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마지막 주 월요일(8월 26일)은 페미니즘 스쿨이 휴강하는 날이었다. 특별히 이날에 레드스타킹이 인터뷰이(interviewee)가 되어 청년인문상상프로젝트 기자단과 인터뷰를 했다.
※ [인문상상 인터뷰] 대구 청년들의 페미인문스쿨! ‘레드스타킹’ 인터뷰!
https://blog.naver.com/korea-humanist/221636576950
나는 일부러 늦게 인터뷰에 참여하려고 생각했었다. 나보다 먼저 인터뷰 진행 장소(카페 스몰토크)에 도착한 멤버들이 인터뷰어의 (수준 높은) 질문들에 잘 응해줄 거라 믿었다. 그런데 인터뷰 진행 장소에 도착해보니 인터뷰가 시작되고 있었다. 도착하자마자 자기소개를 했다.
인터뷰에 응하기 전에 기자단이 만들어서 보내준 예상 질문들을 확인했다. 그 중에 제일 마지막 질문이 압권이었다.
‘레드스타킹’ 팀에게 인문이란 무엇인가요?
멤버들이 가장 어려워하는 질문이었다. 그래도 질문에 대한 답변을 준비해온 분들이 있었다. 혹시나 내게 이 질문이 올까 봐 대답할 말을 생각해봤다. 인터뷰 내용을 정리한 블로그(위에 있는 링크를 참조할 것)에 “‘레드스타킹’ 팀에게 인문이란 무엇인가요?”에 답변한 ‘레드스타킹 멤버 1’은 나다. 기자단 중에 인터뷰 내용을 노트북으로 속기한 분이 있었는데, 내가 한 말을 정확하게 잘 썼다.
* 마틴 푸크너 《글이 만든 세계》 (까치, 2019)
인문학의 ‘인문(人文)’은 인간(人)과 글(文)이 합쳐진 단어다. 국어사전에 등재된 ‘인문’의 뜻은 ‘인류의 문화’다. 문화에는 여러 가지 유형이 있지만, 그중에 가장 오래된 문화는 ‘기록 문화’다. 하버드대 영문과 교수 마틴 푸크너(Martin Puchner)는 이야기를 하는 행위(storytelling)와 글쓰기(writing)가 교차하는 문화가 탄생하면서 문학이 등장했다고 말한다. 이렇듯 인문학의 역사가 ‘글쓰기’라는 문화혁명과 함께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나는 글쓰기에 중점을 둔 ‘인문’의 의미를 제고해보고 싶었다. 책을 읽은 다음에 곰곰이 생각해서, 생각한 것을 글로 기록하면 나의 내면을 성장하는 데 도움이 될까? 그게 바로 인문학이라 할 수 있을까? 기록에 초점을 맞춘 인문학은 나 혼자 묻고 답하는 일을 반복할 뿐이다. 이런 인문학은 자신의 삶에만 몰두하는 고상한 개인주의로 전락할 수 있다. 그래서 나와 여러 사람과 함께하는 인문학이 필요하다.
나는 ‘인문(人文)’을 ‘인문(人問)’으로 바꿔서 써보고 싶다. 인문의 ‘문’은 기존의 인문학에서 요구하던 자성과 성찰을 의미하지 않는다. 다른 사람에게 질문하는 행위를 뜻한다. 기존의 인문학은 내가 생각한 것을 글로 쓰는 행위가 있는 학문이라면, 인문학(人問學)은 내가 생각한 것을 다른 사람과 공유하고, 그들과 함께 대화를 나누면서 상식과 진리를 의심하고 점검하는 학문이다. 대부분 글은 ‘내가 생각한 것은 이렇다’, ‘나는 ~을 이해했으며 충분히 ~을 알고 있다’라는 식으로 남게 된다. 그러나 여러 사람과 대화를 하면 ‘나는 이렇게 생각했는데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세요?’라고 질문을 할 수 있다. 질문하는 것 자체를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정직한 질문은 딱딱하게 굳어버린 진리를 부드럽게 하거나 산산조각 나게 만든다.
* 김보영, 김보화 《스스로 해일이 된 여자들》 (서해문집, 2019)
페미니즘이 인문학(人問學)이라고 하면 섣부른 확신을 배제하고 끊임없이 질문하는 행위가 동반되어야 한다. 절대 부동의 진리는 없다. 진리에 반기를 들고 비판하는(받는) 과정도 공부다. 다만 ‘즐거운 공부’가 되어야 한다. 옳고 그름을 따지기만 하는 공부는 따분하고 스트레스를 유발한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페미니즘을 즐겁게 공부할 수 있을까?
국내 페미니스트들의 활동을 소개하고, 그들의 진솔한 생각을 담은 책인 《스스로 해일이 된 여자들》(서해문집)에 퀴어 페미니즘 운동 그룹 ‘페미몬스터즈’의 인터뷰 내용이 실려 있다. 인터뷰에 응한 페미몬스터즈 멤버는 이렇게 말한다.
(인터뷰어 질문) 같이 살아가고 있는 페미니스트들과 나누고 싶은 이야기는 어떤 것인가요?
이 운동이 우리에게 즐거운 것이었으면 좋겠어요, 페미니즘을 만나는 건 자기가 깨지는 경험이기도 하잖아요. 삶이 완전히 뒤바뀌는 경험인데, 그게 자신을 병들거나 낙담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더 즐겁게 하는 거였으면 좋겠어요.
(《스스로 해일이 된 여자들》, 38쪽, 밑줄은 필자가 그은 것임)
‘자기가 깨지는 경험’은 어떠한 진리와 상식을 머리와 가슴속에 품고 살아온 ‘나’를 깨뜨리는 경험이다. ‘나’를 조금씩 깨뜨리기 시작할 땐 아프다. 그러나 한번 깨지고 나면 머리와 가슴속에 있던 오래된 진리와 상식이 말끔하게 비워지기 때문에 상쾌하다. ‘중이 제 머리를 못 깎는다’라는 속담이 있듯이, ‘자기가 깨지는 경험’은 나 혼자서 할 수 없다. 반성의 글을 쓴다고 해서 그 마음이 실천으로 이루어지는 건 아니다. 글 쓰는 행위만 가지고는 나를 깨뜨리기 힘들다. 남의 손을 빌려야만 이루어질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독서 모임’에 참여해서 여러 사람과 함께 즐거운 공부를 해야 한다. ‘즐거운 공부’를 자발적으로 하게 만드는 활발한 모임 분위기와 크고 작은 질문과 다른 의견을 귀담아 들어주는 훌륭한 멤버들이 있어서 나는 2년 동안 레드스타킹 독서 모임에 참석해왔고, 페미니즘 스쿨을 시작할 수 있었다.
‘레드스타킹’ 인터뷰는 ‘대구 페미니즘 북클럽 레드스타킹’이 어떠한 모임인지 잘 보여주는 기록이다. 레드스타킹이 궁금한 분이라면 이 인터뷰를 참고하셔도 좋다. 이 인터뷰에 참여한 분들은 모임에 꾸준히 나오는 ‘열혈 멤버’이고, 나보다 더 오랫동안 여성학을 공부한 페미니스트다.
인터뷰 내용에 글을 작성한 기자단의 실수로 보이는 오류가 있다. 레드스타킹을 소개하는 내용 중에 “지난해 10월 팀 이름을 ‘레드스타킹’으로 지었다”라는 문장이 있다. 모임 명인 ‘레드스타킹’은 지난해 10월이 아니라 2017년 10월부터 정식으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 Trivia
《스스로 해일이 된 여자들》의 인터뷰이로 참여한 페미니즘 모임 중에 ‘나쁜 페미니스트’라는 모임이 있다. 줄여서 ‘나페’라고 부른다. 대구에서 레드스타킹보다 오랫동안 활동한 페미니즘 모임이다. 대구에서 활동하는 분들이다 보니 페미니즘 강연이나 행사에 참석하면 ‘나페’ 멤버들을 자주 만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