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루미(Me)
No. 6
풍월당 - 살라 푸가
2026년 10월 3일 토요일에 첫 방문
두루미는 가와우치 아리오(川內 有緖)의 《눈이 보이지 않는 친구와 예술을 보러 가다》(다다서재, 2023년)에서 만난 구절, ‘세계를 두루두루 보는 따뜻한 시선(205쪽)’에 영감을 얻어 만든 조어(造語)다.
‘미’는 ‘아름다울 미(美)’와 ‘나’를 뜻하는 영어 ‘me’, 두 가지 의미를 지니고 있다. ‘두루미’는 혼자 전시회에 가서 예술 작품을 ‘두루두루 보는’ 경험, 예술을 즐기는 일상(dilettante)을 상징한다.
풍월당(風月堂)은 빌딩 숲 한가운데에 있는 음악의 정원이다. 클래식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꼭 한 번은 들러야 하는 곳이다. 2003년에 태어난 풍월당은 클래식 음반 가게였다. 음악의 정원을 가꾼 박종호 대표의 본업은 정신과 전문의다. 클래식 음악에 관한 칼럼을 쓰면서 클래식 음악 마니아로 알려졌다.
시간이 지날수록 음악의 정원은 넓어지고 풍성해졌다. 세계적인 음악의 명인(名人)들이 풍월당을 방문했다. 그들이 방문객들에게 음악을 들려주는 순간, 정원에서 작은 연주회가 시작된다. 음악을 감상하면서 담소를 나눌 수 있는 카페 ‘로젠카발리에(Rozenkavalier)’가 있다. 로젠카발리에는 ‘장미의 기사’를 뜻하는 독일어다. 장미의 기사는 리하르트 슈트라우스(Richard Strauss)의 오페라 제목이다.

올해 초에 풍월당은 더 나은 음악의 정원으로 가꾸기 위해 길게 쉬었다. 바람이 선선해지는 무렵에 풍월당은 음악 감상실 겸 자료실 ‘살라 푸가(Sala Fuga)’로 새롭게 단장했다. ‘Sala’는 이탈리아어로 방을 뜻한다. 푸가는 하나의 성부(聲部)가 음을 연주하면 다음 성부가 먼저 연주된 음을 모방하면서 이어 나가는 곡조 형태다.

‘살라 푸가’는 10월 1일부터 올해 말까지 임시 개장 형태로 방문객들을 맞이한다. 이 기간에 무료로 이용할 수 있다. 푸가의 방이 열리는 날은 매주 목, 금, 토요일이다. 이용 시간은 1시간이다. 풍월당 직원들이 고른 음악을 들으면서 박종호 대표가 모으고 차곡차곡 정리한 책들과 음반들(비 판매용), 클래식 음악 관련 자료들을 살펴볼 수 있다.

음악의 정원에 입장하면 안내문과 《살라 푸가를 읽는 시간: 공간 곳곳에 새긴 음악과 문장들》이라는 소책자를 받는다. 이 소책자는 살라 푸가의 벽면 구조와 각각 벽면에 새겨진 문구들의 의미를 소개한다.

푸가의 방을 둘러보면서 제일 먼저 마주친 문구는 라틴어 문장 ‘Res Severa Verum Gradium’이다. 고대 로마의 스토아학파 철학자 세네카(Seneca)가 쓴 문장이다. 박종호 대표는 세네카의 문장을 ‘진정한 기쁨은 진지한 것이다’라고 풀어 썼다. 세네카가 생각하는 ‘진지함’은 어떤 것에 호기심을 느끼고, 오랫동안 톺아보면서 열중하는, 참된 내면 상태이다.

온전히 음악에 집중할 수 있는 감상실이 따로 있다. 커튼이 드리워진 여닫이문이 달린 방이며, 내부 조명이 어슴푸레하다. 명상하듯이 음악을 들을 수 있는 최적의 공간이다. 직원의 안내에 따라 입장할 수 있다. 턴테이블 옆에 뜻밖의 인물 조각상이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동화 작가로 유명한 덴마크의 소설가 안데르센(Hans Christian Andersen) 동상을 작게 만든 조각상이다.

푸가의 방에 들어온 방문객들에게 과자와 음료(커피, 보리차)가 제공된다. 접시와 찻잔, 커피추출기가 있는 부엌의 이름이 ‘로시니(Rossini)’다. 대식가인 이탈리아 음악가의 이름을 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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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터 박스올 <죽기 전에 꼭 읽어야 할 책 1001권> 개정판 411번째 책]
* 헤르만 헤세, 이영임 옮김 《유리알 유희》 (민음사, 2011년, 전 2권)
살라 푸가는 클래식 음악 명인(박종호 대표)의 정원이자 정신이 맑아지는 천국의 정원이다. 지난달에 읽기 시작한 헤르만 헤세(Hermann Hesse)의 소설 《유리알 유희》는 천국의 정원으로 이끌어준 입장권과 같은 책이다.
《유리알 유희》의 주인공이자 ‘유희 명인’ 요제프 크네히트(Josef Knechts)는 어린 시절에 음악 명인을 만난다. 음악 명인은 요제프의 정신적 성장에 도움을 준 스승이다. 두 사람은 음악에 관한 대화를 나누는데, 음악 명인은 요제프에게 푸가가 어떤 곡인지 알려준다.
* 클라이브 웅거 해밀턴, 김형수 옮김 《클래식, 바로크 시대와의 만남: 바흐 . 헨델. 비발디의 시대》 (포노, 2012년)
* 김현철 《내가 사랑한 몬테베르디: 작품을 통해 바라본 몬테베르디의 예술 세계》 (음악세계, 2012년)
음악 명인은 바로크 시대에 풍미했던 음악가들의 곡을 좋아한다. 푸가를 진지하게 연구하여 정교하게 만든 바흐(Johann Sebastian Bach), 영국 바로크음악을 대표하는 헨리 퍼셀(Henry Purcell), 중세 음악과 르네상스 음악의 매력을 그대로 살리면서 새로운 이탈리아 바로크음악의 시작을 알린 클라우디오 몬테베르디(Claudio Monteverdi) 등이다.
박종호 명인의 서재에 《유리알 유희》를 포함한 헤세의 소설들이 꽂혀 있다. 명인은 책에 밑줄을 그으면서 읽었다. 명인이 어떤 문장에 밑줄을 그었는지 궁금했다.



“명상할 때면 무언가 보았을 거야. 음악이 모습으로 나타난 거지. 마음이 내키면 그걸 그려 보게.”
크네히트는 객실 책상 위에 종이 한 장과 연필이 놓여 있는 것을 보았다. 잠자리에 들기 전에 그는 음악이 변해서 자신에게 나타났던 형상을 그려 보려고 한다.
(헤르만 헤세, 이영임 옮김, 《유리알 유희 1》 중에서, 102쪽)
헤세는 색깔을 가지고 노는(Spiel mit farben) 화가다. 그는 《유리알 유희》의 음악 명인처럼 음악을 형상화하고, 색깔을 입히면서 그림을 그렸을 것이다. 이것이 헤세가 음악을 가지고 노는(Spiel mit Musik) 방식이다. 그에게 색과 음악은 놀이(유희)다.
* 헤르만 헤세, 김윤미 옮김 《헤르만 헤세, 음악 위에 쓰다》 (북하우스, 2022년)
* 이신구 《헤세와 함께 음악이 흘렀다: 소나타로 읽는 헤세》 (세창미디어, 2021년)
《유리알 유희》를 읽으면서 《헤세와 함께 음악이 흘렀다》라는 책을 구매했는데, 저자는 오래전부터 헤세와 음악의 연관성을 연구해 온 독어독문학과 교수다. 《헤세와 함께 음악이 흘렀다》는 소설에 드러난 헤세의 음악 취향을 분석한 책이다. 헤세가 좋아한 음악가는 바흐, 모차르트(Wolfgang Amadeus Mozart), 쇼팽(Frédéric Chopin)이다. 이 세 명의 음악가는 소나타(모차르트, 쇼팽)와 푸가(바흐) 작품을 많이 남겼는데, 이들 곡의 공통점은 정교한 화음이다.

《헤르만 헤세, 음악 위에 쓰다》는 음악을 주제로 한 헤세의 글과 음악이 언급된 헤세의 문장들을 모은 책이다. 이 책에도 클래식 음악 명인이 남긴 형광펜 흔적을 확인할 수 있다. 클래식 음악 명인은 헤세의 삶을 소개한 글에도 줄을 그었다. 헤세의 문학 세계를 ‘악보 없는 음악’으로 비유한 내용에 공감했는지 분홍색 형광펜으로 문장 전체를 네모 상자에 담아서 별 모양 표시를 했다.

공간 이용 시간은 정해져 있지만, 방문객이 많지 않으면 조금 더 음악을 즐길 수 있다. 나는 책이 많은 곳으로 이동해야 해서 다음에 또 오기로 했다. 푸가의 정원에 흐르는 음악에 흠뻑 취했는지 입장권에 내 이름이 ‘최해송’으로 잘못 적혀 있는 것을 늦게 알았다.
내 이름의 ‘해’는 ‘바다 해(海)’ 자다. 내 이름을 처음 접한 사람들 대부분은 ‘혜성’으로 착각한다. 그래서 나는 처음 만난 사람들에게 이름을 말할 때 ‘바다 해’라고 강조한다. ‘해송’은 흥미로운 오자다. 노래를 뜻하는 영단어 song을 소리 내서 읽으면 ‘송’이다. 한자와 영어가 합친 ‘해송’은 ‘바다의 노래’로 풀어 쓸 수 있다.
* 클로드 드뷔시, 이세진 옮김 《안티 딜레당트 크로슈 씨: 프랑스 음악의 한 정신》 (포노, 2017년)
* 스테판 말라르메, 황현산 옮김 《시집》 (문학과지성사, 2005년)
* 스테판 말라르메, 김화영 옮김 《목신의 오후》 (민음사, 2016년)
바다를 소재로 한 클래식 음악 중에 드뷔시(Claude Debussy)의 <바다>라는 작품이 있다. <바다>는 고향시다. 작품 부제는 ‘관현악을 위한 3개의 교향적 스케치(소묘)’다. 드뷔시는 인상주의 음악가다. 자연을 보면서 찰나에 느끼는 인상을 그림 그리듯이 음악으로 표현하는 것이 인상주의 음악의 특징이다.
드뷔시는 자신이 추구하는 음악이 무엇인지 소신껏 글로 써서 발표했다. 그는 본인 스스로 딜레당트(dilettante)로 여겼다. 딜레당트는 ‘즐기다’를 뜻하는 이탈리아어 ‘dilettare’에서 유래한 말이다. 딜레당트는 전문적으로 배우지 않고도 학문과 예술을 즐기는 사람이다. 드뷔시에게 음악은 ‘겸허히 즐거움을 주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예술이다. 그래서 그는 전문가에 속하는 음악 비평가들의 현학적인 감상에 동의하지 않았다. 그는 감상자의 자유를 존중하며 솔직하고 성실한 ‘인상(impressions)’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바다>는 드뷔시의 대표작 <목신의 오후 전주곡>, <달빛>, <아마빛 머리의 소녀>와 더불어 내가 좋아하는 곡이다. <목신의 오후 전주곡>은 프랑스의 시인 말라르메(Stéphane Mallarmé)의 시 <목신의 오후>에 선율을 입힌 교향시다. 나른한 선율이 이 곡의 매력이다. 살라 푸가에서 듣고 싶은 곡을 신청할 수 있다면, 나는 드뷔시의 음악을 제일 먼저 고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