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쁜 페미니스트 - 불편하고 두려워서 페미니스트라고 말하지 못하는 당신에게
록산 게이 지음, 노지양 옮김 / 사이행성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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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책 소개 시작을 하기에 앞서 반성부터 먼저 한다. 그동안 우리 사회에 썩은 채 뿌리 깊게 박혔던 여성 혐오, 여성 차별 문제를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못한 점, 반성한다. 소설가 록산 게이는 자신의 책 《나쁜 페미니스트》에서 ‘오랫동안 여성을 함부로 다룬 현실’에 눈물이 난다고 적었다. 그리고 그 사회가 여성을 무시하는 나쁜 남자들(본문에는 ‘당신’으로 되어 있다)을 망쳐 놓았다고 했다. 내 주변에 여성을 가볍게 대하는 남자들을 많이 봤다. 여성을 소재로 성적으로 농담하고, 여성과 잠자리를 한 경험을 서슴없이 얘기하는 친구들도 있었다. 나는 그들의 말에 거부감을 느꼈지만, 완전히 잘못된 생각이라고 반박하지 못했다. 입에 담지 못할 말을 억지로 귀 기울어 들어야 했다. 나는 그들을 망쳐 놓았다. 그들의 잘못된 행동을 알면서도 방관했다.

 

죽지 않고 영생하는 암세포가 있다. 현재 전 세계에서 가장 널리 활용되고 있는 암세포인 ‘헬라세포(Hela Cell)’이다. 자궁경부암으로 세상을 떠난 헨리에타 랙스의 이름에서 두 글자를 따서 만든 것이다. 이 암세포는 60년 동안 비교적 안정된 핵형을 유지한 채 지금도 배양액 속에서 분열하고 있다. 여성 차별/혐오 문제는 끊임없이 분열되는 헬라 세포와 같다. 점점 사라지기는커녕 오히려 우리 일상 속에서 번식하고 있다. 여성 차별/혐오가 세포처럼 분열되어 일상 깊숙이 침투하는데, 그 전파 속도가 무척 빠르다. 텔레비전 드라마, 영화, 인터넷, SNS 등을 통해 전파되어 우리 가정에 침투한다. 그렇게 우리는 여성 차별/혐오가 숨겨진 텍스트 및 영상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

 

단적인 예를 들자면, 강간에 대한 인식에서 찾아볼 수 있다. 록산 게이는 미국 사회가 ‘강간과 관련된 것들을 지나치게 수용하는 문화’라고 꼬집었다. 즉 미국인들은 ‘강간 문화(rape culture)’ 속에 살아가고 있다. 강간 문화의 시대에는 여성을 향한 남성의 폭력성과 공격성을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영화나 드라마에 줄거리와 상관없는 성폭력 장면이 등장하는가 하면, 강간이 연상되는 내용의 유머를 편집 없이 브라운관에 전파된다. 미국의 ‘강간 문화’가 우리 사회에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건 크나큰 착각이다.

 

2010년에 방송된 KBS 2TV <추노> 3회는 지나친 음담패설이나 성추행 같은 장면을 남발한 최악의 에피소드다. 특히 남자들이 드라마 속 여주인공 언년이(이다해 분)에게 겁탈을 시도하는 장면은 필요 이상의 자극적인 설정이다. 이때 언년이의 모습은 한복 상의가 벗겨져 어깨 속살을 드러낸 상태였다. 지금도 포털사이트에 검색하면 문제의 장면을 캡처한 사진이 나온다. 3회가 방영된 이후 ‘이다해 노출’이 큰 화제가 되었는데, 놀랍게도 방송통신심의위원회는 드라마에 경고 제재를 주지 않았다.

 

 

 

 

 

 

인터넷 문화에 익숙한 아이들, 젊은 사람들이 쓰는 속어 중에 ‘개관광’이라는 말이 있다. 스포츠 경기에서 압도적으로 크게 패하는 선수나 팀, 혹은 일 대 일 대 형식의 컴퓨터 게임(스타크래프트)에 처참하게 패배한 게이머를 조롱하는 의미에서 ‘개관광당했다’라는 말을 자주 쓴다. ‘개관광’이 좋은 의미를 가진 속어가 아니다. 이 속어의 유래에 대한 설이 분분하지만, ‘강간’이 ‘관광’으로 변형되어 전해진 사실을 부정할 수 없다. ‘강간’의 어감이 좋지 않기 때문에 어감이 비슷한 ‘관광’으로 바꾼 것이다. 외국에서도 한 팀이 일방적으로 우승한 싸움을 ‘Reaped(강간당하다, 약탈당하다)’라고 부른다. 아이들은 속어 ‘관광’의 의미를 알지 못한다. 그저 재미있는 표현이라고 생각하면서 속어를 사용한다. 나도 철없던 학창 시절에 이 표현을 자주 사용했다. 강간을 가볍게 여기는 속어를 사용하는 짓은 발화자 자신의 천박한 수준을 스스로 드러내는 꼴이다.

 

록산 게이는 자신을 ‘나쁜 페미니스트’라고 지칭했다. 여기서 말하는 ‘나쁜 페미니스트’는 남성을 적으로 간주하고, 히스테리 환자 같은 왜곡된 편견으로 매겨진 페미니스트를 의미하지 않다. 그녀는 자신을 모순덩어리 페미니스트라고 고백한다. 완벽한 인간은 없다. 누구나 약점 하나씩 가지고 있다. 편견에 휩싸이기 쉽다. 이로 인해 어떤 현상을 잘못 분석하고 판단한다.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저지른다.

 

UN 여성 친선대사 자격으로 연설한 동영상이 전 세계로 알려진 후로 ‘페미니스트의 아이콘’이 된 엠마 왓슨. 최근 그녀가 파나마 페이퍼스 명단에 연루된 사실이 알려졌다. 왓슨 측은 탈세 목적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고 해명했지만, 해외 네티즌들은 크게 실망했다. 한동안 잠잠하던 여성혐오론자들이 악마의 날개를 쭉 편다. 그들은 왓슨을 대중의 광장 한가운데에 몰아세워 페미니스트의 도덕적 결함을 지적한다. 그러면서 페미니스트를 향한 반감 정서를 키우기 시작한다.

 

 

최근 페미니즘이 이런 이유로 고통을 당하고 있다. 유명인들이 우리가 듣고 싶은 말을 하면 그들을 페미니스트 왕좌에 올려놓고 떠받들고 칭송하다가 그들이 마음에 들지 않는 행동을 하면 바로 무대에서 끌어내리며 페미니스트 리더들이 우리를 실망시켰으므로 페미니즘에 본질적인 문제가 있다고 결론 내린다. (서문 13쪽)

 

 

미국이든 한국이든 어딜 가도 페미니즘은 늘 오해를 받고, 핍박받느라 고생한다. 페미니스트를 괴롭히지 못해 안달 나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 그들은 페미니즘을 ‘유명인이 인기를 많이 받기 위해 아는 척 떠드는 철학’으로 여긴다. 유명인의 페미니즘 발언에 공감하는 여성들의 반응이 한심하다고 조롱한다. 여성 혐오 표현을 일삼는 일베 회원은 그녀들을 ‘김치녀’라고 폄하한다. 페미니스트를 떠나서 여성의 존재 자체를 비하하는 극단적인 사회 속에 여성 유명인들마저 떳떳하게 페미니스트라고 밝히지 못한다. 페미니즘은 전문가나 공인이 앞장서서 대중에게 전파하는 철학이 아니다. 페미니스트의 잘못된 행동의 원인을 무조건 페미니즘에서 찾으려고 하는 것은 악의적인 비난에 불과하다.

 

페미니즘은 남녀 모두 평등하게 살아가는 법을 모색하는 상생의 길이다. 여성 차별/혐오가 심각해지는 상황 속에 유명인들의 입만 지켜볼 수 없다. 우리는 록산 게이처럼 ‘나쁜 페미니스트’가 되어야 한다. 페미니즘을 완벽히 알지 못하더라도 누구나 여성에게 불합리한 문제를 인식하고, 개선하기 위한 의견을 말할 자격이 있다. 소신 있게 페미니즘에 관한 자기 생각을 피력했는데, 상대방에게 지적받는 경우가 있다. 틀려도 오해받아도 좋다. 잘못된 점은 인정하고, 새로 배워나가면 된다. 페미니즘이라고 해서 늘 동일한 선상에서 문제를 바라보는 페미니스트들만 모여 있는 건 아니다. 록산 게이가 경계한 근본주의적 페미니스트는 페미니즘 담론을 방해하기도 한다. 모두 다 생각의 차이가 있으며 편견에 사로잡힌다.

 

나는 나쁜 페미니스트다. 여전히 내 머릿속에는 남성중심적 사고가 얼룩무늬 흔적처럼 뚜렷하게 남아 있다. 페미니즘을 받아들여서 머릿속을 말끔하게 씻으려고 해도 쉽지만 않다. 가끔 얼룩무늬 흔적의 후유증 때문에 곤혹스러운 발언이 갑자기 뛰어나올까 봐 두렵다. 생각이 단단히 여물지 못해도 ‘오랫동안 여성을 함부로 다룬 현실’이 부끄럽다. 나는 나쁜 페미니스트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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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5-24 19: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6-05-24 20:48   좋아요 1 | URL
맞습니다. 여성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진 시대인데, 여전히 가부장제 사회에서 볼법한 생각을 가진 분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가부장제 영향 속에서 자란 아버지 밑에서 자란 자식은 아버지의 행동을 관찰하게 됩니다. 아이가 부모의 거울이라고 하죠. 안 가르쳐줘도 아버지의 가부장제 행동을 자식이 따라하게 됩니다. 아내를 무시하는 아버지 밑에서 자란 유치원 자식들은 어머니를 무시합니다.

아무 2016-05-24 23:3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역관광이라는 말은 이따금씩 접했었는데, 이게 그런 의미였군요. 하...
오래 살아보진 않았습니다만, 남중과 남고, 군대를 거치면서 `여성을 함부로 다루는 현실`을 자주 접하긴 했죠. 그래서 소위 남초 사회/집단 안에서 남성적이라고 이야기되는 성격적 특성들에 거부감을 느낀 것도 사실이고, 여전히 저에게 그 느낌은 유효합니다. 사실 아무리 시대가 변했다고 해도 여전히 페미니즘이 가야할 길은 멀고, 남성들에게 필요한 것은 자신이 과거의 잘못된 제도나 교육이 체화되었는지 돌아보는 일일 텐데, 그런 사람을 보기도 쉽지 않고, 혐오에 대해 제대로 논의가 이루어지는 걸 보기도 쉽지 않죠. 볼 때마다 참 답답합니다..

cyrus 2016-05-25 15:08   좋아요 2 | URL
군대가 제일 심하죠. 군인들이 모이면 꼭 빠지지 않는 이야기 소재가 여자고, 여자와 잠자리한 경험담입니다. 선임에게 이런 이야기를 하지 못하면 재미없는 호구로 취급하고 은근히 무시합니다. 저는 사창가를 한 번도 가본 적이 없어서 첫 경험 얘기를 하지 않으니까 선임이 저를 갈군 적이 있습니다. 제가 빨리 입대했으면, 재미없다는 이유로 선임에게 두드려 맞았습니다. 제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군인들도 페미니즘 교육을 받았으면 좋겠습니다.
 
흥행의 천재 바넘 - 대중은 속기 위해 태어났다 인물탐구 1
강준만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1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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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사람과 이별했을 때 유행가 가사가 구구절절 심금을 울린다. 노래가 어쩌면 그리도 내 마음을 잘 알고 있었든지, 가사가 꼭 나의 이야기 같다. 마치 나를 모델로 하여 노래를 만든 것 같은 생각이 든다.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그건 착각이다. 가사를 쓴 사람이 내 이야기를 알 리가 없다. 그런데도 노래 가사가 자신의 이야기인 양 느껴지는 것은 노래를 듣는 사람의 불안한 심리 때문이다. 통상적으로 사람들은 누구에게나 들어맞을 수밖에 없는 일반적인 정보만 들으면 그게 ‘꼭 내 이야기 같다’라고 믿으려는 경향이 있다. 이런 현상을 심리학에서 ‘바넘 효과(Barnum Effect)’라고 한다. 19세기 말 곡예단에서 사람들의 성격과 특징 등을 알아내는 일을 하던 피니어스 테일러 바넘에서 유래했다. 바넘 효과는 유행가를 자신의 이야기인 양 착각하는 현상뿐 아니라, 우리의 일상에 깊숙하게 들어와 있다. 사람들이 답답할 때 용하다는 점쟁이를 찾아가서 그의 신통력에 탄복하는 것도 바넘 효과가 작용한 것이다.

 

 

 

바넘의 흥행은 매사가 이런 식이었지만, 대중은 바넘에 의해 속아 넘어가는 것마저 즐겼다. 중요한 건 사실이나 진실이 아니라 어떻게 해서건 대중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것이었으며, 바넘의 성공 비결은 바로 그런 일을 잘하는 탁월한 홍보술이었다. (24쪽)

 

 

 

사실 바넘은 천재였다. 그는 스토리텔링의 원조였고, 입소문 마케팅에도 탁월한 재능을 보였다. 바넘은 대중이 논란을 사랑한다는 걸 간파해 이를 마케팅에 적극 활용하는 방식으로 흥행사로서 입지를 구축했다. 반면 그를 나쁘게 말하면 머리 좋은 사기꾼이었고, ‘야바위(ballyhoo)의 왕자’였다. 그는 항상 ‘여러분이 한 번도 본적이 없는 것을 보여드립니다’ 등의 말을 거침없이 해대며 대중의 입소문을 이끌어냈다. 그는 자신의 선전술과 관련해서 의미심장한 말을 남겼다. “사람들은 태생적으로 기만당하기 좋아한다”

 

바넘의 선전술이 어찌나 뛰어났던지 그의 속임수를 보려고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바넘은 영국 식민지 시절을 겪고 조지 워싱턴 전 대통령의 간호 노예로 일했던 조이스 헤스라는 여성을 언론에 소개했다. 그녀의 나이는 놀랍게도 161세였다. 그러나 얼마 후 조이스 헤스는 161세가 아닌 80세로 밝혀졌다. 이에 바넘은 사기꾼이라는 비난을 면치 못하게 됐다. 그렇지만 이미 그는 큰돈을 모은 상태였다. 이번에 바넘은 인어 미라를 전시해 화제를 모았다. 하지만 원숭이와 연어 뼈를 이어 붙였다는 사실이 드러나 거짓으로 판명됐다. 또 그는 한 농장에서 발견됐다는 3m 크기의 거인 화석을 전시하기도 했으나 이 역시 사기였다. 미국인들은 바넘에게 속을 줄 알면서도 속았다. 그렇게 매번 속아 넘어가는 상황을 즐겼다. 바넘이 81세로 사망하자 미국과 유럽 각지에는 그의 죽음을 애도하는 사람들이 넘쳐났다고 한다.

 

 

 

 

 

 

 

바넘은 “대중은 스스로 믿고 싶어 하는 것을 믿는다.”라는 대중심리를 교묘하게 이용했다. 특히 바넘 효과는 정치인들이 많이 이용한다. 경제공화당 허경영 총재는 다소 황당해 보이는 공약들을 내세워 비주류 후보로는 이례적으로 뜨거운 반응을 얻었다. 허경영 신드롬은 사기꾼의 쇼와 똑같다. 정치적 의미나 의사 표현이 아닌 재미를 좇는 사람들의 관심일 뿐이다. 마술사의 마술이 눈속임인 것을 알면서도 거기에 빠져드는 것과 똑같다. 정치에 대한 부동층과 무관심층이 늘어나고 있는 상황에서 국민이 정치적 무관심에 대한 불만을 해소하려는 측면이 있었다. 결국, 국민의 정치적 무관심이 심할수록 사회 전체가 ‘엔터테인먼트 민주주의’에 휘둘린다. 정치가 엔터테인먼트로 탈바꿈하는 동안 정치 쇄신과 풀뿌리민주주의는 철 지난 유행어가 되고 말았다. 미국은 더 심하다. 도널드 트럼프는 수준 낮은 망언과 속임수를 통해 인지도를 높이고 있다.

 

우리나라 사회가 엔터테인먼트 민주주의를 극복하기는 현실상 어렵다. 언론은 엔터테인먼트 민주주의를 탄생하게 만든 공범자에 가깝다. 언론도 논란을 좋아한다. 인터넷상에서 논란을 부추기는 세력에게 언론이 맹목적으로 동조하는 것이 문제다. 여기에 대중은 구경꾼이 된다. 어쩌면 엔터테인먼트 민주주의는 현대 사회의 불가피한 현상일지도 모른다. 닐 포스트먼은 자신의 책 《죽도록 즐기기》에서 텔레비전이 등장한 이후 정치와 사회 같은 진지한 영역마저 ‘쇼’가 되어가는 현상을 경계했다. 정치인들에게도 공약을 내세울 때 쇼맨십이 요구되고, 스펙터클한 사건이 중요한 사건보다 더 많은 카메라의 관심을 받는 시대다. 야망을 품고, 유명해지고 싶은 사람이 정치인으로 변신하기에는 이보다 더 좋은 시대는 없다. 우리는 그들의 환상적인 정치 쇼에 매번 속을 것이다. 늘 그랬듯이(we always ha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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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대구 서구청 뒤편 평리공원에 도서 교환전과 알뜰 장터가 열렸다. 드디어 동네에서 열리는 도서 교환전을 구경하게 되었다. 매년 한 번씩 열리는 정기 행사인데 올해 들어서 처음 알게 되었다. 일반적으로 도서 교환권을 받으려면 집에 있는 책을 가져와야 한다. 당연히 나는 상태가 좋고, 읽을 만한 책을 가져오기만 하면 되는 줄 알았다. 그런데 조건이 있었다. 2010년 이후에 나온 책이어야 하고, 무조건 책 3권을 가져와야 도서 교환권을 받을 수 있었다. 이 사실을 몰랐던 나는 가져온 책이 조건에 부합되지 않은 사실을 행사 현장에서 알았다. 행사장과 집 사이의 거리가 가까워서 다행이었다. 햇볕이 너무 뜨거웠던 오전 날씨가 흠이었지만. 사실 도서 교환 방식에 불만이 있다. 1인당 책 3권을 가져와서 무료로 가져갈 수 있는 책의 권수는 고작 1권이다. 책 2권을 챙기려면 2010년 이후에 나온 책 6권을 가져와야 한다. 도서 교환권이 없는 사람은 책을 사야 한다. 책 한 권 가격이 1,000원이다. 어떤 책은 3,000원을 내야 한다. 지금도 1,000원짜리 책과 3,000원짜리 책의 차이점을 모르겠다.

 

집에 다시 가서 새로 가져온 책은 《강신주의 다상담》전 3권 세트였다. 동녘 출판사 이벤트에 당첨돼서 받은 책이다. 강신주의 글을 좋아하지 않는 편이라 1권을 읽다가 말았다. 속표지에 출판사 증정 도장이 찍혀 있어서 알라딘 서점에 팔 수가 없었다. 안 읽는 책을 책장에 오래 보관해야 할 이유가 없다. 미련 없이 헤어져야 한다. 《강신주의 다상담》 세트를 가지고 다시 도서 교환권 배부처에 갔다. 배부처에 세 명의 아주머니가 앉아 있었다. 교환권을 배부하는 아주머니 한 분이 내가 가져온 책을 보더니 눈이 휘둥그레졌다.  

 

 

아주머니 : 어머나! 이 책 엄청 유명한 책이잖아요.


cyrus : 맞아요. 한 번 읽어봤는데 내용이 괜...


아주머니 : 이 책, 제가 가져갈게요. 호호호 (내 말 안 들림)

 

 

도서 교환전에 베스트셀러가 나오는 일은 가뭄에 콩 나듯 드물다. 좋은 책을 오랫동안 소유하고 싶은 게 사람 아니 애서가의 심리다. 반대로 내용이 시원찮은 책은 도서 교환전의 단골손님이다. 그래서 도서 교환전에 큰 기대를 하면 안 된다. 마음에 드는 책이 없다고 생각해야 한다. 도서 교환전에 비치된 책들 대부분은 새마을문고에 소장된 것들이었다. 역시 아동용 위인전, 동화, 그림책이 제일 많았다. 성인이 읽을 만한 책이 그리 많지 않았다. 내 눈에 띈 책은 하늘출판사에서 나온 故 신영복 교수의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구판이었다. 놀랍게도 책 상태가 아주 좋았다.

 

나는 《강신주의 다상담》 세트가 3,000원짜리 책을 파는 곳으로 갈 줄 알았다. 도서 교환권이 없는 사람이 세트를 사려면 9,000원을 내야 한다. 그런데 그 책은 1,000원짜리 책을 파는 곳으로 향했다. 오래된 책 위주로 파는 곳에 새 책을 끼여 파는 것이었다. 《강신주의 다상담》 세트를 가지고 싶었던 아주머니는 3,000원으로 책을 사는 데 성공했다. 말도 안 되는 책값으로 책을 파는 게 마음에 안 들지만, 원하는 책을 가지게 돼서 싱글벙글 웃는 아주머니의 얼굴을 보니 무척 행복해 보였다. 내가 저 아주머니의 기분을 잘 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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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생각하는발 2016-05-22 18: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야무 님과 사이러스 님 보면서 항상 깨닫게 되지만 좋은 책을 얻으려면 항상 발품을 팔아야 한다는 사실....

cyrus 2016-05-22 19:50   좋아요 0 | URL
책이 있는 곳에서 읽고 싶은 책을 직접 찾는 일이 즐거워요. 인터넷에서 주문할 때 기분과 완전 다릅니다.

yureka01 2016-05-22 19:5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책을 좋아하는 마음이 발걸음을 움직이게 했네요.역시 사랑한다면 행동하게 되니까요..좋은 행사입니다......

cyrus 2016-05-23 17:03   좋아요 1 | URL
이런 행사들이 많이 열렸으면 좋겠습니다. ^^

yamoo 2016-05-22 20: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곰발 님, 저보다 사이러스 님이 더 열성적이에요..ㅋㅋ 닉네임도 책성애자 잖아욤..ㅋㅋ

그나저나 박스 안의 아주머니 반응이 넘 웃기네요..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근데, 진짜 책을 분류하는 기준이 개 모모 같군요.ㅎ 강신주의 다상담이면 개인기 책이라 3천원 쪽으로 가도 이상할 게 하나도 없는데, 천원코너로 가다니..--;;

아, 그나저나 요즘 저도 교환할 책이 쌓여서 고민입니다. 서울권은 요새 도서교환전 같은 걸 전혀 안하고 있는지라..ㅜㅜ

cyrus 2016-05-23 17:08   좋아요 0 | URL
도서 교환전에 새 책을 내는 사람이 잘 없어요. 그래서 아주머니가 놀랐을 겁니다. ㅎㅎㅎ 제가 도서 교환전 책 받고 확인하는 사람이었다면 마음에 드는 책을 발견했을 때 흥분했을 거예요. ^^ 동네에서 진행되는 도서 교환전 같은 경우에는 홍보가 잘 안 돼서 모르는 사람이 많아요.

cyrus 2016-05-23 17:12   좋아요 0 | URL
혹시 교환할 책이 있으면 저한테 알려주십시오. 왠지 야무님 서재에 좋은 책이 많이 있을 것 같습니다. 제가 보답으로 새 책을 선물로 드리겠습니다. ^^

sb 2016-05-22 20: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도서 교환전이라 참여해보고 싶네요 ㅎㅎ

cyrus 2016-05-23 17:09   좋아요 0 | URL
큰 기대를 하면서 도서 교환전에 가보면 실망할 수도 있습니다. ㅎㅎㅎ

북다이제스터 2016-05-22 21: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강신주의 다상담>을 일찍이 처분했습니다.
그의 책이 좀체 왜 맘에 들기 어려운지 cyrus님과 나중 생각 나누고 싶습니다. ㅎ

cyrus 2016-05-23 17:10   좋아요 1 | URL
1권 반만 읽다가 안 읽었습니다. 애초에 읽고 싶었던 책이 아니라서 끝까지 읽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습니다. ^^;;

빨강앙마 2016-05-23 17: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역시 교환장터에서 좋은 책(?)을 득템한일은 극히 드문듯해요.. 그 아주머니는 정말 완전 기분 좋으셨을듯..^^

cyrus 2016-05-23 17:50   좋아요 0 | URL
완전 새 책인데, 온라인 중고삽에 팔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면 제가 호구됩니다. ㅎㅎㅎ
 

 

 

 

 

 

 

알라딘 어플에 접속해서 아래에 보면 ‘10분 독서-동영상 리뷰 OPEN’이라는 이벤트 페이지를 확인할 수 있다. 나는 처음에 이걸 보면서 동영상 형식으로 리뷰를 올리는 기능이 생기는 줄 알았다. 그게 아니라 알라딘이 제작한 동영상 리뷰를 말한 것이었다. 동영상 리뷰를 보고나서 소감 댓글을 남긴 500명은 적립금 1천 원, 추첨으로 뽑힌 두 명에는 적립금 1만 원을 지급한다. 

 

 

 

 

 

 

언젠가는 알라딘에 동영상 리뷰를 올리는 기능이 나올지도 모른다. 많지는 않지만, 유튜브에 들어가 보면 책을 소개하는 동영상이 있다. 유튜브에서 활동하다가 알라딘/북플에 동영상 리뷰를 올리는 한 분이 있다. Eunju님은 일주일에 두 편의 동영상 리뷰와 책 소개 동영상을 올린다(http://blog.aladin.co.kr/Eunjubook). 동영상을 직접 촬영하고, 편집하는 작업은 까다로운 편이다. 동영상 편집에 능숙한 솜씨를 가진 사람이라도 제대로 된 동영상 한 편을 제작하는 데 꽤 많은 시간을 들인다.

 

길게 나열된 텍스트로 이루어진 서평을 읽기가 지루하면 동영상 리뷰를 보면 된다. 책 내용이 귀에 쏙쏙 들어온다. 그리고 동영상 리뷰는 문자로 된 서평의 단점을 보완한다. 동영상 리뷰를 통해 책 표지와 디자인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다. 내가 문자 형태로 ‘이 책은 이렇게 생겼고요, 표지가 이런 형태입니다’라고 구구절절하게 써도, 텍스트를 받아들이는 독자에게 책의 모습을 생생하게 전달하기 어렵다. 스마트폰 혹은 컴퓨터로 문자 텍스트를 읽으면서 집중하는 시간이 1분이 채 안 된다고 한다. SNS에 발달할수록 문자 텍스트가 점점 짧아지고, 사진 및 동영상 텍스트를 선호하는 이유가 있다. A4 용지 한 장 반 정도로 쓰인 글은 그렇게 긴 분량이 아니다. 종이신문에 실리는 칼럼의 분량은 딱 A4 용지 한 장을 채운다. 하지만 이런 글도 스마트폰으로 보면 끝까지 읽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는다. 나도 그렇다. 스마트폰으로 텍스트를 접하는 횟수가 많아진 이후로 집중력이 크게 떨어졌다. 6년 전만 해도 컴퓨터 모니터로 독자 서평을 정독했었다. 그러나 이제는 스마트폰으로 북플을 접속하면 짧은 글 위주로 보는 일이 많아졌다.

 

수십 년 후 알라딘의 미래를 상상해본다. 과연 십년 후에도 알라딘은 국내 굴지의 온라인 서점으로 승승장구하고 있을까? 알라딘이 아니더라도 온라인 서점에 동영상 리뷰를 올릴 수 있는 기능이 따로 만들어진다면 어떤 일이 펼쳐질까? 동영상을 편집하고 업로드하는 방법을 숙달하면 누구나 동영상 리뷰를 올릴 수 있다. 특히 글쓰기를 부담스러워하는 분들은 동영상 리뷰로 자신의 책 관심사를 마음껏 표출한다. 특별한 방식으로 동영상 리뷰를 만들어서 시청자들의 관심을 유도하는 유명 동영상 리뷰어가 등장한다. 동영상 리뷰어가 점점 많아지자 부작용이 생긴다. 동영상 리뷰어가 책 소개를 하는 도중, ‘좋아요’를 눌러 달라고 거듭 강조한다. 다른 사람들의 관심을 받기 위해 본래 목적에 어긋나는 내용을 소개하는 불량 동영상 리뷰가 속출한다. 책을 제대로 안 읽었으면서 책 표지 달랑 보여주고, 대충 책 소개하는 동영상 리뷰어는 읽은 척하면서 자랑하는 독자와 같다. 늘 새로운 먹잇감을 찾으려는 악플러들은 동영상 리뷰어를 노리기 시작한다. 그들은 책 소개에 전혀 관심이 없고, 동영상 리뷰어의 외모를 비하한다. 

 

지금까지 동영상 리뷰가 유행하는 미래의 모습을 생각나는 대로 써봤다. 동영상 리뷰어가 많아진다고 해서 우리나라 독서열이 높아질 거로 기대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자신의 관심사를 알리고 싶은 독자들의 참여가 높아질 가능성이 있다. 글을 쓰는 고민을 하지 않아도 된다. 가족, 친구들을 위해 편안하게 책을 권유하는 마음으로 부담 없이 책을 소개하면 된다. 동영상 리뷰어가 많아지는 날이 오면, 나는 글쓰기를 그만둘 것이다. 매일 글 한 편 쓰는 일이 버겁다. 동영상 리뷰어로 전향할 생각도 없다. 내 외모는 방송용으로 부적합하다. 그냥 평범하게 책 읽으면서 하루를 보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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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5-22 13:07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6-05-22 13:34   좋아요 0 | URL
그럴 수도 있겠어요. 제가 너무 낙관적으로 생각했군요. 동영상으로 만든 다이제스트가 많아질 수 있겠어요.

:Dora 2016-05-22 23: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진지하게 읽다가 막판에 조금만 웃었어요 ...동영상 싫은 일인 추가요

cyrus 2016-05-23 17:14   좋아요 0 | URL
동영상을 정보를 효과적으로 전달하기에 좋은 방식이긴 한데, 요즘은 부작용이 많이 나오고 있어서 그런지 동영상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 많을 거 같아요.
 

 

 

이틀 전에 민음사가 창립 50주년을 맞았다. 축하할 일이다. 여기에 맞춰 민음사는 창립 50주년을 기념하여 ‘세계시인선’ 15권을 새롭게 출간했다. 세계시인선을 모으는 독자로서 무척 반가운 소식이다.

 

 

 

 

 

 

 

 

 

 

 

 

 

 

 

 

 

세계시인선 리뉴얼판 네 번째 작품은 프랑수아 비용의 《유언의 노래》다. 비용은 프랑스 중세 말기에 활동했던 시인이다. 백년전쟁의 열기가 식지 않은 1431년 파리에서 태어났다. 그의 삶은 평범하지 않았다. 비용은 필립 세르모아라는 신부와 언쟁을 벌인 끝에 단검으로 그를 찔러 죽였다. 사실 피를 부르는 싸움의 발단은 세르모아였다. 그가 느닷없이 비용 일행에게 다가가서 시비를 걸었다. 처음에 비용은 싸움을 원하지 않았다. 그런데 세르모아는 단검을 빼내어 비용의 얼굴에 상처를 입혔다. 비용 입장에서는 자신의 목숨을 지키기 위해 세르모아를 공격했을 것이다. 비용은 칼에 찔린 세르모아의 머리에 돌을 던졌다. 길바닥에 쓰러진 세르모아를 내버려둔 채 비용 일행은 부리나케 도망갔다. 싸운 지 3일 뒤에 세르모아는 사망했다. 살인자가 된 비용은 가명을 사용하면서 7개월 동안 도피 생활을 했다. 비용의 범죄 이력은 이게 끝이 아니다. 친구들과 함께 학교 돈을 훔친 사실이 발각되어 또다시 도망자 신세가 되었다. 몇 차례 투옥되기도 했지만, 운 좋게 풀려났다. 비용은 짧지 않은 방랑 생활을 보냈는데, 그간의 행적에 대해선 많이 알려지지 않았다.

 

비용 주변에는 행동이 불량한 친구들이 많았다. 비용이 그들과 같이 다니면 불미스러운 사건이 생겼다. 비용 일행 중 한 사람이 싸움을 걸어 사람을 죽이고 말았는데, 억울하게도 비용이 그 자리에 긴급 체포되고 말았다. 설상가상으로 이 사건의 재판을 담당한 자는 평소 행실이 좋지 않은 자를 엄하게 처벌하기로 악명 높았다. 비용은 물고문당한 후에 교수형 선고를 받는다. 억울한 비용은 판결에 불복상고를 신청했다. 다행히 그는 교수형을 면했고, 10년간 파리추방의 선고를 받았다. 파리를 떠나는 횟수만 해도 세 번째였다. 1463년 1월에 파리를 떠났는데, 그 이후 비용이 여생을 어떻게 보냈는지, 언제 세상을 떠났는지 알 수 없다.

 

비용은 1456년 말 혹은 1457년 초에 <유증시>(Lais)를 썼고, 이를 개작해서 나온 작품이 바로 <유언시> 혹은 <유언의 노래>(Le Testament)다. 비용은 그 당시 유행한 발라드(ballade) 형식을 따랐는데, 발라드란 자유로운 형식의 담시를 의미한다. <유증시>는 비용이 주변 사람들의 이름을 열거하면서 자신의 물품을 유증하는 형식으로 이루어진 장시다. <유언시>는 <유증시>를 개작한 것이다. 1461~1462년 수감되었을 때 쓰였을 거로 추정한다. <유언시>는 비용의 심적 변화가 뚜렷하게 드러나는 작품이다. 전반부에서 비용은 자신에게 내려진 처벌이 가혹하다고 호소하지만, 끝내 신 앞에서 회개할 것을 다짐한다.

 

 

나는 죄인이로다, 그것을 잘 알고 있거늘
그러나 신은 내 죽음을 바라지 아니하고
죄에 괴로워하는 모든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행실을 고치고 선하게 살기를 원하도다.
내가 죄로 인하여 죽는다 하더라도
신은 산다고 하셨기에
내 양심이 가책을 느낄 때
그 자비로움은 나를 너그럽게 용서해 주시리라.

 

(<유언시> 문학과지성사 77~78쪽)

 


후반부에 <유증시> 내용 일부가 다시 등장하는데, 전반부에서 보여주던 회개하는 태도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사회를 향해 신랄한 조롱을 퍼붓는다. 창녀, 떠나버린 연인을 비난하는 냉소적인 분위기의 발라드가 있다.

 

 

 

 

 

 

 

 

 

 

 

 

 

 

 

 

 

 

자신의 삶에 회한을 무수히 느끼면서도 갑자기 냉소적인 태도로 돌변하여 세상을 향해 악담하는 비용의 정서적 태도는 훗날 보들레르와 아폴리네르로 이어진다. 보들레르와 아폴리네르도 순탄치 않은 인생을 살았던 시인들이다. 비용과 아폴리네르의 생애를 비교해보면 닮은 점이 몇 가지 있다. 두 사람 다 실연으로 큰 아픔을 겪었고, 시를 통해 떠나간 여인들을 원망하는 심정을 직설적으로 드러냈다. 아폴리네르는 루브르에 전시된 다 빈치의 <모나리자> 도난 사건에 휘말려 한동안 곤욕을 치러야 했다. 아폴리네르는 <모나리자> 도난 사건에 전혀 관련이 없었다. 뚜렷한 직업 없이 파리에 머무는 이탈리아인이란 이유로 절도 범죄자로 몰렸다. 이로 인해 아폴리네르는 상테 감옥에 일주일 동안 수감되었다. 그는 당시 억울함 심정을 담아 ‘상테 감옥으로’라는 제목의 시를 썼다.

 

 

감방으로 들어가기 전에
나는 알몸이 되어야 했으니
어느 불길한 밤새 소리 울부짖는다
기욤 너 이게 무슨 꼴이냐고

 

나는 어찌 되나요 오 내 고통을 아시는 신이시여
 그 고통을 주신 그대여
불쌍히 여기소서 눈물 없는 내 눈을 내 창백한 얼굴을
 사슬에 매인 내 의자 삐걱대는 소리를

 

울고 있는 이 시간을 네 울며 한탄할 날 있으리
어느 시간이나 그렇듯이
너무나 빨리 지나갈 이 시간을

 

(‘상테 감옥으로’ 중에서, 《알코올》 175~179쪽)

 

 

아폴리네르는 기소유예로 풀려났지만, 파리 사회는 무국적자인 그를 ‘잠재적 범죄자’로 몰아세웠다. 국외 추방의 위협을 받은 아폴리네르는 작가 활동에 큰 타격을 입었다. 제1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16년에 아폴리네르는 프랑스 국적을 얻었다. 그가 프랑스군에 자원입대했기에 이루어진 일이었다. 프랑스 국적을 얻은 지 닷새 만에 아폴리네르가 소속된 사단이 최전방에 투입되었다. 전쟁터에 들어가기 전에 아폴리네르는 약혼녀에게 짧은 편지를 보냈다.

 

 

“내가 가진 모든 것을 그대에게 유증합니다. 만일의 경우, 이것을 나의 유언으로 간주하시오.” (《알코올》 348쪽)

 

 

불행하게도 아폴리네르는 오른쪽 관자놀이에 포탄 파편이 박히는 부상을 입었다. 오랜 수술 끝에 극적으로 살아남으나, 부상 후유증으로 약간의 마비 증세를 겪어야 했다. 비용과 아폴리네르는 세상으로부터 사랑받지 못한 저주받은 시인이었다. 안정된 삶을 누리지 못한 두 시인은 시집으로 자신들의 삶을 알리려고 애썼다. <유언시>와 《알코올》은 시인들의 회한의 자취와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장대한 묘비명이다. 

 

 

 

 

사진출처: 민음사 공식 블로그(http://blog.naver.com/minumworld/220712963719)


 


프랑스 중세 시인의 작품이 소개돼서 기쁘지만, 출판사 창립 기념의 즐거운 분위기를 망치더라도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다. 민음사 공식 블로그에 들어가 보면 시집을 간략하게 소개한 글들이 있다. 민음사는 《유언의 노래》를 ‘국내 최소 소개’한 시집으로 소개했다. 이는 잘못된 사실이다. 아주 오래전에 비용의 시집이 완역된 적이 있다.

 

 

 

 

 

1980년 플로베르 연구의 권위자이자 불문학자인 송면 교수가 번역한 적이 있다. 번역본 출판사는 ‘문학과지성사’다. 송 교수는 동서문화사판 《레 미제라블》과 1985년 노벨 문학상 수상자 클로드 시몽의 《플랑드르로 가는 길》 등을 번역했고, 1994년에 세상을 떠났다.

 

 

 

 

 

 

 

 

 

 

 

 

 

 

 

 

 

그가 세상을 떠나고 난 후 이듬해에 나온 유고집이 《프랑수아 비용 : 그 생애와 시 세계》(동문선)이다. 송 교수가 비용을 처음 알게 된 계기가 특별하다. 송 교수가 일본 와세다대학에서 불문학을 전공할 당시 일본인 지도교수로부터 비용 연구를 권유받았고, 비용 연구는 송 교수의 부전공이 되었다. 그의 지도교수가 비용 연구의 권위자였다. 만약 송 교수가 그를 만나지 못했으면, 비용이 국내에 처음 소개되는 시기가 엄청 늦어졌을 것이다.

 

 

 

 

 

 

 

 

 

 

 

 

 

 

 

 

 

 

진중권은 《미학 오디세이》 1권에 송 교수가 번역한 <유언시>를 참고하여 일부 문장을 인용한 적 있다.

 

 

저는 가난하고 늙은 여인입니다
아주 무식해서 읽을 수도 없어요
그들은 저희 마을 교회에
하프가 울려 퍼지는 천국과
저주받은 영혼들이 불타는 지옥을 그려서 보여주었어요
하나는 내게 기쁨을 주지만
다른 하나는 두려움을 줍니다.

 

(《미학 오디세이》 1권 구판 150쪽)

 


저는 아무 것도 모르는, 낫 놓고 기역자도 모르는
불쌍한 늙은 여자외다.
제가 속하고 있는 성당에는
수금과 비파가 그려진 천국의 그림과
죄인들이 업화에 타는 지옥의 그림이 있는데
하나는 저를 무섭게 하고 하나는 저를 기쁘고 즐겁게 하나니
하늘의 거룩한 성모여 죄인은 독실한 신앙을 가지고
가식도 거짓도 없이 당신에게 매달리지 않을 수 없은즉
그 기쁨 저로 하여금 느끼게 해주소서.
그러한 신앙으로 살다가 죽으오리다.

 

(<유언시> 문학과지성사 128쪽)

 


진중권은 이 문장을 ‘어머니를 위한 발라드’에서 따온 것이라고 밝혔으나 송 교수의 번역본에 보면 시의 제목이 ‘성모에게 기도하기 위한 발라드’로 되어 있다. 진중권이 책을 쓰는 과정에 성모를 ‘어머니’로 착각한 것일까.

 

‘국내 최초 소개’한 작품을 책으로 만드는 것은 출판사 입장에서는 기념비적인 일이다. 하지만 책을 만들기 전에 이미 나온 적이 있는지 사실을 꼼꼼하게 조사해볼 필요가 있다. 그럴 일은 없겠지만, 출판된 사실을 알면서도 모르는 척하면서 ‘국내 최초’의 수식어를 내세우는 일은 옳지 않다. 출판사가 이런 실수를 하지 않으려면 책의 존재가 잊히지 않도록 해야 한다. 이 일은 독자의 몫이다. 독자 서평은 단순히 감상 수준에 그치는 개인적인 기록을 넘어선 오랫동안 책의 존재를 알려주는 중요한 기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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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랑 2016-05-21 21: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민음사 세계시인선을 20여권 모으고 있었는데 어느 순간 잘 보이지 않더군요. cyrus님이 아니었다면 이번에 새로 나왔는지 몰랐을 거에요, 좋은 정보 감사합니다! 새로운 디자인도 끌리지만 내용면에서도 번역이나 다른 부분도 만족스러웠으면 합니다.

cyrus 2016-05-22 08:16   좋아요 0 | URL
저보다 많이 모으셨는데요. 저도 이미 다른 분들이 소개한 글을 보고 알았습니다. 그 덕분에 민음사 창립 50주년도 같이 알았고요. ^^

yamoo 2016-05-22 20: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알코올, 저도 있는데, 도체 어디 있는지 찾지 못하고 있습니다..ㅜㅜ

저는 시 선집은 취급안하는지라, 패쑤할게욤^^;;

cyrus 2016-05-23 17:18   좋아요 0 | URL
시인선에 포함된 <악의 꽃>이 기존의 김붕구 번역에서 황현산 번역으로 바뀌었어요. 그런데 완역은 아닙니다. 그게 좀 아쉬워요. 황현산 교수가 완역한 <악의 꽃>이 나왔으면 좋겠습니다. ^^

nomadology 2016-05-24 13: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궁금한게 세계시인선은 원본과 번역이 같이 나왔던가요? 아니면 번역만 나오나요??

cyrus 2016-05-24 14:13   좋아요 0 | URL
원문과 번역문 같이 나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