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아, 그런 나는 없다
홍창성 지음 / 김영사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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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이 얇다. 디자인도 깔끔하다.

불교의 핵심 진리인 '무아'에 대한 책이다.

제목도 '무아' 라는 뜻에 걸맞게 하얀 바탕에 드러나지 않는 음각으로 인쇄가 되어있다.

이책의 흥미로운점은 불교라고 해서 어려운 한문풀이나 구구절절 고리타분한 교리에 관한 내용이 아니다.

요즘 세대들도 쉽게 읽을수 있는 문체로 되어있어 편하게 볼수 있다. 철학에 대해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다면 볼만한 책이다.

 

이책에서는 먼저 '나는 누구인가?' 라는 궁극적인 철학적인 질문에서부터 문제를 제기한다.

이 질문이 과연 타당한것인가? 라는 작가의 견해가 흥미를 끈다.

이후 기독교의 '영혼'과 소위 '나' 라고 일컫는 실체에 대해 파헤쳐본다.

파헤치는 도구는 언어철학, 불교의 연기론, 근대 데카르트의 서양 철학등을 동원한다.

그리고는 비교와 분석을 통해 부처님께서 깨달으신 무아를 역설하는데 중점을 두고 있다.

작가의 철학적인 분석을 통해 전하고자 하는 의도는 충분히 볼만하다. 그렇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읽고난  몇가지 아쉬움이 사라지지 않는다.

 

먼저 작가가 강조하는 '무아' 는 글자 그대로 '내가 없다'는 무기공(無記空)에 치우친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왜냐하면 작가는 '참나'를 부정하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

'참나' 라는것은 힌두교의 '아트만'과 같은것으로 간주했고, 작가의 시각으로 보는 일부 불교계에서 주장하는 '참나' 라는것은 부처님께서 설한 '무아' 와는 위배가 된다는 것이다.

이게 아쉽냐면은 작가는 무아에 대한 단순히 평면적인 해석(내가 없다)을 한것이 아닌가 싶었다.

 

대행 큰스님께서는 무아에 대한 개념에 대해 '나를 무엇이다' 라고 딱 '나' 라고 고정할수 없어서 '무아'라고 설하셨다. 즉 '고정됨이 없는데 어찌 나 라고 세울수 있는가?' 하셨다.

부처님께서 설하신 '무아' 라는것은 단순히 내가 없다는 개념이 아니라 '에고로서의 나' 를 없애면 자연히 참성품이 드러난다는 것 까지 포함된것 일것이다.

참성품은 부처님께서 설법하신 법화경에서의 우리 모두에게 내재되어 있는 '불성' 인것이다.

작가가 '참나'를 인정 하지 않겠다면 '불성'도 인정하지 않겠다는 뜻인지? 그점이 모호하다.

만약 '불성'도 없는것이고 다 '무아' 라고 한다면 부처님께서 설하신 '누구나 다 불성이 있고 부처가 될수 있다' 는 법화경의 설법은 무엇이란 말인가?

 

조주선사의 선문답, 개에게도 불성(佛性)이 있습니까? 에 대한 대답 '무(無)' 라고 한것 처럼, 우리의 불성도 '무' 라고 받아 들여야 하는건지?

책에서는 정작 중요한 불성과 마음에 대한 언급은 전혀없다.

또한 부처님 열반시 '법등명(法燈明) 자등명(自燈明)' 하라는 부촉(咐囑)을 남기신것은 불자라면 다 아는 사실이다.

그런데 여기서 자등명 즉 '자신을 등불 삼아 밝히는것' 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된다는 것인지?

'무아' 이므로 '밝혀야할 나' 는 없게 되는것인가?

이처럼 작가의 무아론을 확대하면 단순하고 피상적인 철학적 논리로는 부족해서 좀더 해설이 필요하지 않았나 싶었다.

더구나 책에서 마지막 해설중에 진제(참된 진리)라는 면에서는 무아가 맞지만 속제(세속적인 진리)라는 면에선 '실용적인 나' 의 일면도 존재한다고 인정했다.

이것으로 작가 나름의 결론인지 제안인지 모호한 설명을 내놓은것이다.

일반적으로 '인식하는 나' 라는 존재에 대해서 작가가 일관되게 주장해온 '무아' 와 함께 어설픈 절충안을 내놓은것 같은 느낌마저 들었다.

 

불교는 수행의 종교이자 실천의 종교이다.

분명 불교가 철학적인 면이 있는건 사실이지만 목적은 마음의 불성을 깨닫고 부처가 되고 자유인이 되는데 있다.

또한 '상구보리 하화중생(上求菩提下化衆生:위로는 보리를 구하고 아래로는 중생을 제도한다)' 이라 하지 않던가?

불교는 분명히 서양 철학식의 분석과 비교로 배우고 깨닫는 종교가 아니라고 본다.

게다가 불교 또한 종교이기 때문에 믿음을 기본적으로 가져야 된다.

더구나 믿음이 절대자를 향하는게 아니라 자신 자신에 대한 믿음, 즉 부처님께서 깨달으신 자기불성에 대한 믿음을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철학적으로 '무아'가 이치에 맞는다 하더라도 마음으로서 믿음과 수행이 깔려있지 않는다면 '사상누각(沙上樓閣)' 이 되는게 아닐까 싶다.

 

이 책의 작가' 홍창성' 은 현재 미국 미네소타 주립대학의 철학과 교수님이시다.

작가가 주장하는 진리는 신비한 무언가가 아니고 오히려 단순하다는 명쾌함은 동의를 하지만 <무아가 곧 깨달음이고 행복이요 자유>라는 불성을 배제한 '무아만능론' 에 가까운 주장에 대해서는 납득이 잘 안간다.

철학과 교수님답게 서양철학으로 불교 철학을 해석하신점은 탄복하지만 마음을 떠난 믿음과 수행이 바탕이 되지않은 문자 논박에 치우친점은 많이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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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년 전(2023.9.19일), 오늘 블로그에 올렸던 무아에 대한 나의 생각을 다시 올려 본다.

그때 무아와 불성에 대한 고민을 했던 흔적을 다시 읽어 보니 지금은 확실히 말할 수 있겠다.

"무아와 불성은 둘이 아니다.

그리고 그 바탕은 믿음의 길 위에서 서는 것이며

그 길의 여정 끝이 바로 참나요, 자유인이다!" 라고.

 

하지만 나는 이렇게 말 할 수 있지만 여전히 실천에서는 아직도 머뭇 거려진다.

아마도 이 생이 다 할때 까지 여전히 방황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그게 바로  운명이라면, 여전히 이번 생을 사랑할 것이다.

 

by Dharma & Maheal

만약 독자에게 ‘나는 누구인가?‘ 라는 질문이 오묘하게 들린다면, 그것은 이름을 묻는 ‘나는 누구인가?‘와 인생관이나 진로를 찾는 ‘나는 무엇이어야 하는가?‘가 교묘하게 뒤섞여 있기 때문이다. 답이 분명하지 않은 이유는 질문이 엉터리이기 때문에 그런 경우가 대부분이다. - P17

이제 우리는 붓다의 논증을 감상할 준비가 되었다... 중략...
붓다의 논증이 짧은 문장들로 전해져 오고 있기 때문에 그 숨어 있는 논증의 구조를 헤아리기가 쉽지 않지만, 역시 붓다다운 탁월한 가르침이다. - P66

나를 찾는 과정은 실은 나를 내려놓는 과정이다. - P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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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제목:  GPU 적 사고와 공() 사유

세상은 직렬(直列)에서 병렬(竝列)로 이동하고 있다.

엔비디아의 젠슨 황이 GPU를 세상에 내놓고 보니, 그것은 단순한 기술의 혁신이 아니었다. 기존의CPU는 직렬적 선형이었다. 

안정적이지만 단순했다. 즉 제한적이었다

그러나 GPU는 코어를 직렬이 아닌 병렬로 배치하는 방식으로 보다 빠르고 확장성이 넓어졌다

즉 새로운 세계를 열어 젖힌 것이다.


오늘날, 인공지능의 문제를 풀어내는 방식은 GPU적 사고를 기반으로 한다. 수천 개의 연산 코어가 동시에 병렬로 움직이며 수많은 경우의 수를 열어두고 탐색한다

원래 GPU는 게임의 그래픽을 빠르게 그리기 위한 칩 이였지만, 지금은 인공지능과 가상세계의 심장을 뛰게 만드는 엔진이 되어 버린 것이다.

이것은 사유(思惟)의 혁명이었다.

이 병렬적 방식은 단순히 컴퓨터 기술에 국한되지 않는다.

오늘날 인류의 학문·스포츠·문화·종교까지 흐름은 GPU적으로 흐르고 있다.

UFC가 종합 격투기로 장르를 융합하고, 현대 축구가 공격과 수비의 경계를 허무는 멀티 전술로 나아가듯, 학문도 철학과 과학, 종교도 명상과 기도를 서로 차용하며 융합의 길을 걷고 있다.

인류는 이미 병렬적 사고를 통해새로운 진화의 길을 밟고 있다.


사실 병렬적 사유는 인류가 처음 겪는 일이 아니다.

고대 그리스의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가 철학과 수학, 자연학을 한데 묶어 탐구했을 때, 이미 그들은 GPU적 사유를 하고 있었다.

르네상스의 레오나르도 다빈치 또한 회화와 해부학, 공학을 동시에 넘나들며 병렬적 사유의 거인이었다

18세기 조선의 실학자들, 중국의 북학자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영역을 허물고, 동시에 사유했다.
그러나 근대 이후 학문은 쪼개지고 전문화되며 CPU적 직렬 사고로 흘렀다
효율은 높아졌지만, 창의성은 가뭇없이 사라졌다.

다시 GPU적 사고가 필요한 이유다.

2500
년 전, 붓다는 이미 GPU적 사고를 완성시켰다.

바로 불교의 공() 사상이다.

불교에서 말하는 “공”이란 본래 자성(自性)이 없다는 뜻이다.

고정된 실체가 없고, 오직 관계와 조건 속에서만 존재한다.

GPU 연산 역시 그렇다

GPU적 사고는 한 가지 고정된 답을 내놓지 않는다

데이터라는 인연 속에서 수많은 가능성을 가지고 확률적 갱신으로 의미를 만들어 낸다.

독립된 코어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연기의 망 속에서만 의미가 생기는 것이다.

결국 GPU적 사고란 확실성 대신 가능성, 단일 해답 대신 확률적 갱신, 고정된 실체 대신 공적 관계를 인식하는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오늘의 인공지능이 가르치는 사유 방식이며, 불교가 오래 전부터 일깨워온 깨달음이다.


이것은 니콜라 테슬라가 교류(AC)를 선택해 현대 문명의 불을 밝힌 것도 같은 맥락이다

에디슨의 직류(DC)는 안전했지만 한 방향으로만 흐르는 한계가 있었다.

그러나 교류는 흔들리고 떨리지만 오히려 멀리까지 빛을 전했다.

병렬적, 진동적, ()적인 방식이 직렬적 확정성을 넘어선 것이다.

경제 또한 병렬적 현실을 마주하고 있다. 주가가 오르는 것만으로는 풍요를 보장하지 않는다. 코스피 지수의 화려한 그래프 이면에 가계부채, 관세 협상의 실패, 부동산 시장의 불안이 얽혀 있다. 단선적인 수치만 보면 현실을 오도한다. 병렬적 시야로, 수많은 지표와 연동된 흐름을 동시에 보아야 한다.

우리가 앞으로 나아가야 할 길은 분명하다

정치든 경제든 학문이든, CPU적 직렬사고의 틀에서 벗어나 GPU적 병렬사고로 전환해야 한다.

이 사유의 전환을 인식하는 자가, 새로운 시대의 다빈치요, 새로운 부처가 될 것이다. 우리 모두 그런 가능성 위에 있다.


공은 허무가 아니다가능성의 장이다.

GPU가 보여주듯, 공은 무수한 연산과 길을 품는다.

그리고 그 안에서 우리는 다시 물어야 한다.
“과연 나는 직렬의 우물 안에 머무를 것인가, 병렬의 바다로 나아갈 것인가?


🖋 Dharma & Mahe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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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 8 31

제목: 이상하고 아름다운 도깨비 세상에서(서유기에서 귀멸의 칼날까지)



근래 들어 넷플릭스의 〈케이팝 데몬 헌터스〉와 일본의 애니 〈귀멸의 칼날〉이 인기를 끌고 있다

줄거리는 단순하다.  오니 즉 도깨비와 요괴가 사람들을 해치고, 그들이 속한 집단이 그것들을 멋지게 무찌른다. 걸그룹 헌터 귀살대(鬼殺隊), 이름은 달라도 핵심은 멤버들의 소속감이다. 많은 이들이 그들에게 열광하는 이유는, 또한 저들과 함께 도깨비를 무찌르고 싶다는 열망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이들의 원형은 서유기 삼장법사와 손오공 일행과 다르지 않다. 서천을 향하는 위에서 그들은 요괴와 맞서 싸웠다. 손오공은 여의봉을 휘두르고, 72가지 변신술로 저팔계는 삼지창으로 사오정은 반월 창으로 요괴를 제압했다. 오늘날 귀살대의 기둥()들이 호흡에 의한 검술이나, 걸그룹 헌터 춤과 노래로 펼치는 굿판 역시 같은 맥락에 놓여 있다.

그렇다면 현실에 도깨비가 정말 있는가?

있다.

서로를 요괴라 부르며 끝없이 다투는 정치판 말이다. 다만 모습은 바뀌었을 뿐이다.

끊이지 않는 당파싸움, 허깨비를 만들어내던 조선의 사화와 쇄국정책이 모두 예다. 구한 조선은 제너럴 셔먼호를 불로 태우고 병인, 신미양요 같은 서양 오랑캐를 물리쳤다 자만과 동시에 세상의 흐름은 쳐 버렸다. 그에 반해 일본은 흑선의 충격을 받아 보신전쟁(1868)으로 봉건을 청산하고 근대를 열었다. 같은 시기, 우리는 내부의 허깨비와 싸우느라 정작 진짜 도깨비와는 맞서지 못했던 것이다.

일본의 메이지 유신 뒤에도 라스트 사무라이들과 신정부의 서남전쟁(1877)이라는 내전을 치렀고 우리 조선은 동학혁명(1894)으로 몸부림쳤다. 그러나 양국에서 흘린 내전의 피는 서로 다른 열매를 맺었다. 일본은 근대화로 이어졌고, 조선은 식민지라는 비극으로 떨어졌다

역사는 도깨비와 허깨비가 얽힌 싸움의 연속이었다.


오늘날 내가 지지하는 정당은 정의이고 상대당은 도깨비 같은 요괴 무리로 취급한다. 사실은 우린 여전히 허깨비와 싸우는 중이다.

진짜 도깨비는 여전히 곁에 놔두고 말이다. 관세, 환율, · 패권, 가짜 뉴스, 양극화 모든 것이 현대판 요괴들이.

서유기에서는 손오공의 여의봉 하나로는 모든 요괴를 이길 . 삼장 일행이 함께 힘을 모아야 했다. 귀멸의 칼날도, 케이팝 헌터스도 마찬 가지다. 귀살대가 호흡을 맞추, 걸그룹 헌터가 춤과 노래를 합주하듯이, 이제 우리도 함께 리듬을 찾아야 한다.

우리가 서유기와 귀멸, 케데헌에 이끌리는 까닭은, 함께 맞서야 요괴들을 무찌르며 길을 나섰던 기억이 집단 무의식 속에 남아 있기 때문일 것이다. 아마도 동양 삼국은 기억을 누구보다 깊이 간직해온 명일지 모른다.

도깨비는 사라지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도깨비와 허깨비의 구분뿐만 아니라, 어떻게 함께 도깨비를 무찌르느냐다. 이상하고도 아름다운 도깨비 세상에서, 우리가 얻어야 것은 허깨비와의 다툼이 아니라 진짜 도깨비와의 싸움 끝에 손에 쥐는 보배다.
보배는 다름 아닌, 각자 가슴속에 품어야 행복이라는 여의주가 아닐까?


이상하고 아름다운 허깨비 같은 세상, 그대 도깨비가 보이는가?




🖋 Dharma & Mahe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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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크냄새 2025-08-31 10:1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도깨비 세상의 허깨비는 도깨비가 만들어 내지만 현실 세상의 허깨비는 우리가 만들어 낸다는 것이 묘하죠. 우리가 만든 허깨비는 잠에서 깨면 사라지는데 우리는 자는 게 아니라 자는 척 하기 때문에 절대 허깨비를 이길 수 없는 현실이 아닌가 싶어요. 차라리 깊이 잠들라!!!

마힐 2025-09-03 08:32   좋아요 1 | URL
귀멸의 칼날에서 혈귀들은 인간 보다 강하고 죽지도 않아요. 하지만 햇빛을 쬐면 바로 타서 죽어버려요. 그래서 그들의 최종 보스는 완전한 존재가 되려고 태양을 극복할 수 있는 청색 거미 꽃을 찾으려 했답니다. 하지만 거미 꽃은 일 년에 딱 이틀만 낮에 개화하기 때문에 밤에만 활동하는 그들은 절대로 얻을 수 없어요. 결국 불로장생인 그들 또한 거미 꽃이라는 허깨비를 쫓은 셈이죠. 결국 허깨비는 우리의 그릇 된 욕망과 집착이 만들어 낸다는 것이죠. 아무리 강한 존재 조차도 욕망과 집착이 있다면 허깨비 속에 살게 된다는 뜻이기도 하지요. 잉크냄새님 말처럼 마음 편하게 차라리 깊이 잠이나 자면서 영생을 꿈꾸는 것도 좋을 것 같네요.ㅎㅎ

잉크냄새 2025-09-03 19:50   좋아요 1 | URL
차라리 깊이 잠들라는 잠으로 영생을 꿈꾸는 것이 아니라 不知为不知의 의미라 생각해요. ㅎㅎ
 

관노트: 8 27

글 제목:  어린 왕자에서 은하 철도 999, 그리고 화엄경까지


어제 블로그 이웃 이신 잉크냄새님의 어린 왕자의 사투리 버전에 대한 리뷰를 읽다가 문득 어린 왕자의 여우가 떠올랐다.

여우는 지구 별을 여행하는 어린 왕자에게 중요한 것은 마음으로 봐야 함을 알려준 스승과 같은 존재다. 만약 어린 왕자가 여우를 만나지 못했다면 과연 어린 왕자는 장미에게 지녔던 감정이 사랑 이였음을 깨달을 수 있었을까?

이렇게 사유해 보다가 어린 왕자는 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넘어서 깨달음을 얻는 구도의 여정으로 읽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화엄경과 연결되었다.

화엄경은 불교 경전 가운데서도 ‘경전의 왕’ 이라 불린다

부처가 깨달음을 얻은 , 세상의 모든 존재가 인연에 의해 서로 얽히고 기대며 살아가는 법을 보여주는 책이다. 마지막 입법계품에서 선재동자는 53명의 스승을 찾아다니며 무지와 집착을 버리고, 보현보살에게서 깨달음은 지혜로만 끝나지 않고 자비로 완성된다는 가르침을 받는다.


어린 왕자는 단순하게 어른을 위한 동화가 아니다. 

별에서 만난 , 허영심 많은 사람, 술꾼, 사업가, 등불지기, 지리학자는 모두 인간의 집착과 어리석음을 상징한다. 선재동자가 위에서 만난 선지식처럼, 어린 왕자도 만남을 통해 깨달음의 단계를 밟아간다. 

특히 어린 왕자가 만났던 왕의 모습에서 이제는 콜드플레이의 노래 Viva La Vida 멜로디가 떠오른다.

“한때 세상을 지배했지만, 지금은 성벽은 무너지고 나는 홀로 있다. 

멜로디는 경쾌하지만, 안에는 권력이 얼마나 덧없는지 담겨 있다.

권력은 실체 없는 그림자이고, 무너지는 순간 비극은 오히려 울림으로 변한다. 


마침내 지구별에서 어린 왕자가 여우를 만났을 그는 알게 된다. 

장미가 특별한 이유는 네가 시간을 들였기 때문이야 

사랑은 감정이 아니라, 관계와 책임, 시간과 정성 속에서 특별해지는 것이다.

여우는 화엄경의 보현 보살과도 같다. 보현보살은 자비의 상징이며 사실 지혜와 자비는 불교의 깨달음의 다른 말이기도 하다.

마지막에 어린 왕자는 뱀에게 물려 육체의 껍데기를 벗는다. 

“내 몸은 너무 무겁다. 껍데기일 뿐이야. 

어린 왕자에서 뱀은 허물을 벗는 상징이자 장면은 불교의 무아와 겹친다. 뱀이 허물을 벗듯이 우리의 육신도 그저 허물을 벗는 것이다. 육체는 껍데기일 뿐이고, 본질은 너머에 있다.


장면에서는 은하철도 999 떠오른다. 만화에서는 철이와 메텔은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 우주를 여행한다. 하지만 여정의 끝에서 철이는 깨닫는다. 영원한 육체, 기계의 몸은 인간다움이 사라진 껍데기일 뿐이라는 것을 알게 것이다. 

이것은 어린 왕자가 사막에서 육체의 무거운 껍질을 벗는 장면과 맞닿아 있다. 영원을 얻겠다는 욕망은 결국 참된 인간임을 포기하는 길이었다. 


이처럼 어린 왕자와 Viva La Vida 그리고 은하철도 999까지.

서로 다른 언어와 시대, 장르에서 태어났지만 모두 같은 이야기를 들려준다. 

영원과 권력, 육체와 소유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무상 속에서 자비와 자유를 얻으리라는 것이다.

넓은 의미에서 화엄경은 동화 속에도, 음악 속에도, 만화 속에도 있다

바로 우리가 사는 세상이 화엄 세상이다. 깨달음은 멀리 있지 않다.

우리가 읽고, 듣고, 감동한 이야기 속에 이미 숨어 있기 때문이다. 


신라시대 의상대사가 방대한 화엄경의 정수를 짧게 응축해 놓은 것을   법성계(法性偈) 한다. 법성계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구절이 있다.

<시고행자환본제, 파식망상필부득(是故行者還本際, 罷息妄想必不得)

이런 고로 수행자는 근본으로 돌아가되, 망상심을 쉬지 않으면 얻을 것이 하나도 없네> 


보고 듣고 말하는 모든 대상을 분별하지 않을 비로소 깨달음이 다가온다. 

이제 어린 왕자는 화엄경의 선재 동자와 같은 수행자의 모습으로 보이기 시작한다.

어린 왕자가 걸어간 여정은 우리 모두의 여정이다. 


결국, 우리 모두 어린 왕자다. 



🖋 Dharma & Mahe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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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크냄새 2025-08-27 16:5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어린 왕자가 이렇게 화엄경 속에서 태어나는군요.

마힐 2025-08-28 23:44   좋아요 0 | URL
우린 어린 왕자처럼, 혹은 선재 동자처럼 늘 여정을 통해서 깨달음을 얻는 수행자와 다를 바 없어요. 잉큰 냄새님의 다음 여행기도 기대 됩니다. 어떤 깨달음을 얻으셨나요? ㅎㅎ

cyrus 2025-08-28 21:1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직 어리고 젊다는 의미가 있는 어린 왕자로 살고 싶어요. 왕자는 저랑 어울리지 않으니까 어린 아저씨 정도...? ㅎㅎㅎㅎ

마힐 2025-08-29 00:03   좋아요 0 | URL
cyrus 님은 아마도 은하철도 999의 철이가 쓰는 총, 코스모 드래군을 가진 어린 아저씨 모습이 아닐까요? 코스모 드래군은 우주에서 하록 선장같은 레벨을 지닌 사람들만 지녔는데, cyrus님의 올리시는 글에서 그런 느낌을 종종 받습니다. ㅎㅎ
 

관노트: 826

글 제목:  완벽귀조(完璧歸趙) 트럼프

춘추전국시대는 약육강식의 시대였다.

강대국은 힘으로 약소국을 위협했고, 약소국은 처신과 외교로 살아남아야 했다.
대표적인 고사로 완벽귀조(完璧歸趙) 전해져 온다.

약소국 ()나라에는 화씨지벽(和氏之璧)이라고 불리는(오늘날의 )’ 있었다. 강대국인 진나라는 보물을 탐 냈 마침내 자신들의 일부와 바꾸자고 요구하기에 이르렀다. 조나라는 분명 그것은 명분에 지나지 않고 결국 모두 뺏기게 되리라는 고민에 빠졌다.
옥을 바치면 보물을 잃고, 거절하면 전쟁이었다.

이때 조나라의 재상 인상여(藺相如) 기지를 발휘해 옥을 잠시 진나라에 보내는 척하며 결국 무사히 돌려받았다.
고사에서 나온 말이 바로 ‘완벽(完璧)’이다.

완벽귀조 없는 옥을 온전히 지켜내 조나라로 가져왔다 뜻이다.


오늘날, 여전히 우리는 춘추전국시대의 상황과 다르지 않음을 쉽게 안다.
어제 저녁 트럼프 대통령은 한·미 회담을 앞두고 자신의 SNS 글을 남겼다.
“한국은 숙청 중이다. 혁명 같다. 우리는 그런 나라에서 사업을 없다.
짧은 문장이었지만 파장은 보였다. 언론과 정치권은 혹시 회담이 파행으로 흐르지 않을까 긴장했고, 해석이 분분했다.

그러나 막상 회담장은 달랐다.

트럼프는 이재명 대통령을 맞으며 환하게 웃었고, 100% 지지한다”고 말했다.
결과적으로 우려는 기우였고, 회담은 무사히 마무리됐다.

정부는 안도했고, 정당들은 각자의 언어로 성과와 한계를 해석했다.
의전 문제는 논란이 됐다. 비판자들은 영빈관 대신 호텔 숙박과 공항 영접 인사의 격을 문제 삼았고, 지지자들은 실무 방문이니 당연한 절차라 했다.
하지만 사실 중요한 것은 그러한 체면이 아니다.

회담의 실질적 성과가 있었는가, 삶에 닿는 변화가 있느냐가 본질이다.

트럼프의 방식은 특유의 연극성이 있다. 회담하기 강한 언어로 기선을 제압한다. 그러고는 회담장에서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환대로 전환한다.
이렇게 트럼프는 설계된 연극으로 협상의 주도권을 자연스레 쥐고 있었다.

작은 요구조차 내놓지 않은 보였지만, 진짜 청구서는 뒤에 것이다.
관세, 동맹, 투자 이행 같은 구체적 비용은 언급조차 안되었기 때문이다.

결국 이번 회담은 겉으로 체면을 지켰을 , 관세와 동맹, 투자라는 본질적 과제는 그대로 남았다.
우리가 지켜내야 것은 체면이 아니라, 완벽과 같은 없는 실질적 성과다.
조나라가 화씨지벽이라는 옥을 돌려받은 것처럼, 우리의 행복한 이라는 옥을 온전히 지켜내야 한다.

정치권은 서사로 다투겠지만, 시민은 수치로 그들을 평가해야 한다.

적어도 아래 8가지 지표의 수치는 확인이 필요해 보인다.
1.
공장 기분 지수(PMI) 살아나고 있는가?  (50 이상이면 공장이 살아난다는 신호로 본다)
2.
반도체 수출, 자동차, 조선, 화장품 고르게 팔리는가?
3.
관세 예외 업종 , 미국이 세금을 깎아주는 산업이 늘어나는가?
4.
조선업 투자 실행률, 계약이 실제 착공, 고용으로 이어지는가?
5.
외국인 투자 유입, 유출(FDI), 한국으로 돈이 들어오는가, 빠져나가는가?
6.
노사 분규와 가동률, 파업으로 멈추지 않고 공장이 돌아가는가?
7.
실업률과 청년 장기 구직자, 젊은 세대가 일자리를 얻고 있는가?
8.
물가 2% 유지가 되는가? (2% 생활비의 안정적인 수준의 기준임)

숫자와 추세선 이야말로 정치의 서사보다 확인해야 진실에 가깝다.
춘추시대 인상여의 지혜는 오늘날 수치에 근거한 지혜로움으로 변해야 한다.
춘추시대 조나라가 화씨지벽 지켜낸 것처럼, 오늘날 한국도행복한 이라는 완벽(完璧)’ 돌려받아야 한다.

트럼프의 무대는 연극일 있으나, 시민의 삶은 무대 연극이 아니다.
우리는 의전의 격보다 매달 나오는 수치 속에서 나라의 방향을 읽어야만 한다.

서사와 선동에 흔들리는 정치보다는 원칙과 수치를 무장한 지혜로운 자로 살아야 된다.


나는 과연 행복한 삶을 완벽하게 지켜낼 수 있을까?



🖋 by Dharma & Mahe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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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크냄새 2025-08-27 16:5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조도 결국 진에 의해 멸망한 역사라면 완벽귀조 또한 궁여지책이고 임시방편이 아닌가 싶군요. 진의 통일 그 너머를 바라보는 혜안이 필요했을 터인데 역사는 또 어떤 모습으로 그 교훈을 전해주고 있을까요.

2025-08-28 10:56   URL
비밀 댓글입니다.

카스피 2025-08-27 21: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말씀하신 8가지 수치중 현재 민주당이 줄기차게 내놓은 법안은 말씀하신것과 반대로 수치를 낮추는 행태를 보이고있어 미래가 암울해보입니다.

2025-08-28 10:58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