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트리아의 작은 마을에, 난폭한 주정뱅이 아버지 밑에서 자란 소년이 있었다. 소년은 아버지로부터 맞으면서 자랐다. 반면 소년의 어머니는 너무나도 착했다. 그녀는 남편의 학대에 시달리는 소년을 사랑으로 감싸 안아줬다. 그렇지만 어머니의 모성애는 아버지의 폭력성을 이기지 못했다. 아버지의 난폭함은 소년에게 강한 증오심을 심어주고 말았다. 어른으로 성장한 그는 그림을 공부하여 화가가 되기를 원했지만, 훌륭한 화가가 될 실력은 아니었다. 그는 자기기 원하는 삶을 이루지 못하게 되자 세상을 원망했다. 그러다가 전쟁이 일어나게 되면서 독일 군부대로 자원입대한다. 이때부터 소년은 전 유럽을 피로 물드는 전쟁의 힘에 매료되었고, 세상에 대한 증오심은 반유대주의를 형성하게 된다. 이 소년은 훗날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키고, 600만 명의 유대인을 학살한 독일 총통 아돌프 히틀러가 된다. 그의 인간적인 성품에 대해서는 어린 시절을 아버지 밑에서 학대받으며 불후하게 자라 냉혹하다는 진단이 일반적이다.

 

한 시대에 ‘절대 권력’으로 군림했던 지도자들은 무고한 사람들을 숱하게 살육하고, 국가를 파멸로 몰아넣었다. 그 권력으로 수많은 사람의 목숨이 짓밟혔고 마침내 악몽의 역사를 후세에 남겼다. 히틀러와 스탈린. 이 두 사람은 모두 국가라는 이름 아래서 무력을 합법적으로 사용했다. 또한, 유럽을 지배하려는 야심도 갖고 있었다. 무엇이 그들을 광기의 지도자로 만들었는가. 프로이트의 분석을 빌리자면, 어린 시절의 좌절과 상처가 있는 권력자들은 더 극단적인 성향을 보이게 된다. 히틀러와 스탈린은 모두 비참하고 불행한 가정에서 자랐다. 헌신적인 어머니가 있었지만 난폭한 아버지도 있었다. 스탈린도 히틀러처럼 어두운 유년 시절을 보냈다.

 

스탈린은 유럽과 아시아의 경계를 캅카스 산맥 상에 있는 조지아(옛 이름은 그루지야)의 작은 도시 고리에서 가난한 노동자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린 스탈린은 자신과 어머니를 무지막지하게 대하는 아버지의 태도에 경멸을 느껴 아버지에게 칼을 던지기도 했다. 그는 아버지로부터의 폭력을 방어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폭력으로 맞서는 것으로 생각했다. 스탈린에게 폭력은 자신의 약점을 보완해줄 수 있는 전략이었다. 스탈린은 불행한 사고를 두 번이나 겪는 바람에 왼쪽 팔을 못 쓰게 되었고, 한쪽 다리를 절게 되었다. 그 이후로 그에게는 ‘초푸라(곰보)’, ‘게자(절름발이)’라는 별명이 꼬리표처럼 따라왔다. 하지만 신체적 약점은 스탈린의 성품을 더욱 강하게 만들어줬다. 어린 시절의 스탈린을 회고한 기록들을 종합하면 그는 학교 성적이 우수했던 모범생이면서도 난폭한 기질을 폭력으로 표출하는 이중 인간이었다.

 

정적 트로츠키는 스탈린을 힘만 쓸 줄 아는 무식한 행동대장쯤으로 여겼지만, ‘천의 얼굴’ 스탈린의 가면 중 하나를 봤을 뿐이다. 히틀러가 화가의 꿈을 간직하면서 그림을 그렸다면, 스탈린은 시를 직접 쓸 정도로 문학적 감수성을 지니고 있었다. 학비를 벌려고 합창단원으로 일하기도 했다. 그는 합창단의 핵심인 제1 테너였다고 한다. 스탈린의 어머니는 아들을 교회 신부가 되기를 원했다. 아들은 교회 관계자를 잘 아는 친척 덕분에 신학교에 입학하게 되지만, 엄숙한 분위기의 직업은 스탈린에게 맞지 않았다. 스탈린은 다윈의 《종의 기원》을 읽으면서 무신론자가 되었고, 마르크스의 책에 푹 빠졌다. 신부가 되는 길을 거부하고, 조지아 민족주의를 결합한 새로운 마르크스주의를 꿈꿨다. 저 유럽 반대편에서 자란 히틀러는 화가의 꿈을 포기하고, 독일 민족주의와 반유대주의를 결합한 나치즘의 등장을 준비하고 있었다. 사실 히틀러도 백수 시절에 책을 열심히 읽었다고 전해지지만, 스탈린의 독서와 비교하면 형편없다. 히틀러는 책에서 본 내용만 가지고, 사람들 앞에서 잘난척 했으며 그의 지적 수준은 훌륭하지 않았다.

 

재미있게도 히틀러와 스탈린은 같은 장소에서 거주했다. 1913년 오스트리아 빈. 스탈린은 레닌과 교류하면서 새로운 소비에트 연방을 만들기 위해 준비하고 있었고, 히틀러는 싸구려 하숙집에서 자신의 그림 실력을 한탄하면서 백수로 지내고 있었다. 두 사람은 오스트리아 황제가 사는 궁전 근처에 있는 공원을 자주 산책했다. 비록 서로의 존재를 알지 못했지만, 공원을 거닐다가 한 번 정도는 옷깃을 스쳤을 것이다. 정확히 30년 뒤에 두 사람은 독일과 소련의 지도자가 되어 스탈린그라드(현재 이름은 볼고그라드)에서 자존심 대결을 펼친다. 제2차 세계대전의 격전으로 알려진 ‘스탈린그라드 전투’다.

 

 

 

 

히틀러 「The Courtyard of the Old Residency in Munich」 (1913년)

 

 

 

히틀러와 스탈린은 한결같이 남성적인 모습을 보이기 위해 노력했다. 또한, 주변 사람들이 항상 자신에게만 맞춰주고, 복종하는 것을 선호했다. 애정 결핍 상태로 불행한 생활을 경험한 이들은 상처받은 자존심에 대한 보상을 얻기라도 하듯 권력을 좇고, 악용했다. 사람 운명이라는 것은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다. 시를 쓰는 조지아 시골청년과 그림을 그리는 오스트리아 백수가 비정한 권력자가 되어 역사의 악인으로 기억될 줄이야 누가 알았겠는가. 우리 앞에는 누구에게나 하얀 도화지가 놓여 있다. 인생은 그 위에 그림을 그리는 것과 같다. 풀잎 위에 앉은 이슬처럼 청초한 삶을 그리는 사람들도 있지만, 비극적인 상처와 절망을 그리는 이들도 있다. 히틀러와 스탈린은 자신에게 주어진 인생의 도화지를 아주 어둡게 칠했다. 그들은 유년 시절까지 색칠했던 어둠의 기억을 잊고 싶었다. 그래서 그들은 과거를 숨기려고 새로운 색깔로 인생의 도화지에 그림을 그려 넣었다. 그것은 바로 핏빛 색깔로 그려진 ‘권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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