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젤다 - 그녀의 알려지지 않은 소설과 산문
젤다 세이어 피츠제럴드 지음, 이재경 옮김 / 에이치비프레스 / 2019년 2월
평점 :
1920년대 미국은 ‘재즈 시대(Jazz age)’라고 불리던 황금기였다. 재즈 시대는 낭만과 모순이 공존했던 시기였다. 금주법이 시행되었고, 알 카포네(Al Capone)가 ‘밤의 대통령’으로 군림하고 있었다. 한편에선 스윙재즈가 폭발적으로 인기를 끌었고, 성(性) 해방의 자유를 만끽하는 젊은이들이 많아졌다. 특히 재즈 시대를 대표하는 신여성(modern girl)을 ‘플래퍼(flapper)’라고 부른다. 그녀들은 싹둑 자른 단발머리에, 무릎까지 오는 플래퍼 드레스를 찰랑거리며 무도회장을 드나들었다. 그녀들은 술과 담배, 춤과 파티, 화려하면서도 파격적인 옷차림을 즐겼고, 자유분방하고 거침없으며 도발적이었다.
스콧 F. 피츠제럴드(F. Scott Fitzgerald)와 그가 탄생시킨 개츠비(Gatsby)는 재즈 시대를 상징하는 인물이다. 《위대한 개츠비》는 환락과 환멸이 교차하는 재즈 시대에 선 젊은 세대들을 그려낸 소설이다. 떠나간 연인을 되찾기 위해 주류 밀매로 거부가 된 뒤 날마다 성대한 파티를 열다가 비참한 최후를 맞는 개츠비의 모습은 그 시대의 화려한 낭만적인 사회적 분위기와 그 이면에 감춰진 절망을 상징한다. 피츠제럴드의 삶 역시 개츠비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돈과 성공에 대한 열망과 집착이 평생 그를 따라왔다. 《위대한 개츠비》의 성공이 가져다준 부와 명예는 피츠제럴드를 압박해온 평생의 짐이기도 했다. 그는 《위대한 개츠비》를 뛰어넘은 대작을 써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시달렸으며 작가로서의 자의식과 부에 대한 동경 사이에서 갈등했다. 그는 낭비벽이 심했고 술과 파티를 즐겼다. 피츠제럴드는 알코올 중독에 시달리면서도 제2의 전성기를 누리기 위해 계속 글을 써 내려갔다. 그러나 화려함이 계속 이어질 것만 같았던 재즈 시대는 사상 최악의 경제 대공황이 오면서 막이 내렸고, 그는 마지막 소설을 집필하던 중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
피츠제럴드 못지않게 그의 아내인 젤다 세이어(Zelda Sayre)도 수많은 스캔들을 몰고 다닌 화제의 인물이다. 오늘날 사람들은 그녀를 낭비벽이 심하고, 남편을 파멸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은 ‘악녀’로 기억한다. 피츠제럴드의 친구이자 라이벌인 어니스트 헤밍웨이(Ernest Hemingway)의 증언에 따르면 젤다는 남편의 글쓰기를 질투해서 글을 쓰지 못하도록 항상 술을 먹였다. 부부가 파리에 살았을 때, 젤다는 프랑스인 비행 조종사와 짧은 사랑에 빠진 적이 있었다. 그녀는 남편에게 이혼을 요구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미국으로 돌아온 후 피츠제럴드는 작가로서 명성을 얻었지만, 젤다는 정신병원과 요양소를 오가며 지냈다. 피츠제럴드가 세상을 떠나고 8년 뒤에 젤다는 입원한 병원에서 발생한 화재 사고로 사망한다. 과연 그녀는 피츠제럴드가 만나지 말았어야 할 악녀였을까? 젤다는 ‘피츠제럴드의 아내’로만 기억해야 할 인물인가?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Midnight in Paris)>에서 피츠제럴드를 들들 볶는 젤다의 모습을 기억하는 독자라면 ‘작가로서의 젤다’를 들려주는 《젤다》를 읽어보자. 이 책의 부제는 ‘젤다의 편에서 젤다를 읽다’이다. 그동안 대중에게 알려진 젤다의 부정적인 모습, 즉 ‘남편의 재능을 파괴한 정신이상자’ 이미지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보여준다. 젤다는 글재주만 좋을 뿐만 아니라 발레 실력이 뛰어난 플래퍼였다. 또 그림도 잘 그렸다. 그녀가 쓴 단편소설들은 ‘스콧 피츠제럴드’ 또는 그와 같이 쓴 것으로 발표되었다. 피츠제럴드는 젤다의 창작 욕구와 예술적 열정과 무시했다. 젤다는 남편의 반대와 딸의 양육 문제로 인해 정식으로 무용수로 데뷔할 기회를 놓쳤다. 만약 그녀가 무용수가 되었더라면 그녀의 삶은 180도 달라졌을 것이다. 자신의 능력을 발휘할 기회를 놓친 젤다는 커다란 상실감을 느꼈고, 남편의 바람기 때문에 그녀의 외로움과 우울증은 커져만 갔다.
피츠제럴드는 젤다의 일기와 편지에 담긴 문구를 베껴 적으면서 소설을 썼다. 그 문제의 작품들은 피츠제럴드에게 첫 번째 성공을 안겨 준 데뷔작 《낙원의 이편》과 두 번째 장편소설 《아름답고 저주받은 사람들》이다. 두 편 모두 국내에 번역된 작품이다. 젤다는 피츠제럴드의 소설을 비평한 글 『친구이자 남편의 최근작(Friend husband’s latest)』에 《아름답고 저주받은 사람들》을 ‘요상한 책’이라고 부른다. 그러면서 그 ‘요상한 책’을 쓴 남편의 ‘표절’을 지적한다.
어떤 페이지에선 결혼 직후 불가사의하게 사라진 제 옛날 일기의 일부가 보여요. 꽤 편집되어 있지만 편지글들에서도 어쩐지 낯익은 내용이 있고요. 아무래도 피츠제럴드 씨는―스펠링 제대로 쓴 것 맞죠?―표절은 집안에서 시작된다고 믿나 봐요.
(이재경 옮김, 『친구이자 남편의 최근작』 중에서, 118쪽)
《젤다》에 총 5편의 단편소설과 총 9편의 산문이 수록되어 있다. 『오리지널 폴리스 걸(The original follies girl)』, 『남부 아가씨(Southern girl)』, 『재능 있는 여자(The girl with talent)』는 ‘Girl 시리즈’라는 표제를 달고 발표된 단편소설이다. 젤다의 소설에 나오는 주인공은 사랑에 눈이 멀고 재능과 열정을 드러내지 못하는 여성들이다. 『재능 있는 여자』는 젤다의 자전적 성격이 짙은 작품이다. 이 소설의 여주인공 ‘루’는 미국 전역을 넘은 인기 스타가 될 수 있을 정도로 뛰어난 춤 실력을 갖춘 댄서이지만, ‘사랑’과 ‘가정’이라는 현실 앞에 자신의 열정을 포기하는 불행한 인물이다. 『미친 그들(A couple of nuts)』은 재즈 시대의 사회상을 그대로 담은 사진을 보는 듯한 느낌이 주는 소설이다. 목표 없이 방황하면서 자기 존재의 의미에 대해 깊이 생각하기보다는 환락의 파티에 절어 무감각하게 살아가는 젊은 연인의 모습에서 파국으로 치닫는 재즈 시대의 풍경 사진을 보게 된다.
우리는 이제 젤다의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 젊음의 생기를 마음껏 발산하면서 춤을 추던 ‘플래퍼’ 젤다의 이야기, 그리고 열정적인 충동을 문학과 예술로 승화시킨 ‘작가’, ‘예술가’ 젤다의 이야기를. 이 모든 이야기는 우리가 기억해야 할 재즈 시대의 ‘전설’로 남기기에 충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