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마의 묘약 환상문학전집 1
E.T.A. 호프만 지음, 박계수 옮김 / 황금가지 / 2002년 7월
평점 :
품절


 

 

 

몇 년 전에 세상 어디엔가 사는 자신의 분신을 찾아주는 ‘도플갱어 사이트’가 화제가 된 적이 있었다. 이 사이트에 접속해 이름과 생년월일 혈액형 등을 검색하면 내 도플갱어가 어디에서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를 결과로 알려준다. 지금도 ‘도플갱어 사이트’라고 검색창에 치면 바로 찾을 수 있다. 이 사이트는 일본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총 여섯 개의 문항이 있는데 그중 하나가 어떤 사발을 좋아하는지 묻고 있다. 문항 보기로 나온 사발 종류는 일본에서만 볼 수 있다. 도플갱어를 찾는데 왜 하필 마음에 드는 사발을 골라야 하는 걸까. 난 일본산 사발이 어떻게 생겼는지도 잘 모르는데. 진짜 생뚱맞다. 도플갱어 사이트는 단순히 재미를 위해 만들어졌다. 사이트 결과 내용을 그대로 믿는 사람이 없을 거라고 믿는다.

 

도플갱어(doppelganger)는 독일어로 ‘이중으로 돌아다니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같은 공간과 시간에 자신과 똑같은 대상이나 환영을 보는 일종의 심리현상이다. 심리학·정신분석학적으로는 자기상 환시(autoscopy)라고 일컬어지며 정신적으로 큰 충격을 받거나 자신을 제대로 제어하지 못할 경우에 생기는 일종의 정신질환으로 간주한다. 최근 그 의미가 확대돼 똑같이 닮은 사람을 나타내는 말로 언급되기도 한다. 지역에 따라서 상징이나 의미는 조금씩 다르지만 분열된 대상을 보는 것은 머지않아 자신이 죽을 것임을 암시하는 징조로 해석하는 경우가 많으며 죽음을 부르는 도플갱어는 보통 본인의 눈에만 보인다고 한다. 단, 예외의 경우도 있다. 독일 문학의 거장 괴테는 젊은 시절 도플갱어 현상을 경험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83세가 될 때까지 장수를 누렸다.

 

도플갱어 현상은 많은 문학 작품의 소재가 되기도 했는데 유명 작품 몇 개만 언급하면 에드거 앨런 포의 《윌리엄 윌슨》, 오스카 와일드의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 도스또예프스끼의 《분신》 등이 잘 알려졌다. 여기서 도플갱어 현상을 작품의 소재로 처음 사용한 작가가 누군지 명확하게 밝힐 수 없지만 아마도 에른스트 테오도르 아마데우스 호프만이 첫 번째 작가가 되지 않을까 싶다. 호프만의 첫 번째 장편소설 《악마의 묘약》의 주인공은 도플갱어 현상으로 인해 끔찍하고도 불행한 사건이 연속적으로 휘말리게 된다.

 

호프만은 차이코프스키의 발레곡으로 유명한 ‘호두까기 인형’을 쓴 작가이기도 하다. 그의 작품들은 마치 꿈을 꾸듯이 환상의 세계가 펼쳐진다. 이러한 작품의 전개방식은 독일 낭만주의 문학의 전형적인 특징이다. 동화 같은 밝고 신비스러운 분위기부터 정체불명의 마성이 등장하는 괴기스러운 분위기까지 호프만이 창조한 세계는 무척 폭넓다. 이곳에 호프만의 작품 속 인물들은 환상과 현실의 경계를 산만하게 넘나든다.

 

《악마의 묘약》의 주인공 메다르두스는 외적 유혹에 쉽게 무너지는 수도사이다. 그는 금기의 성유물인 악마의 묘약을 몰래 마시게 되는데 이 묘약은 메다르두스의 내면에 있는 타락한 정신을 밖으로 분출하도록 만든다. 성녀 로잘리아와 닮은 미지의 여자에 한 눈에 반한 메다르두스는 펄펄 끓는 물이 냄비 밖으로 넘치는 듯한 뜨거운 정욕으로 인해 마음의 평안을 찾지 못한다. 결국, 메다르두스는 수도원 생활을 더 이상 할 수 없어서 로마로 향하는 특별 파견을 가게 된다. 수도원에서 불안한 입지에 처한 메다르두스에게 세속적 삶을 누릴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혼자 방랑하던 메다르두스는 절벽 위에 졸고 있는 빅토린이라는 사내를 발견한다. 여기서부터 메다르두스의 인생이 완전히 꼬이기 시작한다. 메다르두스가 위험하게 조는 빅토린을 깨우려는 순간 불행한 사고가 일어나고 만다. 화들짝 놀라 잠에서 깬 빅토린이 절벽 아래로 떨어져 버린 것이다. 메다르두스는 유품이 된 빅토린의 모자와 가방을 들고 사고 현장에서 벗어난다. 그런데 메다르두스와 빅토린은 얼굴과 체형이 너무나도 비슷했다. 빅토린의 유품을 든 메다르두스는 영락없는 빅토린이었다. 남작의 성에 들어가 빅토린처럼 행동한다. 남작의 딸 아우렐리에가 자신이 그토록 보고 싶어 했던 미지의 여인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서 또다시 불같은 사랑의 감정을 쏟아낸다. 수도원 밖으로 나온 메다르두스는 점점 추악한 존재로 변한다. 광기 어린 사랑으로 인해 남작 부인과 아우렐리에의 오빠를 살해하기에 이른다.

 

메다르두스의 광기는 도플갱어의 저주에서 비롯된다. 메다르두스는 빅토린이 죽은 줄 알고 빅토린의 삶을 가로챈다. 가짜 빅토린이 된 메다르두스는 남작의 성에 출입이 가능했고, 운명적으로 아우렐리에를 만나는 데 성공한다. 하지만 빅토린과 동일시한 삶을 살수록 메다르두스라는 이름의 진짜 정체성(영혼)은 죽어간다. 여기서부터 메다르두스의 자아가 본격적으로 분열되기 시작한다. 정체성 혼란을 겪는 메다르두스는 빅토린이 되려는 집착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지금까지 빅토린 행세를 해온 일들이 발각되면 아우렐리에와의 사랑이 물거품으로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악행을 저질렀고 강제로 억압당한 메다르두스의 정체성은 추악한 모습으로 왜곡된 ‘이중 인간’으로 부활한다. 이중 인간은 메다르두스 내면에 있는 악마가 되어 메다르두스의 악행을 이끌도록 유혹하는 동시에 죄책감에 시달리게 한다. 메다르두스는 자신이 만든 도플갱어를 만나면 환각 증상과 발작을 일으키는데 호프만은 자기상 환시에 고통스러워하는 인물을 실감나게 묘사했다.      

 

호프만의 《악마의 묘약》은 공포소설(혹은 괴기소설)의 특징을 지녔지만, 독자를 당황하게 하는 불가사의한 요소만 지루하게 나열하지 않는다. 정체성 분열에서 비롯된 끔찍한 망상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한순간에 악마로 돌변하는 메다르두스의 심리적 변화는 소설에 긴장감을 불어넣는다. 메다르두스는 이중 인간이 추악한 자아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고 참회한다. 소설은 어두운 충동을 스스로 극복해서 종교로 귀의하는 참된 인간상을 보여줌으로써 결말을 짓는다. 기독교적 사상이 짙게 배어 있는 이야기는 기괴한 분위기가 이야기 전체를 압도하는 공포소설에서 벗어나는 한계가 있다. 그래도 《악마의 묘약》은 불가사의한 소재인 도플갱어를 그로테스크하게 묘사하는 데 성공했으며 훗날 포와 오스카 와일드의 등장을 예고하는 기념비적 작품으로 평가받아야한다. 황금가지 환상문학전집 시리즈의 첫 번째 작품으로 내세운 이유가 있다. 그런데 현재 품절이다. 지금은 오십 권 족히 넘는 장르문학 작품을 소개한 어엿한 문학전집이 되었는데 그 시작을 알리는 첫 번째 책을 재출간하지 않는 출판사의 태도가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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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1-30 15:3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1-30 18:5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1-31 10:51   URL
비밀 댓글입니다.

곰곰생각하는발 2015-01-30 18: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매우 독특한 양반이죠. 호프만....
악마의 묘약`이었나요. 프로이트가 악마의 묘약에 대해 자세히 설명한 적이 있죠.
꽤 분량이 많았던 것 같던데... 아, 뭐였죠. 생각이 안 나네요.. ㅎㅎㅎㅎ

cyrus 2015-01-30 18:53   좋아요 0 | URL
호프만의 작품으로 처음 읽은 것이 ‘모래 사나이’였어요. 저도 확실하게 아는 것은 아니지만, 곰발님이 말씀하시는 프로이트가 분석한 호프만의 작품이 ‘모래 사나이’일 겁니다. 문학과 지성사에 나온 호프만 단편선에 ‘모래 사나이’에 대한 프로이트의 분석이 짧게 나온 걸로 기억합니다. 그런데 ‘악마의 묘약’도 심리학 이론을 들이대면서 분석하기 딱 좋은 텍스트입니다. ^^

곰곰생각하는발 2015-01-30 19:24   좋아요 0 | URL
아, 마자요. 마자요. 모래인간`입니다. 고, 뭐냐...
언캐니 설명하면서 언급한소설이 모래사나이였죠. 참 재미있게 읽었던,인상깊게 읽은 논문인데 까먹었었네요..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