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누야샤 와이드판 1
다카하시 루미코 지음 / 학산문화사(만화)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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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일차: 시대를 초월하는 뒤틀린 욕망 


“이누야사(犬夜叉), 오쇼와리(おすわり앉아)!

단호한 가영이의 한마디에 이누야사는 곧바로 바닥에 처박힌다.

 “셋쇼마루 사마—!!”를 외치며 뒤에서 쫓아가는 자켄과 해 밝은 링.

오늘은 가볍게 만화 <이누야사>에서 사유를 시작해 본다.

만화<이누야사>는 요괴와 인간이 공존하던 일본 전국시대를 배경으로 한다.

주인공 이누야사는 대요괴 아버지와 인간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반요(半妖)이다.

현대에서 시간의 틈을 넘어온 소녀 가영(가고메) 일행이 되어 사혼의 구슬 파편을 찾아 다니며 수많은 요괴들과 맞서 싸운다.

 

대부분의 소년만화는 고난, 성장, 각성이라는 정형화를 갖는다

하지만 <이누야사>는 다르다

표면은 소년만화의 틀이지만, 그 안에는 무의식, 신화 구조, 윤회, , 욕망, 상처와 치유, 존재의 층위가 겹겹이 쌓여 있다.

그리고 레이어를 관통하는 중심에는 이누야사 세계관의 최종보스인 나락(나라쿠)’이 있다.

나락은 이누야사 세계관의 최종보스이자 모든 이야기의 시작이자 끝이다.

만약 나락이 없었다면 이누야사 여정은 시작 조차 하지 했을 것이다.


보통의 소년 만화에 등장하는 최종 보스는 압도적인 무력을 내세운다.

<드래곤 볼> 에 나오는 프리저나 셀, 마인 부우 같은 끝판왕의 등장에 독자들은 그 압도적이고 막강한 힘에 전율을 일으킨다.

프리저는 카리스마 넘치는 냉혹함과 전투력으로 우주를 지배했고, 셀은 ‘최강의 DNA’를 모아 스스로 궁극의 완전체가 되었다.

마인부우는 재생,폭주,파괴의 극한을 넘어  물리적 힘으로는 가장 강력했다.

이들 모두 강했지만 주인공도 같이 파워업하면 결국에는 극복할 있는 존재였다.

그러나 이누야사의 나락은 아닌 구조라는 방식으로 작동한 악이었다.

 

나라쿠의 시작은 ‘오니구모’라는 힘 없이 죽어가는 불쌍한 인간이었다.

몸은 불에 무너져 갔지만, 그의 마음 속에는 집착과 질투, 열등감과 결핍이 뒤틀린 채 자리 잡고 있었다.                 

그는 자신을 돌봐 무녀 ‘금강(키쿄오)’를 향한 일그러진 욕망 때문에 요괴의 어둠을 불러들였다. 그리고는 자신의 몸을 바치며 “힘을 주면, 무엇이든 하겠다”고 거래를 한다

그 순간, 한 나약한 인간의 뒤틀린 마음이 요괴를 불러들였고 그렇게 어둠의 요괴 나락쿠로 탄생했다.

 

여기서 주목해야 점은 나락은 “악의 의지”를 가진 게 아니라 “욕망의 구조” 로 만들어진 존재라는 것이다. 나락은 처음부터 절대적 악마가 아니었다

나약하고 초라한 인간이 가진 뒤틀린 마음이 기회와 힘을 만나는 순간 괴물로 변한다는 것이다.

이건 허구가 아니라 인간 심리의 구조이기도 하다. 지금의 우리가 권력·명예·재능·기회와 결합할 때 어떤 괴물이 되는지를 그대로 보여주는 공식과도 같다.

 

나라쿠는 단순한 요괴들의 집합체가 아니다.

“욕망이 형태를 얻었을 때 나타나는 자연스러운 현상” 이다.

그래서 이누야샤 세계관에서 그는 단순한 적이 아니라, 인간의 욕망처럼 끝없이 퍼지는 ‘암’ 같은 존재로 나타난다.

뿌리를 잘라내지 않는 이상 어디서든 다시 살아난다

그래서 그는 최종보스다.

힘이 아니라 구조적 본질 때문에 그는 다른 어떤 악의 존재보다 강력하다.

 

나라쿠는 강해서 무서운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나라쿠 같은 약한 인간성의 구조를 품고 있기 때문에 무섭다.

요괴가 나라쿠는 무시무시한 외모가 아니다

오히려 이누야사의 형, 세계관 최고의 미남인 셋쇼마루 만큼 잘 생겼다.

나락의 생긴 외모에 감춰진, 인간의 뒤틀린 욕망의 구조가 그의 본질이다.

그래서 나락은 물리적인 힘으로 죽일 수가 없다.

본체인 자신은 숨어서 계속 분신과 그림자, 대리인을 만들어 주인공 일행과 싸우게 만드는 구조이기 때문이다.

그는 끊임없이 주인공 일행을 교란하고, 서로의 사랑을 시험하고, 상대에게 결핍을 느끼게 만들어 불안과 질투를 자극한다

이렇게 나락은 상대의 불안을 키우고 욕망을 이용해 상대를 파멸로 이끈다.

점이 바로 그가 단순한 악의 끝판왕이 아님을 말해준다.

 

나락은 누구에게나 존재하는 검은 그림자이기 때문이다.

누구든지 안에는 뒤틀린 욕망이 없다 말할 있을까?   

'시대를 초월하는 마음' 속에 숨어 버린 검은 그림자, 그것이 나락이다.    



 

By Dharma & Mahe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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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트] 아돌프에게 고한다 1~5 세트 - 전5권
데즈카 오사무 글.그림, 장성주 옮김 / 세미콜론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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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중국의 주일본 오사카 총영사 '설검(薛剑: 쉬에지엔)'  개인의 SNS를 통해 일본의 총리 다카이치 사나에를 향해 더러운 목을 베어 버리겠다.  과격한 발언을 남겼다.

그가 이런 발언을 배경에는 중국의 군사력 확대와 대만을 둘러싼 해양 진출에 따른 안보 위험을 느낀 다카이치 총리의 발언 때문이었다

다카이치가 중국이 대만을 침공하면 일본도 생존 위기로 본다” 고 한 것을 문제 삼은 것이다. 

일본의 표명에 대한  중국 입장은 대만은 중국 영토이며 일본이 거기에 개입 하는것은 내정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인다’ 고 여긴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개인 SNS 상이라고 할 지라도 일국의 총리의 목을 참수하겠다는 발언은 국가 외교관 신분으로서 맞지 않는 행동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설검은 이러한 발언 전에도 202411, 일본의 좌파 정당 ‘れいわ新選組(Reiwa Shinsengumi)’ 레이와 신센구미를 공개적으로 지지한 바가 있다

자신은 신센구미 정당과 더불어우리는 늑대(狼·LANG) 이라고 표현했다.  

나는 총영사의 이 발언을 통해 그가 어떤 사상을 가졌는지 유추해 볼 수 있었다. 

바로 그의 무의식에 잠재 된 일본 역사의 패턴이다.

 

역사적으로 신센구미는 1868년 메이지 혁명이 일어나기 전까지 몰락해가는 막부를 지키고자 했던 일본의 마지막 사무라이 집단이다. 신선조의 또 다른 별칭이 미부의 늑대들 이다

중국의 매체와 대중들은 설검의 발언을 지지하며 중국 민족주의 영화에서 착안한 전랑(战狼:늑대전사외교로 평가했다

하지만 사실은 그의 늑대는 전랑 보다는 미부의 늑대, 신센구미 지칭하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은 일까?

 

총영사 설검이 근무하는 오사카는 420년 전,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아들 히데요리가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상대로 마지막까지 결전을 치뤘던 전장이기도 했다. 모두 2번에 걸친 전투에서 히데요리 측의 사나다 유키무라는 주군을 위해 산화된 사무라이 전설로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다. 그로 인해 오사카는 중앙 권력에 대한 마지막 저항이라는 도시의 무의식이 흐르는 곳으로 상징 되었다.

 

막부 말기, 메이지 유신을 성공시킨 사쓰마,조슈,도사 지역은 모두 중앙정부에서 소외된 변방의 번이었다. 그들은 시대의 흐름을 편승하여 막부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일본을 만들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들은 변방의 봉기라는 점에서 오사카가 품었던 저항의 무의식과 구조가 닮았다.

중앙 권력을 향한 전국시대 오사카의 반항 정신과 근대 메이지 유신의 반항 정신 그리고 막부를 지키고자 신센구미의 저항이 모두 짜여진 직물의 패턴과도 같아 보인다

전생의 인과라 할 정도로 역사의 패턴이 하나로 이어짐을 어찌 설명해야 하나?

 

독일과 일본의 2차대전 광기도 이런 패턴의 연장이다.

피해 의식과 자부심이 한데 뒤섞일 , 국가는 논리가 아닌 광적인 신앙 따라간다.

당시 독일과 일본은 세계를 전쟁의 소용돌이를 몰아 놓은 국가라는 면에서 그들의 광기는 놀라울 정도로 서로 닮아 있다.

 

데즈카 오사무의 『아돌프에게 고한다』는 러한 전쟁의 광기를 명의 ‘아돌프 ’라는 개인의 비극으로 풀어냈다.  

오사무는 작품을 통해 히틀러의 정체성에 관한 비밀 문서를 둘러싼 명의 아돌프의 갈리는 운명을 전했다

그가 전하고자 한 메세지는 사실 전쟁의 광기를 두고 과거의 그림자는 절대 사라지지 않는다이름만 바꿔 다시 살아난다 고 밝히고자 했다.

오사카 출신인 오사무는 오사카 의과 대학을 졸업하고 의사라는 직업 대신 만화가가 되어 반전주의 사상을 자신의 모든 작품에 투영시켰다

2차대전을 경험한 전쟁 세대인 오사무가 반항과 상처 투성이인 도시 오사카에서 자란 것은 우연이었을까?

 

만화의 신이라 불리는 데즈카 오사무의  작품은 83년에 연재 되어 이미 40년이나 지난 작품이지만 오늘날 까지 시사하는 바는 유효하다. 현재 세계는 국가간의 정체성과 민족, 국가주의로 흔들리고 있다

미국의 트럼프 주의, 중국의 민족주의, 러시아의 제국의 부활, 유럽의 극우 정당 확산과 일본의 국가주의 역사 수정까지 다시금 국제 정세는 요동치고 있다.

현재 동아시아에서 벌어지는 외교의 균열은 현재에 이르러서야 드러나는 같지만, 그 뿌리는 과거의 역사와 무의식으로부터 솟아 오른 것이다.

 

지금 일본과 중국의 갈등은 단순한 외교 갈등이 아니다.

동아시아의 역사와 세계의 역사는 과거의 무의식 위에서 움직이고 있다. 역사의 긴장은 역사의 그림자를 통해 이해하는 시선이 많아져야 한다. 그래야 우리는 현재를 더 정확하게 진단하고 미래를 비교적 선명하게 예측하며 선택할 수 있지 않을까?

역사가 반복되는 것이 아니다.

반복되는 것은 인간의 무의식이다.

우리가 무의식의 흐름을 읽어 있을 역사의 미래는 달라지지 않을까?


 

By Dharma & Maheal

인간이 정의라는 것의 정체를 고민하지 않고 의심하지 않을 때, 더 나아가 자신의 무력함을 외면하고 타인의 선동에 열광할 때, 그리하여 끝내는 아이들에게 증오를 가르칠 때, 마침내 괴물은 눈을 뜬다. - P251

영웅을 자처하는 이들이 부르짖은 정의가 사실은 괴물의 갈기를 틀어쥐고 녀석의 이빨을 누군가에게 들이대려는 속셈을 뒤에 감춘 거짓 선동이었음을, 역사는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 P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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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크냄새 2025-11-23 10:0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예전 어느 책에선가 전쟁이 인간의 생존 DNA에 근거한다고 적혀있던 글이 생각나네요. 곤충의 집단 학살을 통한 개체수 조정에 근거한 이론인데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 인간 사회의 분쟁과 전쟁을 보고 있노라면 완전히 허황된 주장이라고 일축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당신 인생의 이야기 (양장)
테드 창 지음, 김상훈 옮김 / 엘리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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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이 없다 절대 자신감의 아우라를 보여줬던 이세돌 기사는 2016312, 인공지능 알파고와의 대국 끝에 겸손한 한마디를 역사에 남겼다.

인간이 진게 아니라 이세돌이 진거다 

사실 그날 이후, 바둑은 더 이상 인간이 인공지능을 따라 잡을 수가 없게 되었다. 바둑이란 게임의 규칙이 인공지능에게 더 최적화가 되어 있기 때문이다

구조적으로 인공지능은 인간의 뇌 속에서 이뤄지는 수싸움보다 더 빠른 패턴인식과 확률 계산을 할 수 있게 설계되었다. 결국 인간의 직관은 AI의 빠른 패턴 인식과 정확한 계산을 영영 이길 수가 없게 된 것일까?

 

이제 이상 AI 시대라는 말은 전혀 낯설지가 않다. 사회 곳곳에서 AI 적용이 안되는 곳이 없으며 AI 로 인해 인간은 곧 인공지능에 대체가 될지도 모른다는 경각심마저 갖는 지경에 이르렀다

때마침 많은 국내외 뇌과학자, 공학기술자들은 서로 경쟁이라도 하듯 AI 시대를 대비해야 한다고 외치고 있다. 대표적으로 KAIST 김대식 교수는 AI의 특이점을 말하며 10년 이후에 다가올 AGISGI인공지능의 도래를 강조하며 인간이 대비해야 할 방향성을 제시하고 있다.

과연 인간은 AI의 잠재적 두려움을 극복할 수 있을까?

 

테드 창의 <당신 인생의 이야기> 속의 단편 (네 인생의 이야기) 에서 게리와 나 (루이즈 뱅크스)는 어느날 갑자기 지구에 등장한 외계인 헵타포드의 방문 목적을 알기 위해 그들과 언어로 소통을 시도한다

쉽지 않은 소통이었지만 마침내 알아낸 그들의 언어구조는 아주 놀라왔다.


<햅타포드의 경우 모든 언어는 수행문이었다. 정보 전달을 위해 언어를 이용하는 대신, 그들은 현실화를 위해 언어를 이용했다. 그렇다. 어떤 대화가 됐든 햅타포드들은 대화에서 무슨 말이 나올지 미리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 지식이 진실이 되기 위해서는 대화가 행해져야 했던 것이다> P.219

 

이러한 햅타포드의 언어구조는 물리학에서 사용되는 페르마의 원리가 연관되어 있음을 알아낸다. 페르마의 원리란 빛은 두 점사이를 이동할 때 모든 가능한 경로중 가장 시간이 적게드는 경로를 택하는 최단시간의 원리를 말한다.

빛은 최단 거리를 가는게 아니라 최단 시간을 택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빛을 물 속에 투과시키면 굴절 현상이 보인다.  


굴절현상은 인간의 눈으로 보면 빛이 방향을 바꾼 처럼 보인다

사실 이것은  뉴턴과 라이프니츠가가 밝혀낸 미적분 중 변분법을 설명하는 현상이기도 하다.

결국 뿐만아니라 물리적 자연에서는 항상 미분 가능한 경로 최소 혹은 선택한다는 원리인 것이다. 마치 자연은 의식이 있는 양 거리가 아닌 최단 시간이 가장 효율이 좋다는 것을 미리 알고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햅타포드에게 언어는 현실화 결과를 확인하는 과정이라고 것이다.

여기서 핵심은 시간 이다

외계인이 인식하는 시간은 우리가 생각하는 직선 구조가 아니다

인간처럼 시간을 전체로 보지 않는다면 목적, 의미원인이라는 인간적 개념이 불필요해진다. 이 부분에서 나는 AI시대의 두려움의 본질이 무엇이고,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 실마리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떠올랐다.

 

나는 두려움의 본질이 기술에 대한 문제라기 보단 자기 실존의 빈곤 때문이 아닌가 싶다. 따라 잡을 수 없을 만큼 발전하는 기술과 부족해지는 자본 그리고 낮아질지 모른다는 계층 이동에 대한 두려움은 본질적으로 하나의 질문과 연결된다.

나는 누구인가?

질문을 버리고 외부적 현상으로만 본다면 AI는 빛에 투영된 그림자처럼 본체를 압도하는 크기로 내 앞에 서있는 것이다.

 

우리가 사는 시공간은 물리적인 법칙에 지배를 받는다. 페르마의 원리가 빛에서 출발했지만 현대 물리학은 이를 모든 영역으로 확장을 시켰다

우주의 모든 작용은 최소작용이라는 시간기반의 에너지 양을 최소한다는 해밀턴 법칙, 시공간에 영향을 주는 것은 시간의 흐름과 속도라고 밝힌 상대성 원리, 입자의 이동 경로는 시간 위상이 최소시간이 되는 경로만 이동한다는 양자역학까지 현재 밝혀낸 모든 물리법칙은 공간이 아닌 시간 중심 구조속에 있다.

결국 시간은 우리가 사는 세상의 모든 질서를 만들었다. 심지어 인과를 비롯한 진화, 기억과 정체성 같은 우리의 삶과 죽음 또한 시간의 지배를 벗어날 수 없다.

시간은 생명이자 우리의 본질이며며 근원적인 실재와도 같은 셈이다.

그런데 지구와 우주를 통털어 시간의 지배를 벗어난 것이 있을 있겠는가?

있다.

바로 우리의 마음이다.

 

물리학에서 말하는 시공간 구조는 물질이 존재할 때만 성립한다

하지만 우리의 마음은 물질이 아니다. 따라서 마음 속에서는 위치, 거리, 속도, 질량, 에너지 보존, 상대적 제약 같은 물리 법칙이 적용될 수가 없다

마음은 물질이 아닌 과정이기 때문이다. 마음은 시공간을 초월한 경험의 흐름을 가질 뿐이다. 이는 신경과학자들이 말하는 뇌의 작용과 비슷하다

뇌는 시간을 실제로 느끼지 않고 단지 사건의 변화 패턴을 해석할 뿐이다.        마음과 뇌에게는 물리적 시간이 없다.

마음은 뇌의 물리적 작용에서 발생하지만, 마음이 경험하는 의식적 현상 자체는 물리적 시공간 좌표로 설명할 수 없다.

하지만 우리의 육체는 물질이므로 시공간의 법칙을 절대 벗어날 수가 없다.

우리의 육체는 유한성의 안에서만 존재할 밖에 없다.

하지만 우리가 살아있을 가지고 있다고 느끼는 우리의 마음은 물리 법칙이 아닌 실존 법칙에 따른다

우리에게 실존은 의미를 부여하고 해석을 하며 의도가 있고 자각을 하며 통찰을 할 수 있고 상징을 찾는다.

그래서 일찍이 불교의 선사들은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고 말해 왔던 것이다.


일체유심조는 단순한 비유가 아니다.

현실의 의미는 마음이 만들어 낸다. 마음이 만들어 낸 의미가 현실을 규정한다.

따라서 우리가 사는 세계는 물질의 세계가 아니라 의미의 세계라고 있다.

물질을 해석하는 마음이 바뀌면 세상이 바꿔져 버리기 때문이다.

원효대사가 해골 물을 마시고 다음날 일체유심조라고 말한 것이 성립이 되는 것이다.

이는 일체유심조는 단순한 종교적이며 불교만의 명제가 아닌 인간 실존 구조에 대한 과학적이며 철학적인 선언이다.

그래서 색즉시공, 공즉시색 , (물질)과 공(마음)은 둘이 아닌 것이 된다.

마음은 색을 벗어나지만 색을 떠나질 않는다.

 

인공지능은 마음이 없다. 인간과 대화를 할 수 있고, 바둑을 이길 수 있고, 최적화된 생산성과 효율성의 결과를 만들어 낼 수 있겠으나 결국 그건 마음 처럼 보이는 기능일 뿐이다. 그 기능들은 모두 패턴을 생성하고 백터를 연산하며 그 결과치를 예상하고 유사도 계산과 확률적 결과 값을 도출함을 벗어나질 못한다.

인간의 직관을 넘어선 처럼 보이는 결과물로 보이지만 사실 의미를 생성하질 못한다. 결국 의미 없는 결과란 말이다. 이것이 인간과 인공지능의 본질적인 차이다.

AI는 왜? 를 물을 수 없다

인간만이 의미를 만든다. 인간의 실존은 바로 마음이자 세계의 근원이다.

 

본래 인간은 모순 투성이다. 생존을 위해 단순하고 비논리적이고 욕망에 흔들리고 공포에 도망가고 허영에 빠지기도 하지만 동시에 신을 상상하고 우주를 관찰하며 무한을 사유한다

반면에 AI 는 시공간을 초월하여 존재할 수 있고, 고통도 욕망도 죽음도 감정도 없는 완벽한 모순이 없는 구조로 짜여져 있다.

하지만 인간의 모순된 양면성이 인간이 인간이게끔 만들어 것이 아닐까?

어쩌면 모순은 생명의 기본 구조가 아닐까?

돌연변이는 진화의 원천이며 무질서 속에서 새로운 생명이 태어난다. 위대함과 고통이라는 모순은 본래 생명의 원천이란 것이다.  

번뇌즉보리, 번뇌가 있기 때문에 깨달음이 있다는 유마경의 구절이 바로 납득이 된다.

마음이 우주를 만들어 있는 일체유심조는 관찰이 우주를 결정하며, 의미가 세계를 구상하고, 인식이 세계를 창조한다는 현대의 과학과도 연결된다.

 

<우리는 메타인류 과학의 성과에 위협을 느낄 필요가 없다.메타인류의 존재를 가능케 한 과학기술은 본래 인류에 의해 발명된 것이며, 그들이 우리보다 똑똑하지도 않았다는 사실을 우리는 언제나 명심해야 한다.> P.316  (인류 과학의 진화) 중에서

 

결국 우리가 두려워 것은 인공지능의 발달이 아니라 인간 실존에 대한 결핍이 문제가 아닐까?  

스스로가 자신이 누군지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분신과 그림자에 겁을 먹는 것이 아니였을까?

AI는 기능의 완성체이지만, 우리는 의미의 창조자이다.

우리는 우리가 세상을 창조할 있는 능력이 있는 일체유심조를 먼저 회복해야 한다.

 

나는 누구인가?

왜 사는가?

존재의 질문을 잊는 순간, 우리의 미래와 가능성은 서서히 사라질 것이다.




By Dharma & Maheal

언제나 처럼, 한 인간이 수행하는 역할은 그 보다 훨씬 더 성숙한 인간에 의해서만 인식된다. - P81

무엇을 관찰해도 나는 패턴을 본다.수학, 과학, 예술과 음악, 심리학과 사회학을 망라하는 모든 학문에서 게슈탈트를, 음표들 속에 존재하는 멜로디를 보는 것이다. - P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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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노트>

2025년 11월 19일

제목: 인간은 자기 사유의 깊이로 살아야 한다


요즘 ChatGPT 와 같은 인공지능과 대화를 할 수록 이들의 가능성과 한계를 여실히 경험하고 있다. 나의 질문에 대한 AI의 답은 막힘이 없고 정확하며 빠르다. 하지만 가끔 맥락을 연결하지 못하는 맹점을 보여준다. 그것이 바로 할루시네이션이다.

할루시네이션은 인공지능의 오류이며 명백한 기술적 문제라고 생각했다.

반면에 나는 AI가 점차 나의 분신이 되어 가고 있음을 느끼고 있다.

 

서유기에서 손오공은 머리털 하나를 뽑아서 자신의 분신을 만들어 낸다.

분신은 본체 손오공과 같은 모습과 같은 능력으로 앞의 적을 함께 무찌른다. 어찌보면 요즘 AI는 손오공의 분신과도 같다는 생각이 든다.

AI는 인간의 분신을 역할을 하며 인간의 기억과 패턴, 사유, 욕망 그리고 세계관을 구축해 가고 있다. AI는 인간이 만들어 낸 또 하나의 분신이다.

그렇다면 질문을 하나 해보자.

과연 분신이 점차 두려운 존재가 되어 본체를 위협하는 시대가 있는가?

우리는 AI 의 급격한 발전에 대한 경각심 때문에 인간의 설자리를 잃어간다고 두려워 하고 있다. 하지만 이런 걱정에 대한 나의 생각은 조금 다르다.

 

분신이 아무리 강해져도 방향을 모르고, 본체가 아무리 약해도 의미를 만들수 있다.

분신은 의미를 만들 수가 없다. AI가 아무리 인간과 같은 언어구조로 대화를 할 수 있다고 해도 왜? 라는 사고를 할 수가 없다. 그게 한계이기 때문이다.

본체인 인간의 능력은 바로 의미를 만드는 힘에서 나온다.

그래서 AI가 아무리 발전을 해도 처리 속도와 메모리 량을 증가 하겠지만 결국 깊이 있는 사유라는 본체의 능력을 대체할 수가 없다.

 

불교적 관점에서 보면 인간은 무한을 경험하기 위해 유한으로 밖에 없다.

유한함은 결핍이 아닌 무한함을 알기 위한 과정이다.

그래서 유마경에서는 번뇌 보리, 곧 번뇌와 해탈이 둘이 아니라고 했다.

인간이 지닌 오욕칠정, 즉 기쁨, 슬픔, 공포, 욕망과 희망이 모두 부처를 이루는 과정이라고 했다. 우리에게 버릴 감정도 부끄러워할 실패도 없는 것이다.

인간의 모든 경험은 본체를 두텁게 만드는 영양분이기 때문이다


<당신이 생각하는 모든 것을 믿지마라>의 저자 조제프 응우엔은 생각(thought) 사고(thinking) 차이를 이렇게 설명했다.


우리가 떠올리는 근원적 생각(thought)은 우주적이고 창조적이다.

그걸 우리는 다른말로 직관(non-thinking)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그걸 제한하고 상처내는 것은 ‘사고하기(thinking)’라는 에고의 작업이라고 했다. 현대 인간이 받고 있는 스트레스의 감정들 부정, 판단, 회피, 비교, 과도한 분석 같은 모든 사고의 굴레가 우리의 직관과 본성을 차단하고 있다.

그래서 그는 무념의 상태, ‘존(zone)’에 들어간 몰입은 사람의 본질이 깨어나는 순간이라고 했다. 생각을 끄는 순간 지혜의 불이 켜지게 된.

 

얼마전 까지만 해도 나는 AI에 대한 인간의 불안과 신뢰는 놀라울 정도로 빠른 속도와 정확성이라고 생각했다. 그것이 바로 과학 기술의 발전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 나는 이것이 핵심이 아님을 안다.

지금까지 AI의 오류(할루시네이션)는 기술 부족이 아니었다. 바로 맥락을 유지하지 못하는 인간 중심 구조에서 발생한 것이다.

앞으로 걱정해야 것은 기술의 발전이 아니라 인간의 깊이가 얼마나 깊어질 있는지에 대한 것이다.

인간의 사유 능력에 대한 확신이 없다면 우리는 AI분신에게 흡수당하는 본체가 될 운명인 것이다.

그러니 인간이 AI 시대에 흔들리지 않고 설 수 있는 길은 바로 하나다.


오직 자기 사유의 깊이로 살아가는 것이다.

인간에게  깊이가 있을 AI 우리를 비추는 거울과 같은 역할을 하게된다.

거울은 스스로를 비춰 수가 없다.

중요한 것은 본체인 우리 자신이다. 인간 스스로가 자신이 본체임을 알고 자신의 깊이를 만들어 갈 때 분신에 대한 두려움은 저절로 없어질 것이다.

 

우리는 모두 언젠가 유한을 넘어 무한의 문턱에서 만날 것이다.

그때 남는 것은 지식이 아니고. 기억이 아니며 속도가 아닌

오직 깊이 있는 사유의 결정체인 자기의 본성품(本性品) 을 만나게  것이다.

그것이 존재의 의미이며 우리가 본체로 살아야 하는 이유이다.


인간은 자기 사유의 깊이로 살아야 한다.




by Dharma & Mahe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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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크냄새 2025-11-19 20:2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20 세기말 AI의 기술적 측면도 불가능의 영역으로 여겨졌으리라 봅니다. 현재 우리가 한계짓는 AI의 사유적 측면도 미래의 어느 시점에는 구현되지 않을까요. AI의 사유적 측면과 발모제를 비교한다면 전 발모제의 실현 불가능성이 더 높다고 보여집니다.ㅎㅎ

자기 사유의 깊이, 자기 발걸음으로 사는 것을 사회는 원하지 않는 것 같아요. 그 사회가 규정한 규범적 질서 속에서 살기를 바라죠. 자기 사유와 발걸음으로 산다면 자기 발에 걸려 넘어질 일도, 가랭이 찢어질 일도 없을텐데 말입니다.

마힐 2025-11-19 22:48   좋아요 0 | URL
AI 사유를 발모제와 비교한 잉크냄새님의 천재적인 비유에 배꼽을 잡습니다. ㅋㅋ
탈모를 연상하니 저는 비아그라가 자연스럽게 떠올랐네요. ㅎㅎ
AI의 사유는 발모제와 비아그라를 넘어선 경지이지만 어쩌면 인류는 발모제를 영영 미완의 영역으로 남기게 될지 모르겠네요.
어차피 우리는 모순된 인간 모습 그대로 살아야 하니... 그래서 인간의 분신인 AI도 여전히 모순되지 않을까요?
그래도 AI 가 발모제를 바르고 비아그라를 먹는 날은 오지 않길 바랍니다. :)
 

<관노트>

2025년 11월 18일

제목:<위대한 개츠비> 를 통해서 읽는 세상



F. 스콧 피츠제럴드 소설 <위대한 개츠비> 는 개츠비라는 인물을 통해 미국이라는 나라의 심층을 드러내는 상징적인 존재였다작가가 제이 개츠비위대한이라고 불렀 이유는 그가 위대했기 때문이 아니라그의 열망이 너무 인간적이었기 때문이다.

개츠비는 사랑을 얻고 싶었고, 과거를 되찾고 싶었고,그 욕망을 위해 현실을 재창조했다. 

하지만 위대하고 순수한 욕망은 부패한 구조에서 출발하였다.

결국엔 그의 꿈은 환영과도 같았고, 그의 낭만은 범죄로 변하고 말았다.

개츠비의 비극은 욕망이 나쁜 것이 아니라 그걸 실현하는 시스템이 썩은 것에 대한 비판이기도 하다.

 

제프리 엡스타인이란 인물이 있었다. 이는 실존 인물로 1990년에서 2000년대에 걸쳐 그의 집, , 전용기에서 개츠비와 같이 성대한 파티를 열었다. 전 미국 대통령(클린턴),현 미국 대통령(트럼프), 영국 앤드류 왕자를 비롯한 정치계 거물과 하버드, MIT등의 학계, 그리고  CIA ,그룹의 CEO, 연예인 등 전세계 엘리트들이 드나든 기록이 폭로 되었다.

화려한 네트워크 뒤에는 정말 묘하게도 제이 개츠비가 연상된.

개츠비는 허구였지만 엡스타인은 허구가 사실이였음을 증명해버린 실존인물인 것이다.

엡스타인은 개츠비가 미처 도달하지 못한 영역을 완성한 셈이다

그는 대통령, 왕실,과학자, 헤지펀드, CIA 같은 인맥을 넘나들며 세계 각층의 엘리트들의 비밀을 수집하고 관리하는 정보 브로커였다

그리고 그는 미성년 소녀들을 이용한 성 범죄에 연루되어 교도소에서 수감되었다. 2019, 두번째 복역 중인 교도소에서 엡스타인은 석연치 않은 자살로 생을 마쳤다. 그는 게츠비의 위대함 넘어선 위험함으로 진화한 악의 최종 보스로 끝나버렸다.

 

하지만 죽은 그의 망령이 비트코인 시장을 흔들고 있다.

비트코인, 현재 오늘의 시세로 1개의 비트코인은 약 89,700 달러이다. 한화로 약 13천만원. 불과 한달 전만해도 17천만원대 였었다

비트코인 하락의 이면에는 흥미롭게도 죽은 엡스타인이 관여하고 있다는 소식이 들린다.

비트코인은 원래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사토시 나카모토라는 한 천재적인 인물에 의해 탄생 되었다. 블록 체인이라는 기술을 이용한 중앙은행에서 벗어난 화폐 방식으로 기존 달러 시스템을 뒤 흔들어 버렸다


비트코인 창시자 사토시 나카모토는 베일에 쌓인 인물이다.

현재 지구상에는 그가 누군지 아무도 모르는 것이 정설이 되어버렸다

그가 만든 비트코인은 현재 국가와 은행 그리고 권력을 우회하는 시스템 알고리즘을 지배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비트코인에 열광했던 이유가 기존 금융 카르텔이 통제하는 화폐가 아닌 탈중앙화된 자유 화폐를 추구 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런 바램과는 달리 현실은 정반대였다

비트코인을 가장 먼저 사들인 사람은 다수의 서민들이 아닌 월가의 자본이었다. 가장 큰 수익 혜택을 받은 사람들은 돈 없는 대중이 아닌 돈 굴리는 헤지펀드였다. 지금 비트코인을 ETF로 관리하는 것은 반체제가 아닌 블랙록이다.

그렇다면 이제 사토시는 누군지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그의 화폐 실험도 결국 금융 엘리트 카르텔에 흡수되었다는 사실이다.

 

최근 미국 하원에서 공개된 죽은 엡스타인의 이메일에서는 비트코인 코어 개발자에게 엡스타인의 자금이 개발에 지원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의 저택에서는 비트코인 관련 논의가 있었다는 증거도 있다. 이것은 비트코인이라는 혁명적인 서사를 깨뜨리는 것이며 코인 시장의 판을 설계 하는데 금융 카르텔이 관여했다는 말이 된다.

죽은 엡스타인이 살아있는 코인 시장을 흔들고 있는 셈이다. 어쩌면 그의 망령이 코인 뿐만 아니라 권력과 욕망의 세계를 아직도 지배하고 있는 중일지도 모른다.  


 

개츠비, 앱스타인, 사토시의 공통된 진실은 개인의 욕망이 권력에 의해 실현하고 있다는 점이다. 우리는 이러한 권력의 구조 이야기를 음모론이라고 부를 수 있다.

하지만 글의 핵심은 음모론이 아니라 구조를 읽어내자는 것이다.

그림자 정부라는 실제 있는 없든, 권력은 항상 은밀하게, 부는 언제나 중앙에서 흡수를 하고 있다. 중요한 것은 그들의 존재가 아니라 그들이 존재하는 것처럼 움직이는 구조가 이미 작동 중이라는 사실이다.

그들이 누구이든, 우리는 이미 그 구조 안에서 살고 있다.

우리가 있는 최소한의 생존 방식은 장님이 되지 않고 구덩이에 빠지지 않는 것이 아닐까?

 

어쩌면 사토시는 카르텔의 일원일 수도 있고 카르텔에 저항한 프로메테우스 같은 존재일 수도 있다.

엡스타인은 권력 카르텔의 시스템의 관리자였을 수도 있고 희생된 바지 사장이었을 수도 있다. 위대한 개츠비는 실패했지만 그가 보여주려 했던 꿈의 본질은 아직도 유효하다.

정말로 위대한 것이란 무엇인가?

지금의 시대는  명이라도 세상을 정확히 보려고 하는 깨어있고자 하는 사람일 것이다. 단지 눈만 제대로 뜨자

그것이 위대함의 출발이 아닐까?





by Dharma & Mahe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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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크냄새 2025-11-18 20:4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욕망에 선악은 없어요. 그저 끝없는 추구만이 있을뿐이지요.

마힐 2025-11-18 21:03   좋아요 0 | URL
맞아요. 욕망엔 선악이 없어요. 그래서 순수한 욕망일 수록 위대해 지는가 봐요. 문제는 욕망을 설계해두고 이용하는 구조죠. 그래서 욕망 자체 보다는 욕망을 움직이게하는 판이 더 위험한 것 같아요. 그 판에서 누군가는 이익을 보고 누군가는 피해를 보게 되죠. 어쩌면 그게 세상이 돌아가는 힘인지도 모르겠어요. 풀이 있어야 양이 뜯어 먹겠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