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라딘과 비타북스 출판사(http://blog.naver.com/vita_books) 마케팅부서에 아이디어를 제안합니다. ‘비타북스 500’ 북파우치 500명 구매자 한정으로 사은품을 만든다면 출판사 인지도를 높일 수 있는 좋은 마케팅이라고 생각합니다. 말도 안 되는 아이디어처럼 보여도 한정판 북파우치가 나온다면 이걸 원하는 사람들이 있을 겁니다. 알라딘에서 특별 사은품을 사면 덤으로 책을 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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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피북 2015-04-18 10: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두 이 사진 페북에서 보긴 했는데 북파우치는 이해가되는데 이게 왜 3000만원인지는 이해를 못했어요ㅠㅠ 패러디인가요? 정치계의?

cyrus 2015-04-18 15:27   좋아요 0 | URL
성완종 전 경남기업 회장이 죽기 전에 경향신문과 인터뷰를 한 적이 있는데 비타500 박스에 3천만원을 담아서 이완구 총리에게 건넸다고 합니다. 이걸 출판사가 패러디한 겁니다. ^^

소금창고 2015-04-19 17: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이고 이런 패러디에 쓴웃음만 지어야하다니 국민들에겐 정말 정경유착의 비타오백이 쓴맛일 뿐입니다
 

 

 

 

 

 

 

 

 

 

 

 

 

 

 

 

 

4월 14일 오전 4시 7분(한국 시간) 영국 리버풀에 있는 안필드 경기장에서 리버풀과 뉴캐슬과의 프리미어리그 32라운드 경기가 치렀다. 특이한 점은 경기가 열리는 시각이다. 혹시 이 글의 첫 문장을 유심히 읽어본 독자라면 축구 경기가 정시가 아닌 7분 늦게 시작하는 이유에 대해서 궁금할 것이다. 대개 축구 경기는 정시 또는 30분에 맞춰 킥오프 휘슬이 울린다. 그렇지만, 이날만큼은 7분 뒤로 시계가 미뤄진다. 4시 7분에 킥오프 휘슬이 불기 전에 안필드에서 특별한 행사가 진행되었다. 리버풀과 뉴캐슬의 모든 선수가 6분 동안 그라운드 안에 미리 입장했고, 1분 동안 묵념했다.

 

 

 

 

 

 

 

 

 

안필드는 4만 명 이상의 관중을 수용할 수 있는 리버풀의 전용 구장이다. 적지 않은 리버풀 팬들은 묵념하는 동안 ‘Justice’라는 단어나 ‘96’이라는 숫자가 들어간 문구가 적힌 응원 머플러를 머리 위로 번쩍 들어 올린다. 4월 15일이 다가오는 날에 프리미어리그 경기가 치러지면 안필드뿐만 아니라 영국 내에서 열리는 모든 경기도 7분 늦게 시작한다. 1989년 4월 15일에 발생한 ‘힐스버러 참사 (Hillsboroufh Disaster)’를 추모하기 위해서다. 

 

 

 

 

 

모든 경기장 입구가 개방되자 관중들은 계속 관중석으로 들어왔고,

펜스 앞에 있는 관중들은 압사당한 위험에 노출되었음에도 탈출하지 못했다.

(힐스버러 참사가 발생하기 전에 촬영된 사진)

 

 

 

힐스버러 참사는 세계 축구 역사상 최악의 사고다. 1989년 4월 15일은 힐스버러 경기장에서 리버풀과 노팅엄 포레스트의 FA컵 준결승전이 치러질 예정이었다. FA컵은 프리미어리그 소속팀뿐만 아니라 2부, 3부 리그 축구팀들 모두 참여할 정도로 영국 축구팬들의 관심을 많이 받는 인기 있는 축구 대회다. 준결승전을 관람하기 위해 2만 여 명이 넘는 리버풀 팬이 힐스버러 경기장을 찾았다. 이 수많은 관중이 거의 포화 상태에 이른 좁은 경기장 안으로 한꺼번에 몰리는 현상이 발생했다. 경기장 수용 인원이 초과되면 경찰 또는 경기장 직원이 입구를 막아 입장하지 못한 관중들을 다른 입구로 이동할 수 있도록 안내를 해야 한다. 그런데 그 날에 경찰은 많은 관중들이 입장할 수 있도록 나머지 입구도 개방했다. 관중들이 더 들어오도록 만들었다. 이미 경기장 펜스 앞 관중석에 사람들이 매우 빽빽하게 몰려 있어서 압사당하는 끔찍한 사고가 발생한다. 관중석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고, 경기는 중단되었다. 다치지 않은 팬들은 부상당한 관중들을 살리기 위해 노력했으나 경찰은 이들의 행동을 경기장에 침입하여 노팅엄 프레스트 관중들과 맞서려는 훌리건의 소행으로 여겼고, 그들이 이동하지 못하도록 저지선을 쳤다. 관중들의 소란을 막으려는 경찰의 대응으로 인해 경기장 안으로 들어온 구급차는 고작 1대뿐이었다. 병원에 후송된 환자는 단 14명뿐이었고, 경기장 안에 죽어가는 관중들의 수는 점점 늘어났다. 이날 사고 당일에 94명의 관중들이 사망했고, 부상자는 2백 명이 넘었다. 사고가 일어난 지 며칠 후에 14살의 소년이 사망했고, 이 사고로 인해 4년간 혼수상태에 빠져 있던 관중까지 죽게 됨으로써 공식 사망자 수는 96명이 되었다. (1998년부터 지금까지 리버풀에 오랫동안 몸을 담았던 축구선수 스티븐 제라드의 사촌 형도 이 사고로 목숨을 잃었다)

 

사고 당시 영국 경찰은 사고의 원인을 허술한 안전 관리라는 이유를 들었다. 또 안전 수칙을 무시한 일부 리버풀 팬들 또한 사고의 책임이 전적으로 있다고 주장했다. 사고의 책임을 관중과 그 희생자들에게 돌렸던 영국 경찰은 이번 사고에 책임이 없다는 식으로 입장을 밝혔다. 경찰은 희생자들을 공격하는 언론 프레임을 만들기 위해 사실을 왜곡했다. 리버풀 관중들의 책임을 입증할만한 증거를 조작했다. 경찰의 프레임에 속아 넘어간 언론들도 리버풀 관중들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언론지 「더 선」은 힐스버러 참사 관련 기사에 부상을 당하지 않은 관중들은 다치거나 죽은 관중들의 지갑을 훔쳤으며, 경찰과 구조대원을 공격하는 훌리건에 가까운 광란적 행동을 보였다고 썼다. 「더 선」은 지나치게 선정적이면서도 자극적인 기사를 쓰는 일간지로 알려졌다. 힐스버러 경기장을 찾은 리버풀 팬들을 악의적으로 겨냥했고, 거짓말을 하면서까지 힐스버러 참사를 왜곡 보도를 했다. 여기에 마거릿 대처 총리가 이끄는 보수당도 공격에 가세했다. 보수당 입장에서는 노동계급이 많이 거주했던 리버풀을 중상모략하여 노동자들의 권리를 축소하는 동시에 보수당의 입지를 굳히려고 했다. 이런 기사가 나간 지 15년이 지나서야 더 선은 거짓 보도에 공식 사과를 했지만, 지금도 리버풀을 주도(主都)로 둔 머지사이드 주 사람들은 더 선에 반감을 보여 불매운동을 펼치고 있다.

 

힐스버러 참사는 각 분야에서 재난예방에 대한 경각심을 높이는 학습효과를 남겼다. 인명보호를 최고의 가치로 신속한 대응을 강조하는 재난대응 원칙 덕분에 영국의 축구장 안전은 세계 최고 수준을 자랑하게 된다. 이 사고는 25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반성과 진상 규명의 대상이 되고 있다. 2010년에 결성된 힐스버러 참사 진상조사위는 고위 경찰이 목격자의 진술 중에 자신들에게 불리한 내용을 의도적으로 삭제한 사실을 밝혀냈다. 2012년에 영국 보수당 총리 데이비드 캐머런은 경찰의 은폐에 대하여 공식 사과를 했다.

 

 

왼쪽은 리버풀 공식 엠블럼, 오른쪽은 던킨 도너츠가 만든 리버풀 엠블럼

 

 

안필드 경기장과 힐스버러 경기장에 96명의 사망자를 기리는 추모 비석이 세워져 있다. 리버풀 엠블럼에는 힐스버러 참사를 기리기 위한 횃불(성화)이 각각 왼쪽과 오른쪽에 그려져 있다. 리버풀의 공식 후원사 던킨 도너츠는 두 개의 횃불 대신 아이스커피를 대체한 새 리버풀 엠블럼 디자인을 공개했다가 리버풀 팬들의 반발을 산 적이 있었다. 2009년에 리버풀 소속 백업 골키퍼 샤를 이탕주는 경기 전 힐스버러 참사 추모 행사 도중 환한 미소로 춤을 추는 행동을 하여 물의를 빚어 다른 팀으로 옮겨야만 했다.

 

지금도 영국인들은 4월 15일이 다가오면 힐스버러 참사를 추모한다. 이 사고는 영국의 가슴을 관통하는 가슴 아픈 날로 기억한다. 단순히 96명의 희생자가 발생한 끔찍한 사고가 아니라 정의와 진실이 오랫동안 은폐되었던 최악의 사건으로 말이다. 영국인들이 이 사고로 얻은 커다란 교훈을 얻었다. 언제까지 정의와 진실을 숨길 수 없다는 점. 실추된 명예를 되찾으려는 힐스버러 참사 유가족들의 노력이 없었고, 진상위원회가 만들어지지 않았더라면 힐스버러 참사는 축구 역사상 최악의 사고로만 남았을 것이다.

 

 

 

 

 

 

4월 15일이 영국인들의 가슴을 아프게 하는 날이라면, 4월 16일은 우리가 절대로 잊어서는 안 되는 가슴 아픈 날이다. 힐스버러 참사는 어제 25주기를 맞았고, 세월호 사고는 1주기를 하루 앞두고 있다. 두 사고는 서로 비슷한 점이 있다. 영국 경찰은 힐스버러 참사의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목격자의 진술을 은폐했고, 우리나라 해경은 기본적 구조 매뉴얼을 지키지 못해 구조작업 상황 일지를 조작했다. 그러나 영국은 사고의 책임을 밝혀내는 데 성공했지만, 여전히 우리나라는 세월호 사고에 대한 진상 규명이 원활하게 진행되지 못하고 있다. 리버풀은 96명의 희생자를 잊지 않으려고 경기장 주변에 추모비를 세웠고, 경기가 열리면 묵념 행사를 한다. 창단 2년 만에 올해 V리그 챔피언에 오른 OK저축은행 배구팀은 안산 유니폼에는 'We Ansan!(우리는 안산!)'이라는 슬로건이 새겨져 있다. ‘We(위)’와 ‘An(안)’은 붉은색으로 칠했는데 비통에 빠진 안산 시민들에게 ‘위안’을 주겠다는 의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제 1년이 지났을 뿐인데 우리 사회에 세월호 사고를 추모하는 공감이 점점 사라지고 있다. 오늘 팽목항에 희생자 유가족들이 모여 위령제를 지냈다. 아직 세월호의 바다에 남아있는 상처는 여전한데 대통령과 장관은 해외 일정이나 국회 일정 때문에 추모 행사에 참여하지 않는다고 한다. 일부 국민은 세월호 추모에 반감을 보인다. 희생자 유가족들을 안타깝게 바라보던 대중의 시선은 이제 냉담한 시선으로 변했다. 심지어 일베 회원들은 세월호 희생자와 유가족들을 비하하기에 이른다. 세월호 희생자를 애도하는 노란 리본 마크에 일베를 인증하는 마크를 넣는 만행을 저지르기도 했다. 정치인들도 유가족들의 가슴에 못을 박는 망언을 내뱉는다. 진실규명은 고사하고, 유가족의 항의를 ‘선동꾼’이라고 폄훼하여 세월호 희생자들을 위로하기는커녕, 오히려 비아냥대는 현실이다. 여당은 세월호 사고 진상 규명 항의를 ‘종북’과 연관 지어 자신들의 정치적 입지를 지키려고 한다. 1989년 영국의 보수당처럼 대형 사고를 진영논리에 치우쳐 바라보는 여당의 태도는 희생자를 향한 애도를 무색하게 만든다. 정부는 세월호 희생자를 위한 사소한 추모마저 정의와 거리가 먼 불순한 행동으로 보는 듯하다. 도대체 그들이 생각하는 정의란 무엇일까? 

 

‘정의’는 인간이라면 지켜야 할 올바른 것이다. 퇴선 명령을 하지 않은 세월호 선장에 사형을 구형했다고 해서 사고 수사가 종결되는 것은 아니다. 정부가 세월호 선장을 사고의 원흉으로 지목하게 하여 “자! 이것으로 세월호 사고에 관한 이야기는 그만하자!”라고 한다면 세월호 사고는 최악의 해상 사고로만 기억하게 된다. 사고의 원인과 진실을 제대로 규명하지 못한 채 수사를 종결한다면 어쩌면 우리 사회는 힐스러버 참사 이후의 영국처럼 정의가 무용한 암흑의 시간을 보낼지도 모른다. 정부는 세월호 사고를 방관한 해경의 책임을 명명백백 밝힐 수 있도록 적극적인 자세로 나서야 한다. 나라를 다스리는 지도자가 사고 진상 규명을 소홀히 여기고 추모를 하지 않는다면 세월호는 망각의 바닷속으로 가라앉는다. 공감과 연대가 없는 사회에 희생자만 있고, 책임자는 없다. 세월호와 함께 가라앉은 정의를 인양할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과연 사망자 295명과 실종자 9명을 위한 정의가 밝혀지는 날은 올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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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피북 2015-04-15 22: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글에 공감을 더 누를 수 있게 한다면 밤새도록 누르고 싶네요. 한마디 한마디가 반성도 되었어요 내일을 잊고 지날뻔했는데 이웃님들 덕분에 망각했던 정신을 일으켰습니다

cyrus 2015-04-16 15:06   좋아요 0 | URL
이틀 전 새벽에 축구 경기를 보면서 영국인들의 성숙한 자세가 부러웠습니다. 이제 사고 1주년 지났는데 추모 열기를 부정적으로 보는 일부 국민들의 인식이 안타깝습니다.

cocomi 2015-04-16 00: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You cannot find peace by avoiding life! 매번 정면으로 부딪히지 않고 아니면 최소한의 예의나 공감을 보이지 않고 도망가는 것처럼 일단 피하고 보자는 태도 정말 비겁해요. 정말 ˝외교무능˝ ˝공감무능˝ 정부예요.

cyrus 2015-04-16 15:10   좋아요 0 | URL
오늘 팽목항에 대통령이 방문했다고 하던데 세월호 결정 발언을 지켜줬으면 좋겠습니다.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면 공감 무능 정부의 모습을 보여줄 뿐만 아니라 유가족들에게 또 한 번 가슴 아픈 상처를 줍니다.

transient-guest 2015-04-16 06: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치와 언론이 조직적으로 은폐하려고 하니까, 더욱 힘든거죠. 도대체 아이들이 죽어서 슬픈 부모들이 왜 `종북`이라는 소릴 들어야하며 경찰이 진압할 대상이 되는건지 알 수가 없어요. 정말 나쁜 놈들인거죠.

cyrus 2015-04-16 15:12   좋아요 0 | URL
세월호 사고를 진영논리로 바라보면 갈등과 진실 왜곡만 생길 뿐입니다. 여기에 가담하는 나쁜 놈들 때문에 엄숙해야 할 1주기 추모 분위기를 망치는 것 같습니다.
 
미겔 스트리트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92
V.S. 나이폴 지음, 이상옥 옮김 / 민음사 / 200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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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cene #1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으리라

 

귀소(歸巢). 동물이 자기 서식처로 되돌아오는 성질을 뜻한다. 우리는 귀소본능의 상징으로 연어를 가장 먼저 떠올린다. 멀리는 수천떨어진 바다에서 모천으로 되돌아오는 것을 보면, 미물의 귀소성에 경탄할 정도다. 그런데 연어의 행동요소를 동물학적 접근으로 설명한다면, 회귀본능이라고 해야 맞다. 귀소와 마찬가지로 회귀도 서식처로 향하는 본능을 의미한다. 두 용어는 비슷하지만 엄밀한 의미에선 차이가 난다. 둥지와 같은 특별한 서식처는 없지만 태어난 곳에서 일정 시기를 보내고 이곳을 떠나 청장년 시기를 타지에서 보낸 후 다시 영유아 시기의 기억이 있는 장소로 돌아오는 행동이 회귀본능이다. 그래서 연어는 민물에서 산란 후 바다에서 대부분 시간을 보내고, 생의 마지막 순간 산란을 위해 태어난 곳으로 되돌아오는 회귀본능을 지니고 있다. 연어에게 있어 자신이 태어난 하천으로 돌아와 새로운 세대를 잉태하게 하는 모천은 인생 한살이 고리의 종착점이자 시발점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회귀본능은 인생의 의미와 깊고 넓게 연관된다. 수구초심(首邱初心), 여우가 죽을 땐 자기가 살던 곳을 향해 머리를 둔다는 이 사자성어도 회귀본능의 또 다른 심미적 의미를 단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회귀본능은 단순히 특정 장소를 찾는 것이 아니라 생의 의미를 되짚는 본능의 구현이다. 망향에 대한 인간의 마음, 아니 본능적으로 각인된 회귀적 행동이야말로 일상의 압박에서 잠시나마 벗어나는 힘의 원천이 된다. 그렇지만, 모든 사람이 좋은 의미의 회귀본능을 느끼는 것은 아니다. 어떤 이는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2001년에 노벨 문학상을 받은 비디아다르 수라즈프라사드 나이폴은 귀소본능을 스스로 거부하는 중이다.

 

 

 

 

 

 

사진출처: 네이버 두산백과 (수도는 포트오브스페인)

 

 

그가 태어나고 자란 곳은 서인도제도에 있는 트리니다드 섬. 트리니다드 섬 기준으로 북동쪽에 토바고라는 작은 섬이 있는데 두 섬의 이름을 합친 트리니다드 토바고는 정식 국가 명칭이다. 트리니다드 섬은 오랫동안 영국의 지배를 받았으며 1962년에 독립국으로서 지위를 얻게 되었다. 나이폴은 1932년에 인도계 브라만 계급 출신의 부모로부터 태어났다. 16살에 해외 유학 장학금을 받게 되어 영국의 옥스퍼드 대학에 입학했다. 이때부터 나이폴은 영국에 정착하기 시작한다. 가족을 만나기 위해 트리니다드 섬을 떠난 지 10년 만에 고국으로 돌아온 적이 있다. 그렇지만, 나이폴이 트리니다드에서 보낸 시간은 영국과 그 밖의 지역에 머물렀던 시간에 비하면 그리 많지 않다. 나이폴은 특별한 목적이 없으면 트리니다드 섬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현재 여든을 넘은 나이에 이른 네이폴은 영국 서부의 작은 마을에 아내와 함께 거주하고 있다고 한다. 고령의 나이를 생각한다면, 나이폴도 귄터 그라스가 향했던 천국으로 가는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 과연 나이폴은 세상을 떠나기 전에 마지막으로 트리니다드 땅을 밟을 것인가. 그는 언론에 나서는 것을 피하는 성격이라서 트리니다드를 자주 방문하지 않는 이유를 공식 석상에서 분명하게 밝힌 적이 없다.

 

 

 

 Scene #2  실패자들이 사는 섬  

 

나이폴을 서인도제도 출신의 작가로 분류하지만, 혈통을 따져보면 트리니다드 섬에 태어나고 자란 인도인이다. 2001년에 나이폴이 노벨 문학상 수상자로 결정되었다는 발표를 들은 후,내 나라 영국과 내 선조의 조국 인도에 엄청난 선물을 주었다고 말했다. 아이러니하게도 나이폴은 인도와 트리니다드 섬을 지배했던 종주국인 영국도 자신의 조국이라고 밝혔다. 사실 노벨상을 받기 전에도 나이폴은 영국에서 승승장구하던 작가였다. 부커상을 비롯한 영국 내 중요한 문학상을 받은 것은 물론이고, 1990년 엘리자베스 여왕으로부터 기사 작위를 수여받았다. 아마도 나이폴은 성공의 길이 보장되는 땅을 자신의 나라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나이폴은 트리니다드 섬에 살면서 카리브 해 일대를 여행한 경험을 토대로 1962년에 대서양 중간 항로라는 여행기를 발표했다. 트리니다드 섬에 대한 나이폴의 생각을 엿볼 수 있는데 이 작은 섬나라를 냉소적으로 묘사한 내용이 눈에 띈다.

 

그곳에서는 성공담이라고는 들어볼 수 없고 오직 실패담만 들을 수 있었다. 재기발랄한 사람들이라든가 장학금 취급자들은 어려서 죽거나, 미쳐버리거나, 알코올 중독자가 되었다. (중략) 트리니다드에서는 개인적 재능이 한갓 쓸모없는 것이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재능보다도 음모를 앞세웠다. 트리니다드 사람들은 크고 작은 음모를 꾸미고 실천하는 데 아주 숙달되어 있었다. (미겔 스트리트작품해설 중에서, 294~295)

 

나이폴의 눈에 비친 트리니다드 섬 주민들의 모습은 장자에 나오는 와우각상지쟁’(蝸牛角上之爭)이었다. 트리니다드 섬에는 인생에 실패하는 자들이 가득했고, 더 이상 성공할 기회가 보장되어 있지 못했다. 오랫동안 영국의 지배를 받은 탓에 트리니다드 섬 주민들의 민족적 자부심은 한층 떨어졌다. 섬 주민들은 노력이 가져다주는 성공이라는 행복한 열매의 맛을 느끼지 못했고, 치졸한 방법으로 단기간에 성공적인 삶을 누리고 싶었다. 이러한 패습이 굳어진 채 트리니다드 섬 주민들은 코딱지만 한 땅 위에 다투었다.

 

와우각상지쟁의 이야기는 대서양 중간 항로가 발표되었던 해 이전에 나온 그의 세번째 소설 미겔 스트리트에 확인할 수 있다. 트리니다드 섬에서 생활했던 작가의 어린 시절이 반영된 자서전적 요소가 있는 소설이다. 17편의 단편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마지막에 나오는 이야기 1(내가 미겔 스트리트를 떠난 경위)을 제외하고는 어린 시절 나이폴이라고 볼 수 있는 화자 의 시점으로 영국령 트리니다드 섬의 현실을 바라본다. 얼핏 그가 소설에서 묘사한 트리니다드 섬 사람들의 이야기는 평범하면서도 소박해 보이지만, 이야기 속 등장인물들은 사회적 한계에 부닥쳐 실패와 좌절을 겪게 되며 현실에 썩 만족스러워하지 못한다. 이로 인해 그들이 마주치게 되는 미래 또한 썩 유쾌하지 않다.

 

그가 선택한 직업의 주인공 엘리아스는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교에서 시행하는 고교 과정 자격시험 3급에 합격할 정도로 똑똑한 머리를 자랑하지만, 그다음 시험에서 빈번히 낙방하여 고배를 마신다. 취업이 어려워진 엘리아스는 주민들의 기대와는 달리 의사가 아닌 위생 검시관이 된다. 섬을 떠나 영국에서 시험을 치르는 엘리아스의 모습은 영국 대학 입학에 도전했던 나이폴의 학창 시절과 비슷하다. 그렇지만, 나이폴과 정반대로 엘리아스는 영국 사회로 향하는 신분적 상승으로의 진입에 실패한다. 엘리아스에게 영국은 식민지 주민의 성공을 가로막는 거대한 장벽이었고, 나이폴 또한 마찬가지였다. ‘실패자들의 섬을 떠나기에 앞서 영국이라는 장벽을 넘어서야 그토록 갈망하던 성공의 길을 볼 수 있을 거라고 장담했다. B. 워즈워스는 자신이 직접 쓴 시를 싸구려 가격으로 파는 불쌍한 시인의 이야기다. 퍼스트 네임의 'B'는 '블랙'의 약자다. 이름만 들어도 거창하다. 영국에서 이름을 날렸던 계관 시인의 이름과 비슷해서 그런지 블랙 워즈워스는 자신이 이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시인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가 처한 현실은 너무 어둡다. 워즈워스는 정식으로 문단에 등단하지 않았고, 섬 주민들은 그의 시 쓰기에 관심이 없다. 유일하게 화자 만 괴짜 시인의 행보를 지켜본다. 하지만 워즈워스의 삶은 절망적이다. 애초에 그는 밥벌이도 제대로 하지 못해 실패한 삶을 사는 섬 주민일 뿐이다. 워즈워스에게 시는 문학적 낭만의 소산이 아니라 성공하지 못하는 현실을 도피하기 위한 망상적 문장에 불과하다.

 

 

 

 Scene #3  나이폴이 트리니다드 섬을 떠난 경위

    

제 능력으로 성공하지 못하는 주민들이 많을수록 트리니다드 섬에서 도덕은 개나 줘야 할 무의미한 단어가 된다. 열심히 물건을 만들었던 성실한 목수 포포는 절도범이 되고(이름 없는 물건), 이밖에도 각각의 이야기에 나오는 인물들은 사기, 뇌물, 직무 유기 등 크고 작은 범죄 행위를 저지른다. 도덕적으로 타락한 사회는 사회 구성원 간의 신뢰가 사라지고, 사회적 결속력도 떨어진다. 미겔 스트리트의 트리니다드 섬은 평화로운 작은 섬나라가 아니다. 미겔 스트리트 주변에는 무시무시한 일들이 펼쳐지고, 현실에 적응하지 못하는 부적응자들이 생긴다. 섬 내부에는 도덕과 정신을 병들게 하는 기운이 가득하다. 희망을 향한 탈출구마저 보이지 않는다. 외부 세계와 단절된 섬을 나이폴은 탈출하고 싶었고, 기어이 성공하게 된다. 나이폴과 마찬가지로 화자도 주변 사람들처럼 실패자가 되지 않기 위해 약학 공부를 하러 영국으로 떠나게 된다(내가 미겔 스트리트를 떠난 경위).

 

미겔 스트리트는 나이폴을 세계적인 작가로 알리게 해준 소설이다. 하지만 나이폴 본인에게 이 소설은 트리니다드에 대한 안 좋은 추억으로 가득한 개인적 악몽을 기록한 암울한 자서전이다. 나이폴은 대서양 중간 항로에서 영국에 살면서 가장 끔찍했던 악몽이 바로 트리니다드 섬으로 되돌아가는 것이라고 밝혔다. 비록 나이폴의 몸은 고향을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머리만은 회소본능을 거스를 수 없었다. 나이폴은 고통스러운 기억이 남아있는 트리니다드 섬으로 회귀하여 미겔 스트리트를 통해 전통과 도덕 그리고 사회 전체가 무너져가는 섬에 사는 군상을 생생하게 그려냈다. 그런데 암울한 미겔 스트리트를 읽다 보면, 작가의 행보가 조금은 씁쓸하게 느껴진다. 오늘날 나이폴의 문학을 세계의 어떤 문명에도 소속감을 느끼지 않는 고독한 이방인의 글쓰기로 평가하는데 노벨상 수상 발표 소식 이후에 언급한 소감과 영국에 정착한 생활 등은 그의 문학적 입지와 상당히 동떨어져 보인다. 나이폴의 또 다른 작품들도 읽어봐야겠지만, 나이폴이 3세계 문학의 기수’로 추앙받을 자격이 있는지 의문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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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으른독서가 2015-04-14 23: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V.S 나이폴은 영어권에서 정말 유명한 작가죠. 작가에 대해 cyrus 님이 쓰신 `스스로 귀소본능을 거부하는` 이란 표현이 이런저런 생각을 하게 만드네요. 좋은 글 잘 보고 가요.

cyrus 2015-04-16 15:20   좋아요 0 | URL
답글이 늦었습니다. 이제야 댓글을 확인했습니다. 이제부터 나이폴의 소설들을 읽어보려고 합니다. 아직 나이폴의 문학에 대해서 고작 10%만 알았을 뿐인데요. 긴 내용의 잡문을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cocomi 2015-04-15 02:2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도 몇 권밖에 읽지 못했지만 나이폴 작품읽을 때마다 비슷한 느낌을 받아요. 제3세계 작가라고 하면 작품에 제3세계의 문제의식이 담겨있어야 하지만 나이폴은 어쩐지 정말 문제점만을 부각시키는 면이 있는 것 같아요. 어쩌면 나이폴이 트리니다드 토바고에서 태어나기는 했지만 원래 인도에서 도제계약 노동자로 이민온 이민자 가정 출신이었기 때문에 트리니다드를 얼만큼 자신의 고향으로 느끼며 살았을지 모르겠고 또 영국에서 교육을 받았으니 삼중적으로 문화적 지리적 이주를 한 셈이다 보니 토착민도 아니고 외국인도 아닌 애매한 중간자적 입장이 될 수밖에 없었던 것 같아요. 그런데 이런 거리감이 오히려 나이폴 작품만의 독특한 매력이 아닐까 싶기도 해요. 그리고 The Mimic Men에서 보면 영국도 마찬가지로 이상적인 공간으로 등장하지 않거든요. 나이폴의 망향의식은 트리니다드를 향한/관한 게 아니라 어떤 부재하는 대상에 가깝다는 생각이 들어요.

cyrus 2015-04-16 15:24   좋아요 0 | URL
댓글 감사합니다. 코코미님의 말씀에 공감합니다. 안 그래도 나이폴의 작품 세계를 조명한 책을 찾지 못한 상황인데 코코미님의 말씀이 제가 느꼈던 나이폴에 관한 의문을 푸는데 도움이 되었습니다. 며칠 전에 절판된 <흉내>를 중고서점에서 운 좋게 구입했습니다. 이제 고작 나이폴의 소설 한 편 읽었을 뿐이니 나머지 작품들도 읽어보려고 합니다. ^^
 

 

 

 

 

 

 

 

 

 

 

 

 

 

 

 

 

 

제임스 조이스의 《더블린 사람들》을 다 읽은 뒤에 조이스 문학의 참고서라고 할 수 있는 김종건 교수의 《제임스 조이스 문학 읽기》(어문학사, 2015)을 읽었다. 김종건 교수는 조이스 연구의 권위자로 유명하다. 《율리시스》보다 더 난해하기로 악명 높은 《피네간의 경야》를 처음으로 번역한 사람이 김종건 교수다. 이로써 우리나라는 프랑스, 독일, 일본에 이어 세계 네 번째 《피네간의 경야》를 번역한 국가가 되었다. 김종건 교수는 조이스의 주요 작품을 비롯한 시, 희곡, 비평문, 서간문까지 조이스가 남긴 모든 텍스트를 번역했고, 이에 대한 상세한 해설을 정리한 책이 바로 《제임스 조이스 문학 읽기》다. 《더블린 사람들》은 총 열다섯 편의 이야기로 이루어져 있는데 김종건 교수는 이야기 하나하나 해설했고, 《더블린 사람들》과 관련된 서간문도 꼼꼼하게 알려준다.

 

그런데 오자가 많이 보이는 것이 《제임스 조이스 문학 읽기》의 단점이다. 고작 《더블린 사람들》을 해설한 내용만 봤을 뿐인데 교정해야 할 문장이 다섯 개가 넘는다. 게다가 두세 번 읽을수록 이해가 되지 않는 문장도 몇 개 있다. 나온 지 얼마 안 된 책인데 교정이 시급하다.

 

 

 

* 1906년에 『더블린 사람들』을 출판하기로 동의했던 출판자 그랜드 리차즈는 이 단편 속의 "꾀자 노인(a queer old josser)"의 이야기에 불안을 느낀 나머지 이를 생략한 의도였다. (103쪽)

 

⇒ '꾀자'를 '괴짜'로 고쳐야 한다.

 

 

* 그러자 이들 두 소년은 "피전 하우스"까지의 모험을 포기하고, 귀로에 그들이 들판에서 한 괴짜 영감을 만나는데, 그는 이때 그들에게 자신들의 여자 친구 이야기를 해 댄다. (103쪽)

 

⇒ 이 문장은 《더블린 사람들》에 있는 단편 「뜻밖의 만남」의 줄거리를 설명하는 내용의 일부다. 괴짜 영감이 두 소년에게 그동안 자신이 만났던 여러 명의 여자 친구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는 장면을 언급하고 있다. 그러므로 '자신들의 여자 친구'가 아니라 '자신의 여자 친구들'이라고 해야 한다.

 

 

* 그는 지신의 말에 스스로 도취 된 듯 ... (104쪽)

 

⇒ '지신'을 '자신'으로 고쳐야 한다.

 

 

* 그는 난간 너머로 달려가며 그에게 따라오라고 소리쳤다. 사람들이 발리 앞으로 나아가라고 고함을 질렀으나, 그는 여전히 그녀를 부르고 있었다. (110쪽)

 

⇒ '발리'를 '빨리'로 고쳐야 한다.

 

 

* 그는 어떠한 상황에 대해서도 자신의 행동을 적응시키는 카메론적 능력 및 외견상 아첨의 무한한 자질을 전시하면서 ... (116쪽)

 

⇒ '카메론적 능력'은 무슨 의미일까?

 

 

* 레너헌이 루트랜드 관장 건너의 간이 바에서 뭘 먹기 위해 자신의 순례를 멈출 때, 그의 상황이 분명해진다. (116쪽)

 

⇒ '관장'을 '광장'으로 고쳐야 한다.

 

 

* 서술의 그리고 레너헌의 동작의 템포는 콜리가 젊은 여인과 함께 도회로 되돌아올 때 속력을 더한다. (116쪽)

 

⇒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딱 봐도 어색한 문장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 거기 매거진 힐(유명한 군수물 창고 벽으로, 『핀네간의 경야』의 중요한 배경 중의 하나)의 꼭대기에 서서, 그는 도시를 내려다본다. (132쪽)

 

⇒ 다른 글에는 '피네간의 경야'라고 썼는데 132쪽에서는 '핀네간의 경야'라고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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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병통치약 2015-04-11 23: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카메론 은 키메라가 아닐까요? 서술과 레너헌의 동작템포는 이 자연스럽네요 ㅎ

cyrus 2015-04-13 09:48   좋아요 0 | URL
해설이 원작소설을 읽을 때보다 더 어렵게 느껴진 것은 처음이에요. 저도 키메라라고 생각했어요. 원작을 다시 읽어본 뒤에 단어의 의미를 알아볼려고 합니다. 모르면 해당 출판사에 문의할려고요. ^^

AgalmA 2015-04-12 00:5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사람들이 어렵다는 작품들 내용보다 이런 번역과 교정의 미스들이 더 문제더라고요.
꾀자 노인ㅋㅋㅋ 웃다가 숨넘어 갈뻔; 아, 어디가서 꼭 써먹고 싶네요.
만병통치약님 말씀처럼 카메론은 키메라 맞는 듯. 유전 생물학에서 생물체 속에 다른 세포들끼리 공존하는 성질을 그렇게 말하니까 `자신의 행동을 적응시키는` 수식에 어울리려면 키메라적 능력이어야 말이 되네요. 조이스가 신화에도 탁월하니 신화적 키메라 의미도 같이 있겠죠.

cyrus 2015-04-13 09:50   좋아요 0 | URL
아갈마님의 말씀을 듣고보니 키메라가 맞는 것 같습니다. ^^

2015-04-12 00:3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4-13 09:52   URL
비밀 댓글입니다.

cocomi 2015-04-12 17: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꼼꼼하게 읽고 오자/오역 수정해주는 독자라니 김종건 교수님은 좋겠네요. 근데 두 번째 문장 두 번째 줄에 있는 ˝그들이˝는 빼는 게 더 자연스럽네요. 책을 안 읽어봐서 확실하진 않지만 너무 직역을 하려고 하신 듯?
카메론적 능력은 혹시 카멜레온적 능력을 말하는 건 아닐까요?

cyrus 2015-04-13 09:58   좋아요 0 | URL
한 문장에 쉼표와 `-의`를 너무 많이 사용했어요. 원서를 우리말로 옮긴듯한 느낌이 들었어요. ^^;;

transient-guest 2015-04-16 06: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편집자의 태만이라고밖에 생각되지 않네요. 대학때 Ireland에 빠져서 졸업때 마이클 콜린스로 논문도 썼고, 제임스 조이스는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하는 저로써는 이 책이 나타나주어 반갑네요. 사실 너무 어렵거든요 조이스 양반..ㅎㅎ

cyrus 2015-04-16 15:27   좋아요 0 | URL
<더블린 사람들>을 다 읽고 나서 만만하게 생각했는데 조이스 관련 책을 찾아보니까 그리 쉽게 읽혀지는 소설이 아니더군요. 특히 <더블린 사람들> 첫 번째 단편 ‘자매들’에 조이스가 종교 상징을 교묘히 집어넣었더군요. 솔직히 저는 이 소설을 이해하지 못했어요. 결말도 이상하고.. ㅎㅎㅎ 제가 이 소설을 대충 읽은 것 같습니다. 김종건 교수 번역본도 훑어봐야겠어요. ^^;;
 
더블린 사람들 마카롱 에디션
제임스 조이스 지음, 한일동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 / 2015년 3월
평점 :
품절


 

 

 Scene #1  조이스의 패기  

 

제임스 조이스는 아일랜드를 대표하는 세계적 작가임에도 불구하고, 그의 작품을 읽어본 독자를 만나는 것이 드물다. 조이스의 소설이 어렵다고 생각하는 독자가 많다. 조이스는 매우 실험적이면서도 도발적인 모더니스트다. 의식의 흐름, 환상과 무의식의 경계, 에피파니(Epiphany) 등 낯선 서술기법과 말장난을 버무려낸 조이스의 끝없는 실험에 독자들은 당황했고, 비평가들은 분노했다. 《율리시스》는 외설 시비에 휘말려 영국과 미국에서 오랫동안 출간이 금지되는 수모를 겪었다. 《율리시스》의 등장을 예고하는 ‘더블린 삼부작’ 첫 번째 작품 《더블린 사람들》 역시 정식 출간되기까지 우여곡절의 사연이 있었다.

 

조이스는 22세 때 《더블린 사람들》을 집필하기 시작했다. 《더블린 사람들》은 총 열다섯 편의 단편소설로 구성된 작품집인데 조이스가 처음으로 출판계약을 맺었을 때만 해도 《더블린 사람들》은 열 편의 단편소설로 이루어졌다. 지금의 《더블린 사람들》 형태로 갖춰지기까지 조이스는 3년이라는 세월을 써야 했는데 이 기간 동안 네 편의 단편소설이 추가되었다. 그러나 출판업자는 청년 작가의 집필 노력을 알아주지 않았다. 조이스가 추가로 쓴 소설이 문제였다. 출판업자는 소설 속에 문제가 될법한 구절을 지적했고, 이를 바로 잡지 않으면 책을 출판하지 않을 거라고 단호한 태도를 보인 것이다. 작가 지망생은 첫 소설의 출판 결에 난항을 겪으면 출판업자의 입김에 쉽게 기가 죽기 마련이다. 그런데 조이스는 뻔뻔할 정도로 출판업자와 맞선다. 출판업자를 설득하기 위해서 꽤 오랫동안 서신 왕래가 이루어졌는데 한창 열심히 활동해야 할 젊은 조이스 입장에서는 너무나도 아까운 시간이었다. 이로 인해 책의 출판은 8년이나 미뤄지고 말았다. 다행히도 조이스는 처녀작 출간 문제에 지나치게 매달리지 않았다. 곤란한 상황 속에서도 소설 쓰기를 멈추지 않았는데 이미 그는 ‘더블린 삼부작’ 두 번째 작품인 《젊은 예술가의 초상》을 집필하고 있었다. 조이스가 《젊은 예술가의 초상》의 성공으로 작가로 인정받기 시작할 무렵에서야 ‘더블린 사람들’이라는 이름이 붙은 원고지 뭉치들은 한 권의 책이 될 수 있었다. 그렇지만 《젊은 예술가의 초상》과 《율리시스》에 대한 독자의 관심이 워낙 많아서 《더블린 사람들》은 ‘더블린 삼부작’ 첫 번째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어정쩡한 대접을 받아야만 했다.

 

 


 Scene #2  우리는 왜 《더블린 사람들》을 읽어야 하는가

 

《더블린 사람들》은 미국 대학 위원회가 선정한 SAT 추천도서에 서울대가 권장한 100선 도서목록에 포함되었다. 그러니까 이 소설도 요즘 우리가 입으로만 흔히 말하는 ‘고전’의 반열에 오른 것이다. 억양에 차이가 있겠지만 미국은 아일랜드처럼 영어를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더블린 사람들》을 추천도서 목록에 넣어도 무방하다. 반면 우리나라는 왜 조이스의 소설을 추천도서 목록에 포함했고, 왜 읽어보라고 권하는 것일까. 아일랜드를 빛낸 세계적 작가로는 조이스뿐만 아니라 예이츠, 베케트, 버나드 쇼, 오스카 와일드 등이 있지만, 여전히 우리나라 독자에게 아일랜드 문학은 생소하다. 이렇다 보니 아일랜드 문학을 영국문학처럼 유사하게 보거나 아예 영국문학에 포함시켜서 보는 경향이 있다. 조이스나 쇼 등은 아일랜드 밖으로 나와서 영국이나 세계 등지에 작품 활동을 했고, 영어로 글을 썼으나 정서적인 면에서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 아일랜드 문학의 근간을 살펴보면 아이리시 특유의 문화와 역사가 자리 잡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더블린 사람들》을 처음 읽기 전에 이런 생각을 한 번쯤은 해봄 직하다. 세계문학, 특히 영문학을 우수하게 여기는 우리나라의 독서 풍토는 고전을 제대로 이해하는 데 있어서 방해될 수 있다. 만약에 당신이 고전 목록 안에 조이스의 소설이 ‘영문학’에 포함된 것을 봤다면, 분명히 조이스의 소설은 영어로 쓴 글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조이스의 소설 속에 영어 이전에 아이리시가 썼던 켈트계 언어인 게일어도 등장한다. 아일랜드가 지리적으로 영국과 무척 가까워서 공용어를 영어라고 착각하기 쉽다. 영국 식민지 시절의 문화적 잔재를 잊기 위해 아일랜드 정부 차원에서 게일어 보급을 적극적으로 권장하고 있다. 이처럼 기본적 배경 지식을 충분히 알려주지 않고 쓸데없이 고전 목록을 양산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 그래 봤자 고전은 책을 엄청나게 좋아하는 사람만 읽게 된다.

 

아무튼, 조이스의 소설을 읽으려면 아일랜드 문화를 이해하는 것이 좋다. 그 이야기 속에 아일랜드 문화와 역사를 알아야만 이해할 수 있는 장면과 인물 간 대화가 많다.《율리시스》를 제외하면 《더블린 사람들》과 《젊은 예술가의 초상》은 수많은 번역본이 존재한다. 그런데 이 중에 옮긴이의 주석이 없는 번역본은 안 읽는 것이 낫다. 조이스의 소설을 우리말로 옮기려면 옮긴이는 독자를 위해서 아일랜드 문화와 역사를 언급하는 문장을 보충 설명할 수 있는 주석을 반드시 달아야 한다. 《더블린 사람들》의 열두 번째 단편소설 제목은 「위원회의 담쟁이 날」이다. 아일랜드 풍속에 생소한 독자는 ‘담쟁이 날’의 의미를 당연히 모를 수밖에 없다. 아일랜드의 애국지사 찰스 파넬의 사망일을 기리기 위해 만들어진 기념일이다. 아이리시는 이날에 파넬을 기리기 위해서 담쟁이 잎을 옷깃에 다는 전통을 지킨다.

 

 


 Scene #3  마비의 영혼을 비춰주는 거울 같은 소설

 

글이 조금 옆으로 새고 말았는데 이전에 언급했던 질문에 대한 답변은 이렇다. 비록 우리나라에서 조이스에 대한 독자의 대접은 형편없지만, 읽어볼 만한 가치가 많은 고전이라는 사실을 힘주어 말할 수 있다. 일단 《율리시스》와 《피네간의 경야》에서 보여준 조이스의 난해한 말장난이 없으니 부담 갖지 마시라. 조이스는 더블린의 인간 군상을 어떠한 과장이나 꾸밈없이 그대로 묘사하고 있다. 소설에 그려진 더블린 사람들의 삶에서 묘한 기시감이 느껴진다면 이 소설을 제대로 읽고 있다고 보면 된다. 더블린은 무언가로 사방에 꽉 막아버린 한정된 공간이다. 이곳에 자본주의 바람에 잘 적응하여 부귀영화를 누리는 프티 부르주아가 있고, 반면에 불투명한 미래를 바라보면서 궁핍하게 생활하는 하층민이 살고 있다. 그런데 이들의 삶은 그렇게 썩 행복하지 않다. 똑같이 반복되는 지긋지긋한 일상과 부조리한 주변 환경에 불만을 표출해보지만, 이를 적극적으로 개선하려는 모습을 보여주지 못한다.  

 

「애러비」의 어린 화자는 이웃 친구의 누나를 위한 선물을 사려고 혼자서 바자가 열리는 곳으로 향한다. 소년의 눈에는 더블린은 누나와의 사랑을 쟁취하기 위해서 거쳐야 하는 일종의 모험 장소다. 하지만 소년의 환상은 오래가지 못한다. 이미 바자는 끝나버려 인적이 드문 더블린 거리를 바라본다. 소년은 도시의 어둠 속에서 주시하면서 자신을 ‘허영에 쫓겨 농락당하는 한 마리 짐승’이라고 생각한다. 더블린은 모험 장소가 아니라 온정이 금방 식어 사라져버리는 무정한 도시였다. 「이블린」은 소설 속 여주인공의 이름이기도 하다. 조이스는 《더블린 사람들》에 나오는 도시 생활에 안주하여 타성에 젖은 사람들을 통틀어 ‘마비의 영혼’이라고 말했다. 이블린은 더블린을 떠나지 못하는 ‘마비의 영혼’이다. 여자의 몸으로 가족을 홀로 부양하는 이블린은 반복되는 일상을 혐오한다. 자신의 약혼자와 함께 부에노스아이레스로 떠날 수만 있다면 이블린은 답답하기 짝이 없는 더블린 생활을 청산할 수 있다. 더블린에서의 삶과 더블린 밖에서의 삶 한가운데서 내적 갈등을 하는 이블린은 결정적인 순간에 에피파니를 경험한다. 도시의 타성은 그녀의 손을 놓치지 않았고, 이블린은 약혼자와 함께해야 할 새로운 삶에 자신감을 가지지 못한다. 부에노스아이레스로 향하는 배를 타서 약혼자와 도망쳐보지만, 이블린은 손으로 쇠 난간을 붙잡은 채 전혀 미동도 않는다. 약혼자는 이블린을 애절하게 불러보지만 배는 점점 항구에서 멀어진다. 「작은 구름 한 점」에 나오는 주인공 챈들러도 이블린처럼 자유를 갈망하나 끝내 더블린을 벗어나지 못하는 전형적인 마비의 영혼이다. 조이스는 챈들러를 영국 생활이 익숙한 친구 갤러허의 삶과 대비되도록 설정하여 암울한 더블린의 영혼을 더욱 의기소침하게 만든다. 우는 아이를 달래지 못해 아내에게 꾸지람 듣게 된 챈들러는 자신의 현재 상황을 한심스럽게 생각한다. 그가 흘리는 자책의 눈물은 절망적 에피파니를 상징한다. 시인을 꿈꾸었던 챈들러는 가정이라는 좁은 무덤 속에 누워야 하는 더블린의 평범한 소시민으로 살아야 할 자신의 운명을 직감한다.

 

《더블린 사람들》 출판 기회가 번번이 막히자 조이스는 출판업자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자신의 글은 ‘말끔히 닦아놓은 거울’이라고 표현했다. 조이스는 소설가의 사명을 세상을 진실 되게 보여주는 일이라고 굳게 믿었다. 자신의 소설이 아이리시가 제대로 바라보고 공감할 수 있는 ‘말끔히 닦아놓은 거울’이 되기를 갈망했다. 젊은 조이스가 3년 내내 《더블린 사람들》 집필에 심혈을 기울였던 이유가 있었다. 조이스가 이 소설을 쓰고 있을 당시에 예이츠를 중심으로 한 아일랜드 문단은 문예부흥운동을 주도하고 있었다. 민족주의 성향이 강한 작가와 지식인들은 조국의 자유를 되찾으려면 아일랜드 언어와 문화를 알아야 한다고 설파했다. 조이스의 고양 더블린은 문예부흥이라는 이름으로 아일랜드 전역을 휩쓸고 다닌 문화적 태풍의 눈 한가운데에 있었다. 그렇지만 조이스는 민족주의적 감정이 다분히 섞인 문화적 태풍 속으로 휘말리지 않았다. 아일랜드 사회를 똑바로 비춰주는 거울 같은 소설에 문예부흥 태풍으로 인한 습기가 조금이라도 묻지 않으려고 열심히 닦았다. 거울 같은 소설, 《더블린 사람들》은 오늘날 아이리시뿐만 아니라 전 세계 사람들도 바라볼 수 있을 정도로 여전히 깨끗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 지금도 젊은 소설가의 거울 속에는 도시의 타성에 마비된 현대인의 영혼이 갇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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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galmA 2015-04-11 21:3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cyrus님 언급처럼 <더블린사람들>이 조이스 소설 중 가장 접근하기 쉬운 소설이죠. 어떻게보면 그답지 않은 심심한 전개일 수 있는데, 그 속의 아일랜드 상황을 간파하지 못하면, 평범한 고전처럼 읽고 말 수도 있죠. 저도 놓친 게 있지 않나 늘 다시 읽어봐야지 하는 작품^^
이언 매큐언이 <속죄> 앞부분 쓸 때 조이스 <젊은 예술가의 초상> 앞부분 아이 시점을 엄청 신경썼다고 하듯이, 조이스 작품은 두루두루 읽어볼 만한 가치가 있는 작품이죠^^

cyrus 2015-04-11 22:55   좋아요 0 | URL
이언 매큐언에 관한 이야기는 처음 들어봅니다. <젊은 예술가의 초상>도 아직 안 읽어봤어요. <더블린 사람들>을 통해서 이제야 조이스가 대단한 작가임을 알게 됐어요. ^^

AgalmA 2015-04-11 22:58   좋아요 0 | URL
제가 요즘 작가란 무엇인가 읽고 있잖습니까. 거기서 이언 매큐언이 직접 그렇게 말하더군요.
cyrus님도 이제 작가란 무엇인가 읽게 되는 마수에 빠지시는 겁니다! ㅎㅎ
이거 읽으면서 읽을 책이 또 산더미로ㅠㅠ

cyrus 2015-04-11 23:01   좋아요 0 | URL
어떻게 아셨죠? 사실 아갈마님이 이언 매큐언을 언급하셨길래 `매큐언의 소설도 읽어봐야겠구나.`라고 생각했어요. ㅎㅎㅎ

만병통치약 2015-04-11 22: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역시 고전은 재미없어서가 아니라 몰라서 안 읽는 거군요. 꼭 도전해 보겠습니다.

cyrus 2015-04-11 22:58   좋아요 0 | URL
만병통치약님이 제가 서평에서 말하고 싶은 내용을 한 문장으로 제대로 정리하셨군요. 맞습니다. 저도 조이스를 이름만 들었지 그의 소설에 대해선 잘 몰랐어요. 그냥 <율리시스>의 분량만 보고, 조이스의 소설을 어렵다고만 생각했어요. ^^;;

에이바 2015-04-12 16: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펭귄 판도 읽을만 한가요? 전 문동 진선주 선생님 버전으로 읽었는데 참 좋았어요. <젊은 예술가의 초상>도 기다리고 있는 중인데 좀 오래 걸리네요. 열린책들 판으로 읽을까 생각중이에요. <율리시스>는 감히 도전도 못하겠지만 동서에서 나온거 점찍어놨어요. 차근차근 시도해가다보면 언젠간 읽을 수 있겠죠... 아일랜드 역사 관련한 책은 <슬픈 아일랜드>가 좋더라고요.

cyrus 2015-04-13 09:38   좋아요 0 | URL
저는 읽어나가는데 괜찮았습니다. 김종건 교수 번역본도 읽어보려고 해요. 아일랜드 역사에 관한 책을 알아보는 중이었는데 추천해주셔서 고맙습니다. ^^

stella.K 2015-04-12 18: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진작에 알았다만 너는 책읽기가 어느 경지에 이르렀다.
그만 하산을 하라면 말도 안 되는 소리겠지?ㅋㅋㅋ
어쨌든 제임스 조이스를 읽을 정도라면 뭐 상당한 경지지.
난 이걸 10대 말에 도전했다 깨졌는데 말야.
지금쯤 읽으면 좀 읽혀지려나?
책 어렵게 쓰면 독자가 안 읽을텐데 제임스는 기본적으로
빵의 문제가 해결이 됐나 봐. 그지?ㅋ

cyrus 2015-04-13 09:45   좋아요 0 | URL
<더블린 사람들>은 여러 개의 단편으로 이루어진 소설이라서 어렵지 않을거예요. 제목 그대로 더블린에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에요. 조이스가 작가로 성공하기 시작하면서 각종 정부 지원금과 후원금을 여러 번 받았어요. 누님 말씀처럼 조이스는 본인이 쓰고 싶은대로 글을 쓸 수 있는 경제적 여건이 좋았어요. ^^

transient-guest 2015-04-16 06: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조이스가 위대한건 서양의 거의 모든 신화/철학/설화와 문화적인 것을 짧은 이야기에 함축했다는 점을 강조하던 교수님이 생각나네요.

cyrus 2015-04-16 15:29   좋아요 0 | URL
알고 보니 조이스가 박식한 사람이더군요. 언어 구조에 대해서도 유별나게 관심을 많이 가졌고요. 기억력도 좋다고 합니다. 기억력 덕분에 자신이 겪은 체험을 소설 속에 담을 수 있었습니다. 역시 조이스의 소설은 어렵지만, 계속 읽을수록 그의 생각이 알고 싶어집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