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0년대 조선에는 신식 교육을 받은 신여성이 등장했다. 나혜석, 허영숙(한국 여성 최초의 개업의, 춘원 이광수의 부인), 황애시덕(애국부인회를 조직한 독립운동가) 등이 일본에서 공부하고 귀국해 여자유학생친목회를 결성하고, 여성 독자를 위한 교양지 <여자계(女子界)>를 창간한 것은 한국 여성사에서 중요한 사건으로 손꼽힌다. 조선의 문학계와 미술계를 대표하는 유명한 신여성이 나혜석이라면, 음악계에는 윤심덕이 있다. 예술가로서의 길을 걸었던 두 사람의 여성해방론과 신념은 시대를 앞서 있었다. 1920년대 조선에는 여전히 구시대적 사고방식이 남아 있었다. 여성이 결혼하지 않고 사회생활을 하는 것을 용납하지 못했고, 신여성이 지향하는 자유 연애론에 눈살을 찌푸리면서 보는 사람들이 많았다. 여권 신장에 앞장선 두 사람으로서는 그 시절을 살아가기가 결코 녹록치 않았다.

 

 

 

 

 

 

 

 

 

 

 

 

 

 

 

 

 

 

* [우주지감 9월의 책] 나혜석, 장영은 엮음 나혜석, 글 쓰는 여자의 탄생(민음사, 2018)

* [품절] 나혜석 경희 ()(종합출판 범우, 2006)

* [품절] 이상경 나는 인간으로 살고 싶다(한길사, 2009)

 

 

 

 

 

 

 

 

 

 

 

 

 

 

 

 

 

 

 

* 헨리크 입센 인형의 집 (예술의전당 에디션)(민음사, 2018)

* 헨리크 입센 인형의 집(민음사, 2010)

* 헨리크 입센 인형의 집(열린책들, 2010)

 

 

 

나혜석은 한국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로 많이 알려졌지만, 소설과 시를 쓴 작가이기도 하다. 1918<여자계>에 발표한 자전적 소설 경희는 구시대적 통념에 저항하는 새로운 여성상을 제시한 여성주의 텍스트이다. 일본에서 유학 생활을 하고 조선에 돌아온 경희는 여성도 남성과 똑같이 교육을 받을 수 있는 주체이자 결혼의 주체라고 한다. 나혜석은 경희라는 인물을 통해 조선의 여성으로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의 문제를 끊임없이 고민한다. 또 여성 스스로가 결혼을 주체적으로 선택하고 책임을 져야 한다는 내 · 외부적 갈등도 소설 속에 생생하게 담아내고 있다. 결국 경희는 입센(H. Ibsen)의 희곡 인형의 집에 나오는 노라(Nora)처럼 가부장제가 작동하는 가정을 등지기로 결심한다.

 

 

 

 

 

 

 

 

 

 

 

 

 

 

 

 

* 김경일 신여성, 개념과 역사(푸른역사, 2016)

 

 

 

인형의 집은 나혜석을 포함한 신여성들에게 영향을 준 희곡이다. 19211월부터 <매일신보>인형의 집인형의 가()라는 제목으로 번역 연재되었다. 나혜석은 신문에 연재되는 희곡을 위해 직접 삽화를 그렸다. 제일 마지막 회에 나혜석이 쓴 동명의 노랫말이 실렸다. 나혜석의 인형의 가경희()(종합출판 범우)에 수록되어 있다. 윤심덕은 도쿄음악학교 졸업발표회를 위한 인형의 집공연에 노라 역을 맡았다. 나혜석과 윤심덕은 남성에 종속된 여성으로 사는 삶을 거부하고, 한 인간으로서 독립하려는 노라를 찬미하고 동경하고 있다.

 

신여성, 개념과 역사(푸른역사)의 저자 김경일은 나혜석과 윤심덕을 2세대 근대 여성으로 분류한다. 2세대 근대 여성은 봉건적 가족제도와 결혼제도에 대한 비판과 도전을 통해 사회전반에 걸친 개조와 개혁을 달성하려고 했다. 그녀들의 꿈은 여성의 개성과 평등에 기반을 둔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일본의 식민지라는 조선의 특수한 시대적 환경은 그녀들의 신념을 마음껏 펼치지 못하게 만드는 유리 장벽이었다. 나혜석과 윤심덕은 봉건적 가족제도와 결혼제도를 비판하면서 여성의 개성과 평등을 강조했고, 자유연애를 서슴없이 말했다. 특히 나혜석은 1934년에 이혼 고백장-청구(靑邱) 씨에게라는 글을 써서 조선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이 글을 통해 나혜석은 자신이 이혼에 이르게 된 경위와 그 과정에서 전 남편 김우영이 보인 편협함, 그리고 남성 이기주의 등을 상세하게 언급했다. 이혼 고백장는 남성 중심 사회에 대한 공개적인 도발이었다. 그러나 이글이 발표되자 대중은 격렬하게 그녀를 비난했다. 전근대적인 남성 중심 사회에 벗어나지 못한 남녀 모두가 그녀를 향해 돌을 던졌다. 나혜석은 글쓰기를 통해 자기 존재를 증명하려고 했다. 그녀는 잠시 붓을 내려놓고 펜이라는 날카로운 무기를 들어 여성을 억압하는 시대에 맞서 싸웠다.

 

하지만 자유주의 계열의 신여성에 속한 나혜석과 윤심덕을 제외한 일부 신여성들은 여성 해방보다는 민족 해방을 먼저 생각했다. 민족주의와 사회주의의 등장으로 인해 여성의 자유를 강조하는 여성해방론이 설 자리는 축소되었다. 남성 지배의 사회 분위기를 질타한 나혜석은 주류 남성 지식인들의 비방과 냉소에 시달렸지만, 사회주의 계열 신여성은 남성 지식인들의 비방으로부터 조금은 자유로울 수 있었다. 사회주의 계열의 신여성들의 목표는 민족 해방이었고, 그녀들은 새로운 공산주의 국가를 만드는 대의에 헌신하는 존재로 인정받았다.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계열의 남성 지식인들의 눈에는 나혜석과 같은 자유주의 계열의 신여성을 안 좋게 보였을 것이고, 그녀들은 이기적이고 속물 같은 부르주아 여성으로 인식되었다.

 

나혜석은 이혼 고백장에서 이혼 후 자신을 향한 비난과 냉대를 혼자서 감당해야 하는 처절한 심정을 토로한다.

 

 

 

 세상의 모든 신용을 잃고 모든 공분 비난을 받으며, 부모 친척의 버림을 받고 옛 친구를 잃은 나는 물론 불행하려니와 이것을 단행한 씨[김우영]에게도 비탄, 절망이 적지 아니 할 것입니다. 오직 나는 황야를 헤매고 암야에 공막(空漠, 텅 비고 쓸쓸함)을 바라고 자실(自失, 자기 존재를 잊을 정도로 얼이 빠져)하여 할 뿐입니다.

 떨리는 두 손에 화필과 팔레트를 들고 암흑을 향하여 가는 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광망(光芒)의 순간을 구함인가. 너무 크고 너무 중한 상처의 충격을 받는 내게는 각각으로 절박한 쓸쓸한 생명의 부르짖음을 듣고 울고 쓰러지는 충동으로 가슴이 터지는 것 같사외다.

 

(나혜석 이혼 고백장중에서, 나혜석, 글 쓰는 여자의 탄생157)

 

 

 

 

황야를 헤매고 암야에 공막을 바라고 자실한 상태에 이른 나혜석의 모습을 보고 있으면 가슴 속을 파고드는 암울함과 처절함이 우러나오는 윤심덕의 노래 사의 찬미가 떠오른다. 윤심덕은 이 노래를 취입한 레코드가 나오기 전에 극작가 김우진과 함께 현해탄에 몸을 던졌다. 이혼 고백장에 있는 자실이라는 단어가 자살로 느껴지는 건 기분 탓일까? 그러나 나혜석은 절망을 딛고 다시 한 번 갱생하기 위해 세상의 모든 조소와 질책을 감수하면서 행진을 계속할 것이라고 결심한다.

 

 

 

(1)

황막한 광야를 달리는 인생아

너의 가는 곳 그 어데이냐

쓸쓸한 세상 험악한 고해에

너는 무엇을 찾으러 가느냐

 

(2)

웃는 저 꽃과 우는 저 새들이

그 운명이 모두 다 같구나

삶에 열중한 가련한 인생아

너는 칼 위에 춤추는 자로다

 

(3)

허영에 빠져 날뛰는 인생아

너 속였음을 네가 아느냐

세상의 것은 너에게 허무니

너 죽은 후엔 모두 다 없도다

 

(후렴)

눈물로 된 이 세상에

나 죽으면 그만일까

행복 찾는 인생들아

너 찾는 것 허무

 

 

윤심덕의 불꽃 같은 삶은 짧고도 강렬했다. 세상은 그녀의 용감한 신념에 전혀 관심이 없었다. 세상은 오로지 그녀가 자살한 이유를 알고 싶어 했고, 그녀와 김우진과의 관계에 관음증적인 호기심을 느꼈다. 주류 사회를 불편하게 만든 언행으로 인해 나혜석은 세상으로부터 완전히 고립된 채 살다가 행려병자로 쓸쓸히 생을 마감했다. 나혜석과 윤심덕은 세상에 안주하기보다는 자신들의 원대한 꿈을 펼치지 못하게 하는 세상에 정면으로 부딪치는 삶을 선택했다. 그녀들은 자신에게 다가올 비극을 알면서도 각자가 원하는 삶을 찾으려고 열중한 칼 위에 춤춘 자들이었다.

 

 

 

Trivia

 

신여성, 개념과 역사85(초판 1)오자가 있다. 2세대 근대 여과 급진주의라고 적혀 있다. ‘2세대 근대 여성과 급진주의로 고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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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9-25 22: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9-09-28 15:29   좋아요 0 | URL
목숨을 바치면서까지 자신의 신념을 끝까지 지키는 사람들을 보면 대단해요. 저는 그렇게 하라고 하면 절대로 못 하겠어요.. ^^;;

stella.K 2019-09-26 18: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경희> 범우사에서 나왔네.
애석하게도 절판이야. 다른 책도 봤는데 읽고 싶은 게 많더군.
기획을 잘 했던 것 같은데 잘 안 알려진 것 같아.
나도 이제 처음 알았다.
옛날에 범우사 알아 줬는데. 처음 책을 읽는 사람들은
범우사 아니면 삼중당이었는데 지금은 그 명성이 완전 묻혔지?
난 옛날에 냈던 책으로만 먹고 살려나 했더니
그래도 최근 간간이 책을 내긴 했더군.
나혜석은 희곡이 있어 함 읽어보려고 해.

cyrus 2019-09-28 15:33   좋아요 0 | URL
범우사의 행보가 너무 조용해서 지금도 새 책을 내놓고 있는지 알아봤어요. 지금도 범우문고가 나오네요.. ㅎㄷㄷ 그런데 예전에 나온 책들의 일부는 절판됐어요. 나혜석의 희곡을 따로 실은 책이 있을 거예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