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퇴근길 지하철에서는 <취하는 로맨스>라는 드라마를 보고 있다.
인스타그램에서 짧은 영상을 보고 '오 이거 볼까' 했던건데, 내가 봤던 영상속에서 여주인공이 발을 헛디뎌 남주에게 안길 뻔한 그 순간에 코어에 힘을 주고 다시 제자리에 서는 장면이 나왔다. 클리셰에 대한 반박이랄까. 마침 그 여주인공이 나에게 호감인 배우였던 터라 이거나 볼까, 하고 시작하게 됐던 것.
주인공 채용주(김세정)는 특수부대 장교출신으로 지금은 주류회사에서 일하고 있다. 그녀는 평소에 '여자답게 굴라'는 말을 종종 들어왔던 사람인데 자신의 외모를 가꾸거나 좋은 옷, 좋은 가방을 사는데에 관심이 없고 일단 할머니와 함께 사는 가장인지라 최선을 다해 자신의 감정과 고통을 참아가며 일에 열중하는 사람이다. 그런 그녀가 자신과 함께 일하는 주류 지점을 살리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유명한 브루어리의 대표를 만나 함께 일하기를 제안하며 그 대표와 사랑에 빠진다는 내용이다.
이 브루어리의 대표 윤민주(이종원)는 '초민감자-엠패스' 인지라, 어릴 적부터 '남자답게 굴어!'를 들어야했던, 군인 출신 아버지에게 부끄러운 아들이다. 이 드라마 덕에 초민감자 엠패스를 처음 알게 되었는데, 엠패스는 타인의 감정에 깊이 동화되기 때문에 너무 힘들고 가끔은 이 감정이 타인의 것인지 나의 것인지 헷갈려하기도 한다는 것. 그런 그는 다 괜찮다고 말하는 용주가 얼마나 안괜찮은지를 이미 너무나 잘 알고있다. 그리고 이 둘이 사랑에 빠지는거다.
이 커플 외에 주류회사에서 일하는 방아름(신도현) 과 토스트 푸드트럭을 운영하는 '오찬휘(백성철)'가 나오는데 오찬휘 역시 특수부대 장교출신인데 지금은 토스트를 팔고 있고 브루어리에 알바로 써달라며 찾아갔다가 이들과 함께 일을 하게 된다. 그는 방아름에게 첫눈에 반해 적극적 구애를 하고 그런데 방아름은 대기업에 다니는 이유 자체가 결혼정보회사에서 자신의 등급을 높이기 위한 사람. 일년 뒤 결혼할 계획을 가진 방아름은 결정사를 통해 선을 보며 다닌다. 그런데 그녀의 마음에 오찬휘가 자꾸만 들어와. 결정사에서 등급을 받지도 못할 것 같은 오찬휘가.
자, 내가 이 줄거리를 굳이 말한 이유는 이 장면의 설명을 위해서다.
방아름이 또 선을 보러 간다는 걸 알게된 오찬휘는 그러면 안된다는 걸 알면서도 그녀가 선보는 까페 문밖에서 흘끗대며 쳐다본다. 까페 안에서 선을 보고 있던 방아름은 앞에 앉은 거만한 남자에게 신경을 쓰지 못하고 머릿속 오찬휘를 몰아내느라 바쁘다. 그러다 문밖의 오찬휘를 보고 안되겠다 싶어 맞선남에게 '나는 이만 갈게 다음 맞선이 있어'라고 일어서는데, 그 남자가 화가 나서 방아름에게 "어디서 A마이너스가 A플러스 등급의 나를 까냐!"고 하는거다. 이때 오찬휘가 등장해 방아름에게 '바다 보러 갈래요?'를 시전. 그렇게 그들은 바다를 보러갔단 말이야? 그래, 이건 로맨스 드라마니까 그렇다 치는데, 그 뒤에, 나란히 바다를 보기 위해 앉아서 오찬휘는 방아름에게 손을 잠깐 달라고 한다. 그리고 그 손바닥에 검정 수성싸인펜으로(OMR 카드 체크하는 줄...) A++++++++++++ 라고 쓰는거다. 너는 나에게 더블에이플러스라면서. 그러자 방아름은 "이거 지워져요?'라고 묻는데, 오찬휘는 "지금 이거 되게 로맨틱한 순간인데 그런 반응이면 안된다"라고 하는거다.
나는 그 대화 장면을 보면서,
'나는 틀려먹었다'
리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내가 꼭 그랬거든. 너는 나에게 더블에이플러스야 어쩌고야 하는 그 장면이 로맨틱하게 느껴지는게 아니라, 하 쉬바 싸인펜 어떻게 지우지, 왜 손에 낙서를 하고 지랄이야... 이렇게 되어버린거다. 하아- 내가 몰입을 하지 않았다고 볼 순 없다. 나는 그 순간 내 손바닥에 낙서가 되는 것 같았으니, 나는 그 장면에 충분히 몰입했다고. 그런데 싸인펜으로 내 손바닥에 낙서하는 순간, '아니 이 자식이..' 이렇게 되어버린거다. 물론, 남자의 의도는 알고도 남음이다. 에이마이너스라고 멸시를 당한 나를 위로하기 위함이라는거, 그거 따뜻한 마음이라는 거, 진짜 너무나 잘 알고 이해한다. 그런데.. 아니... 그래도.... 손바닥에 싸인펜으로 그거 그리면... 걍 말로 해도 되잖아? 왜 그걸 내 손바닥에 그려? 하아-
난 틀려먹었어. 나는 로맨스 감정 따위, 다 틀려먹은 사람이야. 난 안돼.
그러면서
나 엠비티아이 검사 다시 해봐야 되나? 라는 생각도 했다. 나는 무려 전문적인 검사를 받은 사람이다. 앞에 테스트 해주는 선생님이 앉아 있고 시간을 재면서 종이 질문지에 답했던 사람이고 그렇게 나온 결과가 ESFP 였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아, 이 싸인펜 낙서 어케 지워, 아 빡쳐..' 가 먼저 나오는 걸 보면, 이건 F는 아니지 않나? 아니면 내가 S 이기 때문에 현실에 발붙이고 현실적으로 접근했기 때문이 이것이 '로맨틱한 제스쳐' 가 보다 더 크게 '지워야 할 낙서'로 인지하게 된걸까? 하여간, 틀려먹었다, 라고 생각했다.
그 뒤에 또 이런 장면이 나온다.
윤민주가 채용주에게 데이트를 신청해 첫 데이트를 하는 장면에서 채용주가 평소의 복장과는 다르게, 방아름의 도움을 받아 예쁜 원피스에 힐을 신고 윤민주를 만나러 온거다. 그리고 그런 윤민주는 채용주를 기쁘게 해주겠다며 함께 걷다말고 꽃다발을 사준다. 채용주는 꽃다발을 받아본 적이 없어 꽃다발이 얼마나 좋은지 모르고 있다가 크게 감동하는데, 나 역시 꽃다발은 돈낭비라고 생각했던 어린 시절을 거쳐 이제는 내가 수시로 꽃을 선물하는 사람이 되었기 때문에, 채용주의 감정을 분명히 '안다'. 아는데, 아아, 나는 틀려먹었어, 그런데 이렇게 생각되는거다.
아니 지금 헤어지는 자리도 아니고 이제 만난 자리인데 저 꽃다발 계속 들고 움직여야 하는건가... 귀찮은데.....
라고 말이다. 하아- 나는 틀려먹었어.
내가 비싼 핸드백을 가지고는 있지만, 그걸 내팽개쳐두고 계속 2만원짜리 백팩만 줄기차게 메고 다니는 까닭은 손에 뭘 들고 다니는게 넘나 싫기때문이다. 백팩은 다 그 안에 넣고 메고 다닐 수 있고 그리하여 손이 자유롭기 때문에 베리 땡큐인 것. 그런 성격의 나에게 꽃다발을, 아직 많이 걷고 이동해야 하는 이 한낮에 준다? 영 귀찮아버린 것. 어차피 윤민주는 차를 끌고 왔잖아? 나는 이 문제를 해결해야 했다.
"와 꽃다발 너무 예쁘고 고마운데, 들고다니기는 영 성가시니까 니 차에 가서 놓고 오자"
이렇게. 이렇게 해결하면 되겠지. 그리고 집에 갈 때 가져가면 되잖아. 솔직히 꽃다발 들고 계속 움직이는 건 좀 거시기하지 않냐? 세상 싫다.. 나에게 뭘 들게하지 마시오. 꽃다발을 백팩에 넣을 수도 없고, 데이트한다고 핸드백 들고왔는데 꽃다발까지 들면 내 손은 어디에... 그러면 남자가 '내가 들어줄게' 라고 하겠지만, 니가 들어줘도 니 한 손 못쓰잖아. 짐이다. 걷는 내내 짐이야. 두고 오자. 혹여라도 꽃다발을 꼭 주고 싶다면 일단 차에 두고 집앞에 나 내려놓고 주자.
역시... 나는 틀려먹은 것 같다.
역시.. 나는 외로움과 고독함을 친구 삼아 백팩 메고 책 읽으면서 혼자 돌아다니는 걸로.. 난 틀려먹었다니까?
어제 점심에 e 가 내게 물었다.
아무리 책을 읽고 방출한다고 해도 사는 속도를 결코 못따라갈텐데 내 책장 상태가 심히 걱정된다는 거였다. 이미 책장엔 꽂을 수가 없어, 방바닥을 차지하고 있지.. 라고 하니, e 는 그럴 것 같다며 집에 가면 사진 좀 찍어 보내달라 했다.
그래서 어제 집에 가자마자 ㅋㅋㅋ 사진 찍어 보내줬더니, 와, 조치가 시급해보이네요, 라고 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 책장 앞으로 쓰러지겠는데요? 이러면서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찍어놓고나니 잠자냥 님 생각이 났다. 잠자냥 님을 비롯한 모든 정리정돈 대마왕 님들. 지금 딱 생각나는 건 음, 은오 님, 라파엘 님?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이 분들이 싫어할 사진이라는 생각이 들어 굳이 책장 사진 '일부'를 공개한다.
이런 나라도 괜찮은가요?
이거 내 서재방 아니고 내 침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그리고 가방이 얹어진 저거는 스텝퍼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운동한다고 사뒀다가 내 침실에 처박아두고 가방걸이 되었다. 발 대는 부분에 가방 놓고 잘 보면 손잡이에도 가방 걸려있음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나는 역시 틀려먹었어..
오늘도 제육이나 먹으러 가야겠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