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망 좋은 []

 

EP. 12



2021년 5월 4일 어린이날 

담담책방 





새로운 일을 시작한 지 이제 한 달 지났다. 18개월 만에 재취업하는 데 성공했다. 지금 하는 일은 내가 원해서 한 것은 아니다. 문을 만드는 공장에 일하는데 생산직 특성상 야간 잔업이 많다. 예전처럼 책 읽고 글을 쓸 수 있는 시간(이때는 화이트칼라였다)이 부족하다. 하지만 생계소득 없는 삶이 장기화하지 않으려면 뭐든 해야만 한다. 고심 끝에 생애 처음으로 블루칼라가 되었다기회가 되면 육체노동의 일상을 글을 써보고 싶다직접 피부로 느낀 노동은 책으로 보는 노동과는 확연히 다르다.


책방지기는 내 근황이 궁금했다고 말씀했다. 책방지기 사모님도 내가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궁금했다고 하는데 두 분이 유독 나를 생각해준 이유가 있다. 처음으로 공장 일을 하기 시작하기 전인 3월 말에 마지막으로 방문한 책방이 담담이었다. 그곳에서 책을 읽고 있을 때 공장 관계자로부터 다음 주 월요일에 출근하라고 연락이 왔었다. 원래 담담책방은 토요일에도 문을 열었다. 공장의 연락을 받은 날이 금요일이었는데, 책방지기가 내게 토요일에 책방을 열어야하는지 고민이 된다고 말씀했다. 그분은 목사라서 일요일 교회 예배를 위해 전날에 혼자서 예배를 준비한다. 그래서 책방지기는 불가피하게 토요일에 교회 관련 업무와 책방 일을 병행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나는 책방지기의 결정을 존중한다고 밝혔다. 결국 토요일도 책방 휴일(월요일도 책방이 쉬는 요일이다)로 변경되면서 나는 한 달 동안 담담에 가지 못했다토요일에 내가 갈 수 있는 책방은 읽다 익다 뿐이다. 문제는 책방이 너무 멀다. 버스 타고 책방에 가면 한 시간 정도 걸린다. 그래도 읽다 익다는 내가 글을 쓰는 데 집중할 수 있는 나만의 장소이다.


일을 시작한 지 얼마 안 된 첫 주부터 위기가 찾아왔다. 생전 해본 적이 없는 육체노동을 막 시작했으니 벌써 지칠 만도 했고, 이 일이 힘들어서 그만두고 싶다는 생각을 여러 번 했다. 그런 고충을 진심으로 걱정해주고, 내게 격려해준 좋은 분들 덕분에 이른 포기를 하지 않았고, 일에 적응할 수 있게 되었다. 내가 생각하는 좋은 분들에 담담 책방지기도 포함되어 있다


오늘이 급여를 받는 날인데 공휴일이라서 아직 받지 않았다. 공휴일 전날에 급여가 통장에 들어올 줄 알았는데, 공장에 기대한 내가 바보다. 다행히 넉넉한 생활비가 있었고, 이걸로 책방에 있는 책 두 권을 정가로 샀다. 급여가 들어오는 대로 읽다 익다’, ‘서재를 탐하다에 있는 책 몇 권을 더 살 예정이다. 주말에 대구의 다른 책방에 가봐야겠다.  


평생 직장은 없다. 죽을 때까지 블루칼라로 살고 싶지 않다. 야근을 많이 하면 일한만큼의 대가를 받을 수 있지만, 내 몸의 수명과 나만의 시간이 줄어든다. 야근 때문에 평일 저녁의 독서 모임에 참석이 어려워졌다(화요일과 목요일 저녁에 독서 모임이 진행된다금요일에 진행되던 레드스타킹은 최근에 화요일 저녁으로 변경되었다. ‘우주지감은 목요일에 진행된다. 7시에 퇴근하면 조금 늦더라도 독서 모임에 참석할 수 있다). 지금도 생각하면 이 점이 아쉽고 불만이 많다. 책과 글쓰기가 없는 삶은 시체와 같다. 독서와 글쓰기를 자유롭게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고, 이제야 내 적성에 맞는 일이 책방을 운영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시기상조이지만 블루칼라 노동 이후 내가 해야 할 일에 대해서 차근차근 생각하면서 준비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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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아 2021-05-05 22:3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공휴일 전날 급여가 띵똥 들어왔음 공장 오너님 센스인증인데요! 아쉽네요. 일에 관해 글 꼭 쓰시길 응원드립니다.
조지 오웰이 퍼뜩 떠오릅니당ㅋㅋ신규 책방도 기대되구요!

cyrus 2021-05-10 06:04   좋아요 1 | URL
공휴일 다음 날 오후에 급여가 들어온 걸 확인했어요. 야근 잔업이 없는 날에 일에 관한 글을 써보도록 하겠습니다. ^^

겨울호랑이 2021-05-05 22:52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cyrus님께서 보내고 계신 시간이 분명 의미있는 전환점, 계기가 되리라 생각합니다. 건강하게 한 주 보내세요!

cyrus 2021-05-10 06:05   좋아요 1 | URL
좋은 말씀을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월요일에 겨울호랑이님의 댓글을 보니 힘이 납니다. ^^

mini74 2021-05-05 22:5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많은 작가들의 시작이 퇴근 후 부엌 한켠 작은 전등 아래였다지만 현실적으론 참 힘들고 어려운 일, cyrus님께 어울리는 책방운영의 꿈이 얼릉 이루어지길 바랍니다. 건강 잘 챙기시고요 ~

cyrus 2021-05-10 06:07   좋아요 1 | URL
자투리 시간을 소중히 여겼고, 장소 불문하고 글을 쓴 작가들을 생각하면서 피곤해도 틈틈이 글을 쓰도록 노력해야겠습니다. ^^

페넬로페 2021-05-05 23:0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cyrus님의 새로운 출발에 행운이 가득하기를 먼저~~
블루 컬러로의 일상의 글, 기대하겠습니다^^
일하시면서 몸 다치지 않게 조심하시고 건강 챙기십시오**
엄마, 아니 누나같은 잔소리만 늘어놓습니다 ㅎㅎ

cyrus 2021-05-10 06:08   좋아요 1 | URL
아닙니다. 응원의 말씀을 해주셔서 감사하고, 힘이 납니다. 페넬로페님과 여러 이웃님의 댓글을 보고나니 월요병이 쏙 들어갔어요. ^^

Angela 2021-05-05 23:2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글 쓰는데 다양한 경험은 좋은것같아요~

cyrus 2021-05-10 06:10   좋아요 0 | URL
맞아요. 확실히 독서를 통한 간접 경험과 직접 경험은 차이가 있어요.

레삭매냐 2021-05-06 00:5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다니시는 회사의 결제 시스템이 어떻게
되는지 모르겠지만, 사실 급여는 그전에
주나 나중에 주나 별 차이는 없는데...

자본가의 탐욕이라고 밖에 볼 수 없는
것 같습니다. 원칙대로라면 휴일날이라
도 지급해야 하는데 그건 또 싫겠죠.

자기만을 위한 원칙 같지 않은 무원칙.

cyrus 2021-05-10 06:13   좋아요 0 | URL
한 달 일을 해보니까 개선해야 할 공장의 문제점들이 하나둘씩 보이기 시작했어요. 저보다 오래 일한 사람들은 직업 환경에 불만이 많았는데 공장장은 공장 내부를 더 확장할 생각만 하고 있어요.

syo 2021-05-06 01:0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cyrus님이 책방을 운영하시면 제가 노동하여 책을 사먹겠습니다.
그날까지 피차 잘 삽시다(?)

cyrus 2021-05-10 06:15   좋아요 0 | URL
돈도 중요하지만, 제일 중요한 것은 건강입니다. 건강을 유지하면서 살겠습니다. 책방을 여는 꿈이 언제 실현될지 모르겠지만, 차근차근 그 꿈을 위해 준비하겠습니다. ^^

blanca 2021-05-06 13: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 이 글 읽는데 갑자기... 울컥했어요. 잘 살고 계신다는 얘기 드리고 싶어요. 육체 노동 가운데 읽고 쓰는 일의 무게와 가치를 잃어버리지 않는 마음이 너무 좋아요. 건강 잘 챙기시기를...

cyrus 2021-05-10 06:16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blanca님. 피곤하다는 핑계로 독서와 글쓰기를 미루지 않겠습니다. ^^

stella.K 2021-05-06 15: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역시 건실 청년이다.ㅎㅎ
전에 모교 사무실에서 일한다고 하지 않았나?
1년 8개월을 공백이 있었다니 내가 너무 무심했단 생각이드네.ㅠ
서재에서 너의 글을 볼 수 없다는 게 이쉽긴한데
그중에서도 너의 책방 이야기를 읽을 수 없다는 게 가장 아쉬워.
재미가 쏠쏠했는데.
내가 이런데 책방 좋아하는 너는 더하겠지? 절절하다.
그래. 지금 블루칼라로 열심히 돈 벌어서 나이 좀 들면 네가 하고 싶은 일을 해.
너의 글 계획도 기대된다.
뭐든지 거져는 없는 것 같아. 지금은 힘들어도 훗날 이때를 기억하게 될 거야.
살아보니 힘들었던 때가 가장 기억에 남더라고.ㅋ
힘내라. 화이팅이다!!

cyrus 2021-05-10 06:20   좋아요 1 | URL
좋은 말씀을 해주셔서 감사해요, 누님. 대학교 사무실에 일한 건 더 오래됐고요, 그 다음에 한 일은 중소기업 사무직이었어요. 비록 급여를 많이 받지 못했지만, 일찍 퇴근할 수 있어서 좋았어요. 공장 일을 해보니 주말이 정말 소중하다는 걸 느꼈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