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쁜 페미니스트 - 불편하고 두려워서 페미니스트라고 말하지 못하는 당신에게
록산 게이 지음, 노지양 옮김 / 사이행성 / 2016년 3월
평점 :
품절


 

 

 

책 소개 시작을 하기에 앞서 반성부터 먼저 한다. 그동안 우리 사회에 썩은 채 뿌리 깊게 박혔던 여성 혐오, 여성 차별 문제를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못한 점, 반성한다. 소설가 록산 게이는 자신의 책 《나쁜 페미니스트》에서 ‘오랫동안 여성을 함부로 다룬 현실’에 눈물이 난다고 적었다. 그리고 그 사회가 여성을 무시하는 나쁜 남자들(본문에는 ‘당신’으로 되어 있다)을 망쳐 놓았다고 했다. 내 주변에 여성을 가볍게 대하는 남자들을 많이 봤다. 여성을 소재로 성적으로 농담하고, 여성과 잠자리를 한 경험을 서슴없이 얘기하는 친구들도 있었다. 나는 그들의 말에 거부감을 느꼈지만, 완전히 잘못된 생각이라고 반박하지 못했다. 입에 담지 못할 말을 억지로 귀 기울어 들어야 했다. 나는 그들을 망쳐 놓았다. 그들의 잘못된 행동을 알면서도 방관했다.

 

죽지 않고 영생하는 암세포가 있다. 현재 전 세계에서 가장 널리 활용되고 있는 암세포인 ‘헬라세포(Hela Cell)’이다. 자궁경부암으로 세상을 떠난 헨리에타 랙스의 이름에서 두 글자를 따서 만든 것이다. 이 암세포는 60년 동안 비교적 안정된 핵형을 유지한 채 지금도 배양액 속에서 분열하고 있다. 여성 차별/혐오 문제는 끊임없이 분열되는 헬라 세포와 같다. 점점 사라지기는커녕 오히려 우리 일상 속에서 번식하고 있다. 여성 차별/혐오가 세포처럼 분열되어 일상 깊숙이 침투하는데, 그 전파 속도가 무척 빠르다. 텔레비전 드라마, 영화, 인터넷, SNS 등을 통해 전파되어 우리 가정에 침투한다. 그렇게 우리는 여성 차별/혐오가 숨겨진 텍스트 및 영상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

 

단적인 예를 들자면, 강간에 대한 인식에서 찾아볼 수 있다. 록산 게이는 미국 사회가 ‘강간과 관련된 것들을 지나치게 수용하는 문화’라고 꼬집었다. 즉 미국인들은 ‘강간 문화(rape culture)’ 속에 살아가고 있다. 강간 문화의 시대에는 여성을 향한 남성의 폭력성과 공격성을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영화나 드라마에 줄거리와 상관없는 성폭력 장면이 등장하는가 하면, 강간이 연상되는 내용의 유머를 편집 없이 브라운관에 전파된다. 미국의 ‘강간 문화’가 우리 사회에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건 크나큰 착각이다.

 

2010년에 방송된 KBS 2TV <추노> 3회는 지나친 음담패설이나 성추행 같은 장면을 남발한 최악의 에피소드다. 특히 남자들이 드라마 속 여주인공 언년이(이다해 분)에게 겁탈을 시도하는 장면은 필요 이상의 자극적인 설정이다. 이때 언년이의 모습은 한복 상의가 벗겨져 어깨 속살을 드러낸 상태였다. 지금도 포털사이트에 검색하면 문제의 장면을 캡처한 사진이 나온다. 3회가 방영된 이후 ‘이다해 노출’이 큰 화제가 되었는데, 놀랍게도 방송통신심의위원회는 드라마에 경고 제재를 주지 않았다.

 

 

 

 

 

 

인터넷 문화에 익숙한 아이들, 젊은 사람들이 쓰는 속어 중에 ‘개관광’이라는 말이 있다. 스포츠 경기에서 압도적으로 크게 패하는 선수나 팀, 혹은 일 대 일 대 형식의 컴퓨터 게임(스타크래프트)에 처참하게 패배한 게이머를 조롱하는 의미에서 ‘개관광당했다’라는 말을 자주 쓴다. ‘개관광’이 좋은 의미를 가진 속어가 아니다. 이 속어의 유래에 대한 설이 분분하지만, ‘강간’이 ‘관광’으로 변형되어 전해진 사실을 부정할 수 없다. ‘강간’의 어감이 좋지 않기 때문에 어감이 비슷한 ‘관광’으로 바꾼 것이다. 외국에서도 한 팀이 일방적으로 우승한 싸움을 ‘Reaped(강간당하다, 약탈당하다)’라고 부른다. 아이들은 속어 ‘관광’의 의미를 알지 못한다. 그저 재미있는 표현이라고 생각하면서 속어를 사용한다. 나도 철없던 학창 시절에 이 표현을 자주 사용했다. 강간을 가볍게 여기는 속어를 사용하는 짓은 발화자 자신의 천박한 수준을 스스로 드러내는 꼴이다.

 

록산 게이는 자신을 ‘나쁜 페미니스트’라고 지칭했다. 여기서 말하는 ‘나쁜 페미니스트’는 남성을 적으로 간주하고, 히스테리 환자 같은 왜곡된 편견으로 매겨진 페미니스트를 의미하지 않다. 그녀는 자신을 모순덩어리 페미니스트라고 고백한다. 완벽한 인간은 없다. 누구나 약점 하나씩 가지고 있다. 편견에 휩싸이기 쉽다. 이로 인해 어떤 현상을 잘못 분석하고 판단한다.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저지른다.

 

UN 여성 친선대사 자격으로 연설한 동영상이 전 세계로 알려진 후로 ‘페미니스트의 아이콘’이 된 엠마 왓슨. 최근 그녀가 파나마 페이퍼스 명단에 연루된 사실이 알려졌다. 왓슨 측은 탈세 목적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고 해명했지만, 해외 네티즌들은 크게 실망했다. 한동안 잠잠하던 여성혐오론자들이 악마의 날개를 쭉 편다. 그들은 왓슨을 대중의 광장 한가운데에 몰아세워 페미니스트의 도덕적 결함을 지적한다. 그러면서 페미니스트를 향한 반감 정서를 키우기 시작한다.

 

 

최근 페미니즘이 이런 이유로 고통을 당하고 있다. 유명인들이 우리가 듣고 싶은 말을 하면 그들을 페미니스트 왕좌에 올려놓고 떠받들고 칭송하다가 그들이 마음에 들지 않는 행동을 하면 바로 무대에서 끌어내리며 페미니스트 리더들이 우리를 실망시켰으므로 페미니즘에 본질적인 문제가 있다고 결론 내린다. (서문 13쪽)

 

 

미국이든 한국이든 어딜 가도 페미니즘은 늘 오해를 받고, 핍박받느라 고생한다. 페미니스트를 괴롭히지 못해 안달 나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 그들은 페미니즘을 ‘유명인이 인기를 많이 받기 위해 아는 척 떠드는 철학’으로 여긴다. 유명인의 페미니즘 발언에 공감하는 여성들의 반응이 한심하다고 조롱한다. 여성 혐오 표현을 일삼는 일베 회원은 그녀들을 ‘김치녀’라고 폄하한다. 페미니스트를 떠나서 여성의 존재 자체를 비하하는 극단적인 사회 속에 여성 유명인들마저 떳떳하게 페미니스트라고 밝히지 못한다. 페미니즘은 전문가나 공인이 앞장서서 대중에게 전파하는 철학이 아니다. 페미니스트의 잘못된 행동의 원인을 무조건 페미니즘에서 찾으려고 하는 것은 악의적인 비난에 불과하다.

 

페미니즘은 남녀 모두 평등하게 살아가는 법을 모색하는 상생의 길이다. 여성 차별/혐오가 심각해지는 상황 속에 유명인들의 입만 지켜볼 수 없다. 우리는 록산 게이처럼 ‘나쁜 페미니스트’가 되어야 한다. 페미니즘을 완벽히 알지 못하더라도 누구나 여성에게 불합리한 문제를 인식하고, 개선하기 위한 의견을 말할 자격이 있다. 소신 있게 페미니즘에 관한 자기 생각을 피력했는데, 상대방에게 지적받는 경우가 있다. 틀려도 오해받아도 좋다. 잘못된 점은 인정하고, 새로 배워나가면 된다. 페미니즘이라고 해서 늘 동일한 선상에서 문제를 바라보는 페미니스트들만 모여 있는 건 아니다. 록산 게이가 경계한 근본주의적 페미니스트는 페미니즘 담론을 방해하기도 한다. 모두 다 생각의 차이가 있으며 편견에 사로잡힌다.

 

나는 나쁜 페미니스트다. 여전히 내 머릿속에는 남성중심적 사고가 얼룩무늬 흔적처럼 뚜렷하게 남아 있다. 페미니즘을 받아들여서 머릿속을 말끔하게 씻으려고 해도 쉽지만 않다. 가끔 얼룩무늬 흔적의 후유증 때문에 곤혹스러운 발언이 갑자기 뛰어나올까 봐 두렵다. 생각이 단단히 여물지 못해도 ‘오랫동안 여성을 함부로 다룬 현실’이 부끄럽다. 나는 나쁜 페미니스트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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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5-24 19: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6-05-24 20:48   좋아요 1 | URL
맞습니다. 여성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진 시대인데, 여전히 가부장제 사회에서 볼법한 생각을 가진 분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가부장제 영향 속에서 자란 아버지 밑에서 자란 자식은 아버지의 행동을 관찰하게 됩니다. 아이가 부모의 거울이라고 하죠. 안 가르쳐줘도 아버지의 가부장제 행동을 자식이 따라하게 됩니다. 아내를 무시하는 아버지 밑에서 자란 유치원 자식들은 어머니를 무시합니다.

아무 2016-05-24 23:3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역관광이라는 말은 이따금씩 접했었는데, 이게 그런 의미였군요. 하...
오래 살아보진 않았습니다만, 남중과 남고, 군대를 거치면서 `여성을 함부로 다루는 현실`을 자주 접하긴 했죠. 그래서 소위 남초 사회/집단 안에서 남성적이라고 이야기되는 성격적 특성들에 거부감을 느낀 것도 사실이고, 여전히 저에게 그 느낌은 유효합니다. 사실 아무리 시대가 변했다고 해도 여전히 페미니즘이 가야할 길은 멀고, 남성들에게 필요한 것은 자신이 과거의 잘못된 제도나 교육이 체화되었는지 돌아보는 일일 텐데, 그런 사람을 보기도 쉽지 않고, 혐오에 대해 제대로 논의가 이루어지는 걸 보기도 쉽지 않죠. 볼 때마다 참 답답합니다..

cyrus 2016-05-25 15:08   좋아요 2 | URL
군대가 제일 심하죠. 군인들이 모이면 꼭 빠지지 않는 이야기 소재가 여자고, 여자와 잠자리한 경험담입니다. 선임에게 이런 이야기를 하지 못하면 재미없는 호구로 취급하고 은근히 무시합니다. 저는 사창가를 한 번도 가본 적이 없어서 첫 경험 얘기를 하지 않으니까 선임이 저를 갈군 적이 있습니다. 제가 빨리 입대했으면, 재미없다는 이유로 선임에게 두드려 맞았습니다. 제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군인들도 페미니즘 교육을 받았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