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년 만에 쓴 영화 리뷰







영화관에 가면 우리를 따라다니는 사람이 있다. 그 사람 때문에 영화를 편하게 볼 수 없다. 방해꾼은 우리의 머리를 툭툭 건드린다. 이 귀찮은 녀석은 우리에게 말을 건다.



 “아까 봤던 영화 장면 A, 절대로 잊지 마. 잘 생각해 보라고. 영화 장면 A는 분명 B를 의미할 거야. B는 잠깐 지나간 장면 C와 분명 연관이 있을 거야.”




방해꾼은 우리에게 자꾸 생각하라고 부추긴다. 생각이 많아지니까 영화가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피곤하다. 졸음이 쏟아진다. 꾸벅꾸벅 존다. 


영화관에 출몰하는 방해꾼의 정체는 해석자. 해석자는 책 속에도 살고 있으며 미술관에도 나타난다. 해석자는 영화뿐만 아니라 소설, 예술 작품을 논리적으로 설명하는 사람이다관객은 해석자를 만나고 싶지 않다. 그러나 해석자의 유혹을 완강히 거부하지 못한다. 관객은 영화가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알고 싶다. 영화를 해석하는 작업을 시도한다. 관객은 이제야 바로 옆에 해석자가 있다는 사실을 인식한다. 관객은 해석자의 반응에 순순히 따른다. 영화를 해석하기 위해 눈을 부릅뜨고 본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지쳐서 영화에 흥미를 잃는다잘 만든 영화인데도 관객은 거부감을 느낀다.









세르게이 파라자노프(Sergei Parajanov)<석류의 빛깔>(The Color of Pomegranates, 1969) 해석자들이 좋아하는 영화. 이 영화가 개봉되면 영화관 좌석에 관객보다 해석자들이 더 많이 앉아 있다. 해석자들이 너무 많으면 영화를 재미있게 본 관객은 줄어든다. 대부분 관객은 비몽사몽 중에 영화를 본다잠들어 버린 관객은 영화 줄거리를 기억하지 못하고, 인상 깊은 영화 장면 한 개도 건지지 못한다. 그들은 십중팔구 영화가 수면제라고 말한다해석자의 시선을 유지하면서 영화를 끝까지 본 관객이 있다. 그러나 자신의 해석에 대한 확신이 부족하다.


















* 허승철 코카서스 3국 문학 산책: 조지아, 아제르바이잔, 아르메니아 대표 시와 러시아 문학(문예림, 2018)


사야트 노바의 시 두 편이 실려 있다.




<석류의 빛깔>의 원제는 사야트 노바(Sayat-Nova)’. 사야트 노바(1772~1795)아르메니아의 음유시인이다. 영화감독 세르게이 파라자노프가 태어난 곳은 현재 조지아의 수도인 트빌리시(Tbilisi, 러시아식 지명은 티플리스). 그가 태어났을 때 트빌리시는 소련의 일부였다. 사야트 노바의 출신지도 트빌리시다<석류의 빛깔>사야트 노바의 삶을 다룬 영화. 하지만 영화는 친절하지 않다. 대사가 거의 없다. 영화 속 인물들은 표정과 몸짓, 춤과 같은 시각 언어를 통해 사야트 노바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 보여준다.









노바는 궁정 악사로 활동하다가 왕의 여동생을 사랑한 죄로 추방당했다. 마르마르(Marmar)라는 여자를 만나 결혼하지만, 노바의 사랑은 오래가지 못했다. 실의에 빠진 노바는 하흐파트 수도원에 들어가 수도승이 되었다. 1795년에 이란이 아르메니아를 침공했고, 이란 군은 아르메니아 포로들에게 이슬람으로 개종할 것을 강요한다. 개종을 거부한 노바는 이란 군에게 살해당했다. 노바는 수도사의 삶을 살면서도 세속적이고 낭만적인 사랑을 주제로 시를 썼다.


파라자노프는 악기를 연주하는 음유시인 노바의 모습뿐만 아니라 고통스러운 인생에 깊은 고뇌를 느끼는 수도승 노바의 모습도 보여준다. 그래서 영화는 종교적 색깔이 강하게 나타난다. 이로 인해 <석류의 빛깔>은 소련 검열관의 무자비한 가위질을 피하지 못했고, 소련 정부의 탄압을 받은 파라자노프는 십 년 동안 영화를 만들지 못했다.













영화의 매력은 종교적 상징을 표현한 중세의 이콘(icon, 성화)과 초현실주의적 예술 작품을 떠올리게 하는 몽환적인 이미지의 조화관객의 시선을 사로잡는 강렬한 장면 뒤에 감독이 표현하고 싶은 의미가 숨어 있다. 영화는 관객의 해석을 유도한다. 하지만 영화를 해석하는 일은 수월하지 않다.


















* 윌 곰퍼츠, 주은정 옮김 미술관에서 우리가 놓친 것들: 예술가들이 세상을 바라보는 31가지 방식(RHK, 2025)




관객이 <석류의 빛깔>스크린에 흐르는 예술 작품으로 바라본다면, 해석이 아닌 감상으로 접근해야 한다. 감상 행위는 영화를 생각하면서 보는 것이 아니라, ‘느끼는 것이다. 해석자는 영화 장면 하나하나에 의미를 부여한다면, 감상자는 영화를 보면서 느낀 것들을 채운다.









영국의 화가 데이비드 호크니(David Hockney)는 자신만의 예술을 표현하려면 이웃이 어떻게 생각하는지 주의를 기울이지 말라고 당부한다. 호크니의 무심한 반응은 예술 작품을 감상하는 방식에 적용할 수 있다. 감독이 영화를 만들면서 어떻게 생각했는지 주의를 기울이지 말라.”


조지아 오키프(Georgia O’Keeffe)는 사물을 정확히 보기 위해 소거의 과정을 거쳤다. 소거의 과정이란 사물의 핵심(아름다움)에 도달하기 위해 불필요한 것들을 제거하는 일이다. <석류의 빛깔>을 감상할 때도 소거의 과정이 필요하다. 해석자와 비평가들은 사야트 노바의 삶을 상징하는 장면을 찾아서 영화를 설명하고 싶어 한다. 동성애자인 파라자노프는 소련 정부의 동성애 탄압을 피하지 못했고, 동성애 혐의를 받아 유죄 판결을 받았다. 해석자와 비평가들은 이 사실을 단서로 삼아 영화 속 동성애 코드로 보일 만한 장면을 찾는다. 하지만 감상자는 사야트 노바의 삶과 파라자노프의 영화 미학을 소거한다영화를 보기 전에 영화 감상에 방해가 되는 그들의 존재감을 모른 척하거나 말끔히 지워야 한다.









생각이 많아지는 영화 해석은 영화의 아름다움을 보지 못하게 한다. 사야트 노바와 파라자노프를 아는 해석자를 외면한 채 영화를 본다면 아르메니아 전통 악기의 소리가 더 크게 들릴 것이다. 아니면 기쁨, 사랑, 슬픔 등 인간의 감정을 표현한 아르메니아 민속춤이 눈에 들어올 것이다. 악기 연주가 좋았다거나 춤이 아름답다고 생각했다면 영화를 제대로 감상했다고 볼 수 있다.

















* 수전 손택, 홍한별 옮김 해석에 반하여(윌북, 2025)

 

* [절판] 수전 손택, 이민아 옮김 해석에 반대한다(이후, 2002)




예술을 해석하는 일에 반대한 수전 손택(Susan Sontag)은 우리 감상자에게 중요한 임무를 부여한다. 예술 작품에서 내용을 찾지 말 것, 그 대신 내용을 제거해서 예술 작품의 실체를 바라볼 것. 예술 작품과 영화를 잘 감상하려면 더 많이 보고, 더 많이 듣고, 더 많이 느끼는 법을 배워야 한다. 여기서 제일 중요한 것은 느낄 줄 아는 법이다. 그것이야말로 예술을 사랑하는 태도, 손택이 강조한 예술의 성애학(erotics)이다.









영화의 본질은 영화감독의 마음속에만 있는 건 아니다. 영화의 매력은 영화를 해석하고 비평하는 사람들만 찾을 수 있는 건 아니다. 영화의 본질과 매력은 끝이 없으며 한 곳에만 머물러 있지 않다. 관객인 우리의 마음속에도 있다. 우리는 그것을 스스로 찾아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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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힐 2025-12-09 23: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내 안의 해석자, 저도 이 분이 시시때때로 개입을 하시기 때문에 좀 속이 시끄러운 편입니다. ㅎㅎ 이건 뭐 억지로 못 들어오게 막아도 들어오는 분이라... 이제는 그러려니 합니다. ㅎㅎ
 
슈베르트의 겨울 나그네 (겨울 에디션)
이언 보스트리지 지음, 장호연 옮김 / 바다출판사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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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점  ★★★★  A-






시집을 펼친 음악가가 슬픈 시를 고른다. 

음악가의 눈물을 먹은 시는 녹아서 잉크로 변한다.

잉크가 오선지에 번지면

시는 노랫말로 다시 태어난다.










슈베르트(Franz Schubert)음률(音律) 시인이다. 그가 고른 시는 음표를 만나면 가곡이 된다슈베르트는 눈물이 많다. 그의 서글픈 곡(, 울음)이 그치면 애절한 가곡이 나온다그가 흘린 수많은 눈물방울은 가곡이 싹트는 씨앗이다슈베르트는 가곡의 왕, 눈물의 왕이다.


<겨울 나그네>는 슈베르트가 죽기 일 년 전에 만든 가곡이다. 빌헬름 뮐러(Wilhelm Muller)의 시에 음률을 입힌 연가곡(連歌曲)이다. <겨울 나그네>는 24개의 노래로 이루어져 있다. 노래의 주인공은 사랑에 실패한 남자. 깊은 절망에 빠진 그는 정처 없이 겨울 여행(Winter Journey, <겨울 나그네>의 원제)을 한다실연의 아픔을 잊지 못한 슈베르트는 쓰라린 눈물들을 모아 자신과 비슷한 겨울 나그네를 만들었다. 그는 죽을 때까지 이 곡을 여러 번 고쳤다고 한다. <겨울 나그네>를 만드는 데 슈베르트는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리고 삼켰을까


<겨울 나그네>는 슬픔을 머금은 가곡이다. 가곡을 듣는 청중도, 가곡을 부르는 성악가들은 노래에 취하면 슈베르트의 눈물 자국과 겨울 나그네의 발자국을 따라간다. 그들도 슈베르트와 겨울 나그네의 비애감과 닮아간다그러나 <겨울 나그네>의 선율에 눈물 자국만 있는 건 아니다. 노래가 만들어질 당시의 날씨, 유행했던 문화, 유럽의 정세까지 과거의 흔적들이 묻어 있다독일의 성악가 이언 보스트리지(Ian Bostridge)<겨울 나그네>의 선율을 해부하여 귀로 들을 수 없는 과거의 흔적들을 들추어낸다. 그뿐만 아니라 잘 알려지지 않은 슈베르트의 삶과 참모습까지 복원한다그가 쓴 슈베르트의 겨울 나그네 어둡고 암울한 노래로만 알려진 <겨울 나그네>의 다양한 매력을 보여준다. 책의 부제는 집념의 해부(Anatomy of an Obsession)’.









눈물이 많은 슈베르트는 감성의 시대에 살았다. 감성의 시대는 18세기 중후반에 눈물이 유행했던 시기를 가리킨다. 작가와 예술가들은 실패한 사랑을 경험한 후에 흘린 눈물에 매혹을 느꼈다대중은 실연당한 주인공이 나오는 소설을 읽고 울었다<겨울 나그네>감성의 시대가 끝날 무렵, 대중의 눈물이 말라버린 시기에 나온 노래<겨울 나그네>에 묘사된 겨울 풍경은 유럽 전역을 덮친 혹한기에 볼 수 있었던 일상적인 장면이다. 날씨는 우리의 감정을 지배한다. 눈물마저 얼어붙는 말쌀한 날씨는 슈베르트와 나그네를 더욱 처량하게 만든다.


슈베르트의 겨울 나그네는 음악 비평서도, 음악 해설서도 아니다. 음악 감상론에 가깝다. 저자는 비평하듯이 음악을 분석하지 않는다. 음악에 자신의 감정과 관심사들을 채워 넣는다. 노래를 들으면서 느낀 여러 가지 감정과 예술적 취향을 곁들어 슈베르트의 <겨울 나그네>를 다시 만든다. 저자의 음악 감상은 원작자를 무시하거나 원곡을 파괴하는 행위가 아니다. 음악은 죽지 않는다. 음악은 청자와 연주자들의 반응을 먹으면서 자란다. 세월이 지날수록 연주 방식과 선율은 조금씩 달라진다. 음악은 느리게 변신한다. 청자와 연주자들과 함께하는 음악의 변신은 무죄다.







<책을 해부하면서 읽는 cyrus가 만든 주석>

 






[1] 서평 제목은 나훈아의 <사랑은 눈물의 씨앗>(1969년) 노랫말(사랑이 무어냐고 물으신다면 눈물의 씨앗이라고 말하겠어요.”)을 패러디했다.





* 255





 생기론(생명체는 그것을 무생물과 구별 짓는 생명의 약동을 갖고 있다는 주장)19세기 말까지 지속되었겠지만, 1858 찰스 다윈의 종의 기원[주2]에서 제시된 진화론이 힘을 얻으면서 생물 형태들 사이의 장벽, 궁극적으로는 유기체와 비유기체 사이의 장벽이 무너지게 되었다.



[원문]


 Vitalismthe doctrine that living stuff has some sort of spark or elan vital which distinguishes it from brute mattermay have lingered on to the end of the nineteenth century but the impact and tendency of evolutionary theory from Darwin’s Origin of Species in 1858 on was to break down the barriers between life forms and ultimately between life forms and ultimately between the living, the organic and the inorganic.

 






[주2] 찰스 다윈의 종의 기원초판이 처음 나온 해는 1859년이다. 저자가 출판 연도를 착각했다. 슈베르트의 겨울 나그네를 펴낸 바다출판사다윈과 진화론을 소개한 책을 많이 출간했다2016년에 나온 초록색 표지의 양장본 구판에도 연도 오류가 남아 있다.





* 292





 최근에 나는 작곡가 토머스 아데스와 카네기홀에서 이 작품을 연주했다. 프로그램에는 리스트가 편곡한 바그너의 <사랑의 죽음>[주3]도 포함되어 있었다.



[주3] <사랑의 죽음>(Mild und leise)은 곡명이 아니다. 바그너(Richard Wagner)의 오페라 <트리스탄과 이졸데> 33장 제목이다.





* 305~306

 

 토머스 드 퀸시의 열정적인 산문은 1849년에 영국 우편 마차의 잃어버린 영광을 이렇게 회상했다.[주4] 당시로서는 전례 없던 속도를 통해‥… 움직임의 영광을 처음으로 보여주었다.”




 



[주4] 영국 우편 마차를 주제로 한 토머스 드 퀸시(Thomas De Quincey)의 산문은 <영국의 우편 마차>. 번역본: 유나영 옮김, 심연에서의 탄식/영국의 우편 마차(워크룸프레스, 2019).





* 452




 

 그는 1827년에 친구 에두아르트 바우에른펠트에게 이렇게 편지를 썼다. “자네야 궁정의 고문관이자 유명한 희극작가가 아닌가! 그런데 나는! 나처럼 가난한 음악가는 어떻게 되지? 나이가 들면 괴테의 하프 타는 노인[주5]처럼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빵을 달라고 구걸해야 할지도 몰라!”

 






[5] 괴테(Goethe)의 소설 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 시대(안삼환 옮김, 민음사, 1999)에 나오는 인물이다. 소설 제411 마지막에 하프 타는 노인과 미뇽(Mignon)이 노래를 부르는 장면이 나온다. 노랫말이 소설보다 유명해서 괴테 시 선집에 수록되기도 한다.



그리움을 아는 사람만이

나의 이 괴로움 알리라!

혼자, 그리고 모든 즐거움과 담 쌓은

곳에 앉아

저 멀리 창공을

바라본다.

, 날 사랑하고 알아주는 사람은

먼 곳에 있다!

이 내 눈은 어지럽고

이 내 가슴 타누나.

그리움을 아는 사람만이

나의 이 괴로움 알리라!


 

(안삼환 옮김, 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 시대 1중에서, 3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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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시우행 2025-12-05 16:1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제목 패러디가 멋집니다. 덕분에 겨울 나그네를 다시 감상하려 합니다.

cyrus 2025-12-08 06:11   좋아요 0 | URL
글 제목을 뽑느라 나름대로 생각 많이 했어요.. ㅎㅎㅎ

북프리쿠키 2025-12-06 23:4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서재의 달인 축하드립니다.!

cyrus 2025-12-08 06:12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북프리쿠키님도 서재의 달인에 되신 거 축하드립니다 ^^
 
침묵의 마법 - 카스파 다비트 프리드리히가 그려낸 고요
플로리안 일리스 지음, 한경희 옮김 / 문학동네 / 202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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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점  ★★★★  A-





사람을 그리지 못해서 슬픈 화가를 아시는가? 이 화가는 모델의 얼굴만 보면 긴장한다. 그가 인물화를 그리려고 하면 붓이 뻣뻣해진다그리다 만 그림이 있는 캔버스는 수줍은 화가를 지켜주는 가림막이다화가는 다시 그려보지만, 붓이 가는 대로 그리지 못한 인물화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는 누드 그림도 못 그린다.


화가는 사람보다 나무, 바위, , 바다를 좋아한다. 그는 도시를 여행하면 자연을 유심히 관찰하는 습관이 있다화가는 인물화를 포기하고 풍경화를 그리는 일에 매진한다. 그런데 그가 그린 풍경화는 독특하다. 그림에 나온 인물은 한두 명, 많으면 세 명이다. 인물화에 자신 없던 화가는 사람을 아주 작게 그리거나 뒤돌아선 모습을 그렸다. 사람 한 점 없는 풍경화는 쓸쓸하고, 적막하고, 그윽하다.









사람의 눈을 마주치지 못해 풍경화만 열심히 그린 독일의 화가 프리드리히(Caspar David Friedrich, 1774~1840)는 자신의 단점을 알고 있었다. 동료 화가들은 인물화와 누드 그림 실력이 형편없는 프리드리히를 비웃는다. 쓸쓸한 공기가 흐르는 풍경화는 인기가 없다프리드리히는 남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그림을 그린 자신을 애벌레에 비유한다외로운 애벌레는 고치와 같은 아틀리에에서 그림을 그린다대중과 후대의 화가들에게 인정받는 화려한 나비가 될지, 아니면 어둠 한구석에 있는 구더기로 남게 될지 시대에 맡기겠다고 담담하게 말한다침묵의 마법백 년 동안 무명의 구더기로 지내다가 우여곡절 끝에 나비가 된 화가의 일생을 들려준다









프리드리히의 대표작 <뤼겐의 백악 절벽>은 한때 다른 화가의 작품으로 알려졌다. 프리드리히의 작품으로 확정되기까지 백 년이나 걸렸다. 백 년 묵은 구더기가 어두운 고치를 뚫고 나비가 되는 순간이다. 하지만 20세기에 도착한 프리드리히의 날갯짓은 부자연스러웠다20세기 독일은 프리드리히가 살았던 19세기 독일과 너무나도 달랐다. 20세기 독일은 히틀러(Adolf Hitler)의 나치(Nazi)가 휘어잡고 있었다. 프리드리히가 20세기에 날갯짓을 하는 데 도움을 준 미술사학자는 열렬한 나치즘 신봉자였다히틀러에 경도된 미술사학자는 프리드리히를 강인한 게르만인으로 둔갑시켰다강인한 게르만인은 나치가 선호하는 인간상이다프리드리히는 시대를 또 한 번 잘못 만났고, 본의 아니게 나치에 복무하는 나비가 되었다.


프리드리히의 풍경화는 단순히 자연을 묘사한 그림이 아니다. 화가는 눈으로 본 자연을 똑같이 그리지 않는다. 자연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해체하고 재구성한다. 프리드리히의 풍경화는 거의 추상화에 가깝다. 그에게 자연은 자신의 내면을 표현하기 위한 소재다프리드리히는 예술학교 정교수로 채용되지 못해서 실망했고, 자신이 처한 상황에 빗댄 <좌절된 희망>이라는 그림을 그렸다.





 




프리드리히의 그림에는 여러 가지 색깔로 이루어진 여백이 칠해져 있다. 감상자는 풍경화의 여백에 자신이 느낀 것들을 그릴 수 있다. 수많은 감상자는 자신이 느끼고 생각한 것들을 프리드리히의 풍경화에 다시 그렸다독일의 작가 클라이스트(Heinrich von Kleist)는 프리드리히의 <바닷가의 수도사>를 보자마자 언젠가 자신을 덮치게 될 무거운 절망감을 느꼈다(클라이스트는 34세에 자살했다). 히틀러를 지지한 미술사학자들은 그림 속에 고대 게르만인의 강인한 정신이 있다고 주장했다. 나치에 세뇌당한 독일 군인들은 수첩에 그려진 프리드리히의 그림을 보면서 전투 의지를 높였다.


세상은 프리드리히의 그림을 외면하지 않았다. 다만 세상이 변할수록 그림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도 달라졌다프리드리히를 심하게 왜곡한 감상은 아이러니하게도 잊힐 뻔한 화가를 재조명하게 해주었다예술은 시대적인 분위기와 이데올로기에 예민하게 반응한다. 때론 정치 체제 선전을 위한 도구로 전락하는 부정적인 효과가 나타나기도 하지만, 감상과 해석의 범위가 더 넓어진다그래야 대중은 예술에 다가갈 수 있다.


예술 작품은 예술가가 혼자서 만든 것이 아니다. 예술 작품은 화가가 죽어서도 살아 있으며 감상자의 다양한 생각을 흡수한다. 감상자를 만난 예술 작품은 여전히 만들어지고 있다감상자의 해석은 예술 작품 일부가 되기도 한다작품 속에 숨어 있는 창작자의 해석과 작품 밖에 있는 감상자의 해석을 구분 짓는 경계는 흐릿해진다침묵의 마법예술이 창작자의 감정과 경험으로만 빚어지지 않는다는 점을 보여준다.


오랫동안 살아 있는 예술은 늘 열려 있다. 감상자의 해석을 막는 예술 작품은 매력이 없다. 프리드리히의 풍경화는 잘 그렸다는 이유만으로 유명해지지 않았다. 시대와 불화했던 프리드리히는 아틀리에에 갇히다시피 살았지만, 풍경화는 모든 감상자를 위해 활짝 열어 놓은 그림이다. 시대를 불문하고 수많은 감상자는 화가가 되어 완성된 그림 위에 다시 그렸다. 그림을 그린 감상자들 덕분에 프리드리히는 유명해질 수 있었다. 사람들의 눈빛을 듬뿍 받은 그는 독일 낭만주의 미술을 대표하는 나비가 되었다.






<책의 여백에 적은 cyrus의 주석>




* 227


 마르셀 프루스트는 프리드리히가 숨겨놓은 메시지를 정확하게 이해했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프루스트는 이렇게 충고한다. “언제나 당신 인생 위에 한 조각 하늘을 간직하시오.” [주]



[] 저자가 인용한 프루스트의 문장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1스완네 집 쪽으로」(1권, 김희영 옮김, 민음사, 2012년)에 나온다.



 “어린 친구, 언제나 그대 인생 위에 한 조각 하늘을 간직하게나.” 


(김희영 옮김, 1권 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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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 읽기 - 날씨와 기후 변화, 그리고 우리를 둘러싼 공기에 숨겨진 과학
사이먼 클라크 지음, 이주원 옮김 / 동아시아 / 202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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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높은 하늘 위에 푸른 거인이 우뚝 서 있다.

높푸른 거인은 45억 년째 지구를 듬쑥 끌어안고 있다.

나이를 먹어도 지구는 여전히 푸르다.




우리는 거인을 볼 수 없다. 그렇지만 우리는 거인과 함께 살고 있다. 지구를 상냥하게 안은 거인이 모든 생명체를 먹여 살린다.


건강한 거인은 평온하다거인의 기분이 좋으면 날씨가 매우 좋다. 반대로 기분이 안 좋으면 날씨가 사나워진다그런데 우리는 거인을 잘 모른다거인에게 고마워할 줄 모른다오히려 거인에 역정을 낸다. 우리는 기분이 오락가락하는 거인이 미쳐 돌아간다고 생각한다


이 푸른 거인의 이름은 대기(大氣)’우리가 매일 마시는 공기는 대기가 숨을 쉴 때 나온다거인의 드넓은 포옹은 지구를 아늑하게 해준다행복한 지구는 대기와 함께 춤을 춘다. 지구는 빙그레 미소를 띠면서 빙글빙글 돈다그러나 분노한 대기는 지구를 숨 막히게 한다. 힘겨운 지구가 울먹거리면 암울한 날씨가 이어진다. 불볕더위는 지구를 빨갛게 불태울 기세다. 동장군이 휘두르는 칼날은 점점 매서워진다지구온난화가 심해질수록 암울한 날씨는 더욱 자주 나타난다그런데 우리는 대기가 무엇 때문에 화가 났는지 알지 못한다. 지구는 계속 뜨거워지는데 지구온난화의 심각성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 과학을 모르는 정치인과 화석 연료로 수익을 올리는 기업인들은 지구온난화를 크게 걱정하지 않는다. 이들은 지구온난화를 연구하는 과학자들을 멍청한 사기꾼이라고 비난한다.


하늘 읽기우리가 잘 몰라서, 제대로 보지 못한 대기를 더 가까이 볼 수 있는 책이다. 저자는 대기가 어떻게 움직이고, 우리 삶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 알려준다저자 사이먼 클라크(Simon Clarke)는 영국의 기상학자. 기상학은 여전히 대중에게 생소한 학문이다. 대부분 사람은 기상학자를 과학자로 여기지 않는다. 내일 날씨를 정확히 예측하는 전문가 혹은 공무원 정도로 인식한다. 내일 날씨에 관심은 많지만, 기상학에 무관심한 사람들은 기상학자들이 몸담은 기상청을 불신한다.


기상학은 생각보다 오래된 학문이다.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Aristotle)는 하늘에 일어나는 현상을 알고 싶어 했다. 비록 정확하지 않지만, 날씨에 과학적으로 접근하여 설명하려고 했으며 기상학(Meteorologica)이라는 논문을 썼다. 물리학과 공학은 온도계와 기압계의 발전을 이끌어 왔다. 특히 유체역학은 지구가 움직이면서 생기는 기후와 기후 변화를 방정식으로 설명할 수 있게 해주었다물리학 학위를 받은 저자는 지구 물리 유체역학(geophysical fluid dynamics)이라는 학문을 만났고, 본격적으로 대기를 연구하기 시작했다.


기후는 기온, 습도, 바람 등의 기상 현상을 아우르는 장기적인 대기 상태를 의미한다. 기상학은 복잡하면서도 광범위한 기후 변화를 연구하는 대기물리학이다. 기상학자와 대기물리학자는 이상 기체 법칙(상태 방정식)을 이용해서 대기 거인이 움직이는 모습을 본다. 이 법칙은 기압, 온도, 습도 등이 상호작용을 하는 기후를 간결하게 설명할 수 있는 이론적 도구다.


가끔 기상학자는 태풍의 경로를 예측하지 못하거나 정확하지 않은 날씨 예보를 내놓는다. 그렇다고 누구보다 대기 거인의 기분을 이해하려고 노력한 과학자들을 멍청하다고 비난할 수 없다. 대기 거인의 성격은 장난기 가득한 카오스(Chaos). 대기 거인은 뒤죽박죽으로 움직인다. 정밀한 관측 기기가 있어도 무질서하고 예측이 어려운 거인을 따라가지 못한다. 여기서부터 오차가 생긴다. 대기 거인의 어수선한 움직임을 따라가지 못하면 아주 작은 오차는 점점 커진다.


기후 변화는 우리의 삶과 생태계를 위협한다. 암울한 날씨는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의 터전을 사라지게 할 뿐만 아니라 건강에도 악영향을 준다. 대기 거인은 환경 오염에 민감하다. 대기 거인을 화나게 하면 안 된다. 진노한 거인은 무섭다지구를 옴짝달싹하지 못하게 꽉 껴안는다숨 막힌 지구는 생명체가 살기 힘든 지옥이다. 대기와 지구가 건강해야 우리도 건강하게 살 수 있다.







<대기만성(大器晩成)형 인간이 되고 싶은 

해성(海成)이 만든 주석과 정오표>




* 18


 글레이셔와 그의 동료 헨리 콕스웰열기구 조종사, 그러니까 말 그대로 공중 선원이었습니다. 기구를 타며 여행하는 용감한 개척자였죠.




[1] 이 책의 1기상학의 발전에 이바지한 과학자들의 업적을 소개한다. 제일 먼저 나오는 사람은 열기구를 타고 세계 최초로 성층권에 도달한 제임스 글레이셔(James Glaisher)와 헨리 콕스웰(Henry Tracey Coxwell)이다. 저자가 참고한 글레이셔의 저서 <Travels in the Air>(1871)는 죽을 뻔했던 상공 비행에 대한 경험담을 기록한 책이다. 글레이셔는 이 책에 또 다른 열기구 탐험가들의 비행 시도와 실패 사례도 언급했다. 번역본은 열기구 조종사: 하늘길 여행자 에어로너츠(정탄 옮김, 아라한, 2020)이다. 정탄은 러브크래프트 전집(7, 황금가지, 2009, 2012, 2015)과 스티븐 킹(Stephen King)의 소설 그것(황금가지, 2017)을 번역한 정진영의 필명이다.



※ 《열기구 조종사: 하늘길 여행자 에어로너츠서평

<기구를 탄 이카로스

202113일 작성

https://blog.aladin.co.kr/haesung/12273532






* 112






터키 튀르키예






* 181, 각주 27










[2] 저자가 카오스 이론(Chaos theory)을 설명하기 위해 참고한 책은 국내에 번역되지 않았다. 비록 출간된 지 꽤 오래되었지만(초판은 1987년에 출간되었다), 본격적으로 카오스를 대중에게 널리 알린 제임스 글릭(James Gleick)카오스(박래선 옮김, 김상욱 감수, 동아시아, 2013)를 참고하면 된다. 2013년 번역본의 저본은 초판 출간 20주년 기념판이다글릭이 쓴 책에도 카오스 이론 연구의 선구자로 알려진 프랑스의 수학자 앙리 푸앵카레(Jules Henri Poincaré)와 러시아 수학자 안드레이 N. 콜모고로프(Andrey N. Kolmogorov)의 업적이 언급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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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정복자들 - 농업부터 인공지능까지, 세상을 움직이는 곤충의 놀라운 변신
에리카 맥앨리스터.에이드리언 워시번 지음, 김아림 옮김 / 곰출판 / 202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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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리카 맥앨리스터 · 에이드리언 워시번 함께 씀

김아림 옮김

작은 정복자들:

농업부터 인공지능까지, 세상을 움직이는 곤충의 놀라운 변신

곰출판

2025





4.5점  ★★★★☆  A






왕크왕귀. 왕 크면 왕 귀엽다를 줄인 신조어다. 왕크왕귀는 몸집이 크면서도 귀여운 동물에 호감을 느낄 때 쓴다왕크왕귀라는 별명이 잘 어울리는 동물은 우리에게 친숙한 반려동물이다. 순하디순하기로 유명한 골든 리트리버는 누구에게나 사랑받는 왕크왕귀다.


왕크왕귀에 어울리지 못하는 동물이 있다. 이 동물의 몸집은 인간보다 작다. 그러나 인간보다 먼저 지구에 등장했고, 개체 수가 많다지구에 사는 동물의 절반을 차지할 정도다이 동물의 정체는 곤충이다. 곤충은 동물계 절지동물에 속한다.


곤충의 매력에 푹 빠진 사람은 드물다. 여러 개의 발이 달린 곤충의 생김새는 귀여움과 거리가 멀다우리는 작은 곤충을 미물(微物), 엄청 커다란 곤충을 괴물로 인식한다. 그래서 거대한 곤충이 생포되는 일은 세상을 발칵 뒤집는 특종감이다<위클리 월드 뉴스>(Weekly World News)황당한 가짜 뉴스와 조잡한 합성 사진으로 지면을 도배했던 미국의 신문이다이 신문은 거대한 곤충이 발견되었다는 가짜 뉴스를 심심찮게 보도한다. 거대한 곤충의 모습이 나온 합성 사진도 실었는데, 사진의 출처를 제대로 확인하지 못한 사람들은 진짜라고 믿는다.


사람 몸집만 한 곤충이 살아서 우리 눈앞에 있다면 기절초풍한다. 왕 커서 왕 무섭다. 기예르모 델 토로(Guillermo del Toro) 감독이 만든 공포 영화 <미믹>(Mimic, 1997년)인간의 형상과 비슷하게 진화한 크리처(creature) 나온다영화 주인공인 곤충학자(미라 소르비노 분)바퀴벌레를 죽이는 유전자 변이 곤충 유다(Judas)’를 만든다. 유전자 변이 곤충의 생태계 교란을 방지하기 위해 곤충학자는 유다의 생식 능력을 제거한다. 하지만 유다는 번식에 성공하고, 곤충의 천적 인간을 모방하면서(mimic) 괴물로 진화한다.


기예르모는 유다를 살아 있는 기계 장치처럼 보이도록 표현했다. 그가 유심히 관찰한 곤충은 자연의 살아 있는 기계 장치.











 “곤충은 자연이 만든 완성도 높은 작품입니다. 곤충의 구조는 경외감을 불러일으키지만, 사회적, 정신적 기능은 그렇지 않습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곤충을 두려워한다고 생각합니다. 곤충에게는 정서라는 것이 완전히 결여되어 있으니까요. 곤충은 진정한 의미에서 자연의 살아 있는 기계 장치입니다. 그래서 곤충이 그토록 많은 것들의 상징이 되는 겁니다. 그들은 완전히 에일리언이니까요.

 

(기예르모 델 토로기예르모 델 토로의 창작 노트중에서, 88)




기예르모는 정서가 없는 곤충을 외계의 존재(alien)와 동일시한다. 하지만 곤충학자들은 기예르모의 견해에 동의하지 않는다. 곤충은 인간보다 먼저 지구에 정착한 작은 동물이다그들은 뛰어난 학습 능력을 갖췄고, 혹독한 기후 변화에 적응하면서 살아남았다곤충이 정서를 느끼고 있는지 좀 더 연구해 봐야 하고 철저한 검증이 필요하다. 그러나 다윈(Charles Darwin)과 동물학자, 곤충학자들은 관찰과 실험을 통해 곤충을 포함한 동물은 고도의 지적 능력과 정신 능력이 있다는 사실을 입증했다. 따라서 지구에 오래 살았던 곤충을 우주에서 온 이방인(alien)과 같다고 볼 수 없다.








곤충학자 에리카 맥앨리스터(Erica McAlister)와 과학 다큐멘터리를 제작한 프로듀서 에이드리언 워시번(Adrian Washbourne)이 함께 쓴 책 작은 정복자들우리가 잘 모르는 곤충의 다양한 특기를 알려준다에리카 맥앨리스터는 파리를 사랑하는 곤충학자. 2년 전에 리의 소중함을 일깨워주는 그녀의 저서 위대한 파리》(이동훈 옮김, 마리앤미, 2023년)가 출간되었다파리는 자연을 깨끗하게 만드는 청소부다지구에 파리가 살지 않으면 우리가 버린 쓰레기와 사체는 썩지 않은 채 그대로 남게 된다.


기예르모의 유다는 인간을 죽이기 위해 인간의 신체 구조를 모방한다. 반대로 곤충학자들은 곤충의 신체 구조를 모방한 기술이나 제품을 개발하는 연구에 매진한다벼룩은 동물, 식물, 인간에게 피해를 주는 해충이다. 영화에 묘사된 곤충학자는 벼룩을 퇴치하는 방법을 찾으려고 한다하지만 벼룩에 정말로 관심이 많은 곤충학자는 벼룩이 어떻게 높게 뛸 수 있는지 궁금해한다벼룩은 날개가 없는데도 자기 몸집의 60배나 넘는 거리로 펄쩍 뛸 수 있다. 벼룩의 근육은 더 멀리, 더 높게 뛰는 데 필요한 에너지를 저장한다. 천적을 만나거나 장애물을 뛰어넘을 때 근육에 있는 에너지를 방출한다. 기술 공학자들은 벼룩이 점프하는 메커니즘을 응용한 소형 로봇을 만들었다.


기예르모의 유다는 바퀴벌레와 사마귀와 흰개미의 유전자를 결합, 조작해서 만들어졌다. 바퀴벌레는 생각보다 똑똑한 곤충이다. 바퀴벌레의 뇌는 다른 곤충에 비해 뇌가 크고, 뇌의 신경세포인 뉴런 연결망이 활성화되어 있다. 학습 능력이 뛰어난 바퀴벌레는 미로처럼 좁고 복잡한 공간을 잘 돌아다니며 자기가 지나가던 길을 기억한다. 바퀴벌레가 생존 본능이 강해서 요리조리 도망 다니는 것이 아니다. 바퀴벌레는 인간이 찾을 수 없는 안전한 구역과 은신처로 돌아가는 경로를 알고 있다그들은 똑똑해서 잘 숨고 다닌다.


책에 언급된 호주의 곤충학자는 이십 년 넘게 곤충 신경계를 연구하고 있다. 그는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주변 환경을 이해하면서 단시간에 생존 전략을 찾는 곤충의 유연한 모습에 감탄했다.



 곤충은 뭔가를 배울 수 있습니다고정된 상황에서 판에 박힌 작업을 수행하도록 프로그래밍된 조그만 로봇이 아닌 거죠.”


(《작은 정복자들》, 8. 바퀴벌레의 신경」 중에서, 297)




해충과 익충으로 구분하는 곤충은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이 만든 이 곤충이라는 단어는 절지동물의 다양하면서도 복잡한 생활 방식을 설명하지 못한다.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정지인 옮김, 곰출판, 2021년)를 쓴 과학 전문 기자 룰루 밀러(Lulu Miller)는 다윈이 말한 좋은 과학’이 해야 할 일을 강조했다.







 좋은 과학이 할 일은 우리가 자연에 편리하게그어놓은 선들 너머를 보려고 노력하는 것, 당신이 응시하는 모든 생물에게는 당신이 결코 이해하지 못할 복잡성이 있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다.

 

(룰루 밀러,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중에서, 227쪽,

저자가 인용한 다윈의 말은 종의 기원》에 나온.)




좋은 곤충학은 해충과 익충으로 구분하기 위해 우리가 그어놓은 선을 무너뜨린다



우리가 알아야 하고, 배워야 할 곤충은 미물(微物)이 아니다

자연을 잘 아는 영리한 미물(美物)이다.








<곤충을 함부로 밟지 않는(不殺生戒) cyrus가 만든 주석>








《작은 정복자들》 270~271


 16세기 프랑스의 수필가이자 철학자인 미셸 드 몽테뉴(Michel de Montaigne)수상록2에서 1513년 포르투갈 군대가 샤틴(Xiatine)의 영토에서 벌인 타믈리 시 포위 공격에 대해 묘사했다. 상황이 좋지 않자 주민들은 성벽 너머로 여러 개의 벌집을 던지자는 기발한 계획을 세우고 실행에 옮겼다. 벌집에 불을 붙인 채로 적을 향해 벌이 맹렬하게 날아갔고, 적들은 벌침에 쏘이는 것을 견디지 못해 짐을 싸고 물러나기에 이르렀다.” 화가 난 암컷 벌들 덕분에 주민들은 한 사람도 목숨을 잃지 않았다. [주]



[] 저자가 인용한 이야기는 에세 212레몽 스봉을 위한 변호(Apologie de Raimond de Sebonde)에 나온다. (심민화 옮김, 2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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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 2025-11-10 07: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미믹이란 단어를 보니 델 토르 감독의 미믹이란 영화가 생각나네요.참 충격적이고 공포스러운 영화였지요.

cyrus 2025-11-11 07:01   좋아요 0 | URL
제 글의 중간 부분을 안 보셨군요. 영화 <미믹>의 줄거리와 기예르모가 미믹이라는 캐릭터를 어떻게 구상했는지 설명한 내용이 나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