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시, 100일 정진,  7일차

<不識玄旨 /불식현지/현묘한 뜻은 알지 못하고

徒勞念靜/도로염정/공연히 고요한 생각만 하는구나>

 

시끄럽고 번잡한 속세를 벗어나, 남들의 방해를 받지 않는 한적한 숲속의 바위 위에 앉는다.

어디선가 불어오는 산들 바람 소리, 지저귀는 새 소리, 눈 앞의 졸졸졸 흐르는 계곡의 물소리.

고요한 소리속에 묻혀 있는 , 이제 곧 깨달음을 이룰 것만 같다.

마조(馬祖) 되기 , 도일(道一)은 아마 이런 심정이 아니었을까?

 

과연 속세를 벗어난 곳에만 도가 있는 것인가?

과연 고요한 마음 속에만 도가 있을까?

마음은 언제나 고요함 속에서만 머물러야 하는가?

만일 고요함이 시끄러움으로 변한다면 나의 도는 여전히 있는가?

만일 마음이 번거로와 지게 되면 도는 어찌 되는가?

고요함이 사라지면 마음(心), (), 깨달음 모두 사라지는가?

 

이러한 의문에 승찬(僧璨 ?~606) 대사는 일갈(一喝) 한다.

불식현지(不識玄旨), 현묘한 뜻은 알지 못하고

도로염정(徒勞念靜), 공연히 고요한 생각만 하는구나.

 

도일의 좌선은 고요함이란 모습에만 집착했다.

스승 회양이 옆에서 벽돌을 갈아 거울을 만드는 것과 다름 없는 행위였다.

소를 치지 못하고 달구지만 치는 것에 불과 했다.

우리는 여전히 현지(玄旨) 알지 못하고 모습에만 빠져 버린다.

껍데기만 구한다면 이미 도나 깨달음은 건너 갔다.

즉심즉불(卽心卽佛) 무너지는 순간이다.

부처는 형상이 아니요, 소리도 아니다. 마음도 아니었다.

비심비불(非心非佛).

마음도 아니고 부처도 아닌 도리로 넘어선다.

도일(道一) 마조(馬祖) 되는 순간이다.

이제는 따를 것도 거스릴 것도 없다.

고요함이든 시끄럽든 번거로움이든 걸릴 것이 없다.

마조의 발굽은 천하를 향해 박차고 달린다.

승찬 대사의 글은 살아 있는 말로 변했다.

이제 누구나 마조의 말에 올라 있게 되었다.

 

 

:不識: 아닐 ,  : ~을 알지 못하다

玄旨: 검을 , 알 지: 일반적으로 안다는 뜻의     쓰이지만 여기서는 안다는 뜻은 비교적 깊이 있는 앎이다.  깊이가 너무나 깊어서 검을 정도라면 얼마나 깊이 있는 앎인가. 현지는 깊은 앎이다.

徒勞: 무리 , 일할 로: 아무리 일해도, 즉 아무리 해도, 도로아미타불과 같은 형국이 되어 버린다..念靜:생각할 , 고요할 정:  고요하게 생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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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넬로페 2026-01-05 10: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속세를 떠나거나 고요함 속에서만 정진하는 건 아닌 것 같아요. 지금 있는 자리에서 걸릴 것이 없는 게 최선의 도인데 역시나 이루기 힘드니 정진은 언제나 어려운 숙제입니다.
마힐님, 100일 수행 잘 마무리 하시고
올해도 건강하고 행복한 한 해 되시길 기원드립니다^^
 

- 다시, 100일 정진,  6일차

<違順相爭 /위순상쟁/어긋나고 따름이 서로 다투면,

是爲心病/시위심병/ 이는 마음의 병이 되나니>

 

벽돌을 갈아 거울을 만든다고 했던 남악 회양(南岳懷讓, 677-744) 스님은 심즉불(心卽佛), 즉 마음이 부처라고 했다.

좌선에만 집착하는 도일(道一) 깨우치기 위해 스승 회양은 달구지를 것인가, 소를 칠 것이냐고 물었다.

말에 도일은 좌선이란 몸을 바르게 앉는다고 되는 것이 아님  깨달았다.

결국 도일은 마조(馬祖)라는 법명을 받고 선사(禪師) 되었다.

이후 *마조(馬祖)라는 이름대로 자신의 말의 발굽 아래 많은 제자들을 밟기 시작한다.

그에 발에 밟힌 제자들은 일어나 모두 자신만의 말을 타고 길을 달린다.

마조는 일갈(一喝)했다

즉심즉불(卽心卽佛), 즉 마음이 바로 곧 부처다. 

즉심즉불  마디에 그의 제자 법상(法常, 752839) 깨달음을 얻고 자신은 대매(大梅)산으로 들어가 숨어 버린다.

시간이 흘러 마조는 이제는 이상 즉심즉불’ 이라고 하질 않는다.

비심비불(非心非佛), 즉 마음도 아니고 부처도 아니다 라고 한다.

이에 대중들은 혼란을 겪는다.

전에는 마음이 부처라 했는데 이제는 마음도 아니고 부처도 아니라고 하는가?

바로 여기서 하나의 화두가 생긴다.

비심비불(非心非佛), 마음도 아니고 부처도 아니라면 대체 무엇이 부처인가?

마음이 부처라고 했던 마조는 비심비불, 마음도 아니고 부처도 아니라고 했는가?

 

앞의 구절 욕득현전(欲得現前), 바로 앞에 도가 나타나 보이길 바란다면

막존순역(莫存順逆) 따르고 거스리는 것에 걸리지 말라고 했다.

오늘은 여기에 다시 부연 설명이 추가된다.

위순상쟁(違順相爭) 어긋나고 따름이 서로 다툰다면,

시위심병(是爲心病) 이는 곧 마음의 병이 된다.

 

우리의 마음은 다툼의 연속이다. 마음은 대상을 좋아하고 싫어함에 늘 반응하여 따르거나 거스른다.

편안함을 추구하거나 , 꺼리는 마음을 추구한다면 그것이 바로 다툼이며, 곧 마음은 병을 얻게 된다.

승찬 스님은 우리의 마음이 쪽으로 치우치는 것을 경계했다.

마음은 편향적이다. 하지만 그 편향된 마음에 고정되는 되는 것은 병을 유발한다고 보았다.

마조가 비심비불이라고 뜻은 바로 여기에서 단서를 잡을 있다.

 

대매산으로 들어간 제자 법상을 시험하기 위해 마조는 자신의 다른 제자를 보내 법상을 찾아 물어보라고 전했다.

스승께서는 이제 즉심즉불이라 하지 않으시고 비심비불 이라 하십니다.

즉심즉불(卽心卽佛)인가? 아니면 비심비불(非心非佛)인가?

무엇을 따르고 무엇을 거슬릴 것인가?  


 

:違順: 어길 , 따를 : 어기고 따름이

相爭: 서로 , 다툴 쟁:서로 다툰다면

是爲: 바를 , 할 위: 是는 중국어에서 ~이다 라는 뜻으로 여기서는 ~하다, ~되다’의 뜻이 쓰였다.

心病:마음 , 병 병: 마음의 병

*마조도일(馬祖, 709~788),  6조 혜능에게서 이어지는 남악회양의 제자로 이미 혜능은 회양의 제자 중에 말 한마리가 나타나 천하를 짓 밟는 다고 예언한 바가 있다고 한다. 과연 그 예언 대로 마조의 문하에서 임제를 비롯한 깨달은 이가 수 없이 나왔다고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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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나리자 2026-01-04 20:1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새해는 ‘붉은 말‘의 해라고 하네요.
씩씩한 말처럼 마힐님께서도 활발한 독서 활동 되시길 바랄게요.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건강하시길 기원합니다.^^
 

- 다시, 100일 정진,  5일차

<欲得現前 /욕득현전/(도가) 눈 앞에 나타나 길 바라거든

莫存順逆/막존순역/따름과 거슬림에 걸리지 말라>

 

이제 부터 신심명은 앞의 지도무난(至道無難), 유혐간택(唯嫌揀擇) 단막증애(但莫憎爱), 통연명백(洞然明白)  변주에 해당된다.

앞의 구절의 핵심은 대상에 대해 좋아하고 싫어하는 마음이 일어날 분별하지 마라 였다.

승찬 대사는 언어로 그물을 쳐서 간택하고 증애하는 마음을 걸러내려고 했다.

하지만 신심명은 단순히 마음을 분별하지 말라 되풀이 하는 구절이 아니다.

좋아하고 싫어하는 분별하는 마음마저도 걸리지 말라는 깊은 뜻이 숨겨져 있었다.

 

우리의 의식과 무의식은 좋고 싫음에서 자유로울 없다.

진정한 자유란 좋고 싫음을 구별하는 분별마저도 걸림 없이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쉽게 말해 우리는 분별을 해야 한다.

아니 분별하는 것이 우리의 본성임을 감추지 말아야 한다.

분별하는 마음의 본성을 굳이 수행이란 이름에 걸려서 다시 분별하지 말아야지 하는 것이 바로 분별심이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어리석고, 못 났고, 혹은 내가 잘 났고, 위대하고, 남보다 어떠한 상태로 의식과 무의식중에 비교하고 분별하는 그 마음이 바로 본성이란 것이다.

본성을 부끄러워하고, 감추고자 하고, 수행을 해서 그런 분별심을 없애겠다고 하는 순간, 이미 도는 멀어진다.

도가 어려운 것이 아니란 말은 우리의 본성품이 어렵지 않다는 것과도 같다.

단지 마음을 믿지 못해서, 분별하는 그 마음을 다시 분별하기 때문에 도가 어려워진 것 이 아닐까?

그냥 마음 그대로 인정하는 것에서 수행은 시작되지 않을까?

오늘의 구절 욕득현전(欲得現前),막존순역(莫存順逆), 또한 관점에서 읽어야 한다.

 

<몸에 병이 없기를 바라지 말라. 몸에 병이 없으면 탐욕이 생기기 쉽나니, 그래서 성인이 말씀하시길, 병고로써 양약을 삼으라 하셨다.


세상살이에 곤란함이 없기를 바라지 말라. 세상살이에 곤란함이 없으면 업신여기는 마음과 사치하는 마음이 생기나니, 그래서 성인이 말씀하시길, 근심과 곤란함으로 세상을 살아가라 하셨다.


공부하는데 마음에 장애가 없기를 바라지 말라. 마음에 장애가 없으면 배우는 것이 넘치게 되나니, 그래서 성인이 말씀하시길, 장애 속에서 해탈을 얻으라 하셨다.


수행하는데 마가 없기를 바라지 말라. 수행하는데 마가 없으면 서원이 굳건해지지 못하나니, 그래서 성인이 말씀하시길, 모든 마군으로서 수행을 도와주는 벗을 삼으라 하셨다.


일을 꾀하는데 쉽게 이루어지길 바라지 말라. 일이 쉽게 되면 뜻을 경솔한데 두게 되나니, 그래서 성인이 말씀하시길, 여러 겁을 겪어서 일을 성취하라 하셨다.


친구를 사귀되 내가 이롭기를 바라지 말라. 내가 이롭고자 하면 의리를 상하게 되나니, 그래서 성인이 말씀하시길, 순결로써 사귐을 길게 하라 하셨다.

 

남이 뜻대로 순종해주길 바라지 말라. 남이 내 뜻대로 순종해주면 마음이 스스로 교만해지나니, 그래서 성인이 말씀하시길, 뜻과 맞지 않는 사람들로서 *원림을 삼으라 하셨다.


공덕을 베풀면 과보를 바라지 말라. 과보를 바라면 도모하는 뜻을 가지게 되나니, 그래서 성인이 말씀하시길 덕을 베푼 것을 헌신처럼 버려라 하셨다.


이익을 분에 넘치게 바라지 말라. 이익이 분에 넘치면 어리석은 마음이 생기나니, 그래서 성인이 말씀하시길 적은 이익으로서 부자가 되라 하셨다.


억울함을 당해서 누명을 벗고자 하지 말라. 억울함을 밝히면 원망하는 마음을 돕게 되나니, 그래서 성인이 말씀하시길 억울함을 당하는 것으로 수행하는 문을 삼으라 하셨다.> <보왕삼매론寶王三昧論> 중에서.


<보왕삼매론>은 수행 중에 마주하는10가지 장애를 극복하는 가르침이다.

내용을 보면 기존의 우리가 가진 좋고 나쁘고의 관념을 완전히 바꿔 놓는다.

본래 우리의 마음은 좋으면 따르게 되고, 싫으면 거스르게 되는 것이 인지상정.

그러나 수행의 관점에서 보면 우리의 좋다 나쁘다는 관념 자체는 고정되지 않는다.

신심명은 이러한 보왕삼매론의 부연 설명을 확실한 종지부를 찍고 있다.

 

욕득현전(欲得現前),  바로 앞에 도가 나타나 보이길 바라는가?

막존순역(莫存順逆) 이란 좋아서 따른 것이든 싫어서 거스리는 것이든 모두 고정되지 않았다.

좋다 나쁘다는 것이 사실 없는 것인데 우리 마음이 짓는 것임을 철저히 알라는 것이다.

결국 수행이란 뭔 가를 이루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그저 지금 순간, 내 마음이 어떠한 상태 인지를 철저히 확인하는 것이 전부가 아닐까?

원림속에서 있는 반응하는 나를 지켜 보는 것이다.


:欲得: 바랄 , 얻을 : 얻고자 바란다면, 즉 오를 혹은 깨달음을 얻고자 한다면

現前: 나타날 , 앞 전: 앞에 나타나다. 즉 (눈) 앞에 나타나고자

莫存: 없을 , 있을 존: 막은 부정사로 ~하지 마라, 즉 있게 하지 마라.

順逆: 따를 , 거스릴 역: 따르고 거스리는 것.

*원림(怨林:원망할 , 수풀 림): 나를 힘들게 하는 환경을 뜻함. 원망, 불편, 억울함 같은 감정이 반복해서 일어나는 관계와 상황 전체를 뜻함. 내 뜻대로 되지 않을 때, 인정받지 못한다고 느낄 때. 괜히 마음 상하고 화가 날 때, 바로 그 자리가 원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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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시, 100일 정진,  4일차

<毫厘有差 /호리유차/ 끝만큼이라도 차이가 있으면

天地懸隔/천지유격/하늘과  차이만큼 벌어지나니>

 

지도무난(至道無難), 도에 이르는 것은 어렵지 않다.

유혐간택(唯嫌揀擇), 간택하는 마음마저 꺼리지 않는다면

단막증애(但莫憎爱), 미워하고 좋아하는 마음에도 걸리지 않는다면

통연명백(洞然明白), 통하여 확연하게 (마음자리) 드러난다.

 

결국 도라는 것은 마음자리가 아닐까.

이는 개인이 확언하는 말이 아니다.

심즉불(心卽佛), 즉 마음이 부처란 말이 단순히 그냥 나온 말이 아니기 때문이다.

 

육조의 법을 이은 남악 회양선사(南岳懷讓677~744)는 도일이라는 제자가 열심히 좌선을 하고 있는 것을 보았다.

회양선사는 도일 옆에서 벽돌을 가지고와 숫돌로 갈기 시작했다.

회양의 부시럭 거리며 벽돌을 가는 소리에 도일은 궁금했다.

도일은 회양에게 물었다. 왜 벽돌을 가십니까?

거울을 만들거라네.

아니 벽돌을 간다고 거울이 된다는게 말이 됩니까?

그럼 앉아만 있는다고 부처가 되겠냐?

회양의 말에 도일은 깨닫게 되었다고 전해진다.

회양은 이어서 말했다.

달구지(수레)를 끌려면 마부는 소를 쳐야 하는가? 달구지를 쳐야 하는가?

부처가 되려고 좌선을 하는 것이라면 그대는 좌선을 배우는 것이지 부처가 되는 것이 아니다.

부처는 형상이 없으며 좌선을 배우는 것이라면 좌선은 앉고 눕고 서는데 있지 않다.

마음은 어떤 머무름이 없고 고정됨이 없는데 앉는 것으로 부처가 되려는가?

그건 부처를 죽이는 것이다.

그래서 마음이 부처다.

훗날 도일은 마조도일(馬祖導一, 709~788)이란 이름의 선사가 된다.

 

결국 도라는 것은 말로는 설명할 없다.

말이란 본래 뜻을 왜곡하기 쉽다. 또한 글로 남긴다고 해도 본래 뜻과는 멀어진다.

오늘의 구절 호리유차(毫厘有差) 바로 이러한 상황을 말하고 있다.

본래 우리가 가진 본래 자성인 마음자리를 밝힌 것이 신심명이다.

이는 도가 너무나 쉽지만 너무나 없는 마음의 작용임을 알리는 것이다.

단순한 마음이 아니기 때문에 장황한 설명이 필요한 지도 모른다.

하지만 선은 장황한 언어의 설명 조차 필요없이 바로 마음으로 들어가길 권한다.

호리유차(毫厘有差), 털 끝만큼이라도 차이가 있다면

천지유격(天地懸隔), 하늘 차이만큼 벌어진다는 것이 과연 틀린 말이 아니기 때문이다.

 

지도무난(至道無難), 유혐간택(唯嫌揀擇) 단막증애(但莫憎爱), 통연명백(洞然明白)

사실 신심명의 핵심은 여기까지가 전부라고 한다.

성철(性徹 1912~1993) 큰스님께서도 신심명은 여기까지만 봐도 된다고 하셨다.

뒤에 이어지는 나머지는 모두 부연설명이다.

잘못 이해하면 호리유차, 천지현격이 되어버리기 때문에 핵심은 반복해서 거듭 되새겨야 한다.

신심명의‘명()’ 새길 이유가 여기에 있지 않을까?

 

2026년 신년이 되었다. 올 해는 어떤 일들이 기록되어질까?

벽돌을 갈아 거울을 만들고 있지나 않을까? 소대신 달구지만 주구장창 때리고 있지나 않을까?

이제는 희망과 기대 보다는 안녕과 무탈만 바라게 된다.

 

:毫厘: , 다스릴 : 호와 리는 사물를 재는 아주 작은 단위, 센티, 미리 개념임.

有差: 있을 , 다를 차: 차이가 있다

天地: 하늘 , 땅 지: 하늘과 

懸隔: 매달 , 뜰 격:현은 사람의 목을 나무에 매달아 놓은 형상을 상형화 한 것이다. 죄수의 목을 메달아 공간 사이가 떠 있다. 끔찍한 상황 묘사 이지만, 여기서는 그냥 공간이 벌어져 떨어져 있다고 봐야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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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시, 100일 정진,  3일차

<但莫憎爱/단막증애/미워하고 사랑하는 마음만 없다면

洞然明白/통연명백/통하여 명백하게 드러난다>

 

지도무난(至道無難), 도에 이르는 것은 어렵지 않다.

유혐간택(唯嫌揀擇), 오직 간택하는 마음만 꺼려라고 했다.

여기서 간택하는 마음이란 분별하여 선택하는 마음이다.

분별은 사량으로 헤아리는 마음, 즉 이해타산을 따지는 마음이다.

따지는 마음 , 도를 이루고자 분별심을 혐오해야 한다면  그 또한 간택하는 마음이 아니던가?

분별하지 말라고 해놓고선 분별을 한다. 승찬 대사는 왜 이런 모순된 말을 했을까?

그래서 오늘의 구절은 중요하다.

 

단막증애(但莫憎爱), 누군가를 미워하고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 그 마음 쓰임이 바로 분별이다.

분별이 없다면 좋아하고 싫어 함이 없는 상태인데. 과연 그것이 도란 말인가?

없다 말에 걸리면 우리는 승찬 스님이 가둬 둔 글자의 그물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된다.

 

우리는 무의식적이든 의식적이든 대상에 대해 좋아하고 싫어하는 마음을 가지게 된다.

대상이 생기면 우리의 의식은 저절로 반응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마음에서 일어나는 반응이 바로 좋아하거나 싫어하는 분별심이 된다.

그리고서는 우리는 떠오르는 생각이 자기 생각임을 선택하게 된다. 즉 간택하는 것이다.

어떻게 따져도 우리는 분별심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하물며 도에 이르기 쉽다는 승찬대사 조차 분별하지 말라고 분별을 했을까?

그건 경책인가? 아니면 분별심인가?

 

(空), 불교에서 공은 텅 비었다는 뜻이 아니다.

반야심경의에서 가장 핵심 구절이라 일컫는 조견오온개공(照見五蘊皆空)이란 구절이 있다.

오온(五蘊)이란 색수상행식(色受想行識), 즉 눈,귀,코,혀, 몸을 통해 반응하는 다섯 가지 감관이 사실은 모두 공하다는 것이다.

여기서 공하다는 것은 없다 의미가 아니다.

불교의 공은 고정됨이 없다 의미로 읽어야 한다.

오온이 공함을 본다는 것은 우리의 오온이 고정됨이 없다는 뜻이다.

따라서 고정된 것은 진리가 아니다.

, 신심명에서 하지 마라, 해라 는 글자는 고정됨이 없는 공으로 읽어야 한다.

 

그렇다면 진정 승찬대사가 신심명을 통해서 무엇을 전달 하고 싶은 것일까?

신심명의 구절을 하라, 하지 마라 받아 들이면 신심명은 단순한 경책의 소리로 밖에 지나질 않는다.

진리는 고정되지 않는 것이니, 굳이 하지 말라, 하라에 메이지 말고 걸림이 없이 하라는 의미가 아닐까?

미워하고 사랑하는 마음을 없애라는 것이 아닌 미워하고 사랑하는 마음에 걸리지 않으면 바로 그것이 도에 통하는 명백한 길이 드러난다는 선언이 되는 것이다.

그렇게 공의 도리로 보아야 비로소 승찬대사의 분별심은 그냥 단순한 분별심이 아님을 알게 된다.

분별했지만 분별마저 꺼리지 마라는 뜻이 된다.

분별심에도 걸리지 말란 말이다.

간택하는 마음마저 걸리지 말고, 미워하고 사랑하는 마음에도 걸리지 말아야

비로소 우리의 마음은 모든 것이 통하고 확연하게 드러나게 된다.

 

명백(明白)함이란 바로 확실히 드러난 자리이다.

통연명백이란 바로 밝아서 그대로 하얗게 드러난 마음자리를 말한다.

우리의 본성이 드러나는 순간이다.

견성(见性)이란 성품을 보는 것이 아닌 성품이 저절로 드러나 보여지는 것이 된다.

그래서 마음이 밝아지면 자연스레 보여지게 되어 있다.

통하면 자연히 밝게 하얗게 드러나는 , 그것이 바로 우리의 참 마음 자리가 아닐까?

이제 승찬 스님이 쳐둔 언어의 그물에서 겨우 한번 빠져나왔다.

 

:但莫다만 , 없을 막: 단지 ~가 없다면

憎爱미워할 , 사랑 애: 미워하고 사랑하는 것,

洞然통할 , 그러할 연: 통연하다 통하고 ~그러하게 되다.

明白밝을 , 흰 백:하얗게 밝아진다. 즉 명백하다.  현대 중국어에도 확실한 이해 여부를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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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크냄새 2025-12-31 19:0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으로 받아들여도 될런지요....

한해 마힐님의 글로 많은 생각할 거리가 생겼습니다. 새해에도 정진하시길 바라며 복 많이 받으세요.

마힐 2026-01-01 13:41   좋아요 0 | URL
네, 저도 바람처럼 자유롭게, 살고 싶네요.
그리고 글도 좀 자유롭게 쓰고 싶네요. ㅎㅎ
잉크냄새님 새해 복 많으 받으시고, 건강하세요. ^^
올 해는 좋은 이벤트가 생기는 게 복이겠죠? ㅎㅎ


2025-12-31 20:3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6-01-01 13: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서곡 2026-01-01 00:2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마힐 2026-01-01 13:41   좋아요 1 | URL
서곡님 새해 복 많으 받으시구요. 건강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