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스터리의 법칙 - 내 안에 숨겨진 최대치의 힘을 찾는 법
로버트 그린 지음, 이수경 옮김 / 살림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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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하면 나비가 될 수 있나요?”. “애벌레인 너의 모습을 버릴 수 있을 만큼 너무 너무 날고 싶은 마음을 가져야지. 나를 잘 보거라. 지금 고치를 만들고 있단다. 마치 숨는 것처럼 보이지만, 고치란 피해 달아나는 장소가 아니란다. 참 모습을 찾기 위해서 거쳐 가는 곳일 뿐이지. 나비는 이미 만들어지고 있는 거야. 다만, 아주 천천히 만들어질 뿐이란다. 나비가 없다면 이 세상의 꽃들은 사라질 거야”. (트리나 폴러스  『꽃들에게 희망을』중에서)

 

 

 

 

 ♣ 소년 모차르트의 피나는 노력

 

경박하지만 놀라운 재능을 지닌 천재 모차르트와 그의 재능을 시기하며 괴로워하는 범인(凡人) 살리에리를 그린 영화 《아마데우스》. 그 도입부엔 모차르트의 교향곡 25번이 짧게 흐른다. 모차르트가 교향곡 25번을 작곡한 나이는 열일곱. 모차르트는 우리에게 ‘하늘이 내린 천재’의 대명사로 꼽힌다. 하지만 사실을 들여다보면 그렇지가 않다.

 

매우 어린 나이에 작곡을 시도한 것은 대단했지만 어린 아마데우스가 발표한 초기 작품들은 전혀 비범하지 않았다. 사실상, 그의 초기 작품은 단지 다른 유명 작곡가들의 모사에 불과했다. 11세부터 16세까지 작곡한 초기 일곱 개의 피아노 콘체르토 작품들은 독창성이 거의 없고, 심지어 모차르트가 썼다고 하기도 민망한 수준이었다.

 

모차르트가 독창적인 작품을 쓰기 시작한 것은 작곡을 시작한 지 10년이 넘어서였다. 그 10년이라는 수련기 동안 모차르트는 그만의 내공을 키웠다. 모차르트는 4살 때부터 아버지인 레오폴트에게 음악을 배웠으며, 레오폴트는 모차르트와 함께 연주여행을 다니며 철저하게 음악을 가르쳤으며 끊임없이 피아노 연습을 시켰다. 뛰어난 천재로 각광받은 모차르트의 이면에는 천재가 되기 위해 감수해야 했던 고통이 숨겨져 있었다. 아버지의 지도를 받으면서 소년 모차르트는 늦은 밤까지 피아노 앞에 붙들려 있어야만 했다.

 

말콤 글래드웰이 쓴 『아웃라이어』에 소개된 1만 시간의 법칙이란 것이 있다. 어떤 목표를 가지고 그것을 이루고자 할 때에는 1만 시간을 투자해야 그 성과를 맛볼 수 있다는 것이다. 하루 3시간씩 10년 연습하면 되고, 6시간씩 연습하면 5년이 걸린다. 그런 맥락에서 본다면 재능은 타고나는 것, 고정된 것이 아니라 새롭게 형성하고 발전시킬 수 있다는 말에 설득력이 있다.

 

 

 

 ♣ 내면에 있는 능력을 끌어올리는 ‘마스터리’

 

모차르트는 오랜 반복된 노력 끝에 마침내 자신의 분야에서 독보적인 성취를 끌어낼 수 있는 ‘마스터리’(Mastery)를 확보했다. 모차르트가 갖고 있는 힘, 이 ‘마스터리’는 주변 세계와 타인들, 그리고 자기 자신을 온전히 장악하며 자유자재로 다스리는 힘이다. 보통 사람들에게는 일반적으로 마감시간이 정해진 상황에서 발휘되곤 한다.

 

이런 식이다. 지금 당장 오늘 밤까지 하지 않으면 아주 곤란해지는 업무를 진행하고 있다. 다른 사소한 일들에는 신경도 쓰이지 않는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내 자신이 상상할 수 없었던 놀라운 능력을 발휘해 간신히 데드라인 몇 분 전에 주어진 과제를 해결한다. 이것이 바로 ‘마스터리’의 경험이다.

 

많은 사람이 ‘마스터리’가 특정한 소위 위대한 천재들만 획득할 수 있는 힘이라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아무리 평범한 사람도 일생에 한번쯤은 ‘마스터리’라는 힘을 경험하게 된다. 하지만 단연코 ‘마스터리’는 천재의 전유물이 아니라 일정한 법칙에 따라 자신의 분야를 정하고 그 분야에서 적절한 수련기를 겪으면 누구나 끌어낼 수 있는 힘이다.

 

모든 것이 자기 자신 속에서 응축되어 기술과 경험을 자유자재로 끌어 쓰게 되는 순간, 그들은 이제 더 이상 부분이 아닌 ‘전체를 느끼는 감각’을 얻게 된다. 그러면 ‘내 안에 숨겨진 최대치의 힘’을 평상시에도 어려움 없이 끌어내어 탁월한 결과를 만들 수 있는 경지, 즉 ‘거장’의 반열에 오를 수 있는 것이다.

 

과거와 현재를 막론하고 위대한 거장들의 삶에서는 미래의 성취에 밑거름이 되는 기본 역량이 형성되고 발달하는 특정한 시기가 있게 된다. 이런 거장들의 삶 속에서 다양한 분야에 상관없이 공통적인 과정을 발견할 수 있는데, 바로 ‘마스터리’에 이르기 위한 일종의 이상적 수련 방식을 발견할 수 있다.

 

‘마스터리’를 형성하는 과정은 다음과 같다. 먼저 인생의 과업을 발견한다. 올바른 직업적 길을 찾는 첫 번째 할 일은 어릴 적부터 좋아한 일, 남이 시키지 않아도 몰입한 일이 무엇인지 기억해내는 것이다. 자신이 하고 싶은 목표의 일을 설정했다면 ‘나비의 애벌레’ 시절과 같은 일종의 수련기를 거쳐야 한다. 수련기에 ‘거장’의 경지에 도달했다고 해서 수양의 과정을 멈추지 않는다. 수련기에 습득한 지식에 안주하지 않고 새로운 도전을 계속할 수 있다. 오랜 세월 동안 사람들은 ‘마스터리’의 주변에 견고한 벽을 세워놓았다. 하지만 이 벽은 상상의 산물일 뿐이다. 누구나 적절한 수련기를 겪으면 내면에 잠재된 능력을 끌어낼 수 있다.

 

 

 

  ‘노력’과 ‘열정’ 없이는 거장이 될 수 없다

 

우리는 남과 다른 탁월한 전문성을 발휘하거나 창의적인 사람은 만나면 도대체 어떤 노력을 해서 저렇게 되었는지 물어본다. 즉 우리는 탁월함이나 창의력을 갖춘 개인의 특성이 그렇지 않은 사람과 비교할 때 무엇이 다른지 개인 차원에서 알아보려는 호기심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남다른 탁월성과 창의성을 가진 사람이 그렇지 못한 사람과 어떤 점에서 다른지 묻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로버트 그린의 표현대로 신(神)이 내린 천재 따위는 없으며 열정을 파고든 거장만 있을 뿐이다.

 

자기 회의에 빠지는 기간을, 연습하고 공부하는 지루한 시간을, 어김없이 겪게 되는 실패를, 시샘하는 자들의 가시 돋친 비판을 이겨낼 수 있는 것이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없는 강인한 회복력과 자신감을 키워나간다. (31쪽)

 

많은 시간을 투자하여 꾸준히 노력한다고 해서 항상 성공하는 것은 아니다. 어떤 일이든 일주일에 한 번 7시간 몰아 하는 것은 쉬워도, 매일 1시간씩 꾸준히 계속하는 것은 어렵다. 결의만 하고 중도에 포기한 경험이 훨씬 더 많다. 개인의 꿈과 야망을 이루는 이들은 극소수에 불과하고 대부분 도중하차하고 만다. 대부분 좋아서 시작하게 된 일도 시간이 지남에 따라서 개인별 능력에 큰 차이가 나는 원인변수로 개인의 동기, 집중력, 성취 의욕, 멘토의 지도력 등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애벌레가 나비가 되기 위해 인내의 세월을 견뎌야 한다. 자기의 열정을 알고, 자기를 훈련하는 연습을 해야 한다. 한 단계 도약을 위한 변화, 거기에 따르는 고통은 아름답다. 그러나 인고의 세월은 나비가 될 수 있다는 희망의 열정이 있기에 감내할 수 있다. 열정은 ‘자신의 미래를 만들어 가는 힘’이다. ‘열정’을 딛고 노력하는 자는 절대로 지지 않는다. 미래의 달콤함을 위해 기꺼이 고통을 감수해야 한다.

 

이미 널리 알려진 ‘일만 시간의 법칙’이 소개된 말콤 글래드웰의 『아웃라이어』를 읽은 독자라면 이보다 조금 더 두꺼운 로버트 그린의 신작을 차례차례 읽으면서까지 저자의 메시지를 파악하지 않기를 권한다. 굳이 순서대로 읽을 필요는 없으며 관심 있는 장에 소개된 사례 중심으로 읽는다면 좋을 것이다. 사실 인용된 사례를 제외한다면 저자가 독자에게 강조하는 성공하는 삶을 위한 하나의 처세술로 매번 강조되는 것이다. ‘노력’과 ‘열정’. 이것이 하나의 단어로 축약된 것이 ‘마스터리’다.

 

‘마스터리의 법칙’을 착실하게 따라 실천하다보면 ‘마스터리’를 획득할 수 있고 자신이 속한 분야에서 탁월한 성과를 끌어낼 수 있을 것이다. 마치 떨어지는 물방울이 바위에 구멍을 낼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수적천석(水滴穿石)과 같이 꾸준하게 한 우물을 파는 노력이 있어야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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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넓은 세상에서 나보다 더 구름을 잘 알고, 나보다 더 구름을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면

내게 보여주오!" (22쪽, 민음사)

 

 

헤세는 소설 『페터 카멘친트』에서 자신의 구름 사랑을 예찬했다. 보들레르도 산문집 『파리의 우울』 첫 번째 시 ‘이방인’에서 노래했다. ‘나는 구름을 사랑하오. 지나가는 저 구름……저기…저기…저 찬란한 구름을!’ 구름을 사랑하는 시인이 많다.

 

 

 

 

 

 

 

헤세의 구름 사랑은 자신의 첫 번째 소설인『페터 카멘친트』뿐만 아니라, 초기 시에서도 볼 수 있다. 헤세의 첫 시집은 1899년 『낭만적인 노래』로 그가 18~21세 때 쓴 시들을 모아서 수록했다. 헤세는 이미 젊은 시절부터 구름을 즐겨 봤고, 관찰했을 것이다.『페터 카멘친트』가 1904년에 출간된 사실을 생각해보면 ‘구름’을 바라보는 헤세의 시점이 습작 시기에 맞물려 있고, 시와 소설을 비교하면 구름을 사랑스럽게 묘사하는 분위기면에서도 상당히 유사하다.

 

 

파란 하늘에, 가늘고 하얀

보드랍고 가벼운

구름이 흐른다.

눈을 드리우고 느껴 보아라.

하얗게 서늘한 저 구름이

너의 푸른 꿈속을 지니는 것을.

 

 

- 헤르만 헤세 「한 점 구름」(『헤르만 헤세 시집』21쪽) -

 

 

구름은 시인들의 몽상을 자극하는데, 헤세는 구름의 몽상을 따라가지 않고, 구름의 본질과 기질을 캐고자 한다. 오랜 관찰 끝에 시인이 바라본 구름은 고향에 대한 향수와 청춘의 열병에 시달리고 있는 젊은 이방인의 영혼, 바로 자기 자신이었다.

 

구름은 모든 방랑, 모든 탐구, 갈망과 향수의 영원한 상징이다. 구름이 하늘과 땅 사이에서 수줍어하고 그리워하며 고집스럽게 매달려 있는 것처럼, 인간의 영혼은 시간과 영원성 사이에서 매달려 방황한다. (23쪽, 민음사)

 

시인은 자기가 구름에 대해 확실히 아는 한 가지를 이야기한다. 새파랗게 맑은 하늘은 구름이 생성과 소멸을 또렷하게 펼쳐 보이는 스크린이다. 시인은 중얼거린다. 구름, 너 역시 쓸쓸하구나. 허공에서 태어나 허공에서 조용히 사라지는 구름. 소년 헤세가 바라보는 구름은 이렇다.

 

 

 

 

내가 나 자신에 질문한다. 최근에 구름을 본 적이 있는가. 요즘 나도 그렇다고 손들고 싶다. 가을하늘 못지않게 아름다운 게 사실 비 오고 난 후의 구름이다. 흰색의 물방울체가 파란색을 바탕으로 벌이는 그 다채롭고도 깊고 선명하면서도 아득한 변화와 이동의 장엄. 자연 속 최고의 창조물이 아닐까 싶다. 인생무상(無常)의 덧없음이 아니라 인생과 자연이라는 거저 주어진 무상(無償)을 확인시켜주는 존재다.

 

그런 구름을 어린 시절엔 자주 올려다봤었다. 초등학교 운동장에서 곧잘 그렇게 거꾸로 올려다봤던 구름들은 하늘이 두 발을 받쳐주는 땅이기도 함을 어린 머리에도 깨우쳐주곤 했었다. 그런 놀이를 더는 하지 않게 되면서 어린이라는 순수한 시절과 결별한 게 아니었을지.

 

어른이 되어 낮의 하늘로 고개를 드는 때는 애써 눈물을 감춰야 하거나, 날씨를 확인할 때 정도뿐이다. 낮의 일상은 어른에게 우두커니 고개를 젖히거나 누워서 구름의 변화나 흐름 따위에 눈과 마음을 주게 하지 않는다. 사실 밤하늘의 별보다 더 올려다보기 힘든 게 낮의 구름이다.

 

 

 

 

 

 

 

 

 

 

현대 이전에는 어른들도 그렇지 않았다. 1803년 루크 하워드라는 허름한 차림의 한 약사 출신 젊은이가 당시 유행하던 과학발표극장에서 구름을 적운 권운 층운 같은 유형으로 나누고 이름을 붙였을 때 당시 어른들은 아이들처럼 열광했다. 하워드의 발견이나 작명 자체보다 구름에 대한 그들의 열광이 기상학에 역사적인 방점을 찍게 했다.

 

재상이자 시인이었던 괴테는 '구름을 분류한 사람'을 일부러 초청해 만나고 '하워드를 위하여'라는 구름처럼 풍성한 헌시를 쓰기도 했다. 풍경화의 역사를 시작한 화가 존 컨스터블도 하워드의 구름에 영향을 받아 저 유명한 구름 그림들을 그렸다. 구름은 그 전에도 있었으되 구름에의 새삼스런 열광이 한 시대의 과학과 예술 전체를 새로이 드높인 것이다.

 

컨스터블은 유독 구름을 주제로 한 습작을 많이 남겼으며 그의 풍경화에는 지상의 구름이 화면 전체를 가득 채운다. 그는 실제 자연보다 더 그럴듯하게 그리는 것을 거부했는데 아마도 그는 찬찬히 하늘의 구름과 날씨와 바람을 꼼꼼히 관찰하면서 일지에 적었을 것이고 그보다 더 오래 정성껏 그림들을 다듬었을 것이다

 

인상주의 화가인 모네는 순간 변화하는 빛의 흐름을 일순간에 포착해 캔버스 위로 옮기고자 노력했다. 모네의 작품은 대부분 위의 그림에서 보는 것처럼, 외광을 받은 자연의 표정을 어두운 색감 위에 밝은 색채를 사용하여 효과적으로 구사하고 있다. 자연을 감싸고 있는 대기의 미묘함이나 빛을 받고 변화하는 풍경의 순간적인 분위기와 그 느낌을 충분히 공감할 수 있도록 묘사되었다. 폭풍에 흔들리는 나무나 출렁이는 물결, 그 물에 비친 검푸른 구름이 지금도 매우 빠르게 흘러가고 있는 듯 다음 순간과 느낌이 상상된다.

 

도시의 하늘은 온통 뿌연 회색하늘뿐이라지만 요즘 내가 본 찬란한 구름들은 대부분 대학교 캠퍼스에서 본 것들이었다. 희뿌연 도시에서 살짝 벗어난 교외로 가서 문득 고개를 젖히고 걸음을 멈추며 새털, 뭉게, 비늘, 면사포 같은 모양의 구름들을 만날 수 있다. 운이 좋으면 구름이 되지 못한 물방울이 만든 투명한 무지개 빛깔도 본다.

 

 

 

 

 

존 컨스터블  「구름 습작」 1822년

 

 

긴 여로에서

방랑의 기쁨과 슬픔을 모두

스스로 체험하지 못한 사람은

구름을 이해할 수 없는 법이다.

 

해나 바다나 바람과 같은

하얀 것, 정처 없는 것들을 나는 사랑한다.

고향이 없는 사람에게는

그것이 누이들이며 천사이기 때문에.

 

 

- 헤르만 헤세 「흰 구름」중에서 (『헤르만 헤세 시집』65쪽) -

 

 

 

청년기에 마주하는 구름은 마음에 품은 꿈과 방황과 방랑의 가치를 꼽아보게 한다. 장년기의 구름은 인간이라는 미약한 존재로서의 순백할 수 없었던 날들에의 고백과 겸손에 마음을 여미게 한다. 구름의 시인 헤세는 또 말한다. 방랑의 기쁨과 슬픔을 체험하지 못한 사람은 구름을 이해할 수 없다고.

 

 

 

 

 

헤르만 헤세  「계곡 풍경」 1930년

 

 

변화무쌍한 구름의 모양을 보면 온갖 상상이 떠오른다. 누군가의 모습이 연상되는가 하면, 그리운 사람의 마음을 전해주는 것도 같고, 영락없는 천상의 그림이라는 생각도 든다. 때때로 먹구름이 몰려오면 금세라도 저주를 퍼부을 듯하다. 한 군데 머물지 못하고 늘 이동하는 구름을 우리네 삶에 빗대어 인생무상을 노래하기도 한다. 그래서 헤르만 헤세는 구름을 두고 향수, 낭만, 방탕, 원망이라고 했나 보다.

 

구름은 그 부드러운 기운이 지상까지 전해져 땅의 무거움을 들어 올려 주는 것 같다. 우리가 지상에서 마주치는 생활의 무거움을 기중기처럼 가볍게 살짝 끌어준다. 지상에 내린 구름 그림자는 구름 발자국과도 같아, 침묵의 언어로 잠시 동행하는 친구가 된다. 먹구름은 먹구름대로, 슬픔과 우울함이 없는 삶은 기괴한 삶임을 보여주는 듯하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구름의 귀한 존재감은 현실을 벗어난 다른 곳으로 안내하는 데 있지 않을까? 그러고는 진짜 삶이 어떤 것인지 살짝 맛보게 한다. 그렇다고 해서 구름이 현실 밖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구름은 바로 우리 머리 위에 있다. 삭막한 도시 속에서 우리는 구름의 존재를 가끔 잊고 살 뿐, 구름은 현실의 머리 위에 있다. 구름을 바라보면서 우리는 하늘과 우주까지 보는 시야를 확대해 새로운 세계에 눈을 뜨게 된다.

 

하늘을 봐야 구름도 본다. 하늘은 누워서 보는 게 제격. 방바닥에라도 누워 유리창을 올려다보자. 통유리창이라면 더 좋겠지만, 작은 유리창 한 장도 충분히 하늘을 담는다. 사람 등짝만 보지 말고, 잠시 고개를 젖히고 하늘 위에 있는 구름을 다시 보자, 구름을 이해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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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slmo 2013-11-10 23: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하늘을 자주 쳐다본답니다, 늘 그렇고 그런 일상에, 쉼표를 찍는 의미루다가...ㅋ~.
대낮의 하늘은 햇살 땜에 눈을 잠시 찌푸리게도 되지만,
밤에 조각달이나 눈썹달이라도 걸린 하늘을 바라보면,
누군가를 떠올릴 수 있어 좋아요.

헤르만 헤세는 그림도 좋군요.
님 덕분에 제 눈이 호사네요, 감솨~(__)

cyrus 2013-11-11 21:06   좋아요 0 | URL
가끔 캠퍼스 혼자 걷다가 하늘 위의 구름을 보는 순간, 콱 막힌 마음이 뻥 뚫려요. 나무꾼님 말씀대로 고요한 밤하늘도 좋아요. 하늘을 볼 수 있는 작지만 여유로운 시간이 참 좋습니다. 참고로 헤세의 그림은 문예출판사에서 나온 시집에 수록되어 있어요.

수이 2013-11-11 10: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네의 이 감수성이란-

cyrus 2013-11-11 21:06   좋아요 0 | URL
가을이니까요~ :)

프레이야 2013-11-11 23: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이지 무상으로 보는 게 많은 계절입니다.
구름을 이해하는 아주 좋은 방법 얻어 가네요^^

cyrus 2013-11-13 00:29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구름을 보고 느낄 줄 아는 여유로운 가을 보내세요 :)

그렇게혜윰 2013-11-12 13: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헤세의 그림 참 좋아해요!
오늘은 나가면 구름으르 잘 만나 봐야겠어요^^

cyrus 2013-11-13 00:30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요즘 가을하늘 좋을 때죠. 문예출판사에서 나온 헤세 시집에 수채화 그림이 실려 있습니다(책 광고는 아닙니다 ^^;;)
 
과학혁명의 구조 - 출간기념50주년 제4판 까치글방 170
토머스 S.쿤 지음, 김명자.홍성욱 옮김 / 까치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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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비트겐슈타인의 오리? 토끼?

 

 

만일 ‘젓가락’을 사용하지 않는 식생활 문화를 가지고 있는 어떤 사람이 우리의 ‘젓가락’을 보았다고 가정해 보자. 아마도 손으로 식사하는 문화를 가지고 있는 민족은 젓가락을 공사 중에 사용하는 삽과 같은 도구로 생각하고 불필요한 물건으로 여길지도 모른다. 오히려 자신들이 가진 문화 안에서 젓가락과 가장 비슷하게 생긴 대상을 떠올리고 그 대상에 해당되는 단어를 사용할 확률이 높을 것이다.

 

 

 

어떤 사람은 이것을 오리라고 볼 수 있고 어떤 사람은 이것을 토끼라고 볼 수 있다. 그림은 불변하고 그것을 보는 사람들의 생각과 관점의 차이에 의해 해석이 서로 다르게 나타난다. 이것을 보고 비트겐슈타인은 인간은 각자 나름대로의 해석의 틀이 있고 그 틀 위에서 사물을 새롭게 이해하고 재정립한다고 생각했다. 예를 들면, ‘7’이란 수를 동양에서는 좋은 수로 생각하지만, 서양에서는 좋지 않은 수로 생각하는 것은 사물을 이해하기 전에 사물을 해석하는 사회적인 틀이 각 사람마다 정해져 있기 때문이다. 동일한 현상과 사물이라도 다르게 해석될 수 있는 것이다.

 

현상과 사물을 보는 눈이 서로 다른 사람이 있다면 패러다임(Paradigm)이 다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기존에 보는 시각에 변화가 있으면 패러다임이 전환(Paradigm Shift)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즉 세상이 바뀐 것이 아니라 관점이 바뀐 것이다.

 

 

 

 ♣ 과학은 발전되는 것이 아니다

 

‘패러다임’이란 사전적인 의미로는 ‘어떤 한 시대 사람들의 견해나 사고를 지배하고 있는 이론적 틀이나 개념의 집합체’를 말한다. 1962년 미국의 철학자 토머스 쿤이 그의 저서 『과학 혁명의 구조』라는 책에서 처음 제시한 개념으로, 간단히 말하면 우리가 주변 세상을 지각하고 이해하며, 해석하는 방식을 의미한다.

 

토머스 쿤은 책에서 다음과 같이 찰스 다윈의 말을 인용한다.

 

나는 이 책(『종의 기원』)에서 제시된 견해들이 진리임을 확신하지만, … 오랜 세월 동안 나의 견해와 정반대의 관점에서 보아왔던 다수의 사실들로 머릿속이 꽉 채워진 노련한 자연사학자들이 이것을 믿어 주리라고는 전혀 기대하지 않는다. … 그러나 나는 확신을 가지고 미래를 바라보는데, 편견 없이 이 문제의 양면을 모두 볼 수 있을 젊은 신진 자연사학자들에게 기대를 건다. (262~263쪽)

 

 

다윈은 왜 이렇게 이야기했을까? 쿤은 왜 이 이야기를 인용했을까? 다윈은 지금까지 쌓아 왔던 모든 지식체계를 완전히 뒤바꾸는 학설을 발표했다. 그렇기 때문에 다윈 스스로 이 이야기를 과학자들이 잘 받아들이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토마스 쿤은 다윈이 완전히 새로운 주장을 제시하면서 기존의 사고 틀을 뒤집었던 것처럼 과학이 발전해 왔다고,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이어져 왔다고 주장한다. 결국, 과학은 ‘발전해 온’ 것이 아니고 ‘이어져 온’ 것이다.

 

과학과 지식은 일반적으로 어떤 과정을 거치면서 이어져 왔을까? 정상과학의 시기에는 하나의 패러다임 하에서 연구 작업이 이루어진다. 패러다임이란 기본형, 표준형이다. 패러다임이란 말은 원래 쿤이 언어학에서 차용한 용어인데, 한 동사의 기본형에서 온갖 활용어가 파생되듯이 하나의 패러다임에서 여러 가지 과학적 인식과 모델이 생겨난다. 따라서 과학적 인식뿐만 아니라 과학적 이론, 나아가 과학자 집단의 공유된 관념과 가치관, 관습까지도 모두 그 지배적 패러다임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러나 어떤 한 패러다임을 의문시하는 과학적 증거들이 누적되고 시기가 무르익으면 그 모순은 곪아터지게 된다. 이렇게 과학혁명은 정상과학에서 이상 현상이 일어나거나 새로운 것이 발견되었을 때 촉발된다. 과학혁명이 일어나기 위해서는 정상과학에서 누적된 성과가 필수적이다. 그러나 과학혁명은 정상과학을 연장하는 선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고 불연속적으로, 비약적으로, 단절적으로 일어난다. 이때 기존의 것은 철저하게 부정된다.

 

다윈 이전에도 진화론과 비슷한 학설은 많았다. 그런데 다윈 이외의 학자들은 ‘생명체는 어떤 목적을 향해서 발전해 온 것이며, 어떤 미개한 존재가 인간으로 된 것 역시 발전’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다윈이 그것은 ‘발전’이 아니고 순전히 ‘자연의 선택에 의해서 그렇게 된 것일 뿐’이라고 주장했던 것이다. 이것은 엄청난 혼란을 야기할 수 있다. 다윈의 이론을 받아들이려면 생명체에 대한 개념 규정을 새로 해야 하고, 이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 인간의 정체성 또한 수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기존의 사고 체계에 심각한 위기를 불러일으키는 일이다. 그래서 과학자들은 웬만해선, 정확하게 말하자면 죽을 때까지 새로운 학설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 우리에게 끊임없이 물음을 던지는 쿤의 과학관

 

장기 게임을 예로 든다면 패러다임이 전환되는 것은 ‘게임에서 이기는 새로운 방법을 만들어 내는 일’이 아니다. ‘장기의 규칙을 통째로 바꾸는 일’이다. 그런데 이것을 단순히 ‘발전’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쿤이 말했듯이 발전이라는 것은 기존의 어떤 것을 더 개선시키는 일이고, 결국은 과거의 어떤 것을 더 나은 것으로 만드는 일이다. 패러다임의 전환은 전혀 새로운 이론을 등장시키는 것이기 때문에 과거의 것과 전혀 연결되지 않는다. 결국 과학은 발전하는 것이 아니고 계속 변환된다. 그래서 과학은 ‘발전이 아닌, 완전히 뒤바뀌는 혁명’을 거듭하는 전환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학의 역사는 마치 계속 발전해 온 것처럼 포장되고, 과학 교과서는 이렇게 왜곡된 형태로 기술된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그래야 지금까지 과학의 업적을 인정받을 수 있고, 젊은 과학도들이 더 열심히 공부하게 할 수 있으니까. 과학이 발전한다고 믿는 사람들에게 ‘발전이 아니라는 사실’도 새로운 패러다임이 될 수도 있겠다.

 

쿤은 매우 중요한 문제에 대해서 전혀 해답을 제시해 주지 않는다. 출간 50주년이 지났음에도 여전히 쿤의 과학관에 대한 의견이 분분하다. 이 책을 읽고, 연구하는 과학자나 독자들은 지금도 쿤이 이 책을 통해 던지고자 하는 물음에 대한 답변을 준비하고 있다. ‘과학이 이렇게 패러다임의 전환을 거듭해 간다면, 과학의 목적은 무엇이어야 하는가?’, ‘과거와 연결되지 않은 전혀 새로운 이론의 등장이 과학사를 통째로 뒤바꾼다면 과학 공부를 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모든 패러다임이 전환 가능하다면 도대체 진실은 어디에 있는가?’ 쿤은 이런 문제에 대해 ‘자신이 대답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한다. 궁금하다면 그 답은 책을 읽는 우리가 찾아야한다. 출간 100주년에 이를 즈음에 미래의 독자와 연구가들은 쿤의 과학관에 대해 끊임없이 의문을 표시하고, 물음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탐구할 것이다. 흥미롭게도 쿤의 과학관을 논하는 이 과정 또한 ‘패러다임 전환’으로 볼 수 있겠다.

 

우리는 ‘패러다임’이라는 꽤 정의하기 어려운 말을 마구 쓴다. 심지어 과학뿐만 아니라 사회나 역사 전체를 구성하는 과정을 설명할 때도 사용한다. 또 행정학에서도 ‘패러다임’이라는 단어가 빠지지 않게 사용한다. 그러나 이 책을 단 한 번이라고 읽은 사람들 중에 ‘패러다임’의 진짜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는 사람이 몇 명이나 있을까? 현재 세계에서 영향력 있는 과학철학자 이언 해킹의 서문이 추가되고, 새롭게 개정된 번역본을 읽었지만, 여전히 ‘패러다임’이라는 단어 속에 있는 방대한 의미를 이해하기에는 버겁게 느껴진다. 개정판을 읽으면서 ‘패러다임’을 제대로 이해하지는 못하더라도 ‘패러다임의 전환’이라는 말을 함부로 쓰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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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신의 식탁 - 우리는 식탁 앞에서 하루 세 번 배신당한다
마이클 모스 지음, 최가영 옮김 / 명진출판사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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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 초콜릿의 노예가 된 아이들

 

 

 

 

 

『찰리와 초콜릿 공장』의 작가 로알드 달은 어린아이처럼 단것을 좋아하는 사람이었다고 한다. 한개만 먹으면 코스요리를 맛볼 수 있는 풍선껌이나 녹지 않는 아이스크림, 민트로 이루어진 풀밭은 군것질거리에 애틋해하는 철없는 사람만이 생각해낼 수 있다. 아마도 로알드 달은 윌리 웡카의 초콜릿 공장에서 살고 싶었을 것이다. 초콜릿과 캔디가 넘쳐나고, 공장의 주인이 창조자처럼 군림하며, 심술궂은 아이들을 마음대로 혼내줄 수 있는.

 

세계인의 입맛을 사로잡은 '웡카 초콜릿'. 도대체 그 많은 초콜릿을 누가 어떻게 만드는지 20년 동안 철저히 베일에 가려져 있었다. 초콜릿의 마술사 윌리 웡카는 그 비밀 공장을 견학하고, 평생 먹을 초콜릿을 얻을 수 있는 황금티켓 5장을 전 세계에 배포한다. 5명 중에서 후계자를 선택하기 위해. 착하고 속 깊은 찰리를 빼고 황금티켓을 거머쥔 아이들은 저마다 욕심을 부리다 중도에서 무시무시한 벌을 받고 탈락한다.

 

 

 

 

 

 

 

첫 번째 탈락자는 게걸스럽게 초콜릿을 탐하던 먹보 아우구스투스. 그는 초콜릿으로 따끈하게 녹여 만든 강물을 통째로 들이마실 정도로 언제나 초콜릿을 입에 달고 산다. 권장할 만한 인격을 갖추지 못한 그는 초콜릿을 즐기는 대신 초콜릿의 노예가 되는 비참한 꼴을 당한다.

 

소설에서 가장 중요한 소재는 말할 것도 없이 ‘초콜릿’이다. 이 초콜릿에는 정말 기가 막힐 정도로 매력적인 함의가 있다. 우선 초콜릿의 맛을 생각해 보라. 물론 달지만, 어딘지 쌉쌀한 뒷맛도 난다. 이 영화 속 초콜릿은, 단맛과 쓴맛처럼 두 개의 상반된 의미를 동시에 품고 있다.

 

먼저 단맛에 해당하는 긍정적인 의미는 ‘동심’과 ‘꿈’이다. 웡카는 초콜릿을 통해 동심과 꿈을 키워 왔다. 반대로 쓴맛에 해당하는 부정적인 의미는 ‘탐욕’이다. 온통 초콜릿으로 이뤄진 꿈의 장소 초콜릿 공장. 그러나 남보다 더 많이 먹으려 하거나(아우구스투스), 남을 무조건 이기려 하거나(바이올렛), 원하는 건 뭐든 소유하려 하거나(버루카), 잘난 체를 해야 직성이 풀리는(마이크) 마음을 가진 아이들은 벌을 받는다.

 

결국 이야기는 초콜릿이라는 귀중한 자원을 인간이 어떤 마음가짐으로 다루느냐에 따라 완전히 상반된 결과가 나타날 수 있다는 교훈을 들려준다. 동심을 품은 사람에게 초콜릿은 그 자체로 ‘달콤한 행복’이지만, 탐욕으로 가득 찬 사람에게 초콜릿은 ‘자멸의 지름길’일 뿐이다.

 

 

 

 ♣ ‘맛의 삼각형’(Taste triangle), 단맛·소금·지방

 

하지만 안타깝게도 현실은 로알드 달의 생각대로 되지 않는다. 아우구스투스처럼 초콜릿의 맛에 중독된 아이들은 갈수록 늘어난다. 아이들의 욕심을 절제하는 윌리 윙카처럼 착한 초콜릿 공장주는 그저 이야기 속의 가공인물일 뿐이다. 아이들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단맛의 노예가 되고 있다. 단 음식의 지나친 섭취가 건강에 안 좋다는 것은 이미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런데 왜 단맛에 탐닉하게 되는 걸까?

 

스트레스를 받으면 유독 단 음식을 찾는 사람이 있다. 단맛이 일종의 쾌감을 동반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단맛에 익숙해지면 더 강한 단맛을 찾게 된다. 예전에 비해 설탕 섭취량이 크게 증가한 원인은 가공과정 중 설탕이 첨가된 식품이 늘고 있기 때문이다. 탄산음료가 설탕의 가장 큰 공급원이 되고 있고 에너지음료도 설탕의 함량이 높은 편이다. 말 그대로 우리는 단맛에 중독되어 있다. 초코 쿠키의 대명사로 꼽히는 ‘오레오’ 쿠키가 코카인만큼 중독성이 강하다는 연구결과도 있다.

 

그러나 더욱 충격적인 점은 우리는 단맛이 나는 초콜릿뿐만 아니라 손쉽게 먹을 수 있는 가공식품의 조작된 맛에도 중독되어 있다. 누구나 가공식품이 건강에 해롭다는 사실을 알지만, 쉽고 간편하게 먹을 수 있는데다 맛도 좋기 때문에 즐겨 찾는다. 그동안 우리는 맛 좋고 간편한 가공식품을 먹을 수 있어서 뱃속 시계의 작동을 멈출 수 있었지만, 혀는 중독에 가까울 정도로 가공식품의 맛에 길들이고 말았다.

 

가공식품 기업들은 윌리 윙카의 초콜릿 공장이 될 수 없었다.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소금, 설탕, 지방의 물리적 형태와 구조에 손을 댔고, 우리의 뇌와 혀는 그들이 만든 단맛, 짠맛, 기름진 지방의 유혹에 벗어날 수 없었다. 소금은 가공방식만 해도 수십 가지가 넘을 정도로 흔한 조미료인데다가 처음 한 입 베어 문 순간 혀끝을 짜릿하게 만든다. 지방은 칼로리가 가장 높으며, 많이 먹어도 몸에 특별한 증상을 느끼지 않기 때문에 사람들이 음식을 손에서 놓지 못하도록 교묘하게 유도한다.

 

세계를 움직이는 세 가지의 권력 유착 관계를 ‘철의 삼각형’(Iron triangle)이 있다면, 식품 기업들 사이에서는 모든 소비자들의 맛에 영향을 미치는 ‘맛의 삼각형’(Taste triangle)이 있다. 다르지만 서로 비슷한 이 세 가지 맛을 통해 가공식품 기업들은 소비자들의 지갑을 열리게 만들어 맛보도록 견고한 카르텔을 작동했다. 우리 소비자들은 이런 가공식품 기업의 교묘한 속임수와 거짓을 알아차리지 못했던 것이다.

 

식품기업들은 막대한 마케팅 비용을 써가며 건강식품, 기능식품, 유기농식품이라는 이름으로 소비자를 속여 왔다. 미량의 건강 성분을 넣은 뒤 설탕 덩어리와 다름없는 제품을 건강식품으로 팔거나, 효능이 입증되지 않은 기능 식품을 비싸게 판매해 폭리를 취한다. 켈로그, 네슬레 등은 어린이 간식이나 어린이 식사용 제품을 내놓고 있지만 실체는 설탕범벅 과자일 뿐이라는 것이다. 소비자가 꼭 알아야 할 정보는 감추고, 허위·과대광고가 많은 것도 이들 업체의 특징이다.

 

예컨대 켈로그는 어린이에게 아침 식사를 제공하는 학교에 재정을 지원하는 일종의 마케팅 행사를 한 적이 있었다. 행사를 통해 켈로그 '착한 기업' 이미지를 내세웠지만, 사실은 설탕범벅 시리얼이라는 사실을 숨기고, ‘어린이들이 즐겨 먹는 아침 식사’라는 이미지를 강조했다. 설탕 과다 섭취의 문제점을 알며 자녀들에게 설탕을 많이 먹는 걸 원치 않는 부모님들은 켈로그의 마케팅을 선호했다. 겉으로는 영양 교육에 발 벗고 나선 것처럼 보이지만, 알고 보면 자사 제품을 쏟아내 어린이 소비자의 입맛을 길들이려는 의도인 셈이다. 대다수 소비자들은 이미지 마케팅을 활용한 식품기업들의 눈속임에 속아 넘어가고 있다. 분별력이 부족한 아이들에게는 더욱 큰 피해로 다가올 수 있다.

 

 

 

 ♣ 누구에게도 유익하지 않은 맛의 싸움

 

집에서 먹는 밥이 최고다? 지극히 당연해 보이는 이 통념을 신봉하지 마라. 가공식품이 식재료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이상 우리 몸은 유해 물질로 그득할 뿐이다. 실로 슈퍼마켓 진열대마다 가공식품이 넘쳐난다. 무심코 카트에 담는 이것들에는 몸에 필요한 칼슘, 무기질, 비타민 등 필수영양소 대신 소금, 설탕, 지방 등이 가득하다. 그러니 아무리 아이와 가족 건강을 위해 가공식품으로 만든 음식이 놓인 식탁을 엎는 들 소용없는 일이다.

 

지금도 가공식품 기업 산하 연구소에서는 맛의 중독성을 높이기 위해 흰 가운 입은 연구자들이 실험을 하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식품에 대한 소비자의 반발에 소금, 설탕, 지방 중 어느 하나에 비난 여론이 집중될 때마다 문제가 된 성분을 빼고 다른 성분을 그만큼 더 넣는다. 좋은 성분 하나만 강조함으로써 소비자가 나무는 보되 숲을 보지 못하게 하는 전술이다. 이들은 시정 점유율을 높이기 위해서라면 소비자 보호단체의 공세에 맞설 준비가 되어 있다. 소비자에게 식품을 많이 팔리고 이익을 얻기 위한 기업과 건강에 좋은 영양분이 가득한 맛 좋은 음식을 먹고 싶은 소비자들 간의 갈등은 오랫동안 이어지겠지만 그 어느 누구에게도 유익하지 않은 맛의 싸움일 뿐이다.

 

러시아의 시인 뿌쉬낀은 삶이 우리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여워하지 말고 절망의 나날 참고 견디면 기쁨의 날이 찾아 온다고 썼다. 허나 그동안 먹어왔던 가공식품이 우리의 맛을 속일지라도 노여움과 분노의 감정으로만 그쳐서는 안 된다. 가공식품의 위험성을 제대로 알게 된 이상, ‘맛의 삼각형’에 중독된 입맛을 고치는 일만 남았다. 설탕, 소금, 지방을 많이 찾는 식탁의 노예가 되지 않기 위해 우리 스스로 ‘윌리 윙카’가 되어야 한다. 미각을 죄어왔던 ‘맛의 삼각형’을 파괴해야 한다. 우리를 유혹하는 가공식품 광고의 허상을 파악하고, 불편하더라도 가공식품 위주의 식습관을 줄여야 할 것이다. 식탐의 나날 참고 견디면, 건강의 날 반드시 찾아오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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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밀리 디킨슨)

 

사랑이란 이 세상의 모든 것
우리 사랑이라 알고 있는 모든 것
그거면 충분해, 하지만 그 사랑을 우린
자기 그릇만큼밖에는 담지 못하지

 

 

 

 

 

 

 

사람이 사랑이라 믿고 살다 보면 온몸에 상처가 나고, 뒤틀린 형태와 내 삶의 옹색한 크기가 정해지게 마련이다.

 

다들 그렇게 살아야겠지만, 잠시 거기에서 벗어난 내 사랑을 온전히 보고 싶다면

 

지금 헐벗은 자기 자신을 볼 줄 알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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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anca 2013-11-08 10: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기 자신이 단단해져야 그리고 무엇보다 자기 자신을 사랑해야 상대방도 건강하게 사랑할 수 있는 것 같아요.

cyrus 2013-11-08 21:01   좋아요 0 | URL
네, 맞아요. 디킨슨의 짧은 시를 읽으면서 그동안 느꼈던 사랑에 대한 제 생각에 대해서 반성할 수 있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