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정치학 - 가치 있는 역사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하워드 진 지음, 김한영 옮김 / 마인드큐브 / 2018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하워드 진. 이제 그의 이름만 들어도 믿음이 간다. 2010년에 세상을 떠날 때까지 미국 최고의 ‘행동하는 지성’으로 자리를 굳힌 역사학자였다. 1960년대 흑인 민권운동과 베트남 반전운동의 중심부에 그가 있었다. 그는 강단에만 머무르지 않고 민중의 삶 깊숙이 뛰어들어 이론과 실천을 융합해왔다. 고령에도 그는 ‘아래로부터 만들어진 역사’를 강조하는 일관된 자세를 지켜왔다. 지난달에 진의 초기 저작이라 할 수 있는 《역사의 정치학》(마인드큐브, 2018)가 번역돼 나왔다. 1970년에 초판이 나오고 이십 년 후에 2판이 출간되었다. 《역사의 정치학》은 60~70년대에 본격적으로 체계화된 진의 급진적인 학문 세계와 역사관을 조망해볼 수 있는 책이다.

 

진은 이 책에서 3개의 대주제로 나누어 역사학자이자 사회운동가로서 자신이 부딪치고 건너온 시대를 에세이 형식으로 기술한다. 1부(‘접근법’)3부(‘이론과 실천’)는 미국 주류 역사학과는 궤를 달리하는 급진주의 역사관을 중점적으로 설명한다. 진이 말하는 ‘급진주의 역사’란 국가의 정치적 · 경제적 · 사회적 질서를 공고하게 만든 권력의 실체를 폭로하여 타파하는 변화 지향적 학문이다.

 

급진주의 역사는 정부 개혁의 한계, 정부와 부유한 특권층의 연결, 전쟁과 외국인 혐오를 부추기는 정부의 경향, 법의 중립성 뒤에서 벌어지는 돈과 권력의 유희를 폭로할 것이다. 급진주의 역사는 현실을 유지시키는 정부의 역할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를 구체적으로 밝힐 것이다. (『급진주의 역사란 무엇인가?』, 83쪽)

 

 

진은 반파시즘 역사학자 베네데토 크로체의 말을 빌리면서 (잘 알려지지 않은) 과거가 ‘죽은 역사’라면, 되살아난 과거는 ‘현재’로 나타난다고 확신한다. 그러기 위해선 역사학자는 ‘현재 목표’를 설정하여 지난 역사를 되돌아봐야 한다. 우리 시대를 이해하기 위해 역사를 되돌아보는 까닭은 과거에 대한 탐구가 현재를 넘어 미래 전망의 출발점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역사를 현실 너머로 확장하려면 역사학자는 사회의 중대한 문제들을 침묵해선 안 되고, 중립을 지켜서도 안 된다.

 

 

 역사의 목적은 “과거에 대한 새로운 전망”을 발견하는 것이므로…‥ [중략] 역사학자는 “자신의 과거를 초월하는 바로 그 행위에서 과거를 이용할 수 있고 또 이용해야 하는데” 이는 인류가 “미래에 대한 새로운 전망”을 향해 나아가도록 돕기 위해서다. (『역사학자』, 430쪽)

 

 

망각해선 안 될 과거의 기억들을 소환하여 다음 세대에게 전승하는 것은 역사학자의 중요한 책무이다. 진의 자서전 제목으로 알려진 “달리는 기차 위에 중립은 없다”는 ‘행동하는 지성’으로써의 진의 면모를 부각하는 명언이다. 그는 강단에 있을 때 학생들에게 이 말을 자주 했다고 한다. 『급진주의 역사란 무엇인가?』라는 글의 첫 문단에 이와 비슷한 구절이 나온다. 진은 언행일치된 모습으로 강단에서 말한 내용 그대로 일상에서 실천했다. 상아탑 안에 안주하지 않은 진은 여느 운동가의 그것과 다를 바 없었다. 전국을 돌며 거리 행진을 벌이고, 시위에 참여했다.

 

2부는 ‘미국 역사’를 주제로 한 에세이들로 구성되어 있다. 진의 관심은 미국 역사 속의 지배자들이나 그들의 이념이 아니다. 그는 건국 초기의 미국 역사부터 냉전 시대까지 두루 살피면서 미국 독립선언서의 자유, 평등, 행복의 추구라는 그럴싸하고 찬란한 표어 속에 가려진 역사 속의 희생자들을 소환한다. 2부에서 다루는 역사는 가난하고 억압받은 민중, 노예와 흑인들의 관점에서 보는 역사이다. 독자는 2부에서 ‘아래로부터의 역사’를 재조명하여 민중과 흑인의 권리를 찾으려고 했던 진의 참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1부와 3부를 먼저 읽고, ‘급진주의 역사’ 렌즈를 착용한 후에 2부로 접근해도 좋을 듯하다.

 

진은 미국인들이 권력의 기만에 잘 속아 넘어가는 이유는 비판적 역사관이 결여됐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오만한 제국’에 향한 그의 통렬한 지적은 지금도 유효하다. 미국의 트럼프 대통령은 진의 오래된 충언을 아는지 모르는지(상류사회의 교육을 받고 자란 그가 하워드 진을 알 리가 있겠나.) 유색 인종에 대한 경멸을 공공연히 습관처럼 내뱉었고 이를 실제 정책화하는 최악의 행보를 보인다. 역사를 모르거나 ‘중립’으로 일관하는 역사만 남으면 국민은 권력의 사리사욕을 보지 못하게 되고, 언론과 공권력은 오만한 권력을 보호하는 나팔수와 경호원이 된다. 역사는 우리가 가질 수 있고, 휘두를 수 있는 권력이다. 역사를 조금이라도 안다면, 그보다 비판적 역사관을 적극적으로 드러낸다면 우리는 다시는 속지 않을 것이다.

 

 

 

 

 

※ Trivia

 

단번에 이해하기 어려운 번역문과 오자들이 곳곳에 보인다.

 

* 19쪽

도미니크 공화국의 트루히요 → 도미니카 공화국

 

* 20쪽

찰스 다윈은 1961년 한 편지에서 → 1861년

 

* 71쪽

나는 교회가 다시 과처처럼 행동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고, 나 역시 그러지 않기로 다짐했습니다. → 과거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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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5-10 17:55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8-05-13 11:36   좋아요 1 | URL
역사를 배우는 것보다 제일 중요한 것이 ‘피드백’입니다. 자기만족으로 역사를 배우면 그런 역사는 자신(의 이념)을 돋보이게 하는 장식품에 불과합니다.

2018-05-12 20:0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5-13 11:37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