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밀밭의 파수꾼(The Catcher in the Rye). ‘catcher’를 ‘파수꾼’으로 해석하는 것이 못마땅하지만, 일단 익숙한 제목을 쓰도록 하겠다. 이 소설의 독자들도 아시다시피 ‘The catcher in the Rye’는 로버트 번스(Robert Burns)의 시 「호밀밭을 지나오다가(Comin Thro the Rye, Coming Through The Rye)에서 따온 제목이다.

 

 

 

 

 

 

 

 

 

 

 

 

 

 

 

 

 

 

 

* 제롬 데이비드 샐린저 《The Catcher in the Rye》 (Little Brown & Company, 1991)

* 제롬 데이비드 샐린저 《호밀밭의 파수꾼》 (민음사, 2001)

* 제롬 데이비드 샐린저 《호밀밭의 파수꾼》 (문예출판사, 1998)

 

 

 

소설의 주인공 홀든 콜필드(Holden Caulfield)는 브로드웨이 거리를 걸어갈 때 한 아이가 흥얼거린 콧노래를 듣는다. 그 노래가 바로 번스의 「Coming Through The Rye」에 곡을 붙인 민요다. 그런데 홀든은 그 노래를 ‘호밀밭에 들어오는 사람을 잡는다면(If a body catch a body coming through the rye)이라고 착각하면서 ‘호밀밭의 파수꾼’이 되고 싶다는 의지를 확고히 다진다. 나중에 그의 여동생 피비(Phoebe)는 그 노래가 「Coming Through The Rye」라는 사실을 알려준다.

 

 

 

 

 

 

 

 

 

 

 

 

 

 

 

 

 

 

 

* [절판] 로버트 번스 《올드 랭 사인》 (솔출판사, 1995)

* [절판] 김천봉 엮음 《19세기 영국 명시 낭만주의 시대 1》 (이담북스, 2011)

* [e-Book] 로버트 번스, 김천봉 엮음 《다정한 입맞춤: 로버트 번스 시선》 (글과글사이, 2017)

 

 

 

 

로버트 번스는 오늘날에 민요로 더 알려진 「올드 랭 사인(auld lang syne)「붉고, 붉은 장미(A Red, Red Rose)를 쓴 스코틀랜드 출신의 시인이다. 번스가 누군지 몰라도 「올드 랭 사인」의 선율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올드 랭 사인」은 연말 또는 졸업식에 자주 불리는 노래다. ‘auld lang syne’은 ‘옛날’이라는 뜻을 가진 스코트어(Scots: 스코틀랜드 표준 영어)다. 현재의 ‘애국가’가 나오기 전에 일제 강점기 조선 민중, 그리고 독립군 및 임시정부 인사들은 민요 버전의 「올드 랭 사인」의 선율에 맞춘 애국가를 불렀다.

 

홀든이 우연히 들은 「Coming Through The Rye」는 「올드 랭 사인」에 비하면 자주 불리는 노래는 아니지만, 사실 「Coming Through The Rye」도 우리에게 친숙한 노래이다. 우리나라에 ‘들놀이’라는 제목의 동요로 번안되었다. 필자가 아주 어렸을 때 동요 모음집 카세트테이프에 흘러나오는 ‘들놀이’를 들은 적이 있다. 요즘 아이들도 이 노래를 알려나?

 

 

 

 

 

 

※ 영국의 드라마틱 소프라노(dramatic soprano) 가수 플로런스 이스턴(Florence Easton)이 부른 「Coming Through The Rye」

 

 

 

 

 

 

※ 동요 ‘들놀이’

 

 

 

번스는 스코틀랜드 농촌에서 태어나고 자란 시인이다. 그는 스코틀랜드 방언으로 시를 썼으며 전원생활의 평화로운 분위기, 농민들의 애환 등을 담아냈다. 그래서 번스의 시는 투박하면서도 생기가 넘치는 느낌이 난다. 그의 고향에 박물관이 된 생가가 있을 정도로 번스는 스코틀랜드를 대표하는 국민 시인으로 추앙받고 있다. 영문학사에서 번스는 낭만주의 시인으로 분류되고, 더 나아가 ‘낭만주의의 선구자’로 평가받는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 번스의 인지도는 아주 낮다. 시 앤솔러지(anthology)에 가장 많이 수록된 번스의 시는 「붉고 붉은 장미」다. 번스의 시 선집은 1995년에 나온 《올드 랭 사인》(솔출판사)과 영국의 낭만주의 시인 윌리엄 블레이크(William Blake)의 시들과 함께 수록된 《19세기 영국 명시 낭만주의 시대》 1권(이담북스)이다. 두 권 모두 스코티어 원문과 우리말 번역문이 함께 수록되어 있지만, 절판되었다. 김천봉 교수가 번역한 번스의 시들은 《다정한 입맞춤》(책과책사이)이라는 새로운 제목이 붙여져 전자책 형태로 재출간되었다. 그런데 절판된 종이책과 전자책 두 권 모두 역자는 같아도 명백한 차이점이 있다. Coming Through The Rye」는 종이책에 없고, 전자책에만 수록되어 있다. 그런데 솔출판사의 번스 시 선집에도 「Coming Through The Rye」는 수록되지 않았다. 「Coming Through The Rye」가 번스의 대표 시로 보기 어렵다고 해도 소설 때문에 유명해진 시를 선집에 수록되지 않은 점은 의아스럽다.

 

종이책으로 나온 번스의 시 선집 모두 번역이 좋다고 볼 수 없다. 사실 번스가 시를 쓰면서 사용한 스코트어는 오늘날의 미국과 영국식 영어와 다르다. 스코틀랜드 인들은 18세기 초반 영국 연방에 합쳐진 후 영어와 스코트어, 그리고 스코틀랜드 방언을 함께 썼다. 이 과정에서 그들은 스코트어 특유의 발음을 강조하기 위해 영국 표준 영어의 철자(spelling)를 바꿔서 사용했다. 이를테면 영국인들은 ‘하나’를 뜻하는 영어로 ‘one’을 쓰지만, 스코틀랜드인들은 ‘ane’라고 쓴다. 어쨌든 번스는 스코트어와 스코트랜드 방언을 자유자재로 구사하면서 시를 썼기 때문에, 번역가는 번스의 시를 2중(옛 스코트어→영국 표준 영어→한국어)으로 번역해야 하는 번뇌에 시달려야 한다.

 

《19세기 영국 명시 낭만주의 시대》 1권의 역자 해설(119쪽)에 보면 다음과 같은 문장이 있다.

 

 

 그의 아버지(William Burness, 1721~1784: 1786년까지 번스는 자신의 이름을 ‘Robert Burness’로 표기했다)는 가난한 농부였다.

 

 

시인의 성(姓)은 원래 ‘Burnes’였다. 1786년 이후로 번스는 ‘e’를 뺀 ‘Burns’로 서명을 쓰기 시작했다. 그런데 《19세기 영국 명시 낭만주의 시대》 1권에는 ‘Burness’로 잘못 적혀 있다. 고친다면 뒤에 있는 ‘s’를 빼야 한다.

 

《19세기 영국 명시 낭만주의 시대》 1권에 있는 장시 「경건한 윌리의 기도(Holy Willie’s Prayer)」에 누락된 원문의 일부와 그것을 번역하지 않은 내용이 있다. 김천봉 교수가 번역하지 않은 내용은 이 시의 제사(題詞: 책의 첫머리에 그 책과 관계되는 노래나 시 따위를 적은 글)와 번스의 해설문이다. 김천봉 교수가 번역하지 않은 내용의 원문은 다음과 같다. 원문의 출처는 번스의 생애와 그의 모든 작품들을 한눈에 볼 수 있도록 정리한 웹사이트이다.

 

링크: http://www.robertburns.org/works/58.shtml

 

 

 

“And send the godly in a pet to pray.” - Pope.

 

 

* Argument

Holy Willie was a rather oldish bachelor elder, in the parish of Mauchline, and much and justly famed for that polemical chattering, which ends in tippling orthodoxy, and for that spiritualized bawdry which refines to liquorish devotion. In a sessional process with a gentleman in Mauchline - a Mr. Gavin Hamilton - Holy Willie and his priest, Father Auld, after full hearing in the presbytery of Ayr, came off but second best; owing partly to the oratorical powers of Mr. Robert Aiken, Mr. Hamilton’s counsel; but chiefly to Mr. Hamilton’s being one of the most irreproachable and truly respectable characters in the county. On losing the process, the muse overheard him (Holy Willie) at his devotions, as follows:-

 

 

번즈에 의하면, 홀리 윌리는 실제로 윌리엄 피셔(Willie Fisher)라는 모흘린(Mauchline) 마을의 독신 장로로, 그 마을 목사와 합세하여 개빈 해밀턴(Gavin Hamilton, 또는 곤 해밀턴)이라는 선량한 사람을 교회 재판에 고소했다. 그러나 에어(Ayr, Ayrshire: 스코틀랜드 남서부의 항구 도시, 번즈가 태어난 지역- 필자 주)의 장로회가 해밀턴을 무죄로 판결하자 망신만 당하고 말았다. 번즈는 불만 가득한 상태의 윌리가 혼자 하느님께 불평하는 것을 엿듣는 형식을 빌려, 자기만 옳고 선택됐다고 믿는 칼뱅교도의 오만한 독선과 편협성과 이기주의를 풍자하고 있다.

 

(솔출판사, 128쪽, 번즈의 해설문을 각주 형식으로 요약한 내용)

 

 

솔출판사 판본의 「Holy Willie’s Prayer」 역시 번역이 좋다고 볼 수 없다. 번즈의 해설문을 각주(脚註) 형식으로 언급했지만, 제사를 번역하지 않았다.

 

 

 

 

 

 

 

 

 

 

 

 

 

 

 

 

 

 

* [e-Book] 알렉산더 포프 《포프 시선》 (지만지, 2015)

* [품절] 알렉산더 포프 《포프 시선》 (지만지, 2010)

 

 

 

제사의 출처는 영국의 시인 알렉산더 포프(Alexander Pope)가 1714년에 발표한 풍자적인 장시 「머리 타래의 강탈(The Rape of the Lock)」 4곡(曲, canto)의 64행 구절이다. 이 시는 흔히 ‘머리카락을 훔친 도둑’으로 제목으로 번역되기도 한다. 「The Rape of the Lock」은 총 5곡으로 이루어진 장시다. 《포프 시선》(지만지)은 포프의 시 작품들을 접할 수 있는 유일한 번역본이지만, 「The Rape of the Lock」은 제1곡와 제2곡만 번역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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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19-02-27 09: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래 전 잉글리시 튜터가
<호밀 밭의 파수꾼>을 자신의 인생책
으로 꼽던 기억이 나네요 :>

cyrus 2019-03-04 14:04   좋아요 0 | URL
지난주 목요일에 <호밀밭의 파수꾼> 독서 모임이 있었는데, 저랑 다른 한 분 빼고는 이 책을 좋게 봤어요. ^^;;
 

 

 

 

 

 

 

존 러스킨(John Ruskin)《참깨와 백합》은 1864년에 대중을 상대로 한 두 차례 강연을 묶은 책이다. 아마도 이 책을 처음 접하는 독자는 제목만 봐서 무슨 내용인지 알 수 없을 것이다. ‘참깨’는 첫 번째 강연 제목 「참깨: 왕들의 보물」을 뜻하며 올바른 독서법의 의미와 그 중요성을 다룬다. ‘백합’은 두 번째 강연 「백합: 여왕들의 화원」을 의미한다. 이 강연은 여성의 사적 · 공적 역할과 여성이 받을 수 있는 교육의 범위를 다룬다.

 

 

 

 

 

 

 

 

 

 

 

 

 

 

 

 

 

 

 

 

 

* 존 러스킨 《참깨와 백합 그리고 독서에 관하여》 (민음사, 2018)

* 리처드 프랜시스 버턴 《아라비안나이트 V》 (동서문화사, 2010)

* 앙투안 갈랑 《천일야화 5》 (열린책들, 2010)

 

 

 

첫 번째 강연 내용을 보면 ‘옛적 아라비아 마법의 곡물이며 닫힌 문을 여는 참깨로 빚은 빵’[주1]이라는 구절을 확인할 수 있다. 아라비아, 마법, 닫힌 문을 여는 참깨. 이 세 개의 단어는 《아라비안나이트》‘알리바바와 40명의 도둑’ 이야기를 떠올리게 한다. 보물을 가득 숨겨둔 동굴 앞에 선 알리바바가 동굴의 문을 열기 위해 외친 마법의 주문이 ‘열려라, 참깨(Open sesame)이다. 러스킨이 말하는 ‘참깨’는 동굴 속에 있는 ‘보물’을 찾기 위한 열쇠이며, ‘보물’은 읽을 만한 가치가 있는 책이다. 러스킨은 ‘최고의 지혜’로 채워진 유익한 책을 ‘왕들의 보물’로 비유하면서 독서의 참된 의미를 강조한다.

 

 

 

 

 

 

 

 

 

 

 

 

 

 

 

 

 

 

 

* 존 러스킨 《존 러스킨 라파엘 전파》 (좁쌀한알, 2018)

* 티머시 힐턴 《라파엘 전파》 (시공사, 2006)

* 팀 베린저 《라파엘 전파》 (예경, 2002)

 

 

 

백합의 꽃말은 ‘순결’, ‘변함없는 사랑’이다. 그래서 중세 시대의 고귀한 여성을 상징하는 꽃으로 알려지기도 했다. 러스킨이 ‘백합’에 보인 지대한 관심은 중세 시대 문화를 동경하던 라파엘전파(Pre-Raphaelite Brotherhood)와 관련되어 있다. 라파엘전파에 소속된 화가들은 함축적인 의미가 담긴 사물 또는 자연물을 그림에 그려 넣었다. 라파엘전파 화가들은 꽃말에 관심이 많았는데, 꽃말은 자신들이 그리고자 하는 그림의 의미를 전달하기 위한 일종의 단서로 활용했다. 라파엘전파가 활동하는 데 큰 도움을 준 사람이 러스킨이다. 그는 고전주의에 벗어나지 못한 주류 화단으로부터 비난받은 라파엘전파를 적극적으로 옹호했다.

 

「백합: 여왕들의 화원」을 한마디로 평하면 ‘시대에 뒤떨어진 글’이다. 이 글에서 드러난 러스킨의 여성관은 여성을 능동적인 존재로 인식하지 못한 빅토리아시대의 케케묵은 가부장제 이데올로기에 근거를 두고 있다. 러스킨은 산업자본주의의 폐해를 날카롭게 지적한 진보적인 사상가였지만 여성을 억압하는 인습에 얽매인 빅토리아시대 남성 지식인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했다. 그는 남성이 여성보다 우월하다는 편견의 문제점을 지적하면서도 여성을 ‘전쟁(논쟁)을 중재하고 질서를 유지하는’ 존재로 본다. 러스킨은 누구와도 경쟁하지 않고 정확하게 판단을 내리는 여성의 역할을 찬양하고 있지만, 그러한 능력을 남성이 ‘보호’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에게 여성은 중세 귀부인처럼 ‘남성에게 보호받아야 할 고귀한 존재’인 것이다. 러스킨에 따르면 여성이 다스리는 ‘가정’은 외부의 침입으로부터 지켜야 할 평화적인 안식처이다.[주2] 그는 세상을 온갖 위협과 유혹으로 가득한 일터와 가정으로 나눈 후 남성과 여성을 각 공간의 책임자로 배치한다. 러스킨 본인은 ‘남성은 공적 영역, 여성은 사적 영역’으로 철저히 나누는 이분법적 젠더 구분을 반대하면서도[주3] 여성이 공적 영역에 진입하는 데 필요한 교육의 범위를 한정짓는다. 그는 여성은 ‘자기 계발을 위한 지혜’를 멀리해야 하며 ‘신학’을 공부해선 안 된다고 주장한다. 러스킨이 선호하는 여성은 ‘남편을 섬길 줄 아는 지혜롭고 아름다운’ 여성이다.

 

 

 

 

 

 

 

 

 

 

 

 

 

 

 

 

 

 

 

* 존 스튜어트 밀 《여성의 종속》 (책세상, 2018)

* 존 스튜어트 밀 《자유론》 (책세상, 2018)

* [절판] 케이트 밀렛 《성 정치학》 (이후, 2009)

 

 

 

케이트 밀렛(Kate Millett)은 자신의 주저 《성 정치학》에 「백합: 여왕들의 화원」을 대차게 비판한다. 이때 그녀는 러스킨을 궁지로 몰아세우기 위해 《참깨와 백합》을 존 스튜어트 밀(John Stuart Mill)《여성의 종속》과 비교한다. 밀렛은 《여성의 종속》을 ‘역사를 통틀어 여성이 처한 현실적 입장을 가장 조리 있게 저술한 저서’[주4]라고 높이 평가한다. 한술 더 떠서 《자유론》에 버금가는 강력한 주장을 담은 책이라고 말하기까지 한다. 비록 러스킨의 편협한 여성관과 남성중심주의를 비판하기 위해서 그와 동시대에 활동했던 밀을 좀 더 좋게 평가한 것도 있지만, 급진적 페미니스트로 알려진 밀렛이 자유주의 페미니즘의 고전을 열렬히 호평하는 반응은 이례적이다. 사실 《여성의 종속》을 통해 알 수 있는 밀의 자유주의 페미니즘도 한계가 있다. 《성 정치학》이 나온 1970년대 이후에 밀의 자유주의 페미니즘을 비판하는 논문들이 속속 나오기 시작했다. 밀의 《여성의 종속》에 대한 비판적인 논평은 다음에 다루기로 한다.

 

빅토리아시대 남성은 여성을 ‘어른 아이’로 여겼다. 그러니까 그들은 여성을 미성숙한 ‘소녀’로 인식했던 것이다. 그래서 러스킨은 소녀들을 고상하게 가르칠 수 있는 교육이 필요하다면서 소녀를 가르칠 수 있는 가정교사의 역할을 강조한다. 실제로 러스킨은 아홉 살의 소녀 로즈 라 투셰(Rose La Touche)에게 드로잉을 가르치는 가정교사로 일했다. 이미 한 번 이혼으로 인해 사랑에 실패한 경험[주5]이 있는 러스킨은 로즈를 사랑하게 된다.  「백합: 여왕들의 화원」에서도 러스킨은 소녀를 ‘순수한 존재’로 언금한다. 러스킨이 생각하는 백합은 아름다운 여성으로 자라기 위해 보호받아야 할 순진무구한 소녀를 의미한다. 밀렛은 소녀에 집착하는 러스킨의 관심을 ‘노망난 에로티시즘’이라고 신랄하게 비판했다[주6].

 

 

 

 

 

 

 

 

 

 

 

 

 

 

 

 

 

 

* 설혜심, 박형지 《제국주의와 남성성》 (아카넷, 2016)

* 존 러스킨 《존 러스킨의 드로잉》 (오브제, 2011)

 

 

 

사실 「참깨: 왕들의 보물」도 시대적 한계가 보이는 글이다. 러스킨의 강연을 듣는 대중은 주로 중산층에 속하는 부유한 사람들이다. 이 글에 젠체하는 러스킨의 오만한 엘리트주의를 확인할 수 있다. 그는 양질의 책을 읽어서 지혜로운, 고상한 국민인 ‘신사(紳士)를 치켜세우면서 저속한 ‘군중’을 지적한다. 그가 생각하는 ‘군중’은 지나치게 감정적이며 사리분별이 떨어지는 사람들이다. 「참깨: 왕들의 보물」과 「백합: 여왕들의 화원」에서 드러나는 러스킨의 남성성은 ‘점잖음’을 중시하는 빅토리아시대 신사와 ‘백합’ 같은 고귀한 여성을 보호하고 싶은 중세 기사의 모습에 가깝다. 그가 제일 좋아하는 책 중 한 권이 코번트리 펫모어(Coventry Patmore)의 장편 담시 『집안의 천사』이다. 이 책에서 말하는 ‘집안의 천사’는 가정의 평화를 위해 희생하는 여성성을 상징한다. 러스킨은 「백합: 여왕들의 화원」뿐만 아니라 드로잉의 기초를 설명한 《존 러스킨의 드로잉》에서도 『집안의 천사』를 ‘뛰어난 작품’이라고 극찬했다. 이쯤 되면 그가 과연 여성의 권리 신장을 위해 적극적으로 나선 사람이라고 볼 수 있는지 의문이다.

 

 

 

 

 

 

 

 

 

 

 

 

 

 

 

 

 

 

* 장 자크 루소 《에밀》 (한길사, 2003)

* 장 자크 루소 《에밀》 (책세상, 2003)

* 장 자크 루소 《루소의 에밀 읽기》 (한길사, 2003)

 

 

 

 

 

 

 

 

 

 

 

 

 

 

 

 

 

* 케르스틴 뤼커, 우테 댄셸 《처음 읽는 여성 세계사》 (어크로스, 2018)

 

 

 

《참깨와 백합》 옮긴이는 러스킨을 ‘여성의 교육에 앞선 교육 개혁가’라고 소개했다.[주7] 러스킨은 사회 참여적인 교육가이지 ‘여성을 위한 교육 개혁가’로 평가받을 만한 인물이 아니다. 그의 여성관과 여성 교육에 대한 입장은 《에밀》에서 ‘여성의 역할은 남성을 즐겁게 하기 위한 것’이라고 주장한 루소(Jean Jacques Rousseau)와 유사하다. 루소도 여성을 남편과 가정을 위해 집안일 하는 존재로 한정 지었다.

 

 

《참깨와 백합》을 해설한 옮긴이의 설명은 빈약하다. 왜냐하면 1871년에 《참깨와 백합》 개정판을 내면서 새로 추가된 러스킨의 서문세 번째 강연 「The Mystery of Life and Its Arts」에 대해선 단 한 줄도 언급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개정판 서문과 세 번째 강연을 번역하지 않더라도 이에 대해서 언급했어야 한다.

 

 

 번역하는 내내 바른 가르침을 받는 행복감으로 충일했고 저자의 탄탄한 지성과 면밀한 논리는 생명을 살리는 먹거리가 차려진 소박하나 소중한 밥상과 같았다.

 

(옮긴이의 말, 14쪽)

 

 

옮긴이에게는 미안하지만, 나는 《참깨와 백합》을 읽는 내내 러스킨의 젠체함과 공허한 논리에 거부감이 생겨서 ‘밥상’ 같은 책을 엎고 싶은 느낌이 들었다.

 

 

 

 

[주1] 유정화 옮김, 「참깨: 왕들의 보물」, 80쪽

 

 

 

 

 

 

 

 

 

 

 

 

 

 

 

 

 

* [절판] 존 러스킨 《베네치아의 돌》 (예경, 2006)

 

 

[주2] 러스킨은 고딕 건축 양식과 베네치아 고딕 양식을 분석한 저서 《베네치아의 돌》에서 건축의 세 가지 미덕을 제시한다. 그 중 하나는 건물의 효율성이다. 그는 자연재해와 외부의 침입을 막을 수 있는 기능성이 있어야 좋은 건물이라고 주장한다. 러스킨이 「백합: 여왕들의 화원」에 언급한 ‘가정’은 기능성을 최대한 살린 건축의 의미와 일맥상통하다.

 

[주3] 유정화 옮김, 「백합: 여왕의 화원」, 121쪽

 

[주4] 김전유경 옮김, 《성 정치학》, 191쪽

 

[주5] 필자의 졸문 「에피 그레이의 재앙」을 참조하길 바란다.

 

[주6] 김전유경 옮김, 《성 정치학》, 190쪽

 

[주7] 《참깨와 백합 그리고 독서에 관하여》, 옮긴이의 말, 9쪽

 

 

 

 

 

난센스 퀴즈의 정답은 스킨헤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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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2-25 17:10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9-02-26 00:06   좋아요 0 | URL
급할 거 없습니다. 다음 달에 날씨가 좋아지니까 날 맞춰서 만나요. ^^

stella.K 2019-02-25 18: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ㅋㅋㅋ 설마! 넘 심했다.ㅎㅎㅎㅎㅎㅎ

cyrus 2019-02-26 00:09   좋아요 0 | URL
러스킨이요? ㅎㅎㅎㅎ 러스킨과 에피 그레이의 이혼 스캔들이 너무나 유명해서 러스킨과 로즈 라 투셰의 관계는 많이 알려져 있지 않아요. 러스킨과 같은 시대에 산 루이스 캐럴도 소녀 앨리스 리델을 좋아했어요.. ^^;;

AgalmA 2019-02-26 00:2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남성, 여성의 차이에 대해 결정론적 해석을 하는데 유전학이 어쩐지 기여를 하고 있는 것 같죠? 남성호르몬인 테스토스테론과 폭력성의 관계 등등.
대니얼 리처드슨이 <심리학자들이 알려주지 않는 마음의 비밀>에서 고찰했듯이 복잡한 상황은 모두 무시한 채 인물에 집중하는 ‘기질적 귀인 오류’ 인지작용도 있죠.
이런저런 사고 오류에 대해 말해도 안 들으려는 사람은 안 들으니ㅜㅜ;;

cyrus 2019-02-26 00:22   좋아요 1 | URL
유전학의 흑역사가 우생학이에요. <그들은 왜 극단적일까>라는 책을 쓴 저자의 표현을 빌리자면 몇몇 심리학자는 어용 학자입니다. 어용 학자는 특정 집단이 권력을 유지하는 데 유리한 이론을 강조하고, 자신들이 지지하는 특정 집단에 반하는 타 집단을 부정적으로 규정하는 이론을 만들어요. 가장 대표적인 사례가 미국의 행동주의 심리학자들입니다. 이들은 개인이 환경에 쉽게 영향을 받는다고 주장합니다. 그들의 주장에 따르면 개인은 주변 사람들의 반응에 쉽게 동조하게 되고, 집단 구성원이 되어 동질감을 느끼려고 하죠. 이게 더 발전되어 나온 이론이 ‘집단 극단화 이론’입니다. 사람들이 모이면 하나의 집단이 만들어지고, 집단의 폐쇄적인 환경으로 인해 개인의 의견은 무시되고, 집단을 대표하는 입장이 남게 됩니다. 이러한 집단은 자신들의 입장이 옳다고 믿기 때문에 타 집단의 입장을 무시합니다. 그런데 집단 극단화 이론의 단점은 동질감의 긍정적 기능을 무시하고 집단의 목소리를 부정적으로 보게 만듭니다. 예를 들면 임금 인상을 원하는 정당한 노조 파업은 집단 극단화 이론에 따르면 집단이기주의로 규정될 수 있는 거죠.

오늘 AgalmA님이 소개한 <심리학자들일 알려주지 않는...>을 보면서 심리학 이론을 무조건 받아들어선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들은 왜 극단적일까 - 사회심리학자의 눈으로 본 극단주의의 실체
김태형 지음 / 을유문화사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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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파냐 우파냐, 여당이냐 야당이냐, 성장이냐 분배냐, 문명이냐 야만이냐, 갑이냐 을이냐. 인간의 특성 중 가장 나쁘고 고질적인 것이 있다면 이분법적 사고방식이다. 그 사고 속에는 내 편은 무조건 선이고, 내 편이 아닌 타인이나 집단은 반드시 배척해야 할 악이라는 관념이 배어 있다. 모든 사고를 이분법적으로 하는 사람들에게는 이 세상에 ‘내 편’과 ‘내 편이 아닌 남(others)’이 존재한다. ‘내 편’은 무조건 맞고, ‘남’은 무조건 틀린다. 타자에 향한 혐오를 드러내는 이런 ‘편 가르기’ 프레임의 천박성은 익명성이 보장되는 인터넷에서 극에 달한다. 여성이나 난민에 대한 배타성은 가히 폭력적이라 할 만하다. 따라서 이들은 자신이 보기에 옳다고 확신하는 것에 과도하게 몰입하는 ‘극단주의’에 빠진다. 오랫동안 굳어진 이분법적 사고에서 시작된 극단주의는 인간관계를 해치면서 우리 사회 전체를 갈등과 대립으로 몰아넣는다.

 

우리는 곧잘 자신이나 주변의 누군가가 그 어느 한 편과 동일시되고 그 때문에 배척당하기 쉬운 ‘극단주의의 세상’ 속에 살고 있다. 사실 여부와 무관하게 일단 한번 그렇게 ‘찍히면’ 거의 속수무책이다. 지금 우리 삶의 주변을 둘러보면 거의 모든 장면에서 극단주의가 발견된다. 어디든 극단주의자나 극단적인 집단이 있다. 다만 자신과 다른 생각을 얼마나 강하게 배척하는지의 여부가 중요하다. 극단주의자들은 자신이 누구인가에 관한 확신이 없기 때문에 자기 생각과 일치하거나 ‘내 편’이라고 느껴지는 집단에 속하려고 한다. 내 편이 아닌 다른 사람들의 입장, 사정, 이익 등을 완전히 무시하고 그들을 비하하는 언어를 만들어 사용하면서 다른 사람들과 구별되는 자신들만의 동질감을 느끼려고 한다. ‘~노?(일베에서 시작한 말투)’, ‘젠신병자(트랜스젠더와 정신병자의 합성어로, 트랜스젠더를 비하하는 용어)’ 같은 혐오 발언이 대표적이다. 따라서 극단주의는 매우 편협하고 자기들과 다른 사람들에 대해 냉혹하게 배타적으로 된다.

 

그런데 극단주의는 ‘유유상종(類類相從)’만으로 설명이 가능한 현상인가. 동질감이 극단주의를 불러일으키는 주범인가. 동질감이나 소속감을 느끼고 싶어 하는 게 사람의 본질인데, 동질감을 무조건 나쁘다고만 말할 수는 없다. 사실 특정 집단 안에 공유하고 있는 동질감을 문제 삼으면서 그들을 극단주의라고 규정하는 논리는 극단주의의 정의를 오용했을 뿐만 아니라 그 집단의 실체를 왜곡한다. 《그들은 왜 극단적일까》가 화두로 삼은 출발점이 바로 극단주의를 명확하게 설명할 수 있는 현실적인 정의와 그것이 일어나는 다양한 배경에 대한 것이다.

 

저자에 따르면 극단주의는 배타성, 광신, 강요, 이 세 가지 경향으로 설명할 수 있다. 배타성은 이미 언급했다. 배타성은 자신과 자신이 속한 집단이 아닌 타자나 집단을 배척하는 경향이다. 광신은 객관적인 사실이나 진실을 무시하고 주관적인 믿음이나 망상에 집착하는 비이성적인 반응이다. 강요는 진실과 거리가 먼 헛된 생각을 타인에게 믿으라고 억지로 요구하는 태도이다. ‘가짜 뉴스(Fake News)’를 만들고 유포하는 것도 극단주의자가 할 수 있는 강요의 일종으로 볼 수 있다. 가짜 뉴스는 누구나 쉽게 이용하는 미디어 플랫폼에 ‘정식 기사’로 둔갑하여 나타난다. 감쪽같이 변장한 가짜 뉴스들은 사람들의 입맛에만 맞으면 쉽게 유포되어 확산한다. 개인의 감정과 신념이 객관적 사실의 자리를 대신하는 ‘탈진실 시대(post-truth)’는 극단주의가 자랄 수 있는 최적의 시대적 환경이다.

 

역사적으로 보면 가짜 뉴스는 역설적이게도 종교에 특히 많다. 과거 우리나라를 떠들썩하게 한 휴거 종말론은 사이비 종교가 만들어낸 대표적인 가짜 뉴스다. 종교와 극단주의는 서로 무관하다고 볼 수 없다. 일신교인 기독교와 이슬람은 다른 종교를 ‘이단’으로 규정하는 경향이 있다. 특히 기독교 ·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은 각각 성경과 꾸란의 무오류성을 고수하면서 자신들이 믿는 교리를 타인에게 강요한다. 극단주의자는 타인을 내 편으로 만들기 위해 자기 생각을 강요할 뿐만 아니라 양자택일해야 하는 상황까지 요구하기도 한다. 극단주의자는 자기 생각을 거부하는 타인을 증오한다.

 

극단주의를 분석한 미국의 심리학자들은 ‘유유상종’을 극단주의의 주요 원인으로 본다. 특히 캐스 R. 선스타인(Cass R. Sunstein)은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한 데 모여 폐쇄적인 의견을 나누게 되면 더 극단적인 입장이 나온다는 이른바 ‘집단 극단화 이론’을 주장한다. 그러나 《그들은 왜 극단적일까》는 선스타인을 비롯한 서구 학자들이 믿는 집단 극단화 이론의 한계를 지적한다. 집단 극단화 이론은 사회적 동물(social animal)인 인간으로서 가질 수 있는 동질감을 냉소적으로 보게 만들며 동질감을 공유하면서 구질서에 저항하는 ‘민중’을 억압하는 이론이 될 수 있다. 그래서 《그들은 왜 극단적일까》는 극단주의 자체뿐만 아니라 극단주의라는 용어를 이용하여 타인이나 집단을 억압하는 특정 세력을 비판한다. 그들은 자신들을 비판하는 성난 민심을 잠재우기 위해 ‘희생양’을 만들어 낸다. ‘희생양’에 ‘극단주의자’라는 딱지를 붙이면 민중의 분노는 ‘희생양’에 향한다. 그래서 일부 사람들은 사회에 대한 불만이나 분노를 권력층이 아닌 자신보다 약한 타인이나 집단에 표출한다.

 

《그들은 왜 극단적일까》는 사회심리학의 관점으로 극단주의를 분석한 책이다. 이 책에 극단주의로 설명할 수 있는 여러 가지 사례들이 나오지만, 그렇다고 이 책이 ‘극단주의의 모든 것’을 알려준다고 볼 수 없다. 분명 다른 의견이 나올 수 있다. 극단주의는 다각적이고 복합적인 원인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이다. 극단주의는 한 가지 원인이나 특징을 콕 집어 설명할 수 있을 만큼 단순하지 않다. 학제간 접근을 통한 극단주의 연구가 활성화되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극단주의는 평범하게 사는 일반인과 거리가 먼 남다른 사람들에게만 있는 특별한 반응이 아니다. 극단주의자는 누구나 될 수 있다. 사람이라면 완벽할 수는 없다. 이것은 옳고 저것은 그르다는 이분법적 사고, 하나의 기준을 가지고 사람 또는 전체를 판단하는 오만함, 내가 믿고 있는 지식이 옳다는 착각 등은 살아가면서 몇 번 이상은 인간이라면 다 빠질 수 있는 ‘생각의 함정’이다. 삶의 모든 순간 동안 현실 감각을 유지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래도 사람에게는 자기 생각이 맞는지 성찰하고, 타인의 생각에 대해 꼼꼼하게 따져보는 능력도 있다. 잘못된 사고방식을 원천봉쇄하고 살 수는 없지만 경계할 수 있다. 결국 ‘생각의 함정’에 몇 번씩 빠지더라도 탈출하려고 노력한다면 극단주의에 사로잡히지 않는다. ‘생각의 함정’에 너무 오래 갇혀 있는 사람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극단주의자가 될 가능성이 높다. 본인이 비이성적 믿음 속에서 허우적거리고 있는 것을 인식조차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 Trivia

 

 

* 데스먼 투투 성공회 대주교는 극단주의를 “다른 관점을 인정하지 않을 때, 자신의 견해를 대단히 배타적으로 고수할 때, 다를 수 있음을 용인하지 않을 때”라고 정의했다. (초판 1쇄, 26쪽)

 

→ ‘데스먼 투투’는 ‘데스먼드 투투(Desmond Tutu)의 오식으로 보인다.

 

 

 

* ‘광신(fanaticism)’의 어원은 로마어 ‘fanum’인데, 이 말은 ‘성스러운 장소 혹은 사원’을 의미한다. 현재에는 터키에 속하는 카파토키아 지역의 여신인 코마나가 로마로 수입되면서 벨로나라는 이름으로 바뀌었는데, 이 벨로나 여신을 추종하는 신도들이 사원에서 미친 사람들처럼 피투성이의 제의를 벌이는 것을 본 로마인들이 이들을 ‘광신도(fanatici, fanatic)’이라고 불렀다. (초판 1쇄, 60쪽)

 

 

→ 고대 로마인들이 사용한 언어는 ‘로마어’가 맞긴 하나 오늘날에는 주로 ‘라틴어’라는 이름으로 부른다. ‘카파토키아’는 ‘카파도키아(Cappadocia)의 오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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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19-02-24 18: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제 종로에는 대형 성조기와 이스라텔
깃발이 휘날리더군요.

어느 집회에서는 욱일승천기도 등장했
다고 하던데... 현실이 상상을 능가하는
시절이 되었네요.

포용의 정치가 아니라 혐오의 정치를
구사하는 이들의 종말이 보고 싶습니다.

cyrus 2019-02-25 15:48   좋아요 0 | URL
역시 서울의 집회 스케일은 상상초월이네요... ^^;;

2019-02-24 19:12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9-02-25 15:49   좋아요 1 | URL
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매니큐어 하는 남자 - 강남순의 철학에세이
강남순 지음 / 한길사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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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사회는 남성, 여성이라는 두 개의 범주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면 이상한 존재로 규정해버린다. 젠더(gender)는 외모와 행동을 통해 단박에 알 수 있다는 믿음이 이 사회에 널리 퍼져 있다. 이러한 믿음은 상대방과 관계를 맺는 과정에 큰 영향을 준다. 그래서 우리는 누군가를 보면 저 사람의 외모와 행동만으로 남자인지 여자인지 추정하거나 판단한다. 상대방의 젠더를 외모와 행동과 같은 외적인 단서로 추정하는 것을 ‘젠더 귀인(gender attribution)이라고 한다.[주1] 젠더 귀인에 의해 부여된 성 역할은 개개인을 속박하고 예외의 가능성을 사전에 차단한다.

 

젠더 이분법(gender binary)은 안정적이다. 견고하던 젠더 이분법에 파열음이 나기 전까지는 이러한 남녀 사이의 구분이 전통이었다. 하지만 세상에는 더 많은 젠더가 있으며 그 젠더마다 어떤 규범대로 살아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인간은 각각 부여된 고정된 성 역할에서 벗어나게 되며 새로운 성 정체성을 주체적으로 확립할 수 있다. 또 외모와 행동이 알려주는 정보, 그중에서 젠더 귀인과 관련한 정보는 그리 정확하지 않다. 상대방의 젠더가 모호하거나 젠더 이분법에 부합하지 않는 행동을 하여 ‘저 사람은 남자일까, 여자일까?’라는 반응을 드러내는 순간 젠더를 인식한다. 이를테면 손톱에 매니큐어를 한 남자를 만났다고 치자. 아마도 당신은 ‘저 사람, 남자 맞아?’라고 생각할 것이다. 물론 우리는 손톱에 매니큐어를 하지 않은 남자를 보고 남자인지 여자인지 판단하지 않는다. 우리는 남자가 매니큐어를 하지 않는 것을 당연하고 매우 자연스러운 사실로 여기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은 매니큐어 하는 남자를 게이라고 생각한다. 요즘에는 화장하는 남자들이 많아지고 있지만, 여전히 남자가 화장하는 것을 불편하게 보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게이들이 외모에 많이 신경을 써서 미용에 관심이 많다고 생각한다.

 

매니큐어 하는 남자는 실제 인물이다. 신학자 강남순의 강의를 들었던 학생이다. 그녀뿐만 아니라 강의실에 들어오는 학생들은 매니큐어 하는 남자를 이상하게 보지 않는다. 또 그 사람이 남자인지, 여자인지, 이성애자인지, 동성애자인지, 아니면 다른 어떤 젠더인지 판단하지 않는다. 사실 매니큐어 하는 남자를 ‘남자’라고 단정하기 어렵다. 젠더 귀인에 익숙해진 우리는 겉모습을 보고 남성으로, 매니큐어 하는 행위를 보고 여성으로 판단한다. 그런데 매니큐어 하는 남자는 자기 자신을 남성으로 인식할까? 이것은 본인만이 답할 수 있다. 그 사람은 자신을 여성으로 인식할 수도, 남성인 동시에 여성으로 인식할 수도, 자신을 남성도 여성도 아닌 에이젠더(Agender)로 인식할 수 있다.

 

강남순이 쓴 글의 제목이자 에세이집의 표제인 ‘매니큐어 하는 남자’는 젠더 이분법에 저항하는 ‘사람’을 의미한다. 그는 퀴어(queer)한 삶을 살아가는 인간이다. 견고한 젠더 이분법 구조 안에서 살아온 사람들은 그 구조 바깥에서의 삶을 상상하기란 쉽지 않다. 젠더 이분법은 너무 일상적인 차원에서 우리의 의식을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다. 젠더 이분법은 젠더에 대한 구분과 편견을 강화하고 다른 젠더의 정체성을 부정한다. 대상을 둘로 나누면 편하다. 이러한 간편하게 인식할 수 있기 때문에 젠더 이분법은 성소수자를 차별하거나 혐오하는 효과적인 선전 도구가 된다. 강남순의 말에 따르면 우리 사회에 가장 심각한 병은 ‘획일화된 존재 방식의 절대화’이다. 쉽게 말하면 시스젠더(cisgender)는 성별과 관련된 ‘획일화된 프레임’을 절대적으로 신봉한다. 시스젠더는 성별이 남성과 여성, 이 두 가지로 고정돼 변하지 않는다는 인식 속에서, 사람들은 태어남과 동시에 의사나 부모에 의해 하나의 성별을 지정받고 그것에 따른 겉모습, 성역할 등을 요구받으며 자란다. 그리고 젠더 이분법에 맞지 않는 사람들에게 겉모습이 어떤지, 성격이 남자/여자답지 못하다든지 등 여러 가지 간섭과 억압을 받는다. 이러한 억압이 강압적으로 반복되면 획일화된 젠더 이분법의 틀에 벗어난 퀴어를 향한 혐오와 증오 범죄가 일어난다.

 

저자는 성서의 구절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는 전통 신학의 맹목적인 해석을 비판한다. 그녀는 성서가 인간이 직면한 현실적인 문제에 적확한 답을 내릴 수 없다고 말하면서 ‘성서를 잘 읽는 방식’을 제시한다. 성서와 함께 생각하면서, 성서에 ‘저항(비판)’하는 독서 방식이다. 교회는 전통적 여성의 역할을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소명'이라고 말하면서 소명을 거부하는 불순종은 죄악의 근원이 된다고 가르친다. 그리고 여성과 성소수자들이 여성 해방과 성적 자기 결정권을 주장하면 창녀 · 죄인 · 이단으로 취급하여 배척한다. 보수적인 기독교는 신앙의 이름으로 ‘물음표를 박탈하는 종교’[주2]이다. 우리나라 기독교가 가진 가장 큰 문제이다. 차별과 혐오를 묵인하고 비판을 허용하지 않는 우리나라 기독교는 사회와 단절된 채, 자신들만의 성서에 갇힌 종교가 되었다.

 

누구나 ‘연대’라는 말을 좋아한다. 그러나 알고 보면 ‘연대’는 참으로 어렵고 현실적으로 와 닿지 않는 말이다. 특정 집단이나 상대방을 지지하면서 ‘연대’를 누누이 외치지만,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들을 차별할 수 있고 차별을 묵인할 수도 있다. 페미니스트든 진보주의자이든 누구나 ‘인식론적 사각지대’[주3]에 빠진다. 그러나 연대가 불가능하다고 해서, 그리고 언젠가는 ‘인식론적 사각지대’라는 함정에 여러 차례 빠질 수 있다고 해서 살아있는 한 지속적인 사유를 멈출 수 없다. 주디스 버틀러(Judith Butler)《젠더 트러블》 서문에 ‘살기 위한 욕망, 삶이 가능해지도록 만들려는 욕망, 그 가능성을 다시 생각해보려는 욕망’에 의해 책을 썼다고 밝혔다. 인간이라면 각자 자신이 생각하는 ‘좋은 삶’을 살기 위한 욕망이 있다. 이 기본적인 욕망이 없는 인간은 ‘좋은 삶’이 무엇인지 사유하지 않게 된다. 그는 살아 있어도 죽은 존재이다. 나를 둘러싼 이 세상에 무엇이 문제인지, 더 나아가 좋은 삶을 살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하며, 누구와 함께 연대해야하는지 생각하는 것은 제대로 살고자 하는 욕망이다. 《매니큐어 하는 남자》는 독자의 마음속에 잠들어 있는 욕망을 깨운다.

 

 

 

 

 

 

 

 

[주1] 케이트 본스타인, 조은혜 옮김, 《젠더 무법자》, 바다출판사, 54~56쪽, 2015.

 

[주2] 강남순, 「아담과 하와는 몇 살이었을까」, 《매니큐어 하는 남자》, 한길사, 212쪽, 2018.

 

[주3] 강남순, 「유아인은 페미니스트인가」, 《매니큐어 하는 남자》, 한길사, 136쪽,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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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nsient-guest 2019-02-23 03:3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성서지상주의, 문자지상주의, 특히 절대적으로 구약에 기대는 문제는 비단 LGBTQ에 대한 자세를 넘어 한국개신교의 고질적인 문제라고 봅니다. 포교/선교/헌금활동/교리/강론을 들어보면 구약을 근거해서 나오는 것이 많고 신약은 곁다리 같이 보일 때가 많이 있습니다. 신약은 용서와 관용이 주된 내용이지만 구약은 아전인수로 갖다 붙일 것들도 많고 흑백을 나누는 성향이 있어 그런지도 모르겠습니다.

cyrus 2019-02-24 16:20   좋아요 1 | URL
대부분 사람은 성서를 고전으로 분류합니다. 그런데 성서를 비판적으로 읽지 못하게 한다면 성서가 고전으로서 자격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해요.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나쓰메 소세키(夏目漱石)해로행(薤露行)토머스 맬러리(Thomas Malory)아서왕의 죽음을 각색한 단편소설이다. 5개의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다.

 

 

 

 

 

 

 

 

 

 

 

 

 

 

 

 

 

 

 

 

* 나쓰메 소세키, 박현석 옮김, 나쓰메 소세키 단편소설 전집(현인, 2018)

* 나쓰메 소세키, 노재명 옮김, 런던 소식(하늘연못, 2010)

    

 

 

 

 

 

 

 

 

 

 

 

 

 

 

 

 

 

 

 

 

 

 

 

 

 

 

 

 

 

 

 

 

 

* 토머스 맬러리, 아서 왕의 죽음(나남출판, 2009)

* [절판] 토머스 불핀치, 아서 왕과 원탁의 기사(황금가지, 2004)

* [절판] 토머스 불핀치, 아서 왕과 원탁의 기사들(현대지성사, 1998)

 

 

 

 

아서왕의 죽음은 아서왕(King Arthur)의 일대기와 원탁의 기사들에 대해 쓴 장편 산문이다. 이 작품은 중세 유럽의 문학과 예술에서 가장 중요한 주제 중 하나로 다루어져 왔다. 그리스 로마 신화를 집대성한 토머스 불핀치(Thomas Bulfinch)는 여러 판본으로 전해져온 아서왕 전설을 추려 엮어 펴냈는데, 국내에선 아서왕과 원탁의 기사들(The Age of Chivalry, or Legends of King Arthur)이라는 제목으로 알려져 있다.

 

 

 

 

 

 

 

 

 

 

 

 

 

 

 

 

 

 

 

 

 

 

 

 

 

 

 

 

 

 

 

 

 

 

 

 

 

 

 

 

 

 

 

 

 

 

 

 

 

* [e-Book] 앨프레드 테니슨, 김천봉 옮김, 율리시스: 테니슨 시선(글과글사이, 2017)

* [e-Book] 앨프레드 테니슨, 테니슨 시선(지만지, 2015)

* [품절] 앨프레드 테니슨, 테니슨 시선(지만지, 2011)

* [절판] 김천봉 엮음, 빅토리아 여왕 시대 1: 19세기 영국 명시(이담북스, 2011)

* 앨프레드 테니슨, 눈물이, 부질없는 눈물이(민음사, 1975)

 

 

 

 

영국의 시인 앨프레드 테니슨(Alfred Tennyson)22년에 걸쳐 아서왕 전설을 주제로 한 장편 서사시 국왕 목가(The Idylls of the King)를 썼다. 이 작품의 분량이 방대해서 국내에 완역된 적은 없다. 소세키는 테니슨의 장편 서사시를 칭송하면서 해로행을 쓰는 데 많은 도움을 받았다고 언급한다. 해로행의 두 번째 이야기 제목은 거울인데 샬럿의 여인(The Lady of Shalott)에 대한 내용이다. 테니슨은 맬러리의 아서왕의 죽음에 나오는 랜슬롯(Launcelot)과 일레인(Elaine) 이야기를 바탕으로 샬럿의 여인이라는 시를 썼다. (눈물이, 부질없는 눈물샬럿의 여인이 수록되지 않은 테니슨의 시 선집이다)

 

랜슬롯은 원탁의 기사 중 한 명으로 그가 아서왕 전설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높다. 일레인은 랜슬롯에 한눈에 반해 짝사랑하는 영주의 딸이다. 테니슨은 일레인의 비극적인 사랑을 더욱 강조하기 위해 그녀를 저주받은 여성으로 설정했다. 테니슨이 묘사한 일레인은 혼자 샬럿 섬의 성에 지내면서 직물을 짜야 하는 저주에 걸려 있다. 그녀는 성 밖에 나가지 못한다. 방 안에 있는 거울에 비쳐진 바깥 세계의 풍경(거울의 특성을 생각하면 거울 속 세상은 실재가 아니라 환영이다)을 보면서 산다. 거울은 일레인이 사는 성 근처를 지나가는 랜슬롯의 모습을 보여준다. 일레인은 거울 속에 나타난 랜슬롯을 보자마자 사랑에 빠진다. 그 후로 그녀는 랜슬롯이 자신의 성 앞을 지나가기를 애타게 기다린다. 일레인은 거울의 환영을 계속 봐야하는 자신의 처량한 신세에 불만을 가진다. 결국 그녀는 저주를 무시하고, 랜슬롯을 좀 더 가까이 보기 위해 창밖으로 고개를 내민다. 그 순간 저주가 깨지면서 거울은 산산조각이 나고, 그녀가 짜고 있던 직물은 풀어진다. 일레인의 저주가 깨지는 극적인 순간과 그녀가 랜슬롯을 찾기 위해 홀로 방황하다가 쓸쓸히 최후를 맞는 장면은 중세 문화에 심취한 라파엘전파(Pre-Raphaelite Brotherhood) 화가들이 즐겨 그린 주제였다.

 

해로행런던 소식(하늘연못)나쓰메 소세키 단편소설 전집(현인)에 수록되어 있다. 전자의 책을 번역한 노재명 씨는 고인이다. 그러나 고인이라고 해서 그의 번역에 대한 비판의 칼날을 거둬선 안 된다고 생각한다. 노재명 씨의 번역에 대해 따지기 전에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는 해로행북망행으로 바꾼 점이다. 노재명 씨는 제목을 바꾼 이유를 언급하지 않았다.

 

나는 일문학을 전공하지 않았으며 일본어를 쓰고 말할 줄 모른다. 번역해본 적도 없다. 네이버 일본어 사전과 구글 번역기를 이용하면서 오역으로 의심되는 문장 하나하나 검토했다. 일어를 독해하고 이것을 우리말로 번역하는 능력이 없어서 해로행』 '거울' 편만 검토했지만, 생각보다 오역이 많았다. 이건 정말 심각하다. 나를 포함한 수많은 독자는 엉터리로 번역된 나쓰메 소세키의 단편소설을 읽었기 때문이다. 나는 이번에 번역을 검토하면서 하늘연못 판본의 별점을 네 개에서 두 개로 변경했다.

 

오역인지 아닌지 판단이 잘 서지 않는 문장에 대해선 의견을 피력하지 않았다. 일본어와 번역 비전공자인 내가 의견을 밝히면 주제넘은 짓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 대신 원문과 두 가지 번역본의 문장을 한 눈에 비교할 수 있게 써놨다.

 

 

 

 

 

* 해로행원문 출처: http://www.natsumesoseki.com/home/cairoko

      

 

 

 

 

 テニソンのアイジルス優麗都雅において古今雄篇たるのみならず性格描写においても十九世紀人間古代舞台おどらせるようなかきぶりであるからかかる短篇するにはおおいに参考すべき長詩であるはいうまでもない

 

 

テニソンの: 알프레드 테니슨(1809~1892, 영국의 시인).

古今雄篇: 고금의 웅편. 

 

* 하늘연못

  테니슨의 <아이딜스>[원주]는 유려한 문장이 돋보이는 위대한 작품이다. 뿐만 아니라 성격 묘사에 있어서도 19세기 인간을 고대라는 무대에 되살려 낸 작품이다. 이 소설을 쓰는 데 테니슨의 장시(長詩)에서 많은 도움을 받았다.

 

[원주] The Idylls of the King의 약칭. 목가적인 서사시. 아서 왕과 그 기사들이 중심이다. 

 

* 현인 (387~388)

  테니슨의 아이지루스[역주]는 우아하고 아름다우며 고상하다는 점에서 고금의 웅편(雄篇)일 뿐만 아니라, 성격의 묘사에 있어서도 19세기 사람을 고대의 무대에서 뛰어놀게 한 듯한 필치이기에 이 단편을 집필하는 데 커다란 참고로 삼아야 할 장시(長詩)임은 말할 필요도 없다.

 

[역주] 테니슨의 샬럿의 아가씨(The Lady of Shalott)를 말하는 것이라 여겨진다.

 

 

 

 

 

 

 

2 

 

 

 あるときはかしらよりただ一枚わるる真白上衣うわぎかぶりて眼口手足しかとちかねたるがけたたましげにかねらしてぎるもゆるこれはらいをやむ前世ごうをみずからぐるむご仕打ちなりとシャロットのるすべもあらぬ

 

 

けたたまし: 요란한

:

: 나환자

前世: 전세의 업

: 세상에 알리는

むご: 잔혹한

シャロットの: 샬럿의 여자

      

* 하늘연못

  또 어느 때에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윗도리 하나만 걸친 사람이 나타난다. 도무지 몸은 어디 있는지 알 수 없는 형체가 거울에 비친다. 이 사람은 전생에 나병이라도 앓은 사람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 현인 (396)

  또 어떨 때는 머리부터 단 한 겹이라 여겨지는 새하얀 상의를 뒤집어쓰고 눈과 입도 손과 발도 분명히도 알아볼 수 없지만 요란하게 징을 울리며 가는 모습도 보였다. 이는 문둥병 환자가 전세의 업을 스스로 세상에 알리는 잔혹한 행동이라는 사실을 샬럿의 여자는 알 길이 없었다.

 

 

하늘연못 판본에 요란하게 징을 울리며 가는 모습도 보였다(원문에 밑줄 친 구절)라는 구절이 없다. 현인 판본에 문둥병 환자라는 표현이 나오는데, 나병 환자를 낮잡아 부르는 말이다. 문둥병 환자’, ‘문둥이는 나병 환자를 비하하는 혐오 단어이므로 번역할 때 이러한 표현을 써선 안 된다.

 

 

 

 

 

 

3

 

 旅商人たびあきゅうどのせにえるつつみのにはきリボンのあるか下着のあるか珊瑚さんご瑪瑙めのう水晶真珠のあるかめるらさねばにあるものはにはらず

 

 

旅商人: 떠돌이 장사꾼

きリボン: 붉은 리본

下着: 하얀 속옷

 

      

* 하늘연못

  상인들의 등짐 속에 들어 있는 것은 무엇일까? 흰 의복이라도 들어 있을까? 산호, 마노(瑪瑙), 수정, 진주라도 들어 있는가? 포장 속에 있는 것들은 거울에 비치지 않는다.

      

* 현인 (396)

떠돌이 장사꾼들이 등에 짊어진 보따리 속에는 빨간 리본이 있는지, 하얀 속옷이 있는지, 산호, 마노, 수정, 진주가 있는지, 보따리 안을 비추지 않으면 안에 들어 있는 물건도 거울에는 비치지 않았다.

 

 

 

하늘연못 판본에 원문의 빨간 리본(きリボン)이 빠져 있고, 노재명 씨는 햐안 속옷(下着)흰 의복으로 번역했다.

 

 

 

    

 

 

 

4

 

 シャロットのるは不断はたであるむらの萌草もえぐさのれる釣鐘めるるときはのいつくべしともえぬほどのであるうなのうねりなみのかすときは底知れぬさを一枚きにあるときはじにゆるほのおのにて十字架濁世じょくせにはびこる罪障すきまなく天下いて十字れる経緯たてよこのにもるとしくのみははたをれてばんとす

 

 

不断: 평소(=독특하지 않은), 끊임없음(계속하거나 이어져 있던 것이 끊이지 아니하다)

: 꽃 그림자

うな(海原, うなばら): 넓고 넓은 바다

うねり: 파도

: ~(), ~처럼(동작 · 상태 따위를 나타내는 데 씀)

濁世: 더러운 세상

罪障: 죄장. 성불의 장애가 되는 죄업 

 

* 하늘연못

  샤롯 여인이 짜는 그림은 독특한 것이 아니다. 풀밭을 배경으로 종() 모양의 꽃을 짤 때는 꽃 그림자가 지금이라도 당장 솟아나올 것처럼 보인다. 짙은 꽃이다. 넓은 들판을 배경으로 ()과 지는 꽃을 수놓을 때도 있다. 어느 때는 검은 대지를 배경으로, 타오르는 불꽃같은 십자가를 만든다. 그 순간 그림 속의 불꽃들은 그림을 떠나서 공중으로 날아오를 듯하다 

 

* 현인 (399~400)

  샬럿의 여자가 짜는 것은 끊임없이 이어지는 비단이었다. 수풀에 새로 돋은 풀이 무성하게 우거진 바탕에 초롱꽃이 잠겨있는 모습을 짤 때는 꽃이 언제 떠오를지도 모를 만큼 짙은 색이었다. 널따란 바다의 파도 속으로 눈처럼 떨어지는 물결의 꽃을 새길 때는 끝을 알 수 없는 깊이를 한 겹 얇은 천에 새겼다. 어떨 때는 검은 바탕에 타오르는 불꽃과 같은 색으로 십자를 새겼다. 더러운 세상에 만연한 죄업(罪業)의 바람은 온 천하에 불어, 십자를 짜는 날줄과 씨줄 사이에도 들어가는 듯, 불꽃만은 비단에서 나와 치솟으려 했다.

 

 

 

원문의 不断은 여러 가지 의미를 가진 단어이다. ‘항상’, ‘평소’, ‘끊임없음등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인용한 문장을 보면 샬럿의 여인이 직물로 짠 그림에 묘사된 대상들은 하나같이 역동적이다. 이런 그림이 독특한 것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그리고 노재명 씨는 원문의 넓고 넓은 바다의 파도(うなのうねり)넓은 들판으로 번역했는데 명백한 오역이다.

 

 

 

 

 

   

5

 

 まことの横縦くぐらせばせてげるマリヤの姿となるいをたてにりをよこにあられふる木枯こがらしせば荒野ひげリア面影ずかしきくれないとめしき鉄色をよりせてはうてえたるむべく温和おとなしきがれるかわるがわるにめばわれし乙女おとめのわれはがおにぶれるさまをたもとくにまつわるえぬねがいれなるべし

 

 

, あられ: 싸라기눈(빗방울이 얼어 떨어지는 쌀알 같은 눈)

木枯(), こがらし: 초겨울(늦가을)의 찬바람

: 밝은

リア: 리어 왕

: 만나다

: 길다

, たもと: 소맷자락

まつわる: 휘감긴

いえぬ: 말할 수 없는

, ねがい: 소망

: 어지러운

      

* 하늘연못

  사랑의 실()과 정성의 실을 종횡으로 연결하면, 두 손을 어깨에 올려놓고 하늘을 향한 마리아의 모습이 된다. 광기와 분노를 섞어 고목을 만들면 그 모습은 흰 수염의 리어(King Lear)가 된다. 부끄러운 붉은색과 한 맺힌 회색을 섞으면 떠나간 사람의 마음까지 읽을 수 있다. 또 온화한 황색과 기운찬 자색을 섞으면 마귀에 홀린 여인의 흥분된 얼굴이 나타난다. 이렇듯 그녀의 베틀에는 구름에 휘감긴 사람들의 소원이 어지럽게 뒤섞여 있다.

      

* 현인 (400)

  사랑의 실과 정성의 실을 가로와 세로로 물레의 북을 지나게 하면 손을 어깨에 엇갈려 얹고 하늘을 올려다보는 마리아의 모습이 되었다. 광기를 종으로 분노를 횡으로, 진눈깨비 날리며 삭풍이 부는 밤을 베틀 앞에서 밝히면, 황야에서 흰 수염을 흩날리는 리어의 모습이 나타났다. 부끄러운 주홍과 원망스러운 쇳빛을 한데 모아 간절히 만남을 기다리는 사람의 마음을 읽어낸 듯했으며, 온화한 노랑과 흥분한 보라를 차례로 짜면 마법에 걸린 아가씨가 자신의 얼굴에 감동한 모습이 나타났다. 기다란 자락에 구름처럼 휘감긴 것은, 다른 사람에게는 말할 수 없는 소망의 실이 헝클어진 모습이었다.

 

 

 

원문의 木枯고목이 아니라 목고로 읽는다. 마를 고이다. 리어 왕은 당신이 생각하는 그 사람이 맞다. 셰익스피어의 희곡에 나오는 주인공이다. 싸라기눈(あられ)은 빗방울이 찬바람으로 만나 얼은 상태에서 내리는 눈을 뜻한다. 싸라기눈과 진눈깨비는 다르다. 진눈깨비는 비가 섞여 내리는 눈이다[출처].

 

[출처] <카드뉴스> 가루눈보다 굵고 함박눈보다 가는 것은? (뉴스웨이, 2018113) http://www.newsway.co.kr/news/view?tp=1&ud=2018011217351479073

 

 

 

 

 

 

 

6 

 

     

うつせみの

うつつめば

みうからまし

むかしも

うつくしき

うつす

やうつろう

なに

 

 

うつせみ: 이승, 이 세상

うつつ: 제 정신

      

 

* 하늘연못

허망한 세상을

혼미하게 살면

살기 힘들다네

옛날도 지금도

아름다운 사랑이

비치는 거울에

색이 비치리라

아침 저녁마다

      

* 현인 (401)

이 세상을,

맑은 정신으로 살면

살기 괴로울 테지,

예나 지금이나.

아름다운 사랑,

비치는 거울에

색이 비치네,

아침저녁으로.

 

 

노재명 씨는 원문에 없는 허망한이라는 표현을 썼다.

 

 

 

 

 

 

 

7 

 

   

らしてすえる

 

すえる: 응시하다, 눈여겨보다

      

* 하늘연못

여인은 순간 숨을 몰아쉰다. 눈을 감는다. 

 

* 현인 (402)

여자는 숨을 멈추고 눈을 고정시켰다.

 

 

 

すえる(응시하다)눈을 감는다로 번역하다니…‥.

 

 

 

 

 

   

8

 

 

 このシャロットのサー・ランスロットんでそばにかけってあおきいだすとはきに地震くにける

ぴちりとがして々こうこうたる真二つにれるれたるおもてはびぴちぴちとくがこな微塵みじんになってしつの七巻ななまき八巻やまきりかけたる布帛きぬはふつふつとれてなきに鉄片はほつれ千切ちぎれもつれてつち蜘蛛ぐものくにシャロットの髪毛にまつわる。「シャロットのすものはランスロットランスロットをすものはシャロットのわが末期まつごののろいをうてかたへ両手げてちたる野分のわきをけたる五色あざむく砕片るる[革堂][cyrus ]どうとたおれる

 

[cyrus ] 원문에는 (가죽 혁)+(집 당)이 합쳐진 한자(‘이 부수인 한자)로 표기되어 있음. 네이버 한자사전, 일어사전에도 등록되지 않은 한자라 뜻과 음은 모르겠음 

 

 

サー: ()

ランスロット: 랜슬롯

きに地震: 멀어져 가는 지진

: 지나가다, 달리다

 

       

* 하늘연못

  그때 샤롯의 여인은 다시 소리친다. “랜슬롯 경!” 여인은 창문 쪽으로 몸을 돌려 놀란 얼굴을 세상 속으로 반이나 내민다. 사람과 말이 하나가 된 물체는 높은 저택 아래를 그냥 지나쳐간다.

      

* 현인 (402~403)

  이때 샬럿의 여자가 다시 랜슬롯 경.”하고 외치며 홀연 창 옆으로 달려가 창백한 얼굴을 세상 속으로 반쯤 내밀었다. 사람과 말은 높다란 전각 아래를 멀어져가는 지진처럼 달려 나갔다.

  쩍, 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교교하던 거울이 갑자기 한가운데서 2개로 갈라졌다. 갈라진 표면이 다시 쩍쩍 얼음이 갈라지듯 산산조각 나서 방 안으로 튀었다. 일곱 두루마리, 여덟 두루마리, 짜던 비단이 갈가리 찢어져 바람도 없는데 철조각과 함께 날아올랐다. 붉은 실, 초록 실, 노란 실, 보라색 실은 흐트러지고 끊어지고 풀리고 엉켜 땅거미가 친 그물처럼 샬럿의 여자의 얼굴에, 손에, 소매에, 기다란 머리카락에 휘감겼다. “샬럿의 여자를 죽이는 것은 랜슬롯. 랜슬롯을 죽이는 것은 샬럿의 여자. 내 마지막 저주를 짊어지고 북쪽으로 달려라.”라며 여자는 두 손을 높이 하늘로 올리고 썩은 나무가 태풍을 맞을 때처럼 오색실과 얼음과도 같은 파편이 어지러운 가운데로 털썩 쓰러졌다.

      

 

노재명 씨는 해로행의 결말에 해당하는 문장을 번역하지 않았다. 여담이지만, 해로행거울편과 테니슨의 시 샬럿의 여인의 결말은 다르다.

 

 

 

 

 

 

 

 

 

 

 

 

 

 

 

 

 

  

* [품절] 에드거 앨런 포, 우울과 몽상(하늘연못, 2002)

 

 

지금은 절판되어 사라졌지만, 하늘연못 출판사하면 반드시 언급되는 최악의 번역본이 있었다. 그 책이 바로 에드거 앨런 포(Edgar Allan Poe)의 단편소설들을 수록한 우울과 몽상이다. 그 책에 엉터리 번역문이 많았지만, 가장 최악의 오역은 진자와 함정의 결말 마지막 문장이 누락된 것이다. 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필자의 졸문을 참고하시라[출처].

      

[출처] 책을 던져버리고 싶은 마음, 알 것 같습니다(20151214)

http://blog.aladin.co.kr/haesung/8052770

 

 

 

 

 

 

+1

 

 

 

 

 

 

 

 

 

 

 

 

 

 

 

 

* 팀 베린저 라파엘 전파(예경, 2002)

 

 

 

이왕에 이렇게 된 거 오역 사례 하나 더 언급한다. 예경 출판사라파엘 전파160‘The Lady of Shalott’샬롯 양으로 번역했다. 샬럿은 여인의 이름이 아니라 섬 이름이다. 이 섬에 있는 성에 저주받은 여인이 산다고 해서 샬롯의 여인으로 알려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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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2-18 17:13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9-02-18 18:14   좋아요 0 | URL
지난달에 나쓰메 소세키의 소설을 읽기 시작하면서부터 독서 일정이 꼬였어요. 토요일 새벽에 번역문 대조 작업을 했어요. 이거 하느라 오늘 페미니즘 독서모임을 위해 읽어야 할 책을 읽지 못했어요. 제가 다른 책을 보느라 독서모임 책을 안 읽은 것도 있었지만, 괜한 작업 때문에 힘을 너무 많이 소모했습니다... ^^;;

syo 2019-02-18 17: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렸다...... 역시 당신은....bbbb

cyrus 2019-02-18 18:15   좋아요 0 | URL
일문학 전공자가 나쓰메 소세키의 단편소설을 다시 읽어보라고 말씀하셔서 읽어봤는데 정말 노재명 씨의 번역에 문제가 많았어요. 대조하면서 글 쓸 때 정말 짜증이 났어요... ㅎㅎㅎ

oren 2019-02-18 18:3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일본어도 공부하시지 않으셨는데, 정말 꼼꼼히 비교하셨네요. 고생 많았습니다.
그런데 이 글의 제목과 본문에서도 간혹 잘못 입력된 이름들이 보입니다. ㅎㅎ
(나쓰메 소메키, 캐슬롯)
책에서든 블로그에서든 오탈자들은 그나마 애교로 봐줄 수도 있지만,
판매중인 책에서 발견되는 엉터리 번역은 정말 끔찍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cyrus 2019-02-19 15:13   좋아요 1 | URL
오자를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지난 주말 새벽에 글을 써서 그런지 실수가 많네요. 이 때 정말 힘들었어요... ^^;;

카알벨루치 2019-02-18 19: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진짜 시루스박사!!!!🔥🔥🔥

cyrus 2019-02-19 15:14   좋아요 0 | URL
저는 아마추어입니다.. ^^

transient-guest 2019-02-23 02:3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우울과 몽상‘은 여러 모로 많이 아쉽고 덕분에 최근에 나온 전집을 다시 구매했지요. 번역이 어려운 것도 이해하고 운문/산문을 가져오는 것도 쉽지 않다고 생각합니다만, 제가 가장 아쉽게 생각하는 번역문제는 결국 불성실한 editor가 아닌가 싶습니다. 그야말로 모든 오역/오탈자 등에 대한 최후의 방어선이 editor라고 생각하는데 종종 이런 건 좀 편집하면서 걸러낼 수 있었을텐데 하는 생각을 합니다.

cyrus 2019-02-24 16:26   좋아요 1 | URL
맞습니다. 역자가 번역하면서 잘못 쓴 단어라든가 인쇄 중에 발생한 오식은 편집자가 확인해야 합니다.

2019-02-25 10: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2-25 16:0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2-25 18:04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