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내맘대로 좋은 책 연말 스페셜!
3월달에 『채링크로스 84번지』를 읽으며 놀라워했다. 이 작은 책 한권 안에 달걀과 베이컨과 책이 들어있고, 이 작은 책 한권 안에 기쁨과 놀라움과 행복과 슬픔이 다 담겨져 있다니. 이 작은 책이 이토록 마음을 따뜻하게 해줄 수 있다니! 나는 너무 좋아서 생각나는 사람들에게 이 책을 선물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들의 마음이 내가 그러했던것 처럼 따뜻함으로 가득차기를 바랐다.
5월달에 『새벽 세시, 바람이 부나요?』를 읽었다. 책장을 넘길때마다 에미와 레오가 되어 이메일의 답장을 기다렸다. 그리고 그들은 만나게 될까? 를 끊임없이 궁금해했다. 다 읽고 책장을 덮었을 때, 나는 내 마음속에 바람이 불어옴을 느꼈다. 그것이 따뜻한 바람이든, 차가운 바람이든, 아니 북풍이든. 이 책을 읽고 너무 좋아서 나는 이 책에 나오는 대로 누군가와 온라인상으로 소식을 주고 받았으며, 이 책에 나오는대로 후버까페의 만남도 가져보았다. 여기저기 선물하고 추천도 했다. 이 책이 2쇄를 찍은건 나 때문이라고, 나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한다. 어떤 책이든 그것이 아주 재미있고, 그리고 나를 만났다면, 한 판 더 찍을 준비를 하는것이 좋다. :)
나는 어느 봄날 조선일보에서 이 책을 알게됐고 그 기자가 올해 가장 재미있게 읽은 책, 이라고 평하는 서평을 읽었다. 나를 움직인건 그의 서평이 아니라 책의 제목이었다. 그 신문을 읽자마자 나는 당장 컴퓨터를 켜고 이 책을 주문했다. 그리고 이 책은 내게도 가장 재미있는 책이 되었다.
새벽 세시, 바람이 부나요?
난감한 책읽기란 이런게 아닐까. 나는 대체 '온다 리쿠'의 이 소설의 의미를 찾아낼 수가 없다. 그건 멍청한 독자의 탓, 이라고 누군가 말한다면 그럼 그렇게 말하든지, 라고 대꾸할것이다. 이런 어정쩡한 소설이라니! 어정쩡하고 억지스러운 이야기라니. 왜 온다리쿠는 그 예전의 『밤의 피크닉』같은 소설을 쓰지 못하는 걸까? 2008년에 만난건 아니지만 온다 리쿠의 다른 소설도 통 이해가 되지 않았더랬다. 『빛의 제국』은 대체 뭔말인지 모르겠고, 『황혼녘 백합의 뼈』는 그저 그랬으며, 『라이온 하트』역시 뭐 어쩌란 말인가, 싶었다. 요시모토 바나나와 에쿠니 가오리를 버리고 온다 리쿠를 취할까 했으나 온다 리쿠 역시 취하지 않으련다.
이 작가는 그러니까,
무슨말이 하고싶은걸까?
다른사람들의 서평을 읽어보면 다들 좋다고 하던데, 나랑은 맞지 않는가보다. 어쩔 수 없지, 뭐.
그보다는 『골든 슬럼버』쪽이 훨씬 나은 듯. 읽으면서 울컥 거렸었거든. 가끔 일본 소설에서 묘미를 찾는다면 '이토록 평범하고 작은 일상의 감동'쯤이랄까. '미야베 미유키'의 『화차』를 보면, 신용카드로 빚을 진 사람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면서 (정확하게는 기억나지 않지만)'착실한 사람들이 빚을 갚으려고 노력한다'는 식의 문장(아, 정확하게 기억하고 싶다. 그래야 제대로 표현이 되는데!)이 나온다. 그 때 느꼈던 감정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잘 모르겠지만, 그 문장 때문에 나는 미야베 미유키가 확 좋아졌더랬다. 『골든 슬럼버』도 마찬가지. '어쩔 수 없이 살인자는 될 수 있지만 어쩔 수 없이 치한은 될 수 없다'는 문장에도 아아, 정말 그렇지, 했더랬다. 물론 이 책에서 눈물을 그렁그렁하게 만들었던 문장은 당연히 '그럴 줄 알았어' 겠지만.
그럴 줄 알았어.
이 책에는 '사라'가 나온다. 네명의 남자가 보는 그녀의 모습은 하찮은 하녀이기도 하다가, 몸을 함부로 굴리는 창녀이기도 하다가, 진심으로 사랑하는 여자이기도 하다. 한 여자에게 이토록 다양한 모습이 있는걸까, 혹은 한 여자를 보는 남자들의 시선이 옳지 못했던걸까. 거기에 대한 결론은 감히 책을 읽어보라는 말로 회피하련다.
다만,
어쩌면 정말로, 우리 인류의 죄를 씻어주기 위해서 끊임없이 누군가가 우리를 대신해서 희생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어쩌면 정말로 그럴지도 모른다. 누군가가 하루하루 살아가는 특별할 것 없는 우리들의 일상을 유지하도록 하기 위해서, 어딘가에서 처참한 모습으로 죽어갈지도 모른다. 그(혹은 그녀)는 그런식으로 인류를 구해낼 구세주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그런 세상속을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
초반에 몰입하기가 좀 힘들었는데 끝에 가서는 혼자 막 가슴 벅찼다는.
후회하지 않는 자식이 되는것도 힘들겠지만 후회하지 않는 엄마가 되는것도 어렵지 않을까. 『엄마를 부탁해』가 자녀들의 엄마에 대한 생각과 후회에 대해 끊임없이 얘기했다면, 『유진과 유진』은 더 좋은 엄마, 아니, 자녀에게 상처를 주지 않고 살아가는 것은 어떤것인가 생각해 보게 한다. 나는 이미 우리 엄마의 자녀이기는 하지만, 아직 누군가의 '엄마'는 아니다. 그래서 누군가에게 좋은 엄마가 되는건 이렇게 하는거야, 라고 말해줄 수는 없지만 이렇게 하는게 좀 더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할 수 있도록 『유진과 유진』이 도와준다.
그런데 『엄마를 부탁해』는 지나치게 과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엄마에 대해서 말할때 우리는 언제나 울컥하고 감정적이지만 그래도 이건 너무 과하지 않나, 싶어지는 것이다. 『유진과 유진』은 사실 아주 오래전에 본 '버지니아 앤드류스'의 『오도리나』와 어느 정도 문제 해결 방법이 비슷하다. 그러나 그렇다고해도, 다르게 해결된 방법은 여기서 보여준다. 그리고 사실, 출근하는 지하철안에서 조금, 울었다.
이런것을 반전이라고 해야할까. 나는 『매혹』의 책장을 넘기다가 두번이나 놀랐다. 처음엔 이게 단순히 기억상실증에 걸린 연인들의 이야기가 아니라서, 나중엔 이 모든게 '그의 이야기'가 아니라는 데에서. 퇴근하는 지하철안에서 그 부분을 읽다가, 아, 내가 그동안 잘못읽은걸까, 정말 이런거야? 했었다. 제목처럼 매혹적인 책이었다.
기묘한 재미를 말하자면 『열세번째 이야기』도 빼놓을 수 없다. 너무 두꺼워서 출퇴근하는 동안에만 독서를 하는 내게는 눈에 들지 않는 책이었는데, 자기전에 조금 읽다가 너무 재미있어서 깜짝 놀랐다. 처음엔 그다지 별 이야기가 나오지 않는데, 그저 책방과 책과 아버지의 이야기만 조금 풀어놓는 것 뿐인데도 빨려들어가고 만다. 도대체 이건 무슨 힘인걸까. 매력적이고 재미있는 책.
격한 감정의 흐름없이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책. 『알링턴파크 여자들의 어느 완벽한 하루』를 '재미있다'고 표현하는 건 그다지 적합한 표현은 아닌 것 같다. 그보다 나는, 대부분의 여자들이 이런 감정들을 언젠가는 갖게 될지도 모른다는 공감에 악수를 하고 싶었달까. 남편에 대한 것이든 자식에 대한 것이든 어쩌면 언젠가는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나(의 본질)를 죽이고 있는 것 같은 감정을 느끼게 되지 않을까. 물론 그 감정은 시간이 지나면 사그러들기도 하겠지만. 결혼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결혼하라는 잔소리만 해대는 이미 결혼한 사람들만 가득한 세상에, 이런식의 소설이 나오다니. 정말이지 반갑지 않을 수 없다. 하하.
『넘버원 여탐정 에이전시』는 제목만 보고 빼어난 미모의 여탐정이 나오지 않을까 싶었는데, 결혼에도 한번 실패한 아프리카의 뚱뚱한 여탐정이 나온다. 아, 그런데 이 여자 너무 좋다. 특별한 반전도, 음모도, 사건도 없지만 몇장안에 끝나버리는 그녀의 사건들이 재미있고 그녀가 들려주는 그녀의 남자와 아버지와 친구와 일상에 관한 이야기들이 충분히 만족스럽다. 언젠가 아프리카에 가서 그녀의 옆에 나란히 앉아 그녀가 끓여주는 차를 마시고 싶다는 생각도 해본다.
책 자체도 재미있지만, 교고쿠도의 이론에 언제나 혹하게 만드는 것이 이 책의 묘미가 아닐까. 대체 무슨말을 하려는거야, 싶다가 결국엔 교고쿠도의 이론에 언제나 설득당하고 만다. 그의 이론이 진실이라니까, 하고 편까지 들어주고 싶다. 아직 『광골의 꿈』을 읽지는 않았지만 기대만빵. 참고로 말하자면 『우부메의 여름』에는 20개월동안 임신한 상태인 여자가 등장하고, 『망량의 상자』에는 팔다리가 잘려도 살아서 존재하는 시체 아닌 시체들이 나온다. 호기심이 동하지 않는가? 도대체 어떤 이야기인지 궁금하지 않은가? 읽기 시작한다면 뒷장이 궁금해서 미칠지경이 될지도 모른다.
읽은 책들에 대해서 모두 다 코멘트를 단다면 좋겠지만, 그중 기억나는 몇권에 대해서만 적기로 하고, 마지막으로 『새벽 세시, 바람이 부나요?』가 올해의 내 베스트가 될 뻔 했지만, 그걸 꺽어버린 책이 있다. 올해 (의도한것도 아닌데)9월에 읽었던 책.
무슨말을 해야 좋을지 알 수 없고, 그저 글을 아는 모두가 이 책을 읽기를 희망한다. 이 책은 2008년의 베스트이고, 내 인생의 책이다. 나는 아직도 가끔 책장에서 이 책을 꺼내어 아무곳이나 펼친다. 오스카가 있든 없든,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있든 없든, 블랙씨가 있든 없든, 그 장면 그대로 자꾸자꾸 가슴에 담기는 책.
우리는 무사할 것이다. (p.45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