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숨에 읽는 그림 보는 법 - 시공을 초월해 예술적 시각을 넓혀가는 주제별 작품 감상법
수잔 우드포드 지음, 이상미 옮김 / 시그마북스 / 2019년 1월
평점 :
절판


 

 

“당신은 왜 에베레스트(Mount Everest)에 오르려고 하는 거죠?”

 

“에베레스트가 그곳에 있으니까요(Because it is there).”

 

 

1924년 에베레스트 제3차 원정에 도전하는 조지 맬러리(George Mallory)는 산에 오르는 이유를 묻는 기자의 질문에 아주 명쾌한 답변을 했다. 이 유명한 답변은 산악인들 사이에서 회자하는 명언이 되었고, 우리나라에서는 “산이 거기에 있으니까(요)라는 말로 알려졌다. 등산과 산 자체의 의미나 매력을 이보다 더 간결하게 표현한 말은 없지 않을까 싶다. 물론 맬러리의 말은 산에 오르는 많은 이유 중 하나일 뿐이다.

 

만약 누군가가 내게 “당신은 왜 그림 보는 것을 좋아하죠?”라고 묻는다면(실제로 이런 질문을 받은 적이 있다), 나는 맬러리가 대답했던 말과 조금 비슷하게 말할 것이다. “매력 있는 이야기가 그림에 있으니까요.”

 

인간은 시각 중심의 미적 체험을 통해 삶의 즐거움을 느끼고 또한 삶의 의미를 깨닫는다. 사람들은 아름다움을 느끼는 것을 편안하고 즐거운 마음이라고 생각했다. 이렇듯 그림을 보는(감상하는) 것은 삶의 안정감과 즐거움을 가져다주는 중요한 활동이다. 인간은 이러한 오래된 활동을 통해 자신의 예술적 감성과 미적 취향을 알게 됐다. 그런데 인간의 심미 활동이 어려운 것은 사실이다. 도대체 그림을 어떻게 봐야 그것이 주는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을까? 이 질문은 웬만한 사람이라면 대답할 수 있는 것 아니냐고 생각할지 모른다. 하지만 추상미술을 비롯한 갖가지 예술이 등장한 지금 이 시대를 생각하면 대답하기 쉬운 질문은 아니다.

 

미술사가 수잔 우드포드(Susan Woodford)《단숨에 읽는 그림 보는 법( Looking at Pictures)은 “그림을 어떻게 봐야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는가”라는 단순한 질문에 답하는 책이다. 그녀는 네 가지 방법을 알려준다.

 

첫 번째 방법은 그림이 주로 어떤 목적으로 그려졌는지 생각해 보는 것. 두 번째 방법은 그림에 반영된 시대상의 분위기나 문화에 대한 이야기가 그림을 보는 우리에게 어떻게 전해주는지 알아보는 것. 세 번째 방법은 그림이 현실적으로 그려졌는지 살펴보는 것. 마지막 네 번째 방법은 화가가 자신이 그리고 싶은 것을 표현하기 위해 어떤 기술(technique)[주]을 구사했는지 알아보는 것이다.

 

예술은 직관으로 이해해야 하며 감성으로 느껴야 한다고 생각하는 독자는 저자가 제시한 ‘그림 보는 법’이 마음에 들지 않을 수도 있다. 그렇지만 그림을 보기 위해 도움이 되는, 아주 기본적인 방법을 모른다면 이런저런 잣대로 그림을 재단하고, 잘못 이해하는 상황이 생길 것이다. 결과적으로 저자의 ‘그림 보는 법’은 가장 보편적이고 가장 명료한 것이다. 그림 감상의 즐거움을 느끼려면 그 그림 속에 있는 이야기가 무엇인지 먼저 알아야 한다. 내가 언급한 ‘이야기’는 그림의 형식(형태와 색채), 그림의 내용(그림에 묘사된 인물, 상황이나 사건 등)뿐만 아니라 그림 밖의 이야기(그림이 만들어진 사연, 화가의 삶)도 포함한다. 그림 속과 밖에 있는 다양한 이야기는 관람객의 감성을 자극하며 흥미와 즐거움을 불러일으킨다. 대부분 사람은 ‘아름다움’의 의미를 추상적으로 생각하거나 ‘아름다움’이 무엇인지 설명할 수 있는 명확한 정의를 도출하려고 한다. 그래서 그림을 볼 때 어려움을 겪는다. 나는 잘 그려진 그림이라고 해서 그것이 아름답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당연히 아름다움의 의미는 상대적이다. 사람들이 아름답다면서 칭송한 그림을 보면서 아무런 전율을 느끼지 못했다면, 그 그림이 아름답게 느껴지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현실이나 모델의 모습을 아주 정확하게 그린 그림이라고 해서 다 아름다운 건 아니다. 과거에는 현실을 똑같이 묘사하는 것이 화가의 일차적인 목표였다. 하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 오늘날의 화가는 자신이 표현하고 싶은 것을 자신만의 형식으로 보여줄 수 있는 방법을 찾는다. 따라서 관람객은 화가가 그림을 통해 설명한 것, 즉 그림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알기 위해 능동적으로 감상해야 한다. 이것은 ‘머리’로 그림을 감상하는 자세이다.

 

이 책의 제목에 들어 있는 ‘단숨에’라는 표현만 보고서 ‘가벼이 읽을 수 있는 책’이라고 이해하면 오산이다. 이 책의 각 장이 끝날 때마다 나오는 ‘핵심 질문’은 독자의 눈길을 멈추게 한다. 저자가 던지는 질문들은 독자가 그림을 보는 것과 미술에 대해서 곰곰이 생각할 수 있도록 해준다. 내가 가장 인상 깊었던 질문은 이 책의 마지막 질문이다. “좋은 그림과 위대한 그림을 구분하는 요소는 무엇인가?” 이 질문에 대한 정답은 없다. 자신만의 정답을 찾을 필요도 없다. 저자를 도발하는 것을 좋아할 정도로 호기가 넘치는 독자라면 이 질문 자체를 의심할 수 있다. “좋은 그림과 위대한 그림을 구분할 필요가 있을까?” 사실은 내가 그렇게 생각했다. 저자에 따르면 ‘좋은 화가’는 그림 그리는 방법을 알고, 색채의 조화에 관한 섬세한 감각을 가지고 있으며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전통적인 기술에 대한 강점과 한계를 안다. 그런데 ‘위대한 화가’를 설명한 저자의 말은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 저자가 생각하는 ‘위대한 화가’는 ‘기적 같은 재능’으로 완전히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 관람객에게 보여주는 화가이다. ‘기적 같은 재능’이 구체적으로 뭘 의미하는지는 모르겠지만, 화가의 오랜 노력 끝에 얻은 성취를 ‘기적 같은 재능’으로 표현하는 것에 반대한다. 화가는 하늘에서 내려온 예술의 신이 아니기 때문이다.

 

나는 ‘좋은 그림’과 ‘위대한 그림’을 딱 잘라 구분하면서 정의하고 싶지 않다. 내가 좋다고 생각하는 그림이 위대하게 느껴질 수 있다. 어렵게 생각할 필요가 있나? 내가 생각하는 ‘좋은 그림’은 이미 앞서 말했듯이 재미나 즐거움을 주는 이야기가 있는 그림이다. 특별한 매력이 있는 그림 속과 밖의 이야기 자체가 하나의 즐거움인 셈이다.

 

 

 

 

 

※ 글쓴이의 변: 글을 쓰다 보니 ‘감상문’이 되고 말았다.

 

 

[주] 책의 본문에는 ‘테크닉(technic)’이라고 적혀 있다. ‘테크닉’을 독자들이 이해하기 쉽게 설명하려면 ‘기술’ 또는 ‘기법’이라고 쓰는 게 낫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이 글에서는 ‘테크닉’이 아닌 ‘기술(technique)’이라고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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붕붕툐툐 2019-03-26 18: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cyrus님 그림 보는 거 좋아하시는군요!!

cyrus 2019-03-27 12:49   좋아요 0 | URL
미술관에 자주 가보지 않았지만, 그림을 보면 무언가 생각할 수 있고, 마음이 편해질 수 있어서 좋아요. 종이책이 질리면 가끔 그림이 많은 미술 관련 책을 보곤 해요. ^^

레삭매냐 2019-03-27 13: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제는 회화의 영역까지 파고
드시다니 대단합니다 !!!

cyrus 2019-03-28 17:16   좋아요 0 | URL
인상 깊은 주제를 다룬 미술 책이 눈에 띄지 않아서 한동안 미술 책을 안 읽었어요. ^^;;

페크pek0501 2019-03-30 15:5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감상문이든 리뷰든 써지는 대로의 글이 좋지요. 흘러가는 대로 쓰는 게 최선이라고 봅니다.

cyrus 2019-04-08 06:04   좋아요 0 | URL
가끔 내가 의도한 대로 글을 쓰지 못할 때가 있어요. 글을 쓰다 보면 갑자기 새로운 생각이 떠오르게 되요. 그 생각을 쫓으면서 글을 쓰면 처음에 생각했던 글의 주제와 내용이 확 달라져버려요. 그런 경우가 많아요. ^^
 

 

 

 

‘죽음’에 대해서 일상적인 대화를 나누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누군가가 먼저 죽음을 주제로 한 대화를 시도한다고 해도 이를 들어줄 사람들이 없다. 죽음이 너무 무섭기 때문일까, 앞으로 해야 할 일이 아직도 많다고 생각하기 때문일까.

 

죽음은 먼 옛날부터 두려움과 공포의 대상이었다. 누구나 죽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인간만이 너무나도 잘 알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간이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잊기 위해 생각해낸 게 두 가지 묘책이었다. 하나는 지옥이나 천국과 같은 내세의 관념을 만들어 죽음을 회피하는 것이다. 죽어도 죽지 않는 이른바 불멸성이다. 이로써 삶의 유한성을 극복했다고 생각했다. 또 하나는 될 수 있으면 죽음을 멀리 떼어놓는 것이다. 인간은 죽음을 애써 부정하여 자신과 관계없는 것처럼 생각하려 든다. 마치 햇빛 아래서 자신의 그림자를 부정하는 것과 같다.

 

 

 

 

 

 

 

 

 

 

 

 

 

 

 

 

 

 

 

 

* 노베르트 엘리아스 《죽어가는 자의 고독》 (문학동네, 2012)

* 셸던 솔로몬, 제프 그린버그, 톰 피진스키 《슬픈 불멸주의자》 (흐름출판, 2016)

 

 

 

나와 그림자가 하나이듯이 삶과 죽음도 별개로 분리해서 볼 수 없다. 그런데 우리는 이를 외면하거나 알려 하지 않는다. 죽음은 삶의 끝일 뿐 그 이상은 아니라고 여긴다. 과거엔 가족이 시한부 환자를 부양했고, 삶의 끝자락에 다다를 때까지 시한부 환자는 가족들과 함께할 수 있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죽어가는 순간이 가까울수록 가족과 사회에서 더 멀리 배제된다. 특히 의료체계는 죽음과 죽음을 환기하는 것들을 철저하게 격리한다. 죽어가는 자는 중환자로 격리되며, 시신은 영안실의 싸늘한 침대 위에 눕혀진다. 죽음을 떠올리게 하는 노화는 실버타운에 격리된다. 사회학자 노베르트 엘리아스(Norbert Elias)는 현대 문명이 죽음을 손쉽게 숨길 수 있는 시대라고 말한다. 과거의 죽음은 두려우면서도 친숙한 개념이었다. 과거에 아이들은 죽어가는 사람의 모습을 가까이서 지켜봤다. 아이들은 세 살 무렵부터 처음으로 죽음이 무엇인지 의식하기 시작한다. 그러면서 자신들도 언젠가는 죽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주1].

 

 

 

 

 

 

 

 

 

 

 

 

 

 

 

 

 

 

 

* 에밀리 디킨슨 《고독은 잴 수 없는 것》 (민음사, 2016)

* 에밀리 디킨슨 《디킨슨 시선》 (지만지, 2011)

 

 

 

 

 

 

 

 

 

 

 

 

 

 

 

* 한국현대영미시학회 엮음 《현대 영미 여성시의 이해》 (동인, 2013)

* 박재열 《미국 여성시 연구》 (L.I.E, 2009)

 

 

 

시인 에밀리 디킨슨(Emily Dickinson)은 어렸을 때부터 죽음의 민낯을 아주 가까이서 봤다. 그녀가 아홉 살이었을 때 이사 간 집 주변에 묘지가 있었고, 그곳에서 진행되는 장례식을 자주 지켜봤다. 죽음은 그녀의 일상에서 멀지 않은 것이었다. 디킨슨은 친구, 자신과 정서적으로 교류를 나누던 지인들, 그리고 가족들이 세상을 떠나는 슬픔을 겪었다. 그래서 디킨슨은 죽음과 불멸을 주제로 한 시를 많이 썼다. 그녀는 일상의 삶과 죽음이 동떨어져 있다고 보지 않았다. 디킨슨에게 죽음은 자신과 무관한 먼 미래의 일이 아닌, ‘지금 여기’에서 맞닥뜨리는 현실적인 일이다.

 

디킨슨은 자신의 죽음을 여러 가지 상황과 이미지를 통해 상상하는 내용의 시를 썼다.

 

 

나는 내 두뇌에 장례를 느꼈네.

조문객들이 이리저리

밟고— 또 계속해서 밟았고—

마침내 감각이 완전히 터지는 것 같았다네—

 

그들 모두가 자리에 앉자,

추도식이, 북처럼—

울리고— 또 계속해서 울렸고—

마침내 내 마음이 마비되는 것 같았다네—

 

그런 다음 나는, 그들이 관[주2]을 들어 올렸고,

똑같은 납 장화가 걸으며 내는 삐걱거리는 소리가

다시, 내 영혼을 밟고 지나가는 소리를 들었고,

그리고 공간이— 조종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네.

 

모든 하늘이 하나의 종이 되었고,

존재는 단지 하나의 귀가 되었고,

나와, 침묵은 어느 이방의 종족이 되어

여기서, 외로이, 난파되었다네—

 

그런 다음 이성의 널빤지가, 부서졌고—

나는 아래로, 또 아래로, 떨어지며—

사방으로 곤두박질치며, 별 세계와 부딪쳤고,

그제야— 마침내 무엇인지 알게 되면서 끝이 났다네—

 

 

(No. 280, 윤명옥 옮김, 《디킨슨 시선》, 29~30쪽)

 

 

I felt a Funeral, in my Brain,

And Mourners to and fro

Kept treading — treading — till it seemed

That Sense was breaking through —

 

And when they all were seated,

A Service, like a Drum —

Kept beating — beating — till I thought

My Mind was going numb —

 

And then I heard them lift a Box

And creak across my Soul

With those same Boots of Lead, again,

Then Space — began to toll,

 

As all the Heavens were a Bell,

And Being, but an Ear,

And I, and Silence, some strange Race

Wrecked, solitary, here —

 

And then a Plank in Reason, broke,

And I dropped down, and down —

And hit a World, at every plunge,

And Finished knowing — then —

 

 

 

화자(디킨슨)는 자신 또는 다른 사람의 장례식을 상상한다. 조문객들이 지나가가면서 생기는 발소리는 화자의 감각을 터뜨리게 만든다. 죽은 자를 추도하기 위해 울리는 북소리는 화자의 마음을 마비시킨다. 하늘에 울려 퍼지는 조종(弔鐘) 소리는 화자의 환청이다. 장례식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나오는 소리는 주변인의 죽음으로 인한 심리적 불안을 혼자서 감당하는 시인을 예민하게 만든다. 시인의 정신은 죽음을 떠올리게 하는 소리와 같은 외부 자극에 민감하게 반응한다.

 

강은교 시인은 시 280번의 4행을 “다리에 아무 감각도 없어진 듯할 때까지”라고 번역했다.

 

 

 

장례행렬이 지나가네, 머릿속으로

애도자들은 이리저리

걸어가네 — 걸어가네 — 마치

다리에 아무 감각도 없어진 듯할 때까지.

 

 

(No. 280, 강은교 옮김, 《고독은 잴 수 없는 것》, 27쪽)

 

 

강은교 시인은 원문의 “Sense was breaking”을 ‘감각이 없다’는 의미로 의역을 했다. ‘breaking’은 ‘파괴’를 뜻한다. 윤명옥 교수는 “감각이 완전히 터진다”라고 옮겨 썼는데, 이 번역문을 읽으면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만들어낸 중압감을 견뎌내지 못한 시인의 감정 상태가 어느 정도인지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다.

 

디킨슨의 시 465번은 임종 직전의 상황을 그린 내용이다. 그녀는 이 시에 독자들이 생각지도 못한 ‘의외의 존재’를 등장시켜 무겁고 엄숙한 분위기를 깨뜨린다.

 

 

나는 임종 때에— 한 마리 파리가—

윙윙거리는 소리를 들었다네.

방 안의 정적은— 폭풍과 폭풍 사이에 있는—

공중의 정적과 같았다네—

 

빙 둘러앉은 사람들의 눈에서— 눈물도 마르고—

숨소리도 하나로 모이고 있었다네.

왜냐하면 왕께서 그 방에— 임종 증언을 위해

현현하는 순간의— 그 마지막 입성을 지켜보려고—

 

나는 내 유품에 대해 유언을 했고— 내 소지품을

어떻게 나눠 가지려는 것에 서명을 했다네—

그런 다음, 한 마리 파리가 날아든 것은

바로 그때였다네—

 

푸른— 정체불명의 윙윙거리는 소리가

빛과— 나 사이에 훼방을 놓았네—

그러더니 창이 가려졌고— 그런 다음

나는 보고 싶어도 볼 수가 없었다네.

 

 

(No. 465, 윤명옥 옮김, 《디킨슨 시선》, 63~64쪽)

 

 

 

죽음을 앞둔 상황, 삶과 죽음의 경계에 서 있는 화자는 죽음에 초연한 모습이다. 윤명옥 교수의 해석에 따르면 이 시의 내용은 죽어가는 사람을 위해 신에게 기도하는 기독교적인 전통에 반한다. 이 시에서 말하는 ‘왕(king)[주3]’은 죽어가는 화자의 눈앞에 나타나 그/그녀의 영혼을 천국으로 인도하는 신이다. 그런데 엉뚱하게도 파리 한 마리가 날아와 신성한 분위기를 망친다.

 

 

 

 

 

 

 

 

 

 

 

 

 

 

 

 

* 프레드 게팅스 《악마 백과사전》 (보누스, 2014)

* [품절] 마노 다카야 《천사》 (들녘, 2000)

* 마노 다카야 《타락천사》 (들녘, 2000)

 

 

 

‘왕’과 ‘파리’는 대조적인 관계이다. 그러므로 ‘신’과 ‘악마’의 대립 구조를 연상시킨다. 디킨슨의 시에 나타난 파리는 ‘베엘제붑(Beelzebub) 또는 ‘벨제붑’으로 알려진 악마를 상징한다. 베엘제붑의 본래 이름은 바알제불(Ba’al Zebul)이다. 히브리어로 ‘하늘의 주인’을 뜻한다. 베엘제붑을 신으로 숭배하는 셈족(Semites)의 신앙을 적대시한 유대인들은 이 호칭이 그들이 존경하는 솔로몬 왕(Solomon)을 떠올린다는 이유로 히브리어로 ‘파리의 왕’을 뜻하는 바알제붑(Ba’al Zebûb)으로 바꾸어 불렀다. 그리하여 유대인들은 악마를 가리킬 때 ‘베엘제붑’을 쓰기 시작했다. 베엘제붑은 지옥에서 상당히 높은 계급에 속한 악마이다. 사탄(Satan), 레비아탄(Leviathan)과 더불어 타락 천사 3대장으로 알려지기도 했다.

 

 

 

 

 

 

베엘제붑이 누군지 몰라도, 록밴드 (Queen)의 대표곡 <보헤미안 랩소디(Bohemian Rhapsody)>를 질리도록 들어 본 사람이라면 이 특이한 이름을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절정에 이르는 오페라 파트 마지막에 “Beelzebub has the devil put aside for me”라는 노랫말이 나온다.

 

 

오늘날의 죽음은 삶의 뒤편으로 밀려난 대상이 되었다. 그것은 우리를 언제 습격할지 모르는 “이방의 종족”이다. 그렇지만 디킨슨처럼 늘 죽음을 생각하면서 살아온 사람들은 죽음의 얼굴이 무섭게 느껴지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삶의 질을 높이는 물질적인 풍요에 아주 많이 관심을 보이면서도 ‘죽음의 의미’에 대해서는 애써 눈을 감거나 외면해버린다. 막연한 공포감과 거부감에 짓눌려 죽음을 외면하는 게 과연 행복하게 사는 삶일까. 디킨슨은 죽음을 삶의 자연스러운 과정으로 받아들였다. 그녀는 삶에 대한 애착을 놓치지 않으면서도 죽음과 타협하는 방법을 알려고 했다. 죽음에 관한  디킨슨의 시는 독자에게 ‘삶과 함께 있는 죽음’을 생각해 볼 기회를 준다.

 

 

 

 

[제목에 대한 주] 김영민, 《아침에는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좋다》, 어크로스, 2018.

 

[주1] 셸던 솔로몬 외, 이은경 옮김, 《슬픈 불멸주의자》, 48쪽.

 

[주2] 박재열 교수는 원문의 ‘Box’를 ‘상자’라고 직역을 했는데(《미국 여성시 연구》, 43쪽), 시의 전체 내용을 생각하면, ‘Box’는 시신을 안치하는 ‘관(coffin)’을 상징하는 단어로 봐야 한다.

 

[주3] 강은교 시인은 ‘죽음의 왕’이라고 번역했다(《고독은 잴 수 없는 것》, 73쪽). ‘king’은 죽은 영혼을 구원하는 ‘신(God)’을 상징하고, 신의 권위를 깨뜨리는 존재가 ‘파리’이다. 따라서 ‘king’을 ‘죽음의 왕’으로 보기 어렵다. 파리야말로 죽음의 냄새를 풍기면서 나타나 신과 대립하는 ‘죽음의 왕’으로 해석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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젤다 - 그녀의 알려지지 않은 소설과 산문
젤다 세이어 피츠제럴드 지음, 이재경 옮김 / 에이치비프레스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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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대 미국은 ‘재즈 시대(Jazz age)라고 불리던 황금기였다. 재즈 시대는 낭만과 모순이 공존했던 시기였다. 금주법이 시행되었고, 알 카포네(Al Capone)가 ‘밤의 대통령’으로 군림하고 있었다. 한편에선 스윙재즈가 폭발적으로 인기를 끌었고, 성(性) 해방의 자유를 만끽하는 젊은이들이 많아졌다. 특히 재즈 시대를 대표하는 신여성(modern girl)‘플래퍼(flapper)라고 부른다. 그녀들은 싹둑 자른 단발머리에, 무릎까지 오는 플래퍼 드레스를 찰랑거리며 무도회장을 드나들었다. 그녀들은 술과 담배, 춤과 파티, 화려하면서도 파격적인 옷차림을 즐겼고, 자유분방하고 거침없으며 도발적이었다.

 

스콧 F. 피츠제럴드(F. Scott Fitzgerald)와 그가 탄생시킨 개츠비(Gatsby)는 재즈 시대를 상징하는 인물이다. 《위대한 개츠비》는 환락과 환멸이 교차하는 재즈 시대에 선 젊은 세대들을 그려낸 소설이다. 떠나간 연인을 되찾기 위해 주류 밀매로 거부가 된 뒤 날마다 성대한 파티를 열다가 비참한 최후를 맞는 개츠비의 모습은 그 시대의 화려한 낭만적인 사회적 분위기와 그 이면에 감춰진 절망을 상징한다. 피츠제럴드의 삶 역시 개츠비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돈과 성공에 대한 열망과 집착이 평생 그를 따라왔다. 《위대한 개츠비》의 성공이 가져다준 부와 명예는 피츠제럴드를 압박해온 평생의 짐이기도 했다. 그는 《위대한 개츠비》를 뛰어넘은 대작을 써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시달렸으며 작가로서의 자의식과 부에 대한 동경 사이에서 갈등했다. 그는 낭비벽이 심했고 술과 파티를 즐겼다. 피츠제럴드는 알코올 중독에 시달리면서도 제2의 전성기를 누리기 위해 계속 글을 써 내려갔다. 그러나 화려함이 계속 이어질 것만 같았던 재즈 시대는 사상 최악의 경제 대공황이 오면서 막이 내렸고, 그는 마지막 소설을 집필하던 중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

 

피츠제럴드 못지않게 그의 아내인 젤다 세이어(Zelda Sayre)도 수많은 스캔들을 몰고 다닌 화제의 인물이다. 오늘날 사람들은 그녀를 낭비벽이 심하고, 남편을 파멸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은 ‘악녀’로 기억한다. 피츠제럴드의 친구이자 라이벌인 어니스트 헤밍웨이(Ernest Hemingway)의 증언에 따르면 젤다는 남편의 글쓰기를 질투해서 글을 쓰지 못하도록 항상 술을 먹였다. 부부가 파리에 살았을 때, 젤다는 프랑스인 비행 조종사와 짧은 사랑에 빠진 적이 있었다. 그녀는 남편에게 이혼을 요구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미국으로 돌아온 후 피츠제럴드는 작가로서 명성을 얻었지만, 젤다는 정신병원과 요양소를 오가며 지냈다. 피츠제럴드가 세상을 떠나고 8년 뒤에 젤다는 입원한 병원에서 발생한 화재 사고로 사망한다. 과연 그녀는 피츠제럴드가 만나지 말았어야 할 악녀였을까? 젤다는 ‘피츠제럴드의 아내’로만 기억해야 할 인물인가?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Midnight in Paris)>에서 피츠제럴드를 들들 볶는 젤다의 모습을 기억하는 독자라면 ‘작가로서의 젤다’를 들려주는 《젤다》를 읽어보자. 이 책의 부제는 ‘젤다의 편에서 젤다를 읽다’이다. 그동안 대중에게 알려진 젤다의 부정적인 모습, 즉 ‘남편의 재능을 파괴한 정신이상자’ 이미지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보여준다. 젤다는 글재주만 좋을 뿐만 아니라 발레 실력이 뛰어난 플래퍼였다. 또 그림도 잘 그렸다. 그녀가 쓴 단편소설들은 ‘스콧 피츠제럴드’ 또는 그와 같이 쓴 것으로 발표되었다. 피츠제럴드는 젤다의 창작 욕구와 예술적 열정과 무시했다. 젤다는 남편의 반대와 딸의 양육 문제로 인해 정식으로 무용수로 데뷔할 기회를 놓쳤다. 만약 그녀가 무용수가 되었더라면 그녀의 삶은 180도 달라졌을 것이다. 자신의 능력을 발휘할 기회를 놓친 젤다는 커다란 상실감을 느꼈고, 남편의 바람기 때문에 그녀의 외로움과 우울증은 커져만 갔다.

 

피츠제럴드는 젤다의 일기와 편지에 담긴 문구를 베껴 적으면서 소설을 썼다. 그 문제의 작품들은 피츠제럴드에게 첫 번째 성공을 안겨 준 데뷔작 《낙원의 이편》과 두 번째 장편소설 《아름답고 저주받은 사람들》이다. 두 편 모두 국내에 번역된 작품이다. 젤다는 피츠제럴드의 소설을 비평한 글 『친구이자 남편의 최근작(Friend husband’s latest)에 《아름답고 저주받은 사람들》을 ‘요상한 책’이라고 부른다. 그러면서 그 ‘요상한 책’을 쓴 남편의 ‘표절’을 지적한다.

 

 

 어떤 페이지에선 결혼 직후 불가사의하게 사라진 제 옛날 일기의 일부가 보여요. 꽤 편집되어 있지만 편지글들에서도 어쩐지 낯익은 내용이 있고요. 아무래도 피츠제럴드 씨는―스펠링 제대로 쓴 것 맞죠?―표절은 집안에서 시작된다고 믿나 봐요.

 

(이재경 옮김, 『친구이자 남편의 최근작』 중에서, 118쪽)

 

 

《젤다》에 총 5편의 단편소설과 총 9편의 산문이 수록되어 있다. 『오리지널 폴리스 걸(The original follies girl), 『남부 아가씨(Southern girl), 『재능 있는 여자(The girl with talent)‘Girl 시리즈’라는 표제를 달고 발표된 단편소설이다. 젤다의 소설에 나오는 주인공은 사랑에 눈이 멀고 재능과 열정을 드러내지 못하는 여성들이다. 『재능 있는 여자』는 젤다의 자전적 성격이 짙은 작품이다. 이 소설의 여주인공 ‘루’는 미국 전역을 넘은 인기 스타가 될 수 있을 정도로 뛰어난 춤 실력을 갖춘 댄서이지만, ‘사랑’과 ‘가정’이라는 현실 앞에 자신의 열정을 포기하는 불행한 인물이다. 『미친 그들(A couple of nuts)은 재즈 시대의 사회상을 그대로 담은 사진을 보는 듯한 느낌이 주는 소설이다. 목표 없이 방황하면서 자기 존재의 의미에 대해 깊이 생각하기보다는 환락의 파티에 절어 무감각하게 살아가는 젊은 연인의 모습에서 파국으로 치닫는 재즈 시대의 풍경 사진을 보게 된다.

 

우리는 이제 젤다의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 젊음의 생기를 마음껏 발산하면서 춤을 추던 ‘플래퍼’ 젤다의 이야기, 그리고 열정적인 충동을 문학과 예술로 승화시킨 ‘작가’, ‘예술가’ 젤다의 이야기를. 이 모든 이야기는 우리가 기억해야 할 재즈 시대의 ‘전설’로 남기기에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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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니데이 2019-03-22 18: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목이 게임 이름 같은데요, 젤다 피츠제럴드였네요. 주말에 날씨가 많이 차갑다고 합니다. cyrus님, 따뜻한 주말 보내세요.^^

cyrus 2019-03-26 07:22   좋아요 1 | URL
지난 주 토요일과 일요일의 날씨는 그야말로 극과 극이었어요. 토요일엔 비바람이 많이 불었어요. 요즘 같은 날씨에 감기에 걸리기 쉬우니 감기 조심하세요. ^^

2019-03-23 10:17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9-03-26 07:25   좋아요 0 | URL
제 나름대로 언어유희를 의도한 제목을 정해봤습니다... ㅎㅎㅎ
 

 

제롬 데이비드 샐린저(Jerome David Salinger)의 소설 《The Catcher in the Rye》의 주인공 홀든 콜필드(Holden Caulfield)는 콜필드 가문 3남 1녀 중 둘째이다. 소설에서 친형의 이름은 밝혀지지 않았고, ‘D. B.’라는 이름의 머리글자로만 나온다. D. B.는 할리우드에서 영화 시나리오를 쓰는 작가이다. 남동생 앨리(Allie)는 1946년 7월 18일에 백혈병에 걸려 세상을 떠났다. 홀든의 친구 스트라드레이터(Stradlater)는 자신의 작문 숙제를 퇴학이 확정된 홀든에게 맡기는데, 죽은 앨리를 잊지 못한 홀든은 작문 숙제에 동생과 관련된 추억에 대한 글을 쓴다. 막내 피비(Phoebe)는 홀든이 앨리 못지않게 좋아하는 여동생으로, 소설의 후반부에 등장한다.

 

소설의 중반부에 홀든은 과거에 형과 앨리가 주고받은 대화 한 장면을 회상한다.

 

 지금도 기억하는데, 앨리가 형에게 형은 작가니까 전쟁에 참가하면 작품 쓸 자료를 많이 얻을 수 있어서 좋지 않느냐고 물었던 적이 있다. 그러자 형은 앨리에게 야구 미트를 가져오게 하고는, 루퍼트 부루크와 에밀리 디킨슨 중에서 누가 훌륭한 전쟁 시인인가를 물었다. 앨리는 에밀리 디킨슨이라고 대답했다.

 

(이덕형 옮김, 《호밀밭의 파수꾼》, 문예출판사, 210쪽)

 

 

I remember Allie once asked him wasn’t it sort of good that he was in the war because he was a writer and it gave him a lot to write about and all. He made Allie go get his baseball mitt and then he asked him who was the best war poet, Rupert Brooke or Emily Dickinson. Allie said Emily Dickinson.

 

 

 

루퍼트 브룩(Rupert Brooke, 1887~1915)은 영국의 시인이다. 1911년에 첫 시집을 발표했으나 그의 창작 활동은 오래 가지 못했다.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였다가 1915년에 그리스에서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오스만제국(터키)의 지배에 저항하는 그리스 독립 운동에 뛰어들었다가 열병이 악화되어 그리스에서 세상을 떠난 영국의 시인 조지 고든 바이런(George Gordon Byron)의 최후와 조금 비슷하다.

 

루퍼트 브룩이 누군지 모르더라도 독자들 역시 앨리와 비슷한 생각을 했을 것이다. 에밀리 디킨슨(Emily Dickinson)은 평생 독신으로 은둔의 삶을 살면서 세상을 떠날 때까지 총 1,775편의 시를 썼다. 그렇지만 그녀가 생전에 발표한 시는 10편에 불과했다. 그녀는 늘 흰옷만 입고 다녔기 때문에 ‘뉴잉글랜드 수녀’ 혹은 ‘백의의 처녀’라는 별명을 얻었다. 디킨슨은 죽기 직전 여동생 라비니아 디킨슨(Lavinia Norcross Dickinson)에게 자신이 남긴 기록물 전부 불태우라고 유언을 남긴다. 그러나 라비니아는 언니가 쓴 시를 모아 시집을 펴내는 데 노력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D. B.가 디킨슨을 ‘전쟁 시인’으로 보는 이유를 잘 모르겠다. 디킨슨은 남북전쟁이 일어난 시기에 살았다. 디킨슨이 남긴 1,775편의 시를 다 읽어보진 않았지만, 내가 본 바로는 디킨슨은 남북전쟁을 직접 언급한 시를 쓴 적이 없다. 다만, 어떤 대상이나 자신의 감정 상태를 전쟁으로 비유해서 쓴 시가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시를 썼다고 해서 그녀를 ‘전쟁 시인’으로 단정하기 어렵다. D. B.의 엉터리 말은 얕은 문학 지식을 가진 D. B.의 어리석은 모습을 보여주기 위한 것일 수 있다. D. B.는 영화 시나리오를 쓰기 전에는 <황금 금붕어>라는 제목의 소설을 발표한 적이 있는 무명작가였다. 당연히 D. B.도 콜필드가 비꼬는 인물 중 한 사람이다.

 

디킨슨의 시는 대체로 짧은 편이다. 그러나 쉽게 읽혀지는 시는 아니다. 디킨슨의 시에 많이 나오는 주제는 사랑, 자연, 죽음과 불멸, 종교에 대한 회의적인 질문, 자기 성찰 등이다. 그래서 그녀의 시 대다수는 진중하면서도 엄숙한 분위기를 띤다. 그녀의 시는 심오하고 철학적이다. 디킨슨은 절제된 구성으로 시의 형태를 단순화시키거나 시의 주제를 함축적으로 표현했다. 시의 음률을 살리려고 ‘줄표(—, dash)를 많이 썼다. 게다가 특정 시구를 강조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문법을 무시하는 작법을 구사했다. 그 때문에 디킨슨의 시는 들어가기는 쉬워도(읽기 쉬워도), 나가기 어려운(단번에 이해하기 어려운) ‘미로’이다.

 

 

 

 

 

 

 

 

 

 

 

 

 

 

 

* 에밀리 디킨슨 《고독을 잴 수 없는 것》 (민음사, 2016)

* [구판 절판] 에밀리 디킨슨 《한 줄기 빛이 비스듬히》 (민음사, 1976)

 

 

 

디킨슨이 남긴 1,775편의 시는 실로 어마어마한 양이다. 디킨슨은 시에 제목을 붙이지 않았다. 그래서 시집 출간에 참여한 편집자와 문학 연구가들은 엄청난 양의 시를 구분하기 위해 각각의 시에 숫자 번호를 붙였다. 그녀의 시를 가리킬 땐 숫자 번호와 시의 첫 번째 문장을 함께 언급한다. 시의 첫 번째 문장은 임시로 붙여진 가제(假題)가 된다.

 

만약 우리나라에 해설을 곁들인 디킨슨 시 ‘전집’이 번역되어 나온다면 적어도 두 권으로 나올 수 있겠다. 가장 많이 알려진 디킨슨 시 ‘선집’은 1976년에 강은교 시인이 번역한 《한 줄기 빛이 비스듬히》이다. 알라딘에는 이 시집의 출판연도가 ‘1997년’으로 되어 있는데, 초판 발행연도는 아니다. 1997년에 나온 건 개정 2판이다. 2016년에 나온 《고독을 잴 수 없는 것》은 개정 3판이다. 두 권의 책에 수록된 시와 강은교 시인이 쓴 해설 내용은 모두 같지만, 개정 3판을 잘 살펴보면 구판에서 드러난 어색한 번역문과 오역을 고치고 새로 다듬은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구판과 개정 3판에 ‘하늘나라에 갔었네’라는 가제가 붙여진 시(No. 374: I went to Heaven)가 수록되어 있다. 구판 번역문과 개정 3판의 번역문은 다음과 같다.

 

 

 

Stiller — than the fields

At the full Dew —

Beautiful — as Pictures —

No Man drew.

People — like the Moth

Of Mechlin — frames —

Duties — of Gossamer —

And Eider — names —

Almost — contented —

I — could be —

’Mong such unique

Society —

 

 

 

이슬 가득한 — 들

보다도 고요한 —

그 누구도 그릴 수 없는

메클린의 — 좀벌레 같은 —

사람들 — 평화롭고 —

의무는

거미줄과 솜털처럼 가벼워 —

난 한껏

만족할 수 있었네 —

 

(‘하늘나라에 갔었네’ 중에서, 강은교 옮김, 《한 줄기 빛이 되어》, 민음사, 48쪽)

 

 

 

이슬 가득한 — 들

보다도 고요한 —

그 누구도 그릴 수 없는

메클린의 — 레이스나방 같은 —

사람들 — 평화롭고 —

의무는

거미줄과 솜털처럼 가벼워 —

난 한껏

만족할 수 있었네 —

 

(‘하늘나라에 갔었네’ 중에서, 강은교 옮김, 《고독은 잴 수 없는 것》, 민음사, 47쪽)

 

 

 

 

‘moth’는 나방을 뜻한다. 그런데 구판에는 ‘moth’를 ‘좀벌레(silverfish)’로 잘못 번역한 구절이 있다. 번역문 옆에 원문이 수록되어 있기 때문에 이미 구판의 오역을 발견한 독자들이 있을 것이다.

 

 

 

 

 

 

 

 

 

 

 

 

 

 

 

* 에밀리 디킨슨, 윤명옥 옮김, 《디킨슨 시선》 (지만지, 2011)

* [절판] 에밀리 디킨슨, 김천봉 옮김, 《19세기 미국 명시 6: 에밀리 디킨슨》 (이담북스, 2012)

 

 

 

민음사의 디킨슨 시 선집으로는 성에 차지 않는다면 지만지(지식을만드는지식)의 《디킨슨 시선》이담북스의 《에밀리 디킨슨》을 읽으면 된다. 다만 이담북스 번역본은 절판되었다. 개인적으로 마음에 드는 번역본은 지만지의 《디킨슨 시선》이다. 오역으로 추정되는 시구가 몇 개 있긴 하지만, 가독성이 좋은 편이다. 무엇보다도 이 번역본이 기존의 디킨슨 시 선집과 차별화된 특징이 있는데, 시마다 붙여진 숫자 번호까지 적혀 있다. 지만지의 《디킨슨 시선》은 숫자 번호가 붙여진 유일한 디킨슨 시 선집 번역본이다.

 

 

 

 

 

 

 

 

 

 

 

 

 

 

 

 

* 데이먼 영 《정원에서 철학을 만나다》 (L.I.E., 2009)

* 박재열 《미국 여성시 연구》 (L.I.E., 2009)

 

 

 

잘 알려지지 않은 디킨슨의 생애를 상세하게 다룬 책으로는 데이먼 영(Damon Young)《정원에서 철학을 만나다》박재열《미국 여성시 연구》가 있다. 《정원에서 철학을 만나다》는 정원이라는 한정된 공간 속에 자연을 관찰하면서 시를 쓴 디킨슨의 모습을 볼 수 있는 책이다. 그녀에게 정원은 ‘안식처’이자 ‘천국’과 같은 곳이다. 《미국 여성시 연구》는 디킨슨을 포함한 6명의 여성 시인의 생애와 시 세계를 알기 쉽게 정리한 책이다. 이 책은 다른 시 선집 해설에서 볼 수 없는 디킨슨의 가족 관계—친오빠의 아내인 올케 수전(Susan)과의 관계이 언급되어 있고, 그녀가 친하게 지내던 남성들에게 보낸 편지 일부 내용이 인용되어 있다. 특히 올케에 향한 레즈비언(lesbian)을 암시하는 듯한 디킨슨의 편지글은 그동안 ‘무성애적(asexuality) 처녀’로만 알려진 세간의 평가를 뒤집는 자료이다. 저자는 디킨슨이 쓴 편지글을 통해 간접적으로 드러내면서도 끝내 숨기려고 했던 그녀의 내면을 살피고, 그것이 어떻게 시로 구현되었는지 분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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짜라투스트라 2019-03-22 12: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지만지의 디킨슨 시선 한 번 읽어봐야겠네요^^

cyrus 2019-03-22 17:48   좋아요 1 | URL
지만지 번역본에 원문은 없지만, 민음사 번역본에 수록된 시의 수보다 많습니다. 다양한 소재와 주제의 시를 볼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

syo 2019-03-22 13: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돈받아야 된다니까 정말......

cyrus 2019-03-22 17:51   좋아요 0 | URL
그랬으면 좋겠네요... ㅎㅎㅎㅎ

oren 2019-03-22 16:5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최근에 디킨슨의 시집 『고독은 잴 수 없는 것』을 읽었는데, 정말 하나같이 독특한 시들만 있어서 놀랐고, 쉽사리 이해되지 않는 ‘그녀만의 세계‘를 뚫고 들어가기가 쉽지는 않구나 하는 느낌을 받았더랬습니다.

그녀가 유부남이었던 목사를 사랑했고, 자신의 사랑 고백이 거절당한 이후로 평생 집에만 틀어박혀 오로지 시를 짓는데만 열정을 쏟았다니, 그녀의 삶이 얼마나 고독하고 절망에 차 있었을까 싶어서 그녀의 시를 읽으면서도 짠한 느낌을 지울 수 없겠더군요.

cyrus 2019-03-22 17:56   좋아요 1 | URL
디킨슨의 생애를 알고 난 뒤에 시를 읽으니까 그녀가 왜 ‘죽음’과 ‘불멸’이라는 주제에 집착했는지 이해할 수 있었어요. 그녀의 시에서 죽음에 대한 그녀의 트라우마가 느껴졌습니다.

2019-05-31 06:41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9-06-01 10:21   좋아요 0 | URL
처음에 디킨슨의 시를 읽었을 땐 이해하지 못했어요. 그런데 생각날 때마다 시를 읽으니까 그전에 미처 보지 못했던, 디킨슨의 진가를 발견하게 됩니다. 디킨슨이 좋아했던 장소가 정원입니다. 그래서 정원을 소재로 한 시가 많아요. 세밀한 관찰력이 없으면 쓸 수 없는 시들입니다.
 
진화의 배신 - 착한 유전자는 어째서 살인 기계로 변했는가
리 골드먼 지음, 김희정 옮김 / 부키 / 2019년 1월
평점 :
품절


 

 

피로스의 승리(Pyrrhic victory)라는 말이 있다. 많은 희생을 감수하면서 얻은 승리를 가리킬 때 쓰는 말이다. 고대 그리스의 명장 피로스는 로마와 싸워 승리를 거뒀지만, 자신도 적지 않은 손해를 봤다. 그의 부대는 수많은 장군과 숙련된 병사들을 잃었기 때문이다. 아군의 몰락을 불러올 승전이라면 패배한 것과 다름없다. 이것이 그 무섭다는 승자의 저주(The winner’s curse)이다.

 

호모 사피엔스(Homo sapiens), 즉 인간이 지구상에 살아남은 것은 행운이다. 그러나 지금 인간은 새롭게 우리를 위협하는 질병 속에서 신음한다. 인간은 진화에 성공하여 오랫동안 지구상에 살아남은 승리자가 되었지만, ‘승자의 저주를 피하지 못한다. 질병과의 전쟁은 오늘의 일만은 아니다. 중세 유럽에 흑사병이 유행하여 인구의 4분의 1이 희생되고, 장원제가 붕괴하는 거대한 변화를 야기했다. 인플루엔자 치료제가 없었던 1918년에 전 세계를 휩쓴 스페인 독감은 제1차 세계 대전과 맞물려 유행하면서 5000만 명 이상의 목숨을 앗아간 대재앙이었다. 육체적으로 매우 취약한 인간은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었을까. 물론 우리는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알고 있다. 인간은 유전자 교환을 통한 유성 생식이 가능한 종이다. 유전자의 다양성은 인간의 장기적 생존에 매우 중요하다. 유전적 다양성이 풍부해질수록 질병 면역력이 강한 인간이 태어난다. 그러나 그들 중 일부는 특정 질병에 취약한 속성을 물려받을 수도 있다.

 

진화의 배신은 바로 이 문제를 다루고 있는 책이다. 닳고 닳은 소재지만, 저자의 시각만큼은 무척 참신하다. 심장병 전문 의사인 저자는 인류는 역사적으로 너무나 연약한 존재라는 사실을 먼저 강조한다. 생존율을 높여주는 네 가지 유전 형질 덕분에 인류는 멸종하지 않았다. 저자가 제시한 유전 형질은 다음과 같다.

 

첫 번째, 굶주림을 피하기 위해 필요 이상으로 음식을 먹으려는 유전 형질이다. 초기 인류는 굶어 죽지 않기 위해서 포만감을 느낄 정도로 음식을 먹었다. 그들이 살았던 시대는 식량이 귀한 시절이었다. 초기 인류의 과식은 생존을 위한 본능이었다. 그러나 현생 인류는 식량 부족에 대해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시대에 살고 있다. 우리는 얼마든지 원하는 음식을 먹을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과식이 일상화되면서 당뇨와 고혈압 같은 질병에 걸릴 확률은 높아진다.

 

두 번째, 물과 소금을 많이 섭취하려는 욕구이다. 초기 인류는 아사(餓死)뿐만 아니라 탈수로 인한 죽음의 공포도 시달렸다. 그러므로 탈수 방지를 위해 물과 소금을 많이 섭취하는 습관이 생겼고, 인류는 체내의 물과 소금을 적절히 보존할 수 있도록 진화되었다. 그러나 현생 인류는 소금에 중독되었다. 우리의 뇌는 짠맛을 통해 만족감을 느끼게 된다. 짠맛이 주는 만족감에 익숙해진 뇌는 그 맛을 잊지 못해 계속해서 짠 음식을 찾는다. 과도한 염분 섭취는 성인병을 일으키는 원인이다. 염분 섭취량이 많아지면 갈증이 유발되어 물을 많이 마시게 된다. 물을 너무 많이 섭취하면 체내의 염분이 부족해지고, 전해질이 희석돼 물 중독 증상이 나타나 생명을 위협할 수 있다.

 

세 번째는 위기 상황을 스스로 인식하거나 그것에 대한 두려움을 느끼는 생존 본능이다. 인류는 생명을 위협하는 상황(폭력, 살인, 전쟁 등)에 대해 두려움을 느낀다. 이러한 심리적 반응은 우리의 내면이 보내는 경고 신호이다. 위험한 상황일 수 있으니 얼른 피하라.’ 과거에 비하면 현생 인류는 비교적 안전한 세상 속에 살고 있다. 그렇지만 지나치게 두려워하고 불안에 떠는 성향은 우울증을 유발할 뿐만 아니라 자살까지 불러일으킨다.

 

마지막 네 번째는 과다 출혈을 막는 응고 작용이다. 혈액 응고가 정상적으로 이루어지면 과다 출혈로 목숨을 잃는 일은 없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현생 인류는 혈액 응고 작용으로 인해 목숨을 잃을 확률이 높아졌다. 응고가 너무 많이 일어나면 혈전이 생긴다. 혈전이 생기면 심장마비, 뇌졸중 발생 위험이 커진다.

 

네 가지 유전 형질 덕분에 각종 질병에 면역력이 강한 개체의 인류가 살아남았고, 자손도 남길 수 있었다. 하지만 저자는 현대에 들어서는 이 기능들이 우리를 위협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승자의 저주에 빠진 인류는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저자는 미래의 인류가 겪을 수 있는 상황을 세 가지 시나리오로 제시한다. 하나는 최악의 시나리오다. 다음 후손들이 태어나기 전에 모든 인류는 각종 질병에 시달리다가 죽는다는 시나리오다. 두 번째는 건강해지기 위해 인류가 스스로 제 몸을 관리한다는 시나리오다. 세 번째는 날이 갈수록 발전하는 과학기술을 이용하여 건강을 유지한다는 시나리오다. 다만, 이 시나리오는 과학에 완전히 의존하는 인류의 탄생을 예고하는 포스트휴머니즘(post-humanism)에 가까운 발상은 아니다.

 

이 책은 유전자와 진화의 배신이 인간을 성인병 위험에 노출된 연약한 존재로 만들게 한 원인으로 지목하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건강이 나빠진다고 유전자 탓만 할 수 없다. 앞서 언급했듯이 인간은 그동안 진화의 문턱을 수차례 넘어서면서 살아남은 지구의 승리자인 것처럼 살아왔다. 그렇지만 그 과정에서 인간은 얻은 것도, 잃은 것도 있었다. 그런데 인간은 승리감에 도취해서 무엇을 잃어버렸는지 알아차리지 못했다. 자만과 방심은 금물이다. 진화의 배신은 인간을 진화의 배신에 속절없이 무너지고 마는 연약한 존재라는 점을 증명하기 위해 쓴 책이 아니다. 저자는 비관주의자도, 낙관주의자도 아니다. 이 책은 인간은 언제나 좋은 방향으로 진화하는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을 증명한다.

 

 

진화라는 이름으로 시작된 인류주연의 장대한 드라마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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