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탄생 - 대한민국에서 엄마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대한민국을 생각한다 20
안미선.김보성.김향수 지음 / 오월의봄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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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cene #1 아는 엄마 얘기

 

여기 내가 아는 엄마가 있다. 에바라는 이름의 여자는 한때 세계 여행을 즐기며 자유분방한 삶을 살았다. 그러다가 일과 육아를 병행하는 고단함에 못 이겨 아들에게 냉담한 태도를 보인다. 엄마와의 관계가 소원해질수록 아들은 그녀를 엄마라고 부르지 않는다. 엄마가 자신을 사랑하지 않으니까. 아들은 반항적인 학생으로 자라고 엄마를, 가족을, 사회를 불행하게 만드는 범죄를 저지르고 만다. 이 불행한 모녀 이야기는 라이오넬 슈라이버의 소설 《케빈에 대하여》의 줄거리다. 

 

아들을 사랑하지 않는 엄마를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소설은 에바가 과연 일반적인 모성애가 부족했느냐고, 그러한 책임이 온전히 에바 개인에게 있는 것이냐고 독자에게 도발적으로 질문한다. 누군가는 에바의 차가운 심장 속에 반항적인 아들로 자라는 불행의 씨앗이 생겼다고 말할 것이다. 그런데 에바의 모습은 소설 속에만 나올 법한 특이한 장면이 아니다. 산모에게 갑자기 찾아오는 산후우울증 상태와 비슷하다. 산후우울증은 임신과 출산을 겪으면서 호르몬 변화가 심해지면서 감정을 조절하지 못한다. 아기는 출생 후 엄마의 따뜻한 보살핌과 양육을 받지 못해서 행복하지 못하며 엄마의 우울한 상태는 자녀의 인지발달에도 영향을 준다.  

 

에바의 경우는 자극적인 기사를 내놓는 기자들이 좋아하는 먹잇감이 되기 쉽다. 산후우울증으로 고생하는 엄마의 행동도 마찬가지다. 뉴스는 산후우울증을 아이를 극단적으로 위협하는 정신병으로 전달한다. 이런 뉴스를 접한 아빠들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엄마가 미쳤군, 어떻게 엄마가 아이를 죽일 수 있지?” 아빠는 엄마의 극단적 행동을 이해하지 못한다. 반면 아이를 오랫동안 키워 본 엄마들은 충분히 이해한다. 자신도 아이가 너무 싫어서 죽이고 싶은 순간적 충동이 있었음을. 계속 울고 떼쓰는 아이를 혼자 달래다 보면 스트레스로 작용하여 아이에게서 흥미를 느끼지 못한다.

 

 

 

 Scene #2  오늘도 엄마는 외롭게 싸운다

 

여성이 엄마가 되는 순간, 혼자 해야 할 일이 너무나도 많다. 임신은 축복이지만 출산과 육아는 현실이다. 출산의 기쁨도 잠시, 자녀 양육문제는 가장 무거운 현실의 짐이 된다. 산후조리원은 출산을 겪으면서 정신적으로 긴장하고 육체적으로 지친 산모에게 ‘엄마’라는 칭호에 어울리는 역할을 알려준다. 산모와 아기를 돌보는 많은 산후조리원은 상당히 과학적인 시어머니 혹은 친정어머니가 된다. 산후조리를 위한 돌봄 서비스를 하고, 아기를 돌보는 방법을 친절하게 알려준다. 모유 수유가 아기의 건강에 좋다는 산후조리원의 말에 산모는 유두가 아프더라도 꾹 참고 아기에게 젖을 물린다. 당연히 ‘엄마’니까 아기를 위해서 모유 수유를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모유 수유를 하지 않는 엄마는 좋은 엄마가 아니라는 시선을 받는다. 아이를 키우는 일에는 결코 작은 실수도 용납하지 않는다. 산후조리원에서 집으로 돌아온 순간 밤잠을 편히 자는 것은 포기해야 한다. 아이가 시도 때도 없이 엄마를 찾아 그야말로 상상을 초월하는 노동이 시작된다.

 

산후조리원을 나와도 엄마 주변에는 자꾸 ‘좋은 엄마’라는 꼬리표를 달도록 부추기는 것들이 많다. 침대는, 아니 모성은 과학이라는 점을 육아 관련 업체들은 홍보한다. 몸과 마음이 건강한 아이로 키우고 싶은 엄마 마음에 연령별로 분화된 고가의 유아용품들을 구입한다. 모성애가 뛰어난 엄마가 되려면 이 정도 소비를 감수해야 한다. 사랑뿐만 아니라 모성도 돈으로 사야 하는 시대인 것이다. 엄마는 자본주의라는 사각의 링 위에서 한쪽에는 ‘경쟁’이라는 글러브를, 다른 쪽에는 ‘모성’이라는 글러브를 끼고 외롭게 싸운다. 만약 이 싸움에서 진다면, ‘좋은 엄마’ 소리를 들을 수 없다. 이럴수록 육아에 대한 강박적인 마음에 글러브를 바짝 조인다. 불행하게도 ‘엄마 노릇’하는 여성이 서있는 코너 옆에는 든든한 트레이너가 없다.

 

맞벌이 여성일수록 고민거리는 더 커진다. 취업 전선에 뛰어들고 싶어도 아이는 엄마의 치맛자락을 붙잡는다. 아무리 머리를 굴려봐도 선택은 세 가지 중 하나. 친정이나 시댁에 맡기거나 육아 도우미의 손을 빌리는 것. 셋 중 하나만 찍으면 되지만 선택하기가 쉽지 않다. 경우에 따라 다르지만 일단 어떤 선택이든 비용이 드는 것을 감수해야 한다. 어린이집 폭행 사건이 큰 사회문제로 주목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맞벌이를 하게 되면 아이를 어린이집에 맡긴다.

 

엄마는 늘 피곤하다. 전쟁 같은 삶을 산다. 한 남자의 아내로, 한 아이의 엄마 그리고 일하는 엄마로 산다는 것은. 끊임없이 칭얼대며 엄마를 찾는 아이를 돌본다. 해도 해도 끝나지 않는 반복적 가사노동에 하루를 저당 잡혀버린다. 아무리 가사노동도 어엿한 경제활동이라고 울부짖어도 여전히 현실 속에서는 세 가지 엄마가 구분되고 있다. 언제부터인가 그 너머의 미래를 그릴 수 없게 되고 ‘나’라는 고유한 삶의 윤곽이 사라진 지 오래다.

 

 

 

 Scene #3  Mamma mia! 미아가 된 대한민국 엄마들

 

6년 전에 100만 부를 훌쩍 넘긴 신경숙《엄마를 부탁해》의 엄마는 가족에 대한 희생과 봉사로 점철된 인생을 살았다. 자식을 위해 평생 희생하고 영원한 내리사랑을 주는 어머니의 사랑은 어릴 적 우상이었던 슈퍼맨보다 더 강하다. 하지만 《엄마를 부탁해》 속의 엄마와 같은 인물은 거의 없다. 모성애와 무조건적 헌신의 자세로 포장된 엄마는 없다. 안타깝지만 《케빈에 대하여》 속의 엄마는 있다. 앞으로도 많아질 것이다. 사회가 소유한 모성의 강제성은 역설적이게도 아이와 엄마 간의 관계를 단절한다.

 

 

           

 

 

《엄마의 탄생》은 읽으면서 나는 외마디 감탄사를 내뱉었다. Mamma mia! 세상에! 대한민국 엄마로 산다는 것은 참으로 힘들구나. Mamma mia! now I really know(이젠 정말 알겠어). 엄마는 미아(迷兒)다. 그녀는 외롭다. 가족은 있으나 출산과 육아를 하면서 견뎌야 할 시간을 알아주는 이가 없으니까. 집에 있어도 혼자 남겨진 듯한 기분이 든다. 모성애라는 대의명분만으로 참으면서 이겨내기가 힘들다. 방황하는 엄마가 가는 곳은 쇼핑몰과 키즈 카페. 그러나 이곳으로 들어오는 순간 아이와 엄마가 놀 수 있는 시간은 소비가 된다. 편하게 쉴 곳이 없다. 엄마는 아이를 안은 채 오랫동안 헤맨다. 마음을 안정시킬 수 있는 공간을 찾지 못한 채.

 

적극적 양육자로서 아빠의 역할이 커지는 요즘, 아이들에게 친근한 슈퍼맨이 되고 싶은 아빠들이 많아져서 좋다. 엄마가 혼자 짊어진 짐의 무게를 덜어낼 수 있다. 그렇지만, 보육 부담을 피하기 위해서 모성을 ‘안전빵’으로 생각하는 것은 엄마를 더욱 피곤하게 만든다. 그것은 엄마에게 보육을 전적으로 맡기는 꼴이다. 엄마에게 보육을 부탁해선 안 된다. 모성은 강하다? 이것은 오해의 산물이다. 모성은 엄마가 아이를 키우면서 늘 심장 속에 새겨야 할 책임이라는 단어가 될 수 없다.

 

시장논리 속에서 존재하는 모성은 여성이 처한 사회적 현실을 가리고 포장할 뿐만 아니라, 아이를 돋보이도록 만드는 소비의 대상으로 전락시킨다. 사회는 육아 지침서가 말하는 현명한 엄마, 아이를 똑똑하게 키우는 세련된 엄마, 일과 육아를 동시에 하는 엄마가 되라고 말한다. 여성 독자들이여, 진짜 엄마가 되고 싶은 각오가 되어 있는가. 아니면 사회가 강요하는 ‘엄마 노릇’을 하고 싶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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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장소] 2015-02-02 23: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얼마전에..국내 영화 현기증˝ 을 봤어요.
이거야..말로..미치고 팔짝 뛰겠네..하는
심정을..그대로..담은..영화.엄마의.영화.
라고...봐도 후회 안하실 거라고..ㅎㅎ

cyrus 2015-02-03 17:14   좋아요 1 | URL
장소님이 추천한 영화가 보고 싶군요. <엄마의 탄생>이라는 책도 읽을수록 미치고 팔짝 뜁니다. 정말 대한민국 엄마들이 안쓰러워요. 젊은 세대가 결혼을 기피하는 이유가 다 있더라고요.

[그장소] 2015-02-03 19:44   좋아요 0 | URL
음..엄마의탄생.기억해두고 읽어볼게요.
근데..뭐 저도 그에 만만치 않아서.ㅎㅎㅎ
오늘 기사를 보니 남성들 엄마에서 아내로 가정의 주된일을 그대로 갈아타기 할 뿐이라는 인식이강하다.는 설문이 눈길을 잡아 끌었어요.새삼스럽게...하는 심정으로..피식 웃음이 났고요.

감은빛 2015-02-03 12: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자 3명 중 2명이 아는 사람이네요.
친한 건 아니고, 말 그대로 아는 사람이요.
출판사도 저자도 훌륭하네요.
이 리뷰를 읽고나서야, 저 책이 집안 어딘가에 있다는 사실을 깨닫네요.
찾아서 읽어봐야겠어요.

cyrus 2015-02-03 17:18   좋아요 1 | URL
아이를 키우는 은빛님은 이 글을 어떻게 보실지 궁금합니다. 저는 이 책을 최근에 알게 되었어요. 그런데 책이 많이 알려지지 않은 것 같습니다. 엄마가 나오는 픽션을 그렇게 많이 찾고 읽었던 사회가 진짜 엄마가 나오는 논픽션을 외면하는 상황이 이상합니다.

감은빛 2015-02-03 17:34   좋아요 0 | URL
그 엄마가 나오는 픽션은 워낙 유명한 분이 썼고,
매우 영향력있는 출판사에서 낸 책이죠.
비교 자체가 불가능한 것 같아요.

시루스님의 이 글에 대한 느낌이 궁금하신가요?
글쎄요. 이 책을 읽지 않아서 그런지,
시루스님이 왜 놀랐는지 잘 이해가 되지는 않아요.
이 사회에서 아직까지 육아의 부담이 여성에거 쏠려있기는 하지만,
최근 많이 바뀌는 추세이고,
육아를 부분적으로(혹은 같이) 분담하는 아빠들에게도
우울증이나 어려움은 늘 따라다니는 문제라고 생각해요.

다만 마을에서 함께 아이를 키운다는 개념에 조금 희망을 볼 수 있을 것 같아요.
아내와 제가 마을 활동하면서 자주 데리고다닌 탓에
우리 아이들은 동네에서 아주 유명해졌거든요.
동네 삼촌들, 이모들과 함께 자라는 아이들은
학원 뺑뺑이만 돌거나, 집에서 친인척(혹은 돌보미)와만 보내는 아이들과는
여러모로 다를 거라고 느껴요.
그게 전적으로 긍정적일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그 다름이 더 낫다고 생각해요.


cyrus 2015-02-03 17:40   좋아요 1 | URL
제가 댓글을 잘못 적었어요. 제 글이 아니라 책입니다. 제가 아직 미혼이라서 실제 육아에 대해서 전무합니다. 벌써 결혼을 하고 아이를 키우는 친구들이 있긴 한데 그 친구들이 아이를 키우면서 겪는 고충을 제대로 듣지 못했어요. 그리고 제가 충격적으로 느낀 것이 산후우울증에 관한 내용이었습니다. 이 책을 읽기 전만 해도 산후우울증이 산모가 겪는 심각한 병인 줄 몰랐어요.

단발머리 2015-02-06 08:5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모성이 아주 많이, 턱없이 부족한 엄마로서~~ 아주 잘 읽었습니다.
결국에는 엄마의 자리를 찾는 것도 엄마 스스로의 일일수도 있을 것 같아요.
남편이나 아이를 통해 자신의 존재감을 얻으려하는 시도들은, 사실 사회와 주변의 시선 같은게 많이 작용하죠.
하지만, 나 스스로를 `00엄마`가 아니라, `000`으로 설정하는 건, 내가 해야하는 일이죠. 아이 역시 스스로의 삶을 찾아떠날테니까요.

전 다른 일은 안 하고 살림만 하는, 살림을 못하지만 살림만 하는 전업주부인데, 항상 그런 생각을 많이 해요. 나는 누구인가... ^^

cyrus 2015-02-06 14:49   좋아요 0 | URL
저는 <엄마의 탄생>을 읽으면서 여성이 엄마가 되면서 생기는 자연스러운 본능을 자식을 키우는 데 꼭 필요한 자질로 생각하면 육아를 담당하는 엄마 입장에서는 불편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런 시선에 정신적으로 부담이 되어 스트레스를 받게 될 수 있고요. 알고 보면 별 것 아닌데 아이에게 조금이라도 문제가 생기면 무조건 엄마를 탓하잖아요. 이걸 또 모성이 부족하다고 보는 건 아니라고요. 이러면 엄마는 자존감이 떨어질 겁니다. 저는 단발머리님을 실제로 뵌 적은 없지만 모성이 부족하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
 
아라비안 나이트 살인 노블우드 클럽 5
존 딕슨 카 지음, 임경아 옮김 / 로크미디어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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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추리소설에서 비중 있는 조연은 범인과 탐정의 조수 및 동료이다. 탐정의 동료에 형사도 포함된다. 형사가 추리소설의 주인공, 그러니까 주연이 되어 사건을 해결하는 추리소설도 있다. 그렇지만 탐정이 주연이 되면 형사는 탐정의 추리력을 한껏 돋보이게 하는 역할에 머무른다. 누구도 풀지 못한 수수께끼의 사건을 형사가 아닌 밖에서 굴러들어온 탐정이 갑자기 툭 튀어나와 해결해버린다. 탐정이 주인공인 추리소설의 전개 방식은 항상 이런 식이다. 일개 사립탐정이 높은 직위에 있는 형사 몇 명들보다 사건 해결에 뛰어난 수완을 보이도록 하는 인물 설정은 코난 도일의 홈즈 시리즈에서 많이 볼 수 있다. 런던 경시청에 소속된 경감, 형사들은 어려운 사건이 있으면 홈즈의 조언을 듣기 위해 그가 사는 하숙집에 직접 찾아간다. 레스트레이드 경감은 홈즈 시리즈의 첫 작품《주홍색 연구》부터 시작해서 여러 사건에 자주 등장하는데 홈즈는 두뇌 회전력이 둔한 레스트레이드를 무시한다. 홈즈의 추리 실력은 경시청뿐만 아니라 지역 경찰들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몇몇 형사는 홈즈가 사건에 개입해서 수사하는 것을 대놓고 불만을 표출하기도 한다. 자신이 맡는 사건에 탐정이 개입해서 수사를 펼치는 모습을 보면 약간의 경쟁심과 시기심이 생긴다. 사건을 해결하면서 얻을 수 있는 명예가 사립탐정이 차지한다면 형사 입장에서는 자존심 상하고 경찰의 위상이 떨어진다. 그래서 홈즈는 가끔 사건 해결의 공로를 경찰에게 돌린다. 사건은 홈즈가 해결했지만, 신문에서는 경찰이 해결했다는 식으로 알려진다.

 

머리 좋은 탐정과 이보다 한 수 아래 형사의 조합은 지금까지도 추리물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고전적인 방식이다. 도일의 문학적 유산은 《소년탐정 김전일》과 《명탐정 코난》으로 이어진다. 《소년탐정 김전일》의 겐모치 이사무(한국어판에서는 이사무)와 《명탐정 코난》의 메그레 쥬죠(골롬보 반장)은 머리 좋은 젊은 주인공들(김전일과 코난)의 활약에 미치지 못하지만, 이들의 존재감은 음식의 싱거운 맛에 간을 맞춰주는 소금과 같다. 특히 메그레 반장은 소설과 영화를 통틀어 추리물 중에서 가장 관대한 '대인배'다. 코난과 소년 탐정단(아름이, 세모, 뭉치)이 사건 현장에 함부로 들어와도 쫓아내지 않는다. 일단 코난의 추리력을 믿어 본다. 코난이 사건 현장에 나타나면 사건이 술술 잘 풀렸으니까.

 

독자는 형사보다 월등히 앞서는 탐정의 활약상에 열광하지만, 추리작가 입장에서는 진부한 전개 방식에만 안주하는 것을 원하지 않을 것이다. 전작을 뛰어넘을 수 있는 대담한 트릭과 이전 작품에서 보지 못한 새로운 구성을 선보이고 싶어 한다. 하지만 작가라는 직업의 운명은 늘 그렇듯이 신작에 대한 독자의 기대감을 부담스러워 한다. 홈즈 시리즈로 가난한 의사에서 최고의 인기 작가가 된 도일도 창작의 압박감을 피할 수 없었다. 도일은 하늘을 찌르는 홈즈의 인기를 감당하지 못해 1893년에 《마지막 사건》을 발표한다. 이 작품에서 홈즈는 라이헨바흐 폭포에서 악당 모리어티 교수와 싸우다가 죽는다. 그러자 독자들의 항의 편지가 빗발치는 바람에 10년 뒤에 홈즈가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아 런던으로 돌아오게 된다는 《빈집의 모험》을 발표했다.

 

도일 이외에도 개성 있는 탐정을 창조한 추리작가들이 많지만, 그중에 존 딕슨 카는 도전 정신이 넘치는 추리작가다. 카가 창조한 주인공만 해도 앙리 방코랭, 기드온 펠 박사 그리고 헨리 메리베일 경이 있다. 또 카는 해마다 작품 한 권씩을 발표할 정도로 다작 작가에 속한다. 카는 글을 쓰기 시작하면 밤새도록 커피를 마시고 줄담배를 피울 정도로 왕성한 창작욕을 보여줬다. 《아라비안 나이트 살인》(The Arabian Nights Murder)은 《세 개의 관》(동서문화사, 2003)을 발표한 이듬해에 나온 작품이다. 두 작품 다 기드온 펠 박사가 등장한다. 그러나 《아라비안 나이트 살인》은 이전에 나온 펠 박사 시리즈와 사뭇 다른 독특한 특징을 가지고 있다. '사건 발생-제2의 사건 발생(혹은 제3, 4의 사건까지 발생)-추리-사건 해결'이라는 추리소설의 단순한 전개 구조를 취하면서도 사건 진술과 수사 방식의 비중이 꽤 많은 편이다. 연속으로 발생하는 기이한 사건들을 경찰 관계자 세 명의 시선으로 나누어 소개하고 있다. 아일랜드 출신 경찰 부서장 존 캐러더스 형사, 영국 출신 경찰 부국장 암스트롱 경 그리고 스코틀랜드 출신이며 펠 박사 시리즈의 명조연 해들리 총경, 이 세 사람은 아라비안 나이트 살인 사건을 둘러싸고 다양한 방식으로 수사를 펼친다. 세 사람은 셰에라자드가 되어 자신들이 조사한 아라비안 나이트 살인 사건의 전모를 펠 박사에게 밤새도록 들려준다.

 

카의 작품이 오랫동안 독자들에게 사랑을 받는 이유는 실제로 일어나면 미제로 남을법한 사건들이 꼬리에 꼬리를 무고 일어난다는 점이다. 《아라비안 나이트 살인》을 처음 읽는 독자라면 "뭐, 이런 사건이 다 있냐?"라고 하면서 적잖이 놀랄 것이다. 가짜 흰색 수염을 붙인 정체불명의 노인이 담 위에서 스파이더맨처럼 갑자기 나타나 호스킨스 경사를 공격한다. 경사는 갑자기 공격하는 노인을 주먹 한 방에 쓰러뜨려 기절시키는 데 성공한다. 그런데 호송차를 부르기 위해 경사가 잠시 한 눈 판 사이에 길바닥에 쓰려져 있던 노인은 연기처럼 사라져버린다. 캐러더스 형사는 여러 증언을 토대로 유령 같은 노인이 동서양 고대 유물을 소장한 웨이드 박물관으로 향했을 것으로 생각하고, 혼자 직접 그곳에 간다.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는 박물관 지하에서 캐더러스는 혼자 춤을 추는 박물관 안내원 프루언을 만난다. 그는 프루언에게 노인을 목격했냐고 물어보지만, 확실한 증언을 얻지 못한다. 캐러더스는 이에 포기하지 않고 박물관 내부를 샅샅이 살펴보다가 오래된 영국식 마차 안에 가짜 수염을 단 노인으로 추정되는 시체를 발견한다. 그런데 시체의 얼굴에 붙어 있는 수염은 흰색이 아니라 검은색이다. 살인 사건의 실체를 한 꺼풀씩 벗길수록 수상한 인물들이 한 명씩 등장한다. 일부러 사건의 범인을 숨기려고 하듯이 용의 선상에 오른 인물들의 진술은 점점 늘어난다.

 

이 소설에서 가장 돋보이는 장면은 해들리의 활약이다. 그동안 펠 박사 앞에서면 그의 느긋한 추리력에 된통 혼쭐났던 해들리가 혼자서 살인 사건을 거의 해결하는 능력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소설의 피날레를 장식하는 자는 묵묵히 세 사람의 이야기를 들은 주인공 펠 박사가 된다. 이 소설에서 펠 박사가 나오는 장면은 많지 않다. 심지어 캐러더스 형사, 암스트롱 경, 해들리보다 등장 횟수와 대사가 적다. 펠 박사가 나오는 장면은 경찰 관계자 세 사람에 대한 소개로 시작되는 프롤로그와 펠 박사가 복잡하게 꼬인 사건 해결의 매듭을 단번에 풀어버리는 에필로그뿐이다. 해들리는 사건의 범인을 지목하는 데 성공하지만, 이를 뒤집는 진술이 나오는 바람에 썩 만족스럽지 않은 상황으로 사건이 일단락된다. 해들리는 사건을 완전히 해결할 수 있는 1%를 발견하지 못했다. 그가 놓친 1%는 범인이 가까스로 포위망에 탈출하는 골든타임이 된다. 펠 박사는 세 사람의 긴 진술만 듣고 아라비안 나이트 살인 사건의 진짜 범인을 찾는다.

 

펠 박사의 존재감은 항상 소설이 끝나가는 무렵에 드러난다. 지루하게 이어지는 진술을 끝까지 듣고 난 뒤에 펠 박사는 꾹 닫고 있던 입을 연다. 그만큼 펠 박사 시리즈를 읽으려면 인내심이 필요하다. "제게는 놀랍기도 하고, 고통스럽기도 하고 그렇군요."(384쪽) 세 사람의 이야기를 끝까지 다 들은 펠 박사가 처음으로 꺼낸 말이다. 펠 박사의 말은 《아라비안 나이트 살인》을 다 읽고 나면서 느낀 나의 소감이라고 보면 된다. 도저히 풀릴 것 같지 않은 사건이 펠 박사가 너무나 쉽게 해결해버리는 결말에 놀라웠고, 세 명의 경찰 관계자들의 이야기를 읽는 것이 고통스러웠다. 지나치게 진술 위주로 진행되는 이야기 때문에 배보다 배꼽이 커버린 작품이 되고 말았다.  

 

 

 


※ 소설을 읽다보면 《아라비안 나이트》와 밀접하게 관련 있는 정보가 까메오처럼 나온다. 58쪽에 언급된 흰색, 푸른색. 노란색, 빨간색의 물고기로 변하는 사람들은 《천일야화》 1권(열린책들)의 '어부 이야기'에 삽입된 한 장면이다. 하룬 알 라시드(64쪽)는 《천일야화》 에 많이 등장하는 바그다드의 군주이다. 안토니 갈런드(94쪽)는 프랜시스 버턴보다 먼저 유럽에 《천일야화》 를 소개한 프랑스인이다. 프랑스어는 '앙투안 갈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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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곁에서 만나는 우주!

독일의 인기 천문학자가 들려주는

별과 우주에 관한 매혹적인 이야기들

 

★ 독일 2014 올해의 과학도서상 수상작 ★

 

우주 저 먼 곳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우리의 일상과 어떤 관련이 있을까?

지구의 물은 어디에서, 어떻게 오게 되었나?

냄비요리 안에는 어떤 우주원리가 담겨 있을까?

지구와 소행성이 충돌할 가능성은 얼마나 될까?

너와 나의 시간이 다르게 흐르는 건 무엇 때문일까?

 

 

▼ 일상에서 즐길 수 있는 천문학 입문서

저 멀리 우주에서 벌어지는 사건은 우리의 삶과 도대체 무슨 상관이 있을까? 지구가 생긴 지는 46억년이나 지났고 우리가 살고 있는 우주가 하나도 둘도 아닌 데다, 가장 가까운 행성인 금성까지의 거리만도 4,500만 킬로미터나 될 정도라니, 어마어마한 숫자들에 오히려 무감각해지곤 한다. 그러나 이 책의 저자, 플로리안 프라이슈테터는 우주가 그렇게 먼 세상의 일만은 아니라고 말한다. 네온사인이 번쩍이는 거리에서도 우주를 만날 수 있으며, 소박한 한 끼의 밥상과 이제는 필수품이 된 내비게이션에도 어김없이 우주의 원리는 작동하고 있단다. 그러니 살짝 관심을 가져보라고. 천문학을 만나는 건 작은 관심이면 된다고 설득한다.

사실, 오래전부터 사람들은 하늘과 지구에 대해 끊임없는 호기심을 가져왔다. 최근 국내 개봉되었던 영화 <인터스텔라Interstellar>(2014,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흥행만 보아도 우리가 직접 경험하지 못한 우주에 대해 마음 한켠에 호기심을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과연 우주의 끝은 어디이며, 우리는 우주를 얼마나 이해할 수 있는 것일까?

독일어권에서 큰 인기를 얻고 있는 저자는, 유명한 과학 블로거이자 팟캐스트 진행자답게 쉽고 재미있게 우주 이야기를 들려준다. 이른 아침 불어오는 바람에서 시작해 도시에서 흔히 접할 수 있는 사물들을 탐색하며 일상에 숨겨진 우주의 흔적을 찾아낸다. 천문학자가 들려주는 이야기를 따라 산책하듯이 걷다보면 누구나 우주가 간직한 아름다움과 그 원리에 감탄하게 될 것이다.

 

▼ 우리가 먹고, 걷고, 머무는 도시에서 우주를 만나다

우주는 어디에 있는 걸까? 우리는 어디서 우주를 발견할 수 있을까? 멀리서 찾을 필요는 없다. 집집마다 갖추고 있는 텔레비전의 위성 안테나는 인공위성의 원리와 역할을 알려준다. 특별한 날에 비싸게 주고 산 귀금속에 소행성 충돌의 역사가 남겨져 있다. 아이들이 뛰노는 공원 땅바닥에는 우주에서부터 날아와 먼지가 되어 내려앉은 별의 흔적에 있고, 꽃들을 헤집으며 꿀을 채취하는 벌의 눈동자에는 항성들의 빛이 담겨있다. 이뿐 아니다. 우리가 삼시 세끼 먹고 마시는 음식에는 오래전 태양에서 시작된 에너지가 숨겨져 있고 낯선 길을 안내해주는 내비게이션에는 우주에 떠 있는 위성들과의 교류가, 사계절의 순환에는 기울어진 지구와 달의 만유인력이 존재한다. 그렇다. 느끼면 느낄수록 우리의 일상은 참으로 우주적이다! 이 책은 이처럼 일상 곳곳에 숨어 있는 우주의 원리를 찾아내고 그것을 과학적으로 설명함으로써 독자들이 일상에서, 도시에서 우주를 만날 수 있게 한다.

 

▼ 왜 우리는 여전히 별을 사랑하는가

우주는 수천 년 동안 사람들의 시와 노래 그리고 과학적 탐구의 대상이 되어왔다. 고대 그리스의 아낙사고라스는 당대를 지배하던 종교적 교리를 벗어나 태양은 신의 행사가 아니라고 주장함으로써 고향에서 추방당했고, 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는 우주의 중심에 지구를 두지 않았다고 해서 미치광이 취급을 당했다. 갈릴레오 갈릴레이는 최초로 망원경으로 우주를 관찰하는 데는 성공했으나 당시의 사람들은 그를 믿어주지 않았다. 요하네스 케플러는 그의 스승 티코 브라헤의 지적 유산을 바탕으로 우주의 법칙을 밝히기 위한 ‘전쟁’을 치렀고, 아이작 뉴턴은 공식을 사용해 물체간의 만유인력을 계산해냈다. 그리고 마침내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은 우주의 시공간이 갖는 근본적 구조를 밝혀 상대성이론을 발견했다.

높고 푸른 밤하늘이 주는 낭만과 철학적 사색은 과학과 만나 더 넓은 세상으로 나아간다. 별 한줌 보이지 않는 도시에서도 우리는 별을 꿈꾸고, 단순히 감상하는 것을 넘어 그 존재를 진실로 알고자 탐구한다. 지나간 역사에서 우주를 탐구함으로써 학문적 발전을 이루고 세상에 대한 인식의 틀을 바꾸었듯이, 앞으로도 우리 또한 팽창하는 우주를 향해 나아갈 몫이 많이 남아있다. 저자는 이 책을 넘어 각자의 책꽂이에서 관련된 책을 찾고 더 깊게 생각하며, 더 깊은 우주로 나아가기를 독려한다. 이제 독자들이 이 책을 시작으로 거인의 어깨를 밟고 서서 더 앞으로 나아갈 차례다.

 

책 속으로

지구는 우주의 일부이고, 우주에서 움직이는 행성 중 하나다. 행성이란 항성 주위를 맴도는 천체를 말한다. 지구는 태양 주위를 돈다. 태양은 항상 중 하나로, 다른 수천억 개의 다른 항성과 함께 우리 은하를 이루고 있다. 이러한 우리 은하마저도 우주를 가득 채우고 있는 수천억 개의 은하 중 하나일 뿐이니, 우리 존재란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거대한 우주의 아주 작은 구성 성분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전 우주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건들을 일상에서 아주 또렷하게 맞닥뜨리고 있다. -8쪽

 

‘낯선’ 생명체는 말 그대로 낯설다. 그 생명체가 어떤 상태인지 알지 못하면 결국 무엇을 기준으로 탐색을 해야 하는지도 알 수 없다. 원칙상 존재할 수 있지만 그것이 어떤 종류의 생명체인지를 근본적으로 밝혀내지 못하는 한, 그 생명체를 찾을 수도, 설령 찾았다 하더라도 알아볼 수 없다. 하지만 언젠가 지금껏 찾아낸 843개의 행성에 우리가 인식 가능한 종류의 생명체가 존재한다면, 수십 년 이내로 그 생명체를 찾아내고야 말 것이다! 나뭇잎들이 자신이 존재한다는 신호를 전 우주로 내보내고 있는 것처럼, 다른 행성의 식물 또한 존재의 신호를 내보낼 테니 말이다. -95쪽

 

한 숟가락에 담긴 음식물 안에도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많은 양의 탄소가 들어 있다. 그중 대부분은 평범한 탄소-12고, 그 외 일부가 탄소-13이다. 하지만 아주 조금일지라도, 방사성인 탄소-14가 존재한다. 음식을 섭취하면서 방사능 물질이 우리 몸에 들어가고 있다는 말이다! 그렇다고 겁먹을 필요는 없다. 인체에 해를 끼치기에는 너무도 적은 양이니. 방사성은 특정 정도 이상일 경우에만 신체에 손상을 입힐 수 있고, 경우에 따라서 작은 손상 정도는 저절로 치유되기도 한다. 어찌됐든 아주 미약한 정도일지라도 전 세계 도처에 방사성 원소가 존재하는 것이다. -146쪽

 

지은이와 옮긴이, 감수자

 

지은이 플로리안 프라이슈테터 Florian Freistetter

오스트리아 빈 대학에서 천문학 연구소에서 소행성에 관한 논문으로 박사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예나의 프리드리히-쉴러 대학 천문물리학 연구소, 하이델베르크 루프레흐트-카를스 대학 천문학 연구소에서 근무했다. 2008년에 개설한 우주과학 블로그는 매달 수십만 명이 방문할 정도로 인기를 누리고 있다. 《지금 지구에 소행성이 돌진해 온다면》 외 여러 권의 천문학 책을 썼으며, 팟캐스트를 운영하면서 일반인들에게 우주의 신비와 천문학의 즐거움을 알리는 데 힘쓰고 있다. 《우주, 일상을 만나다》로 ‘2014 올해의 과학도서상’을 수상했다.

블로그 : www.scienceblogs.de/astrodicticum-simplex

 

옮긴이 최성웅

프랑스 파리 3대학에서 불문학과 독문학을 공부했다. 프랑스어와 독일어 통번역가로 일하며, 학습협동조합 ‘가장자리’에서 프랑스어를 가르쳤다. <KBS 스페셜>의 프랑스어 영상을 번역한 바 있고, 옮긴 책으로 《단단한 독서》, 《창조적 사진 전략》, 《폴, 행복을 찾아서》, 《돌아온 검은 고양이 네로》 등이 있다. 누구나 무료로 배울 수 있는 프랑스어 학습 카페(cafe.naver.com/pasdequoi)를 운영 중이다.

 

감수 김찬현

경기과학고등학교 졸업 후 오사카대학교 이학부를 거쳐 도쿄대학교 대학원 이학계 연구과에서 물리학을 공부했다. 반물질의 최소 단위인 반수소원자 합성에 관한 논문으로 석사학위를 받았다. 유럽원자핵공동연구소(CERN)에서 진행중인 국제공동연구 프로젝트 ASACUSA에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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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알라딘 중고서점(대구)에서 질 들뢰즈의 《감각의 논리》(민음사, 2008)가 있는 것을 확인하고 하던 공부를 멈추고 바로 그곳으로 갔다. 이런 상황이 오면 극심한 불안 증세가 찾아온다. 중고서점으로 향하는 버스가 밉게 느껴진다. 내가 타는 버스가 빨강 신호등에 자주 걸린다는 생각도 한다. 손님이 내가 찜을 한 책을 먼저 발견하고 사갈까 봐 걱정한다. 사실 대구 중고서점에 들뢰즈의 책이 판매되는 경우가 드물다. 그리고 나는 이 책을 반드시 사야 할 이유가 있었다. 《감각의 논리》는 들뢰즈가 프랜시스 베이컨의 회화를 해석한 책이므로 베이컨의 그림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꼭 읽어야 할 텍스트다. 최근에 베이컨의 인터뷰가 실린 《나는 왜 정육점의 고기가 아닌가?》(디자인하우스, 2015) 발간 소식에 맞춰 베이컨의 삶과 작품 세계를 조명한 각종 도서를 읽고 있어서 들뢰즈의 책이 손에 넣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손님이 중고서점에 판지 얼마 안 된 책들이 꽂힌 지점은 책을 사려는 손님들이 많이 몰리는 핫 코너이다. 이렇다 보니 내가 사고 싶은 책은 손님들의 눈에 발견되기 쉽다. 운이 따르지 않는다면 허탕을 친다. 서점에 도착해서 사고 싶은 책을 찾지 못했다면 그 책은 이미 다른 사람이 산 것이다. 《감각의 논리》를 찾을 때도 그랬다. 《감각의 논리》가 꽂혀 있어야 할 자리에 푸른 색깔을 띤 책이 보이지 않았다. 인문학과 예술 분야의 책들이 꽂힌 서가에 여러 번 살펴봐도 《감각의 논리》를 찾지 못했다. 보통 책 한 권 찾으면 서점 전체를 한 시간 남짓 둘러본다. 책성애자인 탓에 서점이나 책방에 가면 고도의 집중력이 발휘된다. 길 잃은 아이처럼 이리저리 서점 내부를 돌아다니다가 그 책이 다른 사람의 손에 들려 있는 걸 확인했다. 차라리 그 책이 내 눈에 띄지 않았다면 속 시원하게 포기했을 텐데. 손님의 장바구니 안에 있는 것을 보면 너무나도 아쉽고, 발길을 돌리지 못한다. 두 눈은 자꾸 손님의 장바구니에만 향한다. 그날따라 그 손님이 고른 책들이 부러웠다. 눈으로 어림잡아 세어보니 일곱 권의 책을 골랐다.《감각의 논리》뿐만 아니라 존 스튜어트 밀의 《여성의 종속》(책세상, 2006)도 있었다. 흠, 나도 저런 때가 있었는데. 손님이 부러웠다. 아쉬움을 잊기 위해 발길을 돌려 대구시청 쪽에 위치한 책방으로 향했다.

 

하루에 중고서점과 책방 한두 군데를 집중적으로 둘러본다면 적어도 좋은 책 한 권은 발견한다. 여기서 내가 생각하는 좋은 책의 조건은 독자들에게 널리 읽힐만한 가치가 있고, 품절 또는 절판된 것이어야 한다. 그러니까 내가 찾고 싶은 책 1순위는 신간이 아니라 대형서점에서도 구하기 힘든 오래된 책이다.

 

 

 

 

 

 

 

 

 

 

 

 

 

 

 

 

책방에 가면 중고서점에서의 실패를 만회할 수 있다. 책방도 자세히 살펴보면 읽어볼 만한 무궁무진한 책들이 숨어 있다. 가끔 이런 책을 발견하고 읽게 되면 재출간되기를 바라기도 한다. 어제 책방에서 산 베아트리스 퐁타넬의 《치장의 역사》(김영사, 2004 / 절판)는 그런 경우에 해당하는 책이다. 책의 부제는 ‘아름다움을 향한 여성의 욕망, 그 매혹의 세계’이다. 아름다워지고 싶은 욕망을 가진 인류 아니 여성들의 화려한 풍속을 소개하고 있다. 여성들이 어떻게 외모를 꾸며왔는지 시대별로 내력을 기술했다. 

 

 

 

 

 

 

책방에서 1장만 읽었는데도 시간 가는 줄도 모를 정도로 재미있다. 시대에 따라 달라지는 여성들의 화장 기술법과 몸매 관리법, 각종 미용 도구 등을 살펴보면 아름다워지려는 보편적 욕망이 끊임없이 역사 속에 꿈틀거리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아름다움을 향한 여성의 열망은 한 사회의 문화적 코드로 자리 잡았다.

 

그런데 얼굴을 화려하게 돋보이는 화장 뒤에는 지금으로선 상상을 뛰어넘는 여성들의 말 못한 노고가 있다. 15~16세기 유럽 여성들은 수은 화장품을 사용했다. 당시 연금술에서는 수은이 금 다음으로 고귀한 금속이었기 때문이다. 그 시절의 화장 유행이 이해가 가지 않는다면 예전에 금 조각이 들어간 고급 화장품이나 금 조각을 얼굴에 바라는 미용법이 유행했던 것을 떠올려 보라. 금속 성분이 피부를 보기 좋게 만든다는 과학적 근거는 없다지만, 그래도 수은과 금 둘 중의 하나를 얼굴에 바르라면 후자를 선택하는 것이 낫다. 수은을 얼굴에 바른다는 것은 얼굴에 독성 물질을 바르는 것과 같다. 유럽 여성들의 수명이 짧은 이유가 있는 것이다. 낭만주의 시대는 이보다 더 심하다. 결핵 환자처럼 수척한 몸매에 창백한 피부를 가진 여성이 남성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여성들은 조금이라도 더 창백해 보이려고 벨라돈나 풀이라는 식물에서 추출한 마약과 동공을 확장하는 아트로핀을 복용했다. (최근 해외에 판매되는 영유아 유기농 죽 제품에서 아트로핀 성분이 검출되어 독일, 영국 등지에서 해당 제품을 회수된 적이 있다. 아트로핀을 과다 복용하면 신경계 마비, 환각, 체온 하강을 가져온다. 그러므로 인터넷 직구로 주문하지 마시길) 지금까지 소개한 것 이상으로 더 엽기적인 화장법과 미용법이 나온다. 지금은 건강 친화적인 화장법이 나오고 있지만, 시대만 다를 뿐이지 아름답게 보이려는 여성들의 욕망은 끝이 없다.

 

 

 

 

 

 

이 책의 특징은 치장의 역사를 문장으로만 나열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는 점이다. 당대 유행했던 화장법이나 여성들이 외모를 가꾸는 과정을 한눈에 볼 수 있는 그림들이 장식하고 있어서 보는 눈이 즐겁다. 글과 그림(서양화)이 적절하게 섞인 미시사 관련 책은 세계사를 잘 모르더라도 누구나 부담 없이 읽을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이와 유사한 책을 고르면 슈테만 볼만의 《책 읽는 여자는 위험하다》(웅진지식하우스, 2012 / 품절)과 파스칼 보나푸의《몸단장하는 여자와 훔쳐보는 남자》(이봄, 2013)이 있다. 특히 파스칼 보나푸의 책은 《치장의 역사》와 함께 읽어보면 좋다. 아름다움을 향한 인류의 욕망은 단지 여성들만 전유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여성들이 아름다움을 한껏 드러내고 싶었던 이유는 그 아름다움을 눈으로 소유하고 싶은 남성들의 성적 욕망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치장에만 국한된 주제를 벗어나 인류가 추구하던 미적 열망과 그 변화 과정을 더 자세하게 알려면 움베르토 에코의 《미의 역사》(열린책들, 2005)를 참고하면 좋다. 서양이 아닌 한국의 미용문화사를 소괘한 책으로 김남일의《한방화장품의 문화사》(들녘, 2013)가 있다.

 

 

 

 

 

 

 

 

 

 

 

 

 

 

 

《치장의 역사》의 저자 베아트리스 퐁타넬은 여성 문화에 관한 책들을 펴냈는데 그밖에 국내에 소개된 책으로 《살림하는 여자들의 그림책》(이봄, 2012)이 있다. 이 책도 《치장의 역사》와 마찬가지로 부엌, 식당, 침실 등을 묘사한 그림을 곁들여 여성의 삶에 늘 함께했던 실내 장식의 변천사를 조명한다. 판형이 커서 마치 화보집처럼 그림을 보는 재미가 있는데 이 책도 품절되었다. 나온 지 고작 3년이 되었는데 품절되었다니. 요즘 절판된 책을 타 출판사가 판권을 얻어 새 표지로 재출간하는 추세이다. 《치장의 역사》도 여성 독자들이 좋아하는 책들을 펴내는 이봄출판사에서 새롭게 단장하여 나왔으면 좋겠다. 이왕이면 《살림하는 여자들의 그림책》 재판과 같이 나오면 더 좋고. 그렇게 된다면 《치장의 역사》는 일단 제목부터 바꿔야 한다. ‘화장하는 여자들의 그림책’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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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이 2015-01-30 20:4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소개한 책 다 재밌어 보이는데_ 외모가 예쁜 여성보다는 역시 내면이 아름다운 여성이 갑_ 그나저나 전 다이어트를 좀 해야겠습니다. 뚱땡이가 되어서 완벽한 절구통 아줌마야 ㅠㅠ 읽고 자극 받고프네요.

cyrus 2015-01-31 09:03   좋아요 1 | URL
다이어트하신다는 말, 작년 이맘 때쯤에도 들은 것 같은데요. ㅎㅎㅎ

blanca 2015-01-30 20:5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와. 완전 흥미로운데요. 왜 이 좋은 책이 절판일까, 아쉽네요.

cyrus 2015-01-31 09:05   좋아요 1 | URL
10년 전에 나온 책인데다가 많이 알려지지 않아서 절판된 것 같습니다.

만병통치약 2015-01-30 22:3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주 오래전에 들뢰즈와 가타리 책 본다고 까불었는데 요즘 다시 보니 뭔 정신에 읽었는지 모르겠어요 ㅋㅋ 글자만 본것 같아요

cyrus 2015-01-31 09:09   좋아요 1 | URL
저는 베이컨의 그림을 좋아해서 <감각의 논리>를 도서관에서 빌려서 읽었는데 들뢰즈의 책은 직접 사서 읽고 싶더라고요. 저도 이 책의 절반을 이해 못했어요. ㅎㅎㅎ
 
악마의 묘약 환상문학전집 1
E.T.A. 호프만 지음, 박계수 옮김 / 황금가지 / 2002년 7월
평점 :
품절


 

 

 

몇 년 전에 세상 어디엔가 사는 자신의 분신을 찾아주는 ‘도플갱어 사이트’가 화제가 된 적이 있었다. 이 사이트에 접속해 이름과 생년월일 혈액형 등을 검색하면 내 도플갱어가 어디에서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를 결과로 알려준다. 지금도 ‘도플갱어 사이트’라고 검색창에 치면 바로 찾을 수 있다. 이 사이트는 일본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총 여섯 개의 문항이 있는데 그중 하나가 어떤 사발을 좋아하는지 묻고 있다. 문항 보기로 나온 사발 종류는 일본에서만 볼 수 있다. 도플갱어를 찾는데 왜 하필 마음에 드는 사발을 골라야 하는 걸까. 난 일본산 사발이 어떻게 생겼는지도 잘 모르는데. 진짜 생뚱맞다. 도플갱어 사이트는 단순히 재미를 위해 만들어졌다. 사이트 결과 내용을 그대로 믿는 사람이 없을 거라고 믿는다.

 

도플갱어(doppelganger)는 독일어로 ‘이중으로 돌아다니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같은 공간과 시간에 자신과 똑같은 대상이나 환영을 보는 일종의 심리현상이다. 심리학·정신분석학적으로는 자기상 환시(autoscopy)라고 일컬어지며 정신적으로 큰 충격을 받거나 자신을 제대로 제어하지 못할 경우에 생기는 일종의 정신질환으로 간주한다. 최근 그 의미가 확대돼 똑같이 닮은 사람을 나타내는 말로 언급되기도 한다. 지역에 따라서 상징이나 의미는 조금씩 다르지만 분열된 대상을 보는 것은 머지않아 자신이 죽을 것임을 암시하는 징조로 해석하는 경우가 많으며 죽음을 부르는 도플갱어는 보통 본인의 눈에만 보인다고 한다. 단, 예외의 경우도 있다. 독일 문학의 거장 괴테는 젊은 시절 도플갱어 현상을 경험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83세가 될 때까지 장수를 누렸다.

 

도플갱어 현상은 많은 문학 작품의 소재가 되기도 했는데 유명 작품 몇 개만 언급하면 에드거 앨런 포의 《윌리엄 윌슨》, 오스카 와일드의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 도스또예프스끼의 《분신》 등이 잘 알려졌다. 여기서 도플갱어 현상을 작품의 소재로 처음 사용한 작가가 누군지 명확하게 밝힐 수 없지만 아마도 에른스트 테오도르 아마데우스 호프만이 첫 번째 작가가 되지 않을까 싶다. 호프만의 첫 번째 장편소설 《악마의 묘약》의 주인공은 도플갱어 현상으로 인해 끔찍하고도 불행한 사건이 연속적으로 휘말리게 된다.

 

호프만은 차이코프스키의 발레곡으로 유명한 ‘호두까기 인형’을 쓴 작가이기도 하다. 그의 작품들은 마치 꿈을 꾸듯이 환상의 세계가 펼쳐진다. 이러한 작품의 전개방식은 독일 낭만주의 문학의 전형적인 특징이다. 동화 같은 밝고 신비스러운 분위기부터 정체불명의 마성이 등장하는 괴기스러운 분위기까지 호프만이 창조한 세계는 무척 폭넓다. 이곳에 호프만의 작품 속 인물들은 환상과 현실의 경계를 산만하게 넘나든다.

 

《악마의 묘약》의 주인공 메다르두스는 외적 유혹에 쉽게 무너지는 수도사이다. 그는 금기의 성유물인 악마의 묘약을 몰래 마시게 되는데 이 묘약은 메다르두스의 내면에 있는 타락한 정신을 밖으로 분출하도록 만든다. 성녀 로잘리아와 닮은 미지의 여자에 한 눈에 반한 메다르두스는 펄펄 끓는 물이 냄비 밖으로 넘치는 듯한 뜨거운 정욕으로 인해 마음의 평안을 찾지 못한다. 결국, 메다르두스는 수도원 생활을 더 이상 할 수 없어서 로마로 향하는 특별 파견을 가게 된다. 수도원에서 불안한 입지에 처한 메다르두스에게 세속적 삶을 누릴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혼자 방랑하던 메다르두스는 절벽 위에 졸고 있는 빅토린이라는 사내를 발견한다. 여기서부터 메다르두스의 인생이 완전히 꼬이기 시작한다. 메다르두스가 위험하게 조는 빅토린을 깨우려는 순간 불행한 사고가 일어나고 만다. 화들짝 놀라 잠에서 깬 빅토린이 절벽 아래로 떨어져 버린 것이다. 메다르두스는 유품이 된 빅토린의 모자와 가방을 들고 사고 현장에서 벗어난다. 그런데 메다르두스와 빅토린은 얼굴과 체형이 너무나도 비슷했다. 빅토린의 유품을 든 메다르두스는 영락없는 빅토린이었다. 남작의 성에 들어가 빅토린처럼 행동한다. 남작의 딸 아우렐리에가 자신이 그토록 보고 싶어 했던 미지의 여인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서 또다시 불같은 사랑의 감정을 쏟아낸다. 수도원 밖으로 나온 메다르두스는 점점 추악한 존재로 변한다. 광기 어린 사랑으로 인해 남작 부인과 아우렐리에의 오빠를 살해하기에 이른다.

 

메다르두스의 광기는 도플갱어의 저주에서 비롯된다. 메다르두스는 빅토린이 죽은 줄 알고 빅토린의 삶을 가로챈다. 가짜 빅토린이 된 메다르두스는 남작의 성에 출입이 가능했고, 운명적으로 아우렐리에를 만나는 데 성공한다. 하지만 빅토린과 동일시한 삶을 살수록 메다르두스라는 이름의 진짜 정체성(영혼)은 죽어간다. 여기서부터 메다르두스의 자아가 본격적으로 분열되기 시작한다. 정체성 혼란을 겪는 메다르두스는 빅토린이 되려는 집착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지금까지 빅토린 행세를 해온 일들이 발각되면 아우렐리에와의 사랑이 물거품으로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악행을 저질렀고 강제로 억압당한 메다르두스의 정체성은 추악한 모습으로 왜곡된 ‘이중 인간’으로 부활한다. 이중 인간은 메다르두스 내면에 있는 악마가 되어 메다르두스의 악행을 이끌도록 유혹하는 동시에 죄책감에 시달리게 한다. 메다르두스는 자신이 만든 도플갱어를 만나면 환각 증상과 발작을 일으키는데 호프만은 자기상 환시에 고통스러워하는 인물을 실감나게 묘사했다.      

 

호프만의 《악마의 묘약》은 공포소설(혹은 괴기소설)의 특징을 지녔지만, 독자를 당황하게 하는 불가사의한 요소만 지루하게 나열하지 않는다. 정체성 분열에서 비롯된 끔찍한 망상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한순간에 악마로 돌변하는 메다르두스의 심리적 변화는 소설에 긴장감을 불어넣는다. 메다르두스는 이중 인간이 추악한 자아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고 참회한다. 소설은 어두운 충동을 스스로 극복해서 종교로 귀의하는 참된 인간상을 보여줌으로써 결말을 짓는다. 기독교적 사상이 짙게 배어 있는 이야기는 기괴한 분위기가 이야기 전체를 압도하는 공포소설에서 벗어나는 한계가 있다. 그래도 《악마의 묘약》은 불가사의한 소재인 도플갱어를 그로테스크하게 묘사하는 데 성공했으며 훗날 포와 오스카 와일드의 등장을 예고하는 기념비적 작품으로 평가받아야한다. 황금가지 환상문학전집 시리즈의 첫 번째 작품으로 내세운 이유가 있다. 그런데 현재 품절이다. 지금은 오십 권 족히 넘는 장르문학 작품을 소개한 어엿한 문학전집이 되었는데 그 시작을 알리는 첫 번째 책을 재출간하지 않는 출판사의 태도가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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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1-30 15:3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1-30 18:5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1-31 10:51   URL
비밀 댓글입니다.

곰곰생각하는발 2015-01-30 18: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매우 독특한 양반이죠. 호프만....
악마의 묘약`이었나요. 프로이트가 악마의 묘약에 대해 자세히 설명한 적이 있죠.
꽤 분량이 많았던 것 같던데... 아, 뭐였죠. 생각이 안 나네요.. ㅎㅎㅎㅎ

cyrus 2015-01-30 18:53   좋아요 0 | URL
호프만의 작품으로 처음 읽은 것이 ‘모래 사나이’였어요. 저도 확실하게 아는 것은 아니지만, 곰발님이 말씀하시는 프로이트가 분석한 호프만의 작품이 ‘모래 사나이’일 겁니다. 문학과 지성사에 나온 호프만 단편선에 ‘모래 사나이’에 대한 프로이트의 분석이 짧게 나온 걸로 기억합니다. 그런데 ‘악마의 묘약’도 심리학 이론을 들이대면서 분석하기 딱 좋은 텍스트입니다. ^^

곰곰생각하는발 2015-01-30 19:24   좋아요 0 | URL
아, 마자요. 마자요. 모래인간`입니다. 고, 뭐냐...
언캐니 설명하면서 언급한소설이 모래사나이였죠. 참 재미있게 읽었던,인상깊게 읽은 논문인데 까먹었었네요..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