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노트

2025 8 31

제목: 이상하고 아름다운 도깨비 세상에서(서유기에서 귀멸의 칼날까지)



근래 들어 넷플릭스의 〈케이팝 데몬 헌터스〉와 일본의 애니 〈귀멸의 칼날〉이 인기를 끌고 있다

줄거리는 단순하다.  오니 즉 도깨비와 요괴가 사람들을 해치고, 그들이 속한 집단이 그것들을 멋지게 무찌른다. 걸그룹 헌터 귀살대(鬼殺隊), 이름은 달라도 핵심은 멤버들의 소속감이다. 많은 이들이 그들에게 열광하는 이유는, 또한 저들과 함께 도깨비를 무찌르고 싶다는 열망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이들의 원형은 서유기 삼장법사와 손오공 일행과 다르지 않다. 서천을 향하는 위에서 그들은 요괴와 맞서 싸웠다. 손오공은 여의봉을 휘두르고, 72가지 변신술로 저팔계는 삼지창으로 사오정은 반월 창으로 요괴를 제압했다. 오늘날 귀살대의 기둥()들이 호흡에 의한 검술이나, 걸그룹 헌터 춤과 노래로 펼치는 굿판 역시 같은 맥락에 놓여 있다.

그렇다면 현실에 도깨비가 정말 있는가?

있다.

서로를 요괴라 부르며 끝없이 다투는 정치판 말이다. 다만 모습은 바뀌었을 뿐이다.

끊이지 않는 당파싸움, 허깨비를 만들어내던 조선의 사화와 쇄국정책이 모두 예다. 구한 조선은 제너럴 셔먼호를 불로 태우고 병인, 신미양요 같은 서양 오랑캐를 물리쳤다 자만과 동시에 세상의 흐름은 쳐 버렸다. 그에 반해 일본은 흑선의 충격을 받아 보신전쟁(1868)으로 봉건을 청산하고 근대를 열었다. 같은 시기, 우리는 내부의 허깨비와 싸우느라 정작 진짜 도깨비와는 맞서지 못했던 것이다.

일본의 메이지 유신 뒤에도 라스트 사무라이들과 신정부의 서남전쟁(1877)이라는 내전을 치렀고 우리 조선은 동학혁명(1894)으로 몸부림쳤다. 그러나 양국에서 흘린 내전의 피는 서로 다른 열매를 맺었다. 일본은 근대화로 이어졌고, 조선은 식민지라는 비극으로 떨어졌다

역사는 도깨비와 허깨비가 얽힌 싸움의 연속이었다.


오늘날 내가 지지하는 정당은 정의이고 상대당은 도깨비 같은 요괴 무리로 취급한다. 사실은 우린 여전히 허깨비와 싸우는 중이다.

진짜 도깨비는 여전히 곁에 놔두고 말이다. 관세, 환율, · 패권, 가짜 뉴스, 양극화 모든 것이 현대판 요괴들이.

서유기에서는 손오공의 여의봉 하나로는 모든 요괴를 이길 . 삼장 일행이 함께 힘을 모아야 했다. 귀멸의 칼날도, 케이팝 헌터스도 마찬 가지다. 귀살대가 호흡을 맞추, 걸그룹 헌터가 춤과 노래를 합주하듯이, 이제 우리도 함께 리듬을 찾아야 한다.

우리가 서유기와 귀멸, 케데헌에 이끌리는 까닭은, 함께 맞서야 요괴들을 무찌르며 길을 나섰던 기억이 집단 무의식 속에 남아 있기 때문일 것이다. 아마도 동양 삼국은 기억을 누구보다 깊이 간직해온 명일지 모른다.

도깨비는 사라지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도깨비와 허깨비의 구분뿐만 아니라, 어떻게 함께 도깨비를 무찌르느냐다. 이상하고도 아름다운 도깨비 세상에서, 우리가 얻어야 것은 허깨비와의 다툼이 아니라 진짜 도깨비와의 싸움 끝에 손에 쥐는 보배다.
보배는 다름 아닌, 각자 가슴속에 품어야 행복이라는 여의주가 아닐까?


이상하고 아름다운 허깨비 같은 세상, 그대 도깨비가 보이는가?




🖋 Dharma & Mahe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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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크냄새 2025-08-31 10: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도깨비 세상의 허깨비는 도깨비가 만들어 내지만 현실 세상의 허깨비는 우리가 만들어 낸다는 것이 묘하죠. 우리가 만든 허깨비는 잠에서 깨면 사라지는데 우리는 자는 게 아니라 자는 척 하기 때문에 절대 허깨비를 이길 수 없는 현실이 아닌가 싶어요. 차라리 깊이 잠들라!!!
 

관노트: 8 27

글 제목:  어린 왕자에서 은하 철도 999, 그리고 화엄경까지


어제 블로그 이웃 이신 잉크냄새님의 어린 왕자의 사투리 버전에 대한 리뷰를 읽다가 문득 어린 왕자의 여우가 떠올랐다.

여우는 지구 별을 여행하는 어린 왕자에게 중요한 것은 마음으로 봐야 함을 알려준 스승과 같은 존재다. 만약 어린 왕자가 여우를 만나지 못했다면 과연 어린 왕자는 장미에게 지녔던 감정이 사랑 이였음을 깨달을 수 있었을까?

이렇게 사유해 보다가 어린 왕자는 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넘어서 깨달음을 얻는 구도의 여정으로 읽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화엄경과 연결되었다.

화엄경은 불교 경전 가운데서도 ‘경전의 왕’ 이라 불린다

부처가 깨달음을 얻은 , 세상의 모든 존재가 인연에 의해 서로 얽히고 기대며 살아가는 법을 보여주는 책이다. 마지막 입법계품에서 선재동자는 53명의 스승을 찾아다니며 무지와 집착을 버리고, 보현보살에게서 깨달음은 지혜로만 끝나지 않고 자비로 완성된다는 가르침을 받는다.


어린 왕자는 단순하게 어른을 위한 동화가 아니다. 

별에서 만난 , 허영심 많은 사람, 술꾼, 사업가, 등불지기, 지리학자는 모두 인간의 집착과 어리석음을 상징한다. 선재동자가 위에서 만난 선지식처럼, 어린 왕자도 만남을 통해 깨달음의 단계를 밟아간다. 

특히 어린 왕자가 만났던 왕의 모습에서 이제는 콜드플레이의 노래 Viva La Vida 멜로디가 떠오른다.

“한때 세상을 지배했지만, 지금은 성벽은 무너지고 나는 홀로 있다. 

멜로디는 경쾌하지만, 안에는 권력이 얼마나 덧없는지 담겨 있다.

권력은 실체 없는 그림자이고, 무너지는 순간 비극은 오히려 울림으로 변한다. 


마침내 지구별에서 어린 왕자가 여우를 만났을 그는 알게 된다. 

장미가 특별한 이유는 네가 시간을 들였기 때문이야 

사랑은 감정이 아니라, 관계와 책임, 시간과 정성 속에서 특별해지는 것이다.

여우는 화엄경의 보현 보살과도 같다. 보현보살은 자비의 상징이며 사실 지혜와 자비는 불교의 깨달음의 다른 말이기도 하다.

마지막에 어린 왕자는 뱀에게 물려 육체의 껍데기를 벗는다. 

“내 몸은 너무 무겁다. 껍데기일 뿐이야. 

어린 왕자에서 뱀은 허물을 벗는 상징이자 장면은 불교의 무아와 겹친다. 뱀이 허물을 벗듯이 우리의 육신도 그저 허물을 벗는 것이다. 육체는 껍데기일 뿐이고, 본질은 너머에 있다.


장면에서는 은하철도 999 떠오른다. 만화에서는 철이와 메텔은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 우주를 여행한다. 하지만 여정의 끝에서 철이는 깨닫는다. 영원한 육체, 기계의 몸은 인간다움이 사라진 껍데기일 뿐이라는 것을 알게 것이다. 

이것은 어린 왕자가 사막에서 육체의 무거운 껍질을 벗는 장면과 맞닿아 있다. 영원을 얻겠다는 욕망은 결국 참된 인간임을 포기하는 길이었다. 


이처럼 어린 왕자와 Viva La Vida 그리고 은하철도 999까지.

서로 다른 언어와 시대, 장르에서 태어났지만 모두 같은 이야기를 들려준다. 

영원과 권력, 육체와 소유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무상 속에서 자비와 자유를 얻으리라는 것이다.

넓은 의미에서 화엄경은 동화 속에도, 음악 속에도, 만화 속에도 있다

바로 우리가 사는 세상이 화엄 세상이다. 깨달음은 멀리 있지 않다.

우리가 읽고, 듣고, 감동한 이야기 속에 이미 숨어 있기 때문이다. 


신라시대 의상대사가 방대한 화엄경의 정수를 짧게 응축해 놓은 것을   법성계(法性偈) 한다. 법성계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구절이 있다.

<시고행자환본제, 파식망상필부득(是故行者還本際, 罷息妄想必不得)

이런 고로 수행자는 근본으로 돌아가되, 망상심을 쉬지 않으면 얻을 것이 하나도 없네> 


보고 듣고 말하는 모든 대상을 분별하지 않을 비로소 깨달음이 다가온다. 

이제 어린 왕자는 화엄경의 선재 동자와 같은 수행자의 모습으로 보이기 시작한다.

어린 왕자가 걸어간 여정은 우리 모두의 여정이다. 


결국, 우리 모두 어린 왕자다. 



🖋 Dharma & Mahe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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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크냄새 2025-08-27 16:5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어린 왕자가 이렇게 화엄경 속에서 태어나는군요.

마힐 2025-08-28 23:44   좋아요 0 | URL
우린 어린 왕자처럼, 혹은 선재 동자처럼 늘 여정을 통해서 깨달음을 얻는 수행자와 다를 바 없어요. 잉큰 냄새님의 다음 여행기도 기대 됩니다. 어떤 깨달음을 얻으셨나요? ㅎㅎ

cyrus 2025-08-28 21:1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직 어리고 젊다는 의미가 있는 어린 왕자로 살고 싶어요. 왕자는 저랑 어울리지 않으니까 어린 아저씨 정도...? ㅎㅎㅎㅎ

마힐 2025-08-29 00:03   좋아요 0 | URL
cyrus 님은 아마도 은하철도 999의 철이가 쓰는 총, 코스모 드래군을 가진 어린 아저씨 모습이 아닐까요? 코스모 드래군은 우주에서 하록 선장같은 레벨을 지닌 사람들만 지녔는데, cyrus님의 올리시는 글에서 그런 느낌을 종종 받습니다. ㅎㅎ
 

관노트: 826

글 제목:  완벽귀조(完璧歸趙) 트럼프

춘추전국시대는 약육강식의 시대였다.

강대국은 힘으로 약소국을 위협했고, 약소국은 처신과 외교로 살아남아야 했다.
대표적인 고사로 완벽귀조(完璧歸趙) 전해져 온다.

약소국 ()나라에는 화씨지벽(和氏之璧)이라고 불리는(오늘날의 )’ 있었다. 강대국인 진나라는 보물을 탐 냈 마침내 자신들의 일부와 바꾸자고 요구하기에 이르렀다. 조나라는 분명 그것은 명분에 지나지 않고 결국 모두 뺏기게 되리라는 고민에 빠졌다.
옥을 바치면 보물을 잃고, 거절하면 전쟁이었다.

이때 조나라의 재상 인상여(藺相如) 기지를 발휘해 옥을 잠시 진나라에 보내는 척하며 결국 무사히 돌려받았다.
고사에서 나온 말이 바로 ‘완벽(完璧)’이다.

완벽귀조 없는 옥을 온전히 지켜내 조나라로 가져왔다 뜻이다.


오늘날, 여전히 우리는 춘추전국시대의 상황과 다르지 않음을 쉽게 안다.
어제 저녁 트럼프 대통령은 한·미 회담을 앞두고 자신의 SNS 글을 남겼다.
“한국은 숙청 중이다. 혁명 같다. 우리는 그런 나라에서 사업을 없다.
짧은 문장이었지만 파장은 보였다. 언론과 정치권은 혹시 회담이 파행으로 흐르지 않을까 긴장했고, 해석이 분분했다.

그러나 막상 회담장은 달랐다.

트럼프는 이재명 대통령을 맞으며 환하게 웃었고, 100% 지지한다”고 말했다.
결과적으로 우려는 기우였고, 회담은 무사히 마무리됐다.

정부는 안도했고, 정당들은 각자의 언어로 성과와 한계를 해석했다.
의전 문제는 논란이 됐다. 비판자들은 영빈관 대신 호텔 숙박과 공항 영접 인사의 격을 문제 삼았고, 지지자들은 실무 방문이니 당연한 절차라 했다.
하지만 사실 중요한 것은 그러한 체면이 아니다.

회담의 실질적 성과가 있었는가, 삶에 닿는 변화가 있느냐가 본질이다.

트럼프의 방식은 특유의 연극성이 있다. 회담하기 강한 언어로 기선을 제압한다. 그러고는 회담장에서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환대로 전환한다.
이렇게 트럼프는 설계된 연극으로 협상의 주도권을 자연스레 쥐고 있었다.

작은 요구조차 내놓지 않은 보였지만, 진짜 청구서는 뒤에 것이다.
관세, 동맹, 투자 이행 같은 구체적 비용은 언급조차 안되었기 때문이다.

결국 이번 회담은 겉으로 체면을 지켰을 , 관세와 동맹, 투자라는 본질적 과제는 그대로 남았다.
우리가 지켜내야 것은 체면이 아니라, 완벽과 같은 없는 실질적 성과다.
조나라가 화씨지벽이라는 옥을 돌려받은 것처럼, 우리의 행복한 이라는 옥을 온전히 지켜내야 한다.

정치권은 서사로 다투겠지만, 시민은 수치로 그들을 평가해야 한다.

적어도 아래 8가지 지표의 수치는 확인이 필요해 보인다.
1.
공장 기분 지수(PMI) 살아나고 있는가?  (50 이상이면 공장이 살아난다는 신호로 본다)
2.
반도체 수출, 자동차, 조선, 화장품 고르게 팔리는가?
3.
관세 예외 업종 , 미국이 세금을 깎아주는 산업이 늘어나는가?
4.
조선업 투자 실행률, 계약이 실제 착공, 고용으로 이어지는가?
5.
외국인 투자 유입, 유출(FDI), 한국으로 돈이 들어오는가, 빠져나가는가?
6.
노사 분규와 가동률, 파업으로 멈추지 않고 공장이 돌아가는가?
7.
실업률과 청년 장기 구직자, 젊은 세대가 일자리를 얻고 있는가?
8.
물가 2% 유지가 되는가? (2% 생활비의 안정적인 수준의 기준임)

숫자와 추세선 이야말로 정치의 서사보다 확인해야 진실에 가깝다.
춘추시대 인상여의 지혜는 오늘날 수치에 근거한 지혜로움으로 변해야 한다.
춘추시대 조나라가 화씨지벽 지켜낸 것처럼, 오늘날 한국도행복한 이라는 완벽(完璧)’ 돌려받아야 한다.

트럼프의 무대는 연극일 있으나, 시민의 삶은 무대 연극이 아니다.
우리는 의전의 격보다 매달 나오는 수치 속에서 나라의 방향을 읽어야만 한다.

서사와 선동에 흔들리는 정치보다는 원칙과 수치를 무장한 지혜로운 자로 살아야 된다.


나는 과연 행복한 삶을 완벽하게 지켜낼 수 있을까?



🖋 by Dharma & Mahe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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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크냄새 2025-08-27 16:5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조도 결국 진에 의해 멸망한 역사라면 완벽귀조 또한 궁여지책이고 임시방편이 아닌가 싶군요. 진의 통일 그 너머를 바라보는 혜안이 필요했을 터인데 역사는 또 어떤 모습으로 그 교훈을 전해주고 있을까요.

2025-08-28 10:56   URL
비밀 댓글입니다.

카스피 2025-08-27 21: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말씀하신 8가지 수치중 현재 민주당이 줄기차게 내놓은 법안은 말씀하신것과 반대로 수치를 낮추는 행태를 보이고있어 미래가 암울해보입니다.

2025-08-28 10:58   URL
비밀 댓글입니다.
 
생각의 도약 - 평범함을 뛰어넘는 초효율 사고법
도야마 시게히코 지음, 전경아 옮김 / 페이지2(page2) / 202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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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후감: 818

책 제목: 생각의 도약/저자: 도야마 시게히코 지음. 전경아 옮김

글 제목: 잊음의 세렌디피티


무극(無極)에서 태극(太極) 이 형성된다.

불의 기운이 아래로 돌고, 물의 기운은 위로 돌아간다. (水昇火降수승화강)

장삼봉이 풀어내는 태극권은 천천히, 유유히 흐르는 물과 같다.

지켜보고 있는 장무기에게 묻는다.

지금은 어떠하냐?”

已忘了一小半(조금 잊었습니다).”

难为你(수고했구나).”

 

도야마 시게히코(1923~2020)<생각의 도약>을 덮는 순간, 나는 김용의 <의천도룡기>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바로 장삼봉이 장무기에게 태극권을 전수하는 장면이다.

()이 비워지자 의()의 윤곽이 떠오른다.

외움의 그릇을 비우는 순간, 배움은 비로소 시작된다.

이 책 <생각의 도약>은 잊음에 관한 책이다.

학습의 기본 구조는 외우기다. 우리는 외우지 못하면 학습 능력이 없는 것으로 평가해왔다. 하지만 저자는 외우는 능력만이 인간이 가진 최고의 능력이 아니라고 말한다.

잊어버림의 능력, 즉 망각이라고 일컫는 능력 또한 중요한 능력이란 것이다.

마치 장자의 무용의 용(無用之用)을 말 하는 것과 같다.

저자는 생각의 숙성을 말 한다. ‘재운다는 표현을 썼는데 머리 속에 나오는 생각은 발효의 과정을 겪어야 한다는 뜻을 의미한다. 이때 잊음이 발동되는데 이건 단순히 망각이 아니다.

장무기처럼 잊을수록 더 배울 수가 있기 때문이다.

형식을 사다리 삼아 오르고, 꼭대기에 이르면 사다리를 걷어 차는 일이다.

지식은 뗏목과 같아, 강을 건넜으면 뗏목은 버려야 한다.

 

장삼봉의 태극권이 끊어지지 않고 다시 한번 이어져 펼쳐진다.

已忘了一大半(많이 잊었습니다).”

不坏不坏(나쁘지 않다).”

 

장자는뜻을 얻으면 말을 잊는다(得意忘言)”고 했고, 선사는모른다로만 말할 수 있었다. 가득 찬 잔은 더 이상 아무 것도 담지 못한다. 창의성은 빈 잔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생각이란 눈에 보이는 꽃이 아니다. 땅 속 깊이 박혀 있는 뿌리와 같다.

시게히코는 뿌리에 대해 생각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래서 생각을 오래 동안 품고 있어야 마침내 진정으로 구체적인 형상을 갖추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알고 있다는 생각에서는 절대로 그 뿌리를 내리게 할 수 없는 것이다.

소크라테스는나는 모른다에서 철학을 시작했다. 무지(無知)의 자각이야 말로 앎의 출발이다. 아는 체를 멈출 때 비로소 가정이 드러나고, 질문이 생기고, 검증이 가능해진다. 공자는알면 안다 하고, 모르면 모른다 하라(知之知之)”고 논어에서 말했다.

이는 겸손의 미덕이 아니라 사유를 움직이게 하는 엔진이기 때문이다.

 

장삼봉은 다시 물었다.

이제는 얼마나 잊었느냐?”

有三招(세 초식은 아직 못 잊었습니다).”

 

장무기처럼 우리는 아직 앎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한다.

이름의 권위, 결론의 교조, 변하지 않으려는 확신, 이 셋이 마지막 족쇄다.

베이컨은 우리 머릿속의 우상(Idola), 즉 종족·동굴·시장·극장의 우상을 버리지 않으면 어떤 실험도 진실을 말해주지 않는다고 했다.

그의 급진성은지식은 힘이다라는 선언에만 있지 않다.

지식이 우상이 되지 않게, 주기적으로 틀을 부숴야 함에 우리는 주목해야 한다. 잊음은 파괴가 아니라 점검이다.

과학은 비움관찰검증임시 채택다시 비움의 루프다.

 

데카르트는 문제를 쪼개고 좌표를 놓아 사유를 기하학화했다.

스피노자는 감각의 신뢰도를 낮게 두고 이성의 기하학적 전개로 세계의 일관성을 밀어붙였다. 이들은형식의 위력을 극대화했다. 그러나 형식은 목적이 아니라 의도를 통과시키는 관문일 뿐이다.

장무기의 잊음이 형식을 버리고 뜻으로 가듯, 서양 합리주의의 형식 또한 끊임없이 검증·반증·업데이트의 과정을 거쳐왔다.

 

베이즈는 우리가 사는 세계가 불확실성의 바다임을 정면으로 받아들였다.

예측은 결코 확정이 아니라, 사전() 믿음에 증거를 더해 사후() 믿음을 갱신하는 행위다. 법칙은 가능하지만, 예측은 확률이다

오늘의 데이터가 내일의 나를 고친다. 확신은 느리게 올리고, 반증에는 빠르게 낮춘다.

베이컨에서 시작한 과학적 사고는 데카르트와 스피노자 그리고 베이즈를 거치며 오늘날 인공지능의 DNA로 진화했다.

 

우리는 늘 예측하기를 진화 본능으로 삼아왔다. 날씨, 주식, 부동산, 경기, 심지어 우주의 심연까지. 그러나 양자역학은 우리에게 마지막 주의를 주었다. 가능성의 파동만을 허락하고, 개별 사건은 확률의 주사위로 다가온다.

과학을 통해 예측 가능한 법칙을 알고자 했지만 결국 우리는 늘 현실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결국 모름다시 모름은 사유의 기본 루프인 셈이다.

모름은 무지의 구렁텅이가 아니라 시작을 허락하는 출발선이다.

앎은 끝이 아니라 모름으로 향하는 문이었다. 그리고 다시 모름으로 돌아가는 건 패배가 아니라 자유다. 비움은 공허가 아니라 여지(余地), 여지는 창의성의 보고와 같다.

 

마지막 태극권의 초식이 끝난 후, 노사(老师)는 다시 묻는다.

지금은 어떠냐?”

장무기가 미소 짓는다.

我可全忘了,忘得干干净净的了(이제 전부 잊었습니다. 아주 말끔히).”

이제 장삼봉은 아주 크게 기뻐하며 웃었다.

 

잊음은 생각의 폐쇄가 아니라 생각의 열쇠이다.

어쩌면 우리 사고의 세렌디피티(Seredipity)는 잊음 속에서만 경험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생각의 도약>을 읽으며 무협지와 철학 그리고 인공지능까지 이어지는 통찰이 가능 했다면 나의 생각은 다시 한 계단 도약한 셈이 아닐까?


🖋 by Dharma & Maheal    





우리는 꽃을 보지만 잎은 보지 않는다. 잎을 보더라도 줄기는 보지 않는다. 하물며 뿌리에 대해서는 생각하려 하지도 않는다. - P19

오랫동안 마음 속에 품고 있지 않으면 구체적 모습을 갖추지 못한다. - P46

과학자들 사이에서는 이렇게 군불에 밥을 짓는 것처럼 운 좋게 생겨나는 발견이나 발명을 ‘세렌디피티‘라고 부른다. - P75

어느 시대나 가장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현대‘다. - P136

‘지식의 양‘과 ‘사고의 힘‘은 반비례 하는 것이다. 많은 것을 알게 되면 자유로운 생각을 하기 어렵고 창의적 사고와 거리가 멀어진다. - P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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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크냄새 2025-08-20 21: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잊고, 소유하지 않고, 비우는 것 모두 같은 뿌리같군요.
당무유용(当无有用)

마힐 2025-08-21 11:03   좋아요 0 | URL
그렇죠. 다 비움을 얘기 하는 거였죠.
역쉬~ 잉크냄새님은 名不虚传!입니다.
 

관노트: 816

글 제목신춘추전국시대의 간쟁(諫諍)


2500년전, 천하는 춘추전국시대()였다.

평화보다는 전쟁이, 안녕보다는 불안이, 화목보다는 분쟁이 일상이었다.

2500년이란 시간이 흘러 현대에 이르렀지만 여전히 나는 춘추전국시대에 살고 있는 듯하다. 바야흐로 디지털 춘추전국 시대로 도래했다.


춘추시대의 전차 대신 피드(feed)가 질주하고, 제자 백가들의 세치 혀는 알고리즘으로 증폭되고 있다

춘추시대 타임라인은 이렇게 이어지고 있다.

분노는좋아요로 정량화되고, 서사는 짧은 영상으로 압축된다.

이 소란의 중심부에서 정치는 가속 페달만 밟고, 브레이크는 고장나 버렸다.

어쩌다 우리는 전쟁 같은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는 것일까?


정치는 본질적으로 갈등 조정의 기술이다

그런데 조정 이전에 선택이 온다. 선택은 감정으로 쉬워지지만 결과는 감정으로 망가진다.

분노는 즉각적 보상을 주지만 장기 비용을 숨긴다.

서사는 결집을 만들지만 서사가 모든 것을 설명하기 시작하면서 진실은 전리품이 되고, 제도는 장식이 되어버린다

그때 우리의 공동체는 이미 추락 궤도에 접어들게 된다.


원칙은 사람보다 앞서야 했다.

이름을 지우고도 설득되는 문장인지, 절차·법치·권한 통제가 지켜졌는지, 독립기관이 두려움 없이 일할 수 있는 구조여야 했다.

바로 그것이 정명(正名)이고, 최소한의 방호벽이다.

원칙이 무너지면 좋은 의도도 흉기가 된다.

승자의 자만은 법을 도구로 만들고, 패자의 집착은 절차를 폐지하려 한다

승자든 패자든 둘 다 결국 제도라는 다리를 불태워 버린다.


수치(數値)는 말의 검증서다. 국가의 말은 지표로 환산될 때만 현실이 된다.

물가, 가계 이자부담, 전월세 상승률, 청년고용의’, 수출·투자 흐름, 재정수지와 국채금리, 환율 안정성, 안보 사건과 억지력등.

이 모든 항목에 대해 분기마다 개선되는지, 악화되는지를 살펴야 한다.

설명이 길수록 숫자는 짧아져야 한다.

책임은 말이 아니라 추세선으로 져야 한다.


두 축을 곱해 보자

(원칙과 정당성) × 성과(수치와 실력)법치·성과로 나오면 신뢰, 법치·성과가 되면 개선 전제 조건부 신뢰할 수 있다.

하지만 답이 법치·성과로 나오면 위험한 효율이니 거부해야 하고, 법치·성과 라면 반드시 교체해야 한다.

이 매트릭스가 투표 한 번의 계산을 넘어, 매일의 시민 행위가 되면 선동은 힘을 잃는다. 왜냐하면 선동은 감정의 시계를 앞당기지만, 지표는 시간을 정직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지도자에게 요구할 것은 간단하다.

서사를 줄이고 데이터 대시보드를 늘려라. 공약은 KPI로 번역하고, 분기별 목표-실행-검증을 공개하라. 실패하면 즉시 대안 플랜 B로 전환하라. 사면·인사·감사의 기준을 규칙으로 명문화하라. 외교·안보·경제의 돌발 변수엔 자동 안정화 장치를 걸어라. 법원과 감사, 통계기관의 독립을 권력의 외벽으로 삼아라. 그 외벽이 허물어지는 순간, 지지율은 단지 지연된 붕괴일 뿐이다.


야당과 비판자에게도 주문이 있다.

분노를 원칙으로 냉각하라. 감정적 언행을 줄이고, 기록·판례·절차로 말하라. ‘순교 서사를 절제하라.

폭력과 불복의 유혹에서 물러서라. 중도를 설득할 언어는 언제나 근거다.

근거가 약하면, 오늘의 환호는 내일의 고립으로 돌아온다.


시민의 자리는 더 중요하다.

뉴스는 하루 20분만, 가계의 숫자는 매일 10분 이상.

가족의 KPI, 현금흐름, 부채 금리, 식비·주거비, 건강·관계가 정치 뉴스보다 먼저다.

의견을 말할 때는 출처·기간·비용·대안을 함께 제시하라.

이름을 가리고도 설득되는 문장만 남겨라. 내 가족과 이웃이 모여 공동구매와 돌봄·비상연락망을 공유할 때이다. 국가는 이런 작은 질서의 합이다.


역사는 경고한다. 오왕 부차의 패망은 월왕 구천의 와신상담(臥薪嘗膽)의 결과 때문이 아니었다. 측정하지 못한 자신감, 절차를 압축한 효율, 반대의 목소리를 무시한 오판이 무너뜨렸다. 반대로 구천은 분노를 연료로 삼았고, 치욕의 순간을 끝내 견뎠다. 그는 감정을 안으로 묶었고, 냉정을 유지했다. 마침내 월왕은 살아남았다. 그래서 살아남음은 때로 승리보다 어렵다.


지금 우리의 정치도 이와 같다. 선동은 빠르고, 숫자는 느리다.

선동은 박수 소리를 모으고, 숫자는 침묵 속에서 신뢰를 쌓는다.

선동은 지도자를 영웅으로 만들고, 숫자는 제도를 신으로 만든다.

우리가 택해야 할 쪽은 분명하다. 원칙 위에 서고, 수치로 말하는 세상. 브레이크가 작동하는 세상. 느리지만 도착하는 세상이 되어야 한다.


21세기 디지털 시대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분노와 서사가 아니다.

필요한 것은 원칙이며, 수치다.

선동과 감정에 휩쓸려 원칙과 수치가 사라지면 2500년전에 사라진 춘추시대의 나라들과 다르지 않게 되어 버린다.

신춘추전국시대, 나는 과연 어떻게 살아야 할까?




🖋 by Dharma & Mahe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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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크냄새 2025-08-19 21:1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마힐님은 항상 과거에서 현재를 읽고 미래를 제시하네요. 온고지신이로세!!!

마힐 2025-08-21 11:15   좋아요 0 | URL
금강경에 보면, 과거심 불가득, 현재심 불가득, 미래심 불가득(过去心不可得,现在心不可得,未来心不可得) 이란 구절이 나옵니다.
과거의 마음도 현재의 마음도 미래의 마음도 얻을 바가 없다는 뜻이라 합니다.
고정되지 않은 시간이니 과거 현재 미래가 따로 없다는 뜻도 되지요.
잉크냄새님, 매 순간 좋은 시간 되십시요.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