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부가 1950년 첫 귀순자가 나온 뒤부터 통계를 잡기 시작한 탈북자 수는 올해 (8월까지 기준으로) 2만 5560명이다. 남한에 입국하는 탈북자 증가 속도가 늘어나는 추세지만, 반대로 죽음의 위협을 무릅쓰고 한국에 와놓고도 다시 한국을 등지는 탈북자들도 많아지고 있다. 남한 생활 적응이 여의치 않은 탓에 제3국으로 발길을 돌리는 사람부터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나 여러 복잡한 이유로 북한으로 다시 돌아가는 경우도 있다.

 

얼마나 많은 탈북자가 남한을 떠나는지는 통일부는 정확한 통계를 하고 있지 않다. 탈북자단체들의 추정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데 단체에 따라 추정 수치가 제각각이다. 최소 2000명에서 최대 4000명 정도 추정하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남한에 있는 탈북자 정보를 북측에 넘기거나 김정은 정권이 들어선 이후부터 재입북자들이 북한 방송에 등장하는 횟수가 잦다는 점이다. 북한을 탈출해 남한의 품에 안겼던 그들은 남한 사회를 부정적으로 표현한다. 체제의 이완 현상을 단속하는 동시에 탈북 현상을 막기 위한 북한 정부의 전략에 동원된다. 재입북을 시도하는 탈북자가 북한에 잘 보이기 위해서 스스로 간첩이 되거나, 간첩인 척 행동하든지 간에 북한의 전략은 남한 내 탈북 사회를 동요시킬 수 있다.

 

아마도 법대 교수는 이러한 탈북자들을 자유민주주의를 해치며 북한 정권에 붙는 행위를 하는 ‘배신자’로 규정하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규정하려는 대상을 가리키는 표현이 지나치게 과격했고, 명확하지 않았다. 북한에 탈출하여 주민들의 참혹한 생활상을 알려 북한 주민의 인권 보호를 위해 노력하는 선의의 탈북자 집단을 고려하지 못한 경솔한 표현이다.

 

그리고 탈북자들에게 ‘사형’, ‘처형’은 북한 사회를 잊고 싶게 만드는 무시무시한 단어들이다. 비참하게 죽음을 맞이하게 될지도 모르는 하나뿐인 삶을 담보를 걸어 남한으로 탈출했다. 그 과정에서 탈출을 함께했던 지인이 불행하게도 북한 군인에 붙잡혀 강제 북송되어 끔찍한 최후를 맞이하는 것을 풍문으로 들었거나 직접 목격했을 것이다. 또 자신 때문에 그 곳에 남아 있는 가족들의 생사가 불투명하다. 이렇듯, 탈북자에게 ‘사형’은 트라우마를 불러 일으키는, 절대로 해서는 안 될 단어다. ‘배신자’들을 사형으로 단죄하기보다는 재입북하는 탈북자가 없도록 관련 제도와 체계를 마련하는 것이 우선이다.

 

탈북자 문제도 이념에 따른 인식의 차이가 있기 때문에 상당히 민감한 사안이다. 그래서 신중하게 생각해야 한다. 탈북자 인권에 대한 관심이 부족하면 이번 망언 논란처럼 탈북자에 대한 인식의 오해가 형성될 수 있다. 이번 사건을 단순히 종북 프레임으로 몰아 세워서 갈등과 논란을 조장하도록 감정의 불을 계속 지펴서는 안 된다. 꺼진 불을 다시 봐야 한다. 한국 사회에 들어온 탈북자들을 어떻게 대하고 있는지, 그들이 인권과 안전이 제대로 보장되고 있는지 되새겨 볼 시점이다. 재입북자로 인해서 ‘자유민주주의’보다는 국내 탈북자들의 인권이 파괴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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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13-11-29 15: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떻게 저런 망언을 할 수 있는지...ㅉ
저 사람 탈북자 신세 되봐야 정신 차리려나? 민망하다. 이땅의 지성은 다 죽었나 보다.
무슨 근거로 저런 말을 하는 건지...ㅠㅠ

cyrus 2013-12-03 20:23   좋아요 0 | URL
이 분 때문에 울학교 캠퍼스나 홈페이지 게시판이 조용할 날이 없어요. 학교 정문에서 규탄 시위도 하고 있고요...

2013-12-04 12:09   URL
비밀 댓글입니다.
 

 

 

 

 

 

 

 

 

 

 

 

 

 

 

 

사람이 예술이고 예술이 사람 자체이다. 삶의 기록에 감정을 담으면, 그 글자들이 리듬을 타고 음악으로 표현되며, 손에 리듬을 타면 그림으로 표현된 작품이 된다. 나라는 인생을 보여주는 자화상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색감이나 느낌의 분위기들은 다른 모습을 하고 있어 참 매력적이다. 잔잔한 음악과 비 내리는 저녁, 창가에 앉아 인생 이야기를 나눔은 눈물과 웃음이 가득한 예술로 승화되어진다. 프리다 칼로와 에디트 피아프도 그들의 슬픈 인생을 예술을 통해 극복했고, 그 극복의 예술은 사람들로부터 공감을 이끌어냈다. 두 여인의 예술은 인생이라는 작품과 같다.

 

 

 

 

 

프리다 칼로  「상처 입은 사슴」 1946년

 

 

 

자화상을 많이 그린 프리다 칼로는 뛰어난 외모와 재능이 많지만 불운의 교통사고로 척추와 다리, 자궁을 크게 다쳐 평생에 걸쳐 수술대에 올랐고, 스스로 움직이지 못하는 절망에 빠진 나날을 그림으로 승화시켰다. 결혼을 통해 한 남자의 아내로 행복한 가정을 꾸리길 원했지만 벽화 제작 화가로 유명한 남편 디에고 리베라의 외도와 몇 차례의 유산은 평생을 고독과 외로움으로 점철되게 했다.

 

특히 리베라와 친동생 크리스티나와의 외도는 프리다 칼로에게 배신이라는 깊은 상처를 안겼다. 결국 이혼 후 홀로 여행하며 방황의 삶을 살았지만 결코 리베라를 정신적으로 떠나 보내지 못했다. 프리다에겐 리베라는 연인이자 동지, 그 이상의 존재였으며 어떤 것으로도 대신 할 수 없는 인생의 동반자였기 때문이다.

 

1940년대 말 그녀는 건강이 급격히 악화돼 오른쪽다리를 절단하고 몇 차례의 수술의 실패를 거듭하며 휠체어와 침대 신세를 지고 살았지만 그림은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다. 죽기 전 그녀는 마지막으로 자신의 일기에 ‘이 외출이 행복하기를 그리고 다시 돌아오지 않기를’이라고 적었다. 이는 죽음을 오히려 행복한 외출로 받아들이고 삶의 고통과 외로움이 다시는 돌아오지 않기를 바라는 의미라고 감히 짐작해본다.

 

 

 

 

 

 

 

 

 

 

 

 

 

 

 

에디트 피아프는 ‘노래는 사랑이고 사랑은 노래’라고 말했다. 빈민가 차가운 길바닥에서 방랑곡예사 아버지와 길거리에서 노래하는 어머니 밑에서 태어난다. 어머니에게 버림받고 매음굴을 운영하는 친할머니 밑에서 자라다가 아버지와 유랑생활을 하며 노래 동량으로 지냈다.

 

그녀의 삶은 너무나도 불행했다. 교통사고, 두 번의 결혼과 이혼, 첫 번째 아이의 사망, 남편의 피살, 제자이자 연인이었던 남자에게 배신 그리고 ‘마지막 연인’ 권투챔피언 마르셀 세르당은 비행기를 타던 중 추락해 사망했다. 자책감에 칩거하고 삭발, 마약과 알코올중독으로 망가진 몸으로 48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난다. 비록 불행, 비극, 스캔들, 알코올과 마약 중독에 찌든 삶이었지만 사랑을 갈구했고, 노래를 향한 그녀의 진실성은 아직도 많은 이들에게 큰 감동을 선사해준다.

 

 

지금 그 사람의 이름은 잊었지만,

그의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네.

 

바람이 불고

비가 올 때도

나는 저 유리창 밖

가로등 그늘의 밤을 잊지 못하지.

 

사랑은 가고 과거는 남는 것

여름날의 호숫가 가을의 공원

그 벤치 위에

나뭇잎은 떨어지고

나뭇잎은 흙이 되고

나뭇잎에 덮여서

우리들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의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어

내 서늘한 가슴에 있네.           

 

- 박인환  《세월이 가면》-  

 

 

   

 

 

 

 

 

 

세월은 약이라 하여 아픔도 치유된다 하였거늘, 그렇지만 한평생 잊지 못해 세월 따라 애틋하기만 더한 것이 지나간 세월 우리를 뜨겁게 달궜던 사랑이다. 프리다 칼로와 에디트 피아프의 삶과 그림이 희미하게 상기시키면 박인환 시인의 ‘세월이 가면’이 더욱 아련하게 느껴진다. 그 가운데서도 이 구절이 가슴에 물밀듯 와 닿는다.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 그의 눈동자 입술은 / 내 가슴에 있네 / (중략) 사랑은 가고 옛날은 남는 것.“ 차가운 바람이 부고 가을비가 고요히 내리는 지금 유리창 밖 어두운 밤에 에디트 피아프의 ‘사랑의 찬가’가 내 서늘한 가슴을 스치 흘러간다.  

 

 

 

.

 

 

만약 어느 날 갑자기

나와 당신의 인생이 갈라진다 해도

만약 당신이 죽어서 먼 곳에 가 버린다 해도

당신이 나를 사랑한다면 내겐 아무 일도 아니에요.

나 또한 당신과 함께 죽는 것이니까요.

그리고 우리는 끝없는 푸르름 속에서

두 사람을 위한 영원함을 가지는 거예요.

 

사랑은 오로지 하나. 동서양의 시공(時空)에도 달라질 수 없는 본질. 영원하기가 이를 데 없는 감정의 실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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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애벌레가 본 것

 

 

 

 

 

 

 

트리나 폴러스의 『꽃들에게 희망을』이라는 책의 내용은 어른이 되어서도 잔잔하게 마음 어딘가에 남아 있다. 나비들을 볼 때마다 그들이 어떻게 꽃들에게 희망을 줄까 생각해 보기도 한다. 알에서 깨어나 애벌레, 고치가 되는 과정들을 통해 한 마리 나비가 되기까지의 과정들 자체가 희망이기 때문에 꽃들에게 희망을 줄 수 있는 존재가 아닐까 상상하기도 한다.

 

아직도 기억에 남는 장면은 호랑 애벌레가 기둥의 정상에 거의 다다랐을 무렵에 일어난 일이다. 천신만고 끝에 꼭대기에 거의 다다랐을 때 애벌레는 기쁨보다는 실망과 분노감을 느끼게 된다. 애벌레가 죽기 살기로 올랐던 기둥은 세상에 유일한 기둥이 아니었던 것이다. 수백만 애벌레가 아무것도 없는 꼭대기까지 올라오느라 평생을 낭비하고 있다는 사실을, 애벌레는 그제야 깨닫는다.

 

주인공 애벌레가 목격한 장면은 현대자본주의 사회에서 그대로 재현되고 있다. 높이를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높게 뻗은 수천 개의 기둥 중에서 이 시대에 가장 높은 기둥을 꼽으라면 아마도 돈과 부동산, 그리고 사회적 성공의 기둥일 것이다. 하지만 이 기둥들이 있다고 해서 우리에게 진정한 행복을 가져다주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 여러 연구 결과를 통해서 밝혀지고 있다.

 

 

 

 ♣ 돈과 성공이 행복을 위한 절대적 기준일까?

 

 

 

 

 

 

 

 

 

사람들은 지금보다 돈이 많으면 더 행복할 거라고 믿고 열심히 돈의 기둥을 오르려고 한다. 그러나 데이비드 브룩스는 『소셜 애니멀』에서 돈과 행복의 상관성은 명확하게 설명하기 어렵다고 말한다. 물론 부유한 사람일수록 행복할 확률이 높고, 부자 나라일수록 행복할 경향성이 높은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 상관성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크지 않다.

 

포브스가 선정한 미국의 수천억 원대 갑부들의 행복도를 조사한 적이 있다. 그 결과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돈이 많은 갑부들이라고 해서 반드시 행복한 것은 아니었다. 그들의 행복지수는 미국인의 평균보다 약간 더 높았을 뿐이다. 게다가 그들이 행복한 이유는 돈 때문이 아니었다. 가족이 있고, 친구들이 있고, 삶에서 무언가를 성취했기 때문에 행복하다고, 그들은 답했습니다. 말하자면 돈은 행복의 결정적인 기준이 아니었던 것이다.

 

아마도 호랑 애벌레가 올랐던 기둥은 돈의 기둥이나 성공의 기둥이었을지도 모른다. 열심히 정상을 향해 오르지만, 막상 정상에는 아무것도 없다. 그 위에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쉬쉬하며 무턱대고 오르기만 하는 욕망의 기둥들.

 

 

 

 

 ♣ 인간관계의 중요성

 

최근 행복과 관련해서 주목하는 것이 행복감이다. 호랑 애벌레와 노랑 애벌레가 밟고 밟히는 경쟁의 기둥에서 내려와 둘만의 사랑을 나눌 때 느끼는 행복감. 관계는 확실히 앞의 두 기둥보다 내밀한 행복을 느낄 수 있다.

 

 

성인 남녀 814명의 일생을 70여 년간 추적 조사한 하버드대 조지 베일런트 교수팀의 연구도 이를 뒷받침한다. 연구 결과, 65세까지 충만한 삶을 산 사람 중 93%는 어린 시절 형제자매와 친밀한 관계를 맺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이를 바탕으로 조지 베일런트는 『행복의 조건』에서 “행복하고 건강하게 나이 들어갈지를 결정짓는 것은 뛰어난 지적 능력이나 계급이 아니라 인간관계”라고 단언했다.

 

데이비드 브룩스는 현대 자본주의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일과 돈, 부동산의 가치를 지나치게 높게 평가하는 반면에 친밀한 유대감이나 힘들게 노력하는 과정 같은, 정작 행복에 영향을 미치는 다른 조건들은 지나치게 낮게 평가한다고 지적했다. 분명한 것은 돈이나 부동산 보유 능력, 사회적인 성공이 행복과 어떤 상관관계가 있는지 밝히기는 어렵지만, 사회적인 유대와 행복 사이에는 분명한 상관관계가 있다는 사실이다.

 

 

 

 ♣ 행복을 위한 사유와 탐색이 필요하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아니, 지금까지 나온 ‘행복’에 관한 수많은 연구결과만 본다고 해서 인간이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정확한 방법을 도출한다는 건 어쩌면 불가능하거나 무의미한 일일 수 있겠다. 데이비드 브룩스는 “현대사회에서 사람들은 무엇이 자기를 행복하게 하는지 판단하는 데 무척 서툴다”고 지적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고 살아왔다. 자신이 무엇을 할 때 가장 행복한지 진심으로 이해하고 있을 리 만무하다. 남들이 언젠가부터 오르기 시작한 기둥을 별다른 문제의식 없이, 뒤처지지 않으려고 무작정 오르고 있었다.

 

실제로 우리는 꿈조차도 온전한 자기 자신의 꿈이기보다 사회화되는 과정에서 이식받는 경우가 많다. 요즘 초등학생들의 꿈은 과거와 많이 달라졌다. 내가 초등학생이었던 1990년대만 해도 대통령과 장관, 과학자 등 다양한 직업을 꿈꾸는 친구들이 많았는데, 요즘 초등학생들은 교사, 공무원이 일순위다. 고용 환경이 불안한 시대에 출세보다는 안정적인 직업을 선호하게 된 탓이다.

 

누구나 행복을 원한다. 몇몇은 호랑 애벌레가 처음에 그랬던 것처럼 그저 먹고 자라는 것만이 삶의 전부가 아닐 거라는 생각으로 보다 출세지향적인 행복을 찾아 나설 것이다. 몇몇은 노랑 애벌레가 그러했던 것처럼 행복의 기준을 외부에 두지 않고 자기 안에서 찾을 것이다.

 

 

 

 

 

 

 

 

 

 

 

 

 

 

 

중요한 건 어떤 행복을 추구하든 행복은 거저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행복을 얻기 위해서는 기술이 필요하다. 공부도 필요하다. 버트런드 러셀은 “행복은 저절로 굴러들어오는 것이 아니며, 끊임없이 쟁취해야 하는 것”이라고 했다. 따라서 많은 사람이 행복은 돈이나 성공, 관계에 있다고 말할지라도 스스로에게 한번쯤은 반문해야 한다. 그리고 미래의 아이들에게 행복을 스스로 얻지 못하도록 방해하고 있지 않은지 생각해 봐야 한다. 자신이 어느 때 행복한지 진지하게 탐색하지 않고 행복을 얻기란 쉽지 않다. 행복에 대해 진지하게 사유하지 않고 행복해지기는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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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넓은 세상에서 나보다 더 구름을 잘 알고, 나보다 더 구름을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면

내게 보여주오!" (22쪽, 민음사)

 

 

헤세는 소설 『페터 카멘친트』에서 자신의 구름 사랑을 예찬했다. 보들레르도 산문집 『파리의 우울』 첫 번째 시 ‘이방인’에서 노래했다. ‘나는 구름을 사랑하오. 지나가는 저 구름……저기…저기…저 찬란한 구름을!’ 구름을 사랑하는 시인이 많다.

 

 

 

 

 

 

 

헤세의 구름 사랑은 자신의 첫 번째 소설인『페터 카멘친트』뿐만 아니라, 초기 시에서도 볼 수 있다. 헤세의 첫 시집은 1899년 『낭만적인 노래』로 그가 18~21세 때 쓴 시들을 모아서 수록했다. 헤세는 이미 젊은 시절부터 구름을 즐겨 봤고, 관찰했을 것이다.『페터 카멘친트』가 1904년에 출간된 사실을 생각해보면 ‘구름’을 바라보는 헤세의 시점이 습작 시기에 맞물려 있고, 시와 소설을 비교하면 구름을 사랑스럽게 묘사하는 분위기면에서도 상당히 유사하다.

 

 

파란 하늘에, 가늘고 하얀

보드랍고 가벼운

구름이 흐른다.

눈을 드리우고 느껴 보아라.

하얗게 서늘한 저 구름이

너의 푸른 꿈속을 지니는 것을.

 

 

- 헤르만 헤세 「한 점 구름」(『헤르만 헤세 시집』21쪽) -

 

 

구름은 시인들의 몽상을 자극하는데, 헤세는 구름의 몽상을 따라가지 않고, 구름의 본질과 기질을 캐고자 한다. 오랜 관찰 끝에 시인이 바라본 구름은 고향에 대한 향수와 청춘의 열병에 시달리고 있는 젊은 이방인의 영혼, 바로 자기 자신이었다.

 

구름은 모든 방랑, 모든 탐구, 갈망과 향수의 영원한 상징이다. 구름이 하늘과 땅 사이에서 수줍어하고 그리워하며 고집스럽게 매달려 있는 것처럼, 인간의 영혼은 시간과 영원성 사이에서 매달려 방황한다. (23쪽, 민음사)

 

시인은 자기가 구름에 대해 확실히 아는 한 가지를 이야기한다. 새파랗게 맑은 하늘은 구름이 생성과 소멸을 또렷하게 펼쳐 보이는 스크린이다. 시인은 중얼거린다. 구름, 너 역시 쓸쓸하구나. 허공에서 태어나 허공에서 조용히 사라지는 구름. 소년 헤세가 바라보는 구름은 이렇다.

 

 

 

 

내가 나 자신에 질문한다. 최근에 구름을 본 적이 있는가. 요즘 나도 그렇다고 손들고 싶다. 가을하늘 못지않게 아름다운 게 사실 비 오고 난 후의 구름이다. 흰색의 물방울체가 파란색을 바탕으로 벌이는 그 다채롭고도 깊고 선명하면서도 아득한 변화와 이동의 장엄. 자연 속 최고의 창조물이 아닐까 싶다. 인생무상(無常)의 덧없음이 아니라 인생과 자연이라는 거저 주어진 무상(無償)을 확인시켜주는 존재다.

 

그런 구름을 어린 시절엔 자주 올려다봤었다. 초등학교 운동장에서 곧잘 그렇게 거꾸로 올려다봤던 구름들은 하늘이 두 발을 받쳐주는 땅이기도 함을 어린 머리에도 깨우쳐주곤 했었다. 그런 놀이를 더는 하지 않게 되면서 어린이라는 순수한 시절과 결별한 게 아니었을지.

 

어른이 되어 낮의 하늘로 고개를 드는 때는 애써 눈물을 감춰야 하거나, 날씨를 확인할 때 정도뿐이다. 낮의 일상은 어른에게 우두커니 고개를 젖히거나 누워서 구름의 변화나 흐름 따위에 눈과 마음을 주게 하지 않는다. 사실 밤하늘의 별보다 더 올려다보기 힘든 게 낮의 구름이다.

 

 

 

 

 

 

 

 

 

 

현대 이전에는 어른들도 그렇지 않았다. 1803년 루크 하워드라는 허름한 차림의 한 약사 출신 젊은이가 당시 유행하던 과학발표극장에서 구름을 적운 권운 층운 같은 유형으로 나누고 이름을 붙였을 때 당시 어른들은 아이들처럼 열광했다. 하워드의 발견이나 작명 자체보다 구름에 대한 그들의 열광이 기상학에 역사적인 방점을 찍게 했다.

 

재상이자 시인이었던 괴테는 '구름을 분류한 사람'을 일부러 초청해 만나고 '하워드를 위하여'라는 구름처럼 풍성한 헌시를 쓰기도 했다. 풍경화의 역사를 시작한 화가 존 컨스터블도 하워드의 구름에 영향을 받아 저 유명한 구름 그림들을 그렸다. 구름은 그 전에도 있었으되 구름에의 새삼스런 열광이 한 시대의 과학과 예술 전체를 새로이 드높인 것이다.

 

컨스터블은 유독 구름을 주제로 한 습작을 많이 남겼으며 그의 풍경화에는 지상의 구름이 화면 전체를 가득 채운다. 그는 실제 자연보다 더 그럴듯하게 그리는 것을 거부했는데 아마도 그는 찬찬히 하늘의 구름과 날씨와 바람을 꼼꼼히 관찰하면서 일지에 적었을 것이고 그보다 더 오래 정성껏 그림들을 다듬었을 것이다

 

인상주의 화가인 모네는 순간 변화하는 빛의 흐름을 일순간에 포착해 캔버스 위로 옮기고자 노력했다. 모네의 작품은 대부분 위의 그림에서 보는 것처럼, 외광을 받은 자연의 표정을 어두운 색감 위에 밝은 색채를 사용하여 효과적으로 구사하고 있다. 자연을 감싸고 있는 대기의 미묘함이나 빛을 받고 변화하는 풍경의 순간적인 분위기와 그 느낌을 충분히 공감할 수 있도록 묘사되었다. 폭풍에 흔들리는 나무나 출렁이는 물결, 그 물에 비친 검푸른 구름이 지금도 매우 빠르게 흘러가고 있는 듯 다음 순간과 느낌이 상상된다.

 

도시의 하늘은 온통 뿌연 회색하늘뿐이라지만 요즘 내가 본 찬란한 구름들은 대부분 대학교 캠퍼스에서 본 것들이었다. 희뿌연 도시에서 살짝 벗어난 교외로 가서 문득 고개를 젖히고 걸음을 멈추며 새털, 뭉게, 비늘, 면사포 같은 모양의 구름들을 만날 수 있다. 운이 좋으면 구름이 되지 못한 물방울이 만든 투명한 무지개 빛깔도 본다.

 

 

 

 

 

존 컨스터블  「구름 습작」 1822년

 

 

긴 여로에서

방랑의 기쁨과 슬픔을 모두

스스로 체험하지 못한 사람은

구름을 이해할 수 없는 법이다.

 

해나 바다나 바람과 같은

하얀 것, 정처 없는 것들을 나는 사랑한다.

고향이 없는 사람에게는

그것이 누이들이며 천사이기 때문에.

 

 

- 헤르만 헤세 「흰 구름」중에서 (『헤르만 헤세 시집』65쪽) -

 

 

 

청년기에 마주하는 구름은 마음에 품은 꿈과 방황과 방랑의 가치를 꼽아보게 한다. 장년기의 구름은 인간이라는 미약한 존재로서의 순백할 수 없었던 날들에의 고백과 겸손에 마음을 여미게 한다. 구름의 시인 헤세는 또 말한다. 방랑의 기쁨과 슬픔을 체험하지 못한 사람은 구름을 이해할 수 없다고.

 

 

 

 

 

헤르만 헤세  「계곡 풍경」 1930년

 

 

변화무쌍한 구름의 모양을 보면 온갖 상상이 떠오른다. 누군가의 모습이 연상되는가 하면, 그리운 사람의 마음을 전해주는 것도 같고, 영락없는 천상의 그림이라는 생각도 든다. 때때로 먹구름이 몰려오면 금세라도 저주를 퍼부을 듯하다. 한 군데 머물지 못하고 늘 이동하는 구름을 우리네 삶에 빗대어 인생무상을 노래하기도 한다. 그래서 헤르만 헤세는 구름을 두고 향수, 낭만, 방탕, 원망이라고 했나 보다.

 

구름은 그 부드러운 기운이 지상까지 전해져 땅의 무거움을 들어 올려 주는 것 같다. 우리가 지상에서 마주치는 생활의 무거움을 기중기처럼 가볍게 살짝 끌어준다. 지상에 내린 구름 그림자는 구름 발자국과도 같아, 침묵의 언어로 잠시 동행하는 친구가 된다. 먹구름은 먹구름대로, 슬픔과 우울함이 없는 삶은 기괴한 삶임을 보여주는 듯하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구름의 귀한 존재감은 현실을 벗어난 다른 곳으로 안내하는 데 있지 않을까? 그러고는 진짜 삶이 어떤 것인지 살짝 맛보게 한다. 그렇다고 해서 구름이 현실 밖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구름은 바로 우리 머리 위에 있다. 삭막한 도시 속에서 우리는 구름의 존재를 가끔 잊고 살 뿐, 구름은 현실의 머리 위에 있다. 구름을 바라보면서 우리는 하늘과 우주까지 보는 시야를 확대해 새로운 세계에 눈을 뜨게 된다.

 

하늘을 봐야 구름도 본다. 하늘은 누워서 보는 게 제격. 방바닥에라도 누워 유리창을 올려다보자. 통유리창이라면 더 좋겠지만, 작은 유리창 한 장도 충분히 하늘을 담는다. 사람 등짝만 보지 말고, 잠시 고개를 젖히고 하늘 위에 있는 구름을 다시 보자, 구름을 이해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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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철나무꾼 2013-11-10 23: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하늘을 자주 쳐다본답니다, 늘 그렇고 그런 일상에, 쉼표를 찍는 의미루다가...ㅋ~.
대낮의 하늘은 햇살 땜에 눈을 잠시 찌푸리게도 되지만,
밤에 조각달이나 눈썹달이라도 걸린 하늘을 바라보면,
누군가를 떠올릴 수 있어 좋아요.

헤르만 헤세는 그림도 좋군요.
님 덕분에 제 눈이 호사네요, 감솨~(__)

cyrus 2013-11-11 21:06   좋아요 0 | URL
가끔 캠퍼스 혼자 걷다가 하늘 위의 구름을 보는 순간, 콱 막힌 마음이 뻥 뚫려요. 나무꾼님 말씀대로 고요한 밤하늘도 좋아요. 하늘을 볼 수 있는 작지만 여유로운 시간이 참 좋습니다. 참고로 헤세의 그림은 문예출판사에서 나온 시집에 수록되어 있어요.

수이 2013-11-11 10: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네의 이 감수성이란-

cyrus 2013-11-11 21:06   좋아요 0 | URL
가을이니까요~ :)

프레이야 2013-11-11 23: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이지 무상으로 보는 게 많은 계절입니다.
구름을 이해하는 아주 좋은 방법 얻어 가네요^^

cyrus 2013-11-13 00:29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구름을 보고 느낄 줄 아는 여유로운 가을 보내세요 :)

그렇게혜윰 2013-11-12 13: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헤세의 그림 참 좋아해요!
오늘은 나가면 구름으르 잘 만나 봐야겠어요^^

cyrus 2013-11-13 00:30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요즘 가을하늘 좋을 때죠. 문예출판사에서 나온 헤세 시집에 수채화 그림이 실려 있습니다(책 광고는 아닙니다 ^^;;)
 

 

 

 

 

 

 

시뮬라크르라는 말은 사건·이미지와 의 동일한 말로서 순간적인 것, 지속성을 가지지 않은 것, 자기 동일성이 없는 것을 의미한다. 그 자체로는 지각되지 않으며 오직 감각 가능한 최소시간 내 그들의 합(지각)만이 지각가능하다. 따라서 플라톤에 따르면 시뮬라크르 쪽으로 가까이 가면 갈수록 존재는 점점 더 적어지며 그에 따라 가치 또한 점점 적어지게 된다.

 

사건은 물체에 ‘부대하고’ 언어에 대해 ‘표현전도’, 즉 언어의 표현을 통하여 사건이 분절된다. 따라서 사건을 사유한다는 것은 물질적인 차원과 정신적인 차원, 자연의 차원과 문화적 차원의 접촉이 무엇인가를 밝히는 작업이다.

 

 

 

그렇다면 지금까지도 시뮬라크르를 사유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현대는 공간보다는 시간을, 엄밀한 결정론보다는 우연, 창조, 불연속 등을 중시한다. 이런 흐름의 연장선상에서 등장한 문제가 시뮬라크르이다. 모델과 사본이라는 이분법적 세계관 위에 근거한 플라톤주의를 전복시킴으로써 우리 현실의 삶에 대한 새롭고 깊은 통찰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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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amoo 2013-11-01 18: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뮬라크르 하믄, 보드리야르밖에 생각이 안난다능~ㅎㅎ

사이러스님, 11월 단풍이 아름답게 들었더이다~ 단풍구경하면서 저무는 가을을 만끽하시길~^^

cyrus 2013-11-02 22:00   좋아요 0 | URL
보드리야르의 책도 읽고 있는 중인데 어렵네요.. 이 글을 쓰면서 제가 개념을 제대로 이해했는지 모르겠네요.. ^^:;
감사합니다. 야무님. 어제 서울에 갔는데 날씨가 참 좋더라고요. 간만에 느껴보는 가을 날씨였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