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터르 브뤼헐 「추락하는 이카루스가 있는 풍경」 1558년경

 

 

 

그는 하늘을 나는 마법에 도취돼 더 높이 올라갔다. 새의 깃털과 밀랍으로 만든 날개를 달고 태양에 가까이 가는 바람에 날개가 녹아 바다에 빠져 죽었다.

 

검푸른 물빛이 내게로 달려들었다. 순간 깊이를 알 수 없는 바다에 빠져 발버둥치는 이카루스를 보았다. 나, 아니 세상사람 모두가 광활한 삶의 바다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또 하나의 이카루스였다.

 

 

피터르 브뤼헐의 「추락하는 이카루스가 있는 풍경」이 영화의 한 장면처럼 펼쳐졌다. 푸른 바다엔 배도 떠있고 섬도 있다. 언덕에선 목동이 양을 치고, 비탈 밭에선 농부와 소가 밭을 갈고, 또 한사람은 바다에 낚시를 드리우고 있다. 전경은 너무나 평화스럽다. 화폭 사분의 일이 하늘이고 나머지가 바다다. 목가적인 전원 풍경이 너무나 아름답다.

 

그러나 한 생명이 광활한 바다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는데 잘 보이지 않는다. 다만, 갈색의 막대기처럼 보이는 두 다리만 보일 뿐이다. 한 인간의 예기치 못했던 재난 앞에서 세상은 꿈쩍도 않는다. 그림에는 어부, 농부, 양치기 세 사람이 등장한다. 그도 아니면 물에 '풍덩' 하고 빠지는 소리를 그들 중 하나는 분명 들었을지 모른다. 물에 빠져 살려 달라는 이카루스의 절규를. 그러나 모두들 자기들 일에만 몰두 하고 있다.

 

 

 

 

 

 

 

 

 

 

 

 

 

우리가 흔히 아는 이카루스의 이야기는 이렇게 끝이 나고 자신의 능력을 과대평가했다는 교훈을 남겼다. 그러나 세계적인 경영 구루 세스 고딘은 이카루스 신화의 교훈을 반박한다. 날개를 만든 발명가이자 이카루스의 아버지인 다이달로스는 아들에게 너무 높게 날지 말라는 말만 한 것이 아니었다. 너무 수면 가까이 날아 날개가 물에 젖지 않도록 주의를 줬다.

 

이 이야기를 교훈 삼아 적은 것에 만족하고 겸손한 태도로 사는 사람이 '안전하다'라는 착각에 빠져 현실에 안주하는 것에 대한 경종을 울린다. 그는 새로운 틀을 구축하고 정해진 규칙 없이 시도하는 것을 '아트'(Art)라 말한다. 기존 질서에 도전하는 용기와 통찰력, 결단력을 갖춘 사람을 ‘아티스트’라 일컫는다. 그리고 우리 모두가 날 때부터 아티스트의 자질을 갖추고 있다고 주장한다.

 

세상은 위험한 곳이라는 과장된 정보와 줄밖으로 벗어나면 먹고살기 힘들어질 것이라는 일상적인 불안을 안고 산다. 이 같은 채찍과 더불어 보상이라는 당근을 사용하는 산업사회 시스템에 완전히 길들여지고 말았다. 이런 상황에서 자존감 따위는 생각지도 말아야 한다. 꿈이라는 단어는 머릿속에 둬선 안 된다. 줄을 맞춰 지시대로 움직여야 한다.

 

자유란 자신이 원하는 대로 할 수 있는 능력을 말한다. 또한 자신이 원하는 모든 것을 이루려는 의지를 말한다. (36쪽)

 

이제 세상의 시선에 눈치 보지 않으면서 자신의 길을 가는 아티스트의 시대가 시작했다. 아티스트는 어떤 선입견 없이 세상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남을 따라하지 않는다. 백지상태에서 최초로 시도하려는 자유의지가 강하다.

 

지도 없이 새로운 길을 걷는다는 것은 무모하고 두려운 일이다. 세상은 개인의 도전과 실패, 그리고 그 고통과 아픔에 귀기울여주지 않는다. 하지만 그 위험이야말로 진짜 아티스트가 되기 위해 거쳐야 할 관문이다.

 

물에 빠져 허우적대는 이카루스는 어리석지 않다. 태양에 가까이 가고 싶은 욕망! 이카루스의 도전은 아티스트 본연의 모습이다. 정해진 일만 하면서 안락한 생활을 추구하는 낚시꾼, 농부, 양치기는 아티스트가 될 수 없다.

 

태양을 향한 이카루스의 날개는 아름다웠다. 도전과 추락은 전보다 더 높이 더 멀리 날아 갈수 있는 절호의 기회다. 그림 왼쪽 덤불에 있는 시체는 ‘사람이 죽어도 경작은 계속된다’라는 플랑드르의 옛 속담을 상징한다. 죽을 때까지 현실에 안주하면서 삶의 경작을 계속할 것인가 아니면 자신이 원하는 것을 이루기 위해 하늘을 나는 이카루스가 될 것인가.

 

 

 

 

※ 책에 관한 쓴소리 : 감정노동이 아트를 위한 최선의 능력이 될 수 있을까?

 

최근 페이스북에서 이 책에 대한 간략한 평을 본 적이 있다. 자신의 주장을 계속 반복하고 사례만 열거하는 세스 고딘의 글쓰기 때문에 책을 구입한 돈이 아깝다는 혹평도 있었고, 번역의 문제를 제기한 내용이 있었다. 인용된 문제의 문장은 다음과 같다.

 

그 자신이 하나의 신화적 존재인 조지프 캠벨은 이렇게 못을 박았다. (중략) 신화는 우리 인간이 신 또는 전설적인 존재의 옷을 걸치고 인간적인 행동을 하는 이야기다... 우리가 좋아하는 인물 또는 우리가 도달할 수 있는 최고의 자아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기 때문이다. (104~105쪽)

 

처음에 읽었을 때 별다른 느낌은 없었는데 인용된 문장만 봐도 잘못된 문장인지 판단하기 어렵다. 어법이 잘못되었다기보다는 한 번에 읽고, 의미를 이해하기 어려운 문장인 것 같다.

 

그래서 내가 문제 제기하고 싶은 번역의 수준이 아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저자답지 않은 억지스러운 내용의 글은 실망스럽기만 하다. 내가 인용한 문장을 읽어보라.

 

 

다른 사람들에게 관심과 감사하는 마음을 얻고, 그들의 영혼 깊숙이 파고들려면 감정노동을 통해 다가서야 한다. 기존의 경제는 확장 불가능한 육체노동의 성실함을 기반으로 성장했다. 여기서 ‘육체노동’이라는 말은 인간의 근육이나 두뇌를 써서 하는 반복적인 작업을 가리킨다. (중략) 아트는 감정노동을 통해, 즉 위험과 기쁨, 두려움, 사랑을 통해 이룰 수 있다. 감정노동은 ‘좀 더 많은 노력으로 때로는 엄청난 가치를 창출할 수 있다는 점’에서 확장 가능하다. 사람들 사이의 관계에는 육체노동이 아니라 감정노동으로 형성된다. (75쪽)

 

 

‘감정노동(Emotion work , Emotional labor)’. 책의 원문을 이 ‘감정노동’을 어떻게 표현했는지 궁금하다. 세스 고딘은 ‘감정노동’을 아트를 위한 가치를 높일 수 있는 새롭고도 긍정적인 노동의 한 형태로 봤다. 미국에서는 감정노동자에 대한 처우가 잘 되어 있을지 몰라도, 우리나라는 의미뿐만 아니라 상황도 전혀 다르다.

 

 

 

 

 

 

 

 

 

 

 

 

 

 

 

 

우리나라의 감정노동은 실제 자신의 감정을 숨기면서 직무를 수행하는 것을 뜻한다. 감정노동으로 생긴 감정적 부조화는 감정노동을 행하는 조직 구성원을 힘들게 만든다. 감정노동으로 생긴 문제가 적절하게 다루어지지 않는 경우엔 심한 스트레스(좌절이나 분노, 적대감)가 나타난다. 육체노동을 하면 할수록 건강에 좋지 않다. 감정노동 또한 거의 육체노동과 마찬가지로 노동자의 정신적 상태에 악영향을 주는 문제점이 부각되고 있다. 과연 ‘감정노동’이 신뢰와 사랑을 형성할 수 있는 잠재적인 가치의 능력으로 볼 수 있을까?

 

‘감정노동’이라는 용어는 최근에 등장한 것이 아니다. 세상에 나온지 지금으로부터 무려 21년이나 되었다. 미국 출신의 사회학자 앨레 러셀 혹실드가 1983년에 처음으로 『managed heart: commercialization of human feeling』이라는 책에서 사용했다. 우리나라에서는 ‘감정노동’으로 번역됐다.

 

사실 세스 고딘이 말하는 ‘감정노동’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 없다. 이에 대한 부연 설명할 수 있는 간단한 사례 또한 언급되지 않았다. 세스 고딘은 ‘감정노동’의 원래 의미를 잘 이해하지 못했던 걸까? 이렇듯, 아무리 영향력 있는 저자라고 해서 그의 주장에 무조건 동의할 수 없는, 의문이 들 때가 간혹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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