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만나는 프랑스 혁명
주명철 지음 / 소나무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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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프랑스 혁명, 제대로 알고 있을까?

 

<레 미제라블>은 우리말로 ‘불쌍한 사람들’이란 뜻이다. 집필 당시 제목은 ‘레 미제레(Les Miseres, 비참함)’였다고 한다. 프랑스 혁명과 산업혁명이라는 거대한 역사 수레바퀴에 깔린 인간 군상들을 세세히 그려낸 대서사시다. 노도와 같은 역사 속에 개인의 삶은 휩쓸려갔지만 ‘인간애만이 유일한 희망’이라는 사상이 작품을 관통한다. 대선의 열기가 남아 있는 불씨가 사라지지 않을 무렵에 동명 원작의 뮤지컬 영화가 흥행에 성공했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이 영화가 2012년 대선에서 야권 후보에게 표를 준 시민들에게 일종의 ‘힐링 무비’로 소비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이 사실에 고개를 갸우뚱하게 되는 점들이 있다. 이러한 주장의 바탕에는 이 영화가 2012년의 대선에서 야권을 지지했던 48%의 유권자들이 느낀 상실과 좌절감에 위안이 되기에 적절하다는 것이다. 역사의 발전에는 수많은 고통과 좌절이 점철되어 있다. 사회의 진보에는 수많은 퇴행과 반동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그래서 지금 이 현실에서의 실패와 좌절의 상처는 충분히 딛고 일어설 수 있을 것이라는 위안. 특히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함께 부르는 노래 '민중의 노랫소리가 들리는가(Do you hear the people sing)'는 “오늘 우리가 죽으면 다른 이들이 일어서리. 이 땅에 자유가 찾아올 때까지”라는 가사와 합창의 장엄한 감동으로의 어우러진다. 이러한 시각이 나름의 근거를 연상케끔 생각이 들기도 한다.

 

'힐링'이란 말 그대로 몸이나 마음의 상처를 회복 또는 치유한다는 말이다. 즉 '힐링'은 이미 상처와 아픔을 전제로 하는 말이다. 그런데 상처와 아픔의 원인과 정도, 위치 그리고 그것의 진행과 현실적 구성은 온데간데없고 치유된 상태, 회복된 상태, 건강한 정상만을 이야기한다면 그것에 가장 근접한 용어는 '힐링'이 아니라 '환상'이다. 환상은 보이는 현실에 눈을 감아 버리고 가상의 실재에 주체를 옮겨버리는 일이다. 그래서 환상은 끊임없이 새로운 환상을 만들어 내야만 작동한다. 이러한 환상의 연쇄 고리를 끊어내는 것은 철저한 자기인식과 반성이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힐링'으로 가는 첫걸음이다.

 

우리는 프랑스 혁명을 제대로 안다고 볼 수 없다. 역사적 사건 속에 피어난 로맨스에 치우친 뮤지컬 영화만으로 프랑스 혁명의 역사적 진의와 교훈을 되짚어 보기에는 부족하다. 사실 <레 미제라블>은 1830년 7월 혁명과 1848년 2월 혁명 이전 격랑의 시기를 주요 무대로 한다. 프랑스 혁명의 유산이 남아 있긴 하지만 장기간의 격변으로 이루어진 사건의 스케일을 생각한다면 영화에 차지하는 비중은 적다.

 

만화 <베르사이유의 장미>에서 그려진 그 ‘프랑스 혁명’을 기억하고 있다면 이것 또한 당찮다. 프랑스 혁명에 대한 역사적 담론을 우리 사회나 개인의 사회적 삶에 대한 차분한 분석이나 이론적 검토를 통해서 형성되어온 적은 없는 것 같다. 이러한 언어들은 방송과 상업적 광고를 통해서 제시되고 유통이 되며 이것이 마치 시대의 정신이나 사회문화적 담론이나 되는 양 재생산될 뿐이다.

 

혁명에 의한 반동과 좌절을 상징하는 장면이 연출된다고 하더라도 결국 영화의 결말, 즉 이미 알고 있는 혁명의 결과만 우리는 기억하게 된다. 학창 시절 프랑스 혁명을 공부하게 되면 세부적인 과정보다는 혁명의 결과 및 의미만 달달 외워서 기억하듯이.

 

 

 

 ♣ 사회가 곯고 있는 사이에 피어난 혁명의 작은 불씨

 

 

 

 

 

“제3신분이란 무엇인가? 전부다. 그런데 그들은 지금까지 무엇이었나? 아무것도 아니었다.”

(시에예스 <제3신분이란 무엇인가> 중에서, 28쪽)

 

 

 

'태양왕' 루이 14세의 무리한 대외 전쟁으로 프랑스의 경제는 상승세가 꺾였다. 루이 15세는 영국과 전쟁을 하다 북미와 인도 식민지를 전부 상실하는 참담한 패배를 당하면서 경제 문제는 회복 불능으로 치달았다. 사실 이 때부터 프랑스 혁명이 일으킬 조짐이 일어났다고 보면 된다. 경제 불능 속에서도 소수의 귀족은 재산을 불렸고, 상당수 가난한 평민들은 굶주림의 나날을 보내야 했다. 이미 조금씩 불만의 불씨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거기에 기름을 부었던 결정적 시기가 바로 루이 16세 시절이다. 루이 16세 때 미국독립전쟁이 발발하자 프랑스는 영국에 북미 식민지를 모두 빼앗겼던 복수를 하기 위해 미국을 전심전력으로 원조했다. 재무대신 네케르는 이대로 가면 프랑스는 파산한다고 경고하였으나 그는 되레 해임되었다.

 

그러나 네케르의 예언은 적중했다. 그의 말대로 국고가 비어버리고 만 것이다. 궁지에 몰린 루이 16세는 재정문제 해결을 위해 삼부회를 소집한다. 여기서 ‘삼부회’는 일본 말을 그대로 빌려 쓴 말이라 우리나라 말로 순화한다면 ‘전국 신분회’로 쓰는 것이 낫다. 전국 신분회는 제1신분(성직자), 제2신분(귀족), 제3신분(평민)으로 구성되어 있다.

 

민중들은 왕이 전국 신분회를 통해 자신들의 고초를 들어줄 것이라는 기대를 건다. 하지만 국왕은 대놓고 제3신분을 차별했다. 복장은 물론이고 개별적으로 국왕을 알현할 수 있는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애초에 전국 신분회는 민중들의 고초를 다독이기 위한 자리가 아니었다. 제1신분, 제2신분, 제3신분이 모두 같은 수인데 제1신분과 제2신분은 이해관계가 크게 다르지 않았던 것이다. 이에 평민 출신 재무 장관 네케르는 제3신분 의원 수를 두 배로 늘릴 것을 요청한다. 왕은 제3신분에게 세금을 부담시키기 위해 그 요청을 들어준다. 그러나 부회별 투표 방식을 머릿수 투표 방식으로 바꾸는 것은 허용하지 않고 전국 신분회가 심의하는 것으로 넘긴다.

 

 

 

 

 

자크 루이 다비드  『죄드폼의 맹세』1791년

 

 

결국 제3신분은 ‘국민의회’를 선언한다. 놀란 귀족들이 회의장을 폐쇄하자 죄드폼(Jeu de Paume)에 모여 ‘헌법이 제정될 때까지 결코 해산하지 않겠다’고 서약한다. 이게 바로 우리가 알고 있는 ‘테니스 코트의 서약’이다. 죄드폼이란 테니스의 일종으로 그 놀이를 할 수 있는 실내 체육관이다.

 

1789년 베르사유 궁전에서 몰려나와 테니스 코트에 집결한 격앙된 표정의 사람들. 프랑스 대혁명의 불씨를 댕긴 죄드폼에서의 서약은 당대 화가 자크 루이 다비드의 붓을 타고 1791년 화폭으로 옮겨왔다. 혁명, 그때 그 순간의 열기를 생생하게 포착해낸 작품이다.

 

루이 16세는 독일과 스위스 용병을 파리에 배치하면서 국민의회를 압박한다. 이런 상황에서 파리 민중들은 분노한다. 독일 용병과의 충돌을 계기로 시민들은 무기의 필요성을 느끼고 바스티유로 향한다. 수십 명의 사상자를 낸 전투 끝에 바스티유는 함락된다. 봉건제가 폐지되고 ‘인간과 시민의 권리에 관한 선언’이 발표된다. 그러나 루이 16세는 여전히 ‘프랑스 혁명’을 인정하지 않았다. 베르사유 궁에서 플랑드르 연대가 혁명의 상징인 삼색모장을 짓밟자 파리의 부녀자들이 베르사유로 행진한다. 국왕이 파리 부녀자들의 포로가 되면서 프랑스 혁명은 1막을 내린다.

 

 

 

 ♣ 왕의 광장에서 혁명 광장으로

 

 

 

 

 

 

'화합의 광장'이라 이름붙인 콩코드르 광장. 1753년에서 1763년에 걸쳐 건축된 이 광장은 당시 ‘루이 15세 광장’이라 이름이 붙여졌지만 국왕 루이 16세의 폭압에 시달리던 프랑스 전 민중이 들고 일어났던 프랑스혁명 당시에는 '혁명광장'이라고 불려졌다. 루이 15세의 동상을 무너뜨리고 목을 자르는 단두대가 그 자리에 설치됐다.

 

국왕 루이 16세와 왕비 마리 앙뜨와네트의 목을 프랑스 민중들은 잘라버렸다. 몸뚱어리와 '모가지'를 이등분으로 분리 즉사시킨 것이다. '자유' '평등' '박애'를 상징하는 삼색기를 쳐든 프랑스 민중들은 '프랑스 만세'를 불렀다. 프랑스 민중 개개인의 존엄성과 동등한 인간의 권리를 선언했다는 점에서 루이 16세의 목을 자른 민중들의 역사행위는 신분제의 철폐와 프랑스 국가공화정치의 시작이다. 그리고 그 몇 해 전인 1789년 7월 14일 정치범이 수용되었던 바스티유 감옥을 파괴한 그 날은 혁명 기념일이 되었고 이 날이 바로 프랑스 국경일이다.

 

프랑스 민중들의 혁명으로 권좌에서 물러난 루이 16세가 가족들과 함께 오스트리아로 도망치다가 국경 근처에서 발각되어 시민군들에 의해 파리로 이송된다. 프랑스인들은 자국민들을 외면하고 적국의 나라로 피신하려던 사람을 자기들의 입헌군주든 절대군주로든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당연히 루이 16세의 모가지는 단두대에 베어져 땅바닥에 떨어졌다.

 

프랑스 혁명의 원인은 '앙시앵 레짐(구체제, Ancien Regime)'을 지키려는 특권계층의 기득권에 대한 '향수병' 때문이었다. 구체제 특권층의 기득권에 대한 강한 집착으로 인한 조세개혁의 실패는 국가 재정난을 해결할 수 없는 지경까지 내몰았다. 결과적으로 혁명의 불길을 당기는 결정적 씨앗을 제공했다. 특권층은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봉건적 신분제와 영주제 폐지, 귀족과 평민의 공평한 과세 등을 담은 '인권선언'을 채택하며 안간힘을 썼지만 혁명의 불길을 잡기에는 이미 늦었다. 혁명의 소용돌이 속에서 오스트리아로 도망치려던 국왕 루이 16세와 구체제의 사수를 위해 기를 썼던 대부분의 특권층은 결국 단두대 올라 목이 잘렸다. 공포정치의 시대가 지나고 나폴레옹 정권이 수립되면서 혁명은 끝났다.

 

어느 시대나 '개혁'을 두려워하는 계층은 있기 마련이다. 보수층이라고 일컬어지는 반 개혁론자들은 자신들이 가진 구체제나 다름없는 기득권을 고수하려는 습성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역사는 말한다. 기득권에 대한 지나친 집착의 말로는 '몰락'의 다른 이름이라고. 그래서 역사가는 역사의 결과만 보려고 하지 않는다. 구체제의 모든 면뿐만 아니라 프랑스 전체에 큰 변혁을 일으킨 전체 모든 과정을 본다. ‘프랑스 혁명이 낳은 구체제가 아니라, 프랑스 혁명을 낳은 구체제를 이해해야 한다.’(36쪽)

 

 

 

 ♣ 너란 '혁명'을 알고 싶어 Hello~

 

18세기 프랑스 대혁명 시대, 찰스 디킨스는 이 시기를 이렇게 묘사했다. “최고의 시대이자 최악의 시대였다. 지혜의 시대였으며 어리석음의 시대이기도 했다. 믿음과 불신이 교차했으며 빛과 어둠이 공존하는 시대였다. 희망의 봄인 동시에 절망의 겨울이었다.”

 

한쪽으로만 치닫는 극단은 혁명기나 혼란기에도 통용됐다. 몽테유파가 공포정치를 통해 반대 세력을 단두대로 보낸 것도 그만큼 사회가 혼란스러웠기 때문이다. 구체제 특권계층을 벌벌 떨게 하던 혁명의 '공포'는 프랑스 내부와 외부의 '적들'을 제압하는 데 무시무시한 위력으로 변질된다. 자유롭고 평등한 세상을 만들려는 뜨거운 열정으로 시작된 프랑스 혁명은 공포 정치와 독재, 살육이라는 광기에 휩싸였다. 흑백으로만 보는 이분법적인 사고는 혁명의 진원지에서도 존재했다. 하나의 색으로만 상대방의 죽음으로 몰아가려는 시대착오적 발상 말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혁명의 로맨스 뒤에는 기억하기 싫은 어둠의 이면이 가려져 있다. 그렇다고 프랑스 혁명의 역사적 가치를 폄하할 정도로 먼 나라 이야기로만 이해해서는 안 된다. 극단과 광기의 이면에 의한 역사의 결과를 제대로 볼 수 있어야 어리석음의 시대, 최악의 시대를 면할 수 있지 않을까. 제대로 된 역사를 보고 싶다면 낭만적인 혁명의 로맨스와 결별해야 된다. 영화와 소설이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정의의 승리나, 역사의 발전과 같은 판에 박은 당위가 아니다. 역사의 거대한 흐름 속에서 인간 하나 하나의 삶과 사회를 구원할 수 있는 것은 정의나 혁명의 승리의 수준을 뛰어넘는 인간의 평생을 다하는 자기반성과 성찰을 통해서 얻어지는 실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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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심의 재발견 - 1년 내내 계획만 세우는 당신을 위한 심리학 강의
피어스 스틸 지음, 구계원 옮김 / 민음사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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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신감 없는 거북은 달리기 경주에 승리할 수 있었을까?

 

 

서로 제가 더 날래다고 거북과 토끼가 다투었다. 둘은 헤어지기 전에 날짜와 장소를 정해놓았다. 토끼는 타고난 속력을 믿고는 서둘러 출발하지 않고 길가에 누워 잠을 잤다. 거북은 제가 느리다는 것을 알고는 쉬지 않고 뛰었다. 그리하여 거북은 자고 있던 토끼를 앞지르고 경주에서 이겨 상을 탔다. (352. 토끼와 거북이, 천병희 역 《이솝 우화》 도서출판 숲, 378쪽)

 

 

이솝 우화 중에 ‘토끼와 거북이’라는 이야기가 있다. 빠른 토끼와 느린 거북이 사이에서 달리기 경주에서 드러난 결과를 가지고 천천히 그리고 꾸준히 노력하는 자가 승리한다는 교훈을 제시해주고 있다.

 

그렇다면 이 이야기를 180도 바꿔서 바꿔보겠다. 거북은 자신이 토끼보다 걸음이 느리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는 태어나기 전부터 자신의 느린 걸음을 치명적인 단점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경주에 임하기 전부터 거북의 마음은 심란하다. ‘내가 토끼보다 걸음이 느린데 과연 내일 달리기 경주에서 토끼를 이길 수 있을까?’ 거북은 마음속으로 후회하기 시작한다. 자신이 토끼보다 빠르다고 우겼던 패기는 온데간데없다. 점점 자신감은 떨어지고 있다.

 

자신감이 부족해서 벌써부터 목이 움츠려진 거북은 토끼와의 경주에서 이길 수 있었을까? 어쩌면 우리가 알고 있는 결과가 뒤집힐 수 있다. 나는 거북이 토끼를 절대로 이길 수 없다고 생각한다. 제 뜀걸음에 오만한 토끼가 여유를 부린다고 해도 거북은 이기지 못할 것이다. 단지 거북이 느리다고 해서 토끼의 우승을 점치는 것은 아니다. 자신의 느린 걸음에 자신감이 위축되어 무력감에 빠져 있을 때부터 거북은 이미 패배한 거나 다름없다. 경기 시작하기 전부터 이미 토끼에게 기권을 선언했을지도 모른다.

 

 

 

 ♣ 늑장의 유혹에 쉽게 무너지는 유형

 

우화의 정본에 등장하는 토끼는 거북과의 경주에서 절대적인 우위를 점했다. 그러나 자신의 능력을 믿고 잠들어버리는 바람에 쉬지 않고 묵묵히 걸어 나간 거북에게 패하고 만다. 내용을 완전히 비틀어서 새롭게 구상한 우화에 나오는 거북은 자신이 토끼보다 느리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자마자 경기를 포기하거나 패하게 된다.

 

감정의 상태를 스스로 주체하지 못해 패배하게 된 토끼와 거북. 이들은 눈앞에 있는 계획의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 결심했으나 포기하고 마는 우리들의 모습이기도 하다. 시험에서 목표 점수 이상 받기, 일주일에 담배 두 갑을 피던 흡연 습관을 버리고 금연하기, 옷에 삐져나오기 일부 직전인 물렁물렁한 뱃살을 빼기 위해 일주일에 두, 세 번 운동하기. 우리는 살아가면서 수없이 많은 계획과 목표를 세운다. 그러나 대다수는 계획의 목표치를 이루지 못한 채 포기하는 경우가 많다. 처음에 시작할 땐 좋다. 계획했던대로 실행해나간다. 그러자 게으름의 신이 우리 옆에서 강림하사 유혹의 손짓을 한다. 점점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해야 할 일을 하지 않고 미룬다. 꼭 해야 되는데 하기가 싫어진다. 공부해야 되는데 머릿속에는 공식 대신 컴퓨터 게임 화면이 아른거린다. 이틀 동안 담배를 입에 물지 않았을 뿐인데 입이 텁텁하고 몸의 기운이 빠진다. 땀을 뻘뻘 흘리면서 운동을 하니까 힘든 마당에 야식으로 시켜 먹었던 치킨과 피자가 먹고 싶어진다. 젠장, 목표는 개나 줘버리고 원래 일상생활로 돌아가게 된다. 작심삼일이다.

 

준비한 계획을 포기하게 되면 늑장 부린 자신의 나태함을 ‘멘탈 부족’이라는 근거를 대면서 자책한다. 우리가 지금까지 살면서 작심삼일로 인해 마음의 쓰레기통으로 폐기처분된 계획의 횟수를 어림잡으면 상당히 많다. 앞으로 남은 인생의 반을 생각해본다면 쓰레기통으로 향하게 될 계획들은 더 있을 것이다. 슬픈 결과가 나오는 걸 뻔히 알면서도 고치기가 쉽지 않은 것이 늑장 부리는 태도다.

 

미국의 심리학자 피어스 스틸은《결심의 재발견》이라는 책에서 늑장 부리는 사람의 세 가지 유형을 제시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충동에 쉽게 휘둘리면 십중팔구 계획을 실행할 수 없다. 자신의 능력을 믿고 졸음을 이지기 못해 경주 도중에 잠드는 토끼처럼 말이다. 그러나 충동적으로 행동한다고 해서 ‘멘탈’이 나쁘다고 크게 자책할 필요는 없다. 계획의 구체성 정도에 따라서 이에 대하는 태도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현재의 목표는 구체적으로 세우는 반면 장기간 실행해야 할 미래의 목표는 추상적으로 세우고 인식하는 경향이 있다. 장기적 목표를 구체적인 내용인 아닌 추상적으로 세운다면 늑장 부릴 가능성이 높아진다.

 

그렇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목표에 대한 흥미와 몰입도도 떨어지게 된다. 우리 주변에 유혹하는 것들이 넘쳐나는 마당에 꾸준히 반복적으로 해야 하는 일에 싫증이 생기는 건 당연하다. 특히 즐겁지 않은 일수록 늑장 부리기 쉽다. 리포트 준비 기간을 두 달 잡아 부여하더라도 제출 마감 기한을 남겨두고 끝내기란 의외로 어렵다. 성실하고 근면한 성격의 학생이라면 미리 리포트 작성을 준비하고 작성할 것이다. 하지만 어느 누가 리포트 쓰는 걸 즐겁게 여기겠는가. 제출 마감 기간까지 준비할 수 있는 시간이 많다면 슬슬 늑장의 기운이 올라온다. 리포트를 빨리 준비하고 작성하면 좋겠지만 막상 쓰고 싶은 마음이 나지 않는다.

 

마지막 늑장 부리기 쉬운 유형으로는 앞에서 소개한 자신감을 상실한 거북이 있다. 목표에 대한 기대치가 낮고 의욕이 없으면 목표 수립을 위한 도전하기가 힘들어진다. 이러한 비관적인 심리 상태가 지속된다면 스스로 포기한다. 더 이상 하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게 된다. 이러한 자아 인식을 ‘자기 이행적 예언’이라고 한다. 스스로 실패라고 예상하면 목표를 위한 노력은 하지 않게 되며 당연히 성과 달성을 기대할 수가 없다.

 

 

 

 ♣ 우리 마음 속 내부의 적, 늑장

 

생각지 못한 내부의 적이 일을 그르칠 때가 있다. 우리 삶에 있어서 한 번씩은 꼭 망쳐버리는 최악의 결과를 유도하는 적이 바로 ‘늑장’이다. ‘늑장’을 연구했다는 저자도 마음속에 자리하고 있는 내부의 적을 한두 번 당한 게 아니었다. 오죽하면 자기 자신을 스스로 ‘미루기 대장’이라고 부르겠는가. 백전백승 지피지기라는 말이 있지 않은가. 이 심리학자는 또다시 내부의 적에게 당하지 않기 위해서 뇌과학과 동물행동학, 진화생물학 등의 연구 결과를 토대로 늑장의 본질적 원인에 대해 조사했다.

 

늑장연구를 통해 그 원인과 행태를 파악하여 늑장과의 싸움에서 패배를 면할 수 있는 ‘늑장 완전 공략 매뉴얼’을 제시하고 있다. 저자는 이 매뉴얼을 제시함으로써 실천 가능한 늑장 탈출의 전략을 조언하고 있다. 다만 내부의 적을 완전히 소탕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든다. 앞에서 늑장의 요인으로 꼽은 ‘충동성’은 매 순간 인내심을 발휘하지 못하고 지금 당장 모든 것을 손에 넣고 싶어 하는 성향에 의해 형성된다. 그리고 늑장 부리기는 유전자처럼 깊숙이 박혀 있어 좀처럼 고치기 어렵다.

 

전쟁의 승패에 영향을 주는 요인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 중 무시할 수 없는 것이 전쟁에 참전하는 병사의 사기다. 사기가 제대로 충전되지 않으면 애초에 전쟁에 이길 기대감을 가져서는 안 된다. 늑장이라는 적과 맞서 싸우기 위해서 상황에 임하는 태도와 인식이 중요하다. 늑장이 더 기세 부리지 않기 위해서는 자신의 마음을 확고하게 다지는 것도 중요하지만 정신을 흩뜨려지게 만들고 늑장의 세력을 더욱 확장시키게 만드는 외부적인 원인 또한 잘 살펴봐야 한다.

 

혹시 이 책에서 제시하고 있는 공략 매뉴얼을 보고도 당장 실천하고 싶다는 마음이 들지 않는다거나 여전히 매뉴얼에 신뢰감이 느껴지지 않는다면 애써 실행하지 않기를 바란다. 흥미가 느껴지지 않는 일을 하다간 늑장만 더 키우는 꼴이 되니까. 늑장과의 싸움은 결국 정신력, 즉 나 자신과의 싸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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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cene #1 

어제 성적석차가 공개하는 날이었다. 그런데 타 대학 성적 공지가 늦어지는 바람에 성적석차가 7월 17일 이후로 공개되기로 했다.

오늘 석차 공개하는 날인지 정확하게 아는 학생이 과연 몇 명이나 있을까? 또 석차 공개 날을 알고 있는 학생들 중에서 공지가 연기되었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몇 명이나 될까? 그런데 수업학적팀은 사소하지만 학생들에게는 중요한 사항에 대해서 제대로 공지한 적이 없다. 심지어 불가피한 사유로 인해 날짜가 연기된 점도 역시 공지하지 않았다. '학사공지'라는 공지 관련 게시판이 떡 하니 있는데도 말이다.

수업학적팀은 미리 방학 전에 석차를 공개할 수 있는 충분한 예상 기간을 공지했어야 한다. 수많은 재학생들의 성적이 모두 확인하고 난 뒤에 석차를 계산하는 기간을 충분히 고려하면 정확한 일수는 아니더라도 예상 기간을 계산할 수 있다. 그러면 학생들이 오매불망 그 날을 기다릴 필요도 없다.


 * Scene #2

지금까지 4년째 학교생활을 하면서 수업학적팀이 성적석차 공개하는 날을 공지한 적을 본 적이 없다. 공지를 하지 않으니까 일부 학생들은 '묻고 답하기' 게시판(일종의 Q&A)에 초조함을 이기지 못하고 질문을 올린다. 학생이 석차 공개 날짜를 물어보면 수업학적팀 이름으로 답글이 올려진다. '묻고 답하기' 게시판답게 충실한 문답 역할을 잘 하고 있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 보자. 한 주에 이와 같은 질문을 하는 학생이 두, 세 명 정도 있다. 수업학적팀이 일일이 똑같은 답변을 달아주는 건 시간 관리 측면에서는 불필요한 낭비다. 차라리 질문 하나하나 읽어가면서 답글을 다는 것보다는 미리 공지문 하나 올려서 정보를 전달하는 것이 효율적인 업무 진행이다.

방학 업무는 정규 학기 일정보다 한가하다. 방학 기간이 되면 학생들의 학교 게시판 접속 및 확인 빈도는 학기 일정 때보다 줄어드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한가하다고 해서 학생들에게 중요한 정보사항을 알리는 것을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 학교 게시판을 수시로 접속 확인하는 일부 학생들도 있기 때문이다. 학생들의 불만이 폭주하면 사과문과 함께 늦게서야 공지한다. 사과문으로 빙자한 늑장 공지가 따로 없다.

수업학적팀의 침묵 공지 또는 늑장 공지 문제는 하루 이틀이 아니다. 정규 학기 때도 아무런 공지 없이 학사 일정이 진행되는 바람에 학생들 사이에 불만스러운 잡음이 많았다. 일정이 많고 업무상 가장 바쁜 정규 학기임을 고려한다면 행정상 실수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한가로운 방학 기간에도 이런 일이 생긴다면 이건 실수가 아니라 실착(失錯)이다.


* Scene #3

'깨진 유리창 법칙'이라는 것이 있다. 건물 주인이 건물의 깨진 유리창을 그대로 방치해두면, 지나가는 행인들은 그 건물을 관리를 포기한 건물로 판단하고 돌을 던져 나머지 유리창까지 모조리 깨뜨리게 된다. 그리고 나아가 그 건물에서는 절도나 강도 같은 강력범죄가 일어날 확률도 높아진다. 즉, 깨진 유리창과 같은 일의 작은 부분이 도시가 무법천지로 변할 수 있음을 뜻한다.

공지사항을 제대로 접하지 못한 학생들이 겪는 한 번의 불쾌한 경험, 한 명의 불친절한 행정직원, 학교의 사소한 실착은 결국 업무 진행에 방해되며 학교 이미지만 나빠진다. 졸업생은 모교를 불만족스러운 행정 업무 서비스로 운영되는 학교로 기억될 수도 있다.

지금 대학교는 미래의 교육 전략이나 원대한 비전에 많은 시간과 노력을 투자하면서도 정작 대학 내부를 갉아먹고 있는 사소하고도 치명적인 것, 즉 깨친 유리창들에 눈을 돌리지 못하고 있다. 제때 공지를 못해서 학생들의 불만이 높아지고 이를 방치해둔다면 이게 진정한 '학생이 행복한 대학교'라고 떳떳하게 말할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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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솝 우화
이솝 지음, 천병희 옮김 / 도서출판 숲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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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동심 파괴, 이솝 우화

 

 

어떤 사람이 자기를 해코지했다는 이유로 여우에게 원한을 품고 있었다. 그는 실컷 앙갚음하려고 여우를 붙잡아 기름에 담갔던 밧줄을 꼬리에 매달고 거기에 불을 붙인 다음 풀어놓았다. 그러나 어떤 신이 그 여우를 풀어놓은 사람의 밭으로 인도했다. 때는 마침 수확기라 그는 울면서 뒤쫓아갔건만 아무것도 거두지 못했다. (우화 58 사람과 여우79)

 

 

무슨 잔인한 이야기일까. 생소하게 여기겠지만 실은 이솝 우화 중 한 꼭지다. 혹자는 어린이들이 즐겨 보는 이솝 우화에 이런 잔인한 장면이 있었느냐고 반문할 것이다. 하지만 수백 편의 이솝 우화에는 이보다 더 심한 장면이 있다. 요즘 유행하는 말로 표현하자면 동심 파괴에 가깝다.

 

 

독수리와 여우는 친구가 되어 서로 가까운 곳에서 살기로 했다. 가까이 살면 우정도 두터워지리라고 믿었던 것이다. 독수리는 높다란 나뭇가지 위로 날아올라가 그곳에 둥지를 쳤다. 여우는 나무 아래 있는 덤불 속으로 슬그머니 들어가 그곳에서 새끼를 낳았다. 하루는 여우가 먹을거리를 구하러 집을 비운 사이 역시 먹을거리가 떨어진 독수리가 덤불 위를 덮쳐 새끼 여우들을 채어가서는 제 새끼들과 함께 먹어치웠다. 집에 돌아와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알게 된 여우는 제 새끼들이 죽음보다도 복수할 수 없다는 것이 더 괴로웠다. (중략) 그 뒤 오래 지나지 않아 독수리는 우정을 모독한 죗값을 치르게 된다. 사람들이 시골에서 염소를 제물로 바치고 있을 때 독수리가 내기 덮쳐 제단 위에서 불타고 있는 내장을 채어갔는데, 독수리가 그것을 제 둥지로 날라갔을 때 강풍이 불어와 내장의 불이 둥지 안의 마른 지푸라기에 옮겨 붙었던 것이다. 불이 불자 새끼 독수리들이 (아직은 날 수 없었기 때문에) 땅에 떨어졌다. 그러자 여우가 달려가 독수리가 보는 앞에서 새끼 독수리들을 모조리 먹어치웠다. (우화 3 독수리와 여우21~22)

 

 

이 이야기와 함께 전해 내려오는 교훈은 다음과 같다. “우정을 모독한 자는 피해자가 허약할 때는 복수를 피할 수 있어도 하늘의 벌은 피하지 못한다.” 피로 시작해서 피로 끝내고 마는 복수의 연속성을 주제로 잔인하고 자극적인 내용으로 알려진 셰익스피어의 초기 비극 <타이터스 앤드로니커스>의 동물 우화 버전을 보는 듯하다. 죄의 대가는 결국 천벌에 의해서 받게 된다는 의미를 강조하고 있다. 어린이용 우화로 각색한다면 이런 식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그러나 이야기 전개의 근간이 되는 복수의 필연성에 초점을 맞춘다면 순수한 동심으로 가득한 어린이들에게 썩 권하고 싶지 않은 내용이 된다.

 

믿기지 않겠지만 앞에서 소개한 엽기적인 이야기들은 진짜 이솝 우화다. 우리가 어렸을 때 즐겨 읽던 그 내용과 전혀 다른 정본이다. 그리고 널리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들 중에는 우리의 상식을 뛰어넘는 장면이 더러 있다. 어떤 이야기는 육식동물인 여우와 초식동물인 당나귀가 함께 사냥하기도 한다.

 

사실 수천 년 전부터 전해 내려온 이솝 우화은 독일의 그림형제 동화집처럼 불행한(?) 운명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이유는 단 하나, 내용이 잔혹했기 때문이었다. 그림형제 동화집은 독일에서 전해내려 오는 민담을 묶어 어린이와 가정을 위한 이야기라는 제목으로 세상에 나왔다. 초판을 펴냈을 때 독일 부모들은 너무 잔인하고 폭력적이다’ ‘아이에게 어떻게 읽힐 수 있나라는 반응을 보였다. 잔인한 폭력성뿐만 아니라 과도한 성적 표현도 들어 있었다. 우리가 오늘날 알고 있는 그림형제의 작품은 대부분 어린이의 눈높이에 맞춰 내용을 풀어내고 표현을 순화해 만든 동화. 이솝 우화도 마찬가지다. 약육강식의 논리로 인간 세상의 권력구조를 표현했다는 인식 때문에 기독교 윤리가 지배하던 시기 때 외면 받았다. 우리에게 친숙한 어린이용 우화로 살아남기 위해서 오랜 세월동안 윤리적인 교훈을 강조하는 착한 이야기로 탈바꿈한 것이다.

 

 

 

 베짱이는 쇠똥구리로, 산신령은 헤르메스로

 

정본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내용의 원형을 알 수 있다. 바꿔 말하자면 원전이라고 할 수 있다. 이솝 이후 수많은 세월동안 후대의 수많은 이야기꾼들은 정본에 손을 댔다. 당연히 우리가 알고 있는 어린이용 이솝 우화를 비교하면 내용상 많은 차이가 있다.

 

가장 널리 알려진 대표적인 이솝 우화 한 꼭지로 개미와 베짱이가 있다. 베짱이는 일하지 않고 놀다가 겨울이 되어서 굶게 되어 후회한다. 베짱이는 여름철에 짝을 찾기 위해 양 날개를 비벼 울음소리를 낸다. 어린이용 우화에서는 베짱이를 악기를 연주하는 음악가로 등장한다. 반면 제대로 먹이를 저장한 개미는 삶의 여유가 있다. 정본에는 음악을 연주하는 베짱이 대신 매미가 등장한다. 그리고 이와 유사한 이야기에는 쇠똥구리가 등장하기도 한다. 그런데 재미있게도 쇠똥구리 역시 개미 못지않게 부지런한 생활을 하는 곤충이다. 쇠똥을 동그랗게 뭉쳐서 집으로 운반해 저장한다. 그런 쇠똥구리는 왜 겨울이 되자 개미에게 구걸을 했던 것일까? 이유가 너무나도 허무하다. 겨울에 내리는 비 때문에 모아 놓은 쇠똥이 녹아버려서. 이솝 우화에 등장하는 인물의 유형은 간단하다.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강자와 약자. 강자는 약자에게 냉정하다. 먹이를 비축한 개미는 한순간에 빈털터리가 된 쇠똥구리를 꾸짖고 있다. 쇠똥구리에게는 조금 억울하게 느낄 수 있는 이야기다.

 

이 우화 한 꼭지로 인해 개미는 일약 근면’, ‘부지런함의 대명사가 되었다. 하지만 최근에는 일종의 비틀어 보기식으로 이솝 우화를 재해석하는 입장이 나오고 있다. 오늘날에는 우화 속 개미를 현대인으로 비유하면 일개미. 쉬지도 못한 채 그저 일만 하는 워커홀릭이다. 근면, 성실한 면모는 본받을 수 있겠지만 휴식 없는 노동을 원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런데 정본 우화에 등장하는 개미가 선량한 이미지로만 나오는 건 아니다. 어떤 이야기는 개미의 특성을 비꼬기도 한다.

 

 

지금의 개미는 옛날에는 사람이었다. 개미는 농사꾼이었는데 제 노력의 결실에 만족하지 못하고 남의 소출에 눈독을 들이다가 이웃이 수확한 것을 훔쳤다. 제우스는 그의 욕심이 못마땅하여 그를 개미라 불리는 동물로 바꿔놓았다. 그는 몸이 바뀌었어도 마음씨는 바뀌지 않았다. 지금도 그는 들판을 돌아다니며 남의 밀과 보리를 모아 저를 위해 저장하니 말이다. (우화 240 개미264)

 

 

본성이 나쁜 자는 벌을 받아도 여전히 변하지 않는다는 성악설(性惡說)을 강조하고 있다. 순자는 외부의 가르침에 의한 수양을 통해 선한 본성으로 바꿀 수 있다고 말한다. 반면 이솝의 성악설은 다르다. 외부로부터 벌을 받아도 나쁜 본성은 고칠 수 없다는 것이다. 개미가 등장하는 우화들 중에서 진짜 개미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실제로 개미는 다른 집단의 개미집을 침략하여 먹이를 약탈하는 습성이 있다.

 

한국 전래 동화와 비슷한 이야기도 있다. 바로 금도끼와 은도끼이야기다. 정직한 나무꾼은 금도끼를 얻고 욕심쟁이 나무꾼은 쇠도끼마저 잃게 되었다는 내용의 설화로 알려져 있다. 이솝 우화에서는 산신령이 아닌 전령(傳令)의 신 헤르메스가 등장한다. 그러나 정본으로 전해져 내린다고 해서 이 이야기가 이솝이 지었다거나 고대 그리스에서 맨 처음 유래되었다고 말할 수 없다. ‘금도끼 은도끼이야기의 분포는 매우 광범하다. 유럽뿐만 아니라 중국, 베트남, 일본에서도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아시아에서 만들어진 이야기가 바다 건너 유럽으로 전달되어 이솝이 활동한 시대 이후에 이솝 우화의 한 꼭지로 편입될 가능성도 있다.

 

 

 

 현상의 양면성을 집약한 세상의 알레고리

 

모든 우화의 이야기 전개는 너무나도 단순하면서도 뻔하다. 권선징악형 결론도 많다. 상대방에게 해를 가한 자는 똑같이 그대로 벌을 받는다. 겉모습은 변하더라도 나쁘고 사악한 본성은 달라질 수 없다. 자신의 분수를 모르는 자는 스스로 화를 자초한다. 등장인물과 상황만 다를 뿐 주제와 이야기 구조가 비슷한 것들이 많다.

 

그렇다고 이솝 우화는 문학성이 떨어지며 일독할 가치가 없는 건 아니다. 이래봬도 성서 다음으로 세계에서 가장 많이 읽힌 작품이다. 300여 편의 이야기 속에는 우리 인간의 특성과 현상의 이치가 집약되어 있다. 선악, 강한 자와 약한 자,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자, 삶과 죽음으로 구분되는 양면성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본성을 유지한 인물만 나오는 것이 아니라 상황에 따라 성격이 달라지는 이중적인 동물 혹은 인간도 등장한다. 그야말로 세상의 맨얼굴을 볼 수 있는 한 권의 알레고리다.

 

우화 3 독수리와 여우처럼 우정을 어긴 자는 복수에 의해서 무너지기도 하지만 적선을 하거나 은혜를 베푼 자는 상대방에게 보은을 받기도 한다. 홍수에 떠내려가는 개미에게 나뭇잎을 떨구어 구해준 비둘기가 훗날 포수의 총에 맞을 뻔했을 때 개미가 포수의 다리를 깨물어 비둘기를 구해 주는 훈훈한 결론도 있다 (우화 242 개미와 비둘기)

 

 

 

 

 

 

야콥 요르단스  『사튀로스와 농부들』1620년경

 

 

반인반수(伴人伴獸) 사튀로스는 이중적인 성격의 사람과의 우정을 경계하고 있다. (우화 60 사람과 사튀로스) 사튀로스가 어느 사람의 집에 초대를 받았다. 식사 때 농부는 뜨거운 수프에 대고 입김을 불었다. 사튀로스는 추울 때 손에 입김을 불던 사람의 모습이 생각나 의아해했다. 그 이유를 물었더니 사람은 수프를 식히기 위해, 손을 따뜻하게 하기 위해 그랬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사튀로스는 이도 저도 아닌 인간의 이중적 행동을 비난했다. 자연에 길들여지지 않은 호색한 사튀로스가 인간의 이중성을 지적하니 역설적이다.

 

언젠가는 우리 숨결을 스쳐 갈 죽음의 신 하데스의 손길을 숙명적으로 받아들이면서도 한편으로는 두려워한다. 죽음 앞에서 이중적인 인간의 모습이다. 너무나 쉽게 죽음을 당하고 마는 보잘 것 없는 목숨을 우리는 파리 목숨이라고 말한다. 파리는 인간보다 수명이 짧지만 인간도 마찬가지. 누군가는 갑작스레 찾아 온 죽음을 겸허하게 받아들이지만 잘못된 탐욕에 의해서 죽음을 스스로 재촉하는 사람은 뒤늦은 후회를 한다. 우리 인생 또한 보잘 거 없을 정도로 허무하며 죽음이 가까이에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Vanitas, 바니타스) 우화 속 두 마리의 파리가 처한 운명을 보라. 과연 나는 죽음 앞에서 어떤 감정을 표출할까?

 

고기가 가득 든 냄비에 파리가 빠졌다. 파리는 국물에 빠져 죽으며 중얼거렸다. “나는 먹고 마시고 목욕까지 했으니 죽어도 여한이 없구나!” (우화 238 파리262)

 

광에서 꿀이 쏟아지자 파리들이 날아와 먹기 시작했다. 먹어보니 하도 맛있어서 파리들은 먹는 것을 멈출 수가 없었다. 발이 꿀에 달라붙어 날아오를 수 없게 되자 파리들은 숨을 거두며 말했다. “우리야말로 가련하구나! 순간의 쾌락 때문에 죽어가고 있으니!” (우화 239 파리들263)

 

 

 

 교훈은 일시적이지만 우화의 클래스는 영원하다

 

어렸을 때 본 우화 속 개미는 착하고 부지런했다. 반면에 게으른 베짱이처럼 살기 싫었다. 여우는 꾀가 많았고 당나귀는 세상 물정 모를 정도로 무식했다. 그 때는 절대로 저렇게 살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우화의 교훈을 뼛속 깊이 새겨 들었다. 하지만 어른이 된 지금, 우화 속 교훈은 한낱 고리타분한 이야기가 되어버렸다. 아니 편법이 판을 치고 정이 사라진 지금 교훈처럼 그대로 도덕주의자로 살아간다는 건 현실적으로는 어렵다. 요즘 시대적 분위기가 맞지 않는 것도 있다.

 

그러나 우화는 읽어야 한다. 교훈의 가치는 퇴색되었지만 인생의 이치는 그 때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기 때문이다. 교훈은 일시적이지만 우화가 지금까지 빛을 발하고 있는 클래스는 영원하다. 우화가 표현한 세상과 동물(혹은 사람)은 양면적이다. 고지식하게 세상을 한 쪽만 편협하게 본다면 올바른 삶을 살아갈 수 없다. 우화를 받아들이는 인식도 마찬가지다. 교훈에 있는 문자 그대로 믿을 시기는 현실적으로 지났다. 어렸을 때 우화를 읽으면서 느꼈던 교화적 감정은 이제는 재현할 수 없다. 이솝 우화에는 그 착했던 이솝은 없다. 외부에 의해 정념에 쉽게 사로잡히고 상황에 따라 사악한 본성을 드러내고 마는 우리들의 모습만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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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리시스 2013-07-17 17: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숍우화, 를 번역한 천병희 선생님은 의외여서 한참 들여다본 적 있던 책이에요. 숲출판사 이벤트도 있길래.하하. 두꺼울 것 같은데 cyrus님 읽기 속도는 못 따라갈 것 같아요 @.@ 그림형제랑 같이 꼭 한 번 제대로 읽어봐야겠다고 생각하는데 이제는 다 컸다고 생각해서 또 그 교훈이 맘에 안 들 것 같기도 하고, 여튼 이 책은 cyrus님으로 기억될 것 같아요.

뜨거운 여름 보내요!
 

 

 

 

 

 

 

 

여행가방

 

                                              정호승

 

 

너는 나를 끌고

인천국제공항으로 가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겠지

너는 나를 비행기에 싣고

시나이반도 위를 신나게 날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겠지

너는 나를 카이로공항에서 다시 만나

이리저리 끌고 다닐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겠지

피라미드 안 좁은 통로를 헤매고 다니거나

람세스 2세의 미라를 슬픈 눈으로 들여다보거나

사막에서 하룻밤 찬란한 별들을 바라보며 추위에 떨다가

질질 나를 끌고 다시 서울로 돌아올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겠지

그러나 나는 너와 함께 가지 않는다

거듭거듭 말하지만 평생 나는 너의 것이 아니다

나는 나 혼자 갈 뿐

너는 너 혼자 갈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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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이 2013-07-12 11: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행 잘 다녀오세요 사이러스님~~~~~ :)
(설마 도서관으로 여행을 가는 건 아니겠지?! 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