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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민과 국민 사이 - 재일조선인 서경식의 사유와 성찰
서경식 지음, 이규수.임성모 옮김 / 돌베개 / 2006년 4월
평점 :
요즘 아이들은 지금까지 토토로는 알고 있어도 우토로는 몰랐을 거다. 얼마 전에 방영한 방송 프로그램 <무한도전> 덕분에 우토로가 다시 한 번 알려지게 되었다. 인터넷 검색 사이트에서 ‘우토로’를 치면 관련 자료가 쏟아져 나온다. 1998년에 《우토로 사람들》(이사히신문사)이라는 책을 통해서 우토로 마을이 처음으로 알려지게 되었고, 지금으로부터 십 년 전에 ‘우토로를 지키는 모임’이 저자로 참여한 《우토로》(민중의소리), 2010년에 어린이 독자를 위한 《우토로의 희망 노래》(푸른책들)까지도 나왔다. 이미 공중파 방송의 다큐멘터리로 다뤄진 적도 있다. 내가 중학생이었을 때, 학교에서 우토로 마을을 소개하는 다큐멘터리를 본 적이 있다. 그렇지만 여전히 낯설다. 우토로 마을에 관심을 가지는 대중의 반응이. ‘무한도전’ 우토로 편은 아주 오랫동안 꺼져 있었던 관심의 불씨를 다시 살렸지만, 과연 이 불씨가 얼마나 오래갈지 걱정이 든다.
오랫동안 한반도의 불행을 고스란히 고여 있는 채 흘려야 했던 재일조선인의 눈물을 생각한다면 우토로 마을 이야기에 반성의 눈물을 흘리면서 끝내선 안 된다. 일제 지배, 미 군정, 전쟁과 분단, 남북대치, 그 역사의 가파른 기복은 재일조선인들에게 고통이요, 질곡이었다. 일제 강점기에 팔려가고 끌려간 세대들이 해방의 기쁨도 잠시, 또 한 번의 시련이 찾아왔다. 일본 정부는 재일조선인의 일본 국적을 인정하지 않기로 했다. 이로써 일제가 징병으로 강제로 끌고 간 사람들까지 법적 지위가 한순간에 사라져버렸다. 귀향하지 못한 재일조선인들의 부초 같은 삶은 지금까지도 이어져 왔다. 세금은 일본인과 똑같이 내면서 ‘외국인’으로 취급되며 취직 진학 영업 대출 등에서 시린 차별대우를 견뎌야 했다. 거기에 또 조국의 분단과 대치가 그들의 국적을 갈라놓고 동포사회를 양분했다. 냉전이 정점을 이루던 시기에는 민단(재일한국거류민단)과 조총련(재일조선인총연합회)의 대립이 분단 조국에서보다 더 첨예하게 맞섰다.
한일 과거사를 논할 때 재일조선인 문제를 제외할 수 없다. 이것은 단지 식민지배의 유산만이 아니라 그 유산을 지속해왔던 한국 사회의 유산이기도 하다. 그런데도 우리 사회는 ‘재일동포’의 삶에 무관심하다. 재일동포’ 대신에 지금 쓰고 있는 이 ‘재일조선인’이라는 말에 생소하게 느껴지거나 거부감을 느낀다. 요즘에는 ‘조선’을 ‘한국’, ‘대한민국’보다 열등하게 보는 의미로 사용된다. 과거 일제 강점기의 아픈 상처를 떠올리게 하는 단어인 것도 있지만, 젊은 세대들은 선진국과 거리가 먼 사회구조로 변하는 한국을 ‘헬조선’이라고 부르면서 열등감을 표출하기도 한다. 서경식 선생은 글이나 인터뷰에서 의도적으로 ‘재일동포’ 대신에 ‘재일조선인’이라고 사용한다. 그 이유가 선생은 ‘조선’이 민족 전체를 아우를 수 있는 호칭으로 어울린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재일조선인은 일본에 의해 난민으로 만들어진 존재이다. 식민지 나라였다는 이유로, 강제 연행됐다는 이유로, 그리고 조국이 분단되어 있다는 이유로 이들은 멸시받고 천대받으며 때로는 일본인처럼 때로는 한국인처럼 분장해야 숨을 쉴 수 있는 나라가 바로 일본이다. 하지만 일본 국민 대다수에게 국가가 난민으로 만든 역사를 인식하지 못한다. <무한도전> 우토로 편이 방영되자, 일본 우익들은 막말을 퍼부었다. 오히려 우토로 마을 사람들을 불법체류자라고 말하면서 조롱을 퍼부었다. 넓은 의미에서 본다면 우토로 마을 사람들은 ‘반난민’이다. 서경식 선생은 자신의 책 《난민과 국민 사이》에서 ‘반난민’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이는 팔레스타인이나 아프간 난민들처럼 먹을 것이 없고 살 곳이 없는 상태는 아니지만, 국가로부터 추방된 상태를 의미한다. 우리는 흔히 모국에서 태어나 자라고, 모국어를 사용하는 사람이 ‘국민’이라고 생각한다. 재일조선인의 비극은 국가라는 방호막이 없고 국민이라는 소속감이 없다는 데서 비롯된다. 사는 나라와 모국, 양쪽으로부터 다 이방인 취급을 받고 있다.
우토로 마을이 2017년에 재개발돼 옛 모습이 완전히 사라진다면, 재일조선인의 역사마저 사라지고 만다. 이럴 때 우토로 마을의 비극만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재일조선인의 역사를 정확히 알아야 한다. 그리고 외면해서는 안 된다. 반성의 눈물이 마르는 순간, 역사의 흔적은 점점 희미해진다. 일본이 잘못된 식민지 지배를 했고 잘못된 침략전쟁을 했다는 역사를 인정했다면, 재일조선인이 차별받고 정체성 때문에 아픔 겪고 하는 일이 없었을 것이다. 20세기가 남겨놓은 식민지 시대와 세계 전쟁의 유산을 청산하려면 ‘조선’의 의미를 새롭게 생각해야 하고, 더 나아가 재일조선인 문제를 어떻게 풀어나가야 할지 고민해야 한다. <무한도전>이 준 감동은 위험하다. 왜냐하면 ‘탄광의 카나리아’와도 같은 재일조선인의 울음소리를 제대로 들어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우익 시위대의 폭력 속에서도 민족 차별의 고통에 울부짖는 존재의 슬픔을. 그러니 지금 우리가 기억해야만 하는 것은 점점 더 잊히고 있는 일본 내 재일조선인의 삶과 그걸 그저 눈물만 훔치며 브라운관을 보고만 있는 우리의 태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