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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화의 배신 - 착한 유전자는 어째서 살인 기계로 변했는가
리 골드먼 지음, 김희정 옮김 / 부키 / 2019년 1월
평점 :
‘피로스의 승리(Pyrrhic victory)’라는 말이 있다. 많은 희생을 감수하면서 얻은 승리를 가리킬 때 쓰는 말이다. 고대 그리스의 명장 피로스는 로마와 싸워 승리를 거뒀지만, 자신도 적지 않은 손해를 봤다. 그의 부대는 수많은 장군과 숙련된 병사들을 잃었기 때문이다. 아군의 몰락을 불러올 승전이라면 패배한 것과 다름없다. 이것이 그 무섭다는 ‘승자의 저주(The winner’s curse)’이다.
호모 사피엔스(Homo sapiens), 즉 인간이 지구상에 살아남은 것은 행운이다. 그러나 지금 인간은 새롭게 우리를 위협하는 질병 속에서 신음한다. 인간은 진화에 성공하여 오랫동안 지구상에 살아남은 승리자가 되었지만, ‘승자의 저주’를 피하지 못한다. 질병과의 전쟁은 오늘의 일만은 아니다. 중세 유럽에 흑사병이 유행하여 인구의 4분의 1이 희생되고, 장원제가 붕괴하는 거대한 변화를 야기했다. 인플루엔자 치료제가 없었던 1918년에 전 세계를 휩쓴 스페인 독감은 제1차 세계 대전과 맞물려 유행하면서 5000만 명 이상의 목숨을 앗아간 대재앙이었다. 육체적으로 매우 취약한 인간은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었을까. 물론 우리는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알고 있다. 인간은 유전자 교환을 통한 유성 생식이 가능한 종이다. 유전자의 다양성은 인간의 장기적 생존에 매우 중요하다. 유전적 다양성이 풍부해질수록 질병 면역력이 강한 인간이 태어난다. 그러나 그들 중 일부는 특정 질병에 취약한 속성을 물려받을 수도 있다.
《진화의 배신》은 바로 이 문제를 다루고 있는 책이다. 닳고 닳은 소재지만, 저자의 시각만큼은 무척 참신하다. 심장병 전문 의사인 저자는 인류는 역사적으로 너무나 연약한 존재라는 사실을 먼저 강조한다. 생존율을 높여주는 네 가지 유전 형질 덕분에 인류는 멸종하지 않았다. 저자가 제시한 유전 형질은 다음과 같다.
첫 번째, 굶주림을 피하기 위해 필요 이상으로 음식을 먹으려는 유전 형질이다. 초기 인류는 굶어 죽지 않기 위해서 포만감을 느낄 정도로 음식을 먹었다. 그들이 살았던 시대는 식량이 귀한 시절이었다. 초기 인류의 과식은 생존을 위한 본능이었다. 그러나 현생 인류는 식량 부족에 대해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시대에 살고 있다. 우리는 얼마든지 원하는 음식을 먹을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과식이 일상화되면서 당뇨와 고혈압 같은 질병에 걸릴 확률은 높아진다.
두 번째, 물과 소금을 많이 섭취하려는 욕구이다. 초기 인류는 아사(餓死)뿐만 아니라 탈수로 인한 죽음의 공포도 시달렸다. 그러므로 탈수 방지를 위해 물과 소금을 많이 섭취하는 습관이 생겼고, 인류는 체내의 물과 소금을 적절히 보존할 수 있도록 진화되었다. 그러나 현생 인류는 소금에 중독되었다. 우리의 뇌는 짠맛을 통해 만족감을 느끼게 된다. 짠맛이 주는 만족감에 익숙해진 뇌는 그 맛을 잊지 못해 계속해서 짠 음식을 찾는다. 과도한 염분 섭취는 성인병을 일으키는 원인이다. 염분 섭취량이 많아지면 갈증이 유발되어 물을 많이 마시게 된다. 물을 너무 많이 섭취하면 체내의 염분이 부족해지고, 전해질이 희석돼 물 중독 증상이 나타나 생명을 위협할 수 있다.
세 번째는 위기 상황을 스스로 인식하거나 그것에 대한 두려움을 느끼는 생존 본능이다. 인류는 생명을 위협하는 상황(폭력, 살인, 전쟁 등)에 대해 두려움을 느낀다. 이러한 심리적 반응은 우리의 내면이 보내는 경고 신호이다. ‘위험한 상황일 수 있으니 얼른 피하라.’ 과거에 비하면 현생 인류는 비교적 안전한 세상 속에 살고 있다. 그렇지만 지나치게 두려워하고 불안에 떠는 성향은 우울증을 유발할 뿐만 아니라 자살까지 불러일으킨다.
마지막 네 번째는 과다 출혈을 막는 응고 작용이다. 혈액 응고가 정상적으로 이루어지면 과다 출혈로 목숨을 잃는 일은 없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현생 인류는 혈액 응고 작용으로 인해 목숨을 잃을 확률이 높아졌다. 응고가 너무 많이 일어나면 혈전이 생긴다. 혈전이 생기면 심장마비, 뇌졸중 발생 위험이 커진다.
네 가지 유전 형질 덕분에 각종 질병에 면역력이 강한 개체의 인류가 살아남았고, 자손도 남길 수 있었다. 하지만 저자는 현대에 들어서는 이 기능들이 우리를 위협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승자의 저주’에 빠진 인류는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저자는 미래의 인류가 겪을 수 있는 상황을 세 가지 시나리오로 제시한다. 하나는 최악의 시나리오다. 다음 후손들이 태어나기 전에 모든 인류는 각종 질병에 시달리다가 죽는다는 시나리오다. 두 번째는 건강해지기 위해 인류가 스스로 제 몸을 관리한다는 시나리오다. 세 번째는 날이 갈수록 발전하는 과학기술을 이용하여 건강을 유지한다는 시나리오다. 다만, 이 시나리오는 과학에 완전히 의존하는 인류의 탄생을 예고하는 포스트휴머니즘(post-humanism)에 가까운 발상은 아니다.
이 책은 ‘유전자와 진화의 배신’이 인간을 성인병 위험에 노출된 연약한 존재로 만들게 한 원인으로 지목하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건강이 나빠진다고 유전자 탓만 할 수 없다. 앞서 언급했듯이 인간은 그동안 진화의 문턱을 수차례 넘어서면서 살아남은 지구의 승리자인 것처럼 살아왔다. 그렇지만 그 과정에서 인간은 얻은 것도, 잃은 것도 있었다. 그런데 인간은 승리감에 도취해서 무엇을 잃어버렸는지 알아차리지 못했다. 자만과 방심은 금물이다. 《진화의 배신》은 인간을 ‘진화의 배신’에 속절없이 무너지고 마는 연약한 존재라는 점을 증명하기 위해 쓴 책이 아니다. 저자는 비관주의자도, 낙관주의자도 아니다. 이 책은 인간은 언제나 좋은 방향으로 진화하는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을 증명한다.
‘진화’라는 이름으로 시작된 ‘인류’ 주연의 장대한 드라마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