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애벌레가 본 것

 

 

 

 

 

 

 

트리나 폴러스의 『꽃들에게 희망을』이라는 책의 내용은 어른이 되어서도 잔잔하게 마음 어딘가에 남아 있다. 나비들을 볼 때마다 그들이 어떻게 꽃들에게 희망을 줄까 생각해 보기도 한다. 알에서 깨어나 애벌레, 고치가 되는 과정들을 통해 한 마리 나비가 되기까지의 과정들 자체가 희망이기 때문에 꽃들에게 희망을 줄 수 있는 존재가 아닐까 상상하기도 한다.

 

아직도 기억에 남는 장면은 호랑 애벌레가 기둥의 정상에 거의 다다랐을 무렵에 일어난 일이다. 천신만고 끝에 꼭대기에 거의 다다랐을 때 애벌레는 기쁨보다는 실망과 분노감을 느끼게 된다. 애벌레가 죽기 살기로 올랐던 기둥은 세상에 유일한 기둥이 아니었던 것이다. 수백만 애벌레가 아무것도 없는 꼭대기까지 올라오느라 평생을 낭비하고 있다는 사실을, 애벌레는 그제야 깨닫는다.

 

주인공 애벌레가 목격한 장면은 현대자본주의 사회에서 그대로 재현되고 있다. 높이를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높게 뻗은 수천 개의 기둥 중에서 이 시대에 가장 높은 기둥을 꼽으라면 아마도 돈과 부동산, 그리고 사회적 성공의 기둥일 것이다. 하지만 이 기둥들이 있다고 해서 우리에게 진정한 행복을 가져다주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 여러 연구 결과를 통해서 밝혀지고 있다.

 

 

 

 ♣ 돈과 성공이 행복을 위한 절대적 기준일까?

 

 

 

 

 

 

 

 

 

사람들은 지금보다 돈이 많으면 더 행복할 거라고 믿고 열심히 돈의 기둥을 오르려고 한다. 그러나 데이비드 브룩스는 『소셜 애니멀』에서 돈과 행복의 상관성은 명확하게 설명하기 어렵다고 말한다. 물론 부유한 사람일수록 행복할 확률이 높고, 부자 나라일수록 행복할 경향성이 높은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 상관성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크지 않다.

 

포브스가 선정한 미국의 수천억 원대 갑부들의 행복도를 조사한 적이 있다. 그 결과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돈이 많은 갑부들이라고 해서 반드시 행복한 것은 아니었다. 그들의 행복지수는 미국인의 평균보다 약간 더 높았을 뿐이다. 게다가 그들이 행복한 이유는 돈 때문이 아니었다. 가족이 있고, 친구들이 있고, 삶에서 무언가를 성취했기 때문에 행복하다고, 그들은 답했습니다. 말하자면 돈은 행복의 결정적인 기준이 아니었던 것이다.

 

아마도 호랑 애벌레가 올랐던 기둥은 돈의 기둥이나 성공의 기둥이었을지도 모른다. 열심히 정상을 향해 오르지만, 막상 정상에는 아무것도 없다. 그 위에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쉬쉬하며 무턱대고 오르기만 하는 욕망의 기둥들.

 

 

 

 

 ♣ 인간관계의 중요성

 

최근 행복과 관련해서 주목하는 것이 행복감이다. 호랑 애벌레와 노랑 애벌레가 밟고 밟히는 경쟁의 기둥에서 내려와 둘만의 사랑을 나눌 때 느끼는 행복감. 관계는 확실히 앞의 두 기둥보다 내밀한 행복을 느낄 수 있다.

 

 

성인 남녀 814명의 일생을 70여 년간 추적 조사한 하버드대 조지 베일런트 교수팀의 연구도 이를 뒷받침한다. 연구 결과, 65세까지 충만한 삶을 산 사람 중 93%는 어린 시절 형제자매와 친밀한 관계를 맺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이를 바탕으로 조지 베일런트는 『행복의 조건』에서 “행복하고 건강하게 나이 들어갈지를 결정짓는 것은 뛰어난 지적 능력이나 계급이 아니라 인간관계”라고 단언했다.

 

데이비드 브룩스는 현대 자본주의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일과 돈, 부동산의 가치를 지나치게 높게 평가하는 반면에 친밀한 유대감이나 힘들게 노력하는 과정 같은, 정작 행복에 영향을 미치는 다른 조건들은 지나치게 낮게 평가한다고 지적했다. 분명한 것은 돈이나 부동산 보유 능력, 사회적인 성공이 행복과 어떤 상관관계가 있는지 밝히기는 어렵지만, 사회적인 유대와 행복 사이에는 분명한 상관관계가 있다는 사실이다.

 

 

 

 ♣ 행복을 위한 사유와 탐색이 필요하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아니, 지금까지 나온 ‘행복’에 관한 수많은 연구결과만 본다고 해서 인간이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정확한 방법을 도출한다는 건 어쩌면 불가능하거나 무의미한 일일 수 있겠다. 데이비드 브룩스는 “현대사회에서 사람들은 무엇이 자기를 행복하게 하는지 판단하는 데 무척 서툴다”고 지적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고 살아왔다. 자신이 무엇을 할 때 가장 행복한지 진심으로 이해하고 있을 리 만무하다. 남들이 언젠가부터 오르기 시작한 기둥을 별다른 문제의식 없이, 뒤처지지 않으려고 무작정 오르고 있었다.

 

실제로 우리는 꿈조차도 온전한 자기 자신의 꿈이기보다 사회화되는 과정에서 이식받는 경우가 많다. 요즘 초등학생들의 꿈은 과거와 많이 달라졌다. 내가 초등학생이었던 1990년대만 해도 대통령과 장관, 과학자 등 다양한 직업을 꿈꾸는 친구들이 많았는데, 요즘 초등학생들은 교사, 공무원이 일순위다. 고용 환경이 불안한 시대에 출세보다는 안정적인 직업을 선호하게 된 탓이다.

 

누구나 행복을 원한다. 몇몇은 호랑 애벌레가 처음에 그랬던 것처럼 그저 먹고 자라는 것만이 삶의 전부가 아닐 거라는 생각으로 보다 출세지향적인 행복을 찾아 나설 것이다. 몇몇은 노랑 애벌레가 그러했던 것처럼 행복의 기준을 외부에 두지 않고 자기 안에서 찾을 것이다.

 

 

 

 

 

 

 

 

 

 

 

 

 

 

 

중요한 건 어떤 행복을 추구하든 행복은 거저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행복을 얻기 위해서는 기술이 필요하다. 공부도 필요하다. 버트런드 러셀은 “행복은 저절로 굴러들어오는 것이 아니며, 끊임없이 쟁취해야 하는 것”이라고 했다. 따라서 많은 사람이 행복은 돈이나 성공, 관계에 있다고 말할지라도 스스로에게 한번쯤은 반문해야 한다. 그리고 미래의 아이들에게 행복을 스스로 얻지 못하도록 방해하고 있지 않은지 생각해 봐야 한다. 자신이 어느 때 행복한지 진지하게 탐색하지 않고 행복을 얻기란 쉽지 않다. 행복에 대해 진지하게 사유하지 않고 행복해지기는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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