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뭄바이에서 테러가 터졌다. 수 많은 사상자를 낸 테러의 다음 목적지로 델리가 지목되었다는 소문이 돌았다. 델리 입국 칠일 전이었다. 당시 첫 배낭 여행에 대한 기대반 두려움반으로 '인도방랑기' 라는 다음 카페에 가입해 여행 정보를 얻고 있었다. 인도는 남미와 더불어 배낭 여행 최악의 난이도로 쌍벽을 이루고 있었는데 대부분의 여행자가 여성인 인도 여행의 특성상 청일점이었던 난 일정과 루트가 비슷한 많은 이들에게 동행을 요청 받아 놓은 상태였다. 그들 모두가 여행을 취소했다. 미안함을 표시하는 그들의 쪽지가 왠지 명복을 빌어주는 쪽지 같았다. 하루 정도 고민했다. 배낭 여행을 위해 회사를 퇴사하고 잡은 일정이었다. 테러에 대한 두려움보다 그냥 내가 부정당해 버린다는 기분에 화가 났다. 그냥 들어가기로 결정했다. 왠지 어줍잖은 비장함도 가슴 한 켠에 자리한 듯 가슴이 두근거리기도 했다. 


여행 전날 카페 글을 확인하다 도움 요청글 하나를 보았다. 델리에 있는 '서울 식당'에서 급하게 핸드캐리를 요청한 사항이었다. 댓가는 하루 숙박과 아침밥 제공이었다. 출국하는 날 공항에서 식당 여주인을 만나니 고추장 등속이 담긴 라면 박스 하나를 넘겨줬다. 뒤돌아서던 그녀는 내 짐을 힐끗 보더니 배낭은 들고 타고 고추장 박스 하나를 더 전달해 달라고 간곡하게 부탁했다. 번잡함을 싫어하던 내 성격이 배낭에도 고스란히 반영된 것인데 보부상 개나리 봇짐 정도의 짐을 메고 있었다. 더구나 배낭 유명 브랜드인 columbia는 침낭이 배낭 위에 묶이는 구조인데 반하여 국산 travel mate는 침낭이 배낭 아래에 메여지는 구조였다. 그리하여 이 개나리 봇짐처럼 아래로 푹 꺼진 배낭에 고추장 박스 두 개를 들고 인생 첫 배낭 여행을 떠나게 된 것이다. 이 복장은 델리 공항에서 검문을 자주 당하는 원인이 되었다. 아마 전도연 주연의 <집으로 가는 길>이 먼저 상영되었다면 이 제안을 분명 거절했을 것이다.

  

<국산 travel mate는 침낭이 배낭 아래에 메여지는 구조이다. 저 보부상 스타일에 양 손에 고추장이 든 라면 상자를 들고 테러가 예고된 델리에 도착했다>


홍콩을 경유한 비행기가 델리 공항에 도착한 것은 자정이 지나서였다. 내세관이 남다른 인도인들은 테러 위협에도 아랑곳없이 북적북적 하였다. 여행자는 남녀 두 쌍이 팀을 이룬 서양인 한 팀만 보였다. 여행 베테랑으로 보이는 그들을 따라가면 공항을 빠져나갈 수 있겠다는 생각에 그들 뒤를 따랐는데 입국 심사에서 발이 묶이고 말았다. 주소지 불명. 그러니까 델리에서 머물 숙박 업소도 없이 들어온 것이다. 출장만 다니고 여행이 처음이니 미처 생각지 못한 부분이었다. 어디로 가느냐는 그들의 물음에 내가 알고 있는 유일한 주소는 '서울 레스토랑'이었다. 심지어 여행자 거리 '빠하르간지'도 모르는 상태였다. 엉성한 영어의 추궁과 답변이 지리하게 이어졌다. 나의 막무가내와 부탁에도 불구하고 폭탄 테러 위협으로 강화된 심사에 그들도 만만히 물러나지 않았다. 그렇게 뜻하지 않게 '서울 레스토랑'이 공항에 무료 광고를 때리고 있을 즈음 나타난 상사인 듯한 관리가 나타났다. 그가 귀찮은 듯 간단한 질문만으로 이 상황을 끝내준 것은 자정 두 시가 훌쩍 지난 시간이었다.


심사대를 지나니 테러 지목에 난리난 공항의 상황이 더 절실하게 다가왔다. 꽁무니를 쫓던 서양 여행자는 물론 인도인들조차 모두 사라지고 나 혼자 덩그러니 넓은 공항에 버려졌다. 다음 비행기조차 입국하는 기색이 없었다. 황토색 군복에 총을 든 군인들이 공항 곳곳을 물샐 틈 없이 경계하고 있었고 폭탄 탐지견들이 꼬리를 흔들면 재기발랄하게 오가고 있었다. 고추장 두 박스를 들고 개나리 봇짐을 멘 모습은 지나가는 군인들의 의심의 눈초리를 자아내기에 충분했다. 폭탄 탐지견들도 고추장 냄새를 처음 맡아본 것일까. 폭탄을 탐지해야 할 탐지견들이 관심을 보였다. 박스를 열어 볼 것을 요청하는 군인들에게 고추장을 보이며 korean red pepper sauce 라고 친절히 설명해도 잠시후 또 다른 군인들이 검문하는 식으로 몇 번을 반복했다. 무안함을 감추기 위해 very spicy 라고 친절하게 덧붙여 주기도 했다.


<다음날 찾아간 델리 여행자 거리 빠하르간지는 공항만큼 어수선했다>


공항 전체는 중동에서 축구 중계를 할 때 들리던 부부젤라 소리가 시끄럽게 들려 혼란을 더욱 가중시켰다. 입국장으로 나와도 군인 외에 사람들이 하나도 없다. 안전을 위해 공항 자체를 통제한 모양이었다. 공항에서 나오려고 유리창으로 다가서다 움찔 놀라 뒷걸음질 치며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공항 유리창에 수 많은 사람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약간 검은톤의 피부에 사기처럼 불투명한 백색의 눈동자를 가진 인도 사람들. 그들이 유리창에 일렬로 늘어서 양손으로 손가리개를 하고 일제히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아마 평소처럼 많은 여행자를 예상하고 곳곳에서 몰려든 호객꾼들이 영업에 실패하고 마지막 남은 먹잇감으로 날 찜해두고 있는 것 같았다. 사리 입은 여인, 터번 두른 아저씨, 붉은 색 점을 찍은 사두...그 수많은 안광은 내 영혼을 집중적으로 구타해 바닥에서 감히 일어날 엄두도 내지 못하게 하였다. '아, 출국 비행기표 끊어야겠다'는 생각이 입국 한 시간 만에 들었다. 문득 그가 떠올랐다. '류시화씨, 당신이 말한 인도, 이건 아니잖아.'


시인을 잘근잘근 씹고 출국 비행기표를 고민하며 한참을 보내니 가출했던 영혼이 다시 돌아왔다. 서울 식당에서 픽업 나오기로 한 것이 그제서야 생각났다. 입국장은 출입이 통제되어 있는 상태였으니 아마도 공항 밖에 있지 않을까 창문으로 다가가니 다시 호객꾼들이 손가리개를 하며 창문으로 몰려들었다. 심호흡을 하고 용기를 내어 군인이 경계를 서고 있던 출입문으로 이동하여 상반신만 내놓은채 소리쳤다. "서울 레스토랑, 서울 레스토랑~~~" 무상 광고의 메아리가 길게 울려퍼질 때쯤 불을 피워 놓은 드럼통 근처에서 한기를 녹이던 한 청년이 서울 식당이 적힌 A4 용지를 흔들며 인도인 특유의 천진난만한 웃음기를 머금고 등장했다. "당신, 픽업하려 나와서 이렇게 하고 있으면 무슨 수로 찾아, 최소한 종이는 들고 있어야지" 라고 소리치고 싶었으나 너무 반갑고 영어가 짧아 "땡큐, 렛츠 고"라고 짧게 말하며 공항을 탈출했다. 공항을 벗어나며 뒤돌아보니 공항은 여전히 부부젤라 소리로 가득했고 그들은 아쉬운 눈길을 돌려 다시 유리창으로 다가서고 있었다.


<루프탑에서 바라보며 과연 인도 여행을 할 수 있을까 이틀 고민했다. 델리 여행자 거리가 이 정도면....>


다행히 델리에 테러는 발생하지 않았다. 군인들은 어떤 테러의 징후도 발견하지 못했으나 korean red pepper sauce가 very spicy하다는 사실은 알아냈다고 한다. 테러에 대하여 두려움이 없었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그러나 테러는 두려움보다는 끊어질 듯 팽팽한 긴장감과 생뚱맞은 호기심이 더 적절했다. 내가 실제 마주한 공포는 막연한 테러보다는 유리창에 붙어 있던 사람들이 내뿜던 안광이었다. 피부색과 완벽히 대비되던 그들의 불투명한 백색 눈동자에서 뿜어져 나오던 안광은 그 이후로도 델리 기차역에서 절정을 맞이했다. 테러로 여행자 발길이 끊긴 기차역에서 CCTV 돌아가듯 얼굴을 180도 돌리며 따라오던 무표정한 백색의 불투명한 눈동자들. 기차역을 한가로이 거닐던 소의 눈망울마저 나를 따라오는 듯 했다. 세렝케티 초원에 남겨진 초식동물이 된 기분이었다. 그 두려움이 사라지기까지 이틀 정도의 시간이 필요했다. 아무튼 델리 도착 후 이틀을 더 고민했으나 출국 비행기표는 결국 끊지 않았다. 그리고 인생 최고의 여행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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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5-09-04 21:5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요즘은 다른 사람 물건 대행 핸드캐리는 절대 하면 안되는 주의사항 1번이죠. 오래전 여행기같은데 앞으로의 이야기가 기대됩니다. 무사히 잘 다녀오셨으니 나머지는 흥미진진한 모험담이 될거같네요.

잉크냄새 2025-09-05 21:10   좋아요 1 | URL
네, 전도연의 영화를 보고 실감하게 되었죠. 다만, 여행 전 저의 업무가 핸드캐리의 도움을 받았던 부분이 있어 좀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있었고 도움이 필요할때 선뜻 손을 내밀게 된 거죠. ㅎㅎ
오래된 여행기를 다시 정리해 보는 중입니다.

2025-09-05 16: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5-09-05 21:11   URL
비밀 댓글입니다.

chika 2025-09-05 17:2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인생최고의 여행이 시작되었다,로 끝나다니요. 그 이야기를 들려주셔야지요.
언제적일까 싶어 뭄바이테러,로 검색하니 08년과 11년이 나오네요. ^^

잉크냄새 2025-09-05 21:14   좋아요 1 | URL
인생 최고 여행이 뭐 특별한 것 없고 그냥 자신에게는 어떤 여행도 최고가 아닌가 싶어요.
뭄바이 테러는 2008년 11월말 뭄바이 타지마할 호텔에서 발생했죠. 제가 들어간 건 정확히 일주일후 그들이 델리를 공개 타겟으로 지정한 날이어서 좀 삼엄했죠.

Forgettable. 2025-09-05 18:2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08년에 갔던 것 같은데..!! ㅎㅎ 고추장 때문에 아래로 축 늘어진 배낭 너무 웃긴데요 ㅋㅋㅋㅋㅋㅋ 오래전 여행을 엄청 생생하게
기억하고 계신것이 신기하네요. 저는 이제 정말 가물가물..

잉크냄새 2025-09-05 21:16   좋아요 0 | URL
08년이면 저보다 먼저 여행하고 나오셨겠네요. 제가 입국한 건 12월초였거든요. 어쩌면 델리 빠하르간지 인도방랑기에서 보았을 수도....ㅎㅎ
전 다른 기억은 연기처럼 사라지는데 여행 기억만큼은 아주 생생하게 남아있어요. 아마 여행이 인생에서 의미가 있기는 했나 봅니다.

마힐 2025-09-07 14:0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무상 광고. 서울 레스토랑, 아직도 있을라나요?
잉크 냄새님, 사투리 어린왕자, 이달의 당선작 되신 것 축하드립니다! 👍
베리 베리 스파이스! ㅎㅎ

잉크냄새 2025-09-07 20:23   좋아요 1 | URL
요즘은 여행지에서 생업을 유지하는 일이 예전과 많이 달라 아마도 지금은 없지 않을까 싶군요. K푸드의 원조는 제가 델리 공항에서 전파한 ˝베리 스파이시˝ 가 아닐까요.ㅎㅎ
당선은 근 20년만입니다. ㅎㅎ 열심히 책 사 읽으라는 계시같아요.

transient-guest 2025-09-13 00:5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인도. 난이도 최상으로 알려진 곳. 저는 아마 못 갈 듯.ㅎㅎㅎ

잉크냄새 2025-09-14 09:58   좋아요 1 | URL
인도는 남미와 더불어 최상위 경쟁중입니다. 개인의 취향이겠지만 전 난이도도 최상이지만 여행의 매력 또한 최상이라고 생각해요.

감은빛 2025-10-06 03:4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한동안 너무 바빠서 잉크냄새님의 여행기가 올라온 줄도 모르고 지나갈 뻔 했네요.
인도, 정말 가보고 싶은 곳 중에 하나입니다.
하필 테러 직후에 새로운 테러 예고가 있었던 곳에 가셨군요.
참, 이런 것도 어찌보면 운인 것 같아요.

델리 공항에서 고추장에 관심을 가진 인도 군인 이야기를 읽으니,
몽골 울란바토르 공항에서 쉰 김치(문화교류행사 음식 재료) 때문에 저 혼자 입국을 못하고
곤란한 상황을 겪었던 일이 생각나네요.
저는 몽골어를 한 마디도 못했기에 영어로 계속 얘기했는데,
몽골 군인(공항경철이었던 것 같기도)들은 영어를 아예 모르더라구요.
아, 정말 손짓발짓에 바닥에 손가락으로 그림까지 그려가며 설명했는데도,
꼼짝도 못하고 붙잡혀 있었어요. ㅠㅠㅠㅠ

잉크냄새 2025-10-06 21:51   좋아요 0 | URL
인도는 참 매력적인 여행지입니다. 물론 호불호가 너무 명확하게 갈리는지라 싫어하는 분들은 저주하지만 전 다시 한번 꼭 가보고 싶은 최고의 여행지입니다. 인도만이 지닌 여행의 묘한 매력이 있습니다.

공항에 발이 묶이면 참 난감합니다. 이대로 집으로 돌아가 라는 말이 나올까 조마조마하기도 하고요. 쉰김치를 그들은 어떤 것으로 여겼을까요? ㅎㅎ 지금이야 김치를 모르는 이들이 거의 없겠지만 그때만 해도 부패된 어떤 것으로 여겨지지 않았을까 싶네요.
 

< 아카바는 국경 도시라 자유로운 분위기가 느껴진다. 홍해 반대편 불빛은 이집트의 카바 항구로서 이스라엘로 들어가는 유일한 항구이다>


이집트로 넘어가는 국경도시인 아카바에 도착한 것은 해질녘이었다. 하루만 머물 예정이었으므로 대충 숙소를 잡고 밖으로 나섰다. 국경의 밤은 뭔가 화려했다. 휘황찬란한 화려함이 아닌 자유로운 화려함이랄까. 다른 중동의 도시와 크게 다를 바 없으면서도 뭔가 자유로움이 선사하는 발랄한 분위기가 도시 전체를 감싸고 있었다. 주류판매점에서 양주를 두 병씩 샀다. 이집트에는 술을 사기 힘들다는 정보(나중에 알고 보니 엉터리였다)를 듣고 두 명의 일행과 함께 총 여섯 병을 샀다. 숙소에 도착하니 숙소 주인이 국경을 통과할 수 있는 건 인당 한병이라기에 버릴 수는 없고 3층 베란다에서 각자 한병씩을 마셨다. 동행한 두 명은 세계 여행이 삼년째 접어든 여행 고수 청년과 영국 유학후 육로로 귀국길을 선택한 여대생이었다. 배낭여행 삼개월차인 내가 제일 초보였는데 셋이 합이 잘 맞아 다마스커스부터 이 곳까지 동행하게 되었다. 이런 저런 이야기로 도심의 불이 완전히 꺼질 때가지 자리는 이어졌다.


<숙소 베란다에서 술 마시며 바라본 아랍 거리, 술 문화가 없어서 그런지 전체적으로 차분한 분위기이다>


아카바를 떠나 홍해를 건너 이집트 뉴웨이바에 도착할 예정이었다. 늦잠 때문에 서둘러 떠난 택시에서 바라본 에머랄드빛 바다와 푸르다 못해 멍든 하늘은 형언할 수 없는 감정으로 가슴을 부풀어 오르게 했다. 쾌속선을 기다리는 시간 점차 뜨거워지기 시작한 햇살 속에 아직 가지지 않은 숙취가 다시 스멀스멀 올라왔다. 보따리 장수를 연상케하는 수 많은 이집트인들 뒤로 페리에 올라타니 홍해의 푸른 바다가 눈 앞에 펼쳐졌다. 바람도 쐬고 술도 깰 겸 두 팔 벌려 타이타닉의 My heary will go on을 하러 뱃머리로 나가니 운행중 갑판에 있을 수 없다고 객실로 모두를 밀어 넣었다. 갑갑한 객실은 만원이었는데 숙취와 객실 가득 피어오르던 향신료 향에 없던 배멀미도 올라올 지경이었다. 까무룩 잠이 들었다 깨어보니 어느덧 뉴웨이바에 도착해 있었다. 주섬주섬 배낭을 챙기니 옆에서 빤히 바라보던 이집트인이 새우깡 비슷한 걸 건네주어 먹었는데 향신료 범벅이었다. 


뉴웨이바 입국 관리소는 허름한 건물이었다. 외국 여행객이 많지 않아 수속 순서는 금방 찾아왔다. 일행이 먼저 수속을 마치고 뒷자리에 앉아 기다리는 동안 비자 발급 심사원 앞에 서서 여권을 건넸다. 여권의 사진을 보고 얼굴을 확인하기 위해 그가 얼굴을 들어 올렸고 나도 최대한 미소를 짓기 위해 입고리를 올리는 순간 내 속에서 무언가 큰 덩어리가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배낭을 둘러멘 채 손으로 입을 틀어 막고 출입문을 거칠게 발로 걷어차고 달려나갔다. 폼으로 배낭에 매단 스테인레스 커피잔과 호신용 호루라기가 부딪혀 비명 소리보다 날카로운 금속음을 질렀고 "형님, 뛰지 마"라는 일행들의 다급한 외침이 들렸어도 내 눈에는 출입구의 창문을 통해 어두운 복도를 비추던 햇살만이 보였다. 롱테이크 샷을 찍듯 어지러이 흔들리던 햇살이 열리며 드디어 그 햇살 속으로 전속력으로 뛰어들었고 파전 한 조각을 급하게 토해내었다. 숙취와 배멀미와 향신료의 절묘한 콜라보이다. 눈물로 촉촉해진 충혈된 눈을 들어 바라보니 총을 멘 채 뒤따라온 군인이 황당한 표정으로 애처롭게 쳐다보고 있었다. 그도 다른 이유로 놀라긴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불과 얼마전 고란 고원에서 총성이 울려 퍼진 지역이었다.

<이집트 다합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다이빙 포인트이다. 괜히 분위기에 휩쓸려 18m 오픈워터 자격증을 따서 장롱에 처박아 두고 있다>


군인의 호위를 받으며 돌아와 눈물을 훔치며 다시 그 앞에 섰다. 사실 비자 거부 사태까지도 염두에 두고 있었다. "더러운 놈, 니네 나라로 돌아가"라고 말한다면 뭐라 하겠는가. 후회가 밀려왔다. 왜 하필 당신 앞에서인가. 반성하는 의미로 열중 쉬어 자세로 서 있으니 한참을 바라보다 여권에 비자를 붙여주었다. 아, 그는 개인의 자존심보다 국가의 관광 수입을 먼저 생각하는 진정한 애국자였던 것이었다! 왠지 같은 나라 국적임을 밝히기 싫어하는 것 같은 동행들과 다합으로 향했다. 뉴웨이바에서 승합차에 오른 순간부터 다음 날 잠에서 깰 때까지 기억이 없다. 기억이 돌아온 건 다음날 다합의 게스트하우스였다. 악몽을 꾼 듯 시트는 온통 땀으로 젖어 있었다. 여행후 처음 찾아든 몸의 아우성이었는지 단순한 숙취였는지 지독한 배멀미였는지 모르겠지만 아마 내 뇌가 쪽팔림에 스스로를 봉인해버린 모양이었다. 지금 이 순간도 그날 오후부터 다음날 오전까지는 여전히 암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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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5-08-05 22:4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전날 먹은 술과 배멀미와 향신료 냄새들이 합쳐진 결과겠죠. 어쨌든 진짜 당황하셨을듯.... 뒤따라온 군인이 더 섬뜩합니다. 그래도 하루의 기억과 무사함을 바꿨으니 다행이지요.

잉크냄새 2025-08-07 20:43   좋아요 1 | URL
뒤따라온 군인은 그 당시에는 별 생각이 없었는데 나중에 떠올려보니 제가 동양인이 아니라 아랍인이였으면 위태로운 상황까지도 발생할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곳은 그때나 지금이나 화약고니까요.

transient-guest 2025-08-06 06:1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여대생에서 뭔가 훈훈한 이야기를 기댔고 가슴속에서 뭔가 차올라왔다는 부분에서는 고대로부터 이어진 땅에 들어가는 벅찬 감동을 기대했는데 말입니다.ㅎㅎㅎ 89년 냉전이 끝나고부터 2001년 9-11 이전까지의 10년 정도가 세상 곳곳을 돌아다니기 좋았던 시기라고 지금 와서 보니 생각하게 됩니다. 이 에피소드에서도 뭔가 90년대스러움이 느껴져서 갑자기 생각해봤습니다.ㅎㅎ 양주 한병을 다 마셨다는 건 일단 꽤 젊은 시절의 이야기가 아닌가해서요.

잉크냄새 2025-08-07 20:51   좋아요 1 | URL
기대에 부흥하지 못하여 죄송합니다. 그 여대생은 저를 오라버니라고 깍듯하게 부르곤 했습니다. ㅎㅎ
여행도 시절마다 제각각의 장단과 매력이 있겠지만 개인적으로 과거가 여행으로서는 더 매력적이지 않나 싶습니다. 감내할 수 있는 정도의 불편함, 세련되지 않은 투박한 인간미, 정보의 부재로 획일화되지 않은 여행 루트 등... 요즘 여행은 뭔가 앙꼬 없는 찐빵 같은 느낌입니다.
양주 한병을 나발불던 저때는 2009년 금융위기때입니다. 덕분에 퇴직금을 시원하게 날렸죠. ㅎㅎ30대에 배낭여행을 하고자 퇴사하고 떠난 길이었습니다.

transient-guest 2025-08-08 01:59   좋아요 1 | URL
30대라면 양주 한병이 가능했을 수도 있겠네요.ㅎㅎ 2009년이면 한창 남의 밑에서 고생하던 시절이네요.. 그때만 가능했을텐데 전 여행을 거의 못한 것에 대한 후회아닌 후회가 있어 제 soft FIRE이후 10년은 여행을 많이 하려고 계획하고 있습니다.

잉크냄새 2025-08-08 18:45   좋아요 1 | URL
soft FIRE이후의 여행 이야기는 길손님이 올려지시면 되겠네요. ㅎㅎ 기대합니다.

마힐 2025-08-08 16:2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전 날, 자유로운 화려함이... 다음 날, 자유로운 부교감 신경으로 다채롭게 활동하게 했군요. ㅎㅎ
너무 재미 있어요. 여행기 계속 연재 부탁드립니다. _()_

잉크냄새 2025-08-08 18:48   좋아요 1 | URL
아주 창자까지 속속들이 내보인 기분입니다. ㅎㅎ
여행기는 느리지만 꾸준한 발걸음으로 하나 하나 채워가볼까 합니다. 마힐님의 응원이 필요해요. ㅎㅎ

카스피 2025-08-09 01:4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요르단 여행을 가셨다니 넘 부럽습니당.제 친척분도 현재 이집트의 건설 현장에서 일하고 계신데 요즘같은 더위면 그냥 회사 때려치고 한국으로 오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은데 가족 생각하면 그럴수 없다고 한탄하시더군요.사진을 보니 요르단도 무척 더워 보이네요^^

잉크냄새 2025-08-10 14:09   좋아요 0 | URL
오래전 이야기를 지금에야 풀고 있습니다. 요르단은 사막 기후의 특징을 지니고 있어 전 새벽녘에 추웠던 기억만 나네요. ㅎㅎ

감은빛 2025-08-17 09:4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와우! 정말 큰일날 뻔 했네요. 숙취와 배멀미와 향신료까지. 글 읽으면서 술도 안 마신 저까지 숙취가 느껴질만큼 공감했습니다. 총까지 들고 따라온 군인의 인내심이 고맙네요. 어휴!

잉크냄새님의 이야기들이 정말 재미있네요. 다음 이야기도 기대합니다.

잉크냄새 2025-08-17 11:17   좋아요 0 | URL
총 이야기도 언젠가 한 번 정리해봐야겠어요. ㅎㅎ 군대에 예비군 7년까지 꽉꽉 채운 한국 여행자가 총에 대하여 얼마나 무던한지를... 일례로 인도 파키스탄 분쟁 지역인 카슈미르에 가장 많이 가는 여행자가 한국과 이스라엘 국적이라고 합니다. 군대가 의무인 두 나라...

여행 이야기는 응원에 힘입어 한 달에 한 번은 정리하려고 노력중입니다. ㅎㅎ

2025-08-30 00:2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5-08-30 20:31   URL
비밀 댓글입니다.
 

이란 테헤란 공항은 페르시아 문명이 지닌 역사적 무게에 걸맞지 않게 낙후된 느낌이었다. 국경 비자 발급은 중동 특유의 느릿한 행정으로 한 시간 넘게 걸렸다. 출장지에서 픽업 나온 택시는 예전 중국의 드럼통 택시를 연상시키듯 낡고 위태로워 보였다. 울퉁불퉁한 도로를 달리는 택시는 테헤란 외곽도로를 따라 우회하여 북서쪽 황무지로 들어섰는데 쿠션과 서스펜션이 거의 망가진 듯 도로 표면의 윤곽을 엉덩이와 척추가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다. 출장지는 그런 황무지를 세 시간 달려 북서쪽 어느 도시에 위치해 있었다.


이란은 경제 제재가 풀린 후로도 대금 지불 문제로 수출길이 열리지 않는 중동의 매력적인 시장이다. 주요 기술 선진국과의 경제 교류가 막힌 상황에서 금융 제재를 피할 수 있는 나라로 중국이 부상했고 마침 중국 법인을 가진 회사들이 중동과의 협업이 가능해졌다. 출장의 목적은 1DIN 오디오 품질확보방안을 고객사 사장에게 브리핑 하는 자리였지만 실상은 자체 기술력이 부족한 고객사에 기술 교육 및 불량 수리를 지원하기 위하여 엔지니어와 연구원을 대동한 자리였다. 관세 문제로 완제품이 아닌 SKD(Semi-completed Knock Down)방식의 수출이 이루어져 제품 수출에 비해 불량이 높은 상황이었다. 


고객사 사장은 중동 특유의 이목구비 뚜렷한 인상의 덩치 큰 남자였는데 기름 왕자 특유의 느끼함을 지니고 있었다. 첫 면담 자리에서 환전을 도와준다며 테헤란부터 동행한 운전사를 불렀다. 사장보다 더 덩치가 큰 그에게 육백 달러를 건네고 차를 마시며 환담을 나누고 있으니 한참 후 돌아온 운전사가 작은 쇼핑백을 나에게 건넸다. 그때는 중국이나 중동이나 회사간 선물 증여가 당연한 시절이었다. 중국에서는 차를, 중동에서는 파스타치오가 들어있는 실타래처럼 둘러싸인 과자를 서로 교환하던 때이다. '출국할 때 주지, 벌써 주나' 싶은 마음으로 들여다보니 돈이 한가득이다. 순간 돈 액수가 너무 많아 보여 뇌물로 착각하여 손사래를 치니 기름 왕자가 '저 자식 케밥을 잘못 먹었나' 하는 눈초리로 쳐다보더니 환전해 온 돈이라며 웃었다. 그 당시 환율이 1달러당 32,000리알이었는데 이란은 공식 환율과 시장 환율이 다르게 작동하여 저 정도의 돈이면 아마도 시장 환율로 환전한 모양이었다. 다음날부터 난 일수 아줌마처럼 노트북과 노트를 다 빼 치우고 돈만 가방에 넣고 숙소와 출장지를 오갔다. 노트북 가방보다 조금 큰 가방은 터질 듯 옆으로 배를 불룩 내밀고 있었다. 직원들과 저녁 식사를 케밥 정식으로 먹은 날 계산대에서 가방을 열고 백만 단위가 넘는 돈 (그래봐야 40달러 남짓) 을 세어 넘겨주었는데 왠지 만수르가 된 느낌이었다. 괜히 어깨에 뽕이 들어간 것처럼 자꾸만 높아졌다. 

<육백달러의 마법>


기름 왕자는 나에게 주로 자신 회사의 앞으로의 비젼에 대하여 말하길 좋아했는데 그와 놀기에 내 영어가 짧아 주로 현장에서 시간을 보냈다. 현장에는 현장 사무실이 별도로 존재하지 않고 한 구석에 책상과 회의 테이블로 구성되어 있었고 불량 수리 및 교육도 현장 사무실에서 주로 이루어졌다. 첫 날 라인 휴식 시간이 되어 작업장을 벗어나 담배를 피우러 가려고 하니 현지 관리자가 만류하며 잠시 기다리라고 했다. 영문을 몰라 앉아 있으니 현장 출입구에서 백색 벨보이 복장을 정식으로 갖춘 말끔한 이란 남자가 쟁반을 받쳐 들고 걸어오고 있었다. 옥구슬 굴러가는 소리가 들릴 듯한 백색의 은쟁반에 날씬한 곡선을 자랑하는 콧대 높은 주전자와 본차이나 임을 한껏 자랑하며 반짝이는 찻잔에 파스타치오를 실타래같은 것으로 둘러싼 과자를 들고 나타난 것이다. 아마도 기름 왕자가 선사하는 이벤트일 것이었다. 10분간의 휴식 시간동안 옆에서 차 시중을 들던 벨보이는 그 이후로도 매일 오전 오후 한 차례씩의 휴식 시간마다 나타나 어색한 차 시중을 들다 사라졌다. 사실 현장 관리 측면에서 조언해야 할 일이었지만 기름 왕자의 자존심에 스크래치를 낼 수는 없는 상황이라 그냥 며칠 동안 만수르가 되기로 했다. 만수르처럼 '후루록' 소리도 내지 않고 우아하게 달큰한 홍차를 마셨다.  


아마 사람이 돈에 대해 품는 어떤 가치는 그 절대치에도 영향을 받지만 부피나 무게처럼 시각적인 영향도 무시 못하는 것 같다. 출장 기간이 1주일인 직원들을 남겨놓고 3일후 먼저 귀국했는데 아직 절반이 넘는 돈을 넘기는 게 왠지 아쉬웠다. 어깨 끈 위에 올려졌던 묵직한 돈의 무게감 때문이었을까. 


p.s)이 글을 쓰며 이란 리알을 알아보기 위해 찾아보니 현재 달러당 공식환율은 42,000리알 시장환율은 백만리알이 넘는다고 한다. 사진보다 30% 늘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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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 2025-07-09 16:2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휴전중이지만 이스라엘과 대치중인데 이란에 다녀오셨는지요? 아님 예전에 다녀오신 글인지 모르겠지만 이스라엘의 폭격으로 테헤란이 쑥대밭이 되었다는데 하루 빨리 원래 모습을 되찾길 바랍니다.

잉크냄새 2025-07-09 19:37   좋아요 0 | URL
2016년 중국 근무할 때 다녀온 이야기입니다. 네타냐후나 트럼프 같은 전쟁 미치광이들이 있는 한 중동의 평화는 요원해 보입니다.

transient-guest 2025-07-10 06:0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중국에서 일하셨던 건 전에 쓰신 글에서 알고 있었는데 출장도 많이 다니셨나 봅니다. 이란, 이라크를 비롯한 중동은 인도-중국-터키와 함께 고대문명의 흔적들, 그리고 이후 서구와는 다르게 발전했던 나라들의 모습을 볼 수 있어서 늘 궁금합니다. 다 파괴되고 사라지기 전에 다녀보고 싶습니다. 제가 잠시 일을 도왔던 그쪽 나라 고객이랑 밥을 먹으면 늘 아주 달디 단 차를 마시던 기억이 납니다.ㅎㅎ

잉크냄새 2025-07-10 20:52   좋아요 1 | URL
중동 지역도 여행지로서 매력적인 곳이라고 들었어요. 전 아라비아 반도 쪽으로만 돌아서 중앙아시아는 출장으로 다녀온 이란 말고는 가본 적이 없네요. 언젠가 인도-파키스탄을 기점으로 중앙아시아를 관통해서 터키로 넘어가는 길을 걸어보고 싶네요.

transient-guest 2025-07-11 01:49   좋아요 1 | URL
저는 일차 FIRE되면 미국 횡당, 서부 종단열차여행을 하고 싶습니다. 언젠가 남북이 연결되어 대륙으로 철도길이 열리면 부산에서 유럽까지 기차를 타고 가보고 싶은데 살아생전엔 어떻게 가능할 수도 있다고 희망하고 있습니다

잉크냄새 2025-07-12 21:54   좋아요 1 | URL
미국 대륙 횡단은 예전 영화 <포레스트 검프>를 보고 한동안 꿈꾸었는데 이제는 무덤덤하네요. 포데로사를 타고 떠난 체 게바라의 발자취를 그대로 따라가보는 남미 여정과 켈커타로 들어가 인도 내륙을 돌아보는 인도 여정은 꼭 해 보고 싶네요.

감은빛 2025-07-28 13:4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렇게 많은 돈을 갖고 다녀본 적이 없어서,
말씀처럼 만수르 같은 기분을 느껴본 적이 없네요. ㅎㅎㅎㅎ
근데 공식 환율과 시장 환율이 차이가 난다는 것은 독특하네요.
뭔가 이유가 있을테고, 누군가 설명해줘도 알아듣지 못할 것 같아서
그 이유까지 궁금해 하지는 않으려고 합니다.

해외에서 근무하신 것도 독특한 이력일텐데, 여러 나라로 출장도 많이 다니셨군요.
이런 옛날 이야기들 너무 재미있어요. 자주 올려주세요.

잉크냄새 2025-07-28 21:17   좋아요 0 | URL
007 가방을 든다면 모를까 일반 가방에 저 정도 부피면 많이 불편합니다. ㅎㅎ

저도 잘 모르지만 사회가 불안정한 나라일수록 공식환율과 시장환율이 차이가 큰 것 같아요. 요즘 볼리비아도 환율 차이가 많이 나는 것 봐서는 그런 연관성이 큰 것 같습니다.

업무보다는 여행으로 겪은 일이 더 많죠. 가끔 풀어보려고 노력중입니다.
 

걸어서 국경을 넘는다는 건 너무나 생소한 일이었다.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지리학적 특성상 하늘을 날아 다른 나라를 가는 것이 일반적 상식이었으며 북쪽의 국경은 스틱스 강을 건너는 것보다도 더 상상하기 힘든 곳이었으니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바라나시에 머무는 내내 나는 가끔씩 불현듯 떠오르는 스트레스에 빠지곤 했다. 그것은 다음 목적지가 네팔이었고 그곳을 가자면 인도-네팔 국경인 소나울리를 걸어서 통과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어찌보면 별것 아닌 이 일이 계속 맘에 떠돈 것은 걸어서 국경을 넘는다는 낯선 두려움 외에도 그 동안 인도 곳곳(특히, 기차역)에서 겪은 불합리하고 비효율적인 방식에 질린 이유도 있을 것이다. 


바라나시에서 새해를 맞이한 다음 날 길을 떠났다. 바라나시에서 오후 3시경 출발한 기차는 다음날 새벽이 되어서야 고락푸르에 도착하였고 간단히 배를 채운 후 올라탄 버스는 점심경이 되어서야 소나울리에 도착하였다. 그곳은 '나 면세점이요' 하는 콧대 높은 건물들이 서 있는 국경 특유의 어떤 특징을 갖추고 있다고는 말할 수 없었고 마을 중앙의 꽤 넓은 길을 통해 사람과 소와 릭샤가 번잡하게 오고 가고 있는 그저 평범함 인도의 시골 마을 같은 풍경이었다. 


(인도 소나울리 국경 - 저 명확한 표지판을 못 본 것은 기존에 가지고 있던 국경에 대한 고정관념 때문일 것이다.)


인파에 휩싸여 두리번거리며 한참을 걸으니 허름한 일련의 일층 건물 속에서 그나마 관공서 같은 모습을 간직한 건물이 눈에 띄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두 명 정도의 사무 인원이 있는 공간에 뚱뚱한 중년의 남성이 미소를 띄며 맞이했다. 출국 수속을 하러 왔다고 하니 그가 큰 소리로 welcome to nepal 이라고 웃는다. 잘못 들었나 싶어 물어보니 이미 국경을 넘어 네팔에 도착했다고 한다. 아, X 됐다. 스틱스 강을 건넌다는 것이 이런 것인가 싶었다. 여행내내 가끔씩 나를 불안하게 하던 상상이 현실이 된 것이다. 당황해 어쩔 줄 몰라하며 큰 죄라도 진 것처럼 최대한 비굴하게 어떻게 해야 하는지 물으니 다시 인도로 넘어가서 도장을 받아오라고 한다. 국경을 넘어가는 일을 옆 마을 마실 가듯이 말하는 그에게 증명서라도 하나 써 달라고 하니 그냥 갔다 오라고 한다. 다시 발걸음을 돌러 인도로 향하니 그제서야 개선문 같은 아치형 건물이 하나 눈에 들어온다. 어떻게 저걸 놓칠 수 있을까. Indian Border Ends라고 선명히 적힌 저 글귀를 시장 같은 인파 속에서 보지 못하고 넘어선 것이다. 아마 보통 생각하는 국경의 모습이 내 눈을 가린 이유일 것이다. 그 글귀 아래에는 인도와 네팔 병사가 비슷한 색의 군복을 입고 벽에 기대어 웃으며 서로 담소를 나누고 있었고 여전히 사람과 소와 릭샤가 넘어다니고 있었다. 군인을 보니 왠지 찔끔 쫄아 다시 무단 출국에 대해 고해성사를 하니 귀찮다는 듯 그냥 넘어가라고 한다. 다시 인도로 넘어와 눈에 불을 켜고 건물을 찾으니 오, 저기 한쪽 벽에 책상 두 개를 놓고 흰색 와이셔츠를 입은 인도인 두 명이 그제서야 '나 공무원이요' 하는 포즈로 서 있었다. 출국 절차를 간단히 마친 후 출입국 관리소를 찾기 어려워 네팔에 벌써 넘어갔다가 오는 길이라고 기절초풍할 고해성사를 하니 종종 있는 일이라며 허허 웃는다. 아무 일 아니라는 듯 겁나 해맑게. 


다시 국경을 넘어가는 길 위에 섰다. 하얀 분필 가루로 그어진 선조차 보이지 않았다. 여전히 사람과 소와 릭샤가 어지러이 넘나들고 있는 길 위일 뿐이었다. 양 국가에 한 발씩 걸치고 잠시 서 보니 문득 분단국인 우리에게 국경이란 하나의 엄청난 트라우마가 아니었을까 싶었다. 철조망이 쳐지고 총검을 들고 경계 태세를 유지하고 있는 곳, 한발짝 건넌다는 것이 목숨을 담보로 하지 않으면 안되는 길, 그렇게 형성된 국경에 대한 트라우마가 스스로를 금기라는 틀에 가두고 있었던 것이다. 여행길 내 맘 속에도 굳건히 또아리를 틀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옆 마을 마실과 다름없는 이 길 위에서 오직 나만이 다른 풍경 속 다른 색채를 띄고 다른 길을 걷는 듯 긴장하고 어색한 발걸음을 이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아치형 경계선에 기대어 담배 한 대를 물었다. 문득 존 레넌이 Imagine에서 노래한 곳이 이런 곳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Imagine there's no contr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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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nsient-guest 2025-05-26 21:2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세계여행은 아직 비교적 먼 미래의 꿈이고 워낙 못 가본 곳이 많아서 유럽만 해도 갈 곳이 많아요. 더운 날씨는 또 선호하지 않기도 해서 바라나시를 가볼 일이 있을까 싶습니다만 그곳에 간 사람들의 경험담에서 무려 3중으로 가위에 눌렸다 깨기를 반복했다는 이야기 등 뭔가 오랜 곳에 층층히 쌓인 시공간의 에너지가 다양한 형태로 발현되는 것 같습니다.ㅎ

잉크냄새 2025-05-27 22:07   좋아요 1 | URL
인도는 호불호가 확실히 갈리는 동네입니다. 꼭 다시 갈꺼야와 두번 다시 안가로 나뉘는데 중간은 별로 없습니다. 전 전자에 가깝습니다. 쓰신 댓글에 적절한 글귀가 보이는데 제가 생각하는 인도의 매력은 다양성입니다. 인도 라는 단어 하나만으로 묶을 수 없는 다양한 문화와 자연과 사람이 공존하는 곳입니다.

페크pek0501 2025-06-04 14:0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전쟁 중인 나라의 뉴스를 많이 봐서 그런지 외국 나가는 게 좀 무서워졌어요.
인도에 관한 책을 읽은 책이 있는데 신비로운 무엇이 있는 것 같았어요.

잉크냄새 2025-06-04 20:00   좋아요 1 | URL
봉준호 감독이 자막 1인치를 뛰어 넘으라고 그랬듯이 1인치만 다르게 생각해보면 외국 나가는 것 별거 아니더군요. ㅎㅎ
인도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살아온 세상에 대한 상식과 기준이 다 무너지는 경험을 하는 동네라 여행지로서 매력적이라 생각해요.

감은빛 2025-06-13 13:0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와! 정말 재미있는 이야기예요.
무단 출국을 했다가 다시 돌아와 뒤늦게 출국 수속을 마치는 잉크냄새님.
심지어 국경선을 통과해놓고 거기가 국경인지 몰랐던 잉크냄새님.

저 이 이야기 나중에 소설에 써도 되나요?

저 오래 전에 군대에 있을 당시에 철책선에서 근무했었어요.
비무장지대. 한 가운데에 철책선은 3선이 있었어요.
가장 안쪽 철책은 정말 낡은 철책이고, 가장 바깥쪽(그러니까 가장 남쪽) 철책은
녹이 하나도 슬지 않은 튼튼하고 반짝거리는 철책이었죠.

통문을 통해 그 3개의 철책선 안쪽으로 들어가면
긴 시간 사람의 흔적이 없는 자연의 공간이 나오죠.
문제는 그 공간들 곳곳에 지뢰들이 깔려 있다는 것이죠.

우리에게 국경이란 그런 곳인데,
이 글에서처럼 인파를 따라가다 국경을 이미 지나버린 것도 모르다니!
비현실적인 현실이네요. ㅎㅎㅎㅎ

잉크냄새 2025-06-13 18:05   좋아요 0 | URL
와우! 소설의 소재가 된다면 저로서는 영광입니다. 어느 날 우연히 마주친 소설 속에서 제 추억을 떠올려보는 상상은 그 자체만으로도 감동입니다.

그나저나 군생활을 엄청 힘든 곳에서 하셨군요. 충성, 존경합니다. ㅎㅎ 전 개인적으로 DMZ의 저 공간을 개발이 손대지 않은 천연의 모습 그대로 <DMZ 평화 트랙킹> 공간으로 만들면 어떨까 하는 상상을 합니다. 길을 절대 벗어나지 않는다는 철칙하에 주변 지뢰 주변 지역도 그대로 남겨두고요. 너무 위험한가요? ㅎㅎ
 

그 곳은 쯔마지에(깨거리)라는 도로변에서 사각형 모양으로 움푹 들어간 곳에 위치해 있었다. 가는 방향으로부터 살펴보면 먼저 꽤 큰 중국 음식점이 있었고 그 옆에 한국 음식점 대장금이 모서리를 끼고 위치해 있었다. 꺽인 모서리를 돌면 토속적인 이름을 붙인 조선족 식당이 있었고 다시 모서리를 끼고 북한 음식점인 대동관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 옆 도로변에 이어진 다시 중국 가게는 정확히 무슨 가게였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한국과 북한이 중국에 의해 꽉 막힌 지정학적 위치와 세 국가의 정체성에 혼란을 겪을 조선족의 심리학적 상황를 반영하듯 옹기종기 붙어있는 모습이 꽤나 인상적이었다. 한국 음식점 상호는 인기 드라마였던 대장금이 주류를 이루고 궁이나 한성같은 약간은 고전적인 명칭을 고수하고 있었고 조선족은 무지개, 진달래, 해당화 같은 유독 삼음절에 집착한 듯한 토속적인 명칭을 주로 사용했다. 북한은 대동관, 칠보산 등 국가는 곧 영토임을 반영하듯 지역명을 주로 사용했다.  


<굴뚝 산업이 제거되기 전 텐진은 세계 2위 오염도시로서 악명을 떨치고 있었다. 그래도 퇴근후 쯔마지에로 가끔 타고 다니던 세냥 짜리 전철은 묘한 매력이 있었다>


아직 대북 제재가 이루어지기 전 북한 식당은 출장자들이 으레 한번쯤 들르는 필수 코스였다. 같은 민족이면서 이질적인 그들의 폐쇄된 사회에 대한 호기심에 저녁 한 끼 정도는 꼭 하는 편이었으나 그 호기심은 한두 번 만에 가라앉곤 했다. 먼저 음식이 특별하다고 할 수 없었다. 평양, 함흥 등 지역명을 달고 나오긴 하나 남쪽에 비해 아주 담백하다는 약간의 맛의 차이만 있을 뿐 이국적인 맛을 느끼지는 못했다. 술 또한 솔잎주 등 명칭이나 맛에 대한 호기심에 마셔보긴 하지만 특별할 것 없는 싸구려 소주 맛에 금방 잔을 내려놓게 되었다. 가장 호기심을 자극한 것은 북한 사람을 접할 수 있는 기회였는데 철저한 교육을 받은 탓인지 유독 한국인에 대하여 적대적이고 경계하는 모습을 보여 몇 번 말을 붙여보다 머쓱하게 말을 거두어 들이곤 했다. 그들은 주로 20대 초중반 평양 출신으로 대졸 이상의 학력을 가졌으며 출신 성분이 꽤나 높은 여성들이었다. 고위층 자녀로서 볼모라는 설도 있었다. 미에 대한 평가도 세월을 타는 것인지 한국 사회에서 여성을 아름답다고 표현한다면 그녀들은 곱다는 표현이 딱 맞아 떨이지는 분위기였다. 홀서빙과 저녁 공연 시간에 각자 악기를 연주하는 무대 활동을 병행하고 있었다. 주고객인 중국인을 대상으로 한 중국 노래 공연이 주를 이루었고 북한 노래는 처음과 시작을 알리는 팡파레 같은 의미로 몇 곡 불려지곤 했다. 한국 노래는 김정일이 좋아했다는 이선희의 'J에게' 와 어떤 이유로 해금되었는지 모르는 노사연의 '만남'이 가끔 연주되곤 했다.  


<악기는 주로 가야금과 전자 기타였고 가끔 트럼펫과 같은 관악기도 등장했다>


이런 호기심의 단계를 넘어서 마니아의 단계에 접어든 분이 계셨으니 천진 공장에 근무하는 총경리였다. 그는 출장자 식사도, 고객 접대도, 주재원 회식도, 점심 식사도 모두 대동관에서 진행하였다. 그의 연령대로 보아 북한이 고향일리는 없고 아마 부모님이 실향민이 아닐까 하는 의견이 잠시 돌았으나 끝내 확인되지는 않았다. 그가 특별히 기억에 남는 것은 년말 망년회조차 대동관에서 진행했기 때문이다. 원칙상 불가능한 일이었으나 그 동안 올려준 매출을 이유로 VIP로서의 위상을 쯔마지에 만방에 휘날린 쾌거(?)였다고나 할까. 2층 제일 큰 홀에서 진행했는데 북한 여종업원 두 명이 밴드로 참석하였다. 식사가 끝나고 술도 몇 순배 돌면서 난 어떤 모습을 쭈욱 지켜보게 되었는데 그것은 참석한 형수님들(주재원 아내) 대여섯분이 여종업원들과 대화를 시도하는 모습이었다. 어색한 침묵의 시간이 좀 흘렀었고, 상대방의 대화에 호응을 해주는 여성 특유의 감탄사도 들렸었고, 또 다시 중간중간 어색한 침묵이 이어지기도 했고, 가벼운 건배 제의도 이루어졌고, 간간히 웃음소리도 들리곤 했다. 술기운인지 어떤 미묘한 감정인지 알 수 없지만 그녀들은 김정일이 좋아하던 'J에게' 와 왜 해금인지 알 수 없는 노사연의 '만남'을 같이 부르기도 했다. 마치고 나오는 길 못내 아쉬운 듯 가볍게 마주 잡은 손을 쉽게 놓지 않았는데 그 이후로 만남을 가졌는지는 알 수 없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세계 평화는 저런 섬세한 감수성과 친화력에서 올 것이라고.


두달여의 출장이 끝나고 돌아오기 전 총경리는 역시 대동관으로 향했고 문을 열고 들어선 순간 어두운 홀 구석에 모여 눈물을 훔치는 그녀들을 보게 되었다. VIP급 총경리가 매니저급 남자 복무원을 닦달하여 물어보니 텐진 지역의 대동관을 폐쇄하고 북한 복귀 명령이 떨어졌다고 했다. 그래서 그 날은 영업을 하지 않았고 일주일여 남은 시간 영업이 어떻게 진행될지도 미지수였다. 돌아오는 길 총경리는 마지막 송별회라도 해야겠다고 굳센 의지를 불태웠다. 난 송별회가 진행되기전 귀국하였고 그 이후 진행 여부는 알 수 없었다. 2년여의 시간이 흘러 다시 업무로 그 곳을 방문했을 때 대동관이 있던 자리는 기념품을 파는 중국가게로 변해있었다. 한 귀퉁이를 차지하던 대장금과 무지개,진달래,해당화는 여전히 영업중이었으나 왠지 지정학적 심리학적 긴장감이 무너진듯 쓸쓸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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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5-04-03 21: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리 아직 친구가 아니었어요?? 😱

잉크냄새 2025-04-04 21:23   좋아요 0 | URL
네, 변방 아웃사이더라 아직....ㅎㅎ

transient-guest 2025-04-08 09:4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중국에 대한 글을 올리신 걸 보면 늘 가보고 싶다는 생각을 많이 합니다. 중국어도 배워보고 싶고, 현지의 식당에서 밥을 먹고 구경도 하면 좋겠다 싶네요. ㅎㅎ

잉크냄새 2025-04-08 20:07   좋아요 1 | URL
땅덩이 넓은 나라는 그 넓이만큼이나 좋던 나쁘던 별의별일이 다 있기도 하지만 또 그만큼 다양한 삶과 문화가 존재하더군요. 중국에서의 생과 여행이 저에게는 삶에 다채로운 색채를 더한 경험이었습니다. 그러고보니 게스트님의 아이디가 여행과 너무 잘 어울리네요.ㅎㅎ

transient-guest 2025-04-09 03:20   좋아요 1 | URL
ID가 길손이죠.ㅎㅎ 반은퇴를 기점으로 보기는 하지만 이번 해부터 근처라도 열심히 다니려고 합니다. SV에 있으니 Napa Valley가 조금 무리하면 하루에 다녀올 수 있는 거리라서 한두 달에 한번은 유명한 와이너리 하나씩 가보려고 해요.ㅎ

잉크냄새 2025-04-09 20:06   좋아요 1 | URL
경험상 여행을 멀리 장기적 계획으로 보면 참 이루기가 어렵습니다. 지금 여기 일단 한 걸음 내딪는 걸음으로 여행은 시작됩니다. 좋은 여행 되시길...

감은빛 2025-04-15 14:0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북한 음식점, 궁금하네요.
말씀처럼 그렇게 특별할 것이 없을 수도 있겠지만,
저도 북한 사람이 제일 궁금할 것 같아요.

2002년 아시안 게임 당시에 자원활동을 하면서 북한 선수들을 가끔 마주쳤었어요.
키가 엄청 큰 농구선수도 만났었고, 여러 종목의 다양한 선수들을 보았고,
응원단으로 온 여성들도 보고 했었죠.
동포라는 생각, 언젠가는 그들과 거리낌 없이 친구가 될 수 있는 날이 과연 올까?
이런 생각들이 들었던 기억이 나네요.

잉크냄새 2025-04-15 17:05   좋아요 0 | URL
네, 아마도 가장 만나기 어려운 사람들이 아닌가 싶습니다.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그 끈을 놓지 말았어야 했는데, 금강산도 그렇고, 개성공단도 그렇고 정치적 판단의 압박용 카드로만 활용되고 말아 아쉽습니다. 더 세월이 흐른다면 한민족이란 단어도 아득해지는 시절이 올까 막연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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