펭귄은 바다표범을 무서워한다. 바닷물 속에서 먹잇감을 찾다가 그만 자신이 바다표범의 먹잇감이 된다. 펭귄들이 살아남으려면 바다표범이 살지 않는 안전한 바다를 찾아야 한다. 이럴 때 ‘퍼스트 펭귄(first penguin)’의 역할이 중요하다. 그는 겁이 많은 펭귄들을 대신하여 바닷속으로 뛰어든다. 그의 용기 있는 행동을 본 펭귄들은 퍼스트 펭귄을 따라서 바다로 들어간다. 바다를 헤엄치며 이동해야 할 때도 퍼스트 펭귄이 가장 먼저 앞장선다. 펭귄 무리는 그의 행동을 믿고 의지한다.
그러나 퍼스트 펭귄이 바다표범에 잡혀 죽는 불상사가 생겼다. 살아남은 펭귄 무리는 퍼스트 펭귄이 끔찍하게 죽어가는 모습을 그저 지켜봐야 했다. 또다시 다른 육지로 이동해야 할 시기가 찾아왔다. 펭귄들은 이곳을 떠나야 한다는 사실을 잘 안다. 여기 한곳에 오래 있으면 북극곰에게 발각될 수 있다. 이번에도 퍼스트 펭귄이 나서야 할 때다. 그런데 펭귄들은 서로 눈치만 볼 뿐, 미동조차 하지 않는다. 퍼스트 펭귄이 되면 집단을 위해 자기희생을 감수하는 막중한 책임감이 따른다. 그걸 잘 알기에 아무나 퍼스트 펭귄이 나오기만 기다린다. 그러자 한 펭귄이 침묵을 깨고 바닷속으로 뛰어든다. 그는 계속 기다리기만 하면 능사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자신이 퍼스트 펭귄이 되기로 했다. 새로운 퍼스트 펭귄은 물속 주위를 확인하고 바다표범이 없다는 사실을 육지의 펭귄들에게 알렸다.
“얘들아, 지금은 안전하니까 얼른 물속으로 내려와!”
그러나 육지의 펭귄들은 우두커니 서서 퍼스트 펭귄을 쳐다봤다. 이들은 전혀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왜 그래? 안 갈 거야?” 퍼스트 펭귄이 재촉하자 펭귄 무리 중 하나가 이렇게 말했다.
“네가 안전하다고 말해도 물속에 들어가기가 무서워.”
《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개마고원, 2013)와 《공부 중독》(위고, 2015)은 삶의 변화를 두려워하는 집단적 공포에 지배당한 우리 사회에 경각심을 주는 책이다. 오찬호, 엄기호, 하지현. 이 세 사람은 성과에 집착하도록 유도하는 현 교육 체제의 문제점을 공유한다. 그리고 문제점을 개선하려는 의지를 갖춘 ‘퍼스트 펭귄’들이다.
오찬호는 지금의 20대들에게 자기계발의 환상적 주문에서 빠져나오라고 당부한다. 자기계발 시대 속에 살아가는 20대들은 ‘뜨거운 열정’을 보여주려고 애쓴다. 젊은이들은 좋은 일자리를 얻을 수만 있다면 ‘열정 페이’를 해서라도 자신의 열정을 보여주고 싶어한다. 기업이 원하는 ‘뜨거운 열정’이 구체적이지 않은데도 의심할 겨를 없이 자신들의 하나뿐인 청춘을 끊임없이 담금질한다. 너나 할 것 없이 전국의 젊은이들이 ‘열정’을 보여주려고 난린데, 취업이 무난하게 될 리 없다. 취업이 안 된 친구들은 점점 입이 바짝 타기 시작한다. 이제 서른이 코앞인데 변변한 직장을 갖지 못하면 왠지 사회에서 뒤처지는 기분이 든다. 수차례 낙방하면 깊은 좌절감에 빠진다. 주변 어른들은 그들에게 위로 같지 않은 위로를 한다.
“젊은이, 좌절하지 말고 더 노오오오력해보시게나.”
젊은이들은 자신이 무능력해서 연거푸 실패의 쓴잔을 들이켜 마신다고 생각한다. ‘취업 준비 중’인 젊은이들은 비좁은 고시원 방에 갇힌 채 두꺼운 자격증 문제집을 끼적거린다. 그들의 방문 앞에 ‘지금도 노력 중’이라는 푯말이 있다. 희망이 보이지 않는 20대들은 이렇게 침잠한 잉여 상태로 청춘의 끝자락을 보낸다.
‘지금도 노력 중’ 상태로 맞춰 살아가는 20대들은 엄청난 양의 공부에 중독되어 있다. 어른들은 공부가 재미없어도 미래를 위해서라도 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래야 명문대에 입학해서 안정적인 일자리를 얻고, 죽을 때까지 넉넉하게 돈을 만지면서 살아갈 수 있다고 믿는다. 하지만 누구나 다 공부하는 시대가 된 지금, ‘공부 성공론’의 신화가 산산이 부서졌다. 변화를 인지하지 못하는 어른들, 그리고 그 밑에 자란 아이들은 공부가 자신들의 성공을 보장해주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라고 착각한다. 공부를 못하는 학생들은 자신의 초라한 성적에 실망한다. 어른들이나 학교 또한 마찬가지. 성적을 기준으로 학생들의 능력을 평가한다. 공부에 소질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학생들은 자신의 적성에 맞는 일을 찾으려고 고민한다. 그런 와중에 선택하는 것이 바로 자기계발이다. 학교 성적이 형편없어도 학교 밖에서 하는 자기계발을 잘하면 중졸이든 고졸이든 사회로부터 인정받을 수 있을 거로 기대한다. 20대들은 자기 삶의 방향으로 나아가기 위한 선택지가 무수히 많다. 그런데도 먼 곳에 있는 선택지를 보지 못한다. 그들의 눈에 보이는 선택지는 공부와 자기계발이다. 이 둘 중 하나만 잘하면 성공하는 인생이 보장된다고 생각한다. 아이가 주체적으로 살아가야 할 결정적인 시기가 찾아오면 부모들은 벌써 자식의 미래를 걱정한다. 그리고 자식이 공부하라고 주문한다. 성공을 위한 왕도(王道)가 공부임을 철석같이 믿는 어른들은 아이들의 옆구리를 쿡쿡 찌르면서 끼여든다. 자식의 성공을 바라는 욕망이 지나칠수록 아이들은 머리만 좋을 뿐, 사회생활에 쉽게 적응하지 못한다.
하지현은 과열된 교육열로 너무 뜨거워진 우리 사회에 투덜대려고 대담을 한 것이 아니라고 밝혔다. 이러한 문제점의 심각성을 파악하는 사람들이 많아지길 기대한다. 그러면 다수의 사람을 한쪽 길에만 움직이게 하는 ‘공부’ 드라이브에 브레이크를 걸 수 있다고 확신한다. 하지현뿐만 아니라 오찬호, 엄기호도 공부 에너지만 내는 ‘Made in Korea’ 교육 드라이브에 브레이크를 걸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제 그걸 지켜보는 독자들도 자신들과 함께 브레이크를 걸자고 제안한다. 설마, 자신들과 문제점을 공유하는 사람들이 줄줄이 나오기만 기다려보자는 건 아니겠지. 사실은 이미 몇 년 전부터 대한민국 교육의 문제점을 깨달은 사람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그런데 왜 우리는 ‘공부’ 드라이브를 멈추지 못하고 있는 것일까.
대한민국 사회는 너무나 오랫동안 공부에 중독되었다. ‘공부가 전부’라는 인식을 쉽게 버리지 못했을뿐더러 그 문제점을 알면서도 개선의 시작을 어디부터 잡아야할지 함께 공유해본 기회가 적었다. 그러니까 문제점은 누구나 다 알면서도 변화할 의지를 제대로 표출하지 못했다. 지금까지 오찬호, 하지현, 엄기호 같은 퍼스트 펭귄들이 계속 등장하여 사회에 태클을 여러 차례 걸어봤다. 그러나 사람들은 변화를 두려워하여 겁이 많은 펭귄들처럼 그냥 그들의 행동을 바라만 봤다. “아, 맞아! 그들이 지적하는 말은 맞아, 그런데 지금까지 해온 걸 막상 포기하자니 두려워.” 기존 사회 체제에 익숙해진 기성세대들은 불편을 감수하면서까지 고통을 꾹 참고 지내왔다. 오로지 경제적으로 성공한 삶을 누리려고 말이다. 지금의 20대들은 어른들의 모습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 당연히 그들의 말에 경청하고 따르면서 자랐으니까. 그렇게 공부에 중독된 아이들은 이러지도 저러지 못하는 구경꾼, 잉여가 된다. 앞으로 이런 교육 문제를 논하기 전에 우리는 각자 자신이 어느 위치에 있는지 알아야 한다. 우리 자신에게 한 번 물어보자. 과연 나는 사회를 개선할 마음이 있는 퍼스트 펭귄인가, 아니면 문제점이 뭔지 알면서도 고치려는 일에 자신 없어하는 겁 많은 펭귄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