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계 없는 페미니즘 - 제주 예멘 난민과 페미니즘의 응답
김선혜 외 지음 / 와온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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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이나 자연재해를 피해 외국이나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는 사람을 난민이라고 한다. 1951년에 체결된 난민의 지위에 관한 국제 협약은 난민을 이렇게 규정하고 있다.

 

인종, 종교, 국적 또는 특정 사회집단의 구성원 신분 또는 정치적 견해 등을 이유로 박해를 받을 우려가 있다는 충분한 근거 있는 공포로 인하여 자신의 국적국(國籍國: 배나 비행기 따위의 국적이 등록되어 있는 나라) 밖에 있는 자로서, 국적국의 보호를 받을 수 없거나 또는 그러한 공포로 인하여 국적국의 보호를 받는 것을 원하지 아니하는 자 []

 

지난해 제주도에 들어온 예멘 난민 문제로 온 나라가 시끄러웠다.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 제주도 난민수용 거부해주세요라는 제목의 글이 올라왔다. 해당 글은 약 17만 명의 동의를 받았으나 공개된 지 사흘 만에 갑자기 삭제됐다. 한번 국민청원 게시판에 올린 글은 작성자가 수정하거나 삭제할 수 없으며 관리자의 삭제만 가능하다. 청와대 측에서 별다른 언급 없이 글을 삭제하면서 논란이 시작되었는데 비슷한 내용의 청원이 계속 나왔다. 난민 수용을 반대하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난민은 가짜 난민(難民)이고 미래의 난민(亂民)이다. 국내에 거주하는 난민이 늘어난다는 소식에 공포를 느낀 사람들은 난민이 무리 지어 다니면 사회의 질서를 어지럽히는 잠재적 범죄자가 될 수 있다고 믿었다. 난민을 둘러싼 가짜 뉴스까지 확산하면서 난민 문제에 대한 국내 여론은 미국과 유럽 등 서구권에서 불거진 이슬람 공포증(Islam phobia)과 이슬람 혐오를 그대로 따라갔다.

 

당시 사람들이 예멘 난민 수용을 반대하면서 가장 많이 언급했던 가짜 뉴스는 이슬람은 여성을 혐오하는 최악의 종교다여성 차별과 여성 혐오 문화에 익숙한 무슬림 남성은 잠재적 성범죄자다라는 내용이다. 여성억압을 이슬람과 동일시하는 가짜 뉴스는 난민수용 반대 여론에 불을 지폈다. ‘무슬림 남성 난민이 한국 여성을 성폭행할 것이라는 주장도 퍼졌다. 예멘 난민 수용을 반대하는 목소리를 낸 사람 중에 자신을 페미니스트라고 밝힌 여성들도 있었다. 그녀들은 무슬림이란 단어로 자연스럽게 연상되는 성차별적이고 폭력적인 남성과 그 피해자인 여성의 구도로 난민 문제를 바라봤다. 과연 여성 혐오는 이슬람만의 특징인가? 무슬림 남성이 가해자라면 무슬림 여성은 남성에게 속절없이 당하기만 하는 피해자인가? 그렇다면 예멘 난민은 잠재적 가해자인가? ‘페미니즘이라는 이름으로 난민(難民)난민(亂民)으로 바라보는 것은 옳은가? 1992년 세계 난민 협약에 가입한 이후로 난민 보호국이 된 우리나라는 그 역할을 제대로 하고 있을까.

 

난민 수용 반대 여론과 가짜 뉴스가 이어지는 동안 한쪽에서는 이러한 상황에 대해 고민하는 페미니스트와 인권 운동가들이 모여 페이스북 페이지 경계 없는 페미니즘을 만들었다. ‘경계 없는 페미니즘은 인도 출신의 탈식민주의 페미니스트 이론가인 찬드라 탈파드 모한티(Chandra Talpade Mohanty)의 동명 저서 제목에서 따온 것이다. 37명의 필자가 참여한 경계 없는 페미니즘은 페이스북 페이지 경계 없는 페미니즘에 연재된 글과 언론에 게재된 칼럼을 포함해서 총 40편의 글이 수록되었다. 페미니즘의 난민 혐오 담론을 줄기차게 비판해온 여성학 연구자 김보명, 성과재생산포럼 소속 활동가 나영, 퀴어 활동가 나영정, 여성학자 정희진, 문화평론가 손희정, 홍성수 숙명여대 법학부 교수 등을 포함해 다양한 분야의 사람들이 참여했다. 경계 없는 페미니즘은 그동안 남의 집 불구경 보듯 다뤘던 무슬림 혐오와 난민 혐오 담론이 우리의 문제임을 환기한다. 동시에 민족주의와 인종주의에 갇혀 있는 페미니즘을 경계한다.

 

우리는 알게 모르게 서구 사회가 이슬람에 가진 오해와 편견을 고스란히 이어받았다. 이슬람 혐오와 페미니즘이라는 글을 쓴 대학생 페미니스트는 실제로 무슬림을 만나면서 자신이 무슬림을 바라보는 눈이 지나치게 서구적이라는 사실을 지각한다. 그녀는 이슬람 문화에 대해 잘 알지 못하면서 여성 혐오라는 프레임을 씌우고 난민 수용을 반대하는 페미니즘을 근거 없는 오만이라고 비판한다. 수상한 페미니스트 투사들은 여성 인권을 위한다는 핑계로 난민 반대를 외치는 수사를 비판한 글이다. 여성을 국민으로 소환해서 여성 인권을 앞세운 난민 반대 수사는 이방인에 대한 공포와 혐오를 재생산한다.

 

단지 한국 여성들만 위하려 한다면 페미니즘 운동은 축소된다. 난민 문제는 너무나 많은 형태(성차별, 인종 차별, 종교 차별, 성소수자 차별)의 억압의 교차 지점에 있다. 그러므로 상호교차성 페미니즘(intersectional feminism)은 인종, 계급, 젠더, 섹슈얼리티, 국적, 종교, 세대 등과 같은 다양한 정체성 범주들이 서로 복잡하게 교차하면서 위계적으로 얽혀 있는 현실을 해석하기 위해 등장했다. 여성혐오자 이슬람 난민을 추방하자고 외치는 당신에게-상호교차성 페미니즘의 여섯 가지 반론인종, 젠더, 교차적 페미니즘은 난민 문제를 무슬림 남성 대 한국 여성으로 단순화하여 바라보는 시선에 문제를 제기한다.

 

누군가는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 난민 인권 운동과 페미니즘 운동을 같이 하면 힘들다고. 그리고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면 페미니즘 운동에 매진할 거라고 생각하는 페미니스트들이 있을 것이다.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는 페미니스트가 있다면 지금 필요한 페미니즘이 무엇인지 알려주는 경계 없는 페미니즘을 권하고 싶다. 그러면 타자를 구분 짓고 배척하게 만드는 내 안의 경계(境界)를 확인할 수 있다. 페미니스트로서 정말 경계(警戒)해야 할 것은 페미니즘이 타자를 절멸하고 부정하고 추방하는 혐오 담론의 근거로 변질되는 것이다. 페미니즘은 사회를 바꾸는 이론이자 주변화된 타자와 연대하는 삶을 구체적으로 실천해야 하는 과제를 안고 가는 실천이지 적을 생산하는 혐오 담론을 합리화하는 폭력이 아니다.

 

 

진부하고 당연하며 이미 우리가 다 알고 있는 교훈일 수 있지만, 다시 한번 말해 보려고 한다. 페미니스트들은 자신이 말하고 살아가는 시대적 조건을 비판적으로 읽기 위해 애써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페미니즘은 여성 인권의 이름으로 타자의 삶의 기회를 박탈하는 모순과 폭력을 저지를지도 모른다.

 

(김보명, 젠더 폭력과 인종주의중에서, 67)

 

 

 

 

 

[] 전국지리교사연합회, 살아 있는 지리 교과서, 휴머니스트,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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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년 전에 국내에 번역된 코난 도일(Conan Doyle)셜록 홈스(Sherlock Holmes)시리즈 번역본들에 대한 글을 쓴 적이 있다. 정말로 고된 글쓰기였다. 나는 번역 일을 단 한 번도 해보지 않은 평범한 사람이고, 영어를 능숙하게 쓰지 못한다. 그렇다 보니 나도 글을 쓰다 보면 크고 작은 실수를 할 때가 있다.

 

지난달 마지막 날에 어느 분이 내가 쓴 셜록 홈스시리즈 번역본에 대한 글에 댓글을 남겼다. 나는 그 글에서 원문의 ‘three days’사흘이라고 번역한 문장이 틀렸다고 지적하는 내용을 썼는데, 댓글 작성자는 사흘‘3과 비슷한 뜻을 가진 단어라고 알려주셨다. 내 글에 있는 잘못된 내용은 삭제하지 않았다. 문장을 삭제하는 대신 취소선으로 그었다.

 

 

[셜록 홈즈의 회상/회고록번역본 비교 Part. 4] (2017628)

https://blog.aladin.co.kr/haesung/9422406

 

[셜록 홈즈의 회상/회고록번역본 비교 Part. 4]

(201774)

https://blog.aladin.co.kr/haesung/9435357

 

 

댓글 작성자가 그 사실을 알려주지 않았으면 나는 사흘의 의미를 잘못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 분의 말에 따르면 3일이 사흘이라면, 4일은 나흘이라고 쓴다.

 

 

1하루

2이틀

3사흘

4나흘

 

 

지금까지 살면서 사흘나흘이라는 단어를 써본 적이 없던 것 같다. 그래서 사흘‘4의 동의어로 착각했다. 사실 단어의 의미를 잘 모르면 국어사전에 찾아봐야 하는데 그때 내가 안일하게 생각했다. 국어사전에 있는 사흘의 의미를 알아봤더라면 실수를 하지 않았을 것이다.

 

글을 쓰다가 뜻이 애매모호한 낱말이 생각나면 국어사전을 이용한다. 그 낱말이 내가 써야 할 문장의 문맥에 어울리는지 그렇지 않은지 알아보기 위해서다. 그러나 얼른 글을 완성하고 싶은 마음이 커지면 국어사전을 참고하는 절차를 무시하고 싶어진다. 그러면 고작 1분도 안 걸리는 일을 하지 않는다. 뜻을 잘 모르는 낱말을 쓰기 전에 국어사전을 살펴보는 습관을 잊지 말아야겠다. 블로그에 남기는 글이라고 해도 아무나 보여줘도 부끄럽지 않은 글을 쓰는 게 내 글쓰기에 관한 지론이다. 그런 글이 될려면 내가 쓰려고 하는 낱말의 의미를 제대로 알고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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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19-10-01 20: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헉, 나도 동의어로 알고 있는데 그게 아니란 말야?

cyrus 2019-10-02 17:27   좋아요 0 | URL
처음에 ‘사흘’의 ‘사’가 ‘넉 사(四)’인 줄 알았어요. 그래서 ‘사흘’의 의미를 착각하고 있었어요... ^^;;

2019-10-01 21: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9-10-02 17:31   좋아요 0 | URL
저도요. 가끔 맞춤법 검사기가 서버 문제로 인해 작동 안 될 때가 있어요. 그럴 때 완성된 글을 맞춤법 검사하지 않고 블로그에 올려요. 이러면 찝찝해요. ^^;;
 
도둑맞은 손 - 살아있지만 인격의 일부라고 말할 수 없는 인간적인 어떤 것에 대한 법적 탐구
장 피에르 보 지음, 김현경 옮김 / 이음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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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개그콘서트에 방영되었던 같기도()라는 코너를 기억하시는가. ‘같기도는 무술도 아니고, 춤도 아닌 뭐라고 부르기 애매모호한 퍼포먼스다. 이 코너에 김준호가 같기도를 연마한 사부로 출연했다. 김준호가 분한 캐릭터는 이건 A도 아니고, B도 아니여라는 말을 하면서 우스꽝스러운 동작을 선보인다.

 

 

이건 내 몸도 아니고, 물건도 아니여.”

 

 

분명히 내 몸의 일부인데, 그게 물건으로 볼 수 있다면 믿을 수 있겠는가. 말이 안 되지만, 우리는 이런 애매모호한 상황에 직면할 수 있다. 내 몸이 물건이라는 주장 자체에 불쾌하게 느껴지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물건으로 분류되는 인간의 몸이 비인간적으로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런데 실제로 인간의 몸은 물건처럼 다루어지고 있다. 대표적인 사례가 동종 이식이다. 질병이나 사고로 훼손된 장기를 타인에게서 받은 장기로 대체하는 시술이다. 살아 있는 사람의 장기를 기증받아서 이식하는 것은 생체 이식이라고 한다. 살아 있든 죽어 있든 상관없이 기증자의 장기가 수혜자(장기 이식을 받는 사람)에게 기증되면 기증자는 장기의 소유권이 사라진다. 기증자의 몸 밖으로 나온 장기는 물건이 되고, 이식 수술이 성공하면 장기의 소유권은 기증자에서 수혜자로 넘어간다.

 

1992년 프랑스에서 몸의 소유권에 대한 상식을 뒤흔드는 판결이 나왔다. A는 실수로 한쪽 손이 절단되는 사고를 겪는다. 충격을 받은 A는 기절하고, 그 사이에 A에게 앙심을 품고 있던 B가 절단된 손을 가져간다. B는 절단된 손을 소각장에 버린다. 그렇다면 B는 법적 처벌을 받을 수 있을까? 프랑스 법에 따르면 B무죄. 그 당시 프랑스 법은 몸을 인격(사람: person)과 동일한 의미로 해석했다. 온전한 몸은 살아있는 인간이다. 물건이 아니다. 여기까지는 어느 누구도 부정하지 않는다. 그런데 잘려 나간 몸의 일부는 인격과 동일시한 몸이 아니므로 주인 없는 물건(무주물)이 된다. A는 잘려 나간 손을 소유할 권리가 없으며 B가 잘려 나간 손의 주인이 된다. 따라서 B는 절도죄도, 중상해죄도 아닌 무죄 판결을 받았다.

 

도둑맞은 손인간(인격)을 동일시하게 생각하는 통념의 한계를 보여주는 책이다. 우리는 인간의 존엄성이 인류가 지향하는 보편적이고 궁극적 가치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러므로 인간이라는 이유만으로 사람은 그 존재 가치가 있으며 그 인격을 존중받아야 한다.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면서 살아가는 사람의 몸은 물건으로서의 속성을 가지고 있지 않다. 하지만 예외가 있다. 앞서 언급한 동종 이식이 합법적으로 이루어지려면 거래 대상이 될 수 있는 물건으로서의 몸이 무엇인지 판단할 수 있는 법적 근거가 있어야 한다. 그렇지만 대부분 사람은 인간의 몸을 물건으로 간주하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하거나 불편하게 생각한다.

 

저자는 몸과 인격을 동일시하는 입장이 어디서부터 시작되었는지 그 기원을 찾는다. 역사는 상당히 오래됐다. 고대 로마법은 주체와 인격을 동일시했다. 그러나 노예제는 주체로 인정받지 못한 인간의 몸을 물건으로 간주하게 만드는 법적 효력을 발휘했다. 기독교가 막강한 권위를 떨치고 있던 시대에 죽은 성인(聖人)의 시신은 성물(聖物)이 되었다. 죽은 성인은 인격이 사라졌어도 성스러움은 여전히 유지된다. 왜냐하면 죽은 성인의 시신은 말 그대로 성물, 성스러운 물건이기 때문이다. 두 가지 사례는 몸을 사람으로부터 분리하여 물건의 범주 속에 넣으려는 시도이다.

 

 

 

 

 

이 책의 역자는 도둑맞은 손》을 기발하고 엉뚱하며 심오한 책이라고 평가했다. 내가 보기에 도둑맞은 손도발적인 책이다. 저자는 몸을 물건으로 봐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면서도 물건으로 간주한 몸을 사고파는 상품으로 보는 것을 경계한다. 각자에게 자신 신체를 소유하는 권리가 있기 때문에 우리는 몸을 함부로 사고팔 수 없다. 따라서 저자가 생각하는 몸은 인격 개념과 물건의 속성이 모두 포함되어 있다. 그렇지만 저자는 물건으로 보는 몸의 법적 지위에 더 관심이 많다. 도둑맞은 손을 읽고 나면 생각할 것이 많아져서 더욱 혼란스러울 것이다. 나는 온전한 몸으로 잘 살아가고 있는데, 이 책을 읽고나니까 왜 이게 내 몸이 아닌 것처럼 느껴지지…‥. , 혼란하다, 혼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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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9-28 17:16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9-10-01 17:30   좋아요 0 | URL
드라마 ‘허준’에서 허준이 스승 유의태의 몸을 해부하는 장면이 생각나네요. 극적 재미를 위해 만들어진 가상의 설정이지만요. ^^;;

2019-09-30 14:45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9-10-01 17:32   좋아요 0 | URL
서양 법률과 관련된 내용이 나와서 사실 저는 조금 지루했어요. 역자 서문만 읽어도 책 내용의 80%를 이해할 수 있어요. ^^
 

 

 

1920년대 조선에는 신식 교육을 받은 신여성이 등장했다. 나혜석, 허영숙(한국 여성 최초의 개업의, 춘원 이광수의 부인), 황애시덕(애국부인회를 조직한 독립운동가) 등이 일본에서 공부하고 귀국해 여자유학생친목회를 결성하고, 여성 독자를 위한 교양지 <여자계(女子界)>를 창간한 것은 한국 여성사에서 중요한 사건으로 손꼽힌다. 조선의 문학계와 미술계를 대표하는 유명한 신여성이 나혜석이라면, 음악계에는 윤심덕이 있다. 예술가로서의 길을 걸었던 두 사람의 여성해방론과 신념은 시대를 앞서 있었다. 1920년대 조선에는 여전히 구시대적 사고방식이 남아 있었다. 여성이 결혼하지 않고 사회생활을 하는 것을 용납하지 못했고, 신여성이 지향하는 자유 연애론에 눈살을 찌푸리면서 보는 사람들이 많았다. 여권 신장에 앞장선 두 사람으로서는 그 시절을 살아가기가 결코 녹록치 않았다.

 

 

 

 

 

 

 

 

 

 

 

 

 

 

 

 

 

 

* [우주지감 9월의 책] 나혜석, 장영은 엮음 나혜석, 글 쓰는 여자의 탄생(민음사, 2018)

* [품절] 나혜석 경희 ()(종합출판 범우, 2006)

* [품절] 이상경 나는 인간으로 살고 싶다(한길사, 2009)

 

 

 

 

 

 

 

 

 

 

 

 

 

 

 

 

 

 

 

* 헨리크 입센 인형의 집 (예술의전당 에디션)(민음사, 2018)

* 헨리크 입센 인형의 집(민음사, 2010)

* 헨리크 입센 인형의 집(열린책들, 2010)

 

 

 

나혜석은 한국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로 많이 알려졌지만, 소설과 시를 쓴 작가이기도 하다. 1918<여자계>에 발표한 자전적 소설 경희는 구시대적 통념에 저항하는 새로운 여성상을 제시한 여성주의 텍스트이다. 일본에서 유학 생활을 하고 조선에 돌아온 경희는 여성도 남성과 똑같이 교육을 받을 수 있는 주체이자 결혼의 주체라고 한다. 나혜석은 경희라는 인물을 통해 조선의 여성으로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의 문제를 끊임없이 고민한다. 또 여성 스스로가 결혼을 주체적으로 선택하고 책임을 져야 한다는 내 · 외부적 갈등도 소설 속에 생생하게 담아내고 있다. 결국 경희는 입센(H. Ibsen)의 희곡 인형의 집에 나오는 노라(Nora)처럼 가부장제가 작동하는 가정을 등지기로 결심한다.

 

 

 

 

 

 

 

 

 

 

 

 

 

 

 

 

* 김경일 신여성, 개념과 역사(푸른역사, 2016)

 

 

 

인형의 집은 나혜석을 포함한 신여성들에게 영향을 준 희곡이다. 19211월부터 <매일신보>인형의 집인형의 가()라는 제목으로 번역 연재되었다. 나혜석은 신문에 연재되는 희곡을 위해 직접 삽화를 그렸다. 제일 마지막 회에 나혜석이 쓴 동명의 노랫말이 실렸다. 나혜석의 인형의 가경희()(종합출판 범우)에 수록되어 있다. 윤심덕은 도쿄음악학교 졸업발표회를 위한 인형의 집공연에 노라 역을 맡았다. 나혜석과 윤심덕은 남성에 종속된 여성으로 사는 삶을 거부하고, 한 인간으로서 독립하려는 노라를 찬미하고 동경하고 있다.

 

신여성, 개념과 역사(푸른역사)의 저자 김경일은 나혜석과 윤심덕을 2세대 근대 여성으로 분류한다. 2세대 근대 여성은 봉건적 가족제도와 결혼제도에 대한 비판과 도전을 통해 사회전반에 걸친 개조와 개혁을 달성하려고 했다. 그녀들의 꿈은 여성의 개성과 평등에 기반을 둔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일본의 식민지라는 조선의 특수한 시대적 환경은 그녀들의 신념을 마음껏 펼치지 못하게 만드는 유리 장벽이었다. 나혜석과 윤심덕은 봉건적 가족제도와 결혼제도를 비판하면서 여성의 개성과 평등을 강조했고, 자유연애를 서슴없이 말했다. 특히 나혜석은 1934년에 이혼 고백장-청구(靑邱) 씨에게라는 글을 써서 조선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이 글을 통해 나혜석은 자신이 이혼에 이르게 된 경위와 그 과정에서 전 남편 김우영이 보인 편협함, 그리고 남성 이기주의 등을 상세하게 언급했다. 이혼 고백장는 남성 중심 사회에 대한 공개적인 도발이었다. 그러나 이글이 발표되자 대중은 격렬하게 그녀를 비난했다. 전근대적인 남성 중심 사회에 벗어나지 못한 남녀 모두가 그녀를 향해 돌을 던졌다. 나혜석은 글쓰기를 통해 자기 존재를 증명하려고 했다. 그녀는 잠시 붓을 내려놓고 펜이라는 날카로운 무기를 들어 여성을 억압하는 시대에 맞서 싸웠다.

 

하지만 자유주의 계열의 신여성에 속한 나혜석과 윤심덕을 제외한 일부 신여성들은 여성 해방보다는 민족 해방을 먼저 생각했다. 민족주의와 사회주의의 등장으로 인해 여성의 자유를 강조하는 여성해방론이 설 자리는 축소되었다. 남성 지배의 사회 분위기를 질타한 나혜석은 주류 남성 지식인들의 비방과 냉소에 시달렸지만, 사회주의 계열 신여성은 남성 지식인들의 비방으로부터 조금은 자유로울 수 있었다. 사회주의 계열의 신여성들의 목표는 민족 해방이었고, 그녀들은 새로운 공산주의 국가를 만드는 대의에 헌신하는 존재로 인정받았다.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계열의 남성 지식인들의 눈에는 나혜석과 같은 자유주의 계열의 신여성을 안 좋게 보였을 것이고, 그녀들은 이기적이고 속물 같은 부르주아 여성으로 인식되었다.

 

나혜석은 이혼 고백장에서 이혼 후 자신을 향한 비난과 냉대를 혼자서 감당해야 하는 처절한 심정을 토로한다.

 

 

 

 세상의 모든 신용을 잃고 모든 공분 비난을 받으며, 부모 친척의 버림을 받고 옛 친구를 잃은 나는 물론 불행하려니와 이것을 단행한 씨[김우영]에게도 비탄, 절망이 적지 아니 할 것입니다. 오직 나는 황야를 헤매고 암야에 공막(空漠, 텅 비고 쓸쓸함)을 바라고 자실(自失, 자기 존재를 잊을 정도로 얼이 빠져)하여 할 뿐입니다.

 떨리는 두 손에 화필과 팔레트를 들고 암흑을 향하여 가는 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광망(光芒)의 순간을 구함인가. 너무 크고 너무 중한 상처의 충격을 받는 내게는 각각으로 절박한 쓸쓸한 생명의 부르짖음을 듣고 울고 쓰러지는 충동으로 가슴이 터지는 것 같사외다.

 

(나혜석 이혼 고백장중에서, 나혜석, 글 쓰는 여자의 탄생157)

 

 

 

 

황야를 헤매고 암야에 공막을 바라고 자실한 상태에 이른 나혜석의 모습을 보고 있으면 가슴 속을 파고드는 암울함과 처절함이 우러나오는 윤심덕의 노래 사의 찬미가 떠오른다. 윤심덕은 이 노래를 취입한 레코드가 나오기 전에 극작가 김우진과 함께 현해탄에 몸을 던졌다. 이혼 고백장에 있는 자실이라는 단어가 자살로 느껴지는 건 기분 탓일까? 그러나 나혜석은 절망을 딛고 다시 한 번 갱생하기 위해 세상의 모든 조소와 질책을 감수하면서 행진을 계속할 것이라고 결심한다.

 

 

 

(1)

황막한 광야를 달리는 인생아

너의 가는 곳 그 어데이냐

쓸쓸한 세상 험악한 고해에

너는 무엇을 찾으러 가느냐

 

(2)

웃는 저 꽃과 우는 저 새들이

그 운명이 모두 다 같구나

삶에 열중한 가련한 인생아

너는 칼 위에 춤추는 자로다

 

(3)

허영에 빠져 날뛰는 인생아

너 속였음을 네가 아느냐

세상의 것은 너에게 허무니

너 죽은 후엔 모두 다 없도다

 

(후렴)

눈물로 된 이 세상에

나 죽으면 그만일까

행복 찾는 인생들아

너 찾는 것 허무

 

 

윤심덕의 불꽃 같은 삶은 짧고도 강렬했다. 세상은 그녀의 용감한 신념에 전혀 관심이 없었다. 세상은 오로지 그녀가 자살한 이유를 알고 싶어 했고, 그녀와 김우진과의 관계에 관음증적인 호기심을 느꼈다. 주류 사회를 불편하게 만든 언행으로 인해 나혜석은 세상으로부터 완전히 고립된 채 살다가 행려병자로 쓸쓸히 생을 마감했다. 나혜석과 윤심덕은 세상에 안주하기보다는 자신들의 원대한 꿈을 펼치지 못하게 하는 세상에 정면으로 부딪치는 삶을 선택했다. 그녀들은 자신에게 다가올 비극을 알면서도 각자가 원하는 삶을 찾으려고 열중한 칼 위에 춤춘 자들이었다.

 

 

 

Trivia

 

신여성, 개념과 역사85(초판 1)오자가 있다. 2세대 근대 여과 급진주의라고 적혀 있다. ‘2세대 근대 여성과 급진주의로 고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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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9-25 22: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9-09-28 15:29   좋아요 0 | URL
목숨을 바치면서까지 자신의 신념을 끝까지 지키는 사람들을 보면 대단해요. 저는 그렇게 하라고 하면 절대로 못 하겠어요.. ^^;;

stella.K 2019-09-26 18: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경희> 범우사에서 나왔네.
애석하게도 절판이야. 다른 책도 봤는데 읽고 싶은 게 많더군.
기획을 잘 했던 것 같은데 잘 안 알려진 것 같아.
나도 이제 처음 알았다.
옛날에 범우사 알아 줬는데. 처음 책을 읽는 사람들은
범우사 아니면 삼중당이었는데 지금은 그 명성이 완전 묻혔지?
난 옛날에 냈던 책으로만 먹고 살려나 했더니
그래도 최근 간간이 책을 내긴 했더군.
나혜석은 희곡이 있어 함 읽어보려고 해.

cyrus 2019-09-28 15:33   좋아요 0 | URL
범우사의 행보가 너무 조용해서 지금도 새 책을 내놓고 있는지 알아봤어요. 지금도 범우문고가 나오네요.. ㅎㄷㄷ 그런데 예전에 나온 책들의 일부는 절판됐어요. 나혜석의 희곡을 따로 실은 책이 있을 거예요. ^^
 

 

 

주디스 버틀러(Judith Butler)는 글을 어렵게 쓰기로 유명한 페미니스트 철학자이다. 혹자는 그녀의 글이 읽기 힘들다는 이유로 그녀의 이론을 연구할 가치가 없다고 무시한다. 하지만 버틀러가 글을 어렵게 쓰는 이유가 있다.

 

 

 

 

 

 

 

 

 

 

 

 

 

 

 

 

* 주디스 버틀러 젠더 트러블(문학동네, 2008)

* 주디스 버틀러 젠더 허물기(문학과지성사, 2015)

 

 

 

 

 

 

 

 

 

 

 

 

 

 

 

 

 

 

 

 

 

 

 

 

 

 

 

 

 

 

 

 

 

 

 

 

 

 

 

 

* 조현준 주디스 버틀러 읽기(여성문화이론연구소, 2006)

* 조현준 주디스 버틀러의 젠더 정체성 이론(한국학술정보, 2007)

* 사라 살리 주디스 버틀러의 철학과 우울(앨피, 2007)

* 조현준 젠더는 패러디다(현암사, 2014)

* 조현준 주디스 버틀러, 젠더 트러블(커뮤니케이션북스, 2016)

* 김은주 생각하는 여자는 괴물과 함께 잠을 잔다(봄알람, 2017)

* 조현준 쉽게 읽는 젠더 이야기(행성B, 2018)

 

 

 

버틀러는 명료하면서도 확정적인 문체에 느껴지는 권위성을 경계한다. 권위적인 문체는 진리를 뚜렷하게 드러나게 해주는 장점이 있다. 이론도, 글도 간결하고 명료하게 쓸수록 좋다. 오컴의 면도날(Occam’s razor)이라는 철학 명언에 따르면 어떤 사실 또는 진리에 대한 설명들 가운데 논리적으로 가장 단순한 것이 진실일 가능성이 높다. 불필요하게 복잡한 설명은 면도날로 잘라내야 한다. 하지만 진리를 명확하게 선포한 권위적인 문체가 하나의 규범으로 자리 잡으면 또 다른 진리(를 설명하는 문체)가 나올 가능성을 방해한다.

 

버틀러는 권위적인 문체가 반복과 인용을 통해서 규범이 되고, 더 나아가 규범은 권력이 된다고 말한다. 그녀는 글로 표현된 자신의 입장이 규범과 권력으로 작동되지 않도록 의도적으로 문장을 어렵게 쓴 것이다. 오컴의 면도날을 쥔 사람들은 버틀러의 의도를 이해하지 못한 채 그녀의 글을 잘라내려고(무시하려고) 할 것이다. 그들은 오컴의 면도날을 잘못 사용하고 있다. 그들은 이해하기 힘들고 명확하게 설명되지 않는 진리의 문체를 이론이나 학문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단순하고 명료한 글이나 진리가 진실이라고 주장하면서 면도날을 무자비하게 휘두르는 그들의 행보는 권위적이면서도 폭력적이다. 오컴의 면도날을 쥔 자들은 버틀러의 글에 쉽게 접근하지 못한다. 그녀의 글에 어디부터가 불필요한지 파악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따라서 버틀러의 글쓰기 방식은 때론 폭력이 될 수 있는 오컴의 면도날을 조롱하고 저항하는 탈권위적인 글쓰기라 할 수 있다.

 

물론, 그녀의 글이 읽기 어렵다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읽기 힘들고 우리말로 번역하기도 힘든 글은 버틀러를 공부하고 연구하는 페미니스트들도 난감하게 만든다. 버틀러는 지금도 학계에서 왕성하게 활동 중이며 칼럼과 책을 쓰고 있다. 우리나라에 번역되지 않은 버틀러의 책 몇 권이 있다. ‘레드스타킹 페미니즘 스쿨전임 강사로 초빙된 전혜은 선생님의 증언에 따르면 어떤 역자가 번역을 착수했으나 끝내 출판하지 못한 버틀러의 책이 있다고 한다.

 

 

 

 

 

 

 

 

 

 

 

 

 

 

 

 

* [품절] 주디스 버틀러 의미를 체현하는 육체(인간사랑, 2003)

 

 

 

버틀러의 글과 책은 젠더와 퀴어를 연구한 사람이 번역해야 한다. 젠더와 퀴어에 문외한 역자가 버틀러의 글에 손을 대면…‥. 어떻게 되는지 자세한 설명은 생략하겠다. 그 최악의 사례를 보여준 책이 있으니 그 책은 바로 절판된 의미를 체현하는 육체(인간사랑)이다. 원제는 <Bodies That Matter>이다. 이 책은 젠더 트러블(문학동네)젠더 허물기(문학과지성사)를 이어주는 중요한 버틀러의 전기 저작이다. 이 세 권의 책은 섹스와 젠더, 그리고 섹슈얼리티에 대한 버틀러의 논의를 중점적으로 다룬다. 그러나 전혜은 선생님은 이 책을 최악의 번역본이라고 언급했다. 버틀러 전공자가 확인 사살’을 했으니 번역본을 읽을 필요가 없고, 중고 책을 사지 않아도 된다.

 

필자는 조현준 교수가 쓴 주디스 버틀러 읽기(여성문화이론연구소), 주디스 버틀러의 젠더 정체성 이론(한국학술정보), 젠더는 패러디다(현암사)를 사서 읽었다. 이것 말고도 버틀러의 사상을 간략하게 정리한 책들 몇 권이 나와 있으나 그 책들에 너무 의존해서도 안 된다. 여기서 자세히 밝힐 수 없지만, 버틀러의 문장을 오독한 것으로 보이는 내용과 버틀러가 책에서 언급한 개념을 잘못 설명한 내용이 있기 때문이다. 그 문제의 내용을 밝힐 수 없는 이유가 있다. 수업 내용을 지식재산권을 가진 전혜은 선생님의 허락 없이는 내가 함부로 인용할 수 없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페미니즘 스쿨에서 배운 버틀러와 관련된 내용은 전혜은 선생님이 쓰고 있는 책에 나올 예정이다.

 

주디스 버틀러에 대한 개론서 중에 읽을 만한 것을 추천하라고 하면, 나는 그 부탁을 정중히 거부할 것이다. 나는 잘 모르겠다. 책을 여러 번 봐도 모르겠다. 솔직히 말하자면 개론서도 어렵다. 개론서는 버틀러에 입문한 독자와 버틀러를 많이 공부한 독자들이 잠깐 기댈 수 있는 임시 보조대일 뿐, 영원히 그들을 편안하게 해주는 든든한 지지대가 될 수 없다. 하지만 개론서가 읽기 어렵다고 해서 읽을 만한 가치가 없다는 건 아니다. 일단 시도해봐라. ‘버틀러 혼자 읽기버틀러 독학보다는 버틀러를 전문적으로 연구한 전공자라든가 버틀러를 공부한 대학원생과 함께 읽는 것이 훨씬 더 낫다. 버틀러의 책은 혼자서 맨땅에 헤딩을 하는 심정으로 읽을 수 있는 책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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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궐 2019-09-24 17:2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문제는 어려운 문장이라도 그 속에 다채로운 사상을 명확하게 드러내는 거겠죠. 중언부언으로 번잡하고 애매함만 있는 거면 결국 사상이 빈곤한 거고요.

cyrus 2019-09-25 16:11   좋아요 0 | URL
맞아요. 다채로운 사상이 들어있는 문장은 어려워 보여도 계속 읽어 보면 이해할 수 있어요.

페크pek0501 2019-09-25 12:5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런 이유로 어렵게 쓰는 사람도 있군요. 저는 확신할 수 없거나 자신 없는 글을 쓸 때 ~~ 한 것 같다, 라든지 ~~ 라고 생각한다, 로 씁니다. 내 생각이 맞는지 모르지만 이렇게 생각한다는 거죠.
어떤 때는 ‘사견‘이라고 덧붙이기도 하죠. ㅋ

cyrus 2019-09-25 16:13   좋아요 0 | URL
저도요. 어떤 의견을 말할거나 글로 쓰기 전에 신중해야 돼요. 정말로 애매한 내용은 언급을 안 하려고 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