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롯한 당신 - 트랜스젠더, 차별과 건강
김승섭 외 지음 / 숨쉬는책공장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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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 게 아니게 보이는 무심함이 온 우주를 멍들게 할 수 있다.

 

(김살로메, 《미스 마플이 울던 새벽》, 54쪽)

 

 

 

올해로 ‘여성 참정권 운동(Suffragette, 서프러제트) 100주년을 맞는다. 여성 참정권 운동이 처음 불붙기 시작한 것은 1848년 뉴욕에서 열린 세계 최초의 여성권리대회 때다. 그로부터 수많은 여성이 투옥되는 등 참정권을 획득하기 위한 여정이 시작됐지만 제일 먼저 여성에게 투표권을 준 나라는 영국도, 미국도 아니다. 1893년 뉴질랜드가 최초이다. 우리나라는 1948년 제헌헌법부터 여성들의 참정권을 보장했다.

 

참정권은 국민이 직접 또는 간접적으로 국정에 참여할 수 있는 기본적 권리다. 그런데 이렇게 중요하고도 소중한 국민의 기본권을 누리지 못하는 여성이 있다. MTF 트랜스젠더(male-to female transgender, 트랜스여성)이다. 태어날 때 지정받은 성별과 스스로 생각하는 성별이 일치하지 않는 사람을 트랜스젠더라고 한다. 남성으로 태어났으나 성별을 여성이라고 생각하면 트랜스여성이고, 반대의 경우는 트랜스남성(female-to-male transgender, FTM 트랜스젠더)이다. 트랜스남성 역시 트랜스여성과 마찬가지로 투표를 하고 싶어도 하지 못한다.

 

국민의 대다수는 시스젠더(cisgender)다. 시스젠더는 신체적인 성별과 자신이 생각하는 성별 정체성이 일치한다고 느끼면서 살아간다. 시스젠더가 투표를 하려면 신분증을 꼭 지참해야 한다. 시스젠더 입장에선 신분증을 챙기고 오는 일은 어렵지 않다. 하지만 트랜스젠더에게 신분증 확인은 불편하고 두려운 일이다. 우리나라 주민등록증 번호 체계는 신원 확인에 유용하다. 13자리 숫자에 출생연도, 출생지, 그리고 성별 등의 정보가 포함된다. 주민등록번호 뒷자리의 첫 번째 숫자는 성별을 의미한다[*]. 트랜스여성은 현재 여성으로 사회생활을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지정받은 성별은 변경되지 않아 남성의 호적을 유지하면서 살아간다. 트랜스젠더 대부분이 호르몬 투여만으로 혹은 일부 외과적 수술만으로 자신의 성별 정체성에 따른 사회생활이 가능하지만, 주민등록증 등 공문서상 법적 성별은 자신의 사회 생활상 성별과는 일치하지 않는다. 트랜스젠더는 신분증 확인 과정에서 겪을 수 있는 시스젠더의 편견과 차별이 두려워서 투표장에 가지 않는다.

 

트랜스젠더는 너무 많은 불편함을 안고 살아간다. 병원에서도, 은행에서도, 신용카드 만들 때 정말로 많은 설명을 해야 하고 심지어 양해를 구하기도 한다. 우리나라는 법적 성별 변경과 관련된 법률이 제정되어 있지 않다. 호적 정정은 시간과 비용이 너무 많이 들고 또 절차도 복잡하다. 시스젠더에 속한 사람들은 트랜스젠더가 마주하는 불편함이 어떤 건지 잘 모른다. 미국의 역사가 헨드릭 빌렘 반 룬(Hendrik Willem van Loon)의 책 《무지와 편견의 세계사》(생각의길, 2018) 첫 문장을 빌리자면, 시스젠더는 ‘무지(無知)라는 골짜기에서 행복하게 살고 있다. 트랜스젠더는 이 골짜기에 들어올 수 없다. 시스젠더, 이성애자가 다수인 골짜기에 트랜스젠더의 삶을 받아들이지 않는 ‘편견’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오롯한 당신》(책공장더불어, 2018)은 ‘무지’의 골짜기에서 벗어나 트랜스젠더에 대해 가장 깊이 들여다볼 수 있도록 견인하는 책이다. 이 책은 김승섭 교수 연구팀이 발표한 트랜스젠더 의료 접근성 문제를 다룬 논문을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논문과 책이 세상에 나오기까지 시행착오가 많았다. 트랜스젠더의 건강 문제에 대한 국내 연구 자료가 전무한 상황 속에서 연구팀은 총 282명의 트랜스젠더를 만나 설문조사를 했다. 대부분 학술 연구는 정부 지원금을 받으면서 진행한다. 그러나 김승섭 교수 연구팀은 트랜스젠더 건강 연구를 진행하기 위해 한국연구재단에 두 차례나 연구비 신청을 했으나 실패했다. 결국 크라우드펀딩(시민의 후원, 기부 등으로 자금을 모으는 방식)으로 연구비를 마련할 수 있었다.

 

연구팀 조사에 따르면 국내 트랜스젠더들은 의료혜택을 받지 못한 채 의료적 트랜지션(medical transition)을 받고 있었다. 우리나라에서는 트랜스젠더들이 성을 바꾸는 의학적 트랜지션인 정신과 진단과 호르몬요법, 외과적 수술 등이 건강보험이 적용되지 않는 항목으로 분류돼 있다. 많은 시스젠더가 트랜스젠더에 대해 오해하는 것 중의 하나가 의학적 트랜지션이다. 트랜지션은 어느 한순간에 마치 마법과 같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호르몬요법은 체형과 피부 · 목소리를 변화시키지만, 비용이 만만치 않다. 성전환수술은 호르몬요법으로 불가능한 신체적 변화를 얻기 위해 시행된다. 여기에는 안면윤곽 성형술, 목젖 성형수술, 유방 절제 · 확대술, 고환 · 정관 절제술, 자궁 · 난소 난관 절제술 등이 포함된다. 트랜스젠더가 의학적 트랜지션을 받지 않는 가장 큰 이유는 높은 의료비용 때문이다. 트랜스젠더가 의료 혜택을 받을 수 있는 의료 시설이 부족한 점도 문제다. 설문조사에 응답한 일부 트랜스젠더는 호르몬 요법을 해주는 의료 기관이 없어서 의료적 처치를 받지 않는다고 답했다. 외국에서는 트랜스젠더를 위한 정부의 의료지원이 확대되는 추세다. 연구팀은 미국 · 유럽에서 의료적 트랜지션을 위한 의료진 교육과 수련 과정을 편성하고 있는 데 반해 한국 의과 대학의 교육 과정에는 이 같은 내용이 포함되지 않아 트랜스젠더의 건강 문제를 이해하는 한국 의료 전문가가 부족하다고 지적한다.

 

이 책을 읽고 나서 조금 더 생각해보면 ‘별 게 아니게 보이는 무심함’이 누군가를 힘들게 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연구에 참여하면서 많은 트랜스젠더를 만난 김승섭 교수의 자기반성은 이분법적 성별을 요구하는 우리 사회에 대해 다시금 생각하게 만든다.

 

 

트랜스젠더의 목소리에는, 내게는 더없이 ‘자연스럽고 익숙한’ 어떤 것들로 인해 고통을 받는 누군가가 살아있는 세상이 있었다. 은행에서 신원 확인을 위해 신분증을 보일 때, 공중화장실을 이용할 때 그들이 겪어야 하는 어려움을 나는 짐작조차 하지 못했다. (19쪽)

 

 

트랜스젠더의 인권 문제는 시스젠더에겐 다소 낯설고 난감할 수 있는 사회적 과제이다. 하지만 어떤 사람이든지, 자기 자신의 모습 그대로 살 수 있는 사회를 만들려면 적어도 편견 없이 트랜스젠더의 삶을 이해하고, 그들이 받는 고통을 알아야 한다. 트랜스젠더도 ‘국민’의 한 사람이며 기본권을 보장해줘야 한다. 트랜스젠더에 대한 편견을 가진 사람들, 그리고 트랜스여성을 비꼬는 일부 급진 페미니스트들(TERF)에게 한 마디 전하고 싶다. 당신들의 편견과 차별, 그리고 소수의 문제에 대한 무심함이 누군가를 멍들게 하는 무기가 될 수 있다고. 트랜스젠더를 ‘오롯한 인간’으로 봐줬으면 좋겠다.

 

 

 

 

[*]

1900~1999년에 태어난 남성 : 1

1900~1999년에 태어난 여성 : 2

2000~2099년에 태어난 남성 : 3

2000~2099년에 태어난 여성 :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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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6-19 16:05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8-06-19 19:27   좋아요 1 | URL
그렇지만 소수의 사회적 약자를 지나치게 옹호하면 다수의 사회 구성원 또는 또 다른 사회적 약자가 차별을 받을 수 있어요. 페미니즘 문제나 성소수자 문제는 ‘정치적 올바름‘의 오류에 빠지기 쉬운 주제입니다. 상대방이 비판하지 않으면 스스로 이 오류를 감지하기 힘들어요.

조그만 메모수첩 2018-06-19 17:1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참정권 소외는 생각해보지 못했던 문제네요. 일상과 의료 면에서의 고통만 어렴풋이 상상했을 뿐이었는데...ㅠㅠ 타고난 성별이든 선택한 성별이든 어떤 차별도 있어서는 안 되는데 사회는 평균에서 벗어난다는 것에 대해 부당한 억압을 가하는 거 같아요 😔

cyrus 2018-06-19 19:29   좋아요 1 | URL
저도 그랬어요. 선거 끝난 후에 이 책을 읽었어요. 트랜스젠더가 겪는 불편한 상황들이 이렇게 많을 줄 생각하지 못했어요.
 
당선, 합격, 계급 - 장강명 르포
장강명 지음 / 민음사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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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준비가 됐는데 어디를 가도 내가 모자라대요.

나의 잘못이 아니라고 말해주세요.”

 

 

(박기영의 노래 『취.준.생』 중에서)

 

 

 

 

등용문(登龍門)은 출세의 문을 뜻한다. 중국 황하(黃河) 상류에 급류가 흐르는 협곡이 있다. 협곡 이름은 용문이다. 물살이 어찌나 센지 그곳을 거슬러 올라가는 데 성공한 잉어는 용이 돼 승천한다는 전설이 있다. 그런데 용문을 오르지 못한 잉어는 뭐라고 부를까? 용문에 오르려고 도전하다가 바위에 이마를 부딪쳐 상처를 입고 하류로 떠내려가는 잉어들을 ‘점액(點額)이라 한다. 점(點)은 상처를 입는다는 뜻이고 액(額)은 이마를 뜻한다. ‘점액’은 출세의 문을 통과하지 못한 사람을 일컫는 말이다.

 

요즘 잉어는 멀리 황하까지 가지 않더라도 매일 등용문을 오른다. 오염 내성이 강한 잉어지만 수질 악화와 서식처 파괴 등 매일 용문보다 험한 길을 살아가고 있으니 말이다. 경기불황의 그늘이 짙어지면서 출세의 문턱이 갈수록 높아지고 있다. 외국 연수를 다녀오고 자격증을 따고 성형수술까지 해도 원하는 직장 구하기가 낙타 바늘구멍 들어가기만큼이나 어려운 시대가 됐다. 개천에서 때때로 잉어도 나오고 용도 나오면 좋겠지만, 지금은 그 희망조차 없다. 부모 돈이 곧 실력이요, 능력인 세상에서 부모의 경제적 뒷받침이 없으면 꿈을 실현하기 어렵다. 학연, 지연, 혈연으로 똘똘 뭉친 사회에선 이미 출발선부터 지각인 사람들이 많다. 매일 차근차근 등용문에 올라가봤자 ‘금수저들’의 세계에서 사다리가 걷어치워 지기 일쑤다.

 

지금 우리 사회는 마치 계급주의 사회처럼 이른바 ‘신의 직장들’이 지나치게 주목받으면서 역주행을 하고 있다. 그 중심에 ‘공채(공개 채용)가 있다. 청년들은 너도나도 대기업 · 공무원 시험에 목을 맨다. 장기 불황에 비정규직 일자리가 넘쳐나자 ‘안정적 고용’에 눈높이를 맞추고 있다. 첫 직장을 ‘중소기업’과 ‘비정규직’으로 출발하면 평생 그 바닥을 벗어날 수 없다는 게 청년들의 인식이다. 공모전은 높은 상금과 인턴 등 실무 경험의 혜택까지 누릴 기회를 부여해 대학생들에게 인기가 높다. 그러나 공모전 경쟁률이 점점 더 높아지면 대학생들은 경력자들과 경쟁해야 한다. 공모전의 ‘전(展)’을 ‘싸울 전(戰)’으로 써야 할 정도로 경쟁이 치열하다.

 

기자 출신 소설가 장강명의 책은 사람들의 생각과 관심사, 현실을 반영한다. 《표백》(한겨레출판, 2011)은 모든 틀이 이미 다 짜여 있는 세상, 그 구조 속에서 옴짝달싹도 할 수 없게 된 오늘날의 젊은 세대를 ‘표백세대’라 칭하며 자살을 통해서만 자신의 존재를 세계에 과시할 수 있는 반어적인 상황을 그린 소설이다. 《한국이 싫어서》(민음사, 2015)는 현실적 이유로 한국을 떠나는 청년들의 이야기를 담아내며 대중과 평단에서 공감을 이끌어냈다는 평을 받았다. 《댓글 부대》(은행나무, 2015)2012년 대선 당시 국가정보원의 댓글 조작을 통한 선거개입에서 모티프를 얻어 쓴 소설이다. 공교롭게도 이번에 나온 첫 르포르타주 《당선, 합격, 계급》(민음사, 2018)동시대의 현실과 호흡하는 그의 글쓰기와 궤를 같이한다. 이번에 그는 문학상과 공채 제도의 문제점을 파헤치고 들여다본다. 2년 넘게 작가는 공모전을 운영하는(운영하지 않는) 출판사 대표 및 담당자, 작가 그리고 작가 지망생 등 문학 공모전과 채용 시스템의 현실에 있는 사람들을 직접 만나 인터뷰했다.

 

장강명은 한국 공채 문화를 ‘지망생들의 세계’, ‘합격자의 세계’로 바라보면서 대학 입시, 기업 공채 제도, 자격증 시험 등으로 확장한다. 이 공채 문화를 계급사회를 조장하는 ‘한국만의 방식’으로 규정한다. 책은 한국 공채 문화의 현실의 면면을 쓸쓸하지만, 사실적으로 그려냈다. 한국 공채 문화의 문제점은 ‘승자’ 그룹(‘등용’, ‘합격자의 세계’)과 ‘패자’ 그룹(‘점액’, ‘지망생들의 세계’)으로 분화시키는 무한 경쟁과 성과(성적) 중심주의다. 자격증과 공모전, 그리고 공무원 시험은 ‘무한 경쟁’이라는 사회의 파고 속에 있는 한 척의 구명보트와 같다. 모든 구직자가 아귀다툼으로 올라타면 구명보트는 당연히 뒤집힐 수밖에 없다. 한 번의 시험으로 모든 경쟁의 금을 넘어선 합격자들은 ‘용(龍)’이 되지 못한다. 어중이떠중이들이다. 그들은 자신의 ‘철밥통’을 지키기 위해 인맥과 파벌을 보험으로 삼고 있어서다. 엘리트의식, 권위주의, 패거리주의에 찌들어 있는 곳이 ‘합격자의 세계’이다.

 

장강명은 ‘문학공모전’ 수상경력이 화려하다. 그러나 그는 문학공모전도 ‘일종의 채용 시스템’이라고 말한다. 한국 사회의 등단 문화와 공채 문화 사이에 비슷한 점이 많다. 점수 또는 성과로 합격(당선)과 불합격(낙선)으로 나누고, 합격자 또는 당선자는 ‘그들만의 세계’의 구성원이 된다. 합격자는 우월감을 느끼고, 불합격자는 열등감을 많이 느끼면서 등용에 재도전한다. 이렇게 합격의 권위가 만들어 낸 울타리에 갇힌 사람들은 자신이 이룬 일을 자랑하기 위해 ‘간판’을 내세운다. 우리는 과대평가된 간판과 권위를 맹목적으로 신뢰한다. 그런데 심각한 문제는 간판을 차지하기 위해 ‘바늘구멍’ 같은 공채에 매달리는 사람들이 많다는 점이다. 오랫동안 취업 및 시험 준비에 매달려서 극도로 예민해진 사람들은 ‘용과 같은 괴물’로 변할 수 있다. ‘고시오패스(고시생과 반사회적 인격장애자를 뜻하는 소시오패스의 합성어)이 괜히 나온 말이 아니다.

 

실력과 능력을 갖추면 누구나 원하는 직장에 취업할 수 있으니 열심히 공부하고 노력하라는 말이 의미 없는 상황이 되었다. 아무리 노력해도 되지 않는 일이 있다는 것을 이 책, 《당선, 합격, 계급》이 보여주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만 막강한 힘을 발휘하는 ‘합격의 권위’와 ‘간판’은 노력보다 배경이 더 중요하다는 불신을 낳게 한다. 시험 결과로 인생의 당락이 결정되는 한국은 ‘공채의 나라’이다. 특권과 차별이 용인된 공채의 나라에 사는 청년들은 꿈을 꾸지 않는다. 안타깝게도 그들은 공채 문화가 ‘불공평한 생존 방식’임을 알면서도 포기하지 못한다. 우리나라의 ‘등용’은 문제가 많다. 우리나라는 여전히 계급 사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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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6-18 17: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8-06-19 15:26   좋아요 1 | URL
공공기관에서 일하는 지인들의 얘기를 들어보면 일하는 게 힘들어 보였어요. 이제 좀 적응했다 싶었는데 인사발령이 나면서 새로운 곳에서 일하게 됩니다. 또 힘든 고생을 하게 되죠.

북다이제스터 2018-06-18 20: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엄지 척^^

cyrus 2018-06-19 15:27   좋아요 1 | URL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
 
미스 마플이 울던 새벽
김살로메 지음 / 도서출판 아시아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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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한 권의 책과 같다. 어리석은 사람은 대충 책장을 넘기지만 현명한 사람은 공들여서 읽는다. 그들은 단 한 번 밖에 읽지 못하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독일의 소설가 장 파울(Jean Paul)의 말이다. 그가 하려는 말은 알겠는데 내 독서방식과는 거리가 멀다. 인생은 단 한 번뿐이라서 책을 과식하는 편이다. 관심 가는 책이나 감동을 많이 주는 책에는 무의식적으로도 손이 먼저 간다. 읽고 또 읽을 때마다 번번이 새로운 깨달음과 감동에 휩싸이기 때문이다. 책을 읽으면서 생기는 이러한 정서적 반응은 책과 마음이 전기가 통하듯 강하게 교류하고 있다는 증거다. 이때 중요한 것은 ‘내가 이런 감정을 느끼는 이유는 무엇일까?’ 하고 자기 마음에서 일어나는 감정들을 가만히 들여다보며 감정의 동기를 생각해 보는 것이다.

 

마음에 위로와 감동을 주는 책은 꼭 소설만이 아니다. 때에 따라서는 진실이 담긴 수필을 읽고 감동을 얻을 수 있다. 그러나 적지 않은 수필은 감동을 주는 삶의 새로운 진실을 발견하는 일과는 거리가 먼 일상적이고 진부한 ‘일기’ 수준을 크게 벗어나지 못한다. 보는 사람을 민망하게 만드는 수필이 나오는 이유는 글쓴이들이 수필을 붓 가는 대로 쓰는 쉬운 글로 잘못 생각하기 때문이다. 내가 생각하는 수필은 자기 고백적 글쓰기다. 자기 고백적 글쓰기는 경험을 의미화하고 객관화함으로써 경험과 자신 사이에 일정한 거리를 만든다. 그리고 그 공간을 비집고 들어가는 것은, 글쓴이의 경험을 공유하면서 느끼는 독자들의 반응, 즉 감정이다.

 

괴롭거나 부끄러운 일일수록 망각과 ‘추억 보정’에 기대어 잊어버리고 싶을 텐데 굳이 글쓰기로 풀려는 사람들이 많다. 이런 사람들은 자기 치유를 목적으로 글을 쓰고 싶어 한다. 그들은 부정적인 경험을 떠올리게 하는 감정의 덩어리를 재료 삼아 글을 써서 견딜 만한 수준의 내용으로 다듬는다. 내게 이런 의미가 있었다는 식으로 해석하게 되면 한결 그 일을 돌아보는 게 쉬워진다. 따라서 자기 고백적 글쓰기, 즉 수필은 아픔의 상처를 다른 느낌으로 재생한다는 뜻에서, 덧난 상처를 아물게 하는 ‘연고’가 될 수 있다.

 

 

 “안동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유년을 보냈다. 수몰민으로 대도시에 버려진 채 십 대와 청춘을 버겁게 앓았다. 그 시절의 트라우마가 글쓰기의 자양분이 되었다. 아픈 어제가 모여 꽃핀 오늘로 거듭나는, 치유로서의 글쓰기에 매혹을 느낀다.” (《미스 마플이 울던 새벽》 작가 소개중에서)

 

 

일상생활 속에서 잔잔하게 가슴 저미게 했던 느낌들을 차분한 글로 풀어내 첫 번째 수필집을 펴낸 소설가 김살로메. 그녀는 치유로서의 글쓰기, 자기 고백적 글쓰기에 깊은 관심이 있다. 그런 관심에 부응한 책이 바로 이 첫 번째 수필집이다. 그녀는 삶의 흔적을 찾듯 끼적거렸던 글들을 오롯이 담아 《미스 마플이 울던 새벽》(아시아, 2018)이란 수필집을 펴냈다. 김살로메의 수필은 특별히 화려한 문체를 자랑하거나 하지 않는다. 내용도 특별할 게 없다. 그저 일상의 세목을 잔잔하게 그려내고 있을 뿐인데, 그 잔잔함이 요즘같이 과장되고 억지수를 써야만 겨우 존재를 인정받는 세태에서 오히려 적잖은 감동으로 다가온다.

 

일천 글자 분량의 수필은 소중한 일상을 엮은 마음의 동화 같은 글이다. 마음속 동화이기 때문에 흘러가 버린 시간에 대한 향수를 불러온다. 너무 바쁜 일상 때문에 잊고 살아온 너와의 관계에 대하여 소중했던 가치를 일깨워준다. 『엄마의 재봉틀』은 스치듯 사라진 일상 속 미세한 풍경을 되살린 글이다. 쉼 없이 돌아가는 재봉틀 소리는 어린 시절 엄마에 대한 향수를 자극하는 소재가 된다.

 

 

 엄마가 남긴 베갯잇, 방석, 이불보 등 다양한 소품들을 보면서 재봉틀을 돌리고 돌리던, 굳은살 밴 엄마 뒤꿈치를 오래 기억할 것이다. 바늘 자국이 지나간 엄마 오른손 검지의 상처를 떠올리며 당신 노동의 숭고함을 되뇌는 것도 잊지 않겠지. (엄마의 재봉틀23)

 

 

많은 이들이 자신을 미워하거나 타인을 미워하면서 산다. 어린 시절 글쓴이는 재봉틀 소리를 싫어했고, 그것을 쉼 없이 돌리는 엄마의 삶을 ‘동조 없는 연민’[*]으로 일관했다. 그러나 어른이 된 글쓴이는 치유로서의 글쓰기를 통해 부끄러운 기억을 억압하거나 부정하지 않고 자신의 눈앞에 그대로 펼쳐놓고 실체를 확인한다. 『엄마의 재봉틀』은 글쓴이의 마음뿐만 아니라 소중한 추억이 깃든 엄마의 물건을 보듬고 쓰다듬는 치유력을 지닌다.

 

김살로메는 경륜을 찬미하는 목소리가 드센 이 시대에 새삼 ‘진정한 어른 되기’를 고민하는 작가이다. 『꼰대라는 말』, 『시청과 견문』은 ‘어른 되기의 어려움’에 대한 수필이다. 글쓴이의 표현에 따르면 ‘시청(視聽)은 흘깃 보는 것이고, ‘견문(見聞)은 제대로 보고 듣는 것이다. 꼰대는 제대로 보고 들은 것이 없으면서도 ‘견문’했다고 큰소리친다. 그리고 ‘내가 옳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젊은 세대를 가르치려고 한다. 꼰대는 “요즘 애들은”이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산다. 어른은 시간이 지난다고 그냥 되는 것이 아니다. 끊임없이 자신을 가다듬는 과정의 결과로 얻어지는 칭호이다. 수필집에는 ‘진정한 어른’이 되기 위한 작가의 내적 성찰이 돋보이는 글이 수록되어 있다. 큰 것, 강한 것, 힘센 것, 자극적인 것이 세상의 중심에서 위압하는 이 시대에 김살로메는 작은 것, 소박한 것이 우리 삶의 진정한 주인공이라고 이야기한다. 독자는 그녀의 수필집에서 마치 진흙 속의 연꽃처럼 성찰과 마음의 다스림을 실천하는 한 사람의 성숙한 어른을 만난다.

 

독자는 교리적인 글에서보다는 정서에 호소하는 글에 감동한다. 문학에서의 감동이란 내면을 두드리는 언어의 힘에서 나온다. 일천 글자로 채워진 소박한 수필에 인간적 애정을 가지고 독자의 마음을 어루만지는 힘이 있다. 《미스 마플이 울던 새벽》은 소박한 경수필만 모은 책이 아니다. 그 속에 세상을 밝고 긍정적으로 보면서 그 가운데 삶의 의미를 찾아가는 글쓴이의 지혜가 있다. 성숙해진다는 것은 완전히 새로운 생각을 하는 것이 아니다. 이미 생각했던 것을 얼마나 더 절실하고 강도 높게 살펴보고 그렇게 해서 자신의 삶과 존재를 어떻게 바꾸는 것인지 고민하는 것이다. 요즘은 반성과 성찰이라는 감정 상태가 아예 없어서 사유를 거부하는 꼰대들도 글을 쓴다. 그러나 세상이 아무리 엉망진창이라고 해도 이 땅에는 순수한 영혼을 향한 지향을 일상에 잊지 않고 글을 쓰는 김살로메가 있기에 아직 세상은 살만하다.

 

 

 

[*] 엄마의 재봉틀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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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발머리 2018-06-16 14: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삶의 의미를 찾아가는 글쓴이의 지혜,라는 의견에 동의합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했어요.^^

cyrus 2018-06-18 16:43   좋아요 0 | URL
스쳐 지나갈 법한 평범한 일상을 주제로 삼아 간결하게 글을 쓴 살로메님의 필력에 감탄했습니다. 프레이야님처럼 살로메님도 리뷰집이나 영화 리뷰집 한 권 내시면 좋겠어요. ^^

페크pek0501 2018-06-16 14:3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좋아요를 열 번 누르고 싶은 리뷰입니다. 잘 쓰셨다고 감탄하며 읽었습니다.

cyrus 2018-06-18 16:46   좋아요 0 | URL
수필집에 보면 ‘문장 털기’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글이 있어요. 이 글에서 살로메님이 깃털로 치장하듯이 화려한 수사가 장식된 글보다는 알짜배기 문장만 남은 글이 더 아름답다고 말합니다. 그런 무색, 무취의 리뷰를 쓰고 싶었는데, 실패했습니다.. ^^;;

sprenown 2018-06-16 15: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생각없이 끄적거린다고 해서 모두 ‘글‘이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되는 리뷰 네요^^. 반성합니다!

cyrus 2018-06-18 16:51   좋아요 0 | URL
매일 틈만 나면 배설되는 문장들과 과시용 사진을 보고 싶지 않아서 페이스북과 인스타그램 계정을 멀리 했어요. 짧은 글도 좋은 건 아니에요. 글이 길든 짧든 상대방에게 전달하고 싶은 진짜 ‘알맹이’가 있어야 읽고 싶은 마음이 생겨요.

2018-06-16 15:38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8-06-18 16:54   좋아요 0 | URL
별말씀을요.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도 1000자 이내의 리뷰를 쓰고 싶었는데, 쉽지 않았어요. 글을 쓰면서 수필집의 매력을 한 가지만 소개하는 것이 너무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

서니데이 2018-06-16 16:2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책 좋았어요. 간결하게 오래 공들여 쓴 느낌이 들었어요.
cyrus님의 리뷰 잘 읽었습니다.
오늘은 더운 토요일입니다. 즐거운 주말 보내세요.^^

cyrus 2018-06-18 16:59   좋아요 1 | URL
뛰어난 소설, 수필을 두루 쓸 줄 아는 작가는 흔치 않아요. 평범한 사람들보다 더 많이 글을 쓴 작가도 소설의 분량보다 적은 경수필을 쓰기 어려워 할 것입니다. 독자에게 전달하고픈 메시지가 명확히 담겨 있는 경수필을 쓰는 것도 꾸준한 노력 아니면 쓰기 힘든 일입니다. ^^

2018-06-17 06: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8-06-18 17:02   좋아요 1 | URL
젊은 세대가 선호하는 취향과 유행을 이해하려면 독서모임에 참석해야 합니다. 20대들과 대화를 나눠 보면 그동안 알지 못했던 새로운 (젊은) 문화를 알 수 있습니다.. ㅎㅎㅎ 20대들이 공유하는 문화를 모르면 꼰대가 되기 쉬워요. 꼰대는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지 못하거든요.

프레이야 2018-06-17 10: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곁들인 사진도 엄마의 재봉틀이 가장 좋았어요^^ 저는.

cyrus 2018-06-18 17:05   좋아요 0 | URL
이 책에 적재적소에 배치된 사진들이 글의 가치를 높여주었습니다. 수필집에 사진이 있을 줄은 생각도 못했어요. ^^
 

 

 

 

포르노그래피(pornography)라는 말은 그리스어에서 유래한 단어로 ‘매춘부에 관한 글’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이 단어가 처음 나온 시기는 19세기 중반이다. 19세기 이전까지 포르노그래피는 종교 · 정치적 권위를 비판하기 위해 은밀하게 만들어진 매체였다. 포르노그래피는 18세기에 이르러 인쇄 문화의 발달로 독자층이 확대되었고 이후 프랑스 혁명을 계기로 하나의 독자적 장르로 자리 잡게 된다. 왕족과 성직자, 귀족들의 문란한 성생활을 묘사한 포르노 팸플릿은 왕권과 교회를 희화화시키며 앙시앵 레짐(구체제)을 타파하는 데 큰 공헌을 했다.

 

 

 

 

 

 

 

 

 

 

 

 

 

 

* 린 헌트 엮음 《포르노그래피의 발명》 (알마, 2016)

* 로버트 단턴 《책과 혁명》 (알마, 2014)

 

 

 

 

 

 

 

 

 

 

 

 

 

 

* 주명철 《계몽과 쾌락》 (소나무, 2014)

* [절판] 주명철 《서양 금서의 문화사》 (길, 2006)

 

 

 

 

 

 

 

 

 

 

 

 

 

 

 

 

* 장 자크 루소 《사회계약론》 (펭귄클래식코리아, 2010)

 

 

 

장 자크 루소와 볼테르, 메리 울스턴크래프트 등으로 대표되는 계몽주의는 프랑스 혁명의 원리를 제공하고 근대 서구사회의 정체성을 구성한 가치다. 그러나 린 헌트, 로버트 단턴 등 역사학자들은 고도로 조직화한 지식 엘리트가 활약했던 계몽주의 시대가 프랑스 혁명을 이끌었다는 정설에 이의를 제기한다. 포르노 팸플릿은 루소의 《사회계약론》보다 훨씬 많이 읽혔다. 특히 마리 앙투아네트의 난잡한 성생활을 풍자한 포르노 팸플릿은 금서임에도 불구하고 당시 최고의 인기를 누렸다. 금서의 유통은 교묘하다. 아무리 출판사를 단속하거나 유통을 원천적으로 차단하려 해도 완벽하게 막을 수는 없다. 정보 수요가 있으면 공급도 따라가기 마련이다. 예컨대 프랑스 혁명 당시 금서들은 ‘철학 서적’이라는 은어로 불렸고, 가격이 저렴해서 노동자들도 사볼 수 있었다.

 

그렇다면 과연 포르노 팸플릿이 혁명의 분위기를 고조시켜 구체제를 무너뜨리게 한 '평등한 포르노'라 할 수 있을까? 프랑스 혁명 시대의 포르노그래피는 치명적인 함정을 깔고 있다. 혁명가들은 왕비의 성적 추문을 의도적으로 만들어서 왕권의 권위를 흔들었다. 왕비의 육체와 섹슈얼리티에 누구나 접근할 수 있다는 대중의 환상은 일종의 성적 판타지이며 대중의 집단적 관음증을 부추겼다. 포르노 팸플릿은 남성에 의해 만들어지고 대부분 남성에 의해 소비되었다. 프랑스 혁명이 끝나면서 포르노그래피는 성적 쾌락 자체를 위한 매체로 변질하였다. 포르노그래피가 영화라는 매체와 만나자 그것은 놀라운 속도로 성장하면서 여성의 섹슈얼리티를 더욱더 값싸고 상스러운 것으로 만들었다.

 

 

 

 

 

 

 

 

 

 

 

 

 

 

 

 

* 수전 브라운밀러 《우리의 의지에 반하여》 (오월의봄, 2018)

 

 

 

숱한 포르노 영화에 ‘강간’ 장면은 약방의 감초처럼 등장한다. 포르노 영화에서 빈번하게 등장하는 줄거리는 전혀 모르는 남성과 여성이 만나 우연히 서로의 몸을 보게 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다. 여성이 처음에는 남성을 거부하지만 결국에는 성행위 자체를 받아들이게 된다는 내용이다. 포르노 영화 제작자들은 성폭력이 남성들을 자극하는 성적 판타지라는 것을 알고 있다. 대부분의 남성이 성에 눈뜨는 시절에 포르노를 접한다. 나도 성적 호기심이 솟구치던 사춘기에 포르노를 봤다. 포르노는 호기심에 볼 수 있다. 하지만 포르노 영화에 묘사된 성관계는 ‘가짜’이며 ‘여성의 몸과 섹슈얼리티를 왜곡하는 위험한 묘사’다. 포르노가 만든 성적 판타지 때문에 남성들은 단지 성행위 자체에만 집착하는 왜곡된 사고를 하게 된다. 또 포르노는 폭력적인 관계에 무감각해지는 위험성도 있다. 남성들의 성적 판타지 속의 성폭력은 소위 ‘야한 것’이다. 포르노를 즐겨보는 남성들은 ‘성적으로 대상화’시킨 여성의 몸을 눈요깃감으로 바라보면서 감상한다.

 

 

 

 

 

 

 

 

 

 

 

 

 

 

 

 

* 수전 손택 《급진적 의지의 스타일》 (현대미학사, 2004)

* [안 읽었어요!] 조르주 바타유 《눈 이야기》 (비채, 2017)

 

 

 

수전 손택은 포르노가 예술의 한 형태가 될 수 있다고 확신했다. 그녀는 조르주 바타유의 소설 《눈 이야기》(비채, 2017)를 옹호한 『포르노그래피적 상상력』(《급진적 의지의 스타일》 수록)이라는 글에서 독자에게 성적 흥분을 불러일으킨 포르노그래피의 효과가 저자의 의도든 아니든 간에 그것은 문학적 결함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표현의 자유’라는 보편적인 단어로 포르노의 성적 판타지를 축소하거나 미화해선 안 된다. 순진한 관점으로 포르노를 접근하면 포르노가 사회에 끼치는 끔찍한 폭력성을 외면하게 된다.

 

 

 외설적 즐거움의 이름으로는 그 어떤 ‘평등한’ 포르노도, 기존의 포르노에 상응하는 여성 포르노도, 반전도 불가능하다. 포르노그래피는 강간과 마찬가지로 여성을 비인간화하고 성적으로 접근할 대상으로만 환원하도록 설계된 남성의 발명품이다. 이건이 도덕주의나 부모의 간섭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관능을 추구하는 일로 미화되어서는 안 된다. 포르노가 파는 주된 품목은 언제나 여성의 벌거벗은 몸, 여성의 노출된 가슴과 성기일 수밖에 없다.  (수전 브라운밀러, 《우리의 의지에 반하여》 617쪽)

 

 

포르노와 예술을 구분하는 기준은 작가의 의도와 보는 이에 따라 시시각각 달라진다. 따라서 이게 포르노이고, 이게 예술이라고 구분하기 어렵다. 예술이 된 포르노 또는 젠더, 계급, 인종, 섹슈얼리티 등 다양한 정체성 범주를 포용하는 포르노 즉 모든 사람이 수긍하는 ‘평등한 포르노’는 절대로 성립될 수 없다. 왜냐하면, 대부분 포르노는 성차별뿐만 아니라 인종차별, 성소수자 차별도 담고 있기 때문이다수전 브라운밀러가 말했듯이 오늘날의 포르노는 여성을 성적 대상화 또는 성 상품화하여 만들어진 ‘남성을 위한, 남성이 만든 발명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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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6-15 20: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8-06-16 13:38   좋아요 0 | URL
그런데 모든 페미니스트가 포르노를 반대하는 건 아닙니다. 반 포르노 규제를 비판하는 페미니스트도 있어요. 그 페미니스트의 책을 아직 안 읽었어요. 곧 읽을 예정입니다. ^^
 

 

 

 

 

 

 

아시다시피 어제 선거 결과는 싱겁게 끝나버렸습니다. 이번 선거에 정의당을 지지했지만, 제가 기대했던 결과는 나오지 않았습니다. TK(대구, 경북)가 산소 호흡기를 뗄 뻔했던 자유한국당을 되살렸습니다. 더불어민주당도 선전했습니다만 자유한국당의 철옹성을 뚫는 데는 역부족이었습니다. 솔직히 말해서 이번 선거에 출마한 더불어민주당 후보 대부분은 눈에 확 들어 올 만큼 인상적이지 않았습니다. 바른미래당 후보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대선 때 불었던 ‘유승민 열풍’이 많이 사그라졌습니다.

 

대구 지역 언론들은 임대윤 민주당 대구시장 후보의 낙선을 ‘졌잘싸(졌지만 잘 싸웠다)라고 평가하고 있는데요, 이런 걸 요즘 말로는 ‘정신 승리’라고 하죠. 대구 시민들이 임대윤 후보자의 정치 능력을 믿어서 그에게 표를 줬을까요? 저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해요. 자유한국당의 행보가 마음에 들지 않아서 속는 셈 치고 더불어민주당 후보를 찍어줬을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걱정인 것은 대구 내 진보정당들의 입지가 좁아진 점입니다. 정의당은 대구, 경북 각각 단 1명만 당선자가 나왔고요, 대구시 · 구의원 비례대표 선거 득표율이 저조했습니다. 시의원 비례대표 득표율은 비례대표 의석 배분 기준인 5%에 미치지 못했습니다. 이번에 제가 지지했던 대구 달서구 비례대표 배수정 후보는 간신히 5% 이상 득표율을 얻는 데 성공했지만, 10.5% 득표율을 얻은 바른미래당을 넘어서지 못했습니다. 이제야 가슴 아픈 결과를 말하게 됐네요. 아쉽게도 배수정 후보는 비례대표가 되지 못했습니다.

 

 

 

 

 

이번 선거 운동을 하게 되면서 많은 걸 느꼈습니다. TV로 보는 정치와 사람들의 숨결이 느껴지는 정치는 달랐습니다. 선거 과정과 규정이 이렇게 복잡할 줄 몰랐습니다. 그리고 ‘TK 섬’에도 더불어민주당, 진보정당을 열렬히 지지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됐습니다. 결과가 어떻든 간에 6월 13일 선거는 제겐 평생에 잊지 못할 날입니다. 선거 운동은 짧았지만, 정말 특별하고 소중한 경험이었습니다. 제 글을 보시고 배수정 후보를 알게 되어 응원해주신 분, 그리고 배수정 후보에게 소중한 한 표를 주신 분들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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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6-14 18:34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8-06-15 18:15   좋아요 0 | URL
맞아요. 변화는 확 오지 않죠. 그런데 대구의 보수 사랑을 욕하는 사람들은 대구의 변화가 빨리 오기를 간절한가 봐요.. 대구에 한 번도 오지 않은 타 지역 사람들이 대구의 단면적인 모습을 보고 까는 모습을 보면 화가 나고 속상합니다.

sprenown 2018-06-14 21: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더불어민주당이 싹쓸이 한것도 그리 바람직하지는 않습니다. 남북회담이나 북미회담 이슈때문인데.견제와 균형을 위해서 다당제에 맞게 진보와 보수 다양한 의견이 국정에 반영되어야 할텐데요.이 참에 개헌논의와 함께 선거구제 개편도 논의했으면 좋겠네요
사회적 합의가 필요 하겠지요.

cyrus 2018-06-15 18:17   좋아요 0 | URL
네, 지금 상황은 ‘위기’라고 생각해요. 더불어민주당 중심의 거대 이슈가 장기적으로 부각된다면 보수와 진보 야권 모두 침체기를 벗어나지 못할 것입니다.

붉은돼지 2018-06-15 12: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밤 11시쯤에 제가 사는 달서구가 한두번 뒤집어져서 기대했었는데 아침에 확인해보니 유혈낭자하더군요 ㅜㅜ

cyrus 2018-06-15 18:19   좋아요 0 | URL
유혈낭자.. ㅎㅎㅎㅎ 달서구 선거 개표 결과를 잘 알고 있어서 무슨 의미인지 알겠습니다. ^^ 제가 살고 있는 동네인 서구도 마찬가지예요. 선거를 치르고 나면 TK만 적조 현상이 생깁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