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7080세대라면 브룩 실즈를 절대로 모를 리가 없다. 1980년대 소피 마르소, 피비 케이츠와 함께 코딩 책받침 미녀 모델의 트로이카 중 한 명이었던 그녀에게 항상 ‘세기의 미녀’라는 수식어가 따라다녔다. 하지만 그녀는 ‘세기의 여배우’가 되지 못했다. 대표작이라고 해봐야 <블루 라군> 정도. <블루 라군>에 출연하기 전에 찍었던 영화 <프리티 베이비>는 작품성보다는 작품에 대한 논란 때문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이 영화를 찍었던 당시 브룩의 나이는 열두 살. 브룩은 어린 창녀 바이올렛으로 등장한다. 1917년, 미국 뉴올리언스의 매음굴을 배경으로 전개되는데, 세상 물정 모르는 바이올렛은 그녀의 어머니(수잔 서랜든 분)처럼 창녀가 된다. 여기에 브룩이 올 누드로 등장해서 큰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이야기 설정도 파격적이다. 어린 창녀가 400달러에 자신의 순결을 팔고, 아버지뻘 되는 남자와 결혼하여 한집에 산다. 이 남자는 창녀들의 모습을 사진으로 찍어 판매하는 일을 했는데 바이올렛은 이 남자를 마음에 들어 한다. 물론, 남자도 소녀를 좋아한다. 가끔 남자는 바이올렛이 투정을 부리면 손찌검을 하지만, 인형처럼 예쁜 그녀의 모습을 사진에 담아낸다. 그는 바이올렛을 찍은 사진만큼은 절대로 팔지 않는다. 하지만 두 사람의 사랑은 오래가지 못한다. 바이올렛은 다시 가족의 품으로 돌아간다.

 

 

 

 

 

 

영화 개봉 당시 비도덕적이라는 이유로 종교계의 격심한 반발을 샀다. 특히 사진기 앞에서 브룩이 벌거벗은 채 자세를 취하는 장면 하나 때문에 그녀는 관능적인 롤리타 이미지를 가지게 되었다. 이 영화가 오늘날에 개봉되었으면 ‘아청법(아동청소년의 성보호에 관한 법률)’이 적용되어 문제의 장면이 삭제되었을 것이다. 지금으로써는 이러한 장면은 문제가 될 소지가 많지만, 20세기 이전만 해도 소녀의 누드 사진은 누구나 볼 수 있는 흔한 이미지였다. 어린 소녀의 사진을 찍어서 혼자 간직하려는 영화 속 사진가의 모습에서 루이스 캐럴이 떠오른다.

 

 

 

 

 

 

 

 

 

 

 

 

 

 

 

 

 

 

루이스 캐럴은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와 《거울 나라의 앨리스》를 쓴 동화작가로 잘 알려졌다. 동화 속 앨리스의 실제 모델은 엘리스 리델. 이 소녀는 캐럴이 수학교수로 재직하던 옥스퍼드 대학 크라이스트 처치 학장인 헨리 리델의 딸이었다. 캐럴은 이 소녀를 즐겁게 하려고 동화 두 편을 집필하게 된다. 그는 말더듬 증세가 있어서 수줍음이 많은 성격인데도 재미있는 농담, 난센스 퀴즈, 짤막한 이야기 등을 준비하여 아이들을 즐겁게 해주는 능력이 있었다. 그리고 사진을 잘 찍었다. 캐럴은 영국에서 사진기를 잘 다루는 사람 중 한 명이었다. 영국의 시인 알프레드 테니슨, 작가 조지 맥도널드 등 영국을 대표하는 명사들을 찍었을 뿐만 아니라 어린아이들의 모습도 많이 찍었다.

 

 

 

 

 

루이스 캐럴이 찍은 앨리스 리델의 사진

 

 

그러나 그가 어린 소녀의 누드를 찍은 사진 몇 점이 사람들로부터 의심의 눈초리를 받는다. 당시 캐럴은 보수적인 기독교 가치를 강조했던 빅토리아 시대에 살고 있었다. 이 시대에 누드 자체를 사진으로 찍는 행위는 공포와 혼란 그 자체였다. 너무 지나치게 점잖은 태도를 유지했던 빅토리아 시대 사람들은 신체 부위를 함부로 노출하는 것을 부도덕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캐럴은 사회의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고 소녀의 누드를 마음껏 찍었다. 성인 남녀의 누드 사진만 아니면 되었다. 성(性)을 부끄러워하던 빅토리아 시대 사람들은 어린 남녀의 누드 사진은 인정했다. 어린 소녀의 누드 사진이 있는 연하장이나 엽서가 만들어졌다. 옷을 입지 않은 아이들의 모습에서 에로티시즘과 상관없는 순수한 육체의 아름다움으로 봤기 때문이다. 캐럴을 포함한 기독교 신자들은 아이를 성별이 없는 순수한 신의 피조물로 인식했다.

 

 

 

 

 

 

 

 

 

 

 

 

 

 

 

 

 

 

평생 독신으로 살았던 캐럴이 어린아이들을 대상으로 사진을 찍었다는 이유로 ‘소아성애자’로 오해를 받기도 한다. 캐럴의 삶을 잘 모르면 이런 오해를 할 수도 있다. 캐럴은 어린 소녀의 사진을 단지 판매를 위한 목적으로 찍지 않았다. 그리고 사진 때문에 생길 수 있는 오해를 피하려고 누드 사진의 원본 필름을 모두 없애버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캐럴의 사진 작업을 이상하게 생각했다. 사진술이 널리 보급되었어도 누드 사진에 대한 반감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성적 욕구를 드러내는 것을 금지했던 빅토리아 시대 특정상 그럴 수밖에 없었다. 하지 말라고 하면, 더 하고 싶어지는 게 사람의 마음이다. 선정적인 포르노 사진이 암묵적으로 유통되었고, 이 사진을 구매하는 고객 대부분은 여자들 앞에서 점잖은 태도를 보였던 남자들이었다. 사진가와 여성 모델이 서로 사랑하는 관계임을 증명하는 사진까지 나오게 되면서 한동안 사진가는 여성 누드를 마음껏 볼 수 있는 천박한 직업으로 여겨지기도 했다. 이때 사진은 미술처럼 하나의 예술 장르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사진을 못 미더운 몇몇 사람들은 캐럴이 어린 소녀, 그것도 누드를 찍는 모습을 수상하게 여겼다. 사소한 오해는 더 큰 오해로 커진다. 캐럴의 일대기를 연구한 학자들은 앨리스 리델을 캐럴이 짝사랑하는 대상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하지만 리델과 주고받은 캐럴의 편지만으로 캐럴이 그녀를 좋아했다고 단정할 수 없다. 캐럴은 앨리스 리델뿐만 아니라 서로 알고 지내는 소녀들과 편지를 주고받았다.

 

캐럴은 억울하다. 그는 단지 귀여운 소녀의 모습이 좋아서 사진을 찍었다. 자신 스스로 육체적으로 깨끗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캐럴의 순수한 사진 작업에 딴죽을 걸었다. 펠릭스 나다르가 프랑스를 대표하는 인물 사진의 대가라면, 여기에 맞서 영국은 캐럴을 내세워도 된다. 어린 소녀의 누드 사진을 찍었다는 이유만으로 그의 이름이 사진 역사에서 제외하는 것은 속 좁은 평가다. 방귀 뀐 놈이 성낸다고 정상적으로 찍은 사진을 선정적으로 보는 사람이 더 이상하다. 알고 보면 순진하고 고결하다고 자부하는 사람들이 오히려 야한 것에 더 밝히는 경우가 있다. 빅토리아 시대 사람들은 벌거벗은 고대 그리스 여신상을 ‘예술’로 찬양했지만, 실제 인간의 벌거벗은 모습을 극도로 싫어하는 반응을 보였다. 그들은 누드를 ‘예술’이라는 고귀한 이름으로 포장하여 즐김으로써 간접적으로 성적 욕구를 풀 수 있었다. 빅토리아 여왕이 지배했던 19세기 영국은 야한 것이 좋다고 함부로 말하지 못하는 '이상한 나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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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9-15 12:0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9-15 18:52   URL
비밀 댓글입니다.

인디언밥 2015-09-15 23: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진짜 잼있어요!! 전부 몰랐던 얘기들.. 특히 소녀 누드사진이 연하장이나 엽서로 만들어지는 시대라니.. 띠용..

cyrus 2015-09-16 13:20   좋아요 0 | URL
사진의 역사를 소개한 책을 읽다가 저도 처음 알았어요. 그전에는 루이스 캐럴이 어린이 사진을 찍은 이유를 좋지 않게 여겼는데, 오해를 풀 수 있었습니다. ^^

stella.K 2015-09-16 18: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때 브룩실즈 정말 예뼜지. 그런데 크면서 별로더군.
게다가 무슨 거인병에 걸렸다고도 했는데.
성장이 멈추지 않는 병. 그래서 키가 190이넘는다고 했는데 지금은
어떤지 모르겠어. 요즘은 뭐하고 사는지?
저 시대에 정말 세 사람이 미녀 트로이카라고 난리였는데...
동시대 사람으로 우리나라에 누가 있었더라...?
김혜수, 이상아, 이미연쯤이 되려나?ㅋㅋ

cyrus 2015-09-16 18:14   좋아요 0 | URL
브룩이 말단비대증에 걸려서 한동안 투병 생활을 했어요. ‘거인병’과 비슷해요. 그리고 출산 이후에 극심한 우울증에도 시달렸다고 해요. 성인이 되어서도 간간히 영화에 출연했는데, 과거의 리즈 시절로 되돌아가기에는 많이 늦었어요.
 

 

 

 

오늘 오랜만에 MBC에서 하는 <신비한 TV 서프라이즈>를 봤다. 본방송을 챙겨보지는 않지만, 가끔 보면 재미있는 이야기를 알게 된다. 오늘 방송된 내용 중 하나가 영국의 화가 존 에버렛 밀레이의 사랑 이야기다. 화가의 연애담은 미술에 문외한인 사람들도 호기심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흥미진진하다. 

 

 

 

 

존 에버렛 밀레이  「성 아그네스의 전야」 (1863년)

 

에피와 결혼한 이후에 그려진 그림이다. 밀레이는 에피를 그림 속 여인의 모델로 썼다. 그러나 작품이 공개되었을 때 비평가의 반응이 좋지 않았다. 여인의 모델이 ‘러스킨의 전처’라는 사실에 보수적인 비평가들은 거부감이 느꼈던 것일까. 비평가들은 그림 속 여인이 ‘앙상하다’, ‘역겹다’라는 식으로 심한 표현을 써가면서 비난했다.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은 자신의 모습을 그릴 화가가 내정된 소식을 듣자마자 화를 낸다. 그 화가는 존 에버렛 밀레이. 무엇이 여왕을 분노하게 하였을까. 밀레이의 사생활이 여왕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든 원인이었다. 밀레이가 유부녀와 결혼한 것이 문제였다. 19세기 중반부터 시작된 빅토리아 여왕 시대는 엄격한 도덕성의 사회였다. 근면, 성실, 종교적이고 도덕적 가치가 강화되는 가운데 여성들은 성적 충동을 가져서는 안 되고, 재혼을 부도덕한 죄를 범한 것으로 여겼다. 밀레이는 실력이 출중한 화가임에도 불구하고, 이혼 경력이 있는 여자와 결혼했다는 이유로 세간의 비난을 받아야 했다.

 

밀레이와 결혼한 여자는 에피 밀레이. 화가를 만나기 전의 이름은 에피 러스킨이었다. 그녀의 전남편은 빅토리아 시대 최고의 미술평론가인 존 러스킨이다. 밀레이, 에피 그리고 러스킨. 이 세 사람은 서로 잘 아는 사이였다. 밀레이에게 러스킨은 자신의 재능을 널리 알려주게 한 은인이었다. 밀레이는 러스킨의 집을 자주 방문했고, 에피를 모델로 삼아 그림을 그리기도 했다. 밀레이와 에피는 ‘화가-모델’의 관계를 넘어서서 사랑의 싹을 틔우기 시작한다. 사회가 용서할 수 없는 사랑을 더욱 간절한 원했던 사람은 에피였다. 그녀는 남편 러스킨과 6년 동안 성관계를 하지 못했다. 러스킨은 그녀와의 성관계를 거부했다. 아이를 갖는 것을 원하지 않고, 임신으로 에피의 건강이 나빠질 수 있다는 식으로 궁색한 변명을 했다. 공허한 부부 생활이 지겨운 에피는 밀레이와의 사랑을 선택한다.

 

 

일단 여기까지가 TV에 방송된 내용이다.

 

 

 

 

 

 

 

 

 

 

 

 

 

 

 

사실 러스킨이 성관계를 거부한 이유는 따로 있다. 미술평론가답게 그는 고대 그리스 미술에 심취했고, 옛것의 아름다움을 재발견하는 미술을 강조했다. 그런 미술양을 공유한 화파가 바로 빅토리아 시대에 유행했던 ‘라파엘 전파’다. 밀레이는 이 화파에 속했다. 러스킨은 자신의 미적 취향과 실생활을 혼동했다. 고대 그리스 시대에 만들어진 벌거벗은 여신상의 아름다움에 너무 빠진 나머지, 자신의 아내도 여신상처럼 아름다울 거라고 믿었다. 그러나 그의 기대는 현실과 동떨어진 것이다. 러스킨은 아내의 체모를 처음으로 본 순간부터 성관계를 피하기 시작했다. 털이 있는 아내의 몸에 성적 매력을 느끼지 못한다. 에피는 남편으로부터 사랑을 받지 못한다고 생각했고, 마음은 점점 밀레이로 향한다.

 

에피의 말 못한 결혼 생활을 알게 된 그녀의 가족은 그녀를 친정으로 호출했다. 하필 그 날은 러스킨과 결혼한 지 6주년이었다. 그녀는 사회의 따가운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고, 교회 법정에 결혼 무효 소송을 신청한다. 말 그대로 러스킨에게 이혼을 요구한 셈이다. 교회 법정은 그녀의 요구를 들어준다. 이로써 러스킨은 결혼 생활 6년 만에 이혼한다. 러스킨은 전처와 친구와의 결혼을 막으려고 ‘우정’을 강조해보지만, 에피의 마음을 되돌리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당시 세 사람의 삼각관계는 전쟁 소식보다 더 회자에 올랐다. 대중은 유부녀가 결혼 관계를 거부하는 시도를 충격적으로 받아들었고, 특히 화가의 친구가 그의 아내를 빼앗는 과정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여왕 또한 이 사실을 곱게 볼 리가 없었다.

 

 

 

 

 

 

존 에버렛 밀레이  「나의 첫 설교」(1863년), 「나의 두 번째 설교」(1864년)

 

 

 

밀레이는 우정과 자신의 명예를 과감히 포기하고, 사랑을 선택했다. ‘부도덕한 만남’이라는 비난을 받았지만, 반대로 두 사람의 사랑을 응원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두 사람은 보란 듯이 슬하에 4남 4녀를 두었고, 에피는 밀레이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그의 곁을 지켜줬다. 밀레이는 설교에 참석하는 자신의 딸을 그린 그림으로 명성을 얻는 데 성공한다. 비록 늦은 감은 있지만, 밀레이는 준 남작의 자리에 오르고, 그가 세상을 떠난 해인 1896년에 왕립 아카데미 회장으로 선출된다.

 

 

밀레이와 에피의 사랑 이야기는 이렇게 행복하게 끝이 난다....고 말할 줄 알았지.

 

글이 조금만 더 길어져도 끝까지 참고 읽어주기를 바란다. 밀레이의 성공에 가려져야만 했던 억울하고도 슬픈 사연이 있으니까.

 

밀레이는 자신의 실력으로 ‘은인의 아내를 빼앗은 자’라는 오명을 벗는 데 성공한다. 하지만 에피는 ‘전 남편을 버린 이혼녀’라는 낙인을 쉽게 지우지 못했다. 에피는 여왕이 주관한 공식 행사에 참석할 수가 없었다. 밀레이의 명성이 더욱 높아질수록 그녀의 사회적 위치는 더욱 좁아진다. 명사들의 사교장이라 할 수 있는 무도회장을 출입할 수 없었다. 에피는 자신에게 ‘러스킨의 전 부인’, ‘이혼녀’라고 수군거리는 사람들의 시선에 부담을 느꼈을 것이다. 밀레이가 세상을 떠나기 직전에 여왕은 그의 집에 시종을 보내 도와줄 일이 있는지 묻는다. 밀레이는 석판에 “여왕 폐하께서 에피를 한 번만이라도 만나주셨으면 합니다.”라고 적는다. 그는 죽기 전에 자신 때문에 정신적으로 고생하는 에피를 위해서 무언가를 해주고 싶었다. 그것은 바로 자신에게 향한 에피의 사랑은 진실하다는 점을 세상에 알리는 것. 여왕에게 전해준 부탁은 유언이 된다. 여왕은 그의 유언을 들어준다. 하지만 에피가 명예를 회복하기에는 너무 늦었다. 그녀는 거동이 불편할 정도로 늙었고, 시력마저 떨어진 상태였다. 밀레이와 재혼한 지 40년 만이다. 에피 밀레이. 그녀는 사랑과 성을 억압했던 빅토리아 시대에 정말 고통스럽게 46년 간 부부 생활을 감내했다. 가부장적 사회는 그녀의 성적 욕망을 받아들이지 못했고, 에피가 밀레이를 만나지 못했다면 죽을 때까지 섹스리스 부부 생활을 했을 것이다. 단지 행복하게 살고 싶어서 과감하게 재혼을 선택해보지만, 도덕성을 강조하는 엄격한 사회는 그녀의 자유를 옮아 매려고 했다. 에피 밀레이는 남성 중심 사회에서 여성 개인의 자유로운 욕망을 적극적으로 행동으로 실천한 선구자적 여성으로 평가받아야 마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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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이 2015-09-15 08: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난 이런 멋진 언니 너무 좋아_ 에피 밀레이는 운이 좋았지만 불행하게 침묵을 강요당하는 여인들이 너무 많아_ 아직까지도.

cyrus 2015-09-15 11:40   좋아요 0 | URL
맞아요. 지금도 돌싱녀에 대한 편견이 많아요.

인디언밥 2015-09-15 23: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야기도 이야기지만 맨 위에 그림 좋아요.. 사연을 들어서그런가 확 와닿는 감정

cyrus 2015-09-16 13:21   좋아요 1 | URL
‘존 에버렛 밀레이’로 검색하면 좋은 그림이 많이 나옵니다. 햄릿의 미친 연인 오필리아를 그린 사람도 밀레이입니다.

에이바 2015-09-16 13: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에피의 용기에 박수를 보냅니다. 밀레이도 멋지고요. 빅토리아 시대나 백년이 지난 지금이나 돌싱에 대한 눈치는 여전한 것 같다는. 지금은 그래도 쬐금 더 낫지만요. 이 책 출간된 후 읽었는데 기억나지 않아 찾아보니 2003년이군요! 십이년이 지났어요. 다시 한번 읽어볼까 싶어요.

cyrus 2015-09-16 13:41   좋아요 0 | URL
재미있는 내용의 책인데 품절되어서 아쉬워요. 유명 화가들의 사랑 이야기를 한 권으로 볼 수 있어서 좋아요. 사실 이 책에 나온 이야기 중 몇 개는 서프라이즈에 방송되었을 거예요. 오래전에 모딜리아니, 달리 이야기를 본 적이 있어요.
 

 

 

 

 

 

 

 

 

 

 

 

 

 

 

 

 

 

오스트리아의 작은 마을에, 난폭한 주정뱅이 아버지 밑에서 자란 소년이 있었다. 소년은 아버지로부터 맞으면서 자랐다. 반면 소년의 어머니는 너무나도 착했다. 그녀는 남편의 학대에 시달리는 소년을 사랑으로 감싸 안아줬다. 그렇지만 어머니의 모성애는 아버지의 폭력성을 이기지 못했다. 아버지의 난폭함은 소년에게 강한 증오심을 심어주고 말았다. 어른으로 성장한 그는 그림을 공부하여 화가가 되기를 원했지만, 훌륭한 화가가 될 실력은 아니었다. 그는 자기기 원하는 삶을 이루지 못하게 되자 세상을 원망했다. 그러다가 전쟁이 일어나게 되면서 독일 군부대로 자원입대한다. 이때부터 소년은 전 유럽을 피로 물드는 전쟁의 힘에 매료되었고, 세상에 대한 증오심은 반유대주의를 형성하게 된다. 이 소년은 훗날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키고, 600만 명의 유대인을 학살한 독일 총통 아돌프 히틀러가 된다. 그의 인간적인 성품에 대해서는 어린 시절을 아버지 밑에서 학대받으며 불후하게 자라 냉혹하다는 진단이 일반적이다.

 

한 시대에 ‘절대 권력’으로 군림했던 지도자들은 무고한 사람들을 숱하게 살육하고, 국가를 파멸로 몰아넣었다. 그 권력으로 수많은 사람의 목숨이 짓밟혔고 마침내 악몽의 역사를 후세에 남겼다. 히틀러와 스탈린. 이 두 사람은 모두 국가라는 이름 아래서 무력을 합법적으로 사용했다. 또한, 유럽을 지배하려는 야심도 갖고 있었다. 무엇이 그들을 광기의 지도자로 만들었는가. 프로이트의 분석을 빌리자면, 어린 시절의 좌절과 상처가 있는 권력자들은 더 극단적인 성향을 보이게 된다. 히틀러와 스탈린은 모두 비참하고 불행한 가정에서 자랐다. 헌신적인 어머니가 있었지만 난폭한 아버지도 있었다. 스탈린도 히틀러처럼 어두운 유년 시절을 보냈다.

 

스탈린은 유럽과 아시아의 경계를 캅카스 산맥 상에 있는 조지아(옛 이름은 그루지야)의 작은 도시 고리에서 가난한 노동자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린 스탈린은 자신과 어머니를 무지막지하게 대하는 아버지의 태도에 경멸을 느껴 아버지에게 칼을 던지기도 했다. 그는 아버지로부터의 폭력을 방어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폭력으로 맞서는 것으로 생각했다. 스탈린에게 폭력은 자신의 약점을 보완해줄 수 있는 전략이었다. 스탈린은 불행한 사고를 두 번이나 겪는 바람에 왼쪽 팔을 못 쓰게 되었고, 한쪽 다리를 절게 되었다. 그 이후로 그에게는 ‘초푸라(곰보)’, ‘게자(절름발이)’라는 별명이 꼬리표처럼 따라왔다. 하지만 신체적 약점은 스탈린의 성품을 더욱 강하게 만들어줬다. 어린 시절의 스탈린을 회고한 기록들을 종합하면 그는 학교 성적이 우수했던 모범생이면서도 난폭한 기질을 폭력으로 표출하는 이중 인간이었다.

 

정적 트로츠키는 스탈린을 힘만 쓸 줄 아는 무식한 행동대장쯤으로 여겼지만, ‘천의 얼굴’ 스탈린의 가면 중 하나를 봤을 뿐이다. 히틀러가 화가의 꿈을 간직하면서 그림을 그렸다면, 스탈린은 시를 직접 쓸 정도로 문학적 감수성을 지니고 있었다. 학비를 벌려고 합창단원으로 일하기도 했다. 그는 합창단의 핵심인 제1 테너였다고 한다. 스탈린의 어머니는 아들을 교회 신부가 되기를 원했다. 아들은 교회 관계자를 잘 아는 친척 덕분에 신학교에 입학하게 되지만, 엄숙한 분위기의 직업은 스탈린에게 맞지 않았다. 스탈린은 다윈의 《종의 기원》을 읽으면서 무신론자가 되었고, 마르크스의 책에 푹 빠졌다. 신부가 되는 길을 거부하고, 조지아 민족주의를 결합한 새로운 마르크스주의를 꿈꿨다. 저 유럽 반대편에서 자란 히틀러는 화가의 꿈을 포기하고, 독일 민족주의와 반유대주의를 결합한 나치즘의 등장을 준비하고 있었다. 사실 히틀러도 백수 시절에 책을 열심히 읽었다고 전해지지만, 스탈린의 독서와 비교하면 형편없다. 히틀러는 책에서 본 내용만 가지고, 사람들 앞에서 잘난척 했으며 그의 지적 수준은 훌륭하지 않았다.

 

재미있게도 히틀러와 스탈린은 같은 장소에서 거주했다. 1913년 오스트리아 빈. 스탈린은 레닌과 교류하면서 새로운 소비에트 연방을 만들기 위해 준비하고 있었고, 히틀러는 싸구려 하숙집에서 자신의 그림 실력을 한탄하면서 백수로 지내고 있었다. 두 사람은 오스트리아 황제가 사는 궁전 근처에 있는 공원을 자주 산책했다. 비록 서로의 존재를 알지 못했지만, 공원을 거닐다가 한 번 정도는 옷깃을 스쳤을 것이다. 정확히 30년 뒤에 두 사람은 독일과 소련의 지도자가 되어 스탈린그라드(현재 이름은 볼고그라드)에서 자존심 대결을 펼친다. 제2차 세계대전의 격전으로 알려진 ‘스탈린그라드 전투’다.

 

 

 

 

히틀러 「The Courtyard of the Old Residency in Munich」 (1913년)

 

 

 

히틀러와 스탈린은 한결같이 남성적인 모습을 보이기 위해 노력했다. 또한, 주변 사람들이 항상 자신에게만 맞춰주고, 복종하는 것을 선호했다. 애정 결핍 상태로 불행한 생활을 경험한 이들은 상처받은 자존심에 대한 보상을 얻기라도 하듯 권력을 좇고, 악용했다. 사람 운명이라는 것은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다. 시를 쓰는 조지아 시골청년과 그림을 그리는 오스트리아 백수가 비정한 권력자가 되어 역사의 악인으로 기억될 줄이야 누가 알았겠는가. 우리 앞에는 누구에게나 하얀 도화지가 놓여 있다. 인생은 그 위에 그림을 그리는 것과 같다. 풀잎 위에 앉은 이슬처럼 청초한 삶을 그리는 사람들도 있지만, 비극적인 상처와 절망을 그리는 이들도 있다. 히틀러와 스탈린은 자신에게 주어진 인생의 도화지를 아주 어둡게 칠했다. 그들은 유년 시절까지 색칠했던 어둠의 기억을 잊고 싶었다. 그래서 그들은 과거를 숨기려고 새로운 색깔로 인생의 도화지에 그림을 그려 넣었다. 그것은 바로 핏빛 색깔로 그려진 ‘권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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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민과 국민 사이 - 재일조선인 서경식의 사유와 성찰
서경식 지음, 이규수.임성모 옮김 / 돌베개 / 200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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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아이들은 지금까지 토토로는 알고 있어도 우토로는 몰랐을 거다. 얼마 전에 방영한 방송 프로그램 <무한도전> 덕분에 우토로가 다시 한 번 알려지게 되었다. 인터넷 검색 사이트에서 우토로를 치면 관련 자료가 쏟아져 나온다. 1998년에 우토로 사람들(이사히신문사)이라는 책을 통해서 우토로 마을이 처음으로 알려지게 되었고, 지금으로부터 십 년 전에 우토로를 지키는 모임이 저자로 참여한 우토로(민중의소리), 2010년에 어린이 독자를 위한 우토로의 희망 노래(푸른책들)까지도 나왔다. 이미 공중파 방송의 다큐멘터리로 다뤄진 적도 있다. 내가 중학생이었을 때, 학교에서 우토로 마을을 소개하는 다큐멘터리를 본 적이 있다. 그렇지만 여전히 낯설다. 우토로 마을에 관심을 가지는 대중의 반응이. ‘무한도전우토로 편은 아주 오랫동안 꺼져 있었던 관심의 불씨를 다시 살렸지만, 과연 이 불씨가 얼마나 오래갈지 걱정이 든다.

 

오랫동안 한반도의 불행을 고스란히 고여 있는 채 흘려야 했던 재일조선인의 눈물을 생각한다면 우토로 마을 이야기에 반성의 눈물을 흘리면서 끝내선 안 된다. 일제 지배, 미 군정, 전쟁과 분단, 남북대치, 그 역사의 가파른 기복은 재일조선인들에게 고통이요, 질곡이었다. 일제 강점기에 팔려가고 끌려간 세대들이 해방의 기쁨도 잠시, 또 한 번의 시련이 찾아왔다. 일본 정부는 재일조선인의 일본 국적을 인정하지 않기로 했다. 이로써 일제가 징병으로 강제로 끌고 간 사람들까지 법적 지위가 한순간에 사라져버렸다. 귀향하지 못한 재일조선인들의 부초 같은 삶은 지금까지도 이어져 왔다. 세금은 일본인과 똑같이 내면서 외국인으로 취급되며 취직 진학 영업 대출 등에서 시린 차별대우를 견뎌야 했다. 거기에 또 조국의 분단과 대치가 그들의 국적을 갈라놓고 동포사회를 양분했다. 냉전이 정점을 이루던 시기에는 민단(재일한국거류민단)과 조총련(재일조선인총연합회)의 대립이 분단 조국에서보다 더 첨예하게 맞섰다.

 

한일 과거사를 논할 때 재일조선인 문제를 제외할 수 없다. 이것은 단지 식민지배의 유산만이 아니라 그 유산을 지속해왔던 한국 사회의 유산이기도 하다. 그런데도 우리 사회는 재일동포의 삶에 무관심하다. 재일동포대신에 지금 쓰고 있는 이 재일조선인이라는 말에 생소하게 느껴지거나 거부감을 느낀다. 요즘에는 조선한국’, ‘대한민국보다 열등하게 보는 의미로 사용된다. 과거 일제 강점기의 아픈 상처를 떠올리게 하는 단어인 것도 있지만, 젊은 세대들은 선진국과 거리가 먼 사회구조로 변하는 한국을 헬조선이라고 부르면서 열등감을 표출하기도 한다. 서경식 선생은 글이나 인터뷰에서 의도적으로 재일동포대신에 재일조선인이라고 사용한다. 그 이유가 선생은 조선이 민족 전체를 아우를 수 있는 호칭으로 어울린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재일조선인은 일본에 의해 난민으로 만들어진 존재이다. 식민지 나라였다는 이유로, 강제 연행됐다는 이유로, 그리고 조국이 분단되어 있다는 이유로 이들은 멸시받고 천대받으며 때로는 일본인처럼 때로는 한국인처럼 분장해야 숨을 쉴 수 있는 나라가 바로 일본이다. 하지만 일본 국민 대다수에게 국가가 난민으로 만든 역사를 인식하지 못한다. <무한도전> 우토로 편이 방영되자, 일본 우익들은 막말을 퍼부었다. 오히려 우토로 마을 사람들을 불법체류자라고 말하면서 조롱을 퍼부었다. 넓은 의미에서 본다면 우토로 마을 사람들은 반난민이다. 서경식 선생은 자신의 책 난민과 국민 사이에서 반난민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이는 팔레스타인이나 아프간 난민들처럼 먹을 것이 없고 살 곳이 없는 상태는 아니지만, 국가로부터 추방된 상태를 의미한다. 우리는 흔히 모국에서 태어나 자라고, 모국어를 사용하는 사람이 국민이라고 생각한다. 재일조선인의 비극은 국가라는 방호막이 없고 국민이라는 소속감이 없다는 데서 비롯된다. 사는 나라와 모국, 양쪽으로부터 다 이방인 취급을 받고 있다.

 

우토로 마을이 2017년에 재개발돼 옛 모습이 완전히 사라진다면, 재일조선인의 역사마저 사라지고 만다. 이럴 때 우토로 마을의 비극만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재일조선인의 역사를 정확히 알아야 한다. 그리고 외면해서는 안 된다. 반성의 눈물이 마르는 순간, 역사의 흔적은 점점 희미해진다. 일본이 잘못된 식민지 지배를 했고 잘못된 침략전쟁을 했다는 역사를 인정했다면, 재일조선인이 차별받고 정체성 때문에 아픔 겪고 하는 일이 없었을 것이다. 20세기가 남겨놓은 식민지 시대와 세계 전쟁의 유산을 청산하려면 조선의 의미를 새롭게 생각해야 하고, 더 나아가 재일조선인 문제를 어떻게 풀어나가야 할지 고민해야 한다. <무한도전>이 준 감동은 위험하다. 왜냐하면 탄광의 카나리아와도 같은 재일조선인의 울음소리를 제대로 들어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우익 시위대의 폭력 속에서도 민족 차별의 고통에 울부짖는 존재의 슬픔을. 그러니 지금 우리가 기억해야만 하는 것은 점점 더 잊히고 있는 일본 내 재일조선인의 삶과 그걸 그저 눈물만 훔치며 브라운관을 보고만 있는 우리의 태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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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행복하자 2015-09-10 19: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비슷한 생각했어요. 이렇게 입에 회자되게 해 주는것은 좋은데 본질을 외면한채 감동과 죄책감으로만 끝나는 게 아닌가 싶어서요. 예능에서 시작했더라도 진지한 논의구조를 만드는 것이 필요할텐데요~ 이런식으로 구렁이 담 넘어가듯이 넘어가버린 일들이 너무 많아요.

cyrus 2015-09-11 18:32   좋아요 0 | URL
다음 주 하시마 섬 편은 어떻게 방영될지 기다려집니다만, 역시 반성을 불러일으키는 데만 그칠 것 같습니다.

yureka01 2015-09-10 20: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픔을 예능으로 꺼집어 내었다는 의미는 크지만,
이걸 자칫 결론없이 단순 감동만으로는 부족하다는 느낌들었어요..

cyrus 2015-09-11 18:34   좋아요 0 | URL
맞습니다. 사실 이런 감동도 예전처럼 큰 효과를 보지 못합니다. 역사를 제대로 못 배웠다거나 사회에 불만이 많은 사람들은 역사의 상처에 눈물 흘리는 방송인의 모습을 ‘방송용’이라고 무시할 정도니까요.

해피북 2015-09-11 19: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저는 `무도`보면서 마음 아프기만 했지 이렇게 깊이 생각해보지 못해 부끄럽네요. 특히 `반성의 눈물이 마르는 순간, 역사의 흔적도 희미해진다`는 말이 정말 크게 다가왔어요. 앞으로도 꾸준히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는 자세 잊지 말아야겠어요^^ 정말 좋은 글 잘 읽고 갑니다. 즐거운 금요일 저녁 보내세요!!

cyrus 2015-09-12 22:03   좋아요 0 | URL
재일조선인 문제를 정부가 직접 나서서 해결하는 차원으로 접근하면 좋은데, 결국 시청자들만 과거 역사에 슬프고 분노하는 데만 그치는 게 너무 아쉽기만 합니다. 해피북님도 주말 잘 보내세요. ^^

yamoo 2015-09-11 23: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헐~ 방송을 꼭 봐야 겠슴다! 좋은 글 감솨함돠!^^

cyrus 2015-09-12 22:05   좋아요 0 | URL
본방을 놓치면 토요일 정오 12시에 하는 재방송을 보면 됩니다. ^^
 

 

 

 

사진은 달의 궁전카페에서 가져왔습니다. 이 책을 읽고 싶은 사람이 많을 겁니다. 신청자가 많으면 달의 궁전카페에 가입한 지 얼마 안 되었거나 활동을 잘 하지 않는 분들이 선정될 가능성이 희박하지만, 그래도 한 번 신청해보셨으면 좋겠습니다.

 

신청을 원하시는 분은 링크 주소를 클릭하면 됩니다.

 

http://cafe.naver.com/darlgung/26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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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9-10 15:45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5-09-10 18:16   좋아요 0 | URL
저도 읽고 싶은 책이 있어도 신청을 자제하는 중입니다. 몇 년 동안 서평단 활동 덕분에 공짜 책을 읽은 혜택을 많이 누려서 그런지 서평단 활동을 안 해본 분들에게 기회를 주고 싶어요. 제가 블로그에 서평단 공지사항을 스크랩하면서 올리는 이유가 바로 그겁니다. 제 글에 ‘좋아요’ 눌러주고, 댓글을 달아주시는 분들에게 조금이라도 보답하는 차원으로 서평단 공지사항을 공유하고 싶어요. ^^

yureka01 2015-09-10 16:31   좋아요 0 | URL
서평단 참가할 기회 더 많으면 좋은것은 맞아요. 소식을 몰라서 못하면 책 알릴 방법이 줄어들테니까요..^^

고양이라디오 2015-09-17 10: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좋은 취지네요. 멋지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