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아라비안 나이트 살인 ㅣ 노블우드 클럽 5
존 딕슨 카 지음, 임경아 옮김 / 로크미디어 / 2009년 9월
평점 :
절판
추리소설에서 비중 있는 조연은 범인과 탐정의 조수 및 동료이다. 탐정의 동료에 형사도 포함된다. 형사가 추리소설의 주인공, 그러니까 주연이 되어 사건을 해결하는 추리소설도 있다. 그렇지만 탐정이 주연이 되면 형사는 탐정의 추리력을 한껏 돋보이게 하는 역할에 머무른다. 누구도 풀지 못한 수수께끼의 사건을 형사가 아닌 밖에서 굴러들어온 탐정이 갑자기 툭 튀어나와 해결해버린다. 탐정이 주인공인 추리소설의 전개 방식은 항상 이런 식이다. 일개 사립탐정이 높은 직위에 있는 형사 몇 명들보다 사건 해결에 뛰어난 수완을 보이도록 하는 인물 설정은 코난 도일의 홈즈 시리즈에서 많이 볼 수 있다. 런던 경시청에 소속된 경감, 형사들은 어려운 사건이 있으면 홈즈의 조언을 듣기 위해 그가 사는 하숙집에 직접 찾아간다. 레스트레이드 경감은 홈즈 시리즈의 첫 작품《주홍색 연구》부터 시작해서 여러 사건에 자주 등장하는데 홈즈는 두뇌 회전력이 둔한 레스트레이드를 무시한다. 홈즈의 추리 실력은 경시청뿐만 아니라 지역 경찰들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몇몇 형사는 홈즈가 사건에 개입해서 수사하는 것을 대놓고 불만을 표출하기도 한다. 자신이 맡는 사건에 탐정이 개입해서 수사를 펼치는 모습을 보면 약간의 경쟁심과 시기심이 생긴다. 사건을 해결하면서 얻을 수 있는 명예가 사립탐정이 차지한다면 형사 입장에서는 자존심 상하고 경찰의 위상이 떨어진다. 그래서 홈즈는 가끔 사건 해결의 공로를 경찰에게 돌린다. 사건은 홈즈가 해결했지만, 신문에서는 경찰이 해결했다는 식으로 알려진다.
머리 좋은 탐정과 이보다 한 수 아래 형사의 조합은 지금까지도 추리물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고전적인 방식이다. 도일의 문학적 유산은 《소년탐정 김전일》과 《명탐정 코난》으로 이어진다. 《소년탐정 김전일》의 겐모치 이사무(한국어판에서는 이사무)와 《명탐정 코난》의 메그레 쥬죠(골롬보 반장)은 머리 좋은 젊은 주인공들(김전일과 코난)의 활약에 미치지 못하지만, 이들의 존재감은 음식의 싱거운 맛에 간을 맞춰주는 소금과 같다. 특히 메그레 반장은 소설과 영화를 통틀어 추리물 중에서 가장 관대한 '대인배'다. 코난과 소년 탐정단(아름이, 세모, 뭉치)이 사건 현장에 함부로 들어와도 쫓아내지 않는다. 일단 코난의 추리력을 믿어 본다. 코난이 사건 현장에 나타나면 사건이 술술 잘 풀렸으니까.
독자는 형사보다 월등히 앞서는 탐정의 활약상에 열광하지만, 추리작가 입장에서는 진부한 전개 방식에만 안주하는 것을 원하지 않을 것이다. 전작을 뛰어넘을 수 있는 대담한 트릭과 이전 작품에서 보지 못한 새로운 구성을 선보이고 싶어 한다. 하지만 작가라는 직업의 운명은 늘 그렇듯이 신작에 대한 독자의 기대감을 부담스러워 한다. 홈즈 시리즈로 가난한 의사에서 최고의 인기 작가가 된 도일도 창작의 압박감을 피할 수 없었다. 도일은 하늘을 찌르는 홈즈의 인기를 감당하지 못해 1893년에 《마지막 사건》을 발표한다. 이 작품에서 홈즈는 라이헨바흐 폭포에서 악당 모리어티 교수와 싸우다가 죽는다. 그러자 독자들의 항의 편지가 빗발치는 바람에 10년 뒤에 홈즈가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아 런던으로 돌아오게 된다는 《빈집의 모험》을 발표했다.
도일 이외에도 개성 있는 탐정을 창조한 추리작가들이 많지만, 그중에 존 딕슨 카는 도전 정신이 넘치는 추리작가다. 카가 창조한 주인공만 해도 앙리 방코랭, 기드온 펠 박사 그리고 헨리 메리베일 경이 있다. 또 카는 해마다 작품 한 권씩을 발표할 정도로 다작 작가에 속한다. 카는 글을 쓰기 시작하면 밤새도록 커피를 마시고 줄담배를 피울 정도로 왕성한 창작욕을 보여줬다. 《아라비안 나이트 살인》(The Arabian Nights Murder)은 《세 개의 관》(동서문화사, 2003)을 발표한 이듬해에 나온 작품이다. 두 작품 다 기드온 펠 박사가 등장한다. 그러나 《아라비안 나이트 살인》은 이전에 나온 펠 박사 시리즈와 사뭇 다른 독특한 특징을 가지고 있다. '사건 발생-제2의 사건 발생(혹은 제3, 4의 사건까지 발생)-추리-사건 해결'이라는 추리소설의 단순한 전개 구조를 취하면서도 사건 진술과 수사 방식의 비중이 꽤 많은 편이다. 연속으로 발생하는 기이한 사건들을 경찰 관계자 세 명의 시선으로 나누어 소개하고 있다. 아일랜드 출신 경찰 부서장 존 캐러더스 형사, 영국 출신 경찰 부국장 암스트롱 경 그리고 스코틀랜드 출신이며 펠 박사 시리즈의 명조연 해들리 총경, 이 세 사람은 아라비안 나이트 살인 사건을 둘러싸고 다양한 방식으로 수사를 펼친다. 세 사람은 셰에라자드가 되어 자신들이 조사한 아라비안 나이트 살인 사건의 전모를 펠 박사에게 밤새도록 들려준다.
카의 작품이 오랫동안 독자들에게 사랑을 받는 이유는 실제로 일어나면 미제로 남을법한 사건들이 꼬리에 꼬리를 무고 일어난다는 점이다. 《아라비안 나이트 살인》을 처음 읽는 독자라면 "뭐, 이런 사건이 다 있냐?"라고 하면서 적잖이 놀랄 것이다. 가짜 흰색 수염을 붙인 정체불명의 노인이 담 위에서 스파이더맨처럼 갑자기 나타나 호스킨스 경사를 공격한다. 경사는 갑자기 공격하는 노인을 주먹 한 방에 쓰러뜨려 기절시키는 데 성공한다. 그런데 호송차를 부르기 위해 경사가 잠시 한 눈 판 사이에 길바닥에 쓰려져 있던 노인은 연기처럼 사라져버린다. 캐러더스 형사는 여러 증언을 토대로 유령 같은 노인이 동서양 고대 유물을 소장한 웨이드 박물관으로 향했을 것으로 생각하고, 혼자 직접 그곳에 간다.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는 박물관 지하에서 캐더러스는 혼자 춤을 추는 박물관 안내원 프루언을 만난다. 그는 프루언에게 노인을 목격했냐고 물어보지만, 확실한 증언을 얻지 못한다. 캐러더스는 이에 포기하지 않고 박물관 내부를 샅샅이 살펴보다가 오래된 영국식 마차 안에 가짜 수염을 단 노인으로 추정되는 시체를 발견한다. 그런데 시체의 얼굴에 붙어 있는 수염은 흰색이 아니라 검은색이다. 살인 사건의 실체를 한 꺼풀씩 벗길수록 수상한 인물들이 한 명씩 등장한다. 일부러 사건의 범인을 숨기려고 하듯이 용의 선상에 오른 인물들의 진술은 점점 늘어난다.
이 소설에서 가장 돋보이는 장면은 해들리의 활약이다. 그동안 펠 박사 앞에서면 그의 느긋한 추리력에 된통 혼쭐났던 해들리가 혼자서 살인 사건을 거의 해결하는 능력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소설의 피날레를 장식하는 자는 묵묵히 세 사람의 이야기를 들은 주인공 펠 박사가 된다. 이 소설에서 펠 박사가 나오는 장면은 많지 않다. 심지어 캐러더스 형사, 암스트롱 경, 해들리보다 등장 횟수와 대사가 적다. 펠 박사가 나오는 장면은 경찰 관계자 세 사람에 대한 소개로 시작되는 프롤로그와 펠 박사가 복잡하게 꼬인 사건 해결의 매듭을 단번에 풀어버리는 에필로그뿐이다. 해들리는 사건의 범인을 지목하는 데 성공하지만, 이를 뒤집는 진술이 나오는 바람에 썩 만족스럽지 않은 상황으로 사건이 일단락된다. 해들리는 사건을 완전히 해결할 수 있는 1%를 발견하지 못했다. 그가 놓친 1%는 범인이 가까스로 포위망에 탈출하는 골든타임이 된다. 펠 박사는 세 사람의 긴 진술만 듣고 아라비안 나이트 살인 사건의 진짜 범인을 찾는다.
펠 박사의 존재감은 항상 소설이 끝나가는 무렵에 드러난다. 지루하게 이어지는 진술을 끝까지 듣고 난 뒤에 펠 박사는 꾹 닫고 있던 입을 연다. 그만큼 펠 박사 시리즈를 읽으려면 인내심이 필요하다. "제게는 놀랍기도 하고, 고통스럽기도 하고 그렇군요."(384쪽) 세 사람의 이야기를 끝까지 다 들은 펠 박사가 처음으로 꺼낸 말이다. 펠 박사의 말은 《아라비안 나이트 살인》을 다 읽고 나면서 느낀 나의 소감이라고 보면 된다. 도저히 풀릴 것 같지 않은 사건이 펠 박사가 너무나 쉽게 해결해버리는 결말에 놀라웠고, 세 명의 경찰 관계자들의 이야기를 읽는 것이 고통스러웠다. 지나치게 진술 위주로 진행되는 이야기 때문에 배보다 배꼽이 커버린 작품이 되고 말았다.
※ 소설을 읽다보면 《아라비안 나이트》와 밀접하게 관련 있는 정보가 까메오처럼 나온다. 58쪽에 언급된 흰색, 푸른색. 노란색, 빨간색의 물고기로 변하는 사람들은 《천일야화》 1권(열린책들)의 '어부 이야기'에 삽입된 한 장면이다. 하룬 알 라시드(64쪽)는 《천일야화》 에 많이 등장하는 바그다드의 군주이다. 안토니 갈런드(94쪽)는 프랜시스 버턴보다 먼저 유럽에 《천일야화》 를 소개한 프랑스인이다. 프랑스어는 '앙투안 갈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