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예선 - 인간의 역사 아우또노미아총서 60
마커스 레디커 지음, 박지순 옮김 / 갈무리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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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만 명의 인류가 어머니 대지의 검은 아름다움을 떠나 새로 발견된 서부의 엘도라도로 옮겨지는 것. 그들은 지옥으로 떨어져 버렸다.”[1] 폭력과 학대 속에서 상처받으며 내일이 없는 삶을 살았던 흑인에게 이 세상 자체는 지옥이었다. 1700년~1808년은 기독교와 자본주의가 전성기를 구가하던 ‘황금의 시대’였다. 이 무렵 유럽의 백인들은 노예무역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아프리카에서 백인들의 노예사냥으로 끌려가 아메리카에 매매된 흑인의 수는 수천만 명이 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아프리카에서 신대륙 아메리카로 가는 노예선. 차곡차곡 관처럼 포개진 흑인들. 그들은 인간이 아니었다. 아프리카에서 대서양을 넘어 아메리카까지 흑인 노예들을 배로 운송하는 과정을 ‘중간항해’라 한다. 노예선의 선원들은 중간항해 도중에 사망한(병사, 자살) 흑인들을 바다에 던져버렸다. 바다 위에 둥둥 떠 오른 흑인들의 시신 주변에 상어 떼가 몰려들었다.

 

《노예선 : 인간의 역사》(갈무리, 2018)충격적이고 참담한 인간의 어두운 이면을 보여준 책이다. 정사에는 철저히 무시됐던 노예 상인의 야만성을 폭로한다. 이 책은 ‘노예’란 무엇인가를 분명하게 보여준다. 흑인해방운동사에 한 획을 그은 윌리엄 에드워드 듀보이스는 아프리카에서 강제로 아메리카로 끌려와 눈물과 고통과 절망 속에 살아온 자신들의 역사를 ‘가장 장엄한 연극’이라고 비유했다.[2] 역사학자 마커스 레디커는 인류사의 ‘연극’이 펼쳐진 중심 무대인 노예선을 주목한다. 그는 잊힌 노예무역과 노예선에 대한 기록들을 모아 역사의 지평을 확대한다.

 

아프리카 노예무역은 네덜란드, 영국, 프랑스 노예 상인들의 주도로 15~18세기 상업자본주의 확장과 더불어 나타났다. 17~18세기에는 아프리카 연안 지역에서 노예가 많이 잡혀 왔으나 19세기에는 아프리카 내륙 지역에서까지 많은 노예가 잡혀 왔다. 노예무역에 노예 상인들에 의한 무자비한 사냥만 있었던 건 아니다. 다호메이 왕국, 아샨티 왕국 등 오랜 옛날부터 번성했던 아프리카 국가들은 다른 아프리카 내 부족과의 전쟁에 승리하면서 세력을 확장했을 뿐만 아니라 노예 상인들과의 거래에 적극적인 모습을 보였다. 아프리카 왕국들은 전쟁 포로를 노예 상인들에게 주는 대가로 무기를 사들일 수 있었다.

 

노예선은 ‘떠다니는 지하 감옥’이었다. 이 거대한 지하 감옥이 망망대해로 나가면 ‘나무로 만든 세계’가 된다. ‘나무로 만든 세계’의 권력자는 선장이다. 배의 하갑판 속에서만 지내는 흑인 노예들은 ‘상품’으로 취급받았다. 이윤에 눈이 먼 노예 상인과 선원 들은 한 명이라도 더 채워 넣기 위해 좁은 하갑판에 인간 ‘상품’을 꽉꽉 채워 넣었다. 선장과 선원들은 식음 전폐를 하거나 반란을 도모하는 노예들에게 온갖 종류의 고문과 신체 절단을 서슴지 않았다. 선장이 선호하는 고문 방식은 구교모 채찍이다. 끝에 매듭이 달린 아홉 개의 끈이 있는 구교모 채찍은 노예의 고통을 극대화하는 가장 강력한 무기였다. 이보다 더 끔찍한 고문은 상어가 돌아다니는 바닷가에 빠뜨리는 벌이다. 선장은 노예 한 명을 골라 상어에 잡아먹히는 대상으로 삼았고, 노예들은 자신의 동료가 죽어가는 모습을 눈앞에서 지켜봐야 했다. 이러한 형벌은 노예들의 저항 의지를 꺾이게 하는 동시에 ‘권력자’로서의 선장의 영향력을 확립한다. 노예들은 알몸으로 채찍을 맞고, 끔찍하게 고문당하고, ‘떠다니는 지하 감옥’ 속에서 잠들었다. 마커스 레디커는 ‘권력자’이자 ‘지배자’인 선장 앞에서 소리 없이 사라졌던 흑인 노예의 역사를 복원시킨다. 노예선 안에 감금된 흑인 노예의 저항 문화도 해방한다. 이로써 ‘아무것도 아닌 것’들은 ‘의미 있는 역사’로 되살아난다.

 

가령 노예선 안에서 형성된 흑인 노예 공동체와 정서적 유대감을 새롭게 해석한다. 노예선에 갇힌 노예들이 ‘흑인’이라고 해서 출신지, 언어, 문화, 관습 등이 다 똑같은 건 아니다. 그들은 서로 다른 언어로 대화를 나누었지만 한마음 한뜻으로 뭉쳤다. ‘고국에 대한 그리움’, ‘두려움’, 그리고 ‘살아갈 희망과 꿈’이라는 공통된 감정들이 친밀감을 높여주었고, 서로 위로하며 의지하는 ‘뱃동지(shipmate) 생겼다. 노래집단 정체성을 하나로 묶고 소통을 가능하게 하는 힘을 가진 지식이 될 수 있다. 노예들은 뼛속까지 스며있는 슬픔을 노래로 만들었다. 저자는 노예들이 부른 노래는 ‘아래로부터의 저항’과 ‘창조성’을 동시에 가진 문화로 본다.

 

《노예선》은 미국 사회조차 망각해버린 흑인 노예제도 역사와 그에 대한 흑인들의 저항을 재현한다. 이 책에 정리된 ‘인간의 역사’는 단순한 흥밋거리나 학문적인 논쟁의 주제라기보다는 삶과 죽음이 교차했던 현장을 보여주는 진실한 기록이다. 책 안에 어른들이 보기에는 상당히 잔인하게 느낄 수 있는 기록들이 몇 개 있다. 그렇지만 고통스럽게 죽어가던 노예들의 울부짖음이 귓가에 맴도는 듯한 역사는 인간이 얼마나 악해질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자본주의의 맹아가 본격적으로 꿈틀거리기 시작한 황금의 시대 이면에는 무참히 파괴된 수많은 운명의 아픔이 있다.

 

 

 

 

* Trivia

 

선장을 잔인하게 살해하는 경우가 발생하게도 했다. (239쪽)

→ 발생하기도 했다

 

 

 

[1] 윌리엄 에드워드 듀보이스, 《노예선》 21쪽

[2] 같은 책, 2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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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5-16 12: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8-05-17 16:07   좋아요 0 | URL
네, 논란이 있긴 하지만 흑인도 노예제에 일조한 사실이 있습니다. 중잉집권제 아프리카 왕국은 포로로 잡힌 아프리카인들을 노예무역 상인에게 판 대가로 무기를 받았습니다. 그 무기로 다른 아프리카 종족이 사는 곳을 약탈했죠. 노예제의 역사를 바라볼 때 ‘가해자(백인)-피해자(흑인)’로 구분되는 이분법적 설정에 의존하면 안 됩니다.

stella.K 2018-05-16 15:0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거 보니까 예전에 <뿌리>란 영화가 있었어.
알렉스 헤일리의 소설을 영화화한.
초등학교 때 봤는데 정말 빨려들듯 봤지.
이게 또 세월이 흘러 다시 만들어졌는데
볼만도 한데 이상하게 보고 싶지가 않더군.
군함도도 보다 말았는데 잔인한 게 보기가 싫더라구.ㅠ

cyrus 2018-05-17 16:11   좋아요 0 | URL
읽을 때마다 가슴 먹먹하게 했던 역사 주제가 ‘흑인 노예’와 ‘일본 위안부’입니다. 보면 볼수록 도저히 인간의 행동이라 볼 수 없을 정도로 잔인한 내용이 나와요. 이 고통스러운 역사를 널리 알리기 위해 평생을 바쳐 연구하는 분들이 존경스럽습니다.

2018-05-16 15:33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8-05-17 16:12   좋아요 1 | URL
<흑인 페미니즘 사상>을 읽기 시작한 이후부터 흑인 문화와 역사에 대해 자세히 알고 싶어졌어요.. ^^;;

esmeral 2018-05-21 16:5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갈무리 출판사입니다.
『노예선』을 읽어주시고 서평과 오류 지적을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알려주신 1쇄의 오류를 갈무리 홈페이지 고칩니다 게시판에 공지하였습니다.
2쇄에서 수정하겠습니다.
http://galmuri.elogin.co.kr/index.php?mid=correct&document_srl=576070
감사합니다!
 

 

 

대구역 건너편에 대구콘서트하우스가 있습니다. 대구 시민회관을 리모델링해서 2016년부터 음악, 연극 등 각종 예술 공연을 펼치는 문화공간으로 운영되고 있습니다. 대구여성가족재단은 대구콘서트하우스 1층에 있습니다. 대구여성가족재단은 여성, 가족을 위한 각종 교육 및 문화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기관입니다. 뒤늦게 확인한 사실인데 대구여성가족재단이 2012년에 출범했을 때 당시 사무실은 서구 평리동 종합복지회관 별관에 있었습니다. 우리 집에서 종합복지회관 별관까지 걸어가면 10분도 채 걸리지 않습니다.

 

 

 

 

 

 

 

 

    

 

4월부터 대구여성가족재단 대회의실에서 대구 남성을 위한 여성학 교육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 김홍미리, 나영, 박이은실, 손희정 외 그럼에도, 페미니즘(은행나무, 2017)

* 오찬호 그 남자는 왜 이상해졌을까?(동양북스, 2016)

 

 

 

412일은 오찬호 작가, 426일은 서민 교수, 510일은 여성주의 활동가 김홍미리 님이 강연을 해주셨고, 524일은 손아람 작가가 강연합니다. 무료 강연이라서 24일 당일에 강연 접수를 해도 대회의실에 입장할 수 있습니다.

 

오찬호 작가와 서민 교수의 강연에 관심 있었지만, 두 날 모두 개인 스케줄이 겹쳐서 강연 신청을 하지 못했습니다. 다행히 김홍미리 님의 강연은 참석할 수 있었습니다.

 

 

 

 

 

 

    

 

김홍미리 님의 강연 주제는 성평등한 사회는 가능한가?’입니다. 몇몇을 제외한 대다수 사람들은 성차별이 나쁘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페미니스트가 아니더라도 성차별은 나빠요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김홍미리 님은 성차별은 나빠요라는 말 한 마디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말했습니다.

 

실제로 있었던 일입니다. 친한 친구가 여성을 차별하는 듯한 발언을 했습니다. 제가 그 말을 듣고 가만히 있을 놈은 아닙니다. 저는 친구에게 여성을 차별한 발언의 문제점을 낱낱이 알려줬습니다. 친구는 기혼자입니다. 저는 친구에게 아내와 언젠가 태어날 자식들 앞에서 절대로 그런 말을 하지 말라고 당부했습니다. 그런데 친구 놈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며 반응했습니다. 내가 했던 말도 여성을 차별하는 의미였어?”

 

 

 

 

 

 

 

 

 

 

 

 

 

 

 

 

 

 

* 수잔 팔루디 백래시 : 누가 페미니즘을 두려워하는가?(arte, 2017)

 

 

 

과거부터 지금까지 여성주의 운동 및 연구에 종사한 여성들은 성차별 · 성폭력의 심각성을 알렸고, 우리 사회에 만연했던 여성 억압을 지적했습니다. 그녀들은 남성 중심주의가 반영된 제도나 문화를 무조건 받아들이기보다는 끊임없이 질문을 던졌습니다. 그 질문은 를 둘러싼 사회에 향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사회는 그녀들의 질문을 거부했습니다. 남성 중심 사회는 여성들의 도발적인 질문에 무관심했습니다. 여성들의 목소리가 점점 높아지고 여성들이 광장에 나서게 되자 남성 중심 사회는 슬슬 여성들의 반응에 거부감을 느끼기 시작합니다. 여성보다 남성이 역차별을 받고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고, 페미니스트에게 인신공격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신자유주의는 사회의 구조적 모순을 개인의 문제로 만들어 버립니다. 여성이 여성을 차별하는 상황을 언급하면, 사회는 그 발언을 개인의 특수한 문제로 받아들입니다. 다른 여자들은 불만 없이 잘 지내고 있는데, 왜 너희(페미니스트)만 예민하게 구느냐?” 여성 문제를 거부하고 외면하는 사회일수록 페미니즘과 여성 정책에 대한 백래시(backlash)가 일어나게 됩니다.

 

 

성폭력 피해 사실을 왜 이제야 말하나?”

 

여자를 위한 정책이 생기면 남자는 힘들어진다

 

한국 페미니스트는 일베충나 다름없는 메갈충이다.

사회악의 근원이다

 

 

페미니스트들은 성차별, 여성혐오 등 여성을 인격체로 존중하지 않는 사회 현상이나 문화를 계속 지적했지만, 사회는 그것을 심각한 문제로 보지 않았습니다. 김홍미리 님의 표현을 빌리자면 일종의 수신 거부인 거죠. 오히려 페미니스트의 발언을 의도적으로 외면하기도 했습니다. 좌파 남성 정치인들마저 여성 문제를 부차적인 것으로 취급했습니다. 사회가 어떤 현상을 문제라고 인식하는 순간, 사회 구성원 일부는 그 문제를 근절하려고 합니다. 그러려면 변함없이 유지됐던 일상을 확 뒤엎는 각오가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사회는 안정적인 체제를 선호합니다. 변화를 두려워해요. 시행착오와 불편함을 감수하는 일을 좋아하지 않죠. 페미니즘을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사람들도 그렇습니다.

 

사회의 수신 거부, 즉 백래시는 페미니즘이 있는 곳에 어디에나 있어왔던 현상입니다. 페미니스트는 백래시에 쉽게 두려워하고, 무너지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페미니즘과 백래시가 충돌하는 상황에서 두려워하고 있는 세력은 혐오와 차별의 언어를 늘어놓는 사람들입니다.

 

 

페미니즘에 대한 반격은 여성들이 완전한 평등을 달성했을 때가 아니라 그럴 가능성이 커졌을 때 터져 나왔다. 이는 여성들이 결승선에 도착하기 한참 전에 여성들을 멈춰 세우는 선제공격이다.”

 

(백래시의 저자 수잔 팔루디, 김홍미리 인용)

 

 

그런 의미에서 백래시는 페미니즘의 패배주의적 행보를 증명한다기보다는 페미니즘의 영향력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백래시에 직면한 지금이야말로 페미니즘의 영향력을 드높일 수 있는 결정적인 기회입니다. 그래서 김홍미리 님은 "성평등한 사회는 가능하다"고 힘주어 말했습니다. 미투 운동 분위기가 가라앉을까 봐 걱정했던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김홍미리 님의 말씀을 듣고 보니 그 걱정은 비현실적인 기우(奇遇)’였다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미투 운동과 페미니즘이 좀 더 전진할 가능성을 전혀 고려하지 못했습니다. 그 날 강연을 통해서 저는 페미니즘의 영향력을 협소하게 바라봤던 제 자신의 한계를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남성은 여성 운동을 위해 무얼 할 수 있을까? 김홍미리 님은 여성혐오, 성폭력, 성차별 등 여성을 억압하는 문제에 접근할 때 관찰하지 말고, 문제를 경험하는 여성의 입장과 같은 방향에 서 보는 상상력이 필요하다고 강조했습니다. 그러면 남성도 여성의 질문에 수신할 수 있으며 차별을 근절하고 평등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 노력할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타자와 같은 위치에서 서 보는 것. 책만 읽고 공부한다고 해서 향상되는 능력은 아닙니다. 여전히 제 마음속에는 지배적 남성성이 남아있고요, 저도 모르는 사이에 지배적 남성성으로 물든 실언을 할 때가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상상력을 키우는 일은 아주 불가능한 건 아닙니다. 책의 위치가 아닌 여성의 위치에서 고민하고, 여성이 억압받는 현실에 저항하는 페미니스트들의 행동에 동참하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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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연 2018-05-14 17: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cyrus님은 참 대단하신 것 같아요. 엄지 척!

cyrus 2018-05-15 16:01   좋아요 0 | URL
오랫동안 여성 운동에 참여했던 페미니스트들, 어디선가 페미니즘을 공부하면서 세상을 바꾸기 위해 고민하는 여성들이 대단하고 존경받아야 합니다. 저는 그분들이 생각하고 기록한 것을 받아적고 있을 뿐입니다.

stella.K 2018-05-14 18: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왕, 좋겠다. 이런 강의 가까이서 들을 수도 있고.
마태님 강의 못 들어서 좀 아쉬웠겠는걸?
손아람 작가 들어보고 싶은데 난 아무래도...ㅠ

cyrus 2018-05-15 16:05   좋아요 0 | URL
서울은 대구보다 전문가 강연이 많아요. 요즘은 SNS로 강연 홍보를 많이 해요. 제가 인스타나 페이스북을 하지 않아요. SNS 계정이 있는 분들 덕분에 대구에 하는 강연 정보를 접해요. ^^;;

꼬마요정 2018-05-14 18: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엄지 척! 대단하신 CYRUS님. 존경의 의미로 대문자로..^^;;
(혹시 대문자로는 다른 의미가 있는 건 아니겠죠? 검색해봐도 걸리는 게 없긴 하지만요^^:)

cyrus 2018-05-15 16:06   좋아요 0 | URL
소문자로 써도 대문자로도 써도 돼요.. ㅎㅎㅎ 특별한 의미는 없어요. ^^

마태우스 2018-05-15 00: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유 제 강의는 부끄럽고요, 손아람 선생님 강의가 젤 좋을 걸요. 근데 김홍미리 선생님이 백래시 번역하신 분이군요 흠...그 책 진짜 어마어마하던데, 전 읽다가 잠시 포기상태에요.

cyrus 2018-05-15 16:17   좋아요 0 | URL
《백래시》 번역한 분은 김홍미리 님이 아니라 다른 분입니다.. ^^;;

페미니즘 북클럽 ‘레드스타킹‘이 정기적으로 모이는 장소가 있어요. 카페 ‘스몰토크‘인데요, 거기 가면 페미니즘 관련 도서들로 채워진 책장이 있어요. 거기에 《백래시》가 꽃혀 있어요. 독서모임할 때마다 틈틈히 읽었어요. 혹시 다음에도 대구에 오셔서 커피를 마시게 된다면 경상감영공원 근처에 있는 ‘스몰토크‘에 가면 됩니다. 대구역과 카페의 거리가 멀지 않아요. ^^

페크pek0501 2018-05-15 23: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발로 뛰며 열심히 배울 거 하나 갖게 되었어요. 파이팅!!!

cyrus 2018-05-16 08:26   좋아요 0 | URL
페크님이 배우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궁금하네요. ^^
 
어떤 글이 살아남는가 - 우치다 다쓰루의 혼을 담는 글쓰기 강의
우치다 다쓰루 지음, 김경원 옮김 / 원더박스 / 201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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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란 인간의 자기 정체성을 드러내는 기회다. 무엇을 위해 쓰는가? 나는 왜 이 글을 써야 하는가? 그러한 일련의 문맥을 눈으로 추적하다 보면 인간이 이 사회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 그의 세계관, 가치관은 무엇인지 드러나게 되어있다. “나는 글을 쓴다. 고로 존재한다.” 인간은 글을 써서 ‘나’의 존재를 확인한다. 그렇게 글쓰기는 그런 의미에서 자기 성찰의 과정인 동시에 자기표현의 산물이다. 타인의 자기표현을 읽는 행위는 자기 성찰을 위해 생각을 수렴하는 것이라면 타인에게 제 생각을 글로 전하는 행위는 자기 정체성을 타인에게 알리고 싶어 하는 본능적인 욕구다. 거기서 의사소통이 이루어지며 글쓴이와 독자는 더 성숙하고 생각이 깊어지는 경험을 하게 된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저런 ‘글을 잘 쓰기 위한 고민’을 하면서도 독자를 배려하지 않는, 단지 ‘날(=글), 보러 와요’라고 강요하는 그런 모습이 있다. 아무리 문장이 좋고, 논리적으로 잘 써도 강파르게 주장을 내세운다면 그 글을 읽는 독자는 소외되기 십상이다. 자기 정체성과 생각을 화려하게 보여주는 데 급급한 자화자찬 글쓰기는 볼거리가 많지만, 독자를 존중하지 않는다. 자화자찬 글쓰기를 위해 사용된 언어는 결국 ‘보여주는 언어’가 된다.

 

‘보여주는 언어’로 글을 써왔던 사람들이 우치다 다쓰루의 글쓰기 강의를 듣게 된다면 부끄러움을 참지 못해 강연장을 나오고 싶은 충동을 느낄 것이다. 우치다 다쓰루는 자화자찬 글쓰기를 선호하는 ‘잘난 놈’의 특권의식을 까발리기 때문이다. 《어떤 글이 살아남는가》(원더박스, 2018)총 14강으로 진행된 ‘창조적 글쓰기’ 강의를 정리한 책이다. 가벼운 호기심에 이 책을 읽다 보면 심기가 여간 불편해지는 게 아니다. 그렇지만 이 책은 글쓴이가 가져야 할 책임성을 되묻게 하기도 한다.

 

 

 ‘독자를 깔보는’ 시선으로 글을 쓰는 능력 따위를 아무리 익히고 배운들 살아가는 데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습니다. 진심으로 힘주어 말합니다만, 그런 능력은 아/무/런/도/움/도 되지 않습니다. (27쪽)

 

 

‘보여주는 언어’로 채워진 글의 주인공은 바로 “나야, 나”, 바로 글쓴이 자신이다. 우치다 다쓰루는 책의 첫머리에 간곡히 당부했다. “제발 제1강까지는 읽어주기 바랍니다. 제1강을 읽었는데도 흥미가 당기지 않는다면 책꽂이에 다시 꽂으셔도 좋습니다.” 저자는 1강에서 ‘독자를 깔보고 사랑하지 않는 글’을 혹평한다. 단지 ‘글을 정확하게 쓰는 비결’을 알고 싶거나 자화자찬 글쓰기를 고집하고 싶은 분이라면 이 책을 덮어도 좋다.

 

솔직히 고백하면, 나는 이 책을 덮을 뻔했다. 그동안 나는 ‘보여주는 언어’로 글을 써왔고, 독자를 배려하지 못한 채 ‘재미없는 글’을 양산했다. 책 뒤표지에 ‘독자를 사랑하지 않는 글쓰기는 백전백패!’라는 문구가 적혀 있다. 나의 글쓰기는 백전백패가 아니라 ‘천전천패(千戰千敗)’이다. 저자의 글쓰기론에 동의하지 않아서 책을 덮으려고 했던 건 아니다. 책에 나온 ‘내 이야기’, 즉 ‘독자를 사랑하지 않는 글쓰기’가 부끄러워서 책을 끝까지 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독자를 사랑하는 글’이란 무엇일까. 이것이 저자가 강조하고 싶은 ‘메타 메시지’다. ‘메타 메시지’는 진정으로 독자에게 전달하고 싶은 중요한 내용을 의미한다. 저자는 ‘메타 메시지’를 ‘사활이 걸린 중요한 정보’라고 말한다. 독자가 읽기 쉬운 글은 글쓴이의 메타 메시지가 명확하게 드러나 있다. 왜냐하면, 글쓴이는 경의(敬意)의 자세로 독자에게 글을 썼기 때문이다. 글쓴이가 말하는 경의의 자세는 이렇다. “부탁입니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을 꼭 들어주세요.” 독자를 사랑하고 존경하는 글쓴이는 ‘내가 하고 싶은 말’을 쉽게 쓴다. 앞서 나는 자화자찬 글쓰기에서 드러나는 ‘보여주는 언어’의 특징을 언급했다. 저자는 마지막 강의(제14강)에서 발언자, 즉 글쓴이의 절박함이 묻어있는 ‘바깥을 향하는 언어’야말로 ‘메타 메시지’이며 수신자(독자)에게 ‘전해지는 언어’라고 말한다. ‘바깥을 향하는 언어/전해지는 언어’의 반대말이 ‘내향적 언어/전해지지 않는 언어’이고, 내가 설명한 ‘보여주는 언어’와 비슷하다. 따라서 ‘내향적 언어/전해지지 않는 언어/보여주는 언어’는 독자에 대한 사랑이 느껴지지 않으며 글쓴이 자신을 ‘주인공’으로 돋보이게 하는 독단적인 글이다. 이런 재미없는 글은 독자들이 외면하는 ‘죽은 글’이다. 이 글에는 글쓴이의 진정한 혼이 실려 있지 않다.

 

글 자체로는 완성도가 떨어져도 글에서 독자에게 나누고자 하는 느낌이 잘 살아있다면 그거야말로 ‘독자에게 사랑받는 좋은 글’이다. 제아무리 열심히 다작(多作)해도 단 한 명의 독자도 알아보지 못하는 글이 무슨 소용이 있으랴. 독자가 외면한 글은 글쓴이와 독자를 이어주는 다리가 되지 못한다. 글쓴이와 독자의 만남이 이루어지는 다리가 부실하거나 부재(不在)한 글은 읽을 만할 가치가 없다. 앞으로도 독자를 존경하는 글로써 ‘살아있는’ 글을 쓰고 싶다. ‘좋은 글(나)을 쓰기 위한 고민’이 아닌 ‘독자를 사랑하는 글을 쓰기 위한 고민’을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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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5-14 13:41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8-05-14 16:45   좋아요 0 | URL
요즘 손이 가는대로 책을 읽다보니 시집을 읽을 기회가 없었어요. 번역서를 많이 읽고 있는 중인데요, 수식어가 긴 문장을 읽는 일이 고역입니다.. ㅎㅎㅎ

2018-05-14 14: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8-05-14 16:51   좋아요 0 | URL
책의 제1강과 제14강만 보면 저자의 글쓴기론을 파악할 수 있어요. 나머지는 롤랑 바르트의 에크리튀르 개념, 부르디외의 ‘구별 짓기’ 개념 같은 서구 사상을 설명하는 내용이에요.

글에 ‘좋아요’ 수가 많다고 해서 그 글이 잘 쓴 것이라고 말할 수 없고, ‘독자가 사랑하는 글’이라고 판단하기 어려워요. 글의 내용보다는 글쓴이의 성품이 마음에 들어서 그 사람이 쓴 글에만 ‘좋아요’를 누를 수 있잖아요. ^^

레삭매냐 2018-05-14 15: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자가 끊임 없이 독자에게 사랑 받기 위해서는
정말 대단한 노력을 해야 할 것 같네요...

그런데 한 번 저자에게 빠지면 쉬이 헤어나기도
쉽지 않을 듯 하네요.

물론 한 저자에게 몰입하는 것도 쉽지 않겠지만요.

cyrus 2018-05-14 16:52   좋아요 0 | URL
작가 한 사람만 지나치게 사랑하면 그 사람의 단점이 보이지 않게 돼요. 그래서 여러 작가들을 사랑하면서 책을 읽으려고 해요.. ^^;;

2018-05-14 16: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8-05-14 16:54   좋아요 1 | URL
우주지감 독서모임 도서 중에 ‘사진 책’이 있으면 그 날 모임에 초청하고 싶어요. ^^

2018-05-14 17:27   URL
비밀 댓글입니다.
 
역사의 정치학 - 가치 있는 역사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하워드 진 지음, 김한영 옮김 / 마인드큐브 / 2018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하워드 진. 이제 그의 이름만 들어도 믿음이 간다. 2010년에 세상을 떠날 때까지 미국 최고의 ‘행동하는 지성’으로 자리를 굳힌 역사학자였다. 1960년대 흑인 민권운동과 베트남 반전운동의 중심부에 그가 있었다. 그는 강단에만 머무르지 않고 민중의 삶 깊숙이 뛰어들어 이론과 실천을 융합해왔다. 고령에도 그는 ‘아래로부터 만들어진 역사’를 강조하는 일관된 자세를 지켜왔다. 지난달에 진의 초기 저작이라 할 수 있는 《역사의 정치학》(마인드큐브, 2018)가 번역돼 나왔다. 1970년에 초판이 나오고 이십 년 후에 2판이 출간되었다. 《역사의 정치학》은 60~70년대에 본격적으로 체계화된 진의 급진적인 학문 세계와 역사관을 조망해볼 수 있는 책이다.

 

진은 이 책에서 3개의 대주제로 나누어 역사학자이자 사회운동가로서 자신이 부딪치고 건너온 시대를 에세이 형식으로 기술한다. 1부(‘접근법’)3부(‘이론과 실천’)는 미국 주류 역사학과는 궤를 달리하는 급진주의 역사관을 중점적으로 설명한다. 진이 말하는 ‘급진주의 역사’란 국가의 정치적 · 경제적 · 사회적 질서를 공고하게 만든 권력의 실체를 폭로하여 타파하는 변화 지향적 학문이다.

 

급진주의 역사는 정부 개혁의 한계, 정부와 부유한 특권층의 연결, 전쟁과 외국인 혐오를 부추기는 정부의 경향, 법의 중립성 뒤에서 벌어지는 돈과 권력의 유희를 폭로할 것이다. 급진주의 역사는 현실을 유지시키는 정부의 역할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를 구체적으로 밝힐 것이다. (『급진주의 역사란 무엇인가?』, 83쪽)

 

 

진은 반파시즘 역사학자 베네데토 크로체의 말을 빌리면서 (잘 알려지지 않은) 과거가 ‘죽은 역사’라면, 되살아난 과거는 ‘현재’로 나타난다고 확신한다. 그러기 위해선 역사학자는 ‘현재 목표’를 설정하여 지난 역사를 되돌아봐야 한다. 우리 시대를 이해하기 위해 역사를 되돌아보는 까닭은 과거에 대한 탐구가 현재를 넘어 미래 전망의 출발점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역사를 현실 너머로 확장하려면 역사학자는 사회의 중대한 문제들을 침묵해선 안 되고, 중립을 지켜서도 안 된다.

 

 

 역사의 목적은 “과거에 대한 새로운 전망”을 발견하는 것이므로…‥ [중략] 역사학자는 “자신의 과거를 초월하는 바로 그 행위에서 과거를 이용할 수 있고 또 이용해야 하는데” 이는 인류가 “미래에 대한 새로운 전망”을 향해 나아가도록 돕기 위해서다. (『역사학자』, 430쪽)

 

 

망각해선 안 될 과거의 기억들을 소환하여 다음 세대에게 전승하는 것은 역사학자의 중요한 책무이다. 진의 자서전 제목으로 알려진 “달리는 기차 위에 중립은 없다”는 ‘행동하는 지성’으로써의 진의 면모를 부각하는 명언이다. 그는 강단에 있을 때 학생들에게 이 말을 자주 했다고 한다. 『급진주의 역사란 무엇인가?』라는 글의 첫 문단에 이와 비슷한 구절이 나온다. 진은 언행일치된 모습으로 강단에서 말한 내용 그대로 일상에서 실천했다. 상아탑 안에 안주하지 않은 진은 여느 운동가의 그것과 다를 바 없었다. 전국을 돌며 거리 행진을 벌이고, 시위에 참여했다.

 

2부는 ‘미국 역사’를 주제로 한 에세이들로 구성되어 있다. 진의 관심은 미국 역사 속의 지배자들이나 그들의 이념이 아니다. 그는 건국 초기의 미국 역사부터 냉전 시대까지 두루 살피면서 미국 독립선언서의 자유, 평등, 행복의 추구라는 그럴싸하고 찬란한 표어 속에 가려진 역사 속의 희생자들을 소환한다. 2부에서 다루는 역사는 가난하고 억압받은 민중, 노예와 흑인들의 관점에서 보는 역사이다. 독자는 2부에서 ‘아래로부터의 역사’를 재조명하여 민중과 흑인의 권리를 찾으려고 했던 진의 참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1부와 3부를 먼저 읽고, ‘급진주의 역사’ 렌즈를 착용한 후에 2부로 접근해도 좋을 듯하다.

 

진은 미국인들이 권력의 기만에 잘 속아 넘어가는 이유는 비판적 역사관이 결여됐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오만한 제국’에 향한 그의 통렬한 지적은 지금도 유효하다. 미국의 트럼프 대통령은 진의 오래된 충언을 아는지 모르는지(상류사회의 교육을 받고 자란 그가 하워드 진을 알 리가 있겠나.) 유색 인종에 대한 경멸을 공공연히 습관처럼 내뱉었고 이를 실제 정책화하는 최악의 행보를 보인다. 역사를 모르거나 ‘중립’으로 일관하는 역사만 남으면 국민은 권력의 사리사욕을 보지 못하게 되고, 언론과 공권력은 오만한 권력을 보호하는 나팔수와 경호원이 된다. 역사는 우리가 가질 수 있고, 휘두를 수 있는 권력이다. 역사를 조금이라도 안다면, 그보다 비판적 역사관을 적극적으로 드러낸다면 우리는 다시는 속지 않을 것이다.

 

 

 

 

 

※ Trivia

 

단번에 이해하기 어려운 번역문과 오자들이 곳곳에 보인다.

 

* 19쪽

도미니크 공화국의 트루히요 → 도미니카 공화국

 

* 20쪽

찰스 다윈은 1961년 한 편지에서 → 1861년

 

* 71쪽

나는 교회가 다시 과처처럼 행동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고, 나 역시 그러지 않기로 다짐했습니다. → 과거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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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5-10 17:55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8-05-13 11:36   좋아요 1 | URL
역사를 배우는 것보다 제일 중요한 것이 ‘피드백’입니다. 자기만족으로 역사를 배우면 그런 역사는 자신(의 이념)을 돋보이게 하는 장식품에 불과합니다.

2018-05-12 20:0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5-13 11: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이토 준지 컬렉션 9화 두 번째 이야기

혈옥수(血鈺樹)

 

 

 

 

 

 

 

 

안자이카나는 차가 고장 나는 바람에 사람이 살지 않는 외딴 마을을 헤맨다. 갑자기 아이들이 튀어나와 커플을 공격하고, 카나의 목에는 아이에게 물린 상처가 생긴다. 가까스로 아이들을 피해 달아난 커플은 혼자 사는 청년의 집에 머무른다.

 

 

 

 

 

 

 

 

 

 

 

 

 

 

 

 

 

* 이토 준지 《이토 준지 공포박물관 7 : 신음하는 배수관》 (시공사, 2008)

 

 

 

 

청년은 커플에게 자신이 사랑했던 여자 친구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여자는 청년에게 자살을 암시하는 듯한 발언을 한다. 그녀는 수수께끼의 말을 남겼는데, 자기 몸속에 흐르는 피가 밖으로 빠져나가고 싶어 한다고 말했다. 결국, 그녀는 칼로 목을 그어 자살한다. 청년은 여자의 목에 흐르는 피를 빨고, 목에 난 상처 부위에 ‘혈옥수’가 자라난다. 여자가 말한 대로 몸속의 피는 밖으로 나오면 나무 형태로 변한다. 혈옥수는 체내의 영양분을 먹으면서 점점 자라고, 영양분이 빠져나간 몸은 미라가 된다. 청년은 혈옥수로 남게 된 여자 친구가 영원히 살아간다고 믿는다. 그런데 상처가 난 카나의 목에 혈옥수가 자라기 시작하는데…‥.

 

 

 

 

 

 

 

 

 

 

 

 

 

 

 

 

 

 

 

* 지그문트 프로이트 《정신분석학의 근본 개념》 (열린책들, 2004)

 

 

 

『혈옥수』에로스(Eros)타나토스(Thanatos)라는 프로이트의 명제와 공포물의 대명사인 ‘뱀파이어’ 설정을 결합한 이야기다. 프로이트는 『쾌락 원칙을 넘어서』라는 글에서 사랑하는 대상을 파괴하고 생명이 없는 무기질로 환원시키려는 죽음 욕동을 가설로 제시했다. 프로이트에게 삶의 욕동은 에로스로 건강하지만, 죽음 욕동인 타나토스는 위험하다. 에로스는 원천이 사랑이기에 건설적이지만, 타나토스는 원천이 미움이기에 파괴하려 든다. 죽음 욕동은 분노를 표출할 대상을 겨냥한다. 분노가 행동으로 표출될 때 쾌감을 느끼기 때문이다. 『혈옥수』의 청년은 자신의 고귀한 목적(혈옥수로 가득한 정원을 만들고 즐기는 것), 즉 쾌락을 위해 타자를 죽음의 구렁텅이로 빠뜨린다(흡혈 행위 이후에 사람의 몸에서 자라나는 혈옥수). 물론 이 쾌감은 정당하지 않다. 쾌감의 희생자 대다수는 여성이기 때문이다.

 

 

 

 

 

 

 

 

 

 

 

 

 

 

 

 

 

 

 

 

 

 

 

 

 

 

 

 

 

 

 

 

 

* 박선경 역 《세계 서스펜스 추리여행 1》 (나래북, 2014) - 클라리몽드

* 테오필 고티에 《고티에 환상 단편집》 (지만지, 2013) - 사랑에 빠진 죽은 연인

* [절판] 신주혜 역 《클라리몽드 : 아홉 개의 환상기담》 (작품, 2013) - 클라리몽드

* 이탈로 칼비노 엮음 《세계의 환상소설》 (민음사, 2010) - 죽은 여자의 사랑

* 이규현 역 《이것은 소설이 아니다》 (창비, 2010) - 죽은 여인의 사랑

* 정진영 역 《뱀파이어 걸작선》 (책세상, 2006) - 죽은 연인

 

 

 

‘에로스와 타나토스’라는 정신 분석의 주제는 테오필 고티에의 고딕 로맨스 소설 『클라리몽드』에서도 나온다. 이 단편 소설은 브램 스토커《드라큘라》(1897년)보다 훨씬 더 일찍 나온(1836년) 뱀파이어 소설이다. 공포 문학이나 뱀파이어 문학의 역사를 이야기할 때 자주 언급되는 작품이기도 하다. 원제는 ‘La Morte Amoureuse (죽은 연인)이지만, 이 소설의 여주인공 이름인 ‘클라리몽드(Clarimonde)’로 더 많이 알려졌다.

 

소설은 나이 든 신부인 로뮈알드가 자신의 젊은 시절을 회상하면서 시작된다. 청년 로뮈알드는 교회에서 기도하던 중 매춘부 클라리몽드를 우연히 보게 된다. 로뮈알드는 그녀에게 첫눈에 반하고, 갑자기 마음속에 솟아오르기 시작한 욕망을 절제하느라 애쓴다. 정식으로 신부가 된 로뮈알드는 장례식을 거행하기 위해 ‘죽은 여인’의 집에 찾아갔는데, 죽은 여인은 바로 자신이 사랑했던 클라리몽드였다. 그는 그녀의 시신을 바라보면서 다시 한번 욕망에 휩싸이게 되고, 클라리몽드의 입술에 키스한다. 신부의 키스에 클라리몽드는 다시 눈을 뜬다. 로뮈알드는 매일 밤 그녀를 만나 밀회를 즐긴다. 그러나 부활한 클라리몽드는 뱀파이어였다. 신부와 뱀파이어의 기이한 사랑은 오래가지 못한다. 로뮈알드의 신부 서품을 도운 세라피옹 신부는 망상에 사로잡힌 로뮈알드를 구해내기 위해 클라리몽드의 무덤을 파헤친다. 클라리몽드의 시신을 확인한 로뮈알드는 자신을 괴롭힌 ‘클라리몽드의 환상’에서 벗어난다.

 

로뮈알드는 처음에 클라리몽드를 만났을 땐 육체적 쾌락을 다스리는 데 성공한다. 그렇지만 죽은 클라리몽드를 보자마자 그녀에 대한 욕정과 집착은 커지기 시작한다. 클라리몽드는 로뮈알드의 피를 빨면서 끝없이 그를 소유하고자 한다. 세라피옹 신부가 등장하지 않았다면 피가 빨린 로뮈알드는 서서히 죽어 갔을 테고, 그녀는 로뮈알드를 죽여서라도 독점했을 것이다. 클라리몽드 역시 상대에게 과도하게 집착하는 도착 증세를 보인다. 도착이란 대상이 너무 집착하는 나머지 그것을 파괴하고 싶은 욕망이다. 클라리몽드의 흡혈 행위는 도착증에 대한 환유로 읽을 수 있다.

 

『혈옥수』와 『클라리몽드』, 두 작품 모두 욕망의 환상 속에 뒤틀린 사랑을 보여준다. 사랑은 기본적으로 타자에 대한 존중이다. 타자를 이용하여 쾌락을 누리는 병든 에로스는 타자와 나를 파괴한다. 많은 영화, 노래, 문학, 미술 등 모든 예술은 지칠 줄 모른 채 ‘병든 에로스’를 다루고, 대중은 사랑과 여성을 왜곡한 예술을 소비한다. 이런 예술을 ‘미학’으로 애써 포장하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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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5-10 14:36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8-05-10 17:15   좋아요 1 | URL
저는 책임성이 부족해서 상대방을 위해 헌신하는 일을 못해요.. ㅎㅎㅎ

겨울호랑이 2018-05-10 15:4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날이 더워지니 이제 공포 / 괴기 문학이 더 생각나네요. 다만, 이토 준지는 좀 끈적한 느낌이 들어 시원한 소나기 같은 느낌보다는 습한 장맛비 같네요^^:)

캐모마일 2018-05-10 15:57   좋아요 1 | URL
습한 장맛비. 비유를 읽고 혼자서 오 맞아!하고 웃는 바람에 주변 분들이 순간 절 이토 준지 만화 인물들처럼 보네요. ㅜㅜ

겨울호랑이 2018-05-10 16:04   좋아요 1 | URL
에고... 난처하셨겠어요... 그래도 이토 준지가 좀 끈적끈적한 것을 아는 사람은 다 알 지 싶습니다.^^:)

cyrus 2018-05-10 17:21   좋아요 2 | URL
To. 겨울호랑이 / 이토 준지의 공포를 적절하게 설명해주셨어요. 습하면서 불쾌한 느낌을 주는 공포를 연출한 러브크래프트의 영향을 받은 사람이 이토 준지입니다. <이토 준지 컬렉션>을 보면 햇빛이 전혀 없는 잿빛 구름만 가득한 하늘이 나옵니다. ^^

To. 캐모마일 / 평범한 것조차 기괴하게 비틀어버리는 묘사가 이토 준지의 능력이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