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시, 100일 정진  97일차 


세상 사람들은 나를 여후(呂后)라고 부른다. 어떤 이는 나를 두고 독한 여자라 하고, 또 어떤 이는 악랄하다고 한다. 그래서 나, 여후는 악녀로 알려졌다.

내가 남긴 피를 먼저 떠올리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다.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러나 그것은 나의 마지막 얼굴일 뿐이다.

얼굴이 만들어지기까지 내가 어떤 시간을 건너왔는지는 말하지 않는다.

 

, 여치(呂雉) 본래 여씨 집안의 부잣집 딸이었다.

아버지는 사람 보는 눈이 있다며, 나를 패현의 한 사내에게 시집 보냈다.

사내의 이름은 유계였다.

처음 그를 마주한 나는 적잖이 당황했다.

건들거리며 묘하게 웃는 사내는 사수의 정장 노릇을 한다고 했지만, 옷차림은 번듯하지도 않고, 말과 행동은 어딘가 가벼워 보였다.

눈에는 유망한 관리라기보다 술과 장난에 빠져 사는 사내로 밖에 보였다.

이런 남자에게 내가 시집와야 하는지, 당시에 어렸던 나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아버지는 완고했다.

“저 사람은 그릇이 크다. 네가 아직 모른다.”

믿지 않았다.

눈에는 그저 집에 붙어 있지도 않고, 패거리들과 어울려 웃고 떠드는, 어딘가 미덥지 못한 사내였으니까.

 

시집온 내가 먼저 배운 것은 남편의 사랑이 아니라 집안의 살림이었다.

시부모를 모셔야 했고, 형님 식구들까지 챙겨야 했으며, 집안의 빈 구석은 늘 내 손으로 메워야 했다.

남편은 동생이라 부르는, 어설픈 패거리들을 데리고 마을 곳곳에 참견하고 다녔다.

그이를 따르는 사람들이 밤낮으로 드나들었고, 나는 술상을 차리고 밥을 내고 뒤를 치웠다.

그들은 나를 형수라 불렀고, 나는 겉으로는 웃으며 그 소리를 들었지만 속으로는 한숨이 많았다.

부잣집 규수로 자라던 내가 어느새 시골 아낙이 되어 있었다.

옷소매를 걷고 밥을 짓고, 아이를 안고, 집안을 지키고, 술 취한 사내들 뒷자리를 치우는 날들이 이어졌다. 그때는 몰랐다.

시간이 훗날 나를 얼마나 질기게 버틸수 있게 만들었는지.

 

유계는 이상한 사내였다. 미덥지도 못했고, 집안을 잘 돌보는 남편은 아니었다. 그런데 사람을 끄는 힘이 있었다. 그와 술을 마시고 떠들던 패거리들은 그를 얕보면서도 떠나지 않았다.

그는 허풍치고, 때로는 한심해 보일 만큼 느슨했지만, 막상 일이 닥치면 사람들은 이상하게도 그를 중심으로 모였다.

나는 여러 생각했다.

사내는 대체 무엇이 있기에 사람들이 그를 따르는가.

처음에는 몰랐지만, 세월이 지나며 조금씩 알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날, 남편이 나라의 명령으로 죄인을 호송하게 되었다.

걱정도 되었지만 무사히 빨리 돌아오기를 빌었다.

유계가 호송하던 죄인들이 도망쳤다는 소문이 들렸다. 이제 남편은 더 이상 패현으로 돌아올 수 없는 몸이 되었다. 사수의 정장에서 하루 아침에 도망자 신세가 된 것이다.

그때부터 삶도 같이 바뀌었다.

남편이 도망자가 집안이 어찌 평안할 있겠는가.

이때부터 내게 불안은 일상이 되었다. 이제 오히려 예전 사수의 정장 시기가 그리웠다.

유계는 산으로 숨었고, 패현은 들 끓었다.

 

마침, 진은 무너지며 천하는 흔들렸으며, 어제의 관리가 오늘의 도적이 되고, 오늘의 도적이 내일의 장수가 되는 세상이 왔다.

유계는 패공이 되어 돌아왔다.

패현에서 마시며 건들 거리던 사내가, 이제는 사람들이 칼을 맡기고 목숨을 거는 사람이 된 것이다.

나는 한편으로 기쁘고 한편으로는 놀랐다.

그러나 놀랄 틈도 없이 세상은 우리를 시대의 소용돌이로 밀어 넣었다.

 

패공의 아내가 되었다고 해서 무엇이 달라졌겠는가.

짓는 손이 가벼워지는 것도 아니고, 불안이 사라지는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불안과 근심은 커져만 갔다.

패공의 아내라는 말은 좋은 옷감이 아니라, 더 큰 근심으로 짠 옷 같았다.

유계가 진을 멸하러 나서고, 다시 서쪽으로 가고, 다시 항우와 맞서게 되는 동안 내 삶도 함께 전장으로 끌려 들어갔다.

 

천하 사람들은 초한쟁패를 유방과 항우의 싸움으로 기억하겠지만, 내게 그저 그 시간은 그저 살아남아야 하는 시간이었다.

유계가 패현을 떠난 뒤의 일곱 동안, 내게는 하루하루가 칼날 위에 선 것 같았다.

잡혀 죽을까 두려웠고, 버려질까 두려웠고, 내 아들과 딸이 변을 당할까 두려웠다.

무엇보다 무서운 것은 항우라는 이름이 공포에 몰아 넣었다.

 

이름은 사람의 이름이라기보다 재앙 같았다.

항우가 이겼다는 말이 들리면 가슴이 내려앉았고, 유계가 또 살아남았다는 말이 들리면 가슴을 쓸어 내려야 했다.

항우에게 사로잡혀 있던 시간은 지금도 몸이 먼저 기억한다.

나는 포로였다. 목숨이 내 것이 아닌 상태로 하루하루를 버텨야 했다.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았고, 언제 모욕을 당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때 가장 잊을 없는 순간이 찾아왔다.

시아버지께서 기름이 끓는 앞에서 죽음에 내몰리던 장면은 아직도 생생하다.

역시 시아버지와 함께 기름 솥에 빠지게 두려워 몹시 떨었다.

무서운 항우의 마디에 사람의 목숨이 달렸던 순간을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다.

그때 나는 몸으로 알았다.

세상은 도리로만 돌아가지 않는다는 것을. 힘이 없으면 효도도, 명분도, 눈물도 다 소용없다는 것을.

 

유계가 살아남고, 또 살아남아 기어이 항우와 맞서는 동안 나도 억척같이 살아남았다

동시에 나의 마음은 점점 변해져 갔다.

순진하게도 남을 의지하거나, 언젠가 편안해질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 같은 것들은 아무 소용도 없음을 깨닫기 시작한 것이다.

나는 버텨야 했다.

유계가 끝내 천하를 얻어 황제가 되면, 이 지옥 같은 세월도 끝날 것이라고 믿었다.

패현의 형수로 세월도, 포로로 떨며 견딘 세월도, 자식의 목숨을 품에 안고 버틴 날들도, 언젠가는 다 지나갈 것이라 믿었다.

 

마침내 믿을 없는 일이 발생했다. 항우가 죽은 것이다.

그리고 유계는 황제가 되고 한나라가 세워졌다.

천하는 모두 그의 것이 되었다.

사람들은 유계의 세상이 되었다고 했지만 내게는 이상하게도 그날부터 다른 두려움이 보이기 시작했다.

항우는 분명 죽었지만, 항우에 대한 공포는 죽지 않았다.

 

황제가 남편 곁에 있는 거대한 이름들, 한신, 팽월, 영포를 볼 때마다 나는 늘 예전의 항우의 그림자가 겹쳐 보였다. 세상은 이미 유씨의 천하라고 말했지만, 내가 보기엔 아직도 천하는 완전히 남편의 손에 들어온 것 같지 않았다.

 

한신은 남편을 보는 같았고, 팽월은 음흉했으며, 영포는 너무 사나웠다.

그들을 경계했다. 두려웠기 때문이다. 나의 불안한 두려움은 분노로 변했다.

분노는 쌓여서 독한 마음으로 굳어졌다.

나는 그때 부터 그들을 남편 대신에 먼저 제거하기로 마음 먹었다.

바깥의 적이 사라졌다고 해서 싸움이 끝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오히려 무서운 싸움은, 우리가 쌓아온 것을 지키는 싸움이었다.

 

패현의 형수 노릇만 하고 있어서는 더는 궁중에서 살아남을 없었다.

술상을 차리는 손만으로는 궁궐 적들의 칼을 막을 없다.

이때 나에 남겨진 것은 하나였다.

죽음을 오가는 끝에 끝내 남은 것은 독함 뿐이었다.

독함은 생존이라는 체에 거르고 걸러진 생의 하나 남은 결정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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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시, 100일 정진  96일차 


패현에 돌아왔다.

사람들은 내가 천하를 얻어 드디어 금의환향을 했다고 말할 것이다.

사수의 정장 노릇이나 하던, 유씨 집 망나니 셋째 아들 유계가 나라의 황제가 되었으니 틀린 말도 아니다.

나이 마흔일곱, 내 고향 패현을 떠났다.

그때는 사실 사지로 가는 것과 다름 없었다. 그 망할 놈의 진시황 노역에 죄수를 호송하던 길이 내 운명이 바뀔 줄이야.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다.

죄수들은 도망갔고 나와 남아 있는 모두는 돌아가면 죽을 것이다.

이렇게 이상 남은 죄수들을 풀어주고, 나 또한 도망치어 숨어 살기로 했다.

그러나 선택이 나의 운명을 뒤바꿔 놓았다. 그래서 운명이란 놈은 참으로 알 수가 없는 것이다.

도망자 신세에서 패현으로 돌아와 보니 어느 내가 패공이 되었다.

그것도 잠시, 나와 형제들은 다시 패현을 떠나야 했다.

진을 멸하지 않고서는 패공이 되어도 아무런 소용이 없다고 생각했다.

지금 돌이켜 보면, 나는 패현을 떠나야만 새로운 나로 바뀌는 것 같다.

 

패현을 떠난 년동안 우리 형제들은 끈질기게 살아 남아 진을 몰아 냈다.

진은 무너져야 했고, 관중은 먼저 들어가야 했었다.

천하는 어느 마리의 용이 여의주 하나를 잡으려고 서로 다투는 형국이 되어 버렸다.

내가 황룡이라면 청룡 마리가 먼저 여의주를 잡고 있었다. 난 그걸 뺏으려고 덤비고 또 덤볐다.

여의주를 움켜 청룡, 그가 바로 항우다. 우리가 서로 차지 하고자 했던 여의주는 진이었다. 우리에게 진은 천하였고 여의주 였다.

항우는 강했다. 그는 정말 인간이 아닌 듯 했다. 세상의 기운이 그 한 사람에게 모두 들어 있는 것같았다. 그 앞에 서면  아무리 강한 사람이라고 해도 몸이 먼저 떨린다. 나 역시도 늘 그랬다.

그는 웃으며 말했지만 앞에서 주눅이 들었다.

 

사실 나는 그보다 뭐든 떨어졌다. 전장에서는 늘 얻어 터지고, 언제나 도망다녀야 했다.

팽성에서는 처참하게 무너졌고, 죽을 고비는 셀 수도 없을 정도로 넘겼다.

특히 홍문연에서의 술잔 앞에서는 정말이지 목이 떨어지는 알았다. 지금 생각해도 오싹하다.

겨우 장자방과 보이지 않는 도움으로 목숨을 건지고 촉으로 밀려났다.

이때 사람들은 아마 내가 거기서 끝날 알았을 것이다.

나도 처음엔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다. 나는 늘 졌으나 아주 무너지지는 않을 만큼만 졌다. 그건 정말 신기했다.

항우가 이길 나는 , 세 번 다시 일어섰다.

군사가 흩어지면 다시 모으고, 성을 잃으면 다시 취하고, 판이 깨지면 다시 어떻게든 짜버렸다.

한신, 장량, 소하가 있었고, 팽월과 영포 같은 자들도 그 판 안으로 들어왔다.

나는 항우처럼 천하를 혼자 짊어질 있는 사람은 절대 아니었다.

지금 다시 생각하면, 항우는 전투를 이기는 사람이었고, 나는 전쟁을 끝까지 버티는 사람이었다.

 

넷이 되어 항우는 죽고 나는 비로소 황제가 되었다.

 

세상 사람들은 거기서 초한지가 끝났다고 생각한다.

해하의 노래가 끝났고, 오강의 칼이 떨어졌고, 한나라가 섰으니 모든 것이 끝난 것처럼 보였을 것이다.

하지만 내게는 그때부터가 다른 시작이었다.

 

천하를 얻은 , 다시 일곱 해가 지났지만 나는 쉬지 못했다.

한신은 죽었고, 진희가 반란을 일으켰고, 흉노를 치러 나갔다가 백등산에서 포위되어 하마터면 모든 것이 거기서 끝날 뻔했다.

팽월과 영포 같은 이름들이 여전히 그림자처럼 곁을 맴돌았다.

황제가 되었으나 갑옷을 벗지 못했고, 천하를 얻었으나 마음은 늘 칼집 위에 얹혀 있었다.

 

돌아보면 삶은 묘하다.

앞의 일곱 해는 천하를 얻는 시간이었다.

뒤의 일곱 해는 얻은 천하가 흩어지지 않게 붙드는 시간이었다.

나는 번째 일곱 동안 패현의 유계에서 한나라 황제로 올라섰고, 두 번째 일곱 해 동안 황제의 자리에 앉아 있으면서도 끊임없이 무너질 수 있는 나라를 붙들고 있었다.

그러니 천하를 얻는 일과 나라를 세우는 일은 같은 일이 아니었다.

항우를 이기는 것과 한나라가 되는 것도 같은 일이 아니었다.

 

나이 예순 하나, 이제 다시 패현으로 돌아왔다.

이제서야 돌아와 보니, 젊은 날에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때의 나는 항우만 넘으면 되는 알았다. 그러나 항우가 죽고 나서야 알게 되었다.

천하를 위협하는 칼은 성밖에서만 번득이는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나라를 세운 뒤에 바람이 궁궐 안을 향해 것이다.

이제 술이 돌고, 옛 얼굴들이 보이고, 고향의 바람이 불어온다.

바람 앞에서 나는 마침내 노래를 부른다.

 

大風起兮雲飛揚(대풍기혜운비양) / 큰 바람이 일어나니 구름이 날아오르고

威加海內兮歸故鄕(위가해내혜귀고향) / 위엄이 천하에 미치니 고향으로 돌아왔노라

安得猛士兮守四方(안득맹사혜수사방) /어찌 맹사를 얻어 사방을 지키게 할 것인가

- 대풍가(大風歌) , 유방

 

사람들은 노래를 승전가라 부를 것이다. 그 또한 맞다.

패현 출신의 비루했던 사내가 천하를 얻고 고향으로 돌아왔으니, 승전가가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그러나 정작 마음은 마지막 구절에서 걸린다.

어찌 맹사(용맹스런 신하) 를 얻어 사방을 지키게 할 것인가.

천하를 얻었으나 아직 지킬 일이 남아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흔히들 이걸 수성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 성은 눈에 보이는 바깥 성만이 아니다.

바깥의 적은 이미 죽었으나, 안의 싸움은 아직 시작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안다.

내가 평생 싸워온 것은 항우였으나, 내가 죽은 뒤 이 나라가 다시 마주할 것은 항우 같은 적이 아닐 것이다. 혈통과 총애와 후계와 공신과 외척, 웃는 얼굴 속에 감춰진 음울한 눈빛과 침묵 속에 숨겨진 칼들이 궁궐 안에서 다시 천하를 흔들 것이다.

 

항우의 <해하가>가 한 영웅의 마지막 노래였다면, 나의 <대풍가>는 이제 앞으로 불게 될 불안한 시작을 알리는 노래인지도 모른다.

 

나와 항우의 초한전쟁은 끝났다. 그러나 또 다른 초한전쟁은 다시 시작될 것 같다.

나는 패현의 바람 앞에서 그것을 어렴풋이 느낀다.

내가 세운 한나라는, 과연 얼마나 오래 버틸 수 있을까.

또한 죽으면, 진시황 뒤의 천하처럼 다시 어지러워지는 것은 아닐까?

 

이제 남은 운명도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뒤의 이야기는, 또 다른 살아남은 자가 들려 주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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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크냄새 2026-04-07 20:1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유방의 독백이 영화 자막처럼 초한지 끝자락을 장식하네요.

마힐 2026-04-08 01:30   좋아요 0 | URL
유방의 독백을 시작으로 초한지에서 살아 남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그들의 시점으로 풀어 보고 싶었어요. 초한지는 비극적 선택을 한 사람들의 이야기로 읽혀지더라구요.
2천년 전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 현실 같아 몰입 중입니다. ^^
 

- 다시, 100일 정진  95일차

 

다리 위를 지나던 말이 갑자기 무엇에 놀랐는지 요동을 친다.

놀란 말을 진정시키는 사이 몸이 시커먼 사내가 다리 밑에서 불쑥 뛰어 올라왔다.

자객이다.

조양자, 이 칼을 받고 죽어라.

 

자객은 칼을 들어 말에 사람을 향해 쏜살같이 달려갔다.

말의 고삐를 잡은 자가 당황하는 사이 호위 무사들이 칼을 빼어 달려드는 자객을 막았다.

호위 무사의 활약으로 결국 자객은 잡혀서 말탄 조양자(趙襄子)에게로 끌려왔다.

잡혀 자객의 얼굴은 흉하게 일그러졌으며 밖으로 드러난 모든 피부는 마치 문둥병 환자와 같았다.

이놈~ 누구냐?  어째서 날 해하려 하느냐.

 

조양자는 잡혀 자객의 흉측한 얼굴을 보는 순간 놀랐다.

자객은 예양(豫讓)이란 이름의 지백(智伯) 가신이었기 때문이다.

지백은 조양자의 정치적 정적으로 둘은 서로를 죽이고자 다투었으나 최종 승자는 조양자였다.

이에 예양은 죽은 자신의 주군 지백의 복수를 위해 조양자를 해치려 것이다.

예양의 지백을 위한 복수 계획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이미 예양은 조양자의 집의 뒷간에 숨어 들어가 암살 시도를 했으나, 조양자는 다행이 큰 해를 입지 않고 오히려 예양을 붙잡았다.

예양이 주군을 위해 복수하겠다는 기개에 감동한 조양자는 예양의 의리가 가상해서 살려 주었었다.

그런데 예양은 다시복수의 칼을 들고 나타났다.

그러자 조양자를 더욱 놀라게 것은 예양의 집요함보다, 옷칠로 일그러진 그의 얼굴과 검게 변한 피부였다.

도대체 얼굴과 피부는 그렇게 되느냐?

 

나를 알아보지 못하게 얼굴과 몸에 옻칠을 했소.

 

이렇게 까지 해서 해치려 하는 거냐?

차라리 네가 내게 거짓으로 투항해서 신하가 되어 기회에 따라 몰래 복수하는게 쉽지 않겠는가?

 

아니오. 난 당신을 죽이려는 마음을 감추고 당신 신하가 될 생각이 없소. 그건 두 마음을 품고 주군을 섬기는 것인데 난 그렇게 할 순 없소. 난 세상 사람들에게 두 마음을 품고 주군을 섬기는 행위가 부끄러운 일임 세상에 알리고 싶소.

 

듣고 있던 조양자는 예양에 기백에 탄복하여 진심으로 예우를 다해 묻기 시작한다.

 

그대의 충심에 대해 조양자는 진심으로 탄복하오. 하지만 그대는 지백을 섬기기 전에 범씨와 중항씨를 섬기지 않았었나? 당시 그대가 모셨던 범씨와 중항씨를 지백이 죽여 버렸소. 그럼 지백이 바로 당신의 옛 주군의 원수나 마찬가지인데 그때 당신 왜 지백에게 복수 하질 않았소? 왜 오히려 이미 죽어버린 지백을 위해 이렇게까지 복수를 하는 것이오?

 

조양자는 예양이 이해가 되질 않았다.

예양의 주군을 지백이 죽였고, 지백은 조양자가 죽였다.

그럼 조양자는 분명 예양의 주군들 복수를 대신 해준 셈인데, 오히려 예양은 조양자를 죽이려고 하고 있다. 이건 도대체 어떻게 이해해야 되는가?

 

신이 본래 범씨와 중항씨를 곁에서 모셨으나, 그들은 제게 보통 사람으로 대우했습니다.

역시 그들을 보통 사람에 대한 보답을 했을 뿐입니다.

그러나 지백은 저를 국사로 대우해 줬습니다. 그러면 저는 지백을 국사로서 보답해야만 합니다.

선비는 자기를 알아주는 사람을 위해 죽고, 여자는 자기를 좋아하는 사람을 위해 얼굴을 아름답게 단장합니다.

 

예양의 말에 조양자는 탄복을 하며 눈물을 흘렸다.

 

그대의 지백을 향한 충절은 깊고 그대의 명예도 이미 충분하게 이루었소. 그러나 과인은 그대를 이미 한번 용서해 주었소. 이제 과인은 그대를 다시 놓아 줄 수는 없소.

 

신은 군왕의 말씀에 이견이 없소. 하지만 신에 죽음은 마땅하나, 원컨데 군왕께서 입던 옷을 제게 주신다면 그 옷을 칼로 치고, 그로써 원수를 갚으려는 뜻을 이루게 하옵소서.  이렇게만 할 수 있다면 죽어도 여한이 없습니다.

 

조양자는 자신이 입고 있던 옷을 벗어 예양에게 건네고, 예양은 다시 칼을 뽑아 조양자의 옷을 세번 찌른 후, 마침내 지백에게 보답을 이루었다 외친 후, 그 자리에서 칼에 몸을 엎었다.

 

이것은 사마천의 사기의 자객열전 중에서 가장 여운이 남는 예양의 일화이다.

士爲知己者死(사위지기자사) / 선비는 자기를 알아주는 사람을 위해 죽고,

女爲悅己者容(여위열기자용) / 여자는 자기를 좋아하는 사람을 위해 얼굴을 아름답게 단장한다.

 

예나 지금이나 예양 같은 사람은 드물다.

세상은 이런 충절을 비웃을지도 모른다. 어리석다고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과연 그것이 비웃을 일인가.

인간은 결국, 자신을 알아준 한 사람의 마음을 끝내 잊지 못하는 존재가 아닐까.

어쩌면 우리는 누군가의 인정과 사랑을 간절히 바라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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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시, 100일 정진  94일차

 

力拔山兮氣蓋世(역발산혜 기개세) / 힘은 산을 뽑고 기세는 세상을 덮을만 하나

時不利兮騅不逝(시불리혜 추불서) / 때가 불리하니 오추마마저 달리지 않는구나

騅不逝兮可奈何(추불서혜 가내하) / 오추마가 달리지 않으니 이를 어찌하나

虞兮虞兮奈若何(우혜우혜 내약하) / 우희여 우희여 그대를 어찌 해야 하나!

- 해하가(垓下歌)/ 항우(項羽)

 

깊은 , 온 진영 곳곳에서 들리는 초나라의 노래 가락은 잠 못이루는 병사들의 눈물을 흘리게 한다.

초나라 대장의 막사 안에서 술을 마시던 항우도 울적해지며 <해하가>를 읆조린다.

진의 마지막 명장 장한을 상대로 펼쳤던 거록 전투의 대승리, 팽성을 점령한 유방의 56만 대군을 3만 정예병으로 처참히 깨 부수었던 팽성 전투. 그리고 수 많은 고함과 비명 속의 전투 속에서 항우는 애마 오추마를 타고 피 바람 부는 전장의 흙 먼지를 뚫고 지나 오늘에 이르렀다.  

주마등처럼 스쳐가는 항우의 무용(武勇), 이제 우희의 볼에 흐르는 눈물처럼 서서히 지워질 차례가 되었다.

경극 <패왕별희>의 백미는 그 사랑하던 항우의 여인, 우희가 가날프게 항우의 장검으로 목을 긋는 장면이다. 서초패왕 항우와 우희의 마지막 이별, 이들은 이제 곧 저승에서 다시 만날 것이지만 애절함은 더욱 깊어진다.

 

今日固決死,願為諸君快戰,必三勝之(금일고결사, 원위제군쾌전, 필삼승지)

令諸君知天亡我,非戰之罪也 (영제군지천망아, 비전지죄야)

오늘은 죽기로 했다. 너희를 위해 통쾌하게 싸워 반드시 세 번 이겨 보이겠다.

하늘이 나를 망하게 것이지, 전투의 잘못이 아님을 너희가 알게 하겠다.

 - 사기. 항우본기 / 사마천 중에서

 

, 항우는 힘이 없어서 진 것이 아니다.

다만 하늘이 유방을 선택했을 !

지금부터 그것을 증명해 보이겠다.

 

너무나도 압도적으로 강했던 서초패왕, 스스로 봉황이 되어 하늘을 날아 올랐으나, 한 낱 참새떼 같은 유방의 패거리에게 쫓김을 당할지 어찌 알았으랴.

항우는 마지막까지 자신을 따르던 부하들을 배에 태워 떠나 보내고 홀로 유방의 백만 대군 앞에 섰다.

압도적인 수의 병사지만 아무도 감히 혼자인 항우를 대적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그는 이미 충분히 자신을 하늘을 향해 증명했다.

이제 마지막 순간이 왔다.

항우는 유유히 흐르는 오강(烏江) 뒤로 , 자신을 맹렬하게 불 태웠던 운명의 불꽃을 스스로 소멸시켰다.

그의 나이 31세였다.

항우는 그날 이후 전설이 되었다.

 

사실 <초한지>의 이야기는 <삼국지> 보다 복잡하지 않고 비교적 단순하다.

하지만 이야기 속에 등장한 인물들의 입체적인 면은 훨씬 다양하다.

그들이 당시에 선택했던 사항들이 이후에 어떤 결과를 가져왔는지 역사적 사실을 통해 바로 확인할 있다.

등장 인물들의 교훈은 2천년이 훨씬 옛날 이야기 이지만 아직도 유용하다.

진시황의 야심, 이사의 공포, 조고의 술수, 장량의 도의, 소하의 분석, 유방의 똘기, 항우의 패기, 한신의 비루함 등은 우리 마음속의 감춰진 본성과 다르지 않다.

역사속 박제된 인물들을 현재로 소환하여 그들의 마음 속을 마음에 비추어 보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초한지는 인간에 대해 지칠 한번 씩 곁에 두고 읽어 보면 좋은 안내서가 되리라 본다.

 

초한지는 우리의 마음 이야기다.

우희여! 우히여!

마음을 나는 어찌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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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크냄새 2026-04-03 20:2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패왕 항우를 잊지 못함은 역발산기개세의 힘과 의지가 아니라 우희를 향한 순정 때문이지요.

마힐 2026-04-03 23:31   좋아요 1 | URL
송나라 때 이청조라는 중국 문학사 중에 최고로 치는 여성 시인이 있었어요.
아마 미국 여류시인 ‘에밀리 디킨스‘ 급 정도의 위상 될 겁니다.
그녀는 항우에 대해 <하일절구(夏日絕句)> 란 시를 남겼죠.

生當作人傑,(생당작인걸) / 살아서는 인간 중에 마땅히 인걸이 되고
死亦為鬼雄。(사역위귀웅) / 죽어서도 귀신 중에 영웅이 되어야 한다네.
至今思項羽,(지금사항우) / 내가 지금까지도 항우을 생각하는 이유는
不肯過江東。(불긍과강동) / 끝내 강동으로 돌아가지 않았기 때문이라네.

그의 죽음에 대해 후세의 많은 사람들에게 울림을 주었지요.
그 중에 우희에 대한 순정도 있고요.
또 이청조 시인의 시처럼 구차하게 살아 남지 않은 영웅이라 잊지 못하는 경우도 있답니다. 영웅이 로맨티스트로 마지막을 선택했으니 어찌 전설이 되지 않을 수 있나요. ^^

 

- 다시, 100일 정진  93일차

 

장막 안의 팽팽한 기운을 가르는 줄기 빛은 차갑다.

쓱삭 하고 잘리는 허공의 소리는 어느새 빛을 쫓는다.

장막의 벽에 비춰진 춤추는 검은 그림자.

순간, 그림자의 손 끝은 날카로운 검이 되어 무섭게 한 곳으로 날아간다.

지켜보는 자에게 날아 오던 끝이 어느새 다시 돌아 나와 그림자 속으로 감춰진다.

다시 검과 그리고 몸이 하나에서 각각으로 돌고 돈다.  

어느덧 항장의 살기를 검무는 점점 빠르게 날아 오르고 있다. .

장막의 고요한 정적 속에 지켜보는 자는 싸늘함만 느낄 뿐이다.

 

항장이 휘두르는 날카로운 검무의 마지막은 목이 하늘로 치솟으며 것만 같았다.

살기등등한 패왕(覇王) 항우 앞의 패공(沛公) 유방은 연신 머리를 조아리고 긴장을 감춘 웃음 밖에 없었다.

웃고 있지만 웃는 아니다.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낸 호랑이 아가리에 머리를 집어 넣고 있는 심정이다.

*홍문의 연(鴻門宴), 유방은 그날 밤 연회에서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긴장을 늦출 수 없었다.

 

범증은 항우에게 홍문의 연회가 시작되기 세가지 계책을 세워 신신당부를 했다.


상책은 패공이 도착하는 즉시 함양성 문을 열어 주지 않았던 그의 죄를 물어 목을 베어야 합니다.

만약 그게 안되면 연회 무장한 병사를 숨겼다가 제가 신호를 보내면 바로 병사를 보내 치십시요.

마지막, 하책으로는 유방이 술을 좋아하니 반드시 취하면 실수하게 될 테니 그때 가차없이 베십시요.

항우는 호방하게 웃으며 패공 유방의 목숨이 오늘 것을 지켜보라 장담했다.

 

호랑이 굴에 잡혀가도 정신만 바짝 차리면 된다는 속담이 바로 홍문의 연이라는 사지(死地) 들어간패공 유방에게 해당되지 않을까.

유방은 그날 , 결국  호랑이 굴에서 무사히 빠져 나오고야 말았다. 

 

어떻게 유방은 당대 최고의 책사 범증이 설계한 사지에서 살아 돌아올 있었을까.

항우의 숙부 항백의 도움 때문인가. 아니면 진평의 거짓으로 따른 술잔 때문인가. 아니면 번쾌의 목숨을 건 술 대작 덕분인가.

춤추는 끝에 자신의 목이 떨어져 나갈 있었던 홍문연에서 살아나온 유방은 과연 정말로 운이 억세게 좋았던 것일까.

 

사실 초한지에서 가장 긴장감을 드러낸 장면이 바로 홍문에서의 연회이다.

누가 봐도 유방이 항우에게 죽임을 당하기 좋은 조건을 가진 상황이었다.

하지만 유방은 사지에서 살아 남아 천하쟁패의 승리자가 되었다.

유방이 이날 살아 남을 있었던 여러 조건 가운데 가장 밑 바탕이 조건이 있다면, 유방의 운도 아니고 어쩌면 나이 때문이 아닌가 싶다.

당시 유방의 나이는 (여러 이설이 있지만) 약 50세이고 항우는 24세 정도 되었다고 한다.

둘이 진의 수도 함양을 치기 전에 의형제를 맺었는데 나이가 많은 유방이 형이 것이 아니라 항우가 형이 되었다. 나이 차이가 그렇게나 나는데 젊은 항우가 형이 되고, 나이 많은 유방이 동생을 자처한 것이다.  

현대 사회에서도 내세울 별로 없을 나이를 가지고 마지막에 내세우는 경향이 있다.

일부 꼰대라고 부르는 나이 많은 사람들은 사실 내세울 별로 없으니 나이라는 계급을 내세운다.

사수의 정장이자 도망자 우두머리, 그리고 패공이 된 유방은 정말로 내세울 게 나이 밖에 없는 사람이다.

하지만 그런 그가 16살이나 어린 항우에게 머리를 조아리며 동생이 되길 마다하지 않았다.

어떻게 유방은 내세울 나이 밖에 없는 사람이 오히려 나이를 초월할 있었을까.

 

사실 유방은 항우와 같은 세대가 아니다. 오히려 진을 통일한 진시황 보다 고작 3살 어린 나이였다.

유방은 진시황 같은 세대로 항우 같은 나이는 자신의 아들 뻘로 여겼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유방은 항우보다 인생의 경험이 넓고 깊었다.

진시황의 굴기와 몰락을 지켜봤으며 스스로 마을 건달 노릇하며 인간 본성과 심리를 누구보다 파악했었다. 이건 나이가 젊다면 절대로 알 수 없는 경험치 인 것이다.

사람들은 유방이 사람을 쓰는 용인술이 항우보다 훨씬 좋아서 천하를 차지 했다고 한다.

하지만 보다 깊은 층엔 나이가 항우보다 많아서 였다고 하면 나만의 비약일까.

 

굽힐 장소에서는 굽힐 알며, 뻣뻣하게 곧을 장소에선 곧게 펼 줄 아는 자. 

그렇게 행 할 수 있는 자가 바로 유방이였다.

만약 유방이 항우와 같은 세대 였다면 의형제를 맺는 자리에서 은근히 자존심을 세웠을 것이다.

유방의 인생은 항우보다 세대를 넘는 경험치가 있었기 때문에 , 동생이란 허울은 아무런 필요가 없었던 것은 아니였을까.

나이가 많아 경험치가 많다는 것은 사지에서도 누구 보다  침착할 있었지 않았을까.

그는 그렇게 자신이란 틀을 부순 사람이다.

이미  라는 (我相)  없는 사람에게는 죽음의 사신도 범접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였을까.

만약 유방이 젊었다면 결코 홍문연에서 살아 돌아올 없었을 것이다.  

자신이 점점 나이를 내세우는 꼰대가 되어 간다면 유방을 한번 떠올려 봄도 좋을 듯하다.

나이는 계급이 아니라 경험의 표식이다.

나의 홍문연은 아직 진행 중이다. 나는 살아 남을 수 있을까.

 

 

: *홍문의 연(鴻門宴): 진나라의 수도 함양을 먼저 차지한 사람이 관중 왕이 되는 조건을 초회양이 걸었다. 유방과 항우는 각각의 군사를 데리고 서쪽과 동쪽에서 출발했는데 결과적으로 유방이 먼저 함양을 점령했다. 후에 항우가 이 사실을 알고 함양에 진입하려 했지만 유방은 성문을 열어주지 않았다. 이에 분노한 항우는 함양 근처 홍문이란 곳에서 유방을 불러 연을 베풀었다. 사실상 죽음의 연회였다.


 

By Dharma & Mahe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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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4-03 20:2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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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4-03 16:0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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