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관집 이층 창비시선 370
신경림 지음 / 창비 / 2014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동네 서점에 시집을 사러 갔더니 매대에 신경림 시인의 신작 시집이 없었다. 지방도시라서 아직 시집이 오지 않았나 해서 서점 주인장에게 여쭈어봤다. 보내온 시집이 다 팔려 재고가 없다고 한다. 질박한 서정과 꾸밈없는 언어로 시대의 상처와 아픔을 다독이는 시를 써온 그를 지역의 독자들도 잊지 않았던 것이다. 기쁜 마음으로 다른 서점으로 가서 시집을 샀다.

 

올해 여든, 내년이면 환갑을 맞는 원로 시인의 문장은 여전히 따뜻했다. 언 손을 녹일 수 있는 것이 작은 핫팩이라면, 시인의 시집은 겨울바람 같은 냉소에 얼얼해진 심장을 녹이는 따뜻한 문장들로 채운 핫팩이다. 하룻저녁 내내 아껴가며 읽은 시집에는 사실 새로울 것도, 유별난 것도 없었다. 현란한 비유도 없고, 어려운 축약도 없다.

 

 

아무래도 나는 늘 음지에 서 있었던 것 같다

개선하는 씨름꾼을 따라가며 환호하는 대신

패배한 장사 편에 서서 주먹을 부르쥐었고

몇십만이 모이는 유세장을 마다하고

코흘리개만 모아놓은 초라한 후보 앞에서 갈채했다

그래서 나는 슬프고 안타깝고 아쉬웠지만

나를 불행하다고 생각한 일이 없다

나는 그러면서 행복했고

사람 사는 게 다 그러려니 여겼다

쓰러진 것들의 조각난 꿈을 이어주는

큰 손이 있다고 결코 믿지 않으면서도

 

- 「쓰러진 것들을 위하여」 (32쪽) -

 

 

이 시는 시인이 1993년 펴낸 시집 『쓰러진 자의 꿈』에 실으려다 마음에 차지 않아 빼 놓았다가 다시 써 낸 것이다. 그래도 시인은 성에 차지 않는다고 한다. 그러나 이 시는 시인 신경림이 아직 살아 있음을 독자들 앞에서 당당하게 보여 준다. 그의 삶은 중국 시성(詩聖) 두보를 닮았다. 인간의 고통를 늘 가슴에 품어 연민의 시어로 위로하고, 평탄치 않은 삶의 불우에 매몰되지 않아 '우리시대의 두보'라 불린다.

 

 

나는 깨지 않으리 이 꿈에서,

비록 이 꿈이 죽음으로 이어지는 것일지라도.

 

- 「몽유도원」 마지막 부분 (39쪽) -

 

 

시인은 이미 인생의 먼 길을 와서 ‘사불휴(死不休, 시로 독자들을 감동시키지 못하면 죽어서도 쉬지 않겠다는 두보의 말)’의 꿈을 이야기하고 있다. “아름다운 시는 오만과 독선을 버린 시”라는 팔순 시인의 시집을 읽어 보면 오히려 그의 눈이 맑아지고 귀는 순해졌다는 것을 읽을 수 있다.

 

 

이웃 가게들이 다 불을 끄고 문을 닫고 난 뒤까지도 그애는 책을 읽거나 수를 놓으면서 점방에 앉아 있었다. 내가 멀리서 바라보며 서 있는 학교 마당가에는 하얀 찔레꽃이 피어 있었다. 찔레꽃 향기는 그애한테서 바람을 타고 길을 건넜다.

 

꽃이 지고 찔레가 여물고 빨간 열매가 맺히기 전에 전쟁이 나고 그애네 가게는 문이 닫혔다. 그애가 간 곳을 아는 사람은 없었다.

 

오랫동안 그애를 찾아 헤매었나보다. 그리고 언제부턴가 그애가 보이기 시작했다. 강나루 분교에서. 아이들 앞에서 날렵하게 몸을 날리는 그애가 보였다. 산골읍 우체국에서, 두꺼운 봉투에 우표를 붙이는 그애가 보였다. 활석 광산 뙤약볕 아래서, 힘겹게 돌을 깨는 그애가 보였다. 서울의 뒷골목에서, 항구의 술집에서, 읍내의 건어물점에서, 그애를 거듭 보면서 세월은 가고, 나는 늙었다. 엄마가 되어 있는, 할머니가 되어 있는, 아직도 나를 잊지 않고 있는 그애를 보면서 세월은 가고, 나는 늙었다.

 

하얀 찔레꽃은 피고,

또 지고.

 

- 「찔레꽃은 피고」 (22~23쪽) -

 

 

한국인의 정서에 각인된 찔레꽃의 이미지는 순박, 소박, 고향, 슬픔이다. 때로는 그 옛날 어린 시절 가난한 고향의 산야에서 만났던 순한 첫사랑의 이미지이기도 하다. 그래서일까. 유난히 찔레꽃을 소재로 만들어진 노래도 많다. 향기가 진해서 오히려 서러운 찔레꽃! 그래서 장사익은 목이 터지도록 “찔레꽃 향기는 너무 슬퍼요”라고 노래를 불렀던 것일까?

 

 

 

 

장사익의 찔레꽃은 노래를 듣고 있는 당신이다. 그 누구도 아닌 바로 '당신'이야말로 순박한 찔레꽃이라고 자꾸 최면을 걸어쌓니 거기에 안 넘어가고 배기겠는가. 신경림의 찔레꽃은 순박했던 첫사랑을 가슴 속에 품은 당신이다.

 

찔레꽃을 담은 장사익은 찔레꽃 가시로 우리들의 가슴을 찔렀다면, 시인은 찔레꽃 향기로 세월의 모진 풍상에 찌든 우리들의 가슴을 살짝 건드린다. 몇 달 뒤에 피게 될, 세월에 잊고 있었던 그 아름다운 찔레꽃 향기의 감각을 살린다.  

 

찔레꽃이 슬픔의 이미지로 한국인들에게 각인된 것은 전쟁이 갈라놓은 생이별, 그리고 이루어지지 못한 첫사랑에 대한 아련한 그리움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저 홀로 고고하게 하얗게 얼굴을 내밀고 있는 찔레꽃. 세월의 바람에 첫사랑의 기억과 함께 점점 희미해져만 가는 찔레꽃 향기는 너무 슬프다. 한국인의 감성 유전자에 그렇게 새겨놓은 것일 게다.

 

 

그의 가난과 추위가 어디 그만의 것이랴.

그는 좁은 어깨와 야윈 가슴으로 나의 고통까지 떠안고

역 대합실에 신문지를 덮고 누워 있다.

아무도 그를 눈여겨보지 않는다.

간혹 스치는 것은 모멸과 미혹의 눈길뿐

마침내 그는 대합실에서도 쫓겨나 거리를 방황하게 한다.

 

찬 바람이 불고 눈밭이 치는 날 그의 영혼은 지상에서 사라질 것이다.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를 걸어올라가 못 박히는 대신

그의 육신은 멀리 내쫓겨 광야에서 눈사람이 되겠지만.

 

그 언 상처에 손을 넣어보지도 않고도

사람들은 그가 부활하리라는 것을 의심치 않을 것이다.

다시 대합실에 신문지를 덮고 그들을 대신해서 누워 있으리라는 걸.

 

그들의 아픔, 그들의 슬픔을 모두 끌어안고서.

 

- 「나의 예수」 (85쪽) -

 

 

석가모니도, 예수도 길에서 태어나고 길에서 생을 마감했다. 머리가 아니라 몸으로 보여 주었던 그 삶은 역시 그들이 가려는 ‘사람의 길, 생명의 길, 평화의 길’이다. 시인은 서울에 예수가 있다고 믿는다. 한 달 전에 이성의 지식인이라는 사람은 집 없는 사람들을 '좀비'라고 돌직구 같은 말을 했다면, 감성의 지식인은 이 세상의 고통을 떠안고 아파하는 '예수'라고 표현했다.

 

비탄과 절망의 현실을 뻔히 눈뜨고 보면서도 도리어 선을 긋고 침묵하고 고개 돌리고 저 멀리 비켜간다면, 자기 말과 행위의 진정성과 인간애를 진실하게 살피며 새롭게 살기를 도모하지 않는다면, 과연 이 시대에 소통을 갈구하는 것은 잘한 일일까? 상처 입고 고통 받는 모든 존재들을 외면하는 것은 소통이라고 할 수 없다. 마음으로 통하는 소통이 아니라 냉소적인 외면일 뿐이다. ‘나의 예수’는 이 땅의 고통 받는 이들을 향해 연민의 손길마저 내밀지 못하는 이 시대, 이 땅에서 ‘가난과 추위’와 동거하는 그들의 아픔, 슬픔을 끌어안을 수 있는지 독자들에게 자문하게 만든다.

 

시인은 언어를 잃어도 맨 몸뚱어리로 세상에 부딪히는 사람들이다. ‘늙은 시인’이라면 더 그렇다. 하지만 우리 나이로 팔순을 맞이한 시인의 나이를 감안하면 새로운 시집 출간을 향한 축복보다 “이번이 마지막 작품이 아닐까?”하는 불안감이 앞서는 마음은 어쩔 수 없다. 시인이 말미에 남긴 “얼마 남지 않은 내일에 대한 꿈도 꾸고 내가 사라지고 없을 세상에 대한 꿈도 꾼다”는 고백은 그래서 더 애틋하게 다가온다. 추억과 따뜻함 그리고 인간애를 동반한 애틋함이다.

 

짧은 인생 동안 정들었던 수많은 거리와 인연을 다 음미하고 또 가슴에다 남겨놓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정말 소중한 것은 적어도 가슴 한 켠에 남아서 가끔 슬퍼지거나 외로워질 때 순간순간 떠오르게 된다. 흑백사진처럼 화려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남루하지는 않고, 조금은 코끝이 찡해지는 그런 순간들이다. 하지만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그 시절이기에 시인은 시로 그 시절 그 사람들을 다시 불러내 살려낸다. 망각의 강 속에서 시인은 추억의 시어(詩語)를 건진다. 추억의 시어는 어느새 냉소로 트다 못해 갈라진 우리들의 마음에 바르는 ‘희망’이라는 연고가 된다. 이 ‘희망’의 연고가 세상과 세월의 풍파 앞에 ‘쓰러진 자들’의 아픔, 슬픔 모두 끌어안을 수 있기를.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시인을 체포하라]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시인을 체포하라 - 14인 사건을 통해 보는 18세기 파리의 의사소통망
로버트 단턴 지음, 김지혜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3년 12월
평점 :
품절


 

 

Scene #1  동요 속에 숨겨진 민중의 소망

 

‘맛동(薯童, 서동) 도령’. 어머니가 용의 정기를 받아 낳았고, 익산에서 자랐다. 생계를 위해 늘 마를 캐 팔러 다녔기에 사람들은 그렇게 불렀다. 때는 6세기말. 신라 26대 진평왕에게는 아름답기로 소문난 셋째 딸 선화 공주가 있었다. 소문은 이웃나라 산골에 사는 서동의 귀에도 들렸다. 서동은 스님으로 변장해 서라벌로 들어간다. 그리고 아이들에게 마를 공짜로 나눠주는 대신, 자신이 직접 만든 동요 하나를 부르게 한다. 일연의 『삼국유사』가 전하는 가장 오래된 4구체 향가인 ‘서동요’이다.

 

‘선화 공주님은 / 남몰래 정을 통해 두고 / 맛동 도련님을 / 밤에 몰래 안고 간다’

 

불과 25개의 한자로 이루어진 노래였지만 위력은 대단했다. 노래를 듣고 대노한 진평왕은 딸을 쫓아냈고, 서동은 큰 힘 안들이고 그녀를 아내로 맞았다. 이에 서동이 길목에 나와 그녀를 기다리다가 함께 백제로 돌아가서 ‘무왕’(武王)이 되고 선화는 왕비가 된다.

 

그러나 무왕이 생존했던 백제가 여전히 신라와 갈등 관계에 있었던 사실을 보면 한창 마를 캐던 서동이 지은 동요가 아닐 수 있다. 서동과 선화는 향가 내용대로 부부의 정을 통하는데 성공했지만, 신라와 백제는 서로 평화를 유지하는 정을 통하지 않은 것 같다. 선화 공주는 무왕에게 간청하여 미륵사지 석탑을 창건했음에도 불구하고, 고국이자 적국인 신라에게 향하는 평화의 랜드마크가 될 수 없었다. 무왕이 신라 서쪽 국경을 여러 번 침공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그래서일까. 일연은 이 서동 설화가 계략과 모함에 대한 비난이 아닌 국경을 뛰어넘은'역사적 로맨스'로 남길 바랐다. 이후 무왕이 신라에 얼마나 적대적이었는지에 대해 언급하지 않은 것을 보면 더욱 그런 생각이 든다. ‘서동요’의 목적이 노래를 이용한 유언비어로 여자 차지하기였다면, 일연에게는 설화적 기록을 통한 국민화합이 목표였지 않았을까. 후삼국으로 다시 찢어진 나라를 하나로 통합한 고려의 최우선 국가 과제가 사회 통합이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따라서 서동 이야기와 서동요는 역사적 사실이라기보다는 고대부터 전승된 설화에 여러 가지 역사적 사건들에 관한 이야기들이 뒤섞이며 만들어질 수 있다. 백제와 신라가 서로 우호적인 관계로 지내기를 원하는 그 당시 민중의 소망 또한 서려 있는 것이다.

 

 

 

 Scene #2   “아! 저기 그가 있어. 매춘부 사생아가!”

 

이제 바다 건너 먼 나라의 이야기로 화제를 돌려보자. 여기 서동요처럼 짧은 시와 노래의 위력을 보여주는 흥미로운 역사적 사건이 있다.

 

1749년 프랑스, 루이 15세를 비방하는 시를 퍼뜨린 혐의로 한 의대생이 체포된다. 시의 내용이 자세히 전해지지는 않지만, 해군과 왕실업무를 담당하고 있던 모르파 백작을 해임하고 유배시킨 루이 15세를 비판하는 내용이었다.

 

매춘부 사생아가 / 궁정에서 출세하네. / 사랑에서나 술에서나 / 루이는 손쉬운 영광을 바라네. / 아! 저기 그가 있어, 아! 여기 그가 있네. / 근심걱정 하나 없는 그 사람. // 보기만큼 어리석은 것이 틀림없어 / 백성들은 염려하네. / 그의 얼굴에 드리운 운명을. / 아! 저기 그가 있네, 등등. (‘매춘부 사생아’ 중에서, 177~178쪽)

 

의대생의 자백 후 시를 암송하고 퍼뜨린데 일조했다고 여겨지는 14인이 줄줄이 체포됐다. 이른바 '14인 사건'이다. 왕을 조롱하는 시가 당시로선 왕권모독이나 역모에 해당됐을 터였다. 하지만 체포된 사람들은 혁명이나 권력투쟁과는 거리가 먼 사람들이었음에도 경찰은 14인을 체포하는 데 많은 시간과 힘을 쏟아 부었다.

 

백성들 사이에 이런 노래가 떠돈 사실을 안 루이 15세가 얼마나 당황했겠는가. 프랑스인들은 이런 노래와 시를 주고받으면서 권력을 풍자하고 비판했다. 노래 속에는 왕과 퐁파두르 부인의 은밀한 관계, 모르파 백작의 몰락 등 공적인 사건들에 관한 뉴스가 가득했다. 불륜과 근친상간, 평민 출신 애첩 퐁파두르 부인에게 보석과 성채를 퍼주느라 왕국이 거덜났다는 주제의 노래와 시가 왕에게 전달됐다. 그 가운데 일부는 국왕 시해를 주장할 정도로 과격했다.

 

왕은 파리 시민이 주고받는 말과 노래에 몹시 민감했다. 파리 시민이 더 이상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믿었다. 그래도 프랑스 국민은 베르사유의 가장 내밀한 안식처에 자신들의 목소리를 전할 수 있었다.

 

 

 

 Scene #3  루이 15세의 ‘불통 태도’가 주는 교훈 

 

 

 

 

프랑수아 부셰 「퐁파두르 부인의 초상」 1756년

 

 

서동요는 참요(讖謠)다. 참요란 미래의 어떤 징후를 암시하는 노래를 말한다. 참요는 여론의 일종으로서 역할로 변환된다. 서동요나 루이 15세를 비방하는 시처럼 어떤 사람이 특별한 목적을 갖고 퍼뜨리기도 한다. 신라의 진평왕은 대궐에까지 퍼진 서동의 노래에 노하여 선화 공주를 내쫓을 수 있었지만, 루이 15세는 속으로 분노를 삭일 수밖에 없었다. 미모와 재치를 겸비한 애첩이며 이미 왕정의 인사에 손 뻗칠 정도로 권세를 누리고 있는 퐁파두르 부인을 단번에 내쫓을 수 있었을까.

 

 루이 15세에게는 자신을 향한 조롱의 시와 노래가 유언비어라고 생각했을지 몰라도, 그 속에는 강력한 군주를 원하는 국민들의 소망이 담겨져 있다. 어쩌면 무능한 왕이 폐위되기를 염원했을지도 모른다. 이토록 간절한 바람이 언제 실현될지 알 수 없었지만, 언젠가는 자신들의 목소리가 왕의 귀에 전해질 거라 믿었다. 그들의 마음이 ‘매춘부 사생아’ 마지막 연에서 엿볼 수 있다.

 

거만한 검열관이 이 노래를 / 제멋대로 비판하고 반박할지도 모르지 / 그 비판의 화살이 실수를 들춰내고 / 왕좌까지 꿰뚫을지도 모르지. (‘매춘부 사생아’ 중에서, 180~181쪽)

 

결국 노래는 무능한 매춘부 사생아가 앉아 있는 왕좌를 꿰뚫는데 성공했다. 그리고 그 비판의 화살이 평범한 14인의 파리 시민들에게 엉뚱하게 향했다. 말 그대도 제멋대로 죄없는 시민을 체포하는데 그친 궁색한 반박이었다. 결과적으로 14인이 퍼뜨린 노래는 서동요처럼 미래의 일을 예언하고 실현된 셈이다.

 

만약에 루이 15세가 자신과 함께 모욕의 대상이 된, 아니 프랑스 국민들로부터 지탄받게 만든 주범인 퐁파두르 부인을 궁궐에서 쫓아냈다면 혼란스러운 국정이 회복되었을 수 있었을까. 그러나 1764년에 죽을 때까지 퐁파두르 부인은 프랑스 정치를 좌우할 정도로 권력을 누렸다. 게다가 루이 15세는 퐁파두르 부인 이외에 또 다른 애첩을 맞을 정도로 왕권은 크게 실추되었다. 실제로 왕이 사망했을 때 아무도 그를 애도하고 존경하지 않았다니, 그에 대한 국민들의 원성이 어느 정도인지 실감할 수 있다.

 

경찰은 수사력을 총동원해 나라 안을 헤집었지만 시의 원작자는 잡지 못했다. 애초에 단 한명의 시인을 쫓는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었을 것이다. 최초에는 한사람의 생각과 입을 통해 나온 시었을 지라도 결국엔 다른 사람들의 생각이 덧붙여지고 변형된 집단창작물의 성격으로 변했기 때문이다. 그게 여론이다. 권력자에게 여론이란 흐름을 파악해 대중의 생각을 읽어야 하는 것이지, 배후를 찾아 헤매는 건 의미 없는 일이다.

 

눈을 뜨는 순간부터 잠자리에 드는 순간까지 현대인의 눈은 스마트 기기에 향한다. 인터넷을 검색하고, SNS에 들어가 소식을 주고받으며, 소셜 커머스에서 필요한 물건을 산다. 하지만 몇 분도 안 되는 사이에 수많은 사람들에게 전달되는 정보가 현대 사회만의 전유물일까.

 

스마트기기를 통해 언제든 정보를 주고받을 수 있는 현대사회와는 달리 정보를 쪽지에 필사해 전하거나 암기해 전하기 때문에 정보의 확산 속도는 너무나도 느렸다. 그래도 18세기 중엽에도 국민들이 서로 의사소통하고 공통된 정보를 공유하는 정보사회라 부를 만한 구조는 갖추고 있었다. 역사는 반복된다고 했던가. 권력자를 괴롭히던 프랑스의 시와 노래는 오늘날 트위터나 페이스북 같은 SNS를 통해 이렇게 되풀이되고 있다. SNS 이전에 18세기 프랑스에 유행한 시와 노래는 오늘날의 SNS처럼 사회를 향한 목소리를 내는 수단으로 활용되고, 시민과 나란히 사회 변화의 주역이 되기도 한다.

 

작년 말에 대통령은 “SNS등을 통해 퍼져나가는 잘못된 유언비어를 바로잡지 않으면 안 된다”는 의견을 밝힌 적이 있다. 정부가 추진하는 정책에 대해 팩트를 왜곡하는 유언비어가 떠도는 점은 무시할 수 없다. 진실을 외면하고, 갈등의 불에 기름을 붓는 유언비어나 비방적인 말은 올바른 비판 여론이라고 할 수 없다. 다만, 자신의 생각과 다른 모든 견해를 유언비어로 보고 이를 척결한다면 임기 초기 전에 많이 지적받았던 대통령 특유의 ‘불통 철학’이 반복될 수 있다. 정부 정책과 다른 비판 여론이 있다면 이를 겸허히 받아들이고 홍보에 힘을 쏟으라는 지시를 내놓는 게 대통령의 역할이다. ‘14인 사건’에 대처하는 루이 15세의 ‘불통 태도’가 여론의 힘을 무시하는 권력자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니까 자신을 희화화하고, 풍자하는 여론에 대통령 각하께서는 당황하지 않으셨으면 한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5)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감은빛 2014-02-05 11: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리 폐하께옵서는 웬만한 일에는 당황하지 않을 듯 보여요.
자신이 연루된 일 임에도 마치 남의 일처럼 이리 무관심하시니 말예요.

cyrus 2014-02-05 23:08   좋아요 0 | URL
무관심한 척하면서 내심 겁먹을 겁니다. 국민들의 자잘하고도 진실한 여론마저 외면하고 귀를 닫는다면, 임기 말 아니면 임기 끝나고 나서도 엄청 괴로워질거에요.
 

 

 

 

 

 

피터르 브뤼헐 「추락하는 이카루스가 있는 풍경」 1558년경

 

 

 

그는 하늘을 나는 마법에 도취돼 더 높이 올라갔다. 새의 깃털과 밀랍으로 만든 날개를 달고 태양에 가까이 가는 바람에 날개가 녹아 바다에 빠져 죽었다.

 

검푸른 물빛이 내게로 달려들었다. 순간 깊이를 알 수 없는 바다에 빠져 발버둥치는 이카루스를 보았다. 나, 아니 세상사람 모두가 광활한 삶의 바다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또 하나의 이카루스였다.

 

 

피터르 브뤼헐의 「추락하는 이카루스가 있는 풍경」이 영화의 한 장면처럼 펼쳐졌다. 푸른 바다엔 배도 떠있고 섬도 있다. 언덕에선 목동이 양을 치고, 비탈 밭에선 농부와 소가 밭을 갈고, 또 한사람은 바다에 낚시를 드리우고 있다. 전경은 너무나 평화스럽다. 화폭 사분의 일이 하늘이고 나머지가 바다다. 목가적인 전원 풍경이 너무나 아름답다.

 

그러나 한 생명이 광활한 바다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는데 잘 보이지 않는다. 다만, 갈색의 막대기처럼 보이는 두 다리만 보일 뿐이다. 한 인간의 예기치 못했던 재난 앞에서 세상은 꿈쩍도 않는다. 그림에는 어부, 농부, 양치기 세 사람이 등장한다. 그도 아니면 물에 '풍덩' 하고 빠지는 소리를 그들 중 하나는 분명 들었을지 모른다. 물에 빠져 살려 달라는 이카루스의 절규를. 그러나 모두들 자기들 일에만 몰두 하고 있다.

 

 

 

 

 

 

 

 

 

 

 

 

 

우리가 흔히 아는 이카루스의 이야기는 이렇게 끝이 나고 자신의 능력을 과대평가했다는 교훈을 남겼다. 그러나 세계적인 경영 구루 세스 고딘은 이카루스 신화의 교훈을 반박한다. 날개를 만든 발명가이자 이카루스의 아버지인 다이달로스는 아들에게 너무 높게 날지 말라는 말만 한 것이 아니었다. 너무 수면 가까이 날아 날개가 물에 젖지 않도록 주의를 줬다.

 

이 이야기를 교훈 삼아 적은 것에 만족하고 겸손한 태도로 사는 사람이 '안전하다'라는 착각에 빠져 현실에 안주하는 것에 대한 경종을 울린다. 그는 새로운 틀을 구축하고 정해진 규칙 없이 시도하는 것을 '아트'(Art)라 말한다. 기존 질서에 도전하는 용기와 통찰력, 결단력을 갖춘 사람을 ‘아티스트’라 일컫는다. 그리고 우리 모두가 날 때부터 아티스트의 자질을 갖추고 있다고 주장한다.

 

세상은 위험한 곳이라는 과장된 정보와 줄밖으로 벗어나면 먹고살기 힘들어질 것이라는 일상적인 불안을 안고 산다. 이 같은 채찍과 더불어 보상이라는 당근을 사용하는 산업사회 시스템에 완전히 길들여지고 말았다. 이런 상황에서 자존감 따위는 생각지도 말아야 한다. 꿈이라는 단어는 머릿속에 둬선 안 된다. 줄을 맞춰 지시대로 움직여야 한다.

 

자유란 자신이 원하는 대로 할 수 있는 능력을 말한다. 또한 자신이 원하는 모든 것을 이루려는 의지를 말한다. (36쪽)

 

이제 세상의 시선에 눈치 보지 않으면서 자신의 길을 가는 아티스트의 시대가 시작했다. 아티스트는 어떤 선입견 없이 세상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남을 따라하지 않는다. 백지상태에서 최초로 시도하려는 자유의지가 강하다.

 

지도 없이 새로운 길을 걷는다는 것은 무모하고 두려운 일이다. 세상은 개인의 도전과 실패, 그리고 그 고통과 아픔에 귀기울여주지 않는다. 하지만 그 위험이야말로 진짜 아티스트가 되기 위해 거쳐야 할 관문이다.

 

물에 빠져 허우적대는 이카루스는 어리석지 않다. 태양에 가까이 가고 싶은 욕망! 이카루스의 도전은 아티스트 본연의 모습이다. 정해진 일만 하면서 안락한 생활을 추구하는 낚시꾼, 농부, 양치기는 아티스트가 될 수 없다.

 

태양을 향한 이카루스의 날개는 아름다웠다. 도전과 추락은 전보다 더 높이 더 멀리 날아 갈수 있는 절호의 기회다. 그림 왼쪽 덤불에 있는 시체는 ‘사람이 죽어도 경작은 계속된다’라는 플랑드르의 옛 속담을 상징한다. 죽을 때까지 현실에 안주하면서 삶의 경작을 계속할 것인가 아니면 자신이 원하는 것을 이루기 위해 하늘을 나는 이카루스가 될 것인가.

 

 

 

 

※ 책에 관한 쓴소리 : 감정노동이 아트를 위한 최선의 능력이 될 수 있을까?

 

최근 페이스북에서 이 책에 대한 간략한 평을 본 적이 있다. 자신의 주장을 계속 반복하고 사례만 열거하는 세스 고딘의 글쓰기 때문에 책을 구입한 돈이 아깝다는 혹평도 있었고, 번역의 문제를 제기한 내용이 있었다. 인용된 문제의 문장은 다음과 같다.

 

그 자신이 하나의 신화적 존재인 조지프 캠벨은 이렇게 못을 박았다. (중략) 신화는 우리 인간이 신 또는 전설적인 존재의 옷을 걸치고 인간적인 행동을 하는 이야기다... 우리가 좋아하는 인물 또는 우리가 도달할 수 있는 최고의 자아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기 때문이다. (104~105쪽)

 

처음에 읽었을 때 별다른 느낌은 없었는데 인용된 문장만 봐도 잘못된 문장인지 판단하기 어렵다. 어법이 잘못되었다기보다는 한 번에 읽고, 의미를 이해하기 어려운 문장인 것 같다.

 

그래서 내가 문제 제기하고 싶은 번역의 수준이 아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저자답지 않은 억지스러운 내용의 글은 실망스럽기만 하다. 내가 인용한 문장을 읽어보라.

 

 

다른 사람들에게 관심과 감사하는 마음을 얻고, 그들의 영혼 깊숙이 파고들려면 감정노동을 통해 다가서야 한다. 기존의 경제는 확장 불가능한 육체노동의 성실함을 기반으로 성장했다. 여기서 ‘육체노동’이라는 말은 인간의 근육이나 두뇌를 써서 하는 반복적인 작업을 가리킨다. (중략) 아트는 감정노동을 통해, 즉 위험과 기쁨, 두려움, 사랑을 통해 이룰 수 있다. 감정노동은 ‘좀 더 많은 노력으로 때로는 엄청난 가치를 창출할 수 있다는 점’에서 확장 가능하다. 사람들 사이의 관계에는 육체노동이 아니라 감정노동으로 형성된다. (75쪽)

 

 

‘감정노동(Emotion work , Emotional labor)’. 책의 원문을 이 ‘감정노동’을 어떻게 표현했는지 궁금하다. 세스 고딘은 ‘감정노동’을 아트를 위한 가치를 높일 수 있는 새롭고도 긍정적인 노동의 한 형태로 봤다. 미국에서는 감정노동자에 대한 처우가 잘 되어 있을지 몰라도, 우리나라는 의미뿐만 아니라 상황도 전혀 다르다.

 

 

 

 

 

 

 

 

 

 

 

 

 

 

 

 

우리나라의 감정노동은 실제 자신의 감정을 숨기면서 직무를 수행하는 것을 뜻한다. 감정노동으로 생긴 감정적 부조화는 감정노동을 행하는 조직 구성원을 힘들게 만든다. 감정노동으로 생긴 문제가 적절하게 다루어지지 않는 경우엔 심한 스트레스(좌절이나 분노, 적대감)가 나타난다. 육체노동을 하면 할수록 건강에 좋지 않다. 감정노동 또한 거의 육체노동과 마찬가지로 노동자의 정신적 상태에 악영향을 주는 문제점이 부각되고 있다. 과연 ‘감정노동’이 신뢰와 사랑을 형성할 수 있는 잠재적인 가치의 능력으로 볼 수 있을까?

 

‘감정노동’이라는 용어는 최근에 등장한 것이 아니다. 세상에 나온지 지금으로부터 무려 21년이나 되었다. 미국 출신의 사회학자 앨레 러셀 혹실드가 1983년에 처음으로 『managed heart: commercialization of human feeling』이라는 책에서 사용했다. 우리나라에서는 ‘감정노동’으로 번역됐다.

 

사실 세스 고딘이 말하는 ‘감정노동’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 없다. 이에 대한 부연 설명할 수 있는 간단한 사례 또한 언급되지 않았다. 세스 고딘은 ‘감정노동’의 원래 의미를 잘 이해하지 못했던 걸까? 이렇듯, 아무리 영향력 있는 저자라고 해서 그의 주장에 무조건 동의할 수 없는, 의문이 들 때가 간혹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책은 도끼다』의 저자인 박웅현은 소설가 김훈을 이렇게 표현한다. ‘미친 사람’ 김훈. 박웅현은 김훈 덕후가 아닐까 싶을 정도로 김훈의 문장마다 감탄하고 있다. 그리고 자신의 줄 쳐놓은 김훈의 문장을 『책은 도끼다』에서도 인용한다. 박웅현이 감탄했던 김훈의 문장 하나 소개해본다.

 

“동백은 한 송이의 개별자로서 제각기 피어나고, 제각기 떨어진다. 동백은 떨어져 죽을 때 주접스런 꼴을 보이지 않는다. 절정에 도달한 그 꽃은, 마치 백제가 무너지듯이, 절정에서 문득 추락해버린다.” (김훈 『자전거 여행』중에서)

 

무엇을 보든 천천히 본다는 김훈다운 관찰의 힘과 탐사정신이 빛나는 문장이다. 박웅현은 "줄을 치고 또 쳐도 마음을 흔드는 새로운 문장들이 넘쳐나는 게 김훈의 책"이라고 말한다. 그만큼 문장마다 빛나는 생각들이 끊임없이 발견되기 때문에 김훈의 책은 될수록 천천히 읽고 음미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우리는 ‘미친 사람’ 김훈의 책을 천천히 읽고 음미하기가 쉽지 않다. 섬세하고 감성적인 김훈 특유의 문장의 맛을 단번에 느끼기 어려운 점도 있지만, 일반 서점에 김훈의 책 몇 권은 구입하기가 힘들기 때문이다.

 

특히『자전거 여행』이 그중 하나다. 김훈은 자전거 마니아로 잘 알려졌다. 자전거와 함께한 여정을 기록한 글 일부는 중학교 국어 교과서에 실릴 정도로 쉽게 읽을 수 있다. 『자전거 여행』은 2002년에 처음으로 출간되어서 2년 뒤에 2권이 나오기도 했다. 출간 당시, 『칼의 노래』와 더불어 많은 독자로부터 큰 인기를 받은 책이었으나 10여 년이 지난 지금, 두 권 다 절판되었다. 김훈을 좋아하는 독자들에게는 이 유명한 책이 서점에서 팔리지 않는다는 사실에 생소하게 들릴지도 모른다. 『책은 도끼다』에 소개된 김훈의 문장에 푹 빠져서 김훈의 책을 사고 싶은 마음에 당장 서점에 간 독자들은 낭패를 봤을 것이다. 꽤 많은 책을 보유하는 교보문고 광화문점에 가봤자 소용없다. 재고가 없으니까.

 

 

 

 

 

 

 

 

 

 

 

 

 

 

 

 

『자전거 여행』『칼의 노래』 등 김훈이 쓴 다수의 책은 ‘생각의 나무’라는 출판사에서 출간되었지만, 2011년에 부도가 나는 바람에 책이 하나둘씩 품절되고 절판되고 말았다. 그나마 다행히도 『칼의 노래』는 ‘문학동네’가 재출간해서 여전히 스테디셀러로 읽히고 있고, 최근에 문학동네 창립 20주년을 맞아 출간된 한국문학 전집 시리즈에 포함되었다.

 

 

 

 

 

김훈의 책 중 유일하게 소장하고 있던 책이 이제는 구할 수 없는 ‘생각의 나무’판 『칼의 노래』였다. 그러다가 어제 정말 운 좋게도 알라딘 중고샵에서 『자전거 여행』1권을 아주 저렴한 가격에 구입할 수 있었다.

 

어제 저녁에 친분이 있는 지인들을 동대구역으로 가는 방향에 있는 평화시장에서 만나기로 했다. 그런데 내가 그만 시장 이름을 착각하고 말았다. 대구역에 있는 번개시장으로 잘못 알고 있었던 것이다. 엉뚱하게 약속 장소가 아닌 대구역에 너무 이른 시간에 도착해서 약속 시간까지 알라딘 중고샵에 책 구경을 할 생각이었다. 알라딘 중고샵 대구점은 대구역에서 도보로 출발하면 10분도 채 안 걸린다. 참새가 방앗간을 그냥 지나칠 수가 있겠는가. 그곳에서 마침 『자전거 여행』1권을 발견했습니다. 새 책이나 다름없었고, 거기에 한정특별판 1쇄였다.

 

나는 깨끗한 상태의 책보다는 초판본을 더 선호하는 편이다. 무조건 맨 처음 나온 게 제일 좋은 것으로 생각한다. 평소에 서점에 가면 시중에 구하기 어려운 책을 잘 찾을 정도로 책 구입만큼은 촉이 좋은 편이다. 만약에 약속 장소를 정확하게 안 상태에서 동대구역으로 갔더라면 『자전거 여행』을 구입하지 못했을 것이다. 헌책방이나 알라딘 중고샵에서 절판본 몇 권을 구입했지만, 이런 경우는 정말 기분은 짜릿하게 느껴진다.

 

중고가로는 4500원. 정가가 비하면 상당히 저렴하게 구입했는데 절판본을 이렇게 싼 가격으로 판매되는 경우는 자주 오는 건 아니다. 인터넷 서점 온라인 중고샵이나 인터넷 쇼핑몰에서는 『자전거 여행』한정특별판 1권을 정가(11000원)보다 더 부풀려서 팔고 있다. 18000원에서 크게는 89000원까지 책정된 것도 있다. 그야말로 ‘미친 사람’이 쓴 절판본의 ‘미친 가격’이다. 이래서 터무니없는 금액으로 책을 ‘고가의 상품’처럼 파는 일부 회원들이 야속하게 느껴진다.

 

1권을 가지고 이상, 이제 2권도 마저 구입하는 일만 남았는데 아무래도 쉽지 않을 것 같다. 운이 따라줘야 하는 ‘촉’에 맡길 수밖에 없다. 좋은 책이 출판사를 만나지 못해 한순간에 독자들의 시선에서 사라져, 독자들의 손에서 영영 멀어지는 상황이 너무 아쉽기만 하다. 그저 『자전거 여행』이 다른 출판사에서 재출간되기를 바랄 뿐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Puzzle #1 『호밀밭의 파수꾼』, 전 세계 청춘들을 위한 문학의 치유제

 

 

 

 

 

 

 

 

 

 

 

 

 

 

 

 

인간은, 아니 더 정확히 말해 소년은 아무도 '무사히' 자라지 않는다. 무난하게 컸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그 누구에게도 말 못했던 은밀한 두려움과 불안이, 밤잠을 설치게 만들었던 외로움과 좌절이, 눈을 감아도 떠오르는 그리움과 사랑이야기가 숨어 있게 마련이다.

 

거짓과 위선으로 가득 찬 어른들 세계를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16세 소년 홀든 콜필드 역시 심한 성장열병을 앓고 있다. 이미 세 번 퇴학 을 경험했고, 성적 불량이란 이유로 네 번째 퇴학을 앞두고 있는 홀든에게는 학교와 선생님들, 친구들, 아니 온 세상이 다 역겹고 한심하게만 느껴진다.

 

결국 네 번째 퇴학을 당한 소년은 홀가분한 맘으로 뉴욕 한복판으로 떠난다. 클럽과 바를 전전하며 술을 퍼마시고, 캑캑거리면서도 연신 담배를 피워댄다. 성인이 되기 위한 마지막 관문인 섹스를 통과하기 위해 늙은 매춘부와 고통스런 경험도 맛본다. 어른이 되기란 정 말 이토록 힘든 걸까. 홀든은 인생 자체를 정답을 찾을 수 없는 거대한 수수께끼처럼 여긴다.  

 

1953년 헤르만 헤세는 샐린저의 『호밀밭의 파수꾼』에서 혐오스럽고 문제적인 동시대를 사랑으로 감싸 안을 수 있는 문학의 가능성을 보았다고 적고 있다. 그는 자신의 작품 『황야의 늑대』를 읽은 미국 독자들의 편지로 샐린저의 소설을 접하게 되었다. 홀든 콜필드의 일탈적 여정에 대한 헤세의 애정과 혜안적인 평가는 후에 1960년대 히피문화로 대변되는 젊은이들의 문화에 헤세의 작품과 함께 『호밀밭』이 끼친 막대한 영향을 통해 정당화 되었다.『호밀밭』에서 아버지 세대의 위선을 읽어내고 더 나아가 베트남전쟁의 부도덕성을 주창하던 68세대의 전염병과도 같은 젊은 열정이 지나간 후에도 여전히 전 세계 젊은이들에게 샐린저의 문학은 청춘의 방황을 치유하는 처방전이 되었다.

 

 

 

 Puzzle #2 『아홉가지 이야기』, 수수께끼 같은 작가가 쓴 수수께끼 같은 단편

 

 

 

 

 

 

 

 

 

 

 

 

 

 

 

 

샐린저가 많지 않은 분량의 장편인 『호밀밭』으로 그를 유명하게 만들었다면, 생전에 발표한 단 한권의 단편집『아홉가지 이야기』는 샐린저를 미국 현대 문학에서 가장 매혹적인 작가로 만들었다.

 

9편 중 우선 권하고 싶은 작품은 ‘에스메를 위하여, 사랑 그리고 비참함으로’다.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해 정신적 상처를 받았던 작가 자신의 경험이 녹아 있는 작품이다. 소설을 쓰는 참전군인 X 하사가 우연히 만난 열세 살 소녀 에스메는 당돌한 소녀다. “아저씨는 미국인치고는 꽤 지적인 편인 것 같아요.” “아저씨도 날 지독하게 차가운 사람이라고 생각해요?”라고 묻곤 한다. 그리고는 “아저씨의 모든 재능을 그대로 지닌 채 귀환하길 바란다”는 인사를 남기고 사라진다. 종전 직후, 환멸과 무기력에 빠진 X 하사에게 부친 지 1년 지난 에스메의 편지가 전달된다. “전쟁, 그리고 줄잡아 말해 우스꽝스러운 생존 방법의 조속한 근절을 가져다 주기를 바랄 뿐”이라는 글이 X 하사에게 희망을 품게 한다. X 하사는 전쟁 와중에 두 가지 부덕, 세계의 저속함과 환멸을 만나지만 어린 에스메의 순수를 통해 자신을 수습한다. 순수의 이 같은 힘을 드러내는 구도는 샐린저 소설의 한 원형을 이룬다.

 

에스메와 같은 당돌함과 영민함을 보고 싶은 독자에게는 전생을 기억하는 어린 천재의 이야기를 다룬 ‘테디’나 ‘에스키모와의 전쟁 직전’ ‘웃는 남자’ ‘작은 보트에서’ 등의 작품을 권하고 싶다. 저속함이나 환멸을 읽어보고 싶다면 대학 동창인 두 여인의 술자리 이야기인 ‘코네티컷의 비칠비칠 아저씨’나 사랑이 낳는 집착을 다룬 ‘예쁜 입과 초록빛 나의 눈동자’가 있다. 이런 작품들 속에서도 샐린저는 시종 유머를 잃지 않는다.

 

 ‘유머를 모르는 자에게는 진정한 진지함도 없다’던 베르그송의 말이 떠오른다. 적절한 유머는 작품의 진정성을 훼손시키지 않으면서 독자들을 유인한다. 샐린저는 이에 대해 단연 최고랄 수 있다.

 

또 한 가지, 단편 ‘바나나피시를 위한 완벽한 날’을 빼놓을 수는 없으리라. 샐린저에게 유명세를 안겨 주었으며 팬들에게 가장 많은 사랑을 받았던 소설이다. 한낮의 햇살만큼이나 강렬한 단편이다. 샐린저의 중편소설 『목수들아, 대들보를 높이 올려라』의 주인공 시모어가 처음 등장하는 작품이기도 하다.

 

샐린저의 다른 소설들에서도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글래스가(家)의 한 인물인 시모어는 여름 휴양지의 해변에서 알게 된 시빌이라는 여자 아이와 바다에 들어가 바나나피시라는 상상 속 물고기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다. 시모어가 지어낸 이야기에 장단을 맞추며 시빌은 “방금 한 마리 봤어요”라고 말하고 시모어는 “그럴 리가”하면서 깜짝 놀라는 시늉을 한다. 둘은 마치 어떤 공모자들처럼 혹은 천진난만한 아이들처럼 태연하게 바나나피시가 실재하는 것처럼 수수께끼 같은 이야기를 이어간다. 수수께끼 같은 삶을 산 작가가 쓴 글답다.

 

‘바나나피시’는 먹이가 숨은 구멍에 고개를 들이밀고 탐식을 하다가 결국 몸이 빠져나올 수 없어서 죽는 물고기다. 왜 이 물고기가 제목으로 들어갔을까? 샐린저가 『호밀밭』다음으로 대중들에게 선보인 이 두 번째 수수께끼가 궁금한 독자들은 이 단편을 읽어보기를 권한다. 단편이 주는 긴박감과 생략의 여운을 기대하는 독자들 역시.

 

 

 

 

 Puzzle #3 『프래니와 주이』, 허무한 일상을 넘어서 삶의 의미 찾기

 

 

 

 

 

 

 

 

 

 

 

 

 

 

『호밀밭』이 미국사회의 이면에 내재되어 있는 폭력성과 미국중산층이 지닌 윤리관의 허위와 기만을 10대 소년 홀든 콜필드의 3박4일간의 방황을 통해서 질타하고 있다면, 『프래니와 주이』에서는 20대 남매 프래니와 주이의 허무적인 일상을 넘어서는 삶의 의미 찾기와정이 담담하게 묘사되어진다.

 

줄거리만 정리하면 너무나 단순하다. 여대생인 프래니는 위선으로 가득찬 세상에 실망하며 신경쇠약 증세를 보이고, 오빠인 주이가 프래니 스스로 이러한 난관을 극복해낼 수 있도록 도와준다는 내용이 이야기의 전부. 이밖에 이야기의 배경이 되는 공간과 시간, 플롯 또한 매우 단순하다.

 

주인공인 프래니와 주이의 대화는 너무나 생생하여 자기도 모르게 큰 소리로 읽게 되며, 군데군데 밑줄을 긋고 책장을 접기 바쁠 것이다. 또한 『호밀밭』의 결말부에서 잠깐 엿보였던 ‘선(禪)’ 불교 사상이 기독교적인 바탕 위에 자연스럽게 펼쳐져 깊은 성찰의 시간으로 잠기게 해준다.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프래니는 죄의식을 씻고자 자연스럽게 연극을 버리고 ‘순례자의 길’이라는 기도책을 소중히 간직하며 열심히 ‘예수의 기도’를 하게 된다. 그녀가 애인인 레인 코텔을 처음에는 아주 반갑게 만났다가 점심을 먹으면서 순식간에 의사소통 단절을 경험하게 될 때도 기도책은 중요하게 다뤄진다. 기도야말로 프래니에게는 유일한 현실 극복 방안인 것이다. 끊임없이 기도하라! 기도하면 구원을 얻으리라!오빠인 주이는 이러한 프래니에게 문제 해결의 궁극적인 길을 가르쳐 준다. 주이는 프래니에게 글래스 집안의 맏이였던 죽은 시모어가 강조한 ‘팻 레이디(Fat Lady)’ 이야기를 해 준다. 여기서 패트 레이디란 일체의 중생이자 예수 그 자체를 뜻한다. 팻 레이디를 위해 열심히 노력하라는 말은 곧 에고(ego)라는 좁은 자아의 틀에서 벗어나 남을 생각하고 자신의 삶을 발견하는 대아의 세계, 대승의 세계로 들어가라는 뜻이다.

 

결국 『프래니와 주이』에서 샐린저는 이 세상을 부정적으로 보면서 욕망을 접고 끊임없이 신에게 기도하는 대신, 욕망을 최대한 실현하면서 남을 섬기며 열심히 사는 데 삶의 진리가 있다고 강조한다. 프래니가 연극의 길에서 벗어나고자 할 때, TV 배우인 주이가 이를 되돌려 놓는 대목은 그래서 더욱 암시적이다. 자신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는 일이야말로 인생의 진리라는 것.

 

이처럼 샐린저의 초기 작품에서는 이런 애타적 사랑이 지배적으로 일관되게 흐르고 있으며 후기 작품에서는 에고이즘이 만연한 현대사회 속에서 탁월한 지성과 예민한 감성을 지닌 인물들이 겪는 불안과 소외로 인한 갈등을 통해 애타적 사랑의 필요성을 더욱 증폭시킨다.

 

 

 

 Puzzle #4 『목수들아, 대들보를 높이 올려라』, 시모어는 정체는?

 

 

 

 

 

 

 

 

 

 

 

 

 

 

 

『호밀밭』 이외에 샐린저가 펴낸 나머지 소설집 세 권은 모두 ‘글래스’라는 성을 지닌 뉴욕의 일가족을 주인공으로 내세운다. 일종의 ‘글래스 가족사’라 할 텐데, 그중 한 권이 『목수들아, 대들보를 높이 올려라』이다. 『목수들아』는 동명의 포제작과 ‘시모어, 서문(序文)’, 두 편의 중편이 수록되어 있다.

 

글래스 집안의 맏아들인 천재 시인 시모어 글래스. ‘목수들아’는 그가 자신의 결혼식장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음으로써 손님들을 골탕 먹이는 이야기를 동생 버디의 시점으로 그렸다면, ‘시모어, 서문’은 그로부터 시간을 훌쩍 건너뛰어 이제 중년의 교수가 된 버디가 서른을 갓 넘긴 나이에 자살한 형 시모어의 천재적 면모를 회상하는 내용이다. 그러니까 두 편의 소설에서 주인공인 시모어는 정작 실제로 등장하지는 않는 셈이다. 대중들 앞에서 등장하지 않으려는 작가의 은둔 본능(?)이 작품 안에서도 드러나고 있다. 주인공이 나오지 않는 이 기묘한 소설들에서 간접적으로 묘사되는 시모어의 초상은 ‘괴짜 천재 시인’이라 요약할 만하다. 그 자신 4개의 사어(死語)를 포함해 9개 국어를 완벽히 구사한다고 소개한 버디라는 인물은 시모어를 “그는 분명 우리에게 진짜인 모든 것을 의미했다”며 숭배한다.

 

도대체 이 ‘시모어’라는 사람은 누구인 걸까. 그의 독특한 이력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이 “셈-켈트족 동양인”은 평생 한시(漢詩)와 일본 하이쿠를 쓰고 즐겼으며 물론 영어와 독일어, 이탈리아어로도 시를 썼다. 비범한 두뇌의 소유자인 그는 학위 과정을 어린 나이에 마치고 18살 무렵부터는 대학 교수로 봉직했다.

 

『호밀밭』은 읽은 독자라면 흥미로운 문장을 만나게 될 것이다. 화자 버디의 이런 진술이다

 

“어떤 사람들은 내가 출간한 유일한 장편의 젊은 주인공이 시모어를 많이 닮지 않았느냐고 물었다.”

 

시모어가 홀든 콜필드의 ‘성인 버전’임을 짐작하게 해주는 대목이다. “너무 행복해서” 결혼식장에 나타나지 않았던 이 인물은 아내와 함께 간 휴가지에서 홀연 자살하고 만다. 시모어는 갑자기 자살을 선택했는가? 궁금하면 방금 앞에서 소개한 단편집『아홉가지』에 수록된 ‘바나나피시를 위한 완벽한 날’을 읽어볼 것.

 

 

 

 Epilogue  네 가지 수수께끼를 풀 수 있는 한 권의 해답, 『샐린저 평전』

 

 

 

 

 

 

 

 

 

 

 

 

 

 

 

샐린저가 호밀밭이 아닌, 하늘의 파수꾼이 된 지 벌써 4년이라는 세월이 지났다. 오늘이 바로 그의 기일이다. 지금으로부터 40년 전인 1974년, 뉴욕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나는 글쓰기를 사랑하지만 출판은 삶을 망치는 끔찍한 일”이라고 말한 적이 있었다. 병적으로 외부 접촉을 싫어했으며, 작품을 영화로 만들려던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을 문 앞에서 쫓아낸 적도 있다.

 

그리고 특유의 고집스런 은둔자답게 책표지와 구성에 대해서 세세하게 요구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샐린저는 에이전트를 통해 자신의 책에 구성적인 삽화를 넣지 않고, 해설문은 붙이지 않으며, 작가 사진도 쓰지 말 것을 요구했다. 이는 샐린저가 자신의 책을 출간할 때 전 세계 모든 출판사에 요구하는 정해진 조건으로 2001년, 『호밀밭』출간 50주년을 맞아 민음사에서 낼 때에도 역시 이와 같은 표지에 대한 세세한 조건을 요구받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샐린저의 소설, 특히 그의 대표작인 『호밀밭』을 읽기 시작한 독자라면 무척 당황스러울 것이다. 작가의 약력도, 그리고 소설에 대한 어떠한 설명 없이 그저 ‘소설’ 자체만 남아 있으니까. 우리에게 샐린저는 소설로만 남은 미지의 작가였던 것이다. 소설 텍스트 자체가 샐린저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텍스트로 무궁무진한 해석을 할 수 있어도 작가의 정체나 진짜 문학적 의도를 읽어내기가 힘들다. 작가가 쓴 작품 하나만 가지고도 그 작가의 문학을 단번에 이해하기도 힘든데, 처음으로 출간된 1951년부터 지금까지도 단 한 번도 해설문을 넣지 않은『호밀밭』이 전 세계적인 스테디셀러로 자리 잡은 사실이 아이러니하다.

 

그래서 국내에 번역된, 생전에 출간된 샐린저의 전 작품을 읽은 독자가 있더라도 샐린저라는 인물을 제대로 알고는 있을까? 샐린저는 자신의 작품들에 대한 서평 그리고 수수께끼 같은 그의 정체를 궁금해한 독자들의 생각을 몰래 지켜보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자신을 세상 앞에서 드러내는 것 자체를 꺼려한 샐린저의 성격이라면 독자서평이나 자신에 대한 온갖 추측과 소문에 대해서 별 관심 없었을 것이다.『호밀밭』을 읽은 열렬한 독자, 심지어 그 소설을 읽고 존 레논을 암살한 죄로 종신형을 선고받은 마크 채프먼이 자신을 찾아온다고 해도 절대로 만나려고 하지 않을지도. 그야말로 샐린저는 문장의 흔적으로 남겨진 자신의 사소한 편지글마저 공개하기를 꺼려하는 은둔의 파수꾼처럼 생활했으니까.

 

샐린저가 살아 있는 동안 그의 전기를 쓴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기획이었다. 샐린저 생전에 그의 평전이 공식적으로 출간되지 전에 법정 공방까지 갈 정도로 큰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샐린저는 저작권 및 사생활 보호 명목으로 자신의 평전에 인용된 개인적 편지, 신상 정보, 자신이 언급된 모든 인터뷰 기록을 삭제시킬 것을 요구했다. 결국, 그가 죽은 뒤인 2010년에 정식 출간되었다. 그리고 드디어 우리나라에서도 번역되었다.

 

이번에 나온 평전의 출간은 무척 반갑기만 하다. 샐린저의 미발표 소설이 처음으로 공개된다는 사실에 반가운 이유이기는 하지만, 드디어 그동안 수수께끼에 쌓인 샐린저라는 작가의 정체를 알 수 있다는 점에서 샐린저의 열렬한 팬으로써 쌍수 들고 환영하고 싶다. 아, 물론 하늘에 있는 샐린저 입장에서는 기분이 편치 않을 것이다.

 

그의 삶을 조망하면서 각각의 작품이 쓰인 맥락을 짚어내고, 동시에 연대순으로 샐린저의 전 작품을 살핌으로써 그의 인생을 심도 있게 관찰할 수 있다. 샐린저의 삶을 먼저 알고 난 뒤에 그의 작품을 읽어보는 것도 좋겠지만, 작품들을 먼저 읽은 뒤에 평전을 읽는 것이 흥미진진할 것이다. 네 개의 수수께끼, 즉 『호밀밭』『아홉가지 이야기』『프래니와 주이』『목수들아』에 도전하고 나서 그 다음에 ‘샐린저’라는 은둔의 파수꾼이 살고 있는 『샐린저 평전』에서 해답을 구해보자.

 

샐린저를 한 마디로 평가하자면 현대의 젊은이들을 위한 신화라고 말하고 싶다. 완성도 높은 문학성뿐만 아니라 은둔 생활로 그는 이미 전 세계인들이 기억하는 ‘신화’가 되었다. 완강한 기성 사회의 위선에 좌절하는 청춘의 고통, 삶의 진정한 의미를 찾고자 꿈틀거리는 젊음의 열정, 섬세하면서도 치밀하게 펼쳐지는 일상적 언어의 축제. 그래서 샐린저의 신전은 늘 전 세계의 젊은 숭배자들로 북적거린다. 오늘도 인생의 수수께끼를 찾기 위해서.

 

 


댓글(5) 먼댓글(0) 좋아요(17)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blanca 2014-01-28 13: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우, 이 글만 읽어도 샐린저에 대한 개략적인 것을 파악할 수 있겠어요. 저는 <호밀밭의 파수꾼> 하나만 읽었는데 저자의 요청으로 사진이 표지에 없다는 것 정도만 알고 있었어요. 생전에 노출되기 꺼려했던 것도요. cyrus님의 깊이 있는 글 잘 읽고 가요. 평전에 대해 더 듣고 싶군요^^

cyrus 2014-01-28 23:58   좋아요 0 | URL
요즘 샐린저 완독에 푹 빠져 있어요. 평전은 지금 읽고 있는 중입니다. 분량이 적지 않은데도 질리지가 않아요. 사실 그동안 샐린저의 소설을 읽고나면 작가의 정체가 너무너무 궁금했거든요. 다 읽고나면 샐린저에 관한 이야기를 정리해보고 싶어요. ^^

노이에자이트 2014-01-28 14: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셀린저 단편 소개해 놓은 것을 읽으니 직접 읽어보고 싶은 마음이 생기네요.특히 상처입은 군인 이야기...

cyrus 2014-01-29 00:02   좋아요 0 | URL
'에스메를 위하여'를 읽기 시작했을 때는 별다른 감흥이 오지 않아요. 그러다가 군인이 소녀를 만나면서부터 이야기가 흥미진진해집니다.

낭만인생 2015-03-11 11: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알라딘 서재에 글을 올리면서 이토록 완성도 높은 글이 가능한가요? 프린트해서 읽으니 화면보다 잘 읽혀집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