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롱(salon)은 여러 가지 의미를 가진 단어다. 첫 번째 의미는 손님을 맞이하는 응접실이다. 두 번째 의미는 그곳에서 열리는 사교 모임이다. 세 번째 의미는 활동 중인 화가들의 그림들을 모아서 정기적으로 개최하는 전시회다.
* 강준만 《룸살롱 공화국》 (인물과사상사, 2011)
우리나라에 알려진 살롱의 의미는 앞에 언급한 것들과 다르다. 여종업원이 술 시중을 들어주는 유흥주점을 ‘룸살롱’이라고 부른다. 이곳에 칸막이가 있는 방들이 있다. 우리 사회의 오래된 폐부인 접대 문화를 분석한 강준만은 한국을 ‘룸살롱 공화국’, ‘칸막이 공화국’이라고 지적했다. 은밀한 접대는 칸막이를 해야 하고, 칸막이를 우아하게 만들어놓은 곳이 바로 룸살롱이다. 룸살롱의 전신은 요정(料亭)이다. 해방 이후 우리나라를 통치한 미군정에 빌붙으려는 세력들은 요정에서 미군정의 주요 인사들을 접대했다. 요정은 권력을 차지하고 싶은 자들이 늘 드나들었고, 밀실 접대를 통해 권력의 한 축이 된 사람들은 룸살롱의 고객이 되었다.
* [절판] 하이덴-린쉬 《유럽의 살롱들》 (민음사, 1999)
* 서정복 《살롱 문화》 (살림, 2003)
* 메릴린 옐롬, 테리사 도너번 브라운 《여성의 우정에 관하여》 (책과함께, 2016)
이제부터 진짜로 ‘살롱’에 대해서 살펴보자. 17~18세기 유럽의 귀족과 지식인들은 응접실에 모여 찻잔을 기울이며 과학과 문학, 예술과 정치 등을 논했다. 허영에 찬 상류층의 모임이라는 비판이 있지만, 살롱에서 이뤄진 방대한 정보와 지식의 교류는 프랑스 대혁명과 계몽주의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살롱은 여성해방의 공간이기도 했다. 사회적 영향력이 있는 살롱의 여주인들은 재기와 언변을 바탕으로 유명 인사들을 끌어들이려 각축전을 벌이기도 했다. 그녀들의 삶과 전설은 《유럽의 살롱들》(민음사)이라는 책에 자세히 나와 있다. 이 책의 부제는 ‘지금은 몰락한 여성 문화의 황금기’다. 《유럽의 살롱들》은 프랑스, 독일, 영국의 살롱 문화의 특징과 각국의 살롱 문화를 대표하는 여성들의 주요 활동을 살펴볼 수 있는 책이다. 20세기까지 이어진 살롱은 정숙한 여성의 역할을 강요해온 가부장적 사회 규범을 타파하는 여성 해방의 자유로운 무대였다. 《유럽의 살롱들》은 절판되었는데, 이 책의 빈자리를 《살롱 문화》(살림)가 대신하고 있다.
남성 중심의 문화와 역사 기록에 가려진 여성의 다양한 우정과 연대 방식을 주목한 《여성의 우정에 관하여》(책과함께)도 여성의 살롱 문화를 비중 있게 언급한 책이다. 살롱 문화를 이끌어간 영국 여성들은 ‘블루스타킹(bluestocking)’이라는 별명이 붙여졌다. 1750년대는 영국의 살롱 문화가 활발히 이루어진 시기였다. 이 시기에 가장 주목받은 살롱의 여주인은 엘리자베스 몬터규(Elizabeth Montagu)다. 그녀의 모임에 자주 참석한 식물학자 벤저민 스틸링플릿(Benjamin Stillingfleet)는 블루스타킹을 착용했다. 그가 모임에 불참하게 되자 몬터규는 벤저민의 부재를 아쉬워했다. 그 후로 몬터규의 살롱 회원들은 블루스타킹을 착용하기 시작했다. 블루스타킹을 신은 사람은 모임에 열심히 활동하는 똑똑한 사람을 상징하게 됐고, 자연스럽게 지적인 살롱 회원을 의미하는 별명으로 남게 됐다. 그러나 여성이 남성 중심 사회에 개입하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긴 일부 사람들은 살롱에 참석하는 여성들을 가리켜 ‘블루스타킹’이라고 불렀다. 이때부터 ‘블루스타킹’은 유식한 여성을 비하하는 말이 됐고, 19세기 초에는 여성 참정권 운동에 뛰어든 여성을 조롱하는 말로 쓰이기도 했다.
* 한일근대여성문학회 옮김 《세이토》 (어문학사, 2007)
* 정애영 《히라쓰카 라이초》 (살림, 2019)
미국과 영국의 여성 참정권 운동에 영향을 받은 일본의 여성주의자들은 1911년 9월에 <세이토(靑鞜, 청탑)>라는 여성문예 잡지를 창간했다. 세이토는 ‘블루스타킹’을 한자어로 바꾼 단어이다. 이 잡지 창간 및 편집에 주도적으로 참여한 히라쓰카 라이초(平塚雷鳥)는 ‘천재적인 여성의 등장’을 역설한 글 『원래 여성은 태양이었다』를 <세이토> 창간호에 게재했다. 『원래 여성은 태양이었다』는 처음에 이렇게 시작한다.
원래, 여성은 태양이었다. 진정한 인간이었다.
지금, 여성은 달이다. 타인에 의해 살아가고 타인의 빛에 의해 빛나는 병자와 같은 창백한 얼굴의 달이다.
지금 「세이토」는 태어났다.
현재 일본 여성의 두뇌와 손에 의해 「세이토」는 처음 태어났다.
(히라쓰카 라이초, 『원래 여성은 태양이었다』 중에서, 《세이토》 39쪽)
‘여성은 태양이었다’는 가부장제 사회 한가운데에 근대 일본 여성주의의 시작을 알리는 선언이다. 라이초는 이 글에서 대지를 비추는 태양처럼 빛나는 독립적이고 주체적인 여성이야말로 진정한 ‘인간’이라고 주장한다.
* [우주지감 9월의 책] 나혜석, 장영은 엮음 《나혜석, 글 쓰는 여자의 탄생》 (민음사, 2018)
* [절판] 이상경 《나는 인간으로 살고 싶다》 (한길사, 2009)
라이초와 <세이토>는 각각 일본의 신여성 운동을 대표하는 인물과 매체로 되었고, 일본에 유학한 조선의 여성주의자들은 이 잡지를 통해 주체적인 인간으로서의 여성의 삶에 관심을 가지게 됐다. 조선보다 한 발 앞선 일본의 여성해방 운동에 영향을 받은 여자 유학생들은 ‘여자유학생친목회’라는 이름의 단체를 만들어 1917년 6월[주]에 <여자계(女子界)>를 발간했다. 여자유학생친목회 회원 중에 그 유명한 나혜석도 포함되어 있다. <여자계>는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잡지 혹은 학술지로 평가받는다. 나혜석은 이 잡지를 통해 여성을 순종적으로 만드는 현실(결혼)과 여성해방의 이상 사이에 고뇌하는 신여성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소설 『경희』를 발표한다. 나혜석은 자신의 글 『이상적 부인』에 라이초를 간접적으로 언급할 정도로 그녀를 신여성 운동의 본보기로 삼았다.
* [절판] 박노자 《우리가 몰랐던 동아시아》 (한겨레출판, 2007)
그러나 라이초는 영국과 미국으로부터 들어온 우생학을 옹호했으며 일본의 파시즘에 협조하는 행보를 보였다. 그녀는 여성의 인권 신장을 위해서 국가에 봉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녀의 모습은 일본의 아시아 침략과 일본의 조선 지배를 옹호한 조선의 신여성들의 모습과 비슷하다. ‘신여성의 태양’ 라이초는 1930년대부터 ‘신여성의 욱일(旭日)’이 되기 시작했다. 종전 이후에 라이초는 반전 운동가로 활동했다. 그러나 그녀가 반전 운동을 했다고 해서 신여성 운동의 한계가 잊히는 건 아니다. 박노자의 《우리가 몰랐던 동아시아》(한겨레출판)에 수록된 『신여성의 명암, 히라쓰카 라이초』는 단순히 일본 신여성 운동의 한계를 지적하는 글이 아니라 그녀들에게 영향을 받은 조선 신여성 운동의 한계까지 되돌아보게 만드는 글이다.
몇 년 전부터 나혜석을 필두로 해서 ‘신여성’을 조명한 책들이 많이 나왔다. 그러나 대부분의 책은 신여성의 ‘명(明)’만 소개하는 데 그친다. 시대를 앞서간 선배라고 해서 너무 띄워주면 곤란하다. 태양 빛을 너무 많이 쬐면 암(癌)이 생긴다. 훌륭한 선배가 있다면 그와 정반대로 살아가는 불량한 선배도 있기 마련이다. 불량한 선배들의 과거 행적은 ‘여성 운동의 오점’이자 ‘흑역사’로 남게 되지만, 이와 같은 일이 재현되지 않으려면 그것을 ‘밟고’ 넘어야 한다. ‘신여성의 암(暗)’은 그냥 건너뛸 수 없는 페미니즘의 문제이다.
[주] 안타깝게도 <여자계>의 창간호는 현재 남아 있지 않다. 현재 남아있는 <여자계> 원본은 2호와 6호 뿐이다. 그래서 <여자계> 창간호 발행연도가 정확하게 언제인지 분명하지 않다. 나혜석의 일대기를 정리한 《나는 인간으로 살고 싶다》(한길사)의 저자 이상경은 <여자계>의 창간호 발행연도를 ‘1917년 7월’이라고 주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