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시, 100일 정진,  18일차

<歸根得旨/귀근득지/근본으로 돌아가면 뜻을 얻고

隨照失宗/수조실종/비춤을 따르면 종취를 잃나니>

 

로고스는 태초의 말씀이요, 창조의 기원이다.

로고스는 우주의 시작이다.

(ॐ) 우주의 진동이다.

로고스는 태초의 말씀으로 창조의 시작이고, 옴은 우주의 진동으로 말이 끊어진다.

로고스는 말씀의 시작이지만 옴은 말이 끊어진 자리다.

하나는 시작이고 하나는 끝이다.

그러나 우주의 시작과 끝은 과연 둘일까?

지난번 빨대 비유를 들었듯이 우주가 하나의 관이라면 시작과 끝의 의미가 있을까?

시작이자 끝이요, 끝이자 시작이 되는 순간.

시종불이(始終不二) 시작과 끝이 둘이 아니다.

로고스와 옴의 상관 관계는 종교를 떠나서 참구해 볼만한 화두(話頭) 본다.

 

절언절려(絶言節慮) 말이 끊어지고 생각이 끊어지면

무처불통(無處不通) 통하지 않는 곳이 없느니라

귀근득지(歸根得旨) 근본으로 돌아가면 뜻을 얻고

수조실종(隨照失宗) 비춤을 따르면 종취를 잃나니

 

말과 생각이 끊어진 자리에서 듣는 것은 바로 태초의 소리일지도 모르겠다.

창조의 시작은 근본 자리가 되고 근본자리가 우리의 불성이다.

근본으로 돌아감은 청정한 우리의 본성품으로 얻는 것이다.

이것은 현재 의식에서 올라오는 말과 생각을 돌려 놓을 일어나는 사건이다.

현재 의식은 보기 바쁘고, 듣기 바쁘고, 말하기 바빠서 쉴 사이가 없다.

비춘다는 것은 올라오는 업식들을 여과없이 비추는 것이다.

따라서 업식을 따르면, 결국 내 근본 자리를 잃게 된다. 따라서 돌려 놓아야 한다.

돌려 놓는다는 것은, 올라오는 바로 그 자리를 다시 지켜보는 것이다.

 

*의상대사(義湘大師625~702) 의 *법성게(法性偈) 에서는 이렇게 표현했다.

시고행자 환본제(是故行者還本際) 그러므로 수행자는 근본으로 돌아가되

파식망상 필부득(叵息妄想必不得) 망상심을 쉬지 않고는 얻을 것이 하나 없네

 

올라오는 업식을 따르지 말고 오직 근본으로 돌아가는 행위가 바로 수행이다.

수행은 근본으로 돌아가길 바라는 끊임없는 행이 아닐까?


:歸根:돌아갈 , 뿌리 근:  근본으로 돌아가면

得旨:얻을 , 뜻 지 :  뜻을 얻게 된다.

隨照: 따를 , 비출 조: 비춤을 따르게 되면

失宗:잃을 , 근본 종: 근본을 잃게 된다.

*의상대사(義湘大師625~702): 젊은 시절 불법을 구하려 원효(元曉, 617~686) 함께 당에 가고자 했다. 원효는 해골물 사건으로 신라에 남게 되나, 의상은 중국으로 넘어가 화엄학을 깨우치고 신라에 화엄종을 개창함. 원효와 더불어 신라 불교의 양대 산맥임.

*법성게(法性偈): 신라의 승려 의상대사가 중국 당나라에서 방대한 경전 <화엄경>을 연구하여 화엄경의 핵심사상을 7언 30구, 210자로 나타난 게송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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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시, 100일 정진,  17일차

<絶言節慮/절언절려/말이 끊어지고 생각이 끊어지면

無處不通/무처불통/통하지 않는 곳이 없느니라>

 

성경에서는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가 되었으니(요한복음) 라고 했다.

태초부터 있었던 소리, 그것은 소리이자 언어였다고 한다.

하나님의 말씀, 그것은 우주의 소리 였을 것이다.

로고스 불리는 창조의 기원이 되는 소리이다.

불교에서도 우주의 소리를 (ॐ)이라고 한다.

옴을 우주의 근원적 소리이며 진동이라 부른다.

그래서 수행의 진언으로 옴을 소리내어 부르기도 한다.

수행자가 근원으로 돌아가는 의식의 소리이다.

태초의 말씀과 옴은 어떤 상관 관계가 있을까?

 

우리는 말에 의지한다.  

태초의 말씀과는 다른 우리의 일상에서 말이 없다면 우리는 어떻게 단순한 소리를 구조화 시켜 우리의 뜻을 상대방에게 전달할 있었을까?

인간이 동물과 구별 되는 말을 있는 능력은 말로 설명할 없는 능력인 같다.

그래서  이란 것은 묘하다.

말은 분명 문자보다 앞선다.

말과 문자는 모두 우리의 생각을 표현하는 수단이다.

그러나 도를 이룬 성현들은 말을 경계 한다.

아니 사실 말을 경계하는 것이 아니라 불필요한 말을 경계하는 것이라.

()에서는 *이심전심(以心傳心), *불립문자(不立文字) 내세운다.

진리는 문자나 언어로 세워질 없으며 오로지 마음과 마음으로만 전할 있다.

생각이 많고 말이 많아지면 진리에 가까워 수가 없다.

 

다언다려(多言多慮) 말이 많고 생각이 많으면

전불상응(轉不相應) 더욱더 상응치 못함이라

절언절려(絶言節慮) 말이 끊어지고 생각이 끊어지면

무처불통(無處不通) 통하지 않는 곳이 없느니라

 

말이 끊어지고 생각이 끊어지는 자리, 그 자리가 태초의 말씀 자리가 아닐까?

태초의 말씀은 어디든 통하지 않는 곳이 없으리라.

 

태초의 말씀과 , 오직 침묵의 체험 속에 듣게 되리라.

 

:絶言:많을 , 말씀 언:  말이 많고

節慮:많을 , 생각할 려 :  생각이 많다

無處: 더욱 , 아닐 불: 더욱 ~ 아니하다

不通:서로 ,  응할 응: 서로 응하다

*이심전심(以心傳心): (깨달음, 진리를)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한다는 선불교의 핵심 개념.

*불립문자(不立文字): 깨달음, 진리는 문자로 전달 될 수 없다는 뜻의 선불교의 핵심 개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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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시, 100일 정진,  16일차

<多言多慮/다언다려/말이 많고 생각이 많으면

轉不相應/전불상응/더욱더 상응치 못함이라>


금강경의 사상(四相)과 반야심경의 오온개공(五蘊皆)은 모두  라는 고정된 실체가 없음을 설했다.

불교에서는 이를 두고 *무아(無我) 라고 규정했다.

여기서 ()는 없음 이란 뜻도 있지만 () 처럼 고정되지 않은 상태  뜻하기도 한다.

마음 자리에서 없음이나 비어 있음을 뜻하지 않는다.

없음이란 뜻만 사용되면 단순히 무아는 내가 없다, 나라는 실체가 없다라고만 풀이 된다.

하지만 여기서 가장 중요한 *진아(眞我)  깨닫게 되는 참나, 불성(佛性) 부정하게 되는 모순에 직면하게 된다.

불교의 많은 논쟁중 가장 첨예한 부분이 무아 참나 간의 대립일 것이다.

전통 불교에서는 무아 실체인데 참나라는 것은 있을 수가 없다고 참나를 부정했다.

하지만 선불교(禪佛敎)에서는 부처 자리가 본래 진아 이므로 참나를 찾아야 한다고 했다.

과연 참나와 무아 어느 것이 옳은가?


견유몰유(遣有沒有)있음을 버리면 있음에 빠지고

종공배공(從空背空)공함을 따르면 공함을 등진다


참나가 있다고 믿으면 무아는 부정된다.

무아라고 믿는다면 참나는 부정된다.

같은 모순속에 빠지는 참나와 무아의 대립은 불교를 공부하는 이들을 곤혹스럽게 만든다.

전통불교의 입장과 선불교의 입장이 서로 다른 것인가?


다언다려(多言多慮)말이 많고 생각이 많으면

전불상응(轉不相應)더욱더 상응치 못함이라


확실하지 않으면 우리는 말이 많아지고, 생각이 많아진다.

진리는 말이 많고 생각이 많아지는 곳에서 나오지 않는다.

언어도단(言語道斷), 말이 끊어지고 생각이 끊어져야 한다.

진리는 말없는 곳에서, 생각이 끊어진 곳에서 드러나기 때문이다.

무아와 참나의 논쟁은 바로 말이 끊어지고 생각이 끊어진 곳에서 결론 지어져야 한다.

깨친 지혜가 아니라면 무아든 참나든 그냥 소리에 불과하다.

소리가 언어가 되려면 지혜를 수반해야 한다.

지혜는 단순한 말이 아닌 말이 끊어지고 생각이 끊어진 자리에서만 나올 수가 있기 때문이다.

이제는 올라오는 모든 말들과 생각들을 내려 놓을 차례이다.


:多言:많을 , 말씀 언:  말이 많고

多慮:많을 , 생각할 려 :  생각이 많다

轉不: 더욱 , 아닐 불: 더욱 ~ 아니하다

相應:서로 ,  응할 응: 서로 응하다

*무아(無我): 고정된 불변의 실체로서 나는 없다는 뜻으로 초기 불교의 핵심 개념

*진아(眞我): 모든 인간이 본래 가진 참성품이며 불성을 뜻함. 대승 불교의 핵심 개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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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시, 100일 정진,  15일차

<遣有沒有/견유몰유/있음을 버리면 있음에 빠지고

從空背空/종공배공/공함을 따르면 공함을 등진다>

 

성현들은 우리의 마음이 극단에 빠지는 것을 경계해왔다.

그래서 중도니 중용이니 하는 도리를 설파했다.

그러나 중도는 결코 극단의 가운데를 지칭하는 것이 아니었다.

중도는 위치나 좌표를 말하지 않는다.

그래서 중도를 추구한다면서 위치를 찾으려 하니 찾기 어려운 것이었다.

극단은 구조적으로 없앨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극단을 버려서는 안된다.

버릴 수도 없다.

가지 불리는 일종(一種) 알려면 극단을 버려서는 안된다.

중도를 알려면 변을 배척해서도 안된다.

 

견유몰유(遣有沒有)있음을 버리면 있음에 빠지고

종공배공(從空背空)공함을 따르면 공함을 등진다

 

있음과 공함.

있음이란 (相) 말한다.

금강경에서 아상(我相), 인상(人相), 중생상(衆生相), 수자상(壽者相) 사상(四相)이라고 했다.

내가 있다는 , 남이 있다는 상, 중생이라는 상, 목숨이 있다는 상을 일반적인 사상에 대한 설명이다.

금강경에서도 가지 상이 모두 ()하다 말한다.

반야심경의 *오온(五蘊) ()하다 처럼 금강경은 *사상(四相) ()하다고 한다.

신심명의 이번 구절은 참으로 (毒)하다.

있음도 아니고 공함도 아니라고 못을 박아 버린다.

어떤 용납도 허용하지 않았다.

이미 우리는 분별하지 말고, 걸리지 말라는 뜻을 앎에도 이 구절에서 또 흠찟 놀라게 된다.

우리가 안다고 하는 상에도 머물지 말라고 하기 때문이다.

반야심경이든 금강경이든 그리고 신심명이든 불교에서는 어떤 상에도 집착하지 말라고 한다.

내가 안다는 생각, 내가 모른다는 생각, 나 라는 생각, 남이라는 생각, 그 어떤 대상도 고정되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가 판단 내리는 모든 것을 믿을 수 없다고 말한다.

결국  라는 상이 없어지지 않는 , 우리는 라는 껍데기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그래서 독하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무척 부드럽다.

이것도 저것도 어떤 것도 아니다.

현재 신심명은 모든 깨부수고 있다.

이제    없는 무아 단계로 접어들 차례다.

어디선가 들려오는 매서운 소리 바람, 사실은 부드러왔다.

이제 부터는 더욱 깊어지는 공부로 들어간다.

 

:遣有:버릴 , 있을 유:  있음을 버린다.

:잠길 몰, 있을 유 :  있음에 잠긴다. 즉 있음에 빠져 버린다.

從空: 쫓을 , 빌 공: 공함을 쫓게 되면

背空: ,  빌 공: 공을 등지게 된다.

*五蘊(오온): 존재를 이루는 다섯 가지 요소, (色) · 수(受) · 상(想) · 행(行) · 식(識) 으로 물질적 형태, 느끼는 감각, 지각,행동,의식 같은 요소가 있어  라는 인식을 하게

*四相(사상):아상 (我相)·인상 (人相)·중생상 (衆生相)·수자상 (壽者相)으로 우리가 집착하는 가지 상을 뜻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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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시우행 2026-01-12 22:4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중도룰 어중간한 중간 정도로 이해히는 분들이 의외로 많아요.

마힐 2026-01-13 17:54   좋아요 0 | URL
네 호시우행님 말씀처럼 중도를 중간 지점, 위치로 파악하면 그렇게 이해 될 겁니다.
가운데를 택하는 순간, 이미 다시 하나의 편으로 되어버리니 그래서 중도는 좀 많이 어려운 것 같습니다.
저도 글을 쓰면서 치우치는 마음을 벗어날 수 없었던 것 같네요.^^
호시우행님의 댓글 감사합니다.

yamoo 2026-01-13 15:4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중도...학부 때 중용과 중도에 대해서 발표수업을 한 이후 이 주제에 대해서 가끔 생각이 나는데...이 글을 보니 엔날 생각이 나네요. 그땐 참 중관학파와 유식학파에 대해서 공부도 많이 했는데....지금은 생각나는게 거의 없어요..ㅎㅎ 물론 재작년에 유식삼성설의 논리를 추상화로 나타내본다고 염병떨던 때도 생각나서 좀 뻘줌하긴합니다..ㅎㅎ

마힐 2026-01-13 18:01   좋아요 0 | URL
와, yamoo님께서 학부 때 이미 공부를 하셨었군요. 대단하십니다!!!
게다가 공부한 자리를 추상화로 표현하실 정도라면...진짜 와우~
그 작품 저도 보고 싶네요...
야무~님의 작품 세계를 마주 할 기회 한번 주시면 감사 하겠습니다. ^^
 

- 다시, 100일 정진,  14일차

<一種不通 /일종부통 /한 가지를 통하지 못하면

兩處失功 /양처실공/양쪽 다 공덕을 얻지 못하니


일종(一種)이란 ‘한 가지’ 를 지칭하는 데, 과연 그 ‘한 가지, 일종’은 중도(中道)에 해당할 까?

양 극단의 중간 지점이 아니라면 과연 중도는 무엇일까?

승찬스님은 이미 분별심, 간택심, 취사심을 버리라고 했다.

마음은 늘 양 극단 중 하나에 집착하거나 편향되기 때문에 그 마음을 놓아 버려야 한다고 했다.

하지만  우리는 그 양 극단이 본래 떨어 질래야 뗄 수 없는 구조를 가졌다고 살펴보았다.

자석의 양극을 분리해도 자석은 여전히 양극의 성질을 버릴 수 없다.

빨대의 관을 아무리 양끝에서 잘라내도 여전히 처음과 끝이라 이름 짓는 구조를 바뀌게 할 순 없다.

우리가 아무리 양 변을 떼어버리고자 해도 결국 양 변을 벗어날 수가 없다.

그러니 취사심이니 분별심이니 간택심이니 하는 것도 우리는 벗어날 수 없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벗어나고자 하는 그 마음까지도 놓아버려야 한다.

즉, 얻고자 하는 것은 사실 집착이요, 간택이고, 분별이다.

따라서 그 얻고자 하는 마음마저도 놓아야만 우리는 걸림없이 다시 간택하고 분별할 수 있다.

그 한 가지 ‘일종’ 이 중도라면 그 중도는 그 어느 것에도 걸림없는 자리여야 한다.


일종평회(一種平懷) 한 가지를 바로 지니면

민연자진(泯然自津) 사라져 저절로 다 하리다

유체양변(唯滯兩邊)오직 양변에 머물러 있으니

영지일종(寧知一種)어찌 한 가지를 알 수 있으랴


따라서 중도는 어렵다 했지만, 중도가 어려운 것은 자리를 찾으려 하니 어려운 것이다.

그 양끝에 서지 않으려고, 치우치지 않으려고 하는 그 마음을 억누르고자 하니 어려운 것이다.

본래 양 극단이 구조적으로 이루어 진 것인데 애써 중도를 찾는다면서 위치만을 찾으려 하니 찾을 수가 없는 것이 아니였을까?

일종부통(一種不通) 한 가지를 통하지 못하면

양처실공(兩處失功) 양쪽 다 공덕을 얻지 못하니


중도는 위치, 좌표를 뜻하는 것이 아니다.

중도의 치우침이 없는 자리란 바로 '양 극단에서 자유로운 것'이다.

음료수에 빨대를 꽂아 마시듯 우리는 앞 뒤없는 빨대를 꽂아야 한다.

양 극단이란 바로 빨대와 같다.

양 극단을 의지해야 한다. 

양 극단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양극단을 인정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양 극단을 저버리면서 중도를 찾는 것은 계란에서 뼈를 찾는 것과 같은 셈이다.

음과 양이 나뉘어 태극이 되어 처음이자 끝이요, 끝이자 처음으로 돌아가는 도리는 모두 조화로움을 뜻한다.

중도란 바로 이 조화롭게 돌아가는 도리를 뜻하는 것이다. 

일종은 결국 그 하나로 돌아가는 조화로움을 말한다.

결국 중도는 일종의 다른 이름이 아니였을까?


푸른 하늘의 흰 구름은 여여히 떠 있다.

 

주:一種:한 일, 씨 종:  한 가지 근본, 즉 본래 성품 혹은 근본자리를 뜻함.

不通:아닐 불, 통할 통 :  통하지 않는다.

兩處: 둘 양, 곳 처: 두 곳, 여기서는 양 극단을 뜻하기도 하지만 그 어떤 곳이든 양 극으로 나뉘는 것은 피할 수 없기 때문에 ‘그 어느 곳’이라 해도 무방해 보인다.

失功:잃을 실, 공덕 공:  공덕을 잃게 된다.


 



 By Dharma & Mah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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