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글이 살아남는가 - 우치다 다쓰루의 혼을 담는 글쓰기 강의
우치다 다쓰루 지음, 김경원 옮김 / 원더박스 / 2018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글쓰기란 인간의 자기 정체성을 드러내는 기회다. 무엇을 위해 쓰는가? 나는 왜 이 글을 써야 하는가? 그러한 일련의 문맥을 눈으로 추적하다 보면 인간이 이 사회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 그의 세계관, 가치관은 무엇인지 드러나게 되어있다. “나는 글을 쓴다. 고로 존재한다.” 인간은 글을 써서 ‘나’의 존재를 확인한다. 그렇게 글쓰기는 그런 의미에서 자기 성찰의 과정인 동시에 자기표현의 산물이다. 타인의 자기표현을 읽는 행위는 자기 성찰을 위해 생각을 수렴하는 것이라면 타인에게 제 생각을 글로 전하는 행위는 자기 정체성을 타인에게 알리고 싶어 하는 본능적인 욕구다. 거기서 의사소통이 이루어지며 글쓴이와 독자는 더 성숙하고 생각이 깊어지는 경험을 하게 된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저런 ‘글을 잘 쓰기 위한 고민’을 하면서도 독자를 배려하지 않는, 단지 ‘날(=글), 보러 와요’라고 강요하는 그런 모습이 있다. 아무리 문장이 좋고, 논리적으로 잘 써도 강파르게 주장을 내세운다면 그 글을 읽는 독자는 소외되기 십상이다. 자기 정체성과 생각을 화려하게 보여주는 데 급급한 자화자찬 글쓰기는 볼거리가 많지만, 독자를 존중하지 않는다. 자화자찬 글쓰기를 위해 사용된 언어는 결국 ‘보여주는 언어’가 된다.

 

‘보여주는 언어’로 글을 써왔던 사람들이 우치다 다쓰루의 글쓰기 강의를 듣게 된다면 부끄러움을 참지 못해 강연장을 나오고 싶은 충동을 느낄 것이다. 우치다 다쓰루는 자화자찬 글쓰기를 선호하는 ‘잘난 놈’의 특권의식을 까발리기 때문이다. 《어떤 글이 살아남는가》(원더박스, 2018)총 14강으로 진행된 ‘창조적 글쓰기’ 강의를 정리한 책이다. 가벼운 호기심에 이 책을 읽다 보면 심기가 여간 불편해지는 게 아니다. 그렇지만 이 책은 글쓴이가 가져야 할 책임성을 되묻게 하기도 한다.

 

 

 ‘독자를 깔보는’ 시선으로 글을 쓰는 능력 따위를 아무리 익히고 배운들 살아가는 데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습니다. 진심으로 힘주어 말합니다만, 그런 능력은 아/무/런/도/움/도 되지 않습니다. (27쪽)

 

 

‘보여주는 언어’로 채워진 글의 주인공은 바로 “나야, 나”, 바로 글쓴이 자신이다. 우치다 다쓰루는 책의 첫머리에 간곡히 당부했다. “제발 제1강까지는 읽어주기 바랍니다. 제1강을 읽었는데도 흥미가 당기지 않는다면 책꽂이에 다시 꽂으셔도 좋습니다.” 저자는 1강에서 ‘독자를 깔보고 사랑하지 않는 글’을 혹평한다. 단지 ‘글을 정확하게 쓰는 비결’을 알고 싶거나 자화자찬 글쓰기를 고집하고 싶은 분이라면 이 책을 덮어도 좋다.

 

솔직히 고백하면, 나는 이 책을 덮을 뻔했다. 그동안 나는 ‘보여주는 언어’로 글을 써왔고, 독자를 배려하지 못한 채 ‘재미없는 글’을 양산했다. 책 뒤표지에 ‘독자를 사랑하지 않는 글쓰기는 백전백패!’라는 문구가 적혀 있다. 나의 글쓰기는 백전백패가 아니라 ‘천전천패(千戰千敗)’이다. 저자의 글쓰기론에 동의하지 않아서 책을 덮으려고 했던 건 아니다. 책에 나온 ‘내 이야기’, 즉 ‘독자를 사랑하지 않는 글쓰기’가 부끄러워서 책을 끝까지 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독자를 사랑하는 글’이란 무엇일까. 이것이 저자가 강조하고 싶은 ‘메타 메시지’다. ‘메타 메시지’는 진정으로 독자에게 전달하고 싶은 중요한 내용을 의미한다. 저자는 ‘메타 메시지’를 ‘사활이 걸린 중요한 정보’라고 말한다. 독자가 읽기 쉬운 글은 글쓴이의 메타 메시지가 명확하게 드러나 있다. 왜냐하면, 글쓴이는 경의(敬意)의 자세로 독자에게 글을 썼기 때문이다. 글쓴이가 말하는 경의의 자세는 이렇다. “부탁입니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을 꼭 들어주세요.” 독자를 사랑하고 존경하는 글쓴이는 ‘내가 하고 싶은 말’을 쉽게 쓴다. 앞서 나는 자화자찬 글쓰기에서 드러나는 ‘보여주는 언어’의 특징을 언급했다. 저자는 마지막 강의(제14강)에서 발언자, 즉 글쓴이의 절박함이 묻어있는 ‘바깥을 향하는 언어’야말로 ‘메타 메시지’이며 수신자(독자)에게 ‘전해지는 언어’라고 말한다. ‘바깥을 향하는 언어/전해지는 언어’의 반대말이 ‘내향적 언어/전해지지 않는 언어’이고, 내가 설명한 ‘보여주는 언어’와 비슷하다. 따라서 ‘내향적 언어/전해지지 않는 언어/보여주는 언어’는 독자에 대한 사랑이 느껴지지 않으며 글쓴이 자신을 ‘주인공’으로 돋보이게 하는 독단적인 글이다. 이런 재미없는 글은 독자들이 외면하는 ‘죽은 글’이다. 이 글에는 글쓴이의 진정한 혼이 실려 있지 않다.

 

글 자체로는 완성도가 떨어져도 글에서 독자에게 나누고자 하는 느낌이 잘 살아있다면 그거야말로 ‘독자에게 사랑받는 좋은 글’이다. 제아무리 열심히 다작(多作)해도 단 한 명의 독자도 알아보지 못하는 글이 무슨 소용이 있으랴. 독자가 외면한 글은 글쓴이와 독자를 이어주는 다리가 되지 못한다. 글쓴이와 독자의 만남이 이루어지는 다리가 부실하거나 부재(不在)한 글은 읽을 만할 가치가 없다. 앞으로도 독자를 존경하는 글로써 ‘살아있는’ 글을 쓰고 싶다. ‘좋은 글(나)을 쓰기 위한 고민’이 아닌 ‘독자를 사랑하는 글을 쓰기 위한 고민’을 해야겠다.

 

 

 


댓글(9) 먼댓글(0) 좋아요(3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18-05-14 13:41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8-05-14 16:45   좋아요 0 | URL
요즘 손이 가는대로 책을 읽다보니 시집을 읽을 기회가 없었어요. 번역서를 많이 읽고 있는 중인데요, 수식어가 긴 문장을 읽는 일이 고역입니다.. ㅎㅎㅎ

2018-05-14 14: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8-05-14 16:51   좋아요 0 | URL
책의 제1강과 제14강만 보면 저자의 글쓴기론을 파악할 수 있어요. 나머지는 롤랑 바르트의 에크리튀르 개념, 부르디외의 ‘구별 짓기’ 개념 같은 서구 사상을 설명하는 내용이에요.

글에 ‘좋아요’ 수가 많다고 해서 그 글이 잘 쓴 것이라고 말할 수 없고, ‘독자가 사랑하는 글’이라고 판단하기 어려워요. 글의 내용보다는 글쓴이의 성품이 마음에 들어서 그 사람이 쓴 글에만 ‘좋아요’를 누를 수 있잖아요. ^^

레삭매냐 2018-05-14 15: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자가 끊임 없이 독자에게 사랑 받기 위해서는
정말 대단한 노력을 해야 할 것 같네요...

그런데 한 번 저자에게 빠지면 쉬이 헤어나기도
쉽지 않을 듯 하네요.

물론 한 저자에게 몰입하는 것도 쉽지 않겠지만요.

cyrus 2018-05-14 16:52   좋아요 0 | URL
작가 한 사람만 지나치게 사랑하면 그 사람의 단점이 보이지 않게 돼요. 그래서 여러 작가들을 사랑하면서 책을 읽으려고 해요.. ^^;;

2018-05-14 16: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8-05-14 16:54   좋아요 1 | URL
우주지감 독서모임 도서 중에 ‘사진 책’이 있으면 그 날 모임에 초청하고 싶어요. ^^

2018-05-14 17:27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