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래식 음악의 정원 ‘풍월당(風月堂)’ 곳곳에 문학과 미술이 있다. 문학과 미술은 음악의 오래된 지음(知音)이다. 자신이 직접 지은 시를 악기로 연주하면서 읊은 음유시인은 악사 겸 시인이었다. 예술에 조예가 깊은 음악가들은 시와 소설을 읽었고, 미술관에 자주 드나들었다.







화가는 음악을 듣다가 떠올린 감정을 그린다. 캔버스에 닿은 선율은 사람, 동물, 식물, 건물로 변신한다. 때로는 절친한 음악가를 위해 초상화를 그려주기도 한다. 프랑스의 화가 들라크루아(Eugène Delacroix)는 폴란드에서 온 ‘음악의 시인’ 쇼팽(Frédéric Chopin)의 친구다. 그는 또 쇼팽과 사귀었던 소설가 조르주 상드(George Sand)와도 친분이 있었다. 들라크루아는 두 사람의 초상화를 그렸다.







풍월당의 카페 ‘로젠카발리에(Rozenkavalier)’는 1900년대 초반 오스트리아 빈(Wien)의 카페를 떠올리게 하는 공간이다. 카페 내부는 19세기 말 유럽에 유행한 유겐트스틸(Jugendstil) 양식으로 꾸며졌다. 유켄트스틸은 아르누보(Art Nouveau)의 독일식 명칭이다. 







카페 안에도 풍월당 대표 박종호 명인이 소장한 책들이 있다. 내가 오랫동안 눈맞춤한 책은 독일의 미술 서적 전문 출판사 타셴(Taschen)이 2017년에 선보인 구스타프 클림트(Gustav Klimt) 도록집이었다.















* [개정판] 자비에르 질 네레, 최재혁 옮김 《구스타프 클림트》 (마로니에북스, 2023년)

 

* [절판] 이주헌 《클림트: 에로티시즘의 횃불로 밝힌 시대정신》 (재원, 1998년)




클림트는 베토벤(Ludwig van Beethoven)의 교향곡 9번 <합창>에 영감받아 <베토벤 프리즈>라는 거대한 벽화를 그렸다. <베토벤 프리즈>는 베토벤 서거 75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클림트는 황금색을 좋아하는 화가, 관능적인 그림을 그린 에로티시즘의 화가, 여성 편력이 심한 화가로 유명하다. 이렇다 보니 클림트의 <베토벤 프리즈>는 걸작임에도 <입맞춤(kiss)>와 <유디트 Ι>에 비하면 대중의 관심도가 낮은 편이다.
















* [개정판] 제러미 시프먼, 김병화 옮김 《베토벤》 (포노, 2025년)

 

* 노먼 레브레히트, 장호연 옮김 《왜 베토벤인가》 (에포크, 2025년)



베토벤 서거 75주년을 맞이한 예술가들은 음악의 성인(樂聖)을 ‘인류의 영혼을 구원한 천재’로 숭배하기 시작했다. ‘환희의 송가(Ode to Joy)’라는 제목으로 알려진 <합창> 교향곡 제4악장은 구스타프 말러(Gustav Mahler)의 지휘로 연주되었다. 










20세기를 반가이 맞이한 빈은 베토벤을 숭배하는 도시가 되었다. 클림트도 베토벤에 경의를 표한 예술가였고, <합창> 교향곡 연주회에 어울리는 벽화를 제작했다.


로젠카발리에를 찬찬히 둘러보면서 다음으로 가야 할 곳을 생각했다. 머릿속에 서울의 책방 이름들이 하나둘씩 스쳐 지나갔다. 카페에서 혼자 서성거리다가 또 한 번 클림트 도록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클림트, 클림트‥…클림트! 

가야 할 곳이 정해졌다.

회현역 지하상가에 있는 헌책방 ‘클림트’로 향했다.







회현역 지하상가에 LP 음반을 파는 가게들이 모여 있다. 클림트는 오래된 책과 중고 LP 음반을 같이 판매한다. 책방 문에 책방 주인의 야구 팬심이 붙어 있다. 책방 주인은 프로야구팀 LG트윈스의 프랜차이즈 선수 이병규와 박용택을 좋아한다. 두 선수 모두 은퇴했다. 이병규는 현재 LG트윈스 2군 감독이다. 2023~2024년에 삼성 라이온즈 수석 코치, 2군 감독으로 부임했다. 박용택은 야구 해설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지하상가에 있는 헌책방은 구멍가게와 비슷하다. 가게 안에 책이 엄청 많이 있으면 사람 한 명 지나갈 수 있는 통로가 비좁다. 켜켜이 쌓여서 생긴 책 탑은 천장에 닿아 있다. 이렇게 비좁은 헌책방은 대구역 근처 지하도(굴다리) 헌책방 이후로 오랜만이다.







사방이 책 탑으로 둘러싸인 헌책방에 있으면 어질어질하면서도 책을 잘 찾고 싶은 마음이 솟구친다. 집중력도 높아진다. 책방의 책 탑은 개정판에 밀려난 구판 도서들의 무덤이다. 표지가 달라지고, 집 주소(출판사)와 이름(책 제목)도 바뀐 개정판이 나오면 구판 도서는 더 이상 출간되지 않는다. 품절과 절판은 책의 죽음이다.


















* 아서 밀러, 최영 옮김 《시련》 (민음사, 2012년)

 

* 에드문트 후설, 이종훈 옮김 《현상학적 심리학》 (한길사, 2021년)



미국의 극작가 아서 밀러(Arthur Miller)의 《세일럼의 마녀》는 민음사 ‘이데아 총서’ 일곱 번째 책이다. 작품의 원제는 ‘The Crucible’이다. 







지금은 원제의 의미에 맞게 《시련》이라는 제목으로 바뀌어서 다시 출간되었다. 구판과 개정판의 역자는 같다. 《세일럼의 마녀》 바로 아래에 에드문트 후설(Edmund Husserl)의 《현상학적 심리학 강의》가 있다. 알라딘에 검색해도 나오지 않는 희귀한 책이지만, 한길사에서 출간되었다.


클림트에 절판된 철학 도서들이 숨어 있다. 이런 구하기 힘든 책들은 도서관에 있다. 그러나 출간된 지 오래되었고, 대출 횟수가 적은 책들은 사서만 갈 수 있는 창고에 갇힌다. 창고에도 책이 많으면 그중 일부는 폐기 처분 도서로 분류되어 헌책방으로 향한다. 헌책방이 없어지면 절판된 철학 도서를 구하기가 힘들어진다.
















* 발터 벤야민, 최성만 · 김영옥 · 윤미애 함께 옮김 《일방통행로 / 사유 이미지》 (도서출판 길, 2007년)

 

* 발터 벤야민, 최성만 옮김 《기술 복제 시대의 예술 작품 / 사진의 작은 역사 외》 (도서출판 길, 2007년)

 

* 발터 벤야민, 최성만 · 윤미애 함께 옮김 《브레히트와 유물론》 (도서출판 길, 2020년)



클림트 책방 주인은 철학 도서들이 독자들을 많이 만나지 못하고, 조용히 절판되는 상황을 안타까워했다. 그분은 ‘길 출판사’가 펴낸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 선집이 더 이상 절판되지 않기를 바랐다. 지금까지 출간된 길 출판사의 벤야민 선집은 총 열두 권이다. 이 중에 품절 도서는 2권이다. 《보들레르의 작품에 나타난 제2 재정기의 파리 / 보들레르의 몇 가지 모티프에 관하여 외》(황현산 · 김영옥 함께 옮김, 2010년)와 《모스크바 일기》(김남시 옮김, 2015년)다. 《브레히트와 유물론》도 한동안 품절 도서였다. 










 







* 발터 벤야민, 반성완 편역 《발터 벤야민의 문예이론》 (민음사, 1983년)

 

* [절판] 발터 벤야민, 최성만 · 김유동 함께 옮김 《독일 비애극의 원천》 (한길사, 2009년)



벤야민의 글을 선별하여 편집한 《발터 벤야민의 문예이론》의 초판 발행 연도는 1983년이다. 민음사 이데아 총서 시리즈에 속한 대부분 책은 절판되었거나 개정판으로 재출간되었다. 《발터 벤야민의 문예이론》은 처음 모습 그대로이며 여전히 건재하다. 이 책에 수록된 벤야민의 글들은 벤야민 선집에도 실려 있다. 그렇지만 오래된 책을 무시할 수 없다. 왜냐하면 《발터 벤야민의 문예이론》에 「보들레르의 몇 가지 모티브에 관해서」가 수록되어 있다. 벤야민의 보들레르론을 접할 수 있는 유일한 책이다.







벤야민 선집에 포함된 책은 아니지만, 벤야민의 논문 《독일 비애극의 원천》이 절판돼서 아쉽다. 벤야민은 프랑크푸르트대학 강사가 되기 위한 자격을 얻으려고 《독일 비애극의 원천》 집필에 착수한다. 비애극은 비극과 다른 개념으로 벤야민이 고안했다. 비애극(trauerspiel)은 비애(trauer)와 유희(spiel)가 만나서 생긴 용어다. 벤야민은 독일 바로크 시대의 문학과 예술 작품들뿐만 아니라 그 시대에 나온 온갖 문헌들을 수집, 분석하여 비애극의 특징과 형성 과정을 밝힌다. 







책방 주인(master)은 책을 읽으면서 철학에 숙달한(master) 분이다. 나는 그분과 20분 동안 철학과 책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나는 철학을 좋아하지만, 깊이 있게 공부하지 않는 게으른 딜레당트(dilettante)다. 책방 주인의 말을 경청했다. 그분이 한 말이 틀릴 수도 있다. 하지만 견해를 검증하듯이 대화하지 않았다. 나는 정확한 지식보다는 그분의 취향과 관심사를 알고 싶었다.


책방 주인은 내가 책을 고르는 데 방해했다고 생각했는지 거듭 사과했다. 나는 좋은 말씀을 해주셔서 감사하다고 말했다. 헌책방 주인도 책을 좋아하는 독자다. 좋은 책을 알아보는 안목이 있다. 책을 찾는 손님을 위해서 큐레이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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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anca 2026-10-12 10:1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 풍월당 리모델링한 이후로 안가봤는데 저렇게 바뀌었군요. 몇 년 전에 손열음 연주회 했을 때 갔었거든요. 클림트 서점도 재미있게 둘러봤어요. 헌책방 탐방기 대리만족합니다. 도록 저도 사고 싶을 떄 있는게 가격의 압박이 너무 심하더라고요. 요즘처럼 대화가 실종된 분위기에서 책방주인과의 대화도 정겹네요.

cyrus 2026-10-12 23:21   좋아요 1 | URL
예전 모습의 풍월당에 한 번도 가본 적이 없어요. 풍월당 강연도 참석해 보고 싶은데, 시간이 안 맞네요..ㅠㅠ 강남에 갈 일이 생기면 살라 푸가에 들러보려고 합니다.

카스피 2026-10-12 23: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서울에 있으면서도 회현역에 헌책방이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네요.시간나면 한번 가봐야 될것 같네요^^

곰곰생각하는발 2026-10-13 14: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
회횐역에 헌책방 있엇나요 ? 나 서울 사람인데 모르고 있었네요. 와우 !!!!!!!!
당장 가서 책구경ㅎ고 와야겠네요.요즘 헌책방 없어져서 여러 모로 상심이 컸는데 헌책방 다운 헌책방 생겨 기분이 좋네요. 알라딘 중고서점은 왠지 헌책방 분위기가 나지 않아서....
 




두루미(Me)


No. 6


풍월당 - 살라 푸가

2026년 10월 3일 토요일에 첫 방문



두루미는 가와우치 아리오(川內 有緖)의 《눈이 보이지 않는 친구와 예술을 보러 가다》(다다서재, 2023년)에서 만난 구절, ‘세계를 두루두루 보는 따뜻한 시선(205쪽)’에 영감을 얻어 만든 조어(造語)다. 


‘미’는 ‘아름다울 미(美)’와 ‘나’를 뜻하는 영어 ‘me’, 두 가지 의미를 지니고 있다. ‘두루미’는 혼자 전시회에 가서 예술 작품을 ‘두루두루 보는’ 경험, 예술을 즐기는 일상(dilettante)을 상징한다.





풍월당(風月堂)은 빌딩 숲 한가운데에 있는 음악의 정원이다. 클래식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꼭 한 번은 들러야 하는 곳이다. 2003년에 태어난 풍월당은 클래식 음반 가게였다. 음악의 정원을 가꾼 박종호 대표의 본업은 정신과 전문의다. 클래식 음악에 관한 칼럼을 쓰면서 클래식 음악 마니아로 알려졌다. 


시간이 지날수록 음악의 정원은 넓어지고 풍성해졌다. 세계적인 음악의 명인(名人)들이 풍월당을 방문했다. 그들이 방문객들에게 음악을 들려주는 순간, 정원에서 작은 연주회가 시작된다. 음악을 감상하면서 담소를 나눌 수 있는 카페 ‘로젠카발리에(Rozenkavalier)’가 있다. 로젠카발리에는 ‘장미의 기사’를 뜻하는 독일어다. 장미의 기사는 리하르트 슈트라우스(Richard Strauss)의 오페라 제목이다.







올해 초에 풍월당은 더 나은 음악의 정원으로 가꾸기 위해 길게 쉬었다. 바람이 선선해지는 무렵에 풍월당은 음악 감상실 겸 자료실 ‘살라 푸가(Sala Fuga)’로 새롭게 단장했다. ‘Sala’는 이탈리아어로 방을 뜻한다. 푸가는 하나의 성부(聲部)가 음을 연주하면 다음 성부가 먼저 연주된 음을 모방하면서 이어 나가는 곡조 형태다.







‘살라 푸가’는 10월 1일부터 올해 말까지 임시 개장 형태로 방문객들을 맞이한다. 이 기간에 무료로 이용할 수 있다. 푸가의 방이 열리는 날은 매주 목, 금, 토요일이다. 이용 시간은 1시간이다. 풍월당 직원들이 고른 음악을 들으면서 박종호 대표가 모으고 차곡차곡 정리한 책들과 음반들(비 판매용), 클래식 음악 관련 자료들을 살펴볼 수 있다.







음악의 정원에 입장하면 안내문과 《살라 푸가를 읽는 시간: 공간 곳곳에 새긴 음악과 문장들》이라는 소책자를 받는다. 이 소책자는 살라 푸가의 벽면 구조와 각각 벽면에 새겨진 문구들의 의미를 소개한다.







푸가의 방을 둘러보면서 제일 먼저 마주친 문구는 라틴어 문장 ‘Res Severa Verum Gradium’이다. 고대 로마의 스토아학파 철학자 세네카(Seneca)가 쓴 문장이다. 박종호 대표는 세네카의 문장을 ‘진정한 기쁨은 진지한 것이다’라고 풀어 썼다. 세네카가 생각하는 ‘진지함’은 어떤 것에 호기심을 느끼고, 오랫동안 톺아보면서 열중하는, 참된 내면 상태이다.







온전히 음악에 집중할 수 있는 감상실이 따로 있다. 커튼이 드리워진 여닫이문이 달린 방이며, 내부 조명이 어슴푸레하다. 명상하듯이 음악을 들을 수 있는 최적의 공간이다. 직원의 안내에 따라 입장할 수 있다. 턴테이블 옆에 뜻밖의 인물 조각상이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동화 작가로 유명한 덴마크의 소설가 안데르센(Hans Christian Andersen) 동상을 작게 만든 조각상이다.







푸가의 방에 들어온 방문객들에게 과자와 음료(커피, 보리차)가 제공된다. 접시와 찻잔, 커피추출기가 있는 부엌의 이름이 ‘로시니(Rossini)’다. 대식가인 이탈리아 음악가의 이름을 붙였다.

















[<읽어서 세계문학 속으로> 2026년 9월, 10월의 세계문학, 추천 독자: 조약돌]

[피터 박스올 <죽기 전에 꼭 읽어야 할 책 1001권> 개정판 411번째 책]

* 헤르만 헤세, 이영임 옮김 《유리알 유희》 (민음사, 2011년, 전 2권)



살라 푸가는 클래식 음악 명인(박종호 대표)의 정원이자 정신이 맑아지는 천국의 정원이다. 지난달에 읽기 시작한 헤르만 헤세(Hermann Hesse)의 소설 《유리알 유희》는 천국의 정원으로 이끌어준 입장권과 같은 책이다.


《유리알 유희》의 주인공이자 ‘유희 명인’ 요제프 크네히트(Josef Knechts)는 어린 시절에 음악 명인을 만난다. 음악 명인은 요제프의 정신적 성장에 도움을 준 스승이다. 두 사람은 음악에 관한 대화를 나누는데, 음악 명인은 요제프에게 푸가가 어떤 곡인지 알려준다.
















* 클라이브 웅거 해밀턴, 김형수 옮김 《클래식, 바로크 시대와의 만남: 바흐 . 헨델. 비발디의 시대》 (포노, 2012년)

 

* 김현철 《내가 사랑한 몬테베르디: 작품을 통해 바라본 몬테베르디의 예술 세계》 (음악세계, 2012년)




음악 명인은 바로크 시대에 풍미했던 음악가들의 곡을 좋아한다. 푸가를 진지하게 연구하여 정교하게 만든 바흐(Johann Sebastian Bach), 영국 바로크음악을 대표하는 헨리 퍼셀(Henry Purcell), 중세 음악과 르네상스 음악의 매력을 그대로 살리면서 새로운 이탈리아 바로크음악의 시작을 알린 클라우디오 몬테베르디(Claudio Monteverdi) 등이다.


박종호 명인의 서재에 《유리알 유희》를 포함한 헤세의 소설들이 꽂혀 있다. 명인은 책에 밑줄을 그으면서 읽었다. 명인이 어떤 문장에 밑줄을 그었는지 궁금했다.













 “명상할 때면 무언가 보았을 거야. 음악이 모습으로 나타난 거지. 마음이 내키면 그걸 그려 보게.”

 크네히트는 객실 책상 위에 종이 한 장과 연필이 놓여 있는 것을 보았다. 잠자리에 들기 전에 그는 음악이 변해서 자신에게 나타났던 형상을 그려 보려고 한다.

 

(헤르만 헤세, 이영임 옮김, 《유리알 유희 1》 중에서, 102쪽)



헤세는 색깔을 가지고 노는(Spiel mit farben) 화가다. 그는 《유리알 유희》의 음악 명인처럼 음악을 형상화하고, 색깔을 입히면서 그림을 그렸을 것이다. 이것이 헤세가 음악을 가지고 노는(Spiel mit Musik) 방식이다. 그에게 색과 음악은 놀이(유희)다.



















* 헤르만 헤세, 김윤미 옮김 《헤르만 헤세, 음악 위에 쓰다》 (북하우스, 2022년)

 

* 이신구 《헤세와 함께 음악이 흘렀다: 소나타로 읽는 헤세》 (세창미디어, 2021년)



《유리알 유희》를 읽으면서 《헤세와 함께 음악이 흘렀다》라는 책을 구매했는데, 저자는 오래전부터 헤세와 음악의 연관성을 연구해 온 독어독문학과 교수다. 《헤세와 함께 음악이 흘렀다》는 소설에 드러난 헤세의 음악 취향을 분석한 책이다. 헤세가 좋아한 음악가는 바흐, 모차르트(Wolfgang Amadeus Mozart), 쇼팽(Frédéric Chopin)이다. 이 세 명의 음악가는 소나타(모차르트, 쇼팽)와 푸가(바흐) 작품을 많이 남겼는데, 이들 곡의 공통점은 정교한 화음이다.







《헤르만 헤세, 음악 위에 쓰다》는 음악을 주제로 한 헤세의 글과 음악이 언급된 헤세의 문장들을 모은 책이다. 이 책에도 클래식 음악 명인이 남긴 형광펜 흔적을 확인할 수 있다. 클래식 음악 명인은 헤세의 삶을 소개한 글에도 줄을 그었다. 헤세의 문학 세계를 ‘악보 없는 음악’으로 비유한 내용에 공감했는지 분홍색 형광펜으로 문장 전체를 네모 상자에 담아서 별 모양 표시를 했다.







공간 이용 시간은 정해져 있지만, 방문객이 많지 않으면 조금 더 음악을 즐길 수 있다. 나는 책이 많은 곳으로 이동해야 해서 다음에 또 오기로 했다. 푸가의 정원에 흐르는 음악에 흠뻑 취했는지 입장권에 내 이름이 ‘최해송’으로 잘못 적혀 있는 것을 늦게 알았다.


내 이름의 ‘해’는 ‘바다 해(海)’ 자다. 내 이름을 처음 접한 사람들 대부분은 ‘혜성’으로 착각한다. 그래서 나는 처음 만난 사람들에게 이름을 말할 때 ‘바다 해’라고 강조한다. ‘해송’은 흥미로운 오자다. 노래를 뜻하는 영단어 song을 소리 내서 읽으면 ‘송’이다. 한자와 영어가 합친 ‘해송’은 ‘바다의 노래’로 풀어 쓸 수 있다. 
















* 클로드 드뷔시, 이세진 옮김 《안티 딜레당트 크로슈 씨: 프랑스 음악의 한 정신》 (포노, 2017년)

 

* 스테판 말라르메, 황현산 옮김 《시집》 (문학과지성사, 2005년)

 

* 스테판 말라르메, 김화영 옮김 《목신의 오후》 (민음사, 2016년)




바다를 소재로 한 클래식 음악 중에 드뷔시(Claude Debussy)의 <바다>라는 작품이 있다. <바다>는 고향시다. 작품 부제는 ‘관현악을 위한 3개의 교향적 스케치(소묘)’다. 드뷔시는 인상주의 음악가다. 자연을 보면서 찰나에 느끼는 인상을 그림 그리듯이 음악으로 표현하는 것이 인상주의 음악의 특징이다. 


드뷔시는 자신이 추구하는 음악이 무엇인지 소신껏 글로 써서 발표했다. 그는 본인 스스로 딜레당트(dilettante)로 여겼다. 딜레당트는 ‘즐기다’를 뜻하는 이탈리아어 ‘dilettare’에서 유래한 말이다. 딜레당트는 전문적으로 배우지 않고도 학문과 예술을 즐기는 사람이다. 드뷔시에게 음악은 ‘겸허히 즐거움을 주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예술이다. 그래서 그는 전문가에 속하는 음악 비평가들의 현학적인 감상에 동의하지 않았다. 그는 감상자의 자유를 존중하며 솔직하고 성실한 ‘인상(impressions)’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바다>는 드뷔시의 대표작 <목신의 오후 전주곡>, <달빛>, <아마빛 머리의 소녀>와 더불어 내가 좋아하는 곡이다. <목신의 오후 전주곡>은 프랑스의 시인 말라르메(Stéphane Mallarmé)의 시 <목신의 오후>에 선율을 입힌 교향시다. 나른한 선율이 이 곡의 매력이다. 살라 푸가에서 듣고 싶은 곡을 신청할 수 있다면, 나는 드뷔시의 음악을 제일 먼저 고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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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달(月, moon / month)이 지는 마지막 금요일 밤이면

정원에서(In the garden) 달무리가 생긴다.


정원에 뜨는 달은 우리의 참모습을 밝혀주는 책이다.

정원에 모인 독자들은 책에 둘러앉아 자신의 감상을 진솔하게 말한다.

정원에 생긴 달무리는 독서 모임이다. 







달무리

(사진 출처: 위키백과)




독서 모임 <읽어서 세계문학 속으로>(줄임말 ‘세속’)는 

카페 <인더가든>(In the garden)에 뜨는 달무리다.

한 달을 갈무리하는 마지막 금요일에 뜨는 달무리다.




<인더가든>은 책이 있는 카페이다. 그러나 책에 눈길을 주는 손님은 없다. 카페에 있는 모든 책은 가만한 장식품이 되었다. 그러나 가만히 책장을 살펴보면 흥미로운 책들을 만날 수 있다. 내가 ‘정원의 서재’를 유심히 관찰하면서 만난 책들은 대부분 문학 작품들이다. 그리고 출간된 지 오래돼서 절판되었다. 그래서 나는 <인더가든>이 ‘문학의 정원’이라고 생각한다.







문학의 정원에 희귀한 책이 있다. 한 권이 아니라 여덟 권이다. 책의 이름은 ‘헤르만 헤세(Hermann Hesse) 전집’이다. ‘성창(成昌)출판사’에서 태어난 책이다. 판권장에 적힌 초판 발행 연도는 1990년이다. 양장본이며 책 전체를 보호하는 케이스가 있다. 







총 8권으로 구성된 헤세 전집의 정가는 5만 원이다. 1990년대 물가 수준을 생각하면 비싼 편이다. 케이스에 구김 흔적이 남아 있지만, 책 상태는 아주 좋다. 책은 나이를 먹으면 종이 색깔이 누렇게 변한다. 하지만 헤세 전집의 종이는 심하게 누렇지 않았다. 많이 펼쳐본 적이 없어서 그런지 손때도 묻지 않았다.


헤세 전집에 실린 작품들은 다음과 같다.




1권 <데미안, 호반의 아틀리에>


2권 <지와 사랑>


3권 <유리알 유희 1부>


4권 <유리알 유희 2부, 싯다르타>


5권 <향수, 단편집>


6권 <수레바퀴 아래서, 크눌프, 라디델, 일기>


7권 <사랑의 3중주, 시집>


8권 <황야의 이리, 우화집, 동화집, 수상(隨想)>
















* 헤르만 헤세, 윤순식 옮김 《로스할데》 (현대문학, 2013년)




<호반의 아틀리에>는 헤세의 네 번째 장편소설 《로스할데》(Rosshalde, 1914년)다. 소설의 주인공은 잘못된 결혼으로 인해 고통받지만, 창작에 몰두하는 화가다. ‘로스할데’는 화가 부부가 사는 저택 이름이다. 화가는 헤세의 분신이다. 실제로 헤세는 연상의 첫 번째 아내와 별거 생활을 하다가 이혼했다.


















* 헤르만 헤세, 임홍배 옮김 《나르치스와 골드문트》 (민음사, 2002년)


* 헤르만 헤세, 김이섭 옮김 《수레바퀴와 아래서》 (민음사, 2001년)




<지와 사랑>의 원제는 《나르치스와 골드문트》(1930년)다. ‘지’는 지성(知性)을 의미한다. 1967년 연수사(硏修社)라는 출판사에서 태어난 《나르찌스와 골드문트》의 부제가 ‘지성과 사랑’이다. 그 이후로 여러 출판사가 《나르치스와 골드문트》 국역본 제목을 ‘지와 사랑’으로 쓰기 시작했다. 나르치스가 이성과 지성을 중시하는 인물이라면, 골드문트는 사랑과 감정을 중시한다. 두 사람은 수도원에 입학한 학생으로 만나 친구가 되지만, 삶의 태도는 달랐다. 나르치스는 엄격한 규율이 있는 수도원에서 생활하면서 공부에 매진한다. 골드문트는 갑갑한 수도원을 떠나 방랑 생활을 한다. 골드문트는 헤세의 유년 시절이 반영된 인물이다. 헤세는 열네 살에 수도원 학교에 입학했으나 속박된 생활을 견디지 못해 입학한 지 9개월 만에 퇴학한다. 헤세는 시인이 되고 싶었다. 《나르치스와 골드문트》를 쓰기 전에 이미 헤세는 학생의 자율적 성장을 막는 교육제도를 비판한 소설을 썼다. 그 소설이 바로 《수레바퀴 아래서》(1906년)다.












 







* 헤르만 헤세, 원당희 옮김 《페터 카멘친트》 (민음사, 2017년)


* 헤르만 헤세, 황종민 옮김 《게르트루트》 (현대문학, 2013년)




<향수>의 원제는 《페터 카멘친트》(Peter Camenzind, 1904년)다. 헤세의 첫 번째 장편소설이며 헤세의 초기 문학의 시작점이다. 5권의 <단편집>(Novellette)에 다섯 편의 노벨레가 수록되었다. <사랑의 3중주>의 원제는 《게르트루트》(Gertrud, 1910년)이다. 한쪽 다리가 불편한 음악가가 주인공이다. 그가 사랑에 빠지는 소프라노 가수의 이름이 게르트루트다.
















* [eBook] 헤르만 헤세, 이민정 옮김 《라디델 허영과 체면》 (본투비, 2026년)




<라디델>(Ladidel)은 1909년에 발표된 헤세의 중편소설이다. 라디델은 자신이 원하는 직업을 찾지 못해 방황하는 소설의 주인공이다. 많이 알려지지 않은 헤세의 초기작이다. 새로 나온 번역본은 없고, 전자책은 있다. 제목은 《라디델 허영과 체면》이다.































* 헤르만 헤세, 이노은 옮김 《크눌프》 (민음사, 2004년)


* 헤르만 헤세, 전영애 옮김 《데미안》 (민음사, 2000년)


[피터 박스올 <죽기 전에 꼭 읽어야 할 책 1001권> 개정판 278번째 책]

* 헤르만 헤세, 박병덕 옮김 《싯다르타》 (민음사, 2002년)


[피터 박스올 <죽기 전에 꼭 읽어야 할 책 1001권> 개정판 310번째 책]

* 헤르만 헤세, 김누리 옮김 《황야의 이리》 (민음사, 2002년)




사회에 적응하지 못해서 방황과 방랑을 경험하고, ‘자기 자신(자아)에 이르는 길’을 찾게 되는 인물이 등장하는 헤세의 소설은 ‘성장소설’이다. 성장소설로 분류되는 작품들이 《수레바퀴 아래서》, 《크눌프》(Knulp, 1915년), 《데미안》(Demian, 1919년), 《싯다르타》(Siddhartha, 1922년), 《황야의 이리》(Der Steppenwolf, 1927년)이다. <라디델>은 이 다섯 편의 ‘문학적인 성과’를 맺게 해준 뿌리와 같은 소설이다. 


<라디델> 최초의 번역문은 1969년에 나온 <헤르만 헷세 전집>(대양서적) 2권에 있다. 사실 성창출판사의 헤세 전집은 대양서적(大洋書籍)의 헤세 전집을 복제한 출판물이다. 







1969년 헤세 전집 번역에 8명의 독문학자가 참여했다. 이들의 이름은 성창출판사의 헤세 전집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6, 70년대에 출간된 독일 문학 작품들은 주로 독어독문학 교수들이 번역했는데, 곽복록(1922~2011) 교수가 번역한 책들은 지금도 나오고 있다. 헤세 전집 수록작 중에 곽 교수가 번역한 작품은 <호반의 아틀리에> 한 편뿐이다.


성창출판사 《데미안》은 김정진 교수가 번역했다. 이 소설에서 가장 유명한 문장은 주인공 에밀 싱클레어(Emil Sinclair)가 학교 쉬는 시간에 우연히 발견한 쪽지에 적힌 문구다. 이 쪽지를 쓴 사람은 싱클레어에게 도움을 주는 데미안이다.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 알은 세계이다. 태어나려는 자는 한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 새는 신에게로 날아간다. 신의 이름은 압락사스다.


 Der Vogel kämpft sich aus dem Ei. Das Ei ist die Welt. Wer geboren werden will, muß eine Welt zerstören. Der Vogel fliegt zu Gott. Der Gott heißt Abraxas.


(《데미안》 중에서, 전영애 옮김, 123쪽)



김정진 교수는 이 명문장의 첫 구절을 이렇게 번역했다.







새는 알에서 벗어나려고 바둥거렸다. 

(107쪽)




‘알에서 벗어나려고 바둥거렸다’라는 문장을 눈으로 씹어서 읽으면 얼얼하다. 오히려 유명해진 문장이 밋밋하다. 나를 둘러싼 세계를 혼자서 한 번에 깨기 어렵다. 알껍데기에 여러 번 부딪히는 새가 고통을 느끼지 않고서 세상 밖으로 나올 수 없듯이 인간 역시 어떠한 일을 성취하려면 그만큼의 성장통을 참아야 한다. 바둥거리는 몸짓은 쉼 없이 노력하는 행위인 동시에 성장통을 앓는 존재의 모습이다.


















[<읽어서 세계문학 속으로> 2026년 9월, 10월의 세계문학, 추천 독자: 조약돌]

[피터 박스올 <죽기 전에 꼭 읽어야 할 책 1001권> 개정판 411번째 책]

* 헤르만 헤세, 이영임 옮김 《유리알 유희》 (민음사, 2011년, 전 2권)


* [품절] 헤르만 헤세, 박계수 옮김 《유리알 유희》 (현대문학, 2013년)




8월 막바지부터 헤세의 소설들을 읽기 시작했다. 그 이유가 <세속> 9월과 10월의 세계문학 작품이 헤세 최후의 대작 《유리알 유희》이기 때문이다. 9월 25일 추석이 9월 마지막 금요일이었다. 연휴인 이날에 모임을 진행하기 어렵고, 한 달 만에 《유리알 유희》 두 권을 완독하는 것은 무리라고 판단해서 모임 날짜를 10월 2일 금요일로 변경했다. 한 주 미뤄진 모임은 《유리알 유희》 1권을 읽은 독자들이 만든다. 《유리알 유희》 2권 모임 날짜는 10월 30일 금요일이다. 2권 모임 장소는 세속 독자인 ‘읽고 글을 쓰는 인간’ 성은님이 운영하는 카페 <그라디언트>다.







《유리알 유희》를 추천한 독자는 조약돌님이다. 약돌님은 《수레바퀴 아래서》와 《싯다르타》를 읽은 후로 헤세의 소설을 좋아하게 되었다. 그래서 헤세 작품 중에 가장 높게 평가받는 《유리알 유희》를 같이 읽어보자고 제안했다. 다음 주 모임에 약돌님을 만나면 《수레바퀴 아래서》와 《싯다르타》의 어떤 점이 좋았는지 물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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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 2026-09-28 10:3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유리알 유희는 60년대 을유문화사본으로 접했는데 9포인트 2단 세로읽기라 책 내용도 쉽지 않아서 결국 읽다가 포기한 생각이 나네요ㅜ.ㅜ

cyrus 2026-10-06 06:54   좋아요 0 | URL
과거에 출간된 <유리알 유희> 번역본이 얼마나 있는지 알아봤는데, 의외로 많이 있더라고요. ^^

서니데이 2026-09-28 21:4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cyrus님 추석연휴 잘 보내셨나요.
헤르만 헤세의 책은 우리나라에 번역된 책도 여러권일 것 같아 독서모임하기에도 좋을 것 같아요. 달무리 사진도 근사하네요.
잘 읽었습니다. 좋은하루되세요.^^

cyrus 2026-10-06 06:57   좋아요 1 | URL
네, 추석 연휴 잘 지냈습니다. ^^ 달무리 사진은 제가 찍은 건 아니구요, 스마트폰으로 촬영하면 예쁘게 나오지 못해요.. ㅎㅎㅎ
 













대구 독서 모임

읽어서 세계문학 속으로




8월의 세계문학





존 르 카레

김석희 옮김

《추운 나라에서 돌아온 스파이》

열린책들

2009년



2026년 8월 28일 금요일

저녁 8시~10시

장소: 인더가든













[북 큐레이터]

천성은(8월 세계문학 추천)

김성현



[진행, 북클럽투르기, 윤색]

최해성



[사진]

천성은

김성현

최해성







[곁두리(간식과 음료)]

인더가든

(모임이 있는 날이면 차, 커피 드립백을 넉넉히 챙겨오는) 김성현



[금요일 밤에 머무른 독자]

천성은, 김성현, 정현정, 최해성





※ 북클럽투르기(bookclubturgy, bookclubtur+記)


 

독서 모임 후기를 쓰는 사람


찰나에 흩어져서 사라지는

독자들의 대화를 그러모으고 메꾸는 엮은이.


‘북클럽투르기’는 

공연 제작을 위해 희곡과 대본을 전체적으로 분석하는 사람을 뜻하는

‘드라마투르기(dramaturgy)’에서 따온 말입니다.







오랜만에 제가 인더가든에 일찍 도착했습니다. 이날을 위해 연차 휴가를 냈어요. 아침 일찍 서울에 갔다가 모임 시작 두 시간 전에 대구로 돌아왔습니다.







성현 님이 두 번째로 인더가든에 도착했습니다. 성현 님은 독서 모임 <고라니 울고>의 모든 일정을 계획하고, 지정 도서를 고르는 일을 도맡을 정도로 바지런합니다. 모임에 참석하는 분들에게 주려고 떡과 커피 드립백을 챙겨왔습니다.

















* [절판] 존 르 카레, 김석희 · 최용준 옮김 《추운 나라에서 돌아온 스파이 + 죽은 자에게 걸려 온 전화》 (열린책들, 2017년)


* [절판] 존 르 카레, 최용준 옮김 《죽은 자에게 걸려 온 전화》 (열린책들, 2007년)



성현 님이 가지고 있는 책이 제 눈길을 잡아당겼습니다. 서점에서 만날 수 없는 특별한 책이거든요. 성현 님의 책은 절판본입니다. <읽어서 세계문학 속으로>(줄임말 ‘세속’) 8월의 작품으로 선정된 존 르 카레(John Le Carre)의 소설 《추운 나라에서 돌아온 스파이》(줄임말 ‘스파이’)와 작가의 첫 소설 《죽은 자에게 걸려 온 전화》(줄임말 ‘전화’)가 합친 양장본이었습니다.  《전화》는 영국 정보부(MI6) 조직원 조지 스마일리(George Smiley)가 처음으로 등장한 소설입니다. 스마일리는 《스파이》에서 조연으로 등장합니다. 양장 합본 이전에 따로 출간된 르 카레의 데뷔작 《죽은 자에게 걸려 온 전화》도 절판되었습니다.


성현 님이 특별한 책을 가지게 된 배경은 게임이었습니다. 성현 님은 <콜 오브 듀티>(Call of Duty)라는 게임을 좋아합니다. <콜 오브 듀티>는 제2차 세계대전을 배경으로 한 일인칭 슈팅 게임입니다. 성현 님은 게임을 하면서 제2차 세계대전과 냉전 시대에 흥미를 느꼈습니다. 20세기 세계사의 관심 폭을 넓히는 중에 르 카레의 소설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 [절판] 톰 클랜시, 김홍래 · 안연모 옮김 《레인보우 식스》 (전 4권, 노블하우스, 2004년)



성현 님이 즐겨 했던 게임 중 하나가 <레인보우 식스>(Rainbow Six)입니다. 이 게임 역시 일인칭 슈팅 게임입니다. ‘레인보우’는 다국적 대테러 부대입니다. 게임의 원작은 톰 클랜시(Tom Clancy)의 동명 소설입니다. 톰 클랜시는 군사 및 무기에 관한 지식을 수집한 ‘밀리터리 덕후’입니다. 그가 쓴 첩보 소설은 테크노 스릴러 또는 밀리터리 스릴러로 분류됩니다.








《스파이》를 추천한 성은 님의 별명은 ‘읽는 인간’입니다. 하지만 제가 아는 성은 님은 책 읽고 글 쓰는 인간입니다. 성은 님은 경북 칠곡군 동명에 있는 브런치 카페 <그라디언트>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그곳에서 여러 개의 독서 모임을 진행합니다. 바쁜 와중에도 <세속>과 <그라디언트> 독서 모임 지정 도서의 서평을 씁니다.


현정 님이 가장 좋아하는 배우는 맷 데이먼(Matt Damon)입니다. 그가 나온 영화는 거의 다 봤다고 했습니다. 당연히 올 여름에 개봉한 <오디세이>도 봤습니다. 과거에 맷 데이먼은 기억을 잃은 전직 CIA 특수요원이 주인공인 영화에 출연했습니다. 그 영화가 바로 ‘제이슨 본(Jason Bourne) 3부작’입니다. 1부는 <본 아이덴티티>(2002년), 2부는 <본 슈프리머시>(2004년), 3부는 <본 얼티메이텀>(2007년)입니다. 
















[대구 독서 모임 <고라니 울고> ‘두꺼운 책 읽기’ 지정 도서(2026년 9~10월 모임), 추천 독자 & 모임장: 김성현]

* 호메로스, 이준석 옮김 《오뒷세이아》 (아카넷, 2023년)



재미있게도 영화에 묘사된 오디세우스(Odysseus)도 완전히 기억을 잃은 상태로 칼립소(Calypso, 샤를리즈 테론 분)가 있는 섬에서 7년 동안 지냅니다. 칼립소는 오디세우스를 살리려고 ‘로터스(lotus)’라는 약초를 먹입니다. 하지만 그 약초는 기억을 잊게 하는 부작용이 있어요. 호메로스(Homer)의 서사시 《오뒷세이아》에서는 오디세우스의 부하들이 열매로 된 로터스를 먹습니다. 로터스에 중독된 부하들은 고향에 대한 기억을 잊어버려 고국으로 돌아갈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 [절판] 로버트 러들럼, 최필원 옮김 《본 아이덴티티》 (전 2권, 문학동네, 2011년)

 

* [절판] 로버트 러들럼, 남명성 옮김 《본 슈프리머시》 (전 2권, 문학동네, 2012년)

 

* [절판] 로버트 러들럼, 조영학 옮김 《본 얼티메이텀》 (전 2권, 문학동네, 2016년)



제이슨 본 시리즈의 원작은 로버트 러들럼(Robert Ludlum)의 첩보 소설입니다. 영화가 유명해서 원작 소설이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들이 있을 거예요. 제이슨 본 시리즈의 원작 소설은 1992년에 《잃어버린 얼굴》(서계인 옮김)이라는 제목으로 번역 출간되었습니다. 이 책을 펴낸 출판사는 90년대 국내 출판계를 주름잡은 ‘고려원’입니다. 《잃어버린 얼굴》이 출간된 지 10년 후에 영화 <본 아이덴티티>가 개봉되었습니다. 제이슨 본 3부작 영화가 모두 개봉한 후에 원작 소설이 ‘문학동네’에서 다시 출간되었습니다. 그러나 3부작 모두 현재 절판되었습니다.


















[대구 독서 모임 <우주지감> ‘이 작가의 책’ 2019년 3월 도서, 추천 독자 & 모임장: ‘읽고 쓰는 인간’ 천성은]

* [품절] 오르한 파묵, 이난아 옮김 《소설과 소설가: 오르한 파묵의 하버드대 강연록》 (민음사, 2012년)

 


* 제임스 우드, 설준규 · 설연지 함께 옮김 《소설은 어떻게 작동하는가》 (창비, 2011년)

 


[대구 독서 모임 <읽어서 세계문학 속으로> 2026년 6월의 세계문학, 추천 독자: 최해성)

* 제임스 우드, 노지양 옮김 《인생에 가장 가까운 것: 삶과 문학, 읽고 쓰기에 관한 네 번의 강의》 (아를, 2025년)



성은 님은 튀르키예의 작가 오르한 파묵(Orhan Pamuk)의 소설 읽기 방식에 맞춰 《스파이》를 읽었습니다. 파묵은 독자들이 독서의 즐거움을 느끼기 위해 소설 속에 ‘감춰진 중심부’를 찾는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독자들은 ‘소설의 모든 세부 사항’을 기억하듯이 읽습니다(《소설과 소설가》, 30~31쪽). 긴 글보다 짧은 글을 선호하고, 글을 빨리 읽는 것에 익숙한 독자들은 ‘세부 사항’을 주의 깊게 관찰하면서 읽는 방식이 힘겨울 수 있습니다. 작가들은 관찰의 대가입니다. 사소한 사물이나 인물을 그냥 지나치지 않고 톺아 봅니다. 오랫동안 관찰하면서 느낀 생각들이나 새로이 알게 된 사실을 토대로 이야기를 써 내려갑니다. 파묵은 ‘소설을 만드는 모든 재료’가 소설의 중심부라고 말합니다.








영국의 비평가 제임스 우드(James Wood)는 소설의 세부 사항을 ‘즐기고 소비하고 곱씹는(《소설은 어떻게 작동하는가》, 83쪽)’ 독자입니다. 그는 문학 에세이 《소설은 어떻게 작동하는가》와 《인생에 가장 가까운 것》에서 세부 사항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세부 사항을 읽는 것은 소설 읽는 독자가 여백에 주석을 다는 것과 같습니다. 독자의 흥미를 돋우는 세부 사항은 사소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소설을 쓴 작가들도 미처 생각하지 못한 새로운 해석으로 자라는 새싹입니다. 절대로 무관심의 눈빛으로 밟지 마세요. 


비밀 작전을 수행하는 첩보원은 자신의 실체를 꼭꼭 숨기고,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인 척하고 살아갑니다. 자신의 감정을 얼굴에 드러내서도 안 됩니다. 하지만 첩보원도 빈틈이 있는 인간입니다. 작전 수행 중에 자신이 예상하지 못한 상황이 생기면 당황합니다. 《스파이》의 주인공인 영국 정보부 소속 첩보원 엘릭 리머스(Alec Leamas)는 자신이 국가 기밀 보안법을 위반한 수배자가 되었다는 사실을 아는 순간, 두려움을 느낍니다(140쪽). 저는 이 장면이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중요한 ‘세부 사항’이라고 생각해요. 성은 님의 《스파이》 서평에 나온 표현을 빌리자면, 리머스가 순간적으로 두려움을 느끼는 모습은 ‘인간적인 민낯’입니다. 기만술을 잘 쓰고 정신력이 강한 첩보원도 불확실한 상황에 맞닥뜨리면 흔들립니다.

















* 존 르 카레, 이종인 옮김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 (열린책들, 2005년)

 

[피터 박스올 <죽기 전에 꼭 읽어야 할 책 1001권> 개정판 726번째 책]

* [품절] 존 르 카레, 조영학 옮김 《스마일리의 사람들》 (RHK, 2013년)

















* [개정판] 줄리언 시먼스, 김명남 옮김 《블러디 머더: 추리 소설에서 범죄 소설로의 역사》 (우연한지식, 2026년)

 

* [구판, 절판] 줄리언 시먼스, 김명남 옮김 《블러디 머더: 추리 소설에서 범죄 소설로의 역사》 (을유문화사, 2017년)



르 카레는 스마일리가 다시 등장하는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와 《스마일리의 사람들》을 썼습니다. 《스파이》가 아주 잘 쓴 소설이라서 그런 것일까요? 영국의 추리소설가 줄리언 시먼스(Julian Symons)는 《스파이》 이후에 나온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와 《스마일리의 사람들》이 실망스러웠다고 혹평합니다. 글이 지나치게 장황하고, 불필요하다고 느낄 정도로 애매한 표현이 늘어났다고 지적합니다.
















* 믹 헤런, 권영주 옮김 《슬로 호시스》 (비채, 2026년)




냉전 시대가 끝난 이후부터 첩보 소설의 인기는 식어갔습니다. 국내에 번역된 첩보 소설과 스릴러 소설들은 소수의 마니아만 보게 되고, 판매 부수가 낮으면 조용히 절판됩니다. 한동안 잊힌 첩보 소설은 영화, 드라마, 게임으로 재탄생된 덕분에 다시금 대중들의 주목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대중은 첩보물 하면 소설보다는 영상 매체를 더 많이 떠올립니다. 


첩보 영화와 드라마가 잘 돼야 원작도 같이 주목받습니다. 2022년 OTT(Over-the-top media service) 서비스인 애플TV(Apple TV)에서 방영된 드라마 <슬로 호시스>(Slow Horses)는 올해로 시즌 6까지 제작 편성될 정도로 인기 있는 첩보 드라마입니다. 동명의 원작 소설은 2010년에 발표되었고, 최근에 번역 출간되었습니다.


번역본 띠지에 작가 믹 헤런(Mick Herron)을 ‘우리 시대의 르 카레’라고 소개한 문구가 있습니다. 과장된 문구가 아닙니다. 실제로 믹 헤런은 르 카레의 애독자입니다. 《슬로 호시스》의 주인공 잭슨 램(Jackson Lamb)은 영국 보안국(MI5)에서 오랫동안 일한 첩보원입니다. 그는 ‘슬라우 하우스’라는 보안국의 비공식적 부서를 맡고 있습니다. 작전 수행 중에 실수를 해서 처벌받았거나 무능력하다고 평가받은 요원들은 슬라우 하우스에 발령받습니다. ‘슬로 호시스’는 ‘느린 말(馬)들’이라는 뜻입니다. 재빠르고 날쌘 첩보원과 상반되는 이미지입니다. 슬로 호시스는 슬라우 하우스에 소속된 능력 미달의 요원들을 비하하는 의미가 담긴 별명입니다. 








작가가 잭슨 램을 만들 때 참고한 캐릭터가 조지 스마일리입니다. 영화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의 조지 스마일리를 연기한 배우는 게리 올드먼(Gary Oldman)입니다. 재미있게도 게리 올드먼이 드라마 <슬로 호시스>의 잭슨 램을 연기했습니다.






<독서 모임 후기 제목에 대한 주석>

















* [절판] 이언 플레밍, 권도희 옮김 《나를 사랑한 스파이》 (뿔, 2011년)



독서 모임 후기 제목은 이언 플레밍(Ian Fleming)의 ‘007시리즈’ 중 하나인 《나를 사랑한 스파이》(The Spy Who Loved Me, 1962년)에서 따온 것입니다. 007(Double O seven)은 MI6 첩보원 제임스 본드(James Bond)의 코드명입니다. 영화 <나를 사랑한 스파이>는 1977년에 개봉되었고, 본드를 연기한 배우는 로저 무어(Roger Moore)입니다.

 

이언 플레밍이 직접 쓴 007시리즈는 장편과 단편집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발표된 작품은 총 14편입니다. 국내에 정식 번역되어 출간된 007시리즈는 《나를 사랑한 스파이》를 포함해서 여섯 권입니다. 나머지 다섯 권은 《카지노 로얄》, 《죽느냐 사느냐》, 《퀀텀 오브 솔러스》(단편 전집), 《다이아몬드는 영원히》, 《황금총을 가진 사나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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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 2026-09-22 08:5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추운 나라에서 온 스파이는 007 시리와는 대척되는 지점의 스파이 소설이지요.이언 플레밍이나 존 르 까레 둘 모두 대전시절 정보부 조식에 속했었지만 이후 그들이 쓴 스파이 소설은 오락용으로 스파이 소설과 리얼리티 스파이 소설로 확연히 나뉘게 됩니다.물론 초반 인기는 영화화에 성공한 007시리즈가 더 많았지만 문학사적 가치는 르 카레의 작품의 더 높다는 것을 누구도 부인하기 힘들죠.
일반적으로 스파이 소설의 명작이자 르 카레의 대표작으로 추우 나라에서 온 스파이를 소개하고 있지만 실제 전작인 죽은자에게서 온 전화를 먼저 읽어야 추운 나라에서 온 스파이의 내용이 이해되기 쉽습니다.(사실 두 작품은 1.2부의 개념이라고 보면 됨)

하지만 한국에선 인지도가 높은 추운 나라에서 온 스파이만 그간 번역했는데 실제 열린책들에서도 2006년에 추우나라에서 온 스파이를 번역하고 2007년에서야 죽은자에게서 온 전화를 번역했을 정되까요.
대부분 열린 책들의 죽은 자에게 온 전화가 최초 번역으로 알고들 계신데 실제는 1981년 현대문예(?)에서 나온 사자에게 걸려온 전화일 겁니다.제가 이 책을 갖고 있는데 과거 추운나라에서 온 스파이를 읽은 후에 우연찮게 헌책방에서 이 책을 구해 읽어보니 그제서야 추운 나라 스파잉속 내용들이 어떻게 흐르게 되었는지 이해가 가더군요.



cyrus 2026-09-24 18:43   좋아요 0 | URL
을유문화사에서 출간된 줄리언 시먼스의 <블러디 머더> 부록에 <추운 나라에 돌아온 스파이> 번역본이 언급되어 있는데, 생각보다 많았어요. 1965년에 ‘세흥문화사’와 ‘휘문출판사’에서 나왔고, 1974년 하서출판사, 1979년 동서문화사, 1989년 해문출판사에서 출간되었어요. 카스피님이 언급하신 1981년 역본은 언급되지 않았어요. 아마도 <블러디 머더> 역자와 편집자가 미처 발견하지 못했을 수도 있겠어요. ^^

카스피 2026-09-28 09:04   좋아요 0 | URL
오 그렇군요.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살리에르 2026-09-27 23:1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같은 대구에 좋은 독서 모임이 있네요. 참여하기는 힘들겠지만 기억해두겠습니다^^ 이번에 책들은 저도 좋아하는 책들이네요. 다 재미있는 책들입니다..^^

cyrus 2026-09-28 06:49   좋아요 0 | URL
독서 모임에 꾸준히 참석하는 분들 덕분에 잘 유지되고 있습니다. ^^
 
수학의 유희 - 퍼즐과 역설에 관한 위대한 문제들 ㅣ Philos 시리즈 51
마틴 가드너 지음, 김영서 옮김, 김민형 해제 / arte(아르테) / 202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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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학자는 수학(數學)을 수학(修學)한다.


학수(學修)하는 수학자는

자신이 풀지 못한 문제를

동료 수학자들이 풀어주기를 학수(鶴首)한다.


숫자와 기호가 잔뜩 적힌 수학 문제를 만나면 어떻게 푸는지 몰라서 난감하다.

하지만 수학자들은 어려운 문제를 만나도 유열(流悅)하다.

그들은 문제의 해답을 찾거나 문제를 만드는 일에 희열(喜悅)하다.

숫자와 기호는 수학자들이 공책을 펼쳐 놓고 만지작거리는 장난감(toy)이다. 



수학 장난감은 수학자의 전유물이 아니다. 깊이 생각하면서 문제를 느긋하게 푸는 것을 좋아한다면 누구든지 가지고 놀 수 있다. 수학을 싫어하는 사람은 처음부터 수학을 잘못 만났다. 수학 교수들이 상아탑에 가둬놓은 수학 장난감은 학교라는 감옥으로 옮긴다. 갑갑한 공부 지옥에 갇힌 학생들은 짧은 시간 안에 수학 문제를 빨리 푸는 연습을 반복한다. 문제를 천천히 풀 수 있는 자유를 누리지 못한다.


마틴 가드너(Martin Gardner)는 사람들과 어울리지 못하고, 상아탑과 학교에서 썩히는 수학을 구출한 수학자다. 가드너는 1956년부터 1981년까지 과학 잡지 《사이언티픽 아메리칸》(Scientific American)에 칼럼을 썼다. 칼럼 제목은 <수학 게임(Mathematical Games)>이다. <수학 게임>은 ‘눈으로 보는 칼럼’이 아니다. ‘머리를 굴려야 하는’ 칼럼이다. 가드너는 <수학 게임>에 자신이 직접 만들었거나, 다른 사람들이 만든 수학 퀴즈와 퍼즐을 소개했다. <수학 게임>은 수학을 전문적으로 배우지 않은 사람들도 참여할 수 있다. 문제를 푼 구독자는 해법을 정리한 편지를 써서 가드너에게 보냈다.







가드너는 유희 수학의 명인(名人)이다. 가드너가 태어나기 전에, 유희 수학의 명인들이 있었다.《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의 작가 루이스 캐럴(Lewis Carrol)은 본명으로 수학 서적을 집필한 수학자였으며 어린이들을 위한 수학 퍼즐을 만든 유희 수학의 명인이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의 내용 곳곳에 수학적 개념과 수학 이론들이 숨어 있다. 가드너는 앨리스 연구의 명인으로도 유명하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와 후속작 《거울 나라의 앨리스》를 탐독하여 엄청난 양의 주석을 썼고, 주석이 달린《앨리스》를 출간했다. 캐럴은 언어유희의 명인이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 다양한 형식의 언어유희가 적용된 문장들이 튀어나온다. 가드너도 칼럼을 쓰면서 종종 언어유희를 구사했다. 언어유희를 주제로 한 칼럼을 썼는데, 《수학의 유희》 3장이 된 칼럼의 주제는 ‘회문(回文)’이다. 회문은 앞으로 읽어도, 뒤로 읽어도 철자가 같은 단어다.







《수학의 유희》는 가드너가 가려 뽑은 ‘최고의 칼럼’ 50편이 실린 ‘수학 게임 앨범’이다. 1990년대 초반에 가드너의 수학 칼럼들을 선별하여 편집한 두 권의 책이 출간된 적이 있다. 《이야기 파라독스》(국립국어원이 정한 외래어표기법에 따르면 ‘패러독스’다. 번역어는 ‘역설’이다)와 《이야기 수학 퍼즐 아하!》(초판본 제목은 《아하! 바로 그거야》였고, 제목이 바뀐 책은 개정판이다)다. 











이 책들이 나온 시기에 대학수학(修學)능력시험과 논술고사가 본격적으로 시행되었다. 수학을 게임하듯이 즐기고 싶은 독자들이 만나야 할 가드너의 수학 칼럼 모음집은 어린이와 청소년들의 논리력과 수리력을 향상하는 데 도움을 주는 교양 서적으로 둔갑했다.


책에 실린 각각의 칼럼에 ‘부록’과 ‘해답’이 덧붙여 있다. 부록이 없는 칼럼도 있다. 부록은 가드너의 칼럼을 보충하는 주석이다. 《수학의 유희》는 ‘주석 달린 <수학 게임>’이다. 부록은 칼럼에 대한 반응이 담긴 구독자의 편지나 자신의 견해에 반박한 학자들이 보낸 편지 내용이다. 가드너는 자신의 잘못된 견해를 정확하게 지적한 구독자의 편지도 공개할 정도로 오류를 자정(自淨)하는 일을 소홀히 하지 않았다. 가드너는 한 편의 잡문에 가까울 정도로 주석을 길게 쓴다. 한 장에 차지한 ‘부록’의 분량이 칼럼 본문보다 많은 편이다.


《수학의 유희》는 유유히 읽어야 하는 책이다. 해답이 궁금해서 해법 과정을 생략한 채 읽는 것은 시간에 쫓기어 수학 문제를 푸는 상황과 같다. 가드너의 수학 퍼즐을 직접 풀어 보는 시간을 만들어 보자. 틀려도 된다. 정답을 찾지 못해도 계산하는 과정을 즐겼다면 당신은 수학(數學)을 열심히 수학(受學)한 수학(數學/受學)자다. 《수학의 유희》는 독자의 계산 실력이 얼마나 잘 나오는지 측정하는 수학(數學) 능력 시험 문제집이 아니다.


잡학 다식한 가드너의 글쓰기에 익숙하지 않은 독자는 몰라도 되는 무용(無用)한 지식을 너무 많이 설명한다고 지적할 것이다. 하지만 가드너는 잘난이가 아니다. 그는 수학뿐만 아니라 새로운 분야나 지식을 공부하면서 글을 썼다. ‘찾아보기’를 제외하면 800쪽이 넘는 ‘벽돌 책’인 《수학의 유희》를 완독하지 못해도 ‘머리말’은 읽어 보길 바란다. 가드너는 자신이 알고 있는 지식을 나열하면서 칼럼을 쓰지 않았다. 이미 알고 있는 지식을 톺아보고, 새로운 지식은 배워가면서 칼럼을 썼다.






 ‘수학 게임(Mathematical Game, M. G.가 내 이니셜이기도 한 것은 우연의 일치이다)’이라는 제목의 이 칼럼은 사반세기 동안 계속됐다. 그 세월이 지나는 동안 나는 점점 더 많은 수학을 배웠다. 어떤 주제를 자신에게 가르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에 대해 글을 쓰는 것이다.

 

(머리말, 9쪽)

 


마틴 가드너는 수학(數學)을 수학(修學)한 수학자다.



Q. E. D.

Quod Erat Demonstrandum

증명 완료







Q. E. D.

Question Every Deduction

모든 추론을 의심하라




* 742~743쪽


 일각고래의 엄니가 어떤 기능을 하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적을 찌르거나 얼음에 구멍을 뚫는 데는 사용되지 않지만, 짝짓기 시즌에 일각고래가 서로 엄니를 맞부딪치는 모습이 목격되어서 성적 의식에서의 역할이 주요 목적일 수도 있다. [주1]



[주1] 2017년 캐나다에서 일각고래가 엄니로 대구를 때려서 기절시킨 다음 잡아먹는 행동이 확인되었다. 엄니에 북극 바닷물의 염분을 감지하는 최대 1,000만 개의 신경 세포가 모여 있다. 바닷물의 염분이 높아질수록 수온은 내려간다. 과학자들은 일각고래가 덜 차가운 바다로 이동하기 위해 엄니로 바닷물의 염분 변화를 감지한다고 주장한다. 


[참고 자료] Britannica, 「What Does a Narwhal Use Its Horn For?」, 2026년 7월 24일 등록. 

https://www.britannica.com/science/What-Does-a-Narwhal-Use-Its-Horn-For






* 744쪽





플로베르의 희극 『성 앙투안의 유혹』 [주2]





[주2] 희곡 형식의 소설이다. 플로베르(Flaubert)가 20대부터 쓰기 시작한 작품이다. 그는 25년 동안 이 소설을 쓰는 데 매달렸고 세 가지 판본을 발표했다. 《성 앙투안느의 유혹》(김용은 옮김, 열린책들, 2010년) 앞표지에 ‘희곡 소설(dramatic novel)’이 표기되어 있다.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에 있는 단어들>



* 수학(修學), 학수(學修): 공부한다.

 

* 학수(鶴首): 학의 목, 학의 목처럼 목을 길게 빼고 간절히 기다린다.

 

* 유열(流悅)하다: 좋아해서 탐닉한다.

 

* 희열(喜悅): 기뻐서 즐거워한다.


* 유유(悠悠)히: 움직임이 한가하고 여유가 있고 느리게. (=느긋이)


* 잘난이: 잘난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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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amoo 2026-09-21 12:3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마틴 가드너의 책은 거의 다 소장하고 있습니다. 마틴 가드너와 윌리엄 파운드스톤 책은 번역되어 나오는 즉시 구입해 놔야하죠!ㅎㅎ

cyrus 2026-09-21 23:10   좋아요 0 | URL
위키피디아에 등록된 마틴 가드너의 저작 목록을 확인했는데, 참 많이도 책을 썼더라고요.. ㅎㅎㅎ 선집 형태로 나온 칼럼 모음집은 열 권 넘었어요. 그리고 G. K. 체스터턴과 로드 던세이니 같은 작가들의 작품 주석판도 썼어요. 이런 책들이 번역되면 좋겠는데, 안 될 것 같습니다.. ^^;;

카스피 2026-09-21 12:5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 저도 사진속 책 두권 다 가지고 있어요.학창시절 교과서 수학책을 보면 머리가 지끈 거렸는데 저 두 책은 넘 재미있더군요.
그나저나 이제 일반인들은 굳이 수학공부 할 필요가 없어진 것 같아요.인공지능이 수학의 난제들도 풀어나기나 이제 인간의 사고력은 필요 없는 시대가 오나 봅니다.

cyrus 2026-09-21 23:15   좋아요 0 | URL
최근에 수학자들이 AI가 수학 문제를 푸는 용도로 활용하는 것에 대해 반대하는 성명을 발표했어요. AI로 정답을 빠르게 찾는 일에 익숙해지면, 계산하는 과정을 생략하게 되고 수리력이 떨어지겠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