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일차: 정치의 시작과 끝, 왜 무의식인가?

 

사람들은 정치를 이성의 영역이며 공학적인 설계로 작동한다고 믿는다

법과 제도, 정책과 숫자, 명분과 논리로 움직이는 세계라고 여기는 것이다. 

그러나 한국 정치의 현실은 늘 이 믿음을 배반해 왔다.

논리로 설명되지 않는 분노, 합리로는 납득 되지 않는 선택, 결과를 알면서도 늘 반복되는 충돌로 끝나고 만다.

우리는 같은 장면을 되풀이하는가.

나는 이유를 정치가 이성의 게임이기 전에, 집단 무의식의 반사 작용이라고 본다.

 

정치는 언제나 표면에서 싸운다. 그러나 진짜 충돌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일어난다.

말로 표현되지 않은 감정, 해결되지 않은 기억, 역사 속에서 봉합 되지 못한 상처들이 세대를 건너 축적된다.

동학 이후 땅에는 하나의 질문은 여전히 봉인 되지 못하고 남았다.

“이 나라는 도대체 누구를 위한 나라인가?”

질문은 사라지지 않았고 다른 시대, 다른 이름을 달고 되돌아왔을 뿐이다.

 

해방 이후, 전쟁 이후, 산업화 이후, 민주화 이후에도 이 질문에 답을 명쾌하게 내 놓을 수 있는가?

그래서 한국 정치는 문제가 생길 때마다 ‘새로운 갈등’ 을 겪는 것이 아니라, 해결되지 않은 질문을 다시 재연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무의식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개인의 마음속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사회에도, 국가에도 무의식은 존재한다.

그것을 우리는 집단 무의식이라고 부른다.

억압 된 감정은 사라지지 않고, 한 번 실패한 해방은 다른 방식으로 재등장한다.

이때 이성은 뒤늦게 명분을 만들어 따라가는 역할을 한다.

그래서 많은 정치적 선택은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보다 ‘왜 그런 감정에 반응 했는지’ 를 물어야 이해된다.

 

정치를 무의식의 차원에서 보지 않으면, 우리는 끝내 서로를 이해 불가한 집단으로만 규정하게 된다.

하지만 이해할 없는 것이 아니라, 보지 않았을 뿐이다.

 

많은 사람들이 정치에 대해서 “정치는 피곤하다.” “정치는 더럽다.”

그래서 “정치는 관심 두지 않겠다.” 고도 말한다.

현대 한국 정치는 불안한 무언가에 잠식되어 있다.

의식이 빠진 자리에 불안한 무의식이 채웠기 때문이다.

 

한국 정치는 원초적인 감정에 의해 움직이고 있다

그 감정에는 공포, 분노, 복수, 보상 심리가 자리 잡고 있다.

감정들은 언제나 가장 단순한 언어와 가장 극단적인 선택을 낳는다.

그래서 무의식을 다루지 않는 정치는 결국 균열과 파열의 형태로 돌아온다.

관계의 파괴는 물리적, 사회적 모습으로 이루어지게 된다.

 

내가 글을 쓰는 이유가 특정 진영을 옹호하려는 것도, 어떤 결론을 강요하려는 것이 아님을 알 것이다.

단지 정치를 무의식으로 보지 않으면, 우리는 선택하는 시민이 아니라, 반응하는 군중으로 남게 된다고 말하고 싶다.

우리는 스스로 판단한다고 믿지만, 사실은 오래된 감정에 끌려 다닐 뿐일지도 모른다.

 

무의식을 본다는 것은 누군가를 비난하는 일이 아니다

오히려 내가 왜 상대의 말에 반응하는지, 무엇이 날 흔들어 이끄는지에 대한 책임을 되찾는 일이다.

질문에 대한 책임을 있게 정치는 비로소 소음이 아닌 성찰의 언어가 된다.

 

우리는 흔히 역사는 반복된다고 말한다

그러나 반복되는 것은 언제나 우리의 무의식이었다.

우리가 무의식을 들여다보지 않는다면 미래는 새로운 선택이 아니라 이미 겪은 과거의 업을 되 풀이 하게 것이다. 지금도 여전히 그렇게 진행 중이다.

그래서 지금, 정치는 내 진영이 옳다는 신념을 내세우기 전에, 나와 상대 진영의 신념 뒤에 감추어진 집단 무의식의 흐름을 읽는 일인지도 모른다.

 

이것이 내가 작은 사유의 여정이 마지막으로 도달한 지점이다.

반복되는 것은 역사가 아니라 우리의 무의식이다.

우리의 무의식, 이제는 한번 쯤, 조용히 되돌아볼 때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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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시우행 2025-12-15 22: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국정치판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먼저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정치가 직업이 되면 이렇게 엉터리 사이비 집단으로 변하기 쉽지요. 그 철밥통이 과연 밥그릇을 포기할까요?ㅠㅠ

마힐 2025-12-16 00:07   좋아요 0 | URL
공감되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이 문제는 함께 생각해볼 지점에 있는 것 같습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3일차: 밖을 부르는 무의식

 

한국 정치는 무의식의 역사가 반복되고 있다.

우리 내부에서 결론을 내지 못할 , 우리는 항상 밖(외세)을 불러왔다.

 

동학의 불길이 휩쓸 , 청과 일본이 들어왔고, 조선의 자주권은 외부의 힘 아래 흔들렸다. 그것은 단순한 침략이 아니라, 내부의 결핍이 외부를 호출한 사건이었다.

임진왜란 때에도 그랬다. 명의 군대는 침략자를 물리치기 위해 온 것이 아니라 조선 내부질서가 이미 붕괴 국면에 들어간 순간에 그 진공을 메우기 위해 들어온 존재였다.

 

해방 이후 한반도는 남과 북으로 갈라졌다. 지금에 와서 “외세 개입”이라 말하지만, 그 분열이 벌어진 순간, 내부의 합의 불능이 외부의 힘을 초대하고 말았다.

그리고 마침내 6·25전쟁. 그 전쟁은 남과 북만의 내전이 아니었다. 이 또한 내부의 균열이 외부를 불러온 사건이었다. 미·중·소를 넘어 연합군이 개입하기에 이르렀다. 이것은 근본적으로 내부의 불화가 외부세력의 개입을 불러온 사건이었다.

 

이것은 단순한 역사적 사실을 넘어선다. 우리의 무의식은 반복해서 같은 흐름을 만들어냈다. “이 싸움, 우리는 끝내지 못한다. 우리는 스스로 합의를 만들 수 없다.”

무력감이 바로 외부를 향한 부름이 시작 것이다.

 

산업화 시대에도, 민주화 시대에도, 한국 사회는 내부 갈등의 순간마다 외부의 기준을 들여다보았다.

“미국과의 관계를 어떻게 유지해야 할까?”, “중국과는 어떻게 상대 해야 할까?”, “일본과의 관계는 어떻게 조정해야 하나?”

이건 외교 정책적 질문이 아니다. 내부의 불안을 외부의 힘으로 잠재우려는 무의식의 호출로 이어지는 것이다. 우리는 외부를 침략자로 규정하면서도 동시에 외부를 구원자로 기대해왔다.

 

외세가 우리 진영의 “패배를 막아줄 존재”라는 기대와 외부가 우리의 “승리를 보증해줄 존재”라는 환상을 꿈꾼다.

모두는 내가 스스로 결론을 없다는 무의식의 자각에서 출발한다.

이것은 단지 외교 정책의 문제가 아니다. 단지 국익의 문제가 아니다.

한국이라는 공동체가 스스로를 믿지 못하는 무의식의 흔적이다.

우리의 역사에서 내부적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외부의 레버리지를 끌어왔다.

레버리지는 때로는 군사적 힘이었고, 때로는 경제적 연대였고, 때로는 국제 여론이었다.

하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외부가 우리의 결정을 대신해줘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외부는 우리의 내부를 해석해주지 않는다.

외부를 부를수록 우리의 분열은 깊어진다.

밖에 기대는 순간, 우리는 내부의 결단을 포기한 것이 된다.

 

지금 한국 정치에서 누군가는 외부를 중심으로 방향을 잡아보려 한다.

그것은 다시 말해 “우리는 혼자 끝낼 수 없다.” 라는 무의식의 재현이다.

이것이 오늘의 외세 논쟁의 본질이다.

외부는 해답이 아니다. 외부는 우리 무의식적의 반복되는 역사의 해결책이 아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해야 일은 외부와의 전략적 관계 구축이 아니라 우리 내부의 무의식을 직면하는 것이다.

 

지금의 한국 정치는 미국·중국·일본·러시아의 영향력이라는 깃발 아래서 싸우는 것이 아니라 우리 내부의 무의식과 싸우고 있는 것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외부의 힘이 아니라 우리 안에서 답을 찾으려는 의지다.

그리고 의지는 외부의 기대가 아니라, 우리 내부의 무의식에 의해 더 이상 우리가 조종되지 않겠다는 자기결단에서 출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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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일차: 내전, 금기일까? 동력일까?

 

내전은 한국 사회에서 금기어와 다름 없다.

입에 올리는 순간, 미친 사람 취급을 받거나 위험 인물로 분류된다.

내전은 악이며, 절대 다시는 언급되어서는 안 될 재앙이라는 합의가 이미 굳어져 있다.

하지만 나는 묻고 싶다.

정말 그럴까?

 

역사를 거칠게 훑어보면, 한 사회가 완전히 다른 단계로 넘어갈 때마다 반드시 등장하는 장면이 있다. 내부의 균열, 폭력적인 충돌, 그리고 질서의 붕괴다. 그것은 미화할 수 없는 고통이지만, 동시에 현실을 재편하는 동력이었다.

 

일본을 보자.

세키가하라 전투는 내전이었다. 그 결과 도쿠가와 막부가 탄생했고, 일본은 260년의 안정된 통치 구조를 얻었다. 메이지 유신 이후에도 세이난 전쟁이라는 내전이 있었다. 마지막 사무라이들이 몰락한 그 전쟁은 일본을 근대 국가로 밀어 올리는 결정적 계기였다.

 

미국도 다르지 않다.

미국 남북전쟁은 단순한 지역 갈등이 아니었다. 국가의 정체성을 둘러싼 내전이었다. 그 전쟁을 통해 연방은 강화되었고, 노예제는 역사에서 퇴출되었다. 오늘날의 미국은 그 피비린내 나는 내전의 산물이다.

 

한국은 어떠한가.

우리는 내전을 이미 겪었다. 6.25는 외세가 개입한 국제전이었지만, 동시에 명백한 내전이었다. 그 전쟁 이후 한국 사회는 완전히 다른 궤도로 진입했다. 국가 중심의 질서, 산업화, 강력한 통제와 동원 체제가 그 후유증 속에서 만들어졌다.

 

문제는 여기서부터다.

한국 사회는 내전을 “끝난 사건”으로만 기억하려 한다는 점이다. 하지만 내전은 끝났어도, 내전을 만들어낸 무의식은 끝나지 않았다. 억눌린 채 다른 형태로 변주되며 살아남았다.

 

그래서 한국 정치는 전쟁의 언어를 사용한다.

상대는 경쟁자가 아니라 적이다.

타협은 배신이고, 중간은 기회주의다.

정치는 협상이 아니라 섬멸전이 된다.

 

이것은 우연이 아니다.

한국 사회의 집단 무의식에는 여전히 “한 번 더 뒤집어야 끝난다”는 감각이 남아 있다. 완전히 정리되지 않은 내전의 기억이 정치라는 무대 위에서 반복 재생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내전을 무조건 악으로만 보지 않는다.

정확히 말하면, 내전 자체가 아니라 내전을 직시하지 못하는 태도가 더 위험하다고 본다.

 

폭발은 억눌린 것의 언어다.

내전은 사회가 스스로를 속여온 대가다.

균열을 관리하지 못하면, 균열은 언젠가 폭력으로 폭발한다.

한국 정치가 지금처럼 극단으로 치닫는 이유는 단순히 정치인의 자질 때문이 아니다.

우리 사회가 오랫동안 미뤄온 질문들이 한꺼번에 밀려 나오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아직 질문에 답하지 않았다.

누가 나라의 주인인가?

질서는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

성장은 누구를 살렸고, 누구를 버렸는가?

 

질문들이 제대로 다뤄지지 않는 , 정치는 계속 전쟁을 흉내 낼 것이다.

실제 총칼이 오가지 않을 , 심리적 내전은 이미 진행 중이다.

 

나는 글이 불편하길 바란다.

왜냐하면 불편하지 않다면, 무의식에 닿지 않았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내전은 다시 오지 않아야 한다.

그러나 내전이 남긴 질문에 답하지 않는 국가는 위험해진다.

우리는 지금, 총 없는 내전의 한복판에 서 있다.

그것은 어떤 계엄이나 탄핵의 문제를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오래도록 누적되어 온 무의식의 분열이다.


피 흘리는 내전 과연 동력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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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일차: 한국 정치, 무의식의 원형

 

한국 정치는 서구 민주주의와 닮았지만 같지 않고, 사회주의 국가들과는 분명히 다른 형태를 가졌다.

나는 한동안 “왜 한국 정치는 국민에게 불안감을 주는가”를 붙잡고 있었다.

그리고 어느 순간 문득 떠올랐다. 지금 여당과 야당의 언쟁만 따라가서는 답이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한국 정치를 이해하려면 훨씬 오래된 흐름, 말로 설명되지 않는 집단 무의식의 지층으로 내려가야 한다.

 

글은 그렇게 시작된 개인적 사유의 여정이다.

나는 한국 정치의 ‘무의식의 원형’을 찾고 싶었다. 

그리고 그 지층을 뚫고 지나가다 만난 것은 다름 아닌 동학이었다.

 

구한말 조선에서 일어난 동학은 단순한 농민들의 봉기가 아니었다.

양반과 상민, 지배층과 피지배층이라는 오랜 위계 질서를 흔든 쓰나미였다.

동학의 사람들은 이상 “누가 지배하느냐”만 묻지 않았다.

그들은 “사람이 하늘이다”라고 외쳤다. 그 말은 분노이자 각성이었다.

억압의 체제에서 벗어나 인간의 존엄을 회복하려는 선언이었다.

사람이 하늘이다

 

그러나 동학의 불길은 강제적으로 진압되었다.

실패는 조선의 자주권을 흔들었고 외세가 틈을 비집고 들어오는 계기가 되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꺼진 잿더미 속에서 독립운동의 불씨가 피어올랐다. 동학이 한국 정치의 무의식이 된다는 것은 바로 이 지점에서 중요해진다. 

실패의 기억은 억압과 보상의 감정을 남겼고, 그 감정은 이후 저항과 재탄생의 동력으로 바뀌어 자라났다.

 

동학은 현대 한국 정치의 원형이며 출발점이다.

한국 정치의 무의식은 ‘억압—폭발—좌절—재탄생’의 흐름으로 움직였다.

이후 해방과 전쟁을 거치고, 국가 재건과 산업화, 민주화가 이어졌지만 표면이 달라졌을 뿐 지층은 쉽게 변하지 않았다.

결국 한국 정치 진영의 정체성은 원형의 변주에 불과하다.

 

한쪽은 “나라를 세우고 살려야 한다”며 질서를 중시했고, 다른 쪽은 “사람이 먼저”라며 기존 질서의 재편을 요구했다. 겉으로는 경제성장과 민주화, 안보와 인권의 대결처럼 보이지만, 깊은 곳에서는 동학 이후 계속 이어진 ‘안정’과 ‘해방’의 균열이 충돌하고 있었다.

 

중요한 둘이 단순한 적대로만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한쪽이 강해지면 다른 쪽도 강해진다. 한국 정치의 양극화는 단순한 싸움이 아니라 두 힘이 서로를 존재하게 만드는 방식으로 커져 왔다.

그래서 오늘의 갈등을 오직 “이념과 진영싸움”으로만 보면 현실을 너무 평면적으로 읽게 된다.

깊은 곳에서는 한국이라는 공동체가 자기 정체성을 찾기 위해 100여 년 동안 반복해온 내적 진동이 움직이고 있다.

 

지층을 보지 못하면 정치는 끝없이 싸움으로만 보일 것이고, 국민은 서로를 끝내 이해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무의식을 알고 보면 지금의 혼란은 ‘갑작스런 일’이 아니라, 한국 사회가 또 한 번 구조를 재편하려는 징후로 읽힌다.

동학이 그랬고, 해방과 전쟁이 그랬고, 산업화와 민주화가 그랬다. 폭발과 혼란은 늘 새 질서의 전조였다.

 

결국 우리가 봐야 하는 것은 미디어 속의 진영 싸움이 아니라, 그 말 뒤에서 움직이는 역사와 집단 무의식의 흐름일지 모른다.

정치는 표면에서 싸우겠지만, 진짜 흔들림은 더 깊은 곳에서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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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일차: 이누야샤, 사유의 여정을 마치며

 

20대 후반, 대학 졸업 후 나의 첫 직장은 한국이 아닌 중국에서 시작했다. 

매일 힘들게 일을 마치고 저녁에 숙소로 돌아와, 할 일 없이 멍하게 지내던 어느 날, 한국의 지인이 CD에 저장된 만화를 보내주었다. 

그 시절 나의 무료함을 달래 줬던 만화가 바로 다카하시 루미코 작가의 <이누야샤>였다.


<이누야샤> 이전에 루미코 여사의 작품 중 가장 유명한 만화는 <란마 1/2> 이었다.

일본의 해적판 만화가 유행했던 80년대 후반, 나는 <란마 1/2> 을 처음 접했었다. 물을 부으면 남자에서 여자로 변하는 란마를 비롯한 서브 주인공들과의 우당탕탕한 격투극은 내게는 적지 않은 문화적 충격을 줬다. 

란마가 소화전 호수로 물을 쏘아대면 상대가  물 위를 수영하며 나아가는 장면은 지금도 기억이 난다. 

더구나 대사는 코미디가 따로 없을 정도로 너무나 웃긴 만화였다. 

당시엔 <란마 1/2> 이 한국 작품이라고 생각했지만 90년대 중반이 되서야 일본 만화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렇게 나중에 제대로 알게 작가 루미코 여사의 작품 <이누야샤>는 나의 20대 후반 타국의 힘겨운 직장에서 하루을 견뎌 냈다는 일종의 보상 같은 역할을 했다. 

직장에서 하루를 버티고 숙소에 돌아와 이누야샤 일행의 나락과 사혼의 구슬을 쫓는 모습에 빠지게 되면 나의 고단했던 하루를 잠시 잊을 수 있었다.

 

그렇게 세월은 흘렀고, 최근 들어 유튜브에서 <이누야샤>의 주제 음악 시대를 초월한 마음 올라왔다.  

그리고는 예전에 봤던 <이누야사> 의 장면들이 하나둘 소환되었다. 세월이 흘러 잊혀졌다고 생각한 만화를 다시 돌아보니, 이 작품은 얼마나 촘촘한 관계의 서사로 엮여 있었는지, 그리고 그 당시 내가 그 안에서 얼마나 큰 위로를 받고 있었는지를 25년이 지난 후에서야 알게 된 것이다. 

사회 초년생의 멍한 눈으로 봤던 <이누야샤>가 사회를 통과한 사유의 눈으로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이누야샤> 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들 중 한 명이 이누야샤의 아버지 투아왕이다. 

그가 죽으면서 장남 셋쇼마루에게는 살생환을, 반요인 아들 이누야샤에게는 철쇄아를 남긴다.

살생환은 죽은 자를 베어 살리는 , 철쇄아는 천 마리 요괴를 한 칼에 베어버리는 살육의 칼이다. 겉으로 보기에 강한 힘이 필요한 건 장남 셋쇼마루 쪽이다. 하지만 투아왕은 일부러 그 반대로 유산을 나눠 준다. 

철쇄아를 쥔 이는 반요 이누야샤, 살생환을 쥔 이는 냉혈한 장남 셋쇼마루이다.

셋쇼마루에게 아버지가 남긴 유산은 오랫동안 풀리지 않는 상처이자 화두였다.


“왜 아버지는 동생에게 철쇄아를 물려 주고 내게는 쓸데없는 살생환을 남겨 줬는가? 아버지는 왜 나를 인정하지 않았지?”

그러나 아버지의 깊은 뜻에는 아들, 모두를 위한 최선의 결정이었음을 나중에야 드러난다. 

철쇄아가 완성되는 길에는 셋쇼마루가 반드시 필요했고, 살생환을 품은 셋쇼마루는 결국 자신의 내면에 숨겨진 폭쇄아라는 자기만의 칼을 뽑아 올린다.

셋쇼마루는 아버지가 남겨 유산이 아니라, “내가 누구인가?” 라는 질문을 통과하며 얻게 되는 자기 안에서 길어 올린 칼, 폭쇄아를 얻게 된다. 

이때 셋쇼마루는 비로소 아버지를 뛰어넘는 대요괴로 완성된다.

 

투아왕은 아무런 설명도, 뜻도 남겨 주지 않고 세상을 떠났다.

공백 속에서 형제는 미워하고, 오해하고, 싸우고, 그리고 조금씩 자라난다. 

그걸 보고 있으면, 우리 삶 속 “말이 없는 아버지들”이 겹쳐 보인다. 

차라리 길게 설명해 주지, 왜 늘 이렇게 묵묵부답으로 남겨 두고 떠나버리는가.

어쩌면 <이누야샤>가 보여 준 건 “아버지의 부재”가 아니라, 말없이 밀어 넣는 성장의 조건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이누야샤의 연인은 둘이다.

과거에는 무녀 금강(키쿄오), 현재에는 현대에서 온 소녀 가영(가고메)이다. 

금강은 이누야샤를 믿지 못했고, 나락의 계략에 속아 그를 봉인한 뒤, 사혼의 구슬과 함께 장렬하게 죽는다. 그리고 다시 흙에서 되살아나지만, 부활한 금강의 몸은 불완전하다.

혼은 흔들리고, 살아 있음 자체가 고통에 가깝다.


반면 가영은 밝다. 현대의 여학생이고, 가족에게 사랑받고, 길을 잃으면 울면서도 금세 자기 길을 찾아 나선다. 

그런데 알고 보면, 가영은 사혼의 구슬을 품고 태어났고, 금강의 환생이다. 한 사람은 “상처 난 과거의 나”, 다른 한 사람은 “지금 여기의 나” 처럼 보인다.

이누야샤는 사이에서 오랫동안 갈팡질팡한다. 누구를 더 사랑하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어떤 자신을 선택할 것인가의 문제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가영은 결국 이누야샤와 함께 과거에 남아 살아가기로 선택하지만, 금강을 끝까지 존중해 준다. 

어쩌면 금강의 상징은 내 과거의 자신을 통째로 부정하려 하는 것일 수도 있다. 그래서 우리는 자기 안의 금강과 싸우는 꼴이다. 

하지만 <이누야샤>에서 보면 과거의 나락을, 상처를, 잘못된 선택을 인정한다고 해서, 지금의 사랑과 지금의 나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과거의 나를 완전히 버리지 않아도, 지금의 나를 사랑할 수 있다.”

 

산고와 코하쿠의 이야기는 잔인하다

나락의 조종으로 코하쿠는 가족을 죽이며, 산고는 동생을 살리기 위해 끝없는 죄책감과 분노를 짊어지고 산다.

산고에게 동생 코하쿠는, “살려야 하지만, 동시에 내 마음을 찢어놓는 존재”다. 그래서 그를 향한 감정은 늘 이중적이다. 

사랑하지만, 미워하고, 지키고 싶지만, 목을 조를 수도 있을 것 같은 절망. 그 옆에서 미륵은 늘 흔들리면서도 서 있다.

수행자임에도 끊임없이 여자에게 치근덕거리는 반쪽짜리 수행자이지만, 중요한 순간에는 누구보다 자기 몸을 내던지는 남자이다.

산고–코하쿠–미륵의 서사를 보면, 우리가 가족과 타인을 향해 쥐고 있는 감정의 복잡함이 그대로 비친다. 

완전히 용서하지도 못하고, 완전히 끊어내지도 못하는 채, 그냥 같이 가는 것. 

그게 어쩌면, 우리가 현실에서 선택하는 최선의 사랑 방식인지도 모른다.

 

<이누야샤>에는 사연 없는 인물이 거의 없다. 

늑대요괴 족장 코우가는 가영을 향한 직진형 사랑을 보여준다. 이누야샤와는 끝없는 견제와 경쟁을 반복하지만, 그 저돌적인 사랑의 구애는 웃음을 자아낸다. 여우 요괴 싯포는 늘 투덜대고 도망치지만, 실제로 가장 먼저 동료들 곁으로 뛰어드는 존재다. 

그는 이 여정의 “아이”이자, 우리 안에 있는 겁 많은 어린 자아를 상징하는 것 같다.

바람의 요괴 카구라는 나락의 부하이면서, 동시에 자유를 꿈꾸는 존재다. 

나락에게서 벗어나고 싶지만, 그에게 묶여 있는 자신의 운명을 끝까지 끊어내지 못한다.

그래서 그녀의 마지막은 슬프지만, 아름답다. 

죽음 직전에 맞는 한 줄기 바람은 어쩌면 그녀가 평생 원했던 진짜 자유였을 것이다.

이외에도 없이 많은 인물들이, “나도 내 얘기가 있다”고 말하듯 자기 서사를 품고 스쳐 간다.

 

작품에는 최소한 열두 겹의 서사 층이 겹쳐져 있다

가족과 혈통, 사랑과 질투, 복수와 용서, 시간(과거–현재), 인간과 요괴의 경계, 몸과 상처, 욕망과 구원, 그리고 결국 “나는 누구인가?”로 돌아가는 정체성의 질문까지. 그래서 <이누야샤>를 다시 읽으면, 어디를 보아도 이야기가 나온다. 

어느 인물을 집어도 삶의 단면이 잡힌다. 

아마 그게, 세월이 흘러도 이 작품이 낡지 않는 이유일 것이다.

 

돌이켜 보면, 나는 중국이라는 타지에서 반요 같은 존재로 살아온 셈이다. 

한국인도, 중국인도 아니면서, 어딘가 두 세계의 경계에서 서성이는 삶이었다.

그때 매일 , 반요 이누야샤의 불안, 셋쇼마루의 고독함 뒤에 숨겨진 따뜻함, 가영이의 내면의 갈등, 산고와 코하쿠의 저릿한 죄책감, 남자라면 이해가 가는 미륵의 행동, 그리고 내 안의 귀엽지만 겁 많은 싯포를 보았다.

아마 나는 그들을 통해 안의 감정들을 것이었다

완벽하지 않아도 살아갈 수 있고, 완전히 용서하지 못해도 함께할 수 있고, 과거의 나를 지우지 않고도 지금의 나를 사랑할 수 있다.  

그리고, 인간은 끝까지 자기 이야기를 포기하지 않는 존재라는 것이다.

만화는 전부를 보여 줬다.

그래서 내게 <이누야샤>는 철학 텍스트이기 전에, 버티게 해 준 한 편의 이야기었다.

 

그때는 몰랐다

이 만화가 언젠가 “나락, 테세우스의 배, AI, 에덴 동산, 신과 인간”으로 사유의 여정으로까지 확장되리라는 것을, 지금에서야 알겠다. 

그 시절 나를 버티게 해 준 건 거창한 철학이 아니라, 서툴고 무모하지만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한 무리의 등장인물들이었다.

이제 나도 삶에서 이누야샤처럼, 셋쇼마루처럼, 산고와 미륵처럼, 그리고 나락과 수많은 조연들처럼 각자의 사연을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을 바라본다.

우리도 결국, 각자 한 편의 <이누야샤>를 쓰고 있는 주인공이다.


글은 결국, 25년 전 사회 초년생이 지금의 다카하시 루미코 여사께 바치는 늦은 한 장의 헌정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루미코 여사가 만들어 준 세계에 대한 작고 늦은 인사이기도 하다.

ありがとう、高橋留美子先生


 

By Dharma & Mahe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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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amoo 2025-12-09 10: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누야사 1기, 2기, 3기...3기가 끝인가요? 어쨌든 보긴 봤는데...중간 중간 보고 끊긴 부분이 많아 결말만 알고 셋쇼마루가 어떻게 폭쇄아를 얻는지...왜 아버지는 이누야사에게 철쇄아를 주었고, 철쇄아가 완성되는 길에 왜 셋쇼마루가 필요한지 모릅니다. 이누야사는 항상 봤고 여러번 봤는데 중간만 여러번 봐서 전체 줄거리를 모른다는 함정...--;;

마힐 2025-12-09 22:48   좋아요 0 | URL
셋쇼와 이누의 일행이 나락과의 결전을 하기 전에 명도잔월파를 완성해야 하는데 그때 샛쇼의 천생아가 이누의 철쇄아와 합쳐져서 명도잔월파를 완성하게 되요. 그리고 이후 샛쇼와 곡령의 대결에서 샛쇼의 몸이 나락의 몸에 흡수되려는 찰나에 샛쇼의 몸안에 감춰진 폭쇄아가 발현하죠. 이게 모두 두 형제를 깨우치게 하려는 아버지의 큰 그림이었다고 하네요.ㅎㅎ

저는 이누야샤를 만화로 먼저 보고 나중에 애니메이션을 봤는데요. 만화로는 끝까지는 못 봤구요. 애니는 마지막 나라쿠를 무찌르는 것 까지 봤어요. 그 당시는 그걸로 완결을 났었는데 최근 몇 년전에 샛쇼마루와 이누야샤의 자식들이 나오는 버젼이 나왔더라구요. 샛쇼와 링이, 이누야샤와 카고매가 맺어졌지요. 이제는 아버지가 된 두 형제의 이야기라네요. 나중에 기회가 되면 볼 수도 있는데 지금은 예전의 이누야샤 와 셋쇼마루 형제 이야기를 가슴에 담아 두고 싶네요. ㅎㅎ

잉크냄새 2025-12-09 18: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래전 기억이라 란마와 이누야사가 막 섞여 떠오르네요. ㅎㅎ 누가 란마고 누가 이누야사인지. 그래도 사유의 길을 따라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그리고 여담이지만 중국에서의 CD 하니 떠오르는 것이 광장에서 리어카에 싣고 팔던 해적판들이 떠오르네요. 그걸로 왕좌의 게임과 스파르타쿠스를 입문했죠. ㅎㅎ

마힐 2025-12-09 22:56   좋아요 0 | URL
만화로는 란마가 먼저 나오고, 이누야샤는 후에 나왔어요. 란마의 개그적 요소는 당시 우리나라 만화에서 보던 것들과 차원이 달라서 사춘기 시절 충격이었죠. ㅎㅎ
그리고 보니 퇴근 후 함께 보았던 왕좌의 게임과 스파르타쿠스 역시... 차원이 다른 미드, 제 30대 시절의 충격이었네요. 아, 그리고 덱스터도... ㅎㅎ

cyrus 2025-12-14 14: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한때 만화를 즐겨 봤을 땐 만화를 책과 같은 텍스트로 여겨서 만화에 대해서 나름대로 감상문을 쓰고 싶다고 생각했어요. 꾸준히 쓰지 못했지만, 그래도 인상 깊은 만화 몇 편 보고 난 후에 감상문을 남기긴 했어요. 재미있는 경험이자 글쓰기 훈련이었어요. <이누야사> 감상문 전편을 모두 다 읽어보진 못했지만, 마힐 님의 꾸준한 글쓰기에 진심으로 경의를 표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