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은 왜 극단적일까 - 사회심리학자의 눈으로 본 극단주의의 실체
김태형 지음 / 을유문화사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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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파냐 우파냐, 여당이냐 야당이냐, 성장이냐 분배냐, 문명이냐 야만이냐, 갑이냐 을이냐. 인간의 특성 중 가장 나쁘고 고질적인 것이 있다면 이분법적 사고방식이다. 그 사고 속에는 내 편은 무조건 선이고, 내 편이 아닌 타인이나 집단은 반드시 배척해야 할 악이라는 관념이 배어 있다. 모든 사고를 이분법적으로 하는 사람들에게는 이 세상에 ‘내 편’과 ‘내 편이 아닌 남(others)’이 존재한다. ‘내 편’은 무조건 맞고, ‘남’은 무조건 틀린다. 타자에 향한 혐오를 드러내는 이런 ‘편 가르기’ 프레임의 천박성은 익명성이 보장되는 인터넷에서 극에 달한다. 여성이나 난민에 대한 배타성은 가히 폭력적이라 할 만하다. 따라서 이들은 자신이 보기에 옳다고 확신하는 것에 과도하게 몰입하는 ‘극단주의’에 빠진다. 오랫동안 굳어진 이분법적 사고에서 시작된 극단주의는 인간관계를 해치면서 우리 사회 전체를 갈등과 대립으로 몰아넣는다.

 

우리는 곧잘 자신이나 주변의 누군가가 그 어느 한 편과 동일시되고 그 때문에 배척당하기 쉬운 ‘극단주의의 세상’ 속에 살고 있다. 사실 여부와 무관하게 일단 한번 그렇게 ‘찍히면’ 거의 속수무책이다. 지금 우리 삶의 주변을 둘러보면 거의 모든 장면에서 극단주의가 발견된다. 어디든 극단주의자나 극단적인 집단이 있다. 다만 자신과 다른 생각을 얼마나 강하게 배척하는지의 여부가 중요하다. 극단주의자들은 자신이 누구인가에 관한 확신이 없기 때문에 자기 생각과 일치하거나 ‘내 편’이라고 느껴지는 집단에 속하려고 한다. 내 편이 아닌 다른 사람들의 입장, 사정, 이익 등을 완전히 무시하고 그들을 비하하는 언어를 만들어 사용하면서 다른 사람들과 구별되는 자신들만의 동질감을 느끼려고 한다. ‘~노?(일베에서 시작한 말투)’, ‘젠신병자(트랜스젠더와 정신병자의 합성어로, 트랜스젠더를 비하하는 용어)’ 같은 혐오 발언이 대표적이다. 따라서 극단주의는 매우 편협하고 자기들과 다른 사람들에 대해 냉혹하게 배타적으로 된다.

 

그런데 극단주의는 ‘유유상종(類類相從)’만으로 설명이 가능한 현상인가. 동질감이 극단주의를 불러일으키는 주범인가. 동질감이나 소속감을 느끼고 싶어 하는 게 사람의 본질인데, 동질감을 무조건 나쁘다고만 말할 수는 없다. 사실 특정 집단 안에 공유하고 있는 동질감을 문제 삼으면서 그들을 극단주의라고 규정하는 논리는 극단주의의 정의를 오용했을 뿐만 아니라 그 집단의 실체를 왜곡한다. 《그들은 왜 극단적일까》가 화두로 삼은 출발점이 바로 극단주의를 명확하게 설명할 수 있는 현실적인 정의와 그것이 일어나는 다양한 배경에 대한 것이다.

 

저자에 따르면 극단주의는 배타성, 광신, 강요, 이 세 가지 경향으로 설명할 수 있다. 배타성은 이미 언급했다. 배타성은 자신과 자신이 속한 집단이 아닌 타자나 집단을 배척하는 경향이다. 광신은 객관적인 사실이나 진실을 무시하고 주관적인 믿음이나 망상에 집착하는 비이성적인 반응이다. 강요는 진실과 거리가 먼 헛된 생각을 타인에게 믿으라고 억지로 요구하는 태도이다. ‘가짜 뉴스(Fake News)’를 만들고 유포하는 것도 극단주의자가 할 수 있는 강요의 일종으로 볼 수 있다. 가짜 뉴스는 누구나 쉽게 이용하는 미디어 플랫폼에 ‘정식 기사’로 둔갑하여 나타난다. 감쪽같이 변장한 가짜 뉴스들은 사람들의 입맛에만 맞으면 쉽게 유포되어 확산한다. 개인의 감정과 신념이 객관적 사실의 자리를 대신하는 ‘탈진실 시대(post-truth)’는 극단주의가 자랄 수 있는 최적의 시대적 환경이다.

 

역사적으로 보면 가짜 뉴스는 역설적이게도 종교에 특히 많다. 과거 우리나라를 떠들썩하게 한 휴거 종말론은 사이비 종교가 만들어낸 대표적인 가짜 뉴스다. 종교와 극단주의는 서로 무관하다고 볼 수 없다. 일신교인 기독교와 이슬람은 다른 종교를 ‘이단’으로 규정하는 경향이 있다. 특히 기독교 ·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은 각각 성경과 꾸란의 무오류성을 고수하면서 자신들이 믿는 교리를 타인에게 강요한다. 극단주의자는 타인을 내 편으로 만들기 위해 자기 생각을 강요할 뿐만 아니라 양자택일해야 하는 상황까지 요구하기도 한다. 극단주의자는 자기 생각을 거부하는 타인을 증오한다.

 

극단주의를 분석한 미국의 심리학자들은 ‘유유상종’을 극단주의의 주요 원인으로 본다. 특히 캐스 R. 선스타인(Cass R. Sunstein)은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한 데 모여 폐쇄적인 의견을 나누게 되면 더 극단적인 입장이 나온다는 이른바 ‘집단 극단화 이론’을 주장한다. 그러나 《그들은 왜 극단적일까》는 선스타인을 비롯한 서구 학자들이 믿는 집단 극단화 이론의 한계를 지적한다. 집단 극단화 이론은 사회적 동물(social animal)인 인간으로서 가질 수 있는 동질감을 냉소적으로 보게 만들며 동질감을 공유하면서 구질서에 저항하는 ‘민중’을 억압하는 이론이 될 수 있다. 그래서 《그들은 왜 극단적일까》는 극단주의 자체뿐만 아니라 극단주의라는 용어를 이용하여 타인이나 집단을 억압하는 특정 세력을 비판한다. 그들은 자신들을 비판하는 성난 민심을 잠재우기 위해 ‘희생양’을 만들어 낸다. ‘희생양’에 ‘극단주의자’라는 딱지를 붙이면 민중의 분노는 ‘희생양’에 향한다. 그래서 일부 사람들은 사회에 대한 불만이나 분노를 권력층이 아닌 자신보다 약한 타인이나 집단에 표출한다.

 

《그들은 왜 극단적일까》는 사회심리학의 관점으로 극단주의를 분석한 책이다. 이 책에 극단주의로 설명할 수 있는 여러 가지 사례들이 나오지만, 그렇다고 이 책이 ‘극단주의의 모든 것’을 알려준다고 볼 수 없다. 분명 다른 의견이 나올 수 있다. 극단주의는 다각적이고 복합적인 원인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이다. 극단주의는 한 가지 원인이나 특징을 콕 집어 설명할 수 있을 만큼 단순하지 않다. 학제간 접근을 통한 극단주의 연구가 활성화되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극단주의는 평범하게 사는 일반인과 거리가 먼 남다른 사람들에게만 있는 특별한 반응이 아니다. 극단주의자는 누구나 될 수 있다. 사람이라면 완벽할 수는 없다. 이것은 옳고 저것은 그르다는 이분법적 사고, 하나의 기준을 가지고 사람 또는 전체를 판단하는 오만함, 내가 믿고 있는 지식이 옳다는 착각 등은 살아가면서 몇 번 이상은 인간이라면 다 빠질 수 있는 ‘생각의 함정’이다. 삶의 모든 순간 동안 현실 감각을 유지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래도 사람에게는 자기 생각이 맞는지 성찰하고, 타인의 생각에 대해 꼼꼼하게 따져보는 능력도 있다. 잘못된 사고방식을 원천봉쇄하고 살 수는 없지만 경계할 수 있다. 결국 ‘생각의 함정’에 몇 번씩 빠지더라도 탈출하려고 노력한다면 극단주의에 사로잡히지 않는다. ‘생각의 함정’에 너무 오래 갇혀 있는 사람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극단주의자가 될 가능성이 높다. 본인이 비이성적 믿음 속에서 허우적거리고 있는 것을 인식조차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 Trivia

 

 

* 데스먼 투투 성공회 대주교는 극단주의를 “다른 관점을 인정하지 않을 때, 자신의 견해를 대단히 배타적으로 고수할 때, 다를 수 있음을 용인하지 않을 때”라고 정의했다. (초판 1쇄, 26쪽)

 

→ ‘데스먼 투투’는 ‘데스먼드 투투(Desmond Tutu)의 오식으로 보인다.

 

 

 

* ‘광신(fanaticism)’의 어원은 로마어 ‘fanum’인데, 이 말은 ‘성스러운 장소 혹은 사원’을 의미한다. 현재에는 터키에 속하는 카파토키아 지역의 여신인 코마나가 로마로 수입되면서 벨로나라는 이름으로 바뀌었는데, 이 벨로나 여신을 추종하는 신도들이 사원에서 미친 사람들처럼 피투성이의 제의를 벌이는 것을 본 로마인들이 이들을 ‘광신도(fanatici, fanatic)’이라고 불렀다. (초판 1쇄, 60쪽)

 

 

→ 고대 로마인들이 사용한 언어는 ‘로마어’가 맞긴 하나 오늘날에는 주로 ‘라틴어’라는 이름으로 부른다. ‘카파토키아’는 ‘카파도키아(Cappadocia)의 오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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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19-02-24 18: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제 종로에는 대형 성조기와 이스라텔
깃발이 휘날리더군요.

어느 집회에서는 욱일승천기도 등장했
다고 하던데... 현실이 상상을 능가하는
시절이 되었네요.

포용의 정치가 아니라 혐오의 정치를
구사하는 이들의 종말이 보고 싶습니다.

cyrus 2019-02-25 15:48   좋아요 0 | URL
역시 서울의 집회 스케일은 상상초월이네요... ^^;;

2019-02-24 19:12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9-02-25 15:49   좋아요 1 | URL
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