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스
어빈 웰시 지음, 김지선 옮김 / 단숨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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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우리는 우리 아닌 다른 존재가 될 수 없다는 이유로 자신을 증오한다.

더 나은 누군가가 될 수 없다는 이유로. 우리는 분노를 느낀다. (509쪽)

 

 

 

 

 Scene #1  혐오스러운 악질 경찰 브루스의 일생

 

여기 부패하고 타락한 경찰이 있다. 그는 술과 마약에 중독돼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없을 정도지만 진급을 위해 동료들을 모함하고 위기로 몰아넣는 데는 발군의 실력을 발휘한다. 변태적 도색(桃色)은 이미 정도를 넘어 동료의 아내들에게까지 뻗쳐 있다. 자기 자신을 완전히 망쳐 놓았을 뿐 아니라 주변 사람들의 행복까지도 거리낌 없이 짓밟아 버리는 남자, ‘필스’(Filth, 오물)의 주인공 브루스 로버트슨은 동시대 인간 말종의 초상과도 같다.

 

일상을 성실하게 살아가는 평범한 독자들에게 브루스는 이해 불가한 주인공이다. 좀 모자라거나 괴짜스럽더라도 착하고 정의로운, 그래서 금방 애정을 갖게 되는 경찰 캐릭터와는 거리가 멀어도 너무 멀다. 라이벌들을 이간질하고, 동료의 아내와 바람을 피우고, 처제와 은밀한 관계를 즐기고, 사건 해결을 위해 협박마저 일삼는 이 비도덕적인 삶이 브루스 자신은 멋있다고 생각한 것일까? 정작 사건 수사는 뒷전이고 진급 라이벌들에 대한 중상모략을 펼치고 그가 좋아하는 갈보들과의 난잡한 행위를 연출하는 장면을 본다면 혐오감에 머리가 어질어질하다.

 

 

 

 

 

브루스의 계속되는 악질을 보는 것도 부담스러운데 중간에 등장하는 기다란 촌충의 독백은 이미 악으로 피폐해진 브루스의 상태를 입체적으로 보여준다. 촌충은 오직 브루스가 음식을 많이 먹기를 바란다. 브루스 못지않게 탐욕스럽다. 이미 부패할 대로 부패한 브루스의 타락한 몸과 마음을 숙주 삼아 살아간다. 촌충이 브루스의 탐욕을 먹고 자란다면, 브루스는 권력 상승을 위해 '경찰'이라는 명함을 앞세워 사회에 기생한다.

 

책을 펼치기 시작하기 전부터 무려 500페이지에 달하는 스코틀랜드 아니 세상에서 가장 추악한 인물의 삶을 끝까지 읽을 필요가 있을지 망설이는 독자가 있을 것이다. 이미 타락한 인간상의 전형을 보여준 어빈 웰시의 대표작이자 데뷔작인 『트레인스포팅』의 원작과 영화를 본 사람이라도 이 충격적이고 더러운 묘사로 가득한 악질 경찰의 이야기를 어떻게 받아 들여야 할지 망설일지도 모른다.

 

 

 

 Scene #2  권력을 위해 기생하는 탐욕덩어리

 

무엇이 브루스를 타락한 경찰이 되게 만들었는가? 성선설을 믿든 성악설을 믿든 고만고만한 영유아기의 인성을 비정상의 궤도로 밀쳐내는 것은 환경과 정신적 외상이라고 보는 것이 현대의 통념이다. 아버지로부터 따뜻한 사랑을 받지 못한 채 외면 받은 유년 시절 그리고 첫사랑을 죽음으로 몰았던 브루스의 경험은 그의 현재를 단단히 뒷받침한다. 분노를 제어할 수 있는 것은 자신 또한 약자를 무너뜨릴 수 있는 권력을 가지는 것이다. 어린 브루스는 자신이 받은 멸시와 폭력을 내면의 상처를 치유하는 동시에 욕구 불만을 해소하는 수단으로 삼기 시작했다. 즉, 세상에 대한 복수를 할 수 있고, 연약한 자신을 보호할 수 있는 유일한 무기가 바로 권력과 폭력이라고 믿게 된다.

 

그러나 자신이 원하는 권력을 행하기에는 자신의 한계를 느끼고 만다. 브루스는 그러한 자신이 원망하고 저주스러워 한다.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없는 절망감에 그는 자신뿐만 아니라 세상 주변에 분노감을 표출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런 분노를 표출할 수 하기 위해서 권력으로 자신을 더욱 강하게 만들고, 보호할 수 있는 유일한 방편이 경찰이 되는 것이었다. 다른 생물체의 몸속에서 먹이와 환경에 의존하여 기생생활을 하는 기생충처럼 이미 비뚤어져버린 심성으로 변한 브루스는 경찰 조직에 들어와 숨겨왔던 탐욕을 드러낸다.

 

곧 경위가 될 자리에 있어도 브루스의 탐욕은 멈출 수 없다. 촌충이 브루스에게 음식을 게걸스럽게 집어삼키도록 명령하듯이 탐욕과 집착은 브루스의 뇌를 지배했다. 브루스가 직접 고백하듯이 그는 자기 자신을 제어할 수 없어 약과 섹스에 탐닉하고 남을 괴롭히는 것으로 자신의 건재를 확인한다. 승진을 위한 권모술수 역시 아내와 딸을 되찾게 해 줄 것이라는 잘못된 신념에서 비롯된 것이다.

 

죄책감으로 인한 정신 분열은 점점 더 빈번하게 브루스를 옥죄어 오는데, 아픈 과거의 기억과 장면이 등장할수록 브루스에 대한 인간적 연민도 정점으로 치닫는다. 이윽고 가해지는 브루스에 대한 처벌들, 범죄자들에게 끌려가 린치를 당하고, 승진에 실패하며, 다른 남자와 가정을 꾸린 아내의 모습을 보게 되는 것은 어쩌면 충분히 가혹한 것이다.

 

브루스와 같은 악한의 행위에 대한 해석은 크게 두 갈래로 나뉠 것이다. 하나는 그가 광기에 사로잡힌 ‘인간 쓰레기’라는 것인데 대다수 보통 사람의 감정적 반응이 이것이다. 이에 반해 그가 악행을 저지르게 된 상황적 요인이 있을 것이란 입장이 맞선다. 악행을 용서하는 것과는 별개로 악행의 원인을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인간의 개인적 또는 집단적 행동, 특히 악행의 주요 원인은 증오심, 기질과 같은 심리적인 것인가, 아니면 그가 처한 특수한 상황 또는 사회적 구조인가라는 질문으로 달리 표현할 수 있다. 어찌 보면 전자의 입장이 훨씬 속 편할지 모른다. 그저 나하곤 전혀 별개의 나쁜 놈, ‘인간 쓰레기’로 규정하면 끝이니까. 그러나 이런 해석은 반복되는 인간의 잔혹한 행동들, 그리고 인간의 본성에 대한 ‘이해’를 가로막는다.

 

 

 

 Scene #3  더 많이 불편하고, 아파하시라

 

“악한 일은 스스로 하는 일의 의미를 깊이 생각하지 못한 데에서 나온다. 평범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스스로 인식하지 못한 상태에서 커다란 악을 저지를 수 있다.” (한나 아렌트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브루스는 사나운 악마는 아니다. 생각이 이상할 뿐, 치유하지 못한 유년기의 상처를 안고 살다가 감정 조절을 주체하지 못하는 ‘거악(巨惡)’으로 변질되고 말았다. 이미 근본적으로 잘못된 오류의 희생자일 뿐이다. 이렇듯 모든 악행은 인간의 악마적 속성이 아니라 사고력의 결여에서 나온다. 아렌트가 만난 아이히만은 히틀러에 대한 맹목적 충성심으로 뭉쳐진 기계적인 인간이었다면, 어빈 웰시가 만들어 낸 가상인물 브루스는 유혹, 본능, 상념과의 갈등에 정신이 게을러져 술과 코카인 그리고 악질에 의존하게 되는 ‘악의 평범성’에 쉽게 지배당하는 허약한 인간이다.

 

그가 악하게 만든 또 다른 요인에는 권력의 환상에 도취된 이상주의적 열정도 한몫하고 있다. 브루스에게 ‘사건’은 일종의 서바이벌 게임이다. 진급을 위해 물불 안 가리고, 진급 경쟁자들을 견제하며 성과를 얻어낸다. 진급을 위한 성과에 눈이 먼 나머지, 사건 해결에 유리하도록 거짓말과 협박을 서슴지 않는다.

 

아렌트는 아이히만의 이상주의를 이렇게 설명한다. “이상주의자란 자신의 이상을 삶을 통해 실천하는 사람이었고, 자신의 이상을 위해서라면 어떤 사람이라도 희생시킬 각오가 된 사람이었다.” 이처럼 브루스의 왜곡된 이상주의적 열정은 관념이 아니라 실천의 문제였고, 그것도 과격한 실천이다. 그러니까 브루스는 난데없이 나타난 악마가 아니라 자신의 삶을 규칙과 명령과 ‘주어진 이상’에 맞추려고 집착한 인물이었던 것이다.

 

옛말에 사필귀정이라는 사자성어가 있다. 예견했던 대로 브루스는 용서와 구원을 받지 못한 채 몰락한다. 드디어 '인간 쓰레기'가 스스로 이 세상에 사라지게 되어서 속 시원하면서도 한편으로는 허무하게 느껴지기도 할 것이다. 미풍양속에 위배되는 존재는 마땅히 처벌받고, 자신이 저지른 죄에 대가를 치러야 한다. 브루스도 법의 손길을 피해갈 수 없다. 그러나 브루스는 법의 손길에 포위되는 대신에 죽음의 신이 뻗친 손길이 자신의 목숨을 거두기를 원했다.

 

장면 하나하나 불편해질 수밖에 없는 악질로 가득한 500여 페이지를 참고 견뎌 읽어도, 여전히 불편하다. 왜 그럴까. 브루스는 불행하게도 자신의 도덕성과 정신을 거의 회복불능 정도로 파괴시킨 '인간 쓰레기'를 복수하지 못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말이 있지 않은가. 죽기 전에 자신의 유년 시절에 자신과 첫사랑을 모욕한, 어디선가 평범하게 살지도 모르는 속이 시커먼 그들을 죽이든, 협박하든, 욕설을 하던 간에 똑같이 악랄한 방식으로 복수를 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비록 용서치 못하는 범죄 행위라도 이 소설을 읽는 독자는 악이 또 다른 악을 응징하는 안티 히어로에 대한 카타르시스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필스』를 끝까지 단숨에 읽었는데도 불편하고, 결말에 불만스럽다. 화장실에서 큰일을 보고 나왔는데도 무언가 개운치 않고, 찜찜한 느낌이 든다. 브루스는 심신을 망가뜨리는 약(藥, 코카인)을 해서 악해진 것이다. 그는 애초부터 폭력에 연약한 사람이라서 어쩔 수 없이 악한 '괴물'으로 변하고 말았다. 일부 독자들 중에는 여전히 브루스를 절대로 용서와 구원받을 수 없는 '인간 쓰레기'라고 손가락질해도 좋다. 무수한 악질로 가득찬 500페이지를 단숨에 끝까지 참고 읽을 수 있다면 더 많이 불편하고 아파해야 한다. 그의 일대기를 보면서 더 많이 불편하게 느끼고 몸속에 촌충이 꿈틀거려 위장을 괴롭힐 때마다 생기는 통증처럼 아프고 찜찜하게 느낀 독자가 단 한 명이라도 있다면 작가 어빈 웰시는 상당히 고마워했을 것이다.

 

 

 

P.s 24시간 악질을 펼치는 주인공을 다룬 이야기답게 입에 담기 어려운 음란한 단어, 온갖 비속어가 줄줄이 나온다. 책의 분량도 적은 편도 아닌데 정신이 해로울 정도로 실감나게(?) 비속어 하나하나 번역한 역자의 노고에 진심어린 박수를 보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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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년 전, 한창 헌책방의 매력에 푹 빠진 시기에 운 좋게도 구하게 된 책이다. 손석희 앵커가 쓴 유일한 책이다. 사실 ‘손석희’라는 이름의 활자가 적힌 책이 『풀종다리의 노래(1993년, 역사비평사)』와 『가슴속에 묻어둔 이야기(아침이슬, 2000년)』, 단 두 권뿐이다.

 

 

 

 

 

 

 

 

 

 

그러나 『가슴속에...』는 단독 저자로서 손석희 앵커가 쓴 책이 아니다. 월간 『말』이라는 잡지에 연재된 유명 연사들의 에세이를 모은 책이다. (이 책 또한 절판 상태다) 손석희 앵커를 너무나도 잘 알면서도 90년대에 태어난 젊은 친구들은 그가 쓴 책이 있다는 사실을 잘 모를 것이다. 나도 몰랐다. 헌책방에서 『풀종다리』를 만날 때까지는.

 

 

 

 

 

 

 

『풀종다리』가 출간된 시기는 지금으로부터 20년 전, 그러니까 1993년, 김영삼 대통령의 문민정부가 들어서기 시작한 첫 해였다. 이 때 뉴스에서 많이 회자되었던 그 당시 사건사고에 관한 단상부터 시작해서 뉴스와 보도에 대한 자신의 신념 그리고 1992년 문화방송 노조 파업 이야기까지 책에 수록된 글의 사연은 다양하다.

 

글의 장르는 에세이라고 할 수 있는데, 재미있게도 책의 출판사는 ‘역사비평사’다. 『역사비평』이라는 학술지도 만드는 역사 전문 출판사다. 손석희 앵커의 감상적인 에세이와 역사 전문 출판사의 조합. 이렇게 본다면 안 어울릴 것 같지만 에세이를 쓴 필자와 역사 전문 출판사의 만남은 ‘진보에 가까운 정도(正度)’를 지향하고 있었기에 충분히 가능했으리라고 본다.

 

『풀종다리』가 나온 지 20년의 세월이 흐른지라, 아무리 우리나라에 대중적 영향력이 높은 방송인의 글이라도 지나가는 세월의 흐름은 어쩔 수 없다. 2004년에 정식 재판되고 난 이후, 절판이 되었다. 절판된 사연이 궁금해서 인터넷에 남아 있는 손 앵커의 인터뷰 내용이나 기사를 검색해봤는데 출판사에서 더 찍겠다는 걸 말렸다고 한다.  손 앵커는 왠지 책을 더 내면 책 장사하는 것 같아서 재판을 거절했다고 한다.

 

 

 

 

 

현재 알라딘 중고샵에 판매되는 『풀종다리』. 가격이 어마어마하다.

 

 

20년 전 이야기로 가득한 글인데다가 손 앵커가 재판을 허락하지 않는 이상 지금 다시 나올 리 만무하고, 심지어 출판물 DB가 최적화되어 있는 인터넷 서점 알라딘, 교보문고, 예스24에 정식 등록되어 있지 않다. 인터넷 서점 전문 중고샵에 한두 권은 볼 수 있을 정도다. 절판 상태인데다가 유명 방송인이 쓴 유일한 책이라서 그런지 꽤 비싼 가격으로 헌책방 매물(?)로 나온다. 제일 비싼 가격은 55000원(책의 정가는 9000원). 시중에 구할 수 없고 나름 희귀한 가치가 있는 책은 터무니없이 높게 잡은 금액으로 헌책방에서 판매된다.

 

대구에서 알아주는 헌책방에서 구했을 때 판매가는 30000원이었다. 헌책방의 매력은 시중에 구할 수 없는 한 권의 책을 숨겨진 보물을 찾는 소유의 기쁨만 있는 것이 아니다. 웬만한 부탁을 해도 가격을 절대로 깎지 않으려는 고집 센 헌책방 주인과의 가격 흥정에서 승리하는 기쁨(?)도 맛봐야 한다. 헌책방에서 자주 출몰하는 젊은 단골손님이 아니었다면 반값에 가까운 가격으로 구입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흥정한 끝에 15000원으로 구입했다.

 

 

 

 

 

손때와 먼지가 전혀 묻지 않았을 정도로 워낙 깨끗한 상태로 보존된 책이라서 그런지 책장에 꽂혀있는 것을 매일 보면서도 시간이 딱 멈춘 듯한 느낌이 든다. 『풀종다리』가 손석희 앵커 특유의 변함없는 ‘바른 이미지’를 닮아가는 것 같다. 그래서 그의 글은 ‘역시 손석희’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소신 있으면서도 잘못된 세태를 비판하는 ‘바른 말’로 이루어졌다. 글이 참 읽기 쉬워서 거의 ‘칼럼’에 가까운 에세이로도 볼 수 있다. 20년 전에 쓴 글인데도 불구하고 기시감이 느껴진다. 20년 전, 손 앵커가 아쉬워하던 세상의 부조리한 장면은 얼굴과 시간만 달라졌을 뿐이지 여전히 남아 있기에 씁쓸한 기시감이기도 하다.

 

 

 

 

 

 

이틀 전 토요일에 중앙일보 오피니언에 대학생 칼럼을 쓴 학생분들과 함께 JTBC 방송국에서 손석희 앵커를 만나게 되었다.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 수 있는 만남일 것 같아서 저자로서의 ‘손석희’의 친필 사인을 받고 싶었다. 그리고 꼭 그 분에게 이 질문을 하고 싶었다. 혹시 글이나 책을 쓸 계획이 없냐고. 만약에 손석희 앵커의 칼럼이 중앙일보 오피니언에 게재된다거나 또 새로운 책이 발간된다면 대중의 엄청난 반응을 상상해본다. (그런데 시간 부족 관계상 질문을 하지 못했다)

 

4시간 걸리는 서울로 가는 기차에 몸을 실을 때도 『풀종다리』를 다시 읽었다. 그 4시간이 지루할 법한데 책 한 권 덕분에 시간 빨리 가는 줄 몰랐다. 그리고 여러 번 『풀종다리』를 읽고 나서 느꼈지만, 손석희 앵커를 직접 뵈면서 느낀 감정을 한 마디로 요약한 문장으로 책의 소개를 마무리한다. ‘손석희 클래스는 영원하다’

 

 

 

 

 

 

 * 방송사 바깥에 있는 사람들을 만나면 꼭 받게 되는 질문이 있다. “그 뉴스는 다 외워서 합니까?” 당연히 생길 수 있는 의문이겠지만 매번 그런 질문을 받다 보면 좀 답답해질 때가 있다. 사람이 기계가 아닌 이상 어떻게 그 많은 부분을 외워두었다가 카메라 앞에서 밑에 있는 원고를 보지 않으려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나는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 진행자로서의 나는 그저 단순한 ‘전달자’여야 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뉴스에서는 진행자 개인이 부각되어야 할 필요가 있어 보이지 않는다. (중략)

 

진행자들이 아무 의미 없이 때로는 현학적 수사로 포장된 기사를 외우고 있고 화면상 보이는 모든 요소들을 치장해 거기에 자족하고 있다면, 또 시청자들 역시 그에 매몰돼 있다면 우리의 방송은 불행하다. (「그 뉴스는 다 외워서 합니까」128쪽, 130쪽)

 

 

 * 오락 일변도의 시청률 경쟁은 결국 비판적 감시 또는 견제 역할이라는 공공성을 중시하는 방송의 이념적 목적지마저도 그 생존의 싸움터에 매몰시켜 버리거나, 아니면 신기루처럼 날려 버릴 것이다. 우리가 진실로 우려하는 것은 이것이다. (「문화관은 슈퍼마켓이 될 수 없다」141쪽)

 

 

 * 문화방송 뒤쪽 아파트 상가의 패스트푸드점 주인 아주머니는 요즘도 날 잘 알아보지 못한다. 못하는 것이 아니라 않는 것이란 표현이 맞겠다. 기억력 탓이 아니니까...

연전에 동료들과 그 집에 처음 들렀을 때 주인 아주머니는 날 보더니 “얼굴이 어디서 본 것 같기는 한데” 했다. 나는 쑥스럽기도 하여 “이 집에 몇 번 왔었지요”하고 넘어가 버렸다. 그러자 아주머니는 “아, 그랬었지 참”하고 되받는 것이었다. 그냥 웃고 지나갈 참이었는데 우리 중 한 사람이 장난기로 말을 했다.

“아주머니 이 사람 모르시겠어요? 테레비에 나오는 사람인데.”

“테레비?”

“예. 저녁 때 채널 11번 틀면 이 사람 나와요.”

“아, 그래요? 무슨 시간에?”

“뉴스시간에요. 아나운서거든요.”

나는 옆에 앉아 있기가 영 곤혹스러워 이 친구를 연신 쿡쿡 찌르고 있었는데, 아주머니의 다음 얘기를 듣고는 파안대소하지 않을 수 없었다.

“11번이면, 그러니까 그게 TBC지?”

세상에 웬 TBC란 말인가. 십여 년 전에 없어진 동양방송이 멀리도 아니고 문화방송 바로 뒤에서 장사를 하고 있는 아주머니를 통해. 채널 11로 부활한 것이다. (「아나운서, 팔방미인 박명시대」142~143쪽)

 

- comment : 만약 아주머니가 지금 살아 있다고 가정하고 TBC가 채널 15로 부활한 JTBC 뉴스9를 진행하는 손 앵커를 브라운관에서 본다면 무슨 느낌이 들까? 아니, 사실 이 글의 문장만 손 앵커에게 보여주고 싶다. 본인도 20년 전에 만난 아주머니의 말씀처럼 중앙일보의 앞 글자 이니셜 ‘J'가 붙은 TBC에서 일하게 된 운명에 파안대소했을 것이다.

 

 

* 우리가 진실로 부끄러워해야 할 것은 무엇인가. 광기 어린 시대에 부화뇌동의 차원을 넘어 상쇠 노릇을 한 것만이 부끄러운 것인가. 아닐 것이다. 말할 수 있는 시기에마저도 침묵한 것 역시 부끄러운 일이다. (「잉크물에 담긴 63빌딩」168쪽)

 

- comment : 지금은 말할 수 있는 시기에 침묵하지 않는 사회가 되었다. 그러나 말할 수 있는 시기를 부정하고, 침묵하기를 강요하는 세력이 존재하니, 이마저도 부끄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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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ren 2014-01-14 10: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손석희 아나운서가 책을 낸 적도 있었군요. 그때나 지금이나 그 사람은 여전히 담백한 모습이라 참 좋아 보여요~

cyrus 2014-01-16 23:19   좋아요 0 | URL
네, 그 날 손석희 아나운서를 직접 가까이서 처음 만났는데요, 역시 정직하고 바른 이미지는 평소에도 여전했어요. 그리고 뉴스와 언론에 대한 소신이 변하지 않았고요.

hnine 2014-01-14 13: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이 이제는 헌책방에서 구할 수 있는 책이 되었군요.
전 이 책 나온지 얼마 안되어 도서관에서 빌려서 읽었어요. 그때는 그저 인기 앵커라고만 생각했지 20년 후 지금과 같은 지명도를 같는 인물이 될지 짐작도 못했어요. 20년이 참 훌쩍 간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cyrus 2014-01-16 23:20   좋아요 0 | URL
20년 전에 나온 책을 썼을 당시에도 손석희 아나운서 본인도 그렇고, 그 누구도 훗날 세상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언론인이 될 지 예상하지 못했을거에요.
 
고장 난 거대 기업 - 우리 시대 기업에 따뜻한 심장 달기
이영면 외 지음, 좋은기업센터 기획 / 양철북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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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cene #1  엄마의 마음으로 건강을 생각해?

 

모유 대용식인 분유와 이유식, 밀크 초콜릿과 인스턴트 커피 등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자주 접하는 식품들을 가장 처음 만든 회사는 어디일까.

 

바로 세계 최대 식품기업인 스위스의 네슬레다. 네슬레는 ‘어머니의 마음으로 고객들의 건강을 생각한다’는 슬로건과 함께 식품회사로서의 명성을 수백 년간이나 이어왔다. 네슬레는 환경에 대한 철학, 고객 감동, 사회공헌, 윤리경영 등을 통해 스위스를 대표하는 기업으로 손색이 없는 탄탄한 지명도를 쌓아왔다. 특히 네슬레는 전 세계 글로벌 기업 가운데 가장 철저하게 ‘세계화’와 ‘현지화’에 성공한 기업으로 평가받고 있으며, 매출의 90% 이상을 해외에서 올리고 있다.

 

그러나 네슬레가 탄탄대로만을 걸어온 것은 아니다. 네슬레는 1960년대 말부터 1970년대 초 아프리카 및 저개발국 유아들의 영양실조 및 사망 사건이 다국적 기업들이 판매하는 유아식과 깊은 관계가 있다는 여러 증거들이 제시되면서 유아식 위해 논쟁에 휘말렸다.

 

1970년대 아프리카 전역에서 수천 명의 아기들이 죽어 나갔는데 네슬레의 마케팅 때문이었다. 네슬레는 분유를 더 많이 팔기 위해 아프리카 엄마들에게 모유 수유는 구시대적이고 불편하다고 선전했지만 비싼 가격에 따른 부작용과 오염된 물 때문에 수천 명의 아이들이 설사로, 이질로, 전염병으로, 영양실조로 죽어 갔다. 네슬레는 초반에는 오염된 물이 문제였을 뿐 자사의 제품 품질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강조하며 책임을 회피했다. 영국의 시민단체 ‘워 온 원트(War on Want)’의 폭로를 시작으로 10년 동안 이어진 전 세계적인 불매운동을 겪고 나서야 네슬레는 손을 들었다.

 

 

 

 Scene #2  소비자에게 영혼이 있다면, 기업은 심장이 필요하다

 

네슬레의 사례는 그저 외국 나라에 발생한 이야기만은 아니다. 네슬레가 아프리카로 진출하던 시기보다 경제의 글로벌화는 점점 가속화되고 있다. 우리 기업의 글로벌 활동도 빠른 속도로 확대되고 있다. 그래서 해외진출 한국기업이 현지 지역사회에서 야기하는 각종 문제들에 대한 국제적 비난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해외에 진출한 한국 굴지의 대기업들이 현지 지역주민들과의 갈등과 인권침해 논란에 휩싸이거나 노동착취, 인종차별, 성차별, 소비자 기만 등으로 잇달아 제소되고 있다. 이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다국적기업 가이드라인, 국제노동기구(ILO)의 노동규약 등 관련된 국제적 규범에 반하는 행위들이다. 해외진출 기업의 사회적 책임(CSR) 이행 여부는 해당 기업이 현지에서 지속가능한 경영활동을 할 수 있는지의 여부뿐만 아니라 나라의 국격과도 직결된다.

 

해외에 진출하는 기업만 그러한가. 우리나라 기업도 마찬가지다. 작년에 떠들썩했던 남양유업 사태 외에도 롯데마트, 세븐일레븐 등 여러 기업에서 나타나는 ‘갑의 횡포’ 사례를 접하면서 매일 수많은 제품을 구입하며 살아야 하는 소비자들은 과연 어떤 기업의 제품을 선택해야 하는지 혼란스럽다.

 

기업의 갑을 관계와 함께 기업 평판이 중요한 화두가 되고 있다. 그동안 기업의 목표는 이익 극대화로 보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점차 사회적 책임을 중시해야 한다는 시각이 커지고 있다. 기업은 단기 이익만을 위해 사회적 책임을 등한시하면 안 된다.

 

기업이 잘못을 저지르면 소비자들이 피해를 보게 된다. 그래서 역사적으로 기업의 잘못에는 소비자들의 항의가 이어졌다. 그 소비자는 개인이었고, 시민단체였고, 언론이었고, 때론 비정부국제기구(NGO)였다. 이들은 기업의 잘못을 따졌고 기업에게 책임을 물었다. 현대 사회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거대 기업들의 횡포를 막아내고 시민의 권리를 지켜낼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러한 시민의 참여와 행동이었다.

 

소비자의 시각이 바뀌면서 기업의 목표도 바뀌고 있다. 단순히 영리를 추구하는 것 외에 기업의 사회적 책임에 충실해야 기업이 오래 살아남을 수 있다. 기업을 둘러싼 이해 관계자가 많아지면서 다양한 이해 당사자의 요구를 모두 만족시켜야 한다. 소비자는 물론 하도급 업자, 회사에서 일하는 근로자 그리고 회사를 둘러싼 많은 사람 입장에서 회사를 경영해야 한다. 회사 입장에서만 경영하게 되면 소비자가 불매운동을 벌일 수 있다.

 

미국의 경영학자 필립 코틀러는 “소비자가 사회적 가치를 중시하는 ‘영혼(Human Spirit)’을 가진 시장참여자로 진화하고 있기 때문에 소비자에게 신뢰를 얻고 감동을 주려면 사회공헌에서도 ‘영혼’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소비자에게 영혼이 있다면 이에 맞춰 기업은 사회적 가치를 담은 영혼을 읽어내고 받아들일 수 있는 따뜻한 심장이 필요하다. 기업에 따뜻한 심장을 있다면 기업 자신들이 저지른 잘못과 과오에 무덤덤하고 회피하려는 대응 방식을 탈피할 수 있다.

 

 

 

 Scene #3  기업의 사회적 책임, 선택이 아닌 필수

 

일찍이 다윈은 ‘종의 기원’을 통해 인간을 포함하여 현존하는 모든 동물은 강하거나 똑똑해서가 아니라 환경변화에 잘 적응해 온 때문이라고 하였다. 세월을 달리하면서 인간이 살아가는 방법도 많은 변화가 있었지만 기업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전 세계 CEO들로부터 귀감이 되고 있는 경영 구루 짐 콜린스의 ‘Good to Great’ (착한 기업을 넘어 위대한 기업으로)에서 보듯이 위대한 기업이 돼야 지속가능 기업이 될 수 있었다. 그러면서 좋은 기업에 만족해서는 안 된다는 뜻으로 ‘좋은 것은 위대한 것의 적’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지금은 어떤가. 그동안 상황이 바뀌어 지속가능 기업이 되자면 위대한 기업을 넘어 착한 기업이 돼야 한다고 한다. 이처럼 기업도 여건변화에 따라 살아남자면 계속 진화를 해야 하는 것이다. ‘착한 기업’이 되는 조건은 어렵지 않다. ‘윤리’와 ‘사회적 책임’. 기업이 이 두 가지 가치를 잊지 않으면 된다.

 

윤리경영은 회사 경영 및 기업 활동 과정에서 기업 윤리를 최우선 가치로 삼고, 투명하고 공정하며 합리적인 업무 수행을 추구한다. 최근 높아진 사회의식과 동반성장에 대한 관심, 다양한 채널을 통한 재능 기부나 물질적 기부로 인한 기업 이미지 제고 등이 맞물려 윤리경영에 대한 중요성이 더욱 부각되고 있다. 앞으로 윤리경영을 못하는 기업들은 시장에서 도태될 수도 있을 것이다. 이제 기업의 사회적 책임은 선택이 아니다. 필수 요소다.

 

기업의 사회적 책임은 이윤을 창출한 이후의 사항이 아니라 이윤창출을 위한 필수요소가 될 것이다. 이미 많은 기업들이 단순한 나눔과 자선의 차원을 넘어선 진정한 사회적 책임을 실천함으로써 소비자들로부터 신뢰를 받고 기업 이미지도 향상되어서 끊임없이 성장하고 있는 것을 보면, 기업의 사회적 책임은 기업의 발전과 무관하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 기업들도 착한 기업이 되기 위한 노력을 많이 하고 있다. 그러나 기업에 대한 이미지가 개선되지 않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특히 최근에 와서는 사회적 불평등 내지 경제민주화의 책임을 상당 부분 기업의 책임으로 돌리는 상황이다. 여기에 기업으로서는 착한 기업 스트레스가 있다. ‘무엇을 할까’에서부터 ‘더 이상 어떻게 하란 말이냐’까지 기업의 갖가지 고민도 이해는 간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기업의 속내에 진정성이 약하다고 생각한다. 진심을 담아서 지속적으로 하라는 식이다. 한마디로 ‘착해 보이려 하지 말고 착해져라’고 한다.

 

그러나 기업이 다양한 사회공헌활동을 하고 윤리경영을 적극 실현한다고 해도 가장 중요한 것은 소비자의 역할이다. 기업이 진정으로 착한 기업이 되기 위해서는 기업 혼자의 노력으로는 어렵다. 소비자도 함께 착해져야 한다. 이제 품질과 가격만 우수하고 착하지 않은 기업은 소비자가 외면해야 한다. 그렇게 되면 기업도 이윤 추구에만 몰두하고 착한 기업이 되는 노력을 겉치레로 하지는 않을 것이다.

 

오늘보다 나은 더 좋은 세상은 이처럼 소비자가 착해짐으로써 가능해진다. 그 기업의 제품을 소비자들이 선택함과 동시에 윤리경영을 지원하고 지지해야 한다. 즉 소비자들의 윤리적 소비의 실천이 뒷받침돼야 윤리경영이 실질적으로 실현될 수 있는 것이다. 착한 소비자가 되는 것은 물론 착한 기업을 만드는 것도 우리 모두의 몫이다. 요즘 ‘안녕들 하십니까?’에서 보는 것처럼 이래저래 우리가 할 일이 참 많은 것 같다. 이제 기업에게 착한 심장을 달 것을 주문하지 말고, 그들 스스로 심장을 달 수 있도록 관심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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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int236 2014-01-09 10: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중요한 것은 CSR도 좋지만 그 이전에 기업 구성원인 자회사의 노동자에 대한 최소한의 대우라는 것이지요. 그것이 선행되지 않고 CSR을 외쳐봐야 사람들이 진심으로 듣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물론 삼성은 이런 것도 없지만 말입니다.

cyrus 2014-01-13 22:20   좋아요 0 | URL
글을 쓰다보니까 노동자 대우에 관한 내용을 언급하지 못했네요.. 그것도 참 중요한 문제죠. 이 책에서도 노동자 부당 대우를 한 기업 사례가 나오거든요. 세인트님 말씀처럼 CSR은 강조하면서도 정작 기업을 움직이는 진짜 구성원인 노동자를 대우하는 것을 무시하는 기업의 행태를 보면 모순적이기도 합니다.
 
쉽게 쓴 후성유전학 - 21세기를 바꿀 새로운 유전학을 만나다
리처드 C. 프랜시스 지음, 김명남 옮김 / 시공사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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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cene #1  환경으로 DNA를 바꾸다

 

우리 몸에서 얼마나 많은 것이 유전자로 결정될까. 또 얼마나 많은 것이 환경이나 생활방식의 영향을 받을까. 흔히 사람은 타고난 모습대로 산다고 한다. 부모를 꼭 닮은 붕어빵 아이의 모습을 보면 특히 그런 생각이 든다. 누군가에게 유전물질을 물려주는 것은 자신의 생명 특성과 성질 대부분, 즉 DNA로 이뤄진 유전자 텍스트를 전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람들은 타고 난 자신의 모습이 탐탁지 않을 때, 흔히 DNA 탓으로 돌리거나 생겨먹은 대로 살 수밖에 없다고 자포자기한다. 그야말로 ‘잘 되면 내 탓, 못 되면 조상 탓’인 셈이다. 실제로 많은 유전학자들이 성격이나 체질 등은 유전적으로 미리 결정돼 있다고 주장해왔다. 생명체는 모두 DNA의 꼭두각시라는 것이다. 그래서 1953년 제임스 왓슨과 프랜시스 크릭이 DNA 이중나선 구조를 밝혀내자, 사람들은 이제 곧 베일 속에 가려져 있던 생명의 신비가 드러날 것이라며 흥분했다. 하지만 세월이 지나면서 오히려 ‘DNA가 생명체의 운명을 결정한다’는 가설에 오류가 많다는 사실이 속속 드러나고 있다.

 

특히 1970년대 등장한 ‘후성유전학’은 운명결정론을 정면으로 반박하고 있다. 후성유전학자들도 생물학적 운명, 즉 육체와 정신을 주관하는 유전 프로그램이 있다는 데에는 동의한다. 다만 유전에 관한 숙명론에 반기를 든 것이다.

 

2009년에는 최초의 후성유전자 지도가 완성됨으로써 인간의 유전구조를 보다 깊이 이해할 수 있게 됐다. 우리의 생활습관, 먹는 음식, 우리가 노출된 오염물질, 심지어 친구관계 등이 유전자의 발현에 변화를 가져온다는 메커니즘은, 인간이 자신의 운명을 바꿀 수 있다는 희망을 안겨주는 것도 사실이다.

 

 

 

 Scene #2  후성유전체가 우리 몸에게 전하는 것

 

후성유전학은 분자수준에서 일어나는 유전현상을 연구하는 새로운 분야이기 때문에 아무래도 전문용어도 그렇고, 어려울 수 있는 주제이기도 하다. 그래도 요즘 ‘흥분을 주는 과학’으로 불리며 그 가치가 높아지고 있는 후성유전자를 다양한 사례를 통해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돕는다는 점이 이 책의 가장 큰 매력이다. 제2차 세계대전 중 네덜란드 대기근을 통해 후성유전적 영향의 역사적 사건을 파헤치는 식이다. 과학자들은 네덜란드 대기근을 겪은 특정 연구 집단을 비교함으로써 어머니의 뱃속에서 기근을 겪은 사람뿐 아니라 그 사람의 자식에게까지 기근의 영향력이 미친다는 사실을 찾아냈다. 비유전자적 유전방식이 건강에 영향을 미친다는 충격적 내용이다.

 

후성유전학은 DNA에 달라붙는 생화학물질 ‘메틸기’의 패턴에 의해 유전형과는 다른 표현형의 변이가 나타나고 그것이 대물림된다고 본다. 아구티라는 쥐의 털 색깔에 관한 연구결과는 메틸화에 의한 대물림 현상이 포유류에게도 확장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결정적 증거다. 유전적으로 동일하지만, 아구티 유전자의 메틸화 패턴이 다른 부모에게서는 새끼들도 다양한 색깔을 지닌 채 태어난다.

 

세대를 초월한 후성유전은 생명의 연쇄 고리가 대를 넘어 계속 이어진다는 점을 깨닫게 한다. 가장 직접적인 것이 게놈 각인이다. 이는 부모가 갖고 있던 후성유전적 표지가 자손에게도 상당히 충실하게 재현되는 현상이다. 저자에 따르면 스웨덴의 외딴 동네에 사는 남자가 사춘기에 섭취했던 칼로리조차 그 손자들의 건강과 연관관계가 있다. 사춘기 이전에 기근을 겪었던 남자의 친손자들은 기근을 겪지 않은 남자의 친손자들보다 심장혈관 질환에 더 취약했다는 것이다.

 

생활방식이 미치는 환경적 영향이 우리 몸의 세포에 새겨지기 때문에 유전형질에는 포함되어 있지 않은 분자생물학적 정보들을 파악할 수 있다. 후성유전체는 유전체에게 잠재력 중에 무엇을 활용해야 할지 말해주는 존재다. 즉 세포가 빠르게 노화할지, 느리게 노화할지, 쉽게 질병에 걸릴지를 결정하기 때문에 생활방식 영양 인간관계를 개선하면 유전자를 조종해 체질 신진대사 인성을 바꿀 수 있다.

 

특히 후성유전학이 최근 과학계에서 각광받고 있는 이유는 암 치료에 혁명을 일으킬 잠재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연구에 따르면 암세포의 유전자들은 메틸화 감소를 포함하여 메틸화 패턴이 독특하게 바뀌어 있다고 한다. 이런 결과로 정상상태에서 억제되던 유전자들이 활성화되는데, 종양억제 유전자도 여기에 포함된다. 이런 주장은 혈액암의 일종인 백혈병 세포에 후성유전적으로 개입하여 정상 백혈구처럼 행동하도록 한 연구로 뒷받침되는데, 주목할 점은 백혈병세포가 정상화된 다음에도 염색체 재배열 상태는 되돌려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후성염색체의 시각에서 본다면 우리가 지금까지 알고 있는 발암물질들을 염색체의 이상을 일으키는 발암물질과 후성유전적 변화를 일으키는 발암물질로 구분하는 방식으로 완전히 재분류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후성유전적 변화는 가역적이기 때문이다.

 

 

 

 Scene #3  더 많은 연구가 필요한 후성유전학

 

후성유전학의 효과를 두고 저자는 다미앵 신부의 기적을 재평가해야 할지도 모른다고 한다. 벨기에 출신의 다미앵 신부는 하와이 몰로카이 섬에서 한센병 환자들을 위하여 생을 바친 선교사다. 다미앵 신부가 성인위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은 그의 감동적인 선교활동에 더하여 전이암을 앓던 오드리 토구치라는 하와이 여성이 그의 무덤에 가서 암을 치료해달라고 기도했더니 암이 싹 나았다는 기적 같은 일이 인정되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바로 이 점에 대하여 저자는 암의 후성유전학적 관점, 특히 미세환경을 중시하는 관점에서 본다면 다미앵 신부를 성인으로 인정할 근거가 약해진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즉 환자의 면역체계가 알맞은 순간에 환자의 구조에 나선 것일 수도 있다는 점인데, 그렇다면 환자의 지극한 소망을 담은 기도가 그녀의 암세포를 둘러싼 미세환경을 바꾸어놓은 계기가 되었던 것이라고 볼 수도 있지 않을까? 모든 암환자의 기도가 같은 효과를 나타내는 것은 아닐 터이니 말이다.

 

요즘도 우리 주변에서 보면 제대로 입증되지 않은 암치료법을 비싼 값으로 파는 사례가 늘고 있다. 이런 사례에서는 암이 완치되었다고 주장하는 환자의 경험담을 입증자료로 내놓고 있는 공통점이 있다. 물론 완치된 환자의 경험이 틀렸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충분히 그럴 수 있다.

 

하지만 몇 건의 사례를 일반화하는 것은 매우 위험하며 무조건 낙관적으로 볼 수 없다. 누군가에게는 치료효과를 나타냈는지 몰라도, 누구에게나 치료효과를 나타내지 못할 가능성이 높은 치료법을 파는 것이 틀렸다는 것이다. 어쩌면 완치된 사례는 후성유전학적 관점에서 오비이락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환경에 영향 받은 후성유전에 의한 유전자 발현조절의 이상이 암, 치매, 정신분열증, 당뇨, 심혈관계 질환 등의 다양한 질병과 밀접한 관계가 있음이 보고됐다. 그러나 이러한 질병을 유발하도록 하는 후성유전학적 변화가 어떻게 일어나는지에 관한 정확한 조절기전과 환경적 요소들에 대한 연구는 매우 미흡하다. 후성유전적 과정에도 무작위적 요소가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후성유전학이 우리 운명을 한 번 결정해주는 진정한 맞춤 의학으로 보기에는 아직은 멀었다.

 

현재 생물학은 후성유전학이라는 학문에 의해 새롭게 변화하고 있는지 모른다. 유전자가 모든 것을 결정한다는 기존 관점들이 재고되고 있다. 우리 몸에 있는 유전자도 중요하지만, 환경 또한 중요하다. 우리 신체와 정신이 환경에 맞춰 어떻게 변화시키느냐에 따라서 건강한 삶이 결정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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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ren 2014-01-08 00: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후성유전학이라는 학문 분야가 있군요. cyrus 님의 충분한 설명 덕분에 쉽게 공감할 수 있는 내용이다 싶군요.

저는 개인적으로 몇 달 전에 '유전자공학'을 이용해 불치병을 치료하는 '바이오 생명공학 회사'를 직접 방문해 본 적이 있는데 '유전공학'의 발전 속도가 정말 놀라울 정도더라구요. 제가 가봤던 회사의 설립자 또한 그 분야에서 세계적인 권위를 갖고 계신 분이던데(MIT에서 석사, 하버드에서 석사, 옥스퍼드에서 박사, MIT에서 박사후 과정을 거쳐 하버드 의대에서 교수 생활을 하다가 모교로 돌아와 서울대 의대 교수로 재직중인 분이더군요) 머지않아 획기적인 치료제들을 여럿 출시할 가능성도 있어 보이더라구요.

cyrus 2014-01-08 20:31   좋아요 0 | URL
처음에 읽기 시작할 때 조금은 어려웠어요. 유전학을 이해하려면 유전자의 구조와 성질을 먼저 알고 있어야하거든요. 다행히 책에 유전자에 관한 기본적인 내용을 먼저 알려주고 설명을 시작해요. oren님이 방문하신 곳에서도 후성유전학과 관련된 실험연구가 진행되고 있을 것 같아요. 그곳에서 과학이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많이 발달되고 있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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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감정 독재』 강준만 / 인물과사상사

 

 

인간은 이성적 동물이라고 하지만 감정에 쉽게 휘둘리는 존재다. 격해진 지인을 보면 흔히 이렇게 충고하곤 한다. '감정적으로 대응하지 마! 그래 봐야 너만 손해야.' 한데 인간은 늘 감정의 지배를 받는다.

 

 

현대 사회는 이성의 자리가 점점 축소되고 있다. 원인은 인터넷과 SNS다. 현대 커뮤니케이션 혁명인 이들은 빠른 속도를 요구한다. 속도는 논리적으로 분석해 다소 시간이 걸리는 이성보다는 즉각적인 감정 배출을 요구한다. ‘그 결과 인간은 과거보다 현저하게 견고해진 감정 독재 하에 살게 됐다’는 게 강준만 교수의 주장이다. 『감정 독재』의 저자 강준만 교수는 일상에서 접하기 쉬운 감정 독재에 해당하는 사례 50개를 제시하고 다양한 이론을 활용해 분석했다.

 

 

 

 

 

 

 

 

 

 

 

 

 

 

 

 

 

 * 『시인을 체포하라』 로버트 단턴 / 문학과지성사

 

 

1749년 봄, 루이 15세를 비방하는 시가 거리에 나돌자 시인 체포령이 내려진다. 대학생과 하급 성직자 등 14명이 바스티유로 잡혀 들어간다. 이른바 '14인 사건'이다. 왕을 조롱하는 시가 당시로선 왕권모독이나 역모에 해당됐을 터였다. 하지만 체포된 사람들은 혁명이나 권력투쟁과는 거리가 먼 사람들이었음에도 경찰은 14인을 체포하는 데 왜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쏟아 부었을까. 흥미롭게도 왕을 비방하는 내용이 적힌 시 한 편의 파급력은 어마어마했다. 백성들은 이런 시를 주고받으며 권력을 풍자하고 비판했으니까.

 

 

이 과정을 통해 저자는 당대의 의사소통망을 복원한다. 문맹률이 엄청나게 높은 구어 중심의 사회에서 정보가 흐르는 방식을 탐색하고 여론의 정의에 대해 다시금 묻는다. 프랑스 미시사 연구가로 알려진 로버트 단턴의 신작은 대중 사이로 사건과 정보가 유통되는 의사소통 구조와 그 과정의 역사를 오늘날 인터넷, 스마트폰 그리고 SNS을 앞세운 정보사회와 비교해볼 수 있을 것이다.

 

 

 

 

 

 

 

 

 

 

 

 

 

 

 

 

 

 * 『사물 판독기』 반이정 / 세미콜론

 

 

미술평론가가 본 사물과 예술 사이. 미술평론가이자 파워블로거인 반이정이 우리 주변에 흔히 보는 사물과 현상과의 교감에 대한 논평과 이미지를 수록하고 있는 사물 사전이다. 평소 눈여겨보지 않던 사물을 남다른 관점으로 환기시켜 사물과 예술 사이에 대한 짧은 비평을 풀어놓는다. 의외로 고고하면서도 어렵게 느껴지던 예술이 어쩌면 우리 일상 가까이에 있을 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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