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롱(salon)은 여러 가지 의미를 가진 단어다. 첫 번째 의미는 손님을 맞이하는 응접실이다. 두 번째 의미는 그곳에서 열리는 사교 모임이다. 세 번째 의미는 활동 중인 화가들의 그림들을 모아서 정기적으로 개최하는 전시회다.

 

 

 

 

 

 

 

 

 

 

 

 

 

 

 

 

 

 

* 강준만 룸살롱 공화국(인물과사상사, 2011)

 

 

 

우리나라에 알려진 살롱의 의미는 앞에 언급한 것들과 다르다. 여종업원이 술 시중을 들어주는 유흥주점을 룸살롱이라고 부른다. 이곳에 칸막이가 있는 방들이 있다. 우리 사회의 오래된 폐부인 접대 문화를 분석한 강준만은 한국을 룸살롱 공화국’, ‘칸막이 공화국이라고 지적했다. 은밀한 접대는 칸막이를 해야 하고, 칸막이를 우아하게 만들어놓은 곳이 바로 룸살롱이다. 룸살롱의 전신은 요정(料亭)이다. 해방 이후 우리나라를 통치한 미군정에 빌붙으려는 세력들은 요정에서 미군정의 주요 인사들을 접대했다. 요정은 권력을 차지하고 싶은 자들이 늘 드나들었고, 밀실 접대를 통해 권력의 한 축이 된 사람들은 룸살롱의 고객이 되었다.

 

 

 

 

 

 

 

 

 

 

 

 

 

 

 

 

* [절판] 하이덴-린쉬 유럽의 살롱들(민음사, 1999)

* 서정복 살롱 문화(살림, 2003)

* 메릴린 옐롬, 테리사 도너번 브라운 여성의 우정에 관하여(책과함께, 2016)

 

 

 

이제부터 진짜로 살롱에 대해서 살펴보자. 17~18세기 유럽의 귀족과 지식인들은 응접실에 모여 찻잔을 기울이며 과학과 문학, 예술과 정치 등을 논했다. 허영에 찬 상류층의 모임이라는 비판이 있지만, 살롱에서 이뤄진 방대한 정보와 지식의 교류는 프랑스 대혁명과 계몽주의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살롱은 여성해방의 공간이기도 했다. 사회적 영향력이 있는 살롱의 여주인들은 재기와 언변을 바탕으로 유명 인사들을 끌어들이려 각축전을 벌이기도 했다. 그녀들의 삶과 전설은 유럽의 살롱들(민음사)이라는 책에 자세히 나와 있다. 이 책의 부제는 지금은 몰락한 여성 문화의 황금기. 유럽의 살롱들은 프랑스, 독일, 영국의 살롱 문화의 특징과 각국의 살롱 문화를 대표하는 여성들의 주요 활동을 살펴볼 수 있는 책이다. 20세기까지 이어진 살롱은 정숙한 여성의 역할을 강요해온 가부장적 사회 규범을 타파하는 여성 해방의 자유로운 무대였다. 유럽의 살롱들은 절판되었는데, 이 책의 빈자리를 살롱 문화(살림)가 대신하고 있다.

 

남성 중심의 문화와 역사 기록에 가려진 여성의 다양한 우정과 연대 방식을 주목한 여성의 우정에 관하여(책과함께)도 여성의 살롱 문화를 비중 있게 언급한 책이다. 살롱 문화를 이끌어간 영국 여성들은 블루스타킹(bluestocking)이라는 별명이 붙여졌다. 1750년대는 영국의 살롱 문화가 활발히 이루어진 시기였다. 이 시기에 가장 주목받은 살롱의 여주인은 엘리자베스 몬터규(Elizabeth Montagu). 그녀의 모임에 자주 참석한 식물학자 벤저민 스틸링플릿(Benjamin Stillingfleet)는 블루스타킹을 착용했다. 그가 모임에 불참하게 되자 몬터규는 벤저민의 부재를 아쉬워했다. 그 후로 몬터규의 살롱 회원들은 블루스타킹을 착용하기 시작했다. 블루스타킹을 신은 사람은 모임에 열심히 활동하는 똑똑한 사람을 상징하게 됐고, 자연스럽게 지적인 살롱 회원을 의미하는 별명으로 남게 됐다. 그러나 여성이 남성 중심 사회에 개입하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긴 일부 사람들은 살롱에 참석하는 여성들을 가리켜 블루스타킹이라고 불렀다. 이때부터 블루스타킹은 유식한 여성을 비하하는 말이 됐고, 19세기 초에는 여성 참정권 운동에 뛰어든 여성을 조롱하는 말로 쓰이기도 했다.

 

 

 

 

 

 

 

 

 

 

 

 

 

 

 

 

 

* 한일근대여성문학회 옮김 세이토(어문학사, 2007)

* 정애영 히라쓰카 라이초(살림, 2019)

 

 

 

미국과 영국의 여성 참정권 운동에 영향을 받은 일본의 여성주의자들은 19119월에 <세이토(靑鞜, 청탑)>라는 여성문예 잡지를 창간했다. 세이토는 블루스타킹을 한자어로 바꾼 단어이다. 이 잡지 창간 및 편집에 주도적으로 참여한 히라쓰카 라이초(平塚雷鳥)천재적인 여성의 등장을 역설한 글 원래 여성은 태양이었다<세이토> 창간호에 게재했다. 원래 여성은 태양이었다는 처음에 이렇게 시작한다.

 

 

 원래, 여성은 태양이었다. 진정한 인간이었다.

 지금, 여성은 달이다. 타인에 의해 살아가고 타인의 빛에 의해 빛나는 병자와 같은 창백한 얼굴의 달이다.

 지금 세이토는 태어났다.

 현재 일본 여성의 두뇌와 손에 의해 세이토는 처음 태어났다.

 

 

(히라쓰카 라이초, 원래 여성은 태양이었다중에서, 세이토39)

 

 

 

 

여성은 태양이었다가부장제 사회 한가운데에 근대 일본 여성주의의 시작을 알리는 선언이다. 라이초는 이 글에서 대지를 비추는 태양처럼 빛나는 독립적이고 주체적인 여성이야말로 진정한 인간이라고 주장한다.

 

 

 

 

 

 

 

 

 

 

 

 

 

 

 

 

* [우주지감 9월의 책] 나혜석, 장영은 엮음 나혜석, 글 쓰는 여자의 탄생(민음사, 2018)

* [절판] 이상경 나는 인간으로 살고 싶다(한길사, 2009)

 

 

 

라이초와 <세이토>는 각각 일본의 신여성 운동을 대표하는 인물과 매체로 되었고, 일본에 유학한 조선의 여성주의자들은 이 잡지를 통해 주체적인 인간으로서의 여성의 삶에 관심을 가지게 됐다. 조선보다 한 발 앞선 일본의 여성해방 운동에 영향을 받은 여자 유학생들은 여자유학생친목회라는 이름의 단체를 만들어 19176[]<여자계(女子界)>를 발간했다. 여자유학생친목회 회원 중에 그 유명한 나혜석도 포함되어 있다. <여자계>우리나라 최초의 여성잡지 혹은 학술지로 평가받는다. 나혜석은 이 잡지를 통해 여성을 순종적으로 만드는 현실(결혼)과 여성해방의 이상 사이에 고뇌하는 신여성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소설 경희를 발표한다. 나혜석은 자신의 글 이상적 부인에 라이초를 간접적으로 언급할 정도로 그녀를 신여성 운동의 본보기로 삼았다.

 

 

 

 

 

 

 

 

 

 

 

 

 

 

 

 

* [절판] 박노자 우리가 몰랐던 동아시아(한겨레출판, 2007)

 

 

 

그러나 라이초는 영국과 미국으로부터 들어온 우생학을 옹호했으며 일본의 파시즘에 협조하는 행보를 보였다. 그녀는 여성의 인권 신장을 위해서 국가에 봉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녀의 모습은 일본의 아시아 침략과 일본의 조선 지배를 옹호한 조선의 신여성들의 모습과 비슷하다. 신여성의 태양라이초는 1930년대부터 신여성의 욱일(旭日)이 되기 시작했다. 종전 이후에 라이초는 반전 운동가로 활동했다. 그러나 그녀가 반전 운동을 했다고 해서 신여성 운동의 한계가 잊히는 건 아니다. 박노자의 우리가 몰랐던 동아시아(한겨레출판)에 수록된 신여성의 명암, 히라쓰카 라이초는 단순히 일본 신여성 운동의 한계를 지적하는 글이 아니라 그녀들에게 영향을 받은 조선 신여성 운동의 한계까지 되돌아보게 만드는 글이다.

 

몇 년 전부터 나혜석을 필두로 해서 신여성을 조명한 책들이 많이 나왔다. 그러나 대부분의 책은 신여성의 ()만 소개하는 데 그친다. 시대를 앞서간 선배라고 해서 너무 띄워주면 곤란하다. 태양 빛을 너무 많이 쬐면 암(癌)이 생긴다. 훌륭한 선배가 있다면 그와 정반대로 살아가는 불량한 선배도 있기 마련이다. 불량한 선배들의 과거 행적은 여성 운동의 오점이자 흑역사로 남게 되지만, 이와 같은 일이 재현되지 않으려면 그것을 밟고넘어야 한다. ‘신여성의 암(暗)은 그냥 건너뛸 수 없는 페미니즘의 문제이다.

 

 

 

 

[] 안타깝게도 <여자계>의 창간호는 현재 남아 있지 않다. 현재 남아있는 <여자계> 원본은 2호와 6호 뿐이다. 그래서 <여자계> 창간호 발행연도가 정확하게 언제인지 분명하지 않다. 나혜석의 일대기를 정리한 나는 인간으로 살고 싶다(한길사)의 저자 이상경<여자계>의 창간호 발행연도를 ‘19177이라고 주장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8)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전자책] 헐리벌리 저택의 신들린 오르간 연주자 빅토리안 호러 컬렉션 7
로사 멀홀랜드 / 올푸리 / 2020년 1월
평점 :
판매중지


 

 

1인 전자책 출판사 올푸리의 출판 속도는 상당히 빠른 편이다. 이 출판사는 빅토리아 호러 컬렉션(Victorian Horror Collection)이라는 이름으로 빅토리아 시대 영국과 아일랜드에서 발표된 단편 환상소설(공포소설)을 소개하고 있다. 올해 올푸리 출판사가 펴낸 전자책은 총 6권이다. 6권의 작품은 다음과 같다.

 

 

* 샬롯 리델 열린 문(20191)

* 아서 맥킨 오비의 빛(20194)

* 메리 엘리자베스 브래든 귀퉁이 그림자(20195)

* 브람 스토커 판사의 집(20197)

* 로사 멀홀랜드 헐리벌리 저택의 신들린 오르간 연주자(20198)

* 허버트 조지 웰스 붉은 방(20198)

 

 

이 중에 우리나라에 처음 번역된 작품은 4(열린 문, 오비의 빛, 귀퉁이 그림자, 헐리벌리 저택의 신들린 오르간 연주자)이다. 지난달에는 두 편의 작품이 거의 동시에 나왔다. 그중에서 내가 읽은 작품은 헐리벌리 저택의 신들린 오르간 연주자(The Haunted Organist of Hurly Burly, 줄여서 오르간 연주자’).

 

로사 멀홀랜드(Rosa Mulholland)1841년 아일랜드의 명문가 출신 차녀로 태어나 1921년 더블린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녀는 열다섯 살 때부터 글을 써서 각종 문예지에 투고했지만 큰 반응을 얻지 못했다. 그러나 그녀의 작품을 높이 평가한 사람이 있었다. 그 사람은 바로 찰스 디킨스(Charles Dickens). 디킨스의 독려를 받은 멀홀랜드는 작가 활동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녀의 작품은 디킨스가 발행하는 문예지에 실리면서 드디어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오르간 연주자1891년에 발표되었다. 헐리벌리 마을에 있는 고풍스러운 저택에 기이한 사연을 간직한 오르간이 있다. 그 오르간의 주인인 루이스 헐리(Lewis Hurly)는 고인이다. 오르간은 루이스의 늙은 부모가 관리하고 있다. 아니, 아들이 애지중지 아낀 오르간을 방에 고이 보관해두는 것이 아니라 그냥 오르간을 방치하고 있다고 설명하는 게 적절하다. 왜냐하면 오르간은 루이스를 죽음에 이르게 한 저주의 악기이기 때문이다.

 

어느 날 리자(Lisa)라는 여성이 헐리 벌리 저택에 찾아온다. 그녀는 노부부에게 자신을 루이스의 약혼녀라고 밝힌다. 노부부는 루이스는 20년 전에 세상을 떠났다고 말하지만, 리자는 노부부의 말을 믿지 않는다. 리자는 자신과 약혼한 루이스가 여전히 살아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자신은 루이스의 부탁을 받고 저택에 왔다고 말한다. 그녀가 말한 루이스의 부탁저택에 있는 오르간을 쉬지 않고 온종일 연주하는 것이다. 노부부는 리자를 설득하기 위해 루이스의 약혼자였던 마거릿 캘더우드(Margret Calderwood)를 만나보라고 한다. 캘더우드는 망상에 빠진 리자를 위해 루이스의 과거를 들려준다. 루이스는 악마를 숭배하는 일에 빠져 자신의 친구들과 함께 행패를 부리고 다닌다. 루이스와 그 일행은 자신들을 악마 클럽이라고 불렀다. 그들은 고인을 모욕하는 일만 골라서 저지른다. 하루는 루이스 일행은 장례식장에서 난동을 부린다. 루이스는 오르간을 연주하면서 불경한 노래를 크게 부른다. 분노한 고인의 아버지는 루이스와 오르간을 저주한다. 여전히 정신을 못 차린 루이스는 그 문제의 오르간을 헐리벌리 저택으로 가져왔고, 방문을 잠가 놓고 매일 오르간을 연주한다. 미친 듯이 오르간을 연주하는 루이스의 모습을 본 마거릿은 알 수 없는 이유로 인해 그가 오르간의 노예가 되었다는 것을 알아차린다. 마거릿은 리자에게 악마의 계략에 휘말리지 말라고 당부하지만, 리자는 루이스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저주의 손아귀에 떨어진 지 오래다. 오르간은 지속적으로 리자를 괴롭힌다.

 

오르간 연주자는 서양 단편 공포소설 선집에 수록될만한 가치 있는 작품이다. 왜 이 소설이 그동안 국내에 한 번도 번역되지 않았는지 의문이다. 멀홀랜드는 아일랜드 민담을 소재로 한 소설과 강인한 여성상을 드러내는 소설을 주로 썼다고 한다. 공포 문학과 페미니즘 문학에 관심이 있거나 두 장르를 연구하는 사람이라면 멀홀랜드의 소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재평가받을 만한 작품이 있을지도 모른다.

 

 

 

 

Trivia

 

 

전자책은 816일에 발행되었고, 826일에 본문의 오자가 수정되면서 업데이트되었다. 그런데 업데이트가 되었는데도 안 고쳐진 오자가 있다.

 

 

 

 

 

18쪽에 마거릿 캐덜우드라고 적혀 있다.

 

 

 

 

 

그리고 시리즈 소개내용에 있는 메리 셸리의 소설 프랑켄슈타인발표 연도가 ‘1817으로 잘못 적혀 있다. 프랑켄슈타인1818에 발표되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1인 전자책 출판사 페가나 북스2011년 아일랜드의 작가 로드 던세이니(Lord Dunsany)의 소설 페가나의 신들을 시작으로 해서 올해까지 11권의 던세이니 작품을 번역 출간했다. 작품 목록은 다음과 같다.

 

 

 

 

 

 

 

 

 

 

 

 

 

 

 

 

 

 

 

 

 

 

 

 

 

 

 

 

 

 

 

 

 

 

 

 

 

* [e-Book] 페가나의 신들(201110)

* [e-Book] 시간의 신들(20126)

* [e-Book] 웰러란의 검(20133)

* [e-Book] 몽상가의 이야기(20138)

* [e-Book] 판의 죽음(201411)

* [e-Book] 경이의 서(20156)

* [e-Book] 경이로운 이야기(20171)

* [e-Book] 세 반구 이야기(201711)

* [e-Book] 꿈의 땅에서 온 이야기(20184)

 

 

 

 

 

 

 

 

 

 

 

 

 

 

 

 

 

* [e-Book] 엘프랜드의 공주(20198)

* [e-Book] 로드 던세이니 단편선(20198)

 

 

 

 페가나의 신들시간과 신들은 단편집이며 완역본이다. 웰러란의 검, 몽상가의 이야기, 판의 죽음, 경이의 서, 경이로운 이야기, 세 반구 이야기, 꿈의 땅에서 온 이야기도 단편집이지만 몇몇 작품은 번역되지 않았다. 예전에 필자가 던세이니의 단편집에 수록된 이야기를 목록 형식으로 정리한 글을 쓴 적이 있다. 던세이니의 단편소설 목록을 알고 싶으면 필자의 졸문을 참고하면 된다

 

 

 

※ 「풍요 속의 몽상(2017422)

https://blog.aladin.co.kr/haesung/9295309

 

 

 

로드 던세이니 단편선9편의 단편집에 있는 모든 이야기를 수록한 합본이다. 던세이니는 단편뿐만 아니라 장편, , 희곡, 에세이까지 쓴 다작 작가이다. 엘프랜드의 공주(The King of Elfland’s Daughter)1924년에 발표된 장편 소설이다. 페가나 북스 공식 홈페이지에 이 소설을 간략하게 소개한 내용이 있는데, 그 내용에 보면 던세이니의 첫 번째 장편소설이라고 적혀 있다. 혼자서 던세이니의 작품을 번역하고 편집한 엄진 씨가 착각한 거로 보이는데 엘프랜드의 공주두 번째장편소설이다. 던세이니의 첫 번째 장편은 1922년에 발표된 환상소설 Don Rodriguez: Chronicles of Shadow Valley.

 

엘프랜드의 공주공주를 찾기 위해 모험을 떠나는 왕자(기사)를 주인공으로 한 중세 문학의 세계관이 반영된 소설이다. (Erl) 주민을 이끌어갈 차기 군주인 알베릭(Alveric) 왕자는 엘프랜드 왕국의 공주 리라젤(Lirazel)과 결혼하라는 부왕의 명령을 받는다. 엘프랜드는 인간 세상과 차원이 다른 요정 왕국이다. 엘프랜드 사람들의 시간 개념은 인간이 생각하는 시간 개념과 다르다. 엘프랜드에서의 하루(24시간)는 인간 세상의 10년과 같다. 엘프랜드에서는 시간이 흐른다라는 인식 자체가 없다. 그곳에는 영원한 아름다움이 존재하며 엘프랜드 사람들은 변화와 새로운 것을 추구하지 않는다. 그렇다 보니 리라젤은 아름다움을 손상시키는(노화) 시간의 힘을 두려워한다.

 

 

 

 

 

 

 

 

 

 

 

 

 

 

 

 

* 프리드리히 드 라 모테 푸케, 차경아 옮김 운디네(지만지, 2013)

 

 

 

 

 

 

 

 

 

 

 

 

 

 

 

 

* [개정판] 차경아 옮김 환상문학 걸작선 1(자음과모음, 2013)

* [구판 절판] 차경아 옮김 완역판 낭만동화집 1(자음과모음, 2006) [주1]

 

 

 

 

 

 

 

 

 

 

 

 

 

 

 

* [절판] 프리드리히 드 라 모테 푸케, 차경아 옮김 물의 요정 운디네(문예출판사, 2006)

* 프리드리히 드 라 모테 푸케 외 물의 요정의 매혹(이화여자대학교출판문화원, 2007) [주2]

 

 

 

 

인간을 사랑하는 요정(정령)은 오랫동안 유럽에서 신화, 전설 등에 자주 등장해왔다. 이 인물 설정은 낭만주의 작가들에게 영감을 준 모티프이기도 하다. 가장 유명한 요정은 운디네(Undine). 운디네는 강이나 연못에 사는 물의 요정이다. 그녀는 영혼을 가지지 않았지만, 인간을 사랑해서 아이를 낳으면 영혼을 얻을 수 있다. 그러나 인간 세상에 정착해서 살아가려는 요정에 제약이 따른다. 운디네와 결혼한 인간이 그녀를 욕하면, 그녀는 물이나 연못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런데 이별이 끝은 아니다. 이별보다 더 가슴 아프고 잔인한 비극이 나온다. 운디네의 전 남편이 재혼을 하면 운디네가 다시 나타나 그의 목숨을 빼앗는다.

 

독일의 낭만주의 작가 푸케(Friedrich de la Motte Fouque)운디네는 물의 요정과 인간의 비극적인 사랑 이야기다. 이 작품이 보여준 이성영역의 인간(남성)감성영역의 요정(여성)의 갈등과 실패한 사랑은 후대 작가들의 동화 작품에 영향을 주었고, 이 설정을 더욱 유명하게 만든 동화가 바로 안데르센(Andersen)인어 공주. 엘프랜드의 공주의 알베릭과 리라젤의 사소한 갈등 역시 운디네에 나오는 비극적인 설정과 유사하다. 그렇지만 이러한 설정은 독일 작가 푸케의 운디네로부터 영향을 받아서 만들었다기보다는 요정이 나오는 모국(아일랜드)의 전설과 민담에 영감을 받았다고 보는 게 옳다.

 

 

 

 

 

 

 

 

 

 

 

 

 

 

 

 

 

* [e-Book] 페가나 무크 Vol. 3(2019)

 

 

 

엘프랜드의 공주로드 던세이니 단편선을 읽기 전에 무료로 볼 수 있는 페가나 무크 Vol. 3을 먼저 보는 것이 좋다. 던세이니의 생애와 작품 세계를 요약해서 정리한 글이 수록되어 있다. 그리고 엄진 씨(무크지 본문에는 엄정진으로 표기되어 있다. 필명인가 아니면 본명인가?)가 추천하는 던세이니 단편 10이 소개되어 있다.

 

 

 

 

 

[주1] 구판에 오자 몇 개가 보인다.

 

[주2] 물의 요정을 주제로 한 단편소설과 시가 다섯 편씩 수록되어 있다. 다섯 편의 소설과 시를 쓴 사람 모두 독일인(루트비히 티크, 괴테, 푸케, E. T. A. 호프만, 에두아르트 뫼리케, 게르하르트 하우프트만, 하인리히 하이네, 아이헨도르프, 고트프리트 켈러)이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5)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stella.K 2019-09-17 15: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왜 꼭 전자책으로만 책을 내는지 모르겠어.
전자책이 싸고 좋은 점도 있겠지만
나 같은 구식인은 전자책 별로야.
다른 출판사에서 종이책으로 내주려나?
하긴 난 어차피 종이책으로 나와도 못 읽을 것 같긴하지만
종이책으로 안 내주니 괜히 심술이 나려고 해.

cyrus 2019-09-17 16:11   좋아요 1 | URL
종이책으로 나오기 힘든 작품은 전자책으로 나올 수밖에 없어요. 종이책 만드는 출판사 대부분은 흔히 ‘고전’이라고 알려진 대중성 있는 작품들을 선호해요. 그래야 많이 팔릴 수 있으니까요. 던세이니의 전 작품을 종이책으로 나온다면 사려는 사람은 많지 않을 거예요. 출판사는 인지도가 낮은 작품을 내는 것을 꺼려해요. 그래서 1인 전자책 출판사들이 대단한 거예요. 한 사람이 안 팔리는 작품을 직접 번역하고 편집하고 출판 홍보를 하니까요. 그들도 알아요. 자신이 만든 소설이 너무 오래됐고 재미없다는 걸요. 그렇지만 문학적 가치가 있어서 포기하지 않고 번역하고 책을 만들어요. 이렇게 열심히 일하는 출판사의 책에 리뷰나 페이퍼가 없으면 안타까워요.
 
독학은 어떻게 삶의 무기가 되는가 - 지적 전투력을 높이는 독학의 기술
야마구치 슈 지음, 김지영 옮김 / 앳워크 / 2019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내면을 성장하는 데 독서만 한 방법이 있을까. 그러나 풍성한 영상 콘텐츠들을 언제 어디서든 접할 수 있는 시대 속에서 책을 엄청나게 좋아하는 사람을 좀처럼 만나기 쉽지 않다. 독서가 중요하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는데, 왜 지속적인 독서가 어려운 것일까? 책 한 권을 읽는 것은 상당한 인내력이 있어야 하는 일이다. 이제는 시간과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컴퓨터나 태블릿 PC, 스마트폰 등을 통해 원하는 정보를 찾을 수 있다. 검색 방법을 잘 활용하고 거짓 정보를 잘 피한다면 인터넷상에서도 신뢰도가 높은 유익한 정보를 몇 분 만에 얻을 수 있다.

 

요즘 국내의 독서 장려 운동은 독서문화 확산을 위해 마을 도서관을 세우거나 동네 서점을 지원하는 방식으로 진행되고 있다. 하지만 이제는 읽어야 할 책이 너무 많아진 시대가 되었다. 애서가들은 읽을 책이 많아서 행복한 고민을 하겠지만, 책을 가까이하지 않은 사람들은 정말로 고민에 빠진다. 저 많은 책 중에 뭐부터 읽으면 좋지?’ 이들의 고민은 남 일 같지 않다. 책 속에 있는 정보를 얻으려고 할 때 가장 먼저 하는 것은 캐내려 하는 정보가 많이 묻힌 광맥과 같은 책을 고르는 일이다. 한정된 시간에 광맥을 찾아내는 것이 중요하다. 광맥을 찾아 나서는 과정이 생각보다 길어지면 다음 단계인 정보를 캐내고 연마하는 작업으로 전진하지 못하게 된다. 공부의 시작은 독서다. 결국, 책을 읽는다는 것은 한 사람이 깊은 내공을 쌓는 데 필요한 정보를 받아들이는 일이다. 나는 책 속에 있는 정보를 읽는 행위를 통해 인풋(input)하여 글쓰기로 아웃풋(output)하는 과정이 몸에 밴 독자이다. 그러나 인풋 단계를 제대로 시작하지 못해 흐지부지된 경우가 많았다. 내가 생각해도 읽어야 할 책을 너무 신중하게 살펴보는 데 할애했다.

 

혼자서 공부하는 일, 즉 독학은 지식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서 현상의 참된 성질을 꿰뚫어 보는 무기로 활용하는 과정이다. 독서를 좋아하는 학구적인 사람이라면 독학에 몰두하는 데 시간을 보낸다. 나는 9년째 그렇게 살아왔다. 그런데 내게 한 가지 큰 문제가 있다. 책을 열심히 읽었는데도 책에서 찾은 정보를 기억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다 보면 책에서 본 내용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한다. 이 고질적인 문제점의 원인을 알아내서 해결하고 싶어서 독학은 어떻게 삶의 무기가 되는가라는 책을 고르게 됐다.

 

저자는 독학을 지적 전투력의 향상을 위한 어른의 공부로 본다. ‘전투라는 표현 때문에 거부감을 느끼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저자는 지적 전투력을 인간의 신체 능력인 순발력과 지구력으로 비유한다. 순발력은 순간적으로 힘을 발휘하는 능력이고, 지구력은 오랜 시간 힘을 발휘할 수 있는 능력이다. 이 두 가지 신체 능력을 지적 능력으로 연관 지어서 설명하면 지적 전투력의 의미에 대한 이해가 빠를 것이다. 지적 전투력에서의 순발력이 내가 알고 있는 정보를 특정 상황에서 적절하게 사용하는 능력이라면, (지적 전투력에서의) 지구력은 과거에 습득한 정보를 잘 축적하는 능력이다. 지적 전투력이라고 해서 상대방을 살벌하게 지적하기 위해 공부해야 할 지식의 양이라고 생각하면 곤란하다. 지식의 양으로 누군가를 공격하는 것은 독학의 목표가 될 수 없다. 즉 이 책에서 말하는 지적 전투력은 지적 싸움의 기술이 아니다.

 

저자의 독학은 인풋(독서)와 아웃풋(글쓰기)에 중점을 둔 기존의 지적 생산 방식과 다르다. 저자는 지적 생산 방식을 하나의 시스템으로 이미지화한다. 이 시스템은 전략’, ‘인풋’, ‘추상화 및 구조화’, ‘축적으로 이루어져 있다. 전략은 독학을 실행하기 위한 과정을 계획하는 일이다. 독학을 시작하려는 사람은 이 전략 단계에서 자신이 공부하고 싶은 테마(Thema)를 설정하고, 어떻게 하면 그 테마를 이해하는 데 필요한 정보를 찾을 수 있는지 생각한다. 전략을 수립했으면 인풋 단계로 가면 된다. 책이나 각종 기타 자료 등을 통해 정보를 획득한다. 인풋 단계에서 습득한 정보를 추상화하고 구조화한다. 추상화는 정보의 핵심을 요약하고 정리하는 것이고, 구조화는 자신만의 관점으로 요약한 정보를 분석하고 조합하여 거기에 의미를 부여하는 일이다. 추상화 및 구조화된 정보를 실생활에 활용할 수 있도록 잘 축적해두어야 한다. 마지막 축적 단계는 내 것으로 만든 정보를 잘 저장하고 관리하는 작업이다. 축적 작업은 지식과 정보를 외우는방식과 다른 의미다. 지금까지 나는 지식과 정보를 기억하기 위해 책을 읽거나 공부를 해왔다. 그러나 저자는 기억하는 것이 독학의 목표가 아니라고 강조한다. 많은 양의 지식과 정보를 가지고 있어도 시간이 지나면 다 잊어버린다. 그리고 지식과 정보에도 유통기한이 있다. 따라서 무조건 기억해야 한다는 심정으로 공부하지 않아도 된다. 유통기한이 지난 지식과 정보를 배출하고, 공간이 넉넉해진 저장고에 신선한 지식과 정보를 넣어두는 과정이 이루어져야 한다. 저자가 말한 독학의 과정을 충실히 실행하면 저장고에 모아둔 정보를 필요할 때마다 꺼낼 쓸 수 있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내 문제점이 무엇인지 알았다. 나는 암기에 대한 강박관념을 갖고 있었다. 암기 중심의 독서와 독학에 몰두하다 보니 내가 습득한 지식과 정보를 추상화하고 구조화하는 작업을 소홀히 했다. 독학은 어떻게 삶의 무기가 되는가는 단순히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독학이 아닌 새롭게 변하는 세상 속에 유연하게 살아가는 인간으로 만들어주는 독학이 무엇인지를 보여준다. 내가 추구하는 독학은 저자가 말하는 삶의 무기를 만드는 과정이 아니다. 독학은 내 삶에 지루할 틈을 없게 하는 즐거운 놀이다. 독학을 통해서 새로운 정보로 가득한 세상을 만나고, 그 세상을 자유롭게 탐험하면서 지적인 안목을 넓힌다면 아주 재미있고 풍요로운 인생이 될 수 있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댓글(8) 먼댓글(0) 좋아요(36)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라온 2019-09-16 20: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은 어떻게 삶의 무기가 되는가 시리즈인가요?^^

cyrus 2019-09-17 11:41   좋아요 0 | URL
전작인 <철학은 어떻게 삶의 무기가 되는가>의 성공적인 반응 때문에 이런 제목을 쓴 것 같아요. ^^

2019-09-17 01:04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9-09-17 11:43   좋아요 0 | URL
저도 책에서 본 내용을 다 기억하지 못해요. 모르거나 잊어버리면 그 책을 다시 볼 수밖에 없어요.. ㅎㅎㅎ

영어 논문을 써본 적이 없어서 잘 모르겠지만, 영어 논문 작성법은 시간이 지나도 크게 달라지지 않을 것 같아요. ^^;;

조그만 메모수첩 2019-09-17 10: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무조건 기억해야 한다는 심정으로 공부하지 않아도 된다”에서 힐링받고 갑니다... 다만 배출해야 할 정보는 쌓이고 간직해야 할 정보는 휘발되는 문제가ㅠㅠ 잘 읽었습니다

cyrus 2019-09-17 11:43   좋아요 1 | URL
저자가 그렇게 말해주니 정말 고마웠고 위안이 되었어요... ㅠㅠ

페크pek0501 2019-09-25 12:4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철학은 어떻게 삶의 무기가 되는가, 라는 책을 통해 알게 된 저자인데 이런 책도 냈군요.
흥미로운 주제를 다룬 책이네요. 읽은 책에서 얻은 지식과 정보를 어떻게 재배치, 재구성하는가가 관건인 것 같아요. 재구성할 때 자신의 신선한 생각이 창출되어야 하는 점이 저는 어렵습니다. 다른 말로 새 관점이겠지요.
유익한 글, 잘 읽었습니다.

cyrus 2019-09-25 16:16   좋아요 0 | URL
내가 알고 있는 지식을 동원해서 새로운 생각을 도출하는 작업은 쉬운 일이 아니에요. 독창적으로 생각한 걸 글로 쓰고 나면 뿌듯한 마음이 생겨요. 그런데 이미 누군가가 먼저 생각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민망해요.. ^^;;
 

 

 

 

지난달 마지막 주 월요일(826)페미니즘 스쿨이 휴강하는 날이었다. 특별히 이날에 레드스타킹이 인터뷰이(interviewee)가 되어 청년인문상상프로젝트 기자단과 인터뷰를 했다.

 

 

[인문상상 인터뷰] 대구 청년들의 페미인문스쿨! ‘레드스타킹인터뷰!

https://blog.naver.com/korea-humanist/221636576950

 

 

나는 일부러 늦게 인터뷰에 참여하려고 생각했었다. 나보다 먼저 인터뷰 진행 장소(카페 스몰토크)에 도착한 멤버들이 인터뷰어의 (수준 높은) 질문들에 잘 응해줄 거라 믿었다. 그런데 인터뷰 진행 장소에 도착해보니 인터뷰가 시작되고 있었다. 도착하자마자 자기소개를 했다.

 

인터뷰에 응하기 전에 기자단이 만들어서 보내준 예상 질문들을 확인했다. 그 중에 제일 마지막 질문이 압권이었다.

 

 

레드스타킹팀에게 인문이란 무엇인가요?

 

 

멤버들이 가장 어려워하는 질문이었다. 그래도 질문에 대한 답변을 준비해온 분들이 있었다. 혹시나 내게 이 질문이 올까 봐 대답할 말을 생각해봤다. 인터뷰 내용을 정리한 블로그(위에 있는 링크를 참조할 것)“‘레드스타킹팀에게 인문이란 무엇인가요?”에 답변한 레드스타킹 멤버 1’은 나다. 기자단 중에 인터뷰 내용을 노트북으로 속기한 분이 있었는데, 내가 한 말을 정확하게 잘 썼다.

 

 

 

 

 

 

 

 

 

 

 

 

 

 

 

 

* 마틴 푸크너 글이 만든 세계(까치, 2019)

 

 

 

인문학의 인문(人文)은 인간()과 글()이 합쳐진 단어다. 국어사전에 등재된 인문의 뜻은 인류의 문화. 문화에는 여러 가지 유형이 있지만, 그중에 가장 오래된 문화는 기록 문화. 하버드대 영문과 교수 마틴 푸크너(Martin Puchner)는 이야기를 하는 행위(storytelling)와 글쓰기(writing)가 교차하는 문화가 탄생하면서 문학이 등장했다고 말한다. 이렇듯 인문학의 역사가 글쓰기라는 문화혁명과 함께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나는 글쓰기에 중점을 둔 인문의 의미를 제고해보고 싶었다. 책을 읽은 다음에 곰곰이 생각해서, 생각한 것을 글로 기록하면 나의 내면을 성장하는 데 도움이 될까? 그게 바로 인문학이라 할 수 있을까? 기록에 초점을 맞춘 인문학은 나 혼자 묻고 답하는 일을 반복할 뿐이다. 이런 인문학은 자신의 삶에만 몰두하는 고상한 개인주의로 전락할 수 있다. 그래서 나와 여러 사람과 함께하는 인문학이 필요하다.

 

나는 인문(人文)인문(人問)으로 바꿔서 써보고 싶다. 인문의 은 기존의 인문학에서 요구하던 자성과 성찰을 의미하지 않는다. 다른 사람에게 질문하는 행위를 뜻한다. 기존의 인문학은 내가 생각한 것을 글로 쓰는 행위가 있는 학문이라면, 인문학(人問學)은 내가 생각한 것을 다른 사람과 공유하고, 그들과 함께 대화를 나누면서 상식과 진리를 의심하고 점검하는 학문이다. 대부분 글은 내가 생각한 것은 이렇다’, ‘나는 ~을 이해했으며 충분히 ~을 알고 있다라는 식으로 남게 된다. 그러나 여러 사람과 대화를 하면 나는 이렇게 생각했는데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세요?’라고 질문을 할 수 있다. 질문하는 것 자체를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정직한 질문은 딱딱하게 굳어버린 진리를 부드럽게 하거나 산산조각 나게 만든다.

 

 

 

 

 

 

 

 

 

 

 

 

 

 

 

* 김보영, 김보화 스스로 해일이 된 여자들(서해문집, 2019)

 

 

 

페미니즘이 인문학(人問學)이라고 하면 섣부른 확신을 배제하고 끊임없이 질문하는 행위가 동반되어야 한다. 절대 부동의 진리는 없다. 진리에 반기를 들고 비판하는(받는) 과정도 공부다. 다만 즐거운 공부가 되어야 한다. 옳고 그름을 따지기만 하는 공부는 따분하고 스트레스를 유발한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페미니즘을 즐겁게 공부할 수 있을까?

 

국내 페미니스트들의 활동을 소개하고, 그들의 진솔한 생각을 담은 책인 스스로 해일이 된 여자들(서해문집)에 퀴어 페미니즘 운동 그룹 페미몬스터즈의 인터뷰 내용이 실려 있다. 인터뷰에 응한 페미몬스터즈 멤버는 이렇게 말한다.

 

 

 

(인터뷰어 질문) 같이 살아가고 있는 페미니스트들과 나누고 싶은 이야기는 어떤 것인가요?

 

이 운동이 우리에게 즐거운 것이었으면 좋겠어요, 페미니즘을 만나는 건 자기가 깨지는 경험이기도 하잖아요. 삶이 완전히 뒤바뀌는 경험인데, 그게 자신을 병들거나 낙담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더 즐겁게 하는 거였으면 좋겠어요.

 

(스스로 해일이 된 여자들, 38, 밑줄은 필자가 그은 것임)

 

 

 

자기가 깨지는 경험은 어떠한 진리와 상식을 머리와 가슴속에 품고 살아온 를 깨뜨리는 경험이다. ‘를 조금씩 깨뜨리기 시작할 땐 아프다. 그러나 한번 깨지고 나면 머리와 가슴속에 있던 오래된 진리와 상식이 말끔하게 비워지기 때문에 상쾌하다. ‘중이 제 머리를 못 깎는다라는 속담이 있듯이, ‘자기가 깨지는 경험은 나 혼자서 할 수 없다. 반성의 글을 쓴다고 해서 그 마음이 실천으로 이루어지는 건 아니다. 글 쓰는 행위만 가지고는 나를 깨뜨리기 힘들다. 남의 손을 빌려야만 이루어질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독서 모임에 참여해서 여러 사람과 함께 즐거운 공부를 해야 한다. ‘즐거운 공부를 자발적으로 하게 만드는 활발한 모임 분위기와 크고 작은 질문과 다른 의견을 귀담아 들어주는 훌륭한 멤버들이 있어서 나는 2년 동안 레드스타킹 독서 모임에 참석해왔고, 페미니즘 스쿨을 시작할 수 있었다.

 

레드스타킹인터뷰는 대구 페미니즘 북클럽 레드스타킹이 어떠한 모임인지 잘 보여주는 기록이다. 레드스타킹이 궁금한 분이라면 이 인터뷰를 참고하셔도 좋다. 이 인터뷰에 참여한 분들은 모임에 꾸준히 나오는 열혈 멤버이고, 나보다 더 오랫동안 여성학을 공부한 페미니스트다.

 

인터뷰 내용에 글을 작성한 기자단의 실수로 보이는 오류가 있다. 레드스타킹을 소개하는 내용 중에 지난해 10 팀 이름을 레드스타킹으로 지었다라는 문장이 있다. 모임 명인 레드스타킹은 지난해 10월이 아니라 201710부터 정식으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Trivia

 

스스로 해일이 된 여자들의 인터뷰이로 참여한 페미니즘 모임 중에 나쁜 페미니스트라는 모임이 있다. 줄여서 나페라고 부른다. 대구에서 레드스타킹보다 오랫동안 활동한 페미니즘 모임이다. 대구에서 활동하는 분들이다 보니 페미니즘 강연이나 행사에 참석하면 나페멤버들을 자주 만난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26)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19-09-16 15: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9-09-16 18:03   좋아요 0 | URL
그럼요. 집에서 푹 쉬었습니다.. ㅎㅎㅎ 유레카님은 추석 잘 보내셨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