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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동원화랑에서 진행되는 박진형 시인의 신작시집 낭독회에 참석했습니다. 박진형 시인이 펴낸 시집 제목은 《고마 됐다》입니다. ‘고마’는 ‘그 정도까지만’의 방언입니다. ‘고마 됐다’는 ‘그 정도까지만 해라’ 또는 ‘그만 됐다’의 의미가 되겠습니다.
* 박진형 《고마 됐다》 (만인사, 2016년)
이 시집은 참말로 독특합니다. 시인은 자신의 고향인 경주에서 사용된 ‘신라 입말’을 발굴하여 시어로 만들어냈습니다. 신라 입말처럼 오래된 말일수록 ‘낮은 말’이 됩니다. ‘낮은 말’의 반대는 ‘높은 말’입니다. ‘높은 말’은 바른말, 고운 말 그리고 표준어인 거죠. 신라가 이 한반도를 지배했을 때까지만 해도 표준어는 신라 입말이었습니다. 나라와 정권이 바뀌면서 신라 입말의 존재는 점점 잊혔고, 연륜이 깊은 소수의 경주 토박이들만 아는 옛말이 되었습니다. 《고마 됐다》는 눈으로 읽는 시집이 아닙니다. ‘신라 입말’이 들어있는 시이기 때문에 입으로 소리를 내야 합니다. 그래야 진정한 신라 입말의 매력을 느낄 수 있습니다. 저는 오늘 《고마 됐다》에 수록된 시를 인용하지 않았습니다. 입말로 이루어진 시를 여기에 인용하면, 눈으로 봐야 하는 ‘글말’이 되기 때문입니다.
낭독회가 열렸던 장소는 동원화랑입니다. 동원화랑은 1982년에 문을 연, 대구에서 가장 오래된 화랑입니다. 이곳에 대구 출신 화가들의 작품이 걸려있습니다. 저는 어제 알았는데, 연예인 하정우, 구혜선, 조영남 씨의 그림 전시가 동원화랑에서 열리기도 했습니다.
시 낭독회가 시작하기 20분 전에 장소에 일찍 도착했습니다. 이곳에서 ‘yrureka01님(유레카)’을 만나려고 했습니다. 여태까지 화랑을 한 번도 가본 적이 없어서 혼자 들어가기가 뻘쭘했습니다. 건물 안에 들어가지 않고, 밖에서 유레카님이 오기를 기다렸어요. 유레카님이 도착하고, 같이 화랑 안에 들어갔습니다. 시 낭독회가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앉을 자리가 없어서 시 낭독회가 끝날 때까지 계속 서 있었습니다. 힘들진 않았습니다. 저는 아직 젊으니까요! (찡긋) 오히려 서 있는 게 좋았습니다. 왜냐하면, 제가 서 있었던 곳 바로 앞에 다과상이 차려져 있었으니까요. (개이득) 저는 시를 읽는 척하면서 다과상으로 차려진 쿠키, 육포, 과일 등을 야금야금 먹었습니다. 오래 서 있는 건 참을 수 있었지만, 배고픔은 참지 못했거든요. 음료는 물과 주스 그리고 포도주였습니다. 이 셋 중에 여러분은 뭘 마실 겁니까? 당연히 포도주죠! 포도주 반 정도를 비우고 싶었지만, 참았습니다. 한 컵만 마셨어요. 화랑에 일하는 직원으로 추정되는 분이 제 근처에 서 있어서 술을 홀짝 마실 수가 없었습니다. 제가 다과상에 눈독 들이고 있었을 때, 유레카님은 시 낭독회의 생생한 현장을 사진으로 담고 있었습니다.
원래 시 낭독회가 참석하기 전에 《고마 됐다》를 읽어보려고 했었습니다. 그런데 대구에 세워진 모든 공공도서관 중에 이 시집을 소장한 곳이 딱 한 군데 밖에 없었어요. 제가 사는 동네에 가까운 도서관이 ‘대구서부도서관’입니다. 이곳에 대구 · 경북 출신의 문인들의 책들을 따로 보관하고, 문인들의 유품까지 전시한 ‘향토문학관’이라는 장소가 있습니다. 그런데 서부도서관에는 《고마 됐다》가 없었습니다. 시집이 잘 안 팔리는 것도 서러운데, 공공도서관마저 홀대합니다.
《고마 됐다》 한 부 챙겨왔습니다. 무료로 받은 셈이죠. 이래도 되나 싶었어요. 하긴 안 팔리는 시집을 창고에 썩혀둘 바에 정말 시와 문학을 사랑하는 시인의 지인들에게 나눠주는 것이 모든 이들을 위한 좋은 일입니다. 시인은 돈 몇푼 더 벌려고 《고마 됐다》를 쓴 것이 아닙니다. 시인은 신라 입말과 고향 사람들을 기억하고 보존하기 위해서 시의 형태로 기록했습니다. 역사가들도 하지 않는 일입니다. 《고마 됐다》는 신라 입말을 빌어 기록한 ‘민중의 역사’이기도 합니다. 되돌아보면 우리는 말과 글을 통해 세상을 만났고, 사람을 사랑하는 법을 배웠고, 세상의 아름다움을 발견하기도 했어요, 태초의 입말이 단순히 과거를 알기 위한 증거이기 때문에 소중한 것이 아닙니다. 지금의 ‘나’와 ‘우리’를 이루는 기본적인 말이기 때문에 소중합니다. 입말은 글말의 씨앗입니다. 입말은 사람과 삶에서 떨어질 수 없습니다. 즉 입말이 곧 사람이고 말하고 듣는 것이 곧 사람의 삶입니다. 이런 까닭에 입말을 이해할 수 있을 때야 우리가 사용하는 글말의 세계도 튼튼히 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