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식
히라노 게이치로 지음, 양윤옥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그러나 아마도 그 하나하나의 이유 모두가 진실을 품고 있으리라. 나이가 들어갈수록 나는, 인간이 행하는 바 어떤 결과가 오직 한 가지의 원인에 반드시 귀착된다고 하는 단순한 낙관주의를 점점 더 믿을 수 없게 되었다. 하나의 결과가 나오는 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도 훨신 더 많은 미묘한 카오스(혼돈)에 의한 것이며, 대부분의 경우 우리가 찾아낸 원인이라는 것은, 유기적인 카오스로부터 조금 떼어온 한 조각에 지나지 않는 것이리라. 물론 그 크고 작음의 차이는 있겠지만. (p.220-221)


댓글(10)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icaru 2015-12-01 17: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작가가 20대 중반쯤에 쓴 작품으로 알고 있는데,, 참 대단해요~
˝어려도 다 알아요(아파요)˝ 같은 노랫가사인지 뭔지가 떠올라요!! ㅎ

다락방 2015-12-01 17:19   좋아요 0 | URL
스물 셋에 썼답니다, 글쎄! 저는 스물 셋에 만화방에서 만화 보며 라면 먹고 있었는데... 하아-

moonnight 2015-12-01 21: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읽고 저도 충격받았던 기억 나네요. 굉장한 젊은 작가가 나타났구나 하고요. @_@;

다락방 2015-12-02 08:20   좋아요 0 | URL
제 젊은 시절은 헛된 시간들이 아니었나..젊은 시절을 너무 탕진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ㅠㅠ

뽈따구 2015-12-02 15: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스물 셋에..... 왠 벤쳐에서 밤새가며 프로그래밍 공부를 했....... 하아..........

다락방 2015-12-03 12:24   좋아요 0 | URL
아아, 그래도 공부를 하셨다면...뭔가 남는 게 아닐까요? 전 너무 먹고 마셔대기만해서...결국 비루한 육체가 남았네요. Orz

transient-guest 2015-12-03 09: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기 제가 사놓고 못 읽고 있는 책이 pop-out하네요.-_-: 납뜩이가 그럽니다...`어쩌면 좋지 너??` 딱 제 심정이네요..

다락방 2015-12-03 12:25   좋아요 0 | URL
사놓고 못 읽은 책으로 배틀붙으면 제가 이길 것 같은데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저는 사두고 안읽은 책 소진하기..를 2016년의 목표로 잡아볼까 합니다. 매해 그랬듯이..말입니다. ( ˝)

2015-12-05 13:4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12-06 20: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걷어차기

어제는 e와 소주를 마셨다. 육전과 부대찌개를 안주삼아 소주를 홀짝홀짝이다가, 그렇게 이 얘기 저 얘기 나누다가, e 는 아오마메를 얘기했다. 고환 걷어차기를. 아! 아오마메, 고환 걷어차기! 나는 그 얘기를 듣고 급반가워하며 맞아,맞아, 그랬지! 대화를 이어갔고, e 는 갑자기 좋다고 했다. 자기 주변에는 책 읽는 사람이 없어서 이런 얘기를 할 수 없는데 너한테는 망설임 없이 해도 된다, 고 하면서. 그치, 좋지? 하며 얘기하다가 갑자기 일큐팔사를 다시 읽고싶어졌다. 지금은, 이 흉흉한 세상에서는, 아오마메가 필요한 게 아닐까.

















아오마메만큼 고환을 걷어차는 기술에 숙달된 사람은 아마 손꼽을 정도일 것이다. 발차기 패턴에 대해서도 매일 연마를 거듭하고 실전 연습을 빠뜨리지 않았다. 고환을 걷어찰 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망설임을 배제하는 것이다. 상대의 가장 허술한 부분을 무자비하게, 전격적으로, 치열하게 공격한다. 히틀러가 네더란드와 벨기에의 중립국 선언을 무시하고 유린해버리는 것으로 마지노선의 약점을 찔러 간단히 프랑스를 함락시킨 것과 같이. 잠시도 망설여서는 안 된다. 단 한순간의 망설임이 치명적인 것이 된다.  (1권, p.276)



남성회원에게 불안이나 분노나 불쾌감을 주는 것에 대해 아오마메는 털끝만큼도 켕기는 게 없었다. 우격다짐으로 성폭행을 당하는 고통에 비하면 그런 불쾌감 따위는 별것도 아니지 않은가.(p.280) 



혹시라도 나를 공격하는 무모한 놈이 있다면, 그때는 세계의 종말을 생생하게 보여주리라고 그녀는 마음먹었다. 왕국의 도래를 똑똑히 직시하게 해주리라. 한 방에 저 남반구로 날려보내 캥거루랑 왈라비와 함께 죽음의 재를 듬뿍 뒤집어쓰게 해줄 것이다.(p.281) 



고환이 걷어 차이는 아픔은 이런 것이다.


"그건 이제 곧 세계가 끝나버리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의 아픔이야. 그거 말고는 제대로 비유할 말도 없어. 보통 아픔과는 전혀 달라."(p.277) 



나는, 어떤 놈들의 세계는 끝나버려도 된다고 생각한다.


















음, 나는 웹툰도 만화책도 잘 못본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이 좋다고 말하는 [미생]도 1권을 보다 말았다. 텔레비젼은 워낙 안보니 역시 방송으로도 보지 않았고. 그런데 우연히 드라마 [송곳] 1편을 보고는 '아 좋다' 생각을 했다. 그 방송을 매시간 챙겨볼 자신이 없었던 나는, 만화책을 읽기로 했다. 부랴부랴 사서 이 책의 1권부터 3권까지 읽게 됐는데, 아, 정말 좋았다. 가슴이 아팠고, 자신의 자리를 지키기 위해 무섭지만 용기를 내는 사람들을 보면서 가슴이 뛰었다. 최규석의 만화야 내가 워낙 좋아했지만, 아, 정말 잘 썼구나, 잘 그렸어. 이야기를 정말 잘 풀어냈고 대사를 진짜 잘 썼다, 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직 완결이 아니라서 아쉽지만, 이 책을 보고난 후에 고개를 들고 세상을 보니 다른 것들이 보이는 것 같았다. 집 근처 홈플러스에 들렀는데 구호가 써진 옷을 입은 몇몇 직원분들이 보였다. 아, 저 분들은 노조에 가입한 거겠구나, 싶더라. 


그리고 지난주 방송에서 지현우는 욕을 했다. 늘 예의를 지키려고 하고 자신이 정한 방향으로 가려고 했던 그는, 사측의 입장이 되어 노조를 방해하는 여자사람부장의 귓가에, 전투력이 상승하여, 



꺼져 씨발년아.



라고 말한다. 그런 자신에 대한 복잡한 감정을 지현우는 어쩌지 못하고 당황스러워한다.



이 장면이 오래오래 기억에 남았다. 왜 기억에 남는지 모르겠는데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았다. 왜일까? 왜그럴까? 그러다가 최근에 내게 일어났던 일이 생각났다. 내가 그때, 그렇게, 그저 수그러들면 안되는거였는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 전투력도 그때 상승했어야 하는데. 그때 말했어야 되는데. 맞서서 으르렁거렸어야 했는데. 그때 진짜 거침없이 말했어야 했는데.



꺼져 씨발놈아.



라고...아, 그러지 못한 게 너무 후회된다. 너무 얌전히 물러났어... 좀 더 거칠어져야겠어.





아버지가 하루 휴가를 내셨고, 덕분에 내가 출근하는 시간에 집에 계셨다. 머리를 감고 나오면 국을 데우는 게 내 출근 일과였는데, 오늘은 아버지가 데우고 계셨다. 반찬은 어떤 거 꺼내줄까, 물으시고는 식탁 위에 반찬도 차려주셨다. 나는 평소보다 조금은 여유롭게 화장을 하고 머리를 말렸고 부엌으로 나와 내가 먹을 만큼의 소고기뭇국(!)과 밥을 퍼서 식탁 의자에 앉았다. 아, 누군가 아침 식사를 준비해주니 출근은 한결 여유로워지는구나. 최근에 엄마가 평일에 여동생집에 가 계셔서 늘 내 아침을 내가 분주하게 차려먹고 와야 했다. 분주한 아침이라며 아침식사를 거를 순 없었다. 매 끼니는 소중하니까.


밥을 다 먹고 양치를 하고 옷을 갈아입고 신발을 신으면서, 아빠, 아침 차려줘서 고마워, 하고 말했다. 아빠 덕분에 한결 편했어, 덧붙이고 집을 나섰다.




며칠전에는 칠봉이에게 재이슨 스태덤과 로지 헌팅턴 휘틀리 얘기를 하면서, 나는 이 커플이 너무 좋고 이런 커플을 지향한다, 라고 말했다. 내 애인은 재이슨이고 내가 로지 같은.....그런 커플......그러자 칠봉이는



너는 로지보다는 재이슨에 더 가깝지.


라고 했다. 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뭔가...반박할 수 없다! 대학시절 교양으로 호신술을 들을 때, 같은과 아이들이 나를 '스티븐 시갈'이라고 불렀던 게 생각났다. 아아, 나는 젊었을 때는 시갈이었고 나이 들어서는 재이슨인가...... 어제 점심에 동료 k 랑 밥을 먹으면서 이 얘기를 했더니 '시갈 닮았다는 게 어쩐지 와닿는다'고 하며 빵터져서 웃더라...야.....





요즘엔 빅토리아 시크릿 모델인 '캔디스 스와네포엘' 사진을 많이 본다. 너무너무 예쁘다. 특히나 내가 언제나 매력적이라고 생각하는 아름다운 색깔의 눈동자! 나는 성형수술 생각이 전혀 없을 정도로 내 얼굴이 마음에 드는데(응?), 눈동자 색깔 만큼은 저렇게 찬란한 색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종종 한다.



이마도 예쁘고 코도 예쁘고 눈썹도 예쁘고 입술도 예쁘다. 아..저 눈동자. 닮고 싶은 눈동자.....


점심을 함께 먹던 k 에게 이 사진을 보여주며 '내가 눈동자색만 이랬어도 이 사람이랑 똑같은데!' 라고 하자, k는 


"네?"


라고 했다.


술을 함께 마시던 e 에게 이 사진을 보여주며 '내가 눈동자색만 이랬어도 이 사람이랑 똑같은데!' 라고 하자, e는


"그렇죠.."


라고 했다.



음...왜 그렇다고 하는 e의 대답이 더 기분나쁜거지...




어쨌든,

목요일에는 어복쟁반을 먹으러 가기로 했다.




그리고 다시 중고샵!

배송비를 받는 대신 책값 대폭 인하! 

송곳은 올리자마자 팔림..


중고샵 바로가기


댓글(10) 먼댓글(0) 좋아요(2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단발머리 2015-12-01 09:5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원래 인생이란 톤이 중요한거죠~~
k는 어처구니없지만서도 웃으면서
˝네?˝ 한거구요,
e는 힘없이 대답한거죠.
˝그렇죠~~~˝
이건 댓글이라 톤이 전달이 안 되니까요.
저는..... ˝그렇죠~~~~˝로 할께요. ㅎㅎ

다락방 2015-12-01 09:55   좋아요 0 | URL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그렇죠?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단발머리님 럽럽 ♡

살리미 2015-12-01 11: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ㅎ 여기 음성지원기능이 있는거 같은데요? ㅋㅋㅋ
방금 간장두종지 곰발님 글 보고 또 열받았다가 금새 또 ㅋㅋㅋㅋㅋㅋㅋㅋ 거리고 갑니다^^

다락방 2015-12-01 11:31   좋아요 0 | URL
음성지원기능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아 배고파요 오로라님. 점심 시간이 곧 다가옵니다. 꺅 >.<

세상엔 사람 열 받게 하는 게 엄청 많지요? 그렇지만 또 사람을 웃게 하는 것도 많아요.
점심 맛있게 드세요, 오로라님. 많이 드시고요. 잘 먹고 추운 겨울, 혹독한 세상살이, 잘 이겨냅시다!!

기억의집 2015-12-01 11: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웹툰만화 못 봐요.희안하게도~ 익숙하지 않아서 그런 건지... 미생은 드라마로 봤는데, 만화는 안 샀어요. 송곳은 편치 않을 드라마같아서 보기가 그렇더라구요....아 진짜 모르겠어요. 우리들 이야긴데 왜 외면하는지...

다락방 2015-12-01 11:37   좋아요 0 | URL
기억의집님, 보니까 확실히 불편해요. 아프고요. 몰랐더라면 좋았을 거다, 라는 생각을 많이 합니다. 그래서 정희진은 `아는 것은 상처받는 것이다` 라고 말했는가 봐요. 그 말을 실감합니다.
그 아픔이 느껴질 게 뻔해서, 불편함이 뻔할 것 같아서 아마도 외면하고 싶은 거 아닐까요?
요즘 세상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정말 `차라리 모르고싶다`는 생각을 많이 하게 해요. ㅠㅠ

transient-guest 2015-12-03 09: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거 웹툰으로 보다가 너무 열받고 답답해서 멈췄어요. 무엇인가 속이 시원할 일이 있었으면 좋겠는데 말이죠..

다락방 2015-12-03 12:26   좋아요 0 | URL
속이 시원해질 날이 올지는..모르겠어요. 암울하죠.
그래도 누군가 그 환경에서조차 용기를 내서 발언을 하고 행동으로 옮긴다는 걸 보노라니 가슴이 뛰더라고요. 두렵고 걱정이 되면서도 가슴이 뛰는거죠. 드라마는 끝났다는데..저는 마지막회를 볼 수가 없을 것 같아요. 어쩐지 너무 아플것 같아서요. ㅠㅠ

럭키언니 2015-12-03 12: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중고샵바로가기를 연신 눌러보는 나.
송곳을 마주하고 싶어지네요..드라마도 못보고 웹툰도 못봤는디..

다락방 2015-12-03 12:27   좋아요 0 | URL
송곳..은 이미 팔렸으므로 다시 올라오진 않을거에요. ㅠㅠ
쪼꼬미뽀님을 위해서라도 중고샵 업뎃을 부지런히 해야하는데, 제가 요즘 독서력이 현저히 떨어져 업뎃이 느리네요. ㅠㅠ 책을 못읽고 있어요.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이웃집 살인마 - 진화 심리학으로 파헤친 인간의 살인 본성
데이비드 버스 지음, 홍승효 옮김 / 사이언스북스 / 2006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알라딘에서 책을 주문할 때도 그렇고 다른 인터넷 쇼핑을 할 때, 나는 가급적이면 회사에서 택배를 받는다. 친구들이 주소를 물어도 대부분 회사 주소를 알려준다. 집 주소는 가능하면 알려주지 않으려고 하는데, 그것이 남자친구인 경우엔 더 그렇다. 가급적이면 애인이라도 집 주소를 알려주고 싶지 않다. 그렇지만 언제까지고 알려주지 않을 수는 없다. 연애를 하고 지내다보면 부득이하게 집 주소를 알려줘야 하는 경우가 생기고야 만다. 좋다고 사귀면서 알려주지 않는 것도 좀 뭣해서 결국엔 알려주게 되는데, 헤어지고나면 집 주소를 알려준 게 가장 걸린다. 


나는 내가 강박증을 갖고 있어서 그러나, 하는 생각을 했는데 최근에서야 많은 여자사람들이 자신의 애인에게 집주소 알려주기를 꺼려한다는 걸 알게됐다. 뿐만아니라, 내가 사는 곳을 알려줬다는 거, 특히나 헤어진 애인이 나의 집을 알고 있다는 것에 대해 두려워한다는 것도 알게됐다. 예전에 여자사람친구랑 얘기하는데, 그 친구가 그랬다. '나는 애인하고 나쁘게 헤어진 것도 아닌데 집 앞에서 날 기다리고 있을까봐 무섭다' 고. 나 역시도 그랬다. 헤어지고나서 가장 무서운 건, 혹시라도 집앞에서 그가 나를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었다. 헤어진 연인을, 말없이, 맞닥뜨리기 싫었다. 그건 두려움이었다. 물론, 사귀고 있을 때도 말없이 집앞에서 기다리는 건 오싹하다. 결코 유쾌하지 않다. 낭만을 찾는답시고 약속 없이 찾아오는 일은 연애중에도 나는 싫다. 오늘도 한 여자사람에게 물었다. 너도 혹시 헤어진 남자가 집앞에서 기다릴까봐 무서웠던 적이 있냐고. 그녀는 있다고 했다. 


어쩌면 나는 기본적으로 남자사람을 신뢰하지 못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그것이 어릴 적에 폭력에 노출된 때문인지 아니면 여태 살아오면서 겪어온 생활속의 남자들의 모습 때문인지는 모르겠다. 물론 나는 아주 많이 남자사람들을 좋아하고, 그들과 대화하며 웃고 술 마시는 걸 정말 사랑하지만, 두려움까지 함께 가진 것도 맞다. 헤어진 뒤 쌍년이란 욕을 들었을 때도 두려웠고 욕을 먹지 않았는데도 두려웠던 적도 있다. 어떤 헤어짐에 있어서는 두려움이 너무 커서 나를 아는 여자사람들 모두에게 내가 지금 이토록 두렵다, 고 다 말하고 다니기도 했었다. 혹시라도 나에게 어떤 일이 생긴다면 내가 이러이러해서 두려워했었다는 걸 알아줘, 하고. 


물론 매 연애와 이별뒤에 늘 그랬던 건 아니다. 또한 나를 두렵게 했던 남자들, 내 친구들을 두렵게 했던 남자들이 유별나게 나빴던 남자들도 아니었다. 오히려 착하고 평범한, 좋은 남자들이었다. 그런데 그중 일부는 헤어지고 나니 무서운 존재가 되는 거다. 그렇다면 그런 두려움을 느끼는 내가, 다른 여자들이 유별난걸까? 이 책은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잠시만 생각해 보자. 순간적일지라도 누군가를 살해하는 상상을 해 본 적이 없는가? (p.56)



살인을 저지르는 사람이 특이한 사람이 아니란다. 우리 모두 누군가 한 번은 죽이고 싶은 욕망을 가지고 살인에 대한 판타지를 가졌다는 것을 이 책은 얘기한다.


이 책에는 누군가를 죽이고 싶었던 생각을 가진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가 나온다. 그 사람들은 평범한 사람들이었다. 가진 것을 잃을까봐, 경쟁상대가 꼴보고 싫어서, 모욕감을 느껴서, 두려워서 등등. 각각의 이유로 사람들은 누군가를 살해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고 대부분은 그저 생각에 그쳤으며 그중 일부는 실제로 살인을 저지르기도 했다. 그리고 이 책을 읽다보니 나처럼 헤어진 연인에 의해 내가 다칠지도 모른다는,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는 여자사람들이 많다는 걸 알게됐다. 내가 유별난 게 아니었단 말이다.



우리는 몇몇 놀라운 사실들을 발견하게 되었다. 예를 들어, 남성들은 자신의 짝짓기 전망이 희박해질 때 살인을 저지르고 싶어진다고 응답한 반면, 여성들은 그렇지 않았다. 도어스의 짐 모리슨이 말했듯이, "당신을 거절할 때, 여자들은 사악해 보인다.(Women seem wicked when you're unwanted)"(1960년대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킵며 히피 문화의 상징으로 추앙받던 전설적인 록 그룹 도어스의 보컬 짐 모리슨이 가사를 쓴 「사람들은 이상해(People are Strange)」에 나오는 구절이다-옮긴이) 이 불온한 생각은 남자들이 살인을 저지르는 상황에 대한 연구 결과에도 그대로 반영되어 나타났다. (p.36-37)



자신을 버린 배우자에 대한 살인 판타지에서는, 남녀 간의 차이가 그리 크게 발견되지 않았다. 오히려 판타지를 실행할 가능성이 주요한 차이라고 할 수 있었다. 남성들이 자신을 버린 배우자를 살해한 반면, 여성들은 살인이 유일한 탈출구라고 생각될 만큼 심하게 자신을 격리하고 학대하며 위협한 배우자를 살해했다. (p.174)



간략히 말해,여성들에 의해 저질러지는 살인의 주된 동기는 자기 보호와 위험한 결혼으로부터 도망치려는 필사적인 욕망이다. 이렇게 학대적인 관계에 처한 여성들은 자신이 처한 위험을 제대로 인식하고 있다. 자신의 배우자를 떠나려 시도한, 비슷한 환경에 처해 있는 많은 여성들이 수잔 라이트보다 더 운이 없었다. 적어도 수잔은 자신의 목숨은 건질 수 있었다.(p.171)



한 남자사람을 처음 보게 됐을 때, 그리고 그저 아는 사이로 지냈을 때는 그가 '사귀면서' 어떤 남자일지 알 수가 없다. 사귀면서는 그의 새로운 면들, 내가 알지 못했던 면들이 속속 드러난다. 마찬가지로, 사귀면서 알지 못했던 점들이 헤어지고 나서 드러나기도 한다. 이 사람이 이럴 줄 몰랐는데, 하는 것들. 데이트폭력을 당하고 가정 폭력에 노출된 여자들에게 종종 '그런 남자랑 왜 사귀어', '그런 남자랑 왜 결혼했어' 라고들 말하는데, 사귀기 전에는 그가 때릴 줄 몰랐기에 사귀었고, 결혼 전에도 그가 수시로 내게 주먹을 휘두를 줄 몰랐기에 그렇게 되었다. 또한 '맞은 여자'라는 타이틀은 오히려 가해자보다 더 많이 피해자를 위협한다. 그런 폭력 속에 휘둘린 이상 거기에서 빠져나오는 것 역시 어마어마한 두려움을 동반한다. 그와 사귀기 전에 알 수 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이 남자는 여자를 때릴 남자다', '이 남자는 변태적인 성행위를 즐기는 남자다', '이 남자는 집착으로 여자를 피곤하게 할 것이다' 등등. 그런 게 이마에 써있다면, 여자들이 미리 알 수 있었다면 당연히 그런 남자를 선택하지 않을 수 있을텐데.



남자들이 반응하는 방법을 예측할 수만 있다면(누가 애걸하며 간청할지, 누가 위협할지, 누가 스토킹할지, 누가 떠나갈지 그리고 누가 살해할지) 상당한 고통을 줄이고 많은 생명을 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럴 수 없다. 살인이 상대적으로 드문 사건이기 때문에, 언제, 어디서, 누가 살인을 저지를 것인가를 예측하는 것은 엄청나게 어려운 일이다. (p.139)



그는 계속 제게 전화해서 사랑한다고 말했어요. 그리고 제가 자신을 완전히 떠나 버리면 뭘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도 말했구요. …… 제가 사는 곳을 알고 있기 때문에 집에 찾아와서 절 죽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어요. (p.145)



살해당한 많은 여자들은 대부분 자신이 살해당할 걸 예측하고 있었다. 누가 자신을 죽일지 이미 두려워하고 있었고 '저 사람이 나를 언젠가 죽일거야' 하는 말을 바깥으로 꺼내기도 했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이 두려워했던 그대로 그 사람에게 살해당한다. 멀리 도망가기도 해봤지만 결국은 그렇게 됐다. 커다란 두려움이 계속 내게 보내는 신호를 절대 무시해서는 안되는 이유다. 7년간 살인에 대해 연구해서 이 책을 써낸 저자 '데이비드 버스'는 이렇게 오랜 시간 살인을 연구했음에도 불구하고,



살인 문제에 대해 만병통치약이란 없다. (p.361)



라고 말한다. 그는 그저 나의 직관을 믿으라고 말한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고작 그것 뿐인것 같다. 




우리가 알고 있고,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살해당할 위험이 얼마나 실제적인 것인지 깨달아라. 반갑지 않은 성적인 눈길을 일 초 이상으로 오래 보내는 남자를 경계하라. 당신이 존재하지 않는 걸 더 좋아할지도 모르는 계부모에게 주의하라. 당신의 성공을 배 아파 하며 조용히 앉아 있는 경쟁자를 조심하라. 동료들 앞에서 당신이 준 모욕을 참을성 있게 받아넘긴 사람에 대해 다시 한번 더 생각하라. 방금 유혹한 이성의 전 배우자를 주의하라. 거절하기 전에 당신을 '유일한 한 사람'으로 생각했던 낭만주의자를 경계하라. 떠나지 않으려는, 스토커로 변해 버린 전 애인을 경계하라. (p.362)



누군가를 죽이고 싶다고 한번쯤은 생각했던 사람들에게 저자는 묻는다. 왜 그렇게 하지 않았냐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사람을 죽이고나면 자신이 감옥에 갈 것임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라고 답했다. 앞으로의 삶을 암흑으로 보내고 싶지는 않았다고. 또한 누군가를 죽인다는 것이 잘못된 것이라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생각에만 그친다. 나 역시 그들과 마찬가지로 누군가를 죽이고 싶다고 생각해본 적이 있다. 저자가 내게 그런데 왜 그렇게 하지 않았느냐고, 그들에게 물었던 그대로 묻는다면, 나는 저자에게 아마도 이렇게 답할 것이다. 그때는 내가 너무 어려서 힘이 없었고, 지금은 힘이 있지만 그가 이미 죽어버렸기 때문이라고. 대부분의 평범한 사람들이 어쩌면 괴물이 됐을지도 모를 순간들을 지나쳐왔다. 나 역시도 그랬고. 



누군가를 죽이고 싶어하는 사람들의 얘기, 누군가 나를 죽일까봐 두려움에 떠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한 권 가득 읽고났더니 두려움보다는 슬픔이 밀려왔다. 죽이고 싶다는 욕망도-거기에 이르게 한 수치심, 모멸감, 분함 등등-, 죽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도, 하나같이 다 내가 알 수 있는 감정들이라 마냥 슬펐다. 이 연구를 하는 동안 저자 역시 연구를 그만둘까를 고민할 정도로 힘들었다고 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는 인간에 대한 희망을 놓지 않는다. 그러니까 살인에 대한 욕망이 아닌 다른 어떤 것들에 대해 믿고 있다고 해야하나. 그리고, 나도 그렇다.


우리의 마음속에 살인을 저지르도록 자극하는 적응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우리가 그것을 인간의 본성으로 받아들이고 살인을 퇴치하려는 노력들을 포기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가? 분명히 그렇지 않다. 인간은 살인에 대한 적응뿐만 아니라 협동, 이타주의, 화해, 우정, 동맹 형성, 자기희생에 대한 적응들 역시 가지고 있다. 살인이 발생할 때, 인간의 본성은 문제가 된다. 그러나 동시에 인간의 본성은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중요한 열쇠를 쥐고 있기도 하다. (p.356)



라고 써놨건만, 조선대의전원생의 데이트폭력 사건을 듣게 됐다. 네 시간 동안 잔인한 폭력 앞에 노출되어 죽음에 대한 공포를 겪었을 생각을 하니 마음이 너무 안좋았다. 피해자는 죽음에 대한 공포를 느꼈는데, 고작 얼마간의 벌금으로 가해자를 세상에, 피해자의 옆에 다시 내놓다니. 바로 위에 희망 운운한게 병신 같은 말이 되어버렸다.




출생 후 작동하는 살해 방어 기제는 바로 `울기`다. `울기`는 아기가 배고픔이나 고통을 부모에게 알리는 괴로움의 신호이다. 출생 후 6개월이 지나, 영아가 다른 곳으로 이동할 수 있는 능력을 비교적 갖추게 될 때까지, 영아에게서는 특화된 공포 반응이 나타난다. 바로 낯선 사람에 대한 공포 반응(낯가림)이다. 영아의 공포 반응은 낯선 사람 누구에게나 무차별적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주로 남성에게 집중해서 나타난다. 이는 인간의 진화 역사 동안 영아에게 가장 큰 위험의 대상이었던 성별과 정확히 일치하는 것이다. (p.30)

또 다른 문제는 비상하는 것은 종종 추락한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사랑에 빠질 때처럼 갑작스럽게 사랑에 흥미를 잃는다. 우리는 누구의 사랑이 식을지 확신을 가지고 예측할 수 없다. 그러나 최근의 연구 결과들은 이에 대해 몇몇 중요한 단서들을 제공해 준다. 사랑에 빠질 때, 욕구의 충족이 중대한 것처럼, 욕구의 방해는 갈등과 이혼을 예고한다. 부분적으로 그가 가진 부와 야심 때문에 선택된 남성은 직업을 잃게 되면 버림받을지도 모른다. 또 부분적으로 젊음과 미모 때문에 선택된 여성은 젊은 모델이 자신의 배우자를 유혹하면 물러나야 할지도 모른다. 처음에는 자상하던 상대가 잔인하게 변할지도 모른다. 반복해서 관계를 가졌음에도 임신이 되지 않으면 부부는 각자 다른 곳에서 더 비옥한 결합을 찾을지도 모른다. (p.120)


댓글(6) 먼댓글(0) 좋아요(2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후이 2015-12-01 09: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글 보고 나니 생각나는 남자가 있네요. 친구에게 직장에서 묘하게 계속 찝쩍대는, 심지어 결혼한 뒤에도 그런 사람이 있었는데, 이상하게 빤히 쳐다보는 눈빛이 너무 무서웠다고요.
매일 하루가 멀다하고 들려오는 기사들이나, 어제 4시간 감금폭행이나 여자를 무섭게 하는 일은 현재진행형으로 계속 되는 거 같습니다.

다락방 2015-12-01 09:38   좋아요 0 | URL
네, 무휘님. 제가 아는 여자들 중에서도 그런 경험을 한 사람들이 있어요. 분명히 `아니`라고 말했고 심지어 `애인이 있다`고 말했는데도 무작정 들이대는 남자들이요. 소리도 질러보고 좋게도 말해봤지만 자기 말만 하고 자기 감정만 전달하기에 급급했던 남자들. 그런 남자들을 대하는 여자들은 정말로 `무서워` 했어요.

현재진행형이에요, 무휘님. 여전히요.

단발머리 2015-12-01 10: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신문기사나 방송을 통해서는 많이 들었지만 헤어진 남자, 전 남편, 전 남친의 존재가 얼마나 공포스러운지 이 글을 읽고나니 더 가깝게 느꼈어요. 제 주위에서는 실제로 많이 말하지 않기 때문인것 같아요.
헤어져서도 도망갈 수도 없다면 어떻게 해야하는지... 정말 죽음을 각오하고 헤어져야 하는지...

그나저나 저는 이 책, 읽어요, 말아요? ㅎㅎ

다락방 2015-12-01 10:29   좋아요 0 | URL
이 책을 읽어야할지 말아야할지 제가 ... 그러니까.. 판단이 잘 안되네요? ㅎㅎㅎㅎㅎ

네, 단발머리님. 실제로 저도 공포를 느낀 적이 있고요, 공포를 느꼈다고 말한 지인들도 있었어요. 그리고 털어놓다 보면 꽤 많더라고요. 다들 그걸 말하기 두려워하고 꺼려하는 것 같아요. 내가 사귀었던 사람, 내가 호감을 가진 남자에게 실상 공포를 느꼈었다는 걸 말하는 건 쉽지 않으니까요. 그렇지만 말하지 않으면 안돼요. 말해야 해요. 그래서 누구 때문에 공포를 느끼는지 주변인에게 알리는 게 좋다고 생각해요, 전. ㅠㅠ

도망을 갔는데도 따라와서 총으로 쏜 남자도 있더라고요. 왜 헤어지는 일이 죽음을 각오해야 하는 일이 된걸까요...하아-

뽈따구 2015-12-01 12: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우... 역시... 전.. 무한긍정인가봐요. 이 글을 읽으면서 십분 공감하면서도.... 실감이 안 나는걸보면. 긁적.

다락방 2015-12-01 13:13   좋아요 0 | URL
실감이 안 나는게 낫지 않을까요? 실감나는 순간 아프고 불편하니까요. ㅜㅜ
 
송곳 1~6 세트 - 전6권
최규석 지음 / 창비 / 2017년 11월
평점 :
절판


가슴이 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만약 중학생인 나를 엄마가 당분간 친척 집에 맡긴다면, 안간다고 신경질을 냈을 것이고 또 그렇게 어찌어찌 친척집에 갔다면, 뭔가 화난 상태로 계속 뚱해 있었을 것 같다. 리쿠도 그랬다. 엄마가 고모네 집으로 자신을 보낸 게 너무 싫었다. 게다가 엄마가 그토록 무시해서 그동안 만나보지도 못하게 했던 간사이 지방의 사투리를 쓰는 고모가 아닌가! 어릴때부터 간사이 지방 사투리는 천하다고 시끄럽다고 엄마한테 들어왔기에, 리쿠는 그 지방의 사투리가 혹여라도 자기에게 익숙해질까봐 치를 떤다. 엄마의 지나치게 '완벽한' 교육 때문에 공감능력을 갖고 있지 못한 리쿠는, 그러나 어떤 분위기에서 눈물을 흘려야 하는지 알기 때문에 눈물이 필요한 순간에는 운다.



음, 좀 복잡한 마음이 되었는데, 


'스테퍼니 스탈'의 《빨래하는 페미니즘》에는, 자신의 아이가 여자라는 이유로 분홍색이나 인형에 대한 선택이 필수적인 것처럼 되는 걸 막기 위해 그런 교육을 시키지 않지만, 유치원에 보내고나니 분홍색과 인형을 취향으로 갖게 됐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내가 이 세계 안에서 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면서 갖게 되는 고유한 환경은, 그 안에 있을 때는 힘이 세다. 물론 바깥으로 처음 나간 순간에도 어마어마한 힘을 발휘하고. 그러나 더 넓은 세계에 더 많은 사람이 있는 건 당연하고, 또 그 많은 사람들에게 저마다의 삶의 방식이 있는 것도 당연하다. 엄마밖에 모르던 어린 아이에게 엄마의 말은 힘이 세지만, 아빠의 말은 진실이지만, 바깥으로 나오는 순간 완전히 낯선 세계가 펼쳐지고, 그걸 보며 잠시 혼란스러워 하다가 결국은 자신에게 맞는 것들을 찾아서 취하게 된다. 리쿠는 중학생인지금, 다른 세계와 다른 세상이 있다는 걸 서서히 받아들이게 되었고 어쩌면 엄마 아빠가 틀린 걸수도 있다는 걸 아마 앞으로는 알게 될 것이다. 나는 그걸 아주 늦게 알았는데, 나의 경우에는 집에서 받는 교육과 학교에서 받는 교육이 일치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학교를 다 졸업하고 나서야, 그제서야 아빠 엄마의 말과 선생님의 말이 틀릴 수도 있다는 걸 알게 된 거다. 내가 듣지 못한 세상에서는 전혀 다른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어쩌면 그래서 나는 더, 경험을 중시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좁은 세계에서 사는 동안에는 그 좁은 세계의 환경이 전부이다. 그러나 인간은 결국은 넓은 세계로 자꾸만 나가게 되는데, 유치원에 가고, 학교에 가고, 아르바이트를 하고, 직장생활을 하면서 결국은 다른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사람이 살아가는데 어릴 때의 환경은 얼마나 중요할까? 에 대한 생각을 해보노라면, 리쿠가 그랬듯이 '절대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것인 것 같아 엄청 중요하게 느껴지다가도, 그러다가 결국은 다른 세상을 보고 다른 사람들을 만나 다른 생각들을 흡수하게 되면서 달라지는 걸 보노라니, 결국은 인간 개개인의 잠재력이 살아가는 데 더 영향을 미치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나만 보더라도 그렇다. 부모님에게 교육 받은 대로 살지 않고 또 국민학교에서 배운대로 살지 않고, 지금은 오히려 부모님과 다른 의견을 가지고 싸우기도 하니, 결국 사람은 자기 갈 길을 가는건가..



아이사와 리쿠는 '그 다음'을 보여주지 않는다. '그 다음'을 보여주지 않음으로써 그 다음을 상상하게 만든다. 또한 이 만화의 중요한 포인트 역시 '그 다음'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러니까, '그 다음'을 얘기하기 위해 풀어놓은 이야기. 




리쿠의 엄마에 대해서도 꼭 얘기하고 싶은데, 그녀는 외로움을 드러내지 않고 감추려는 사람이기 때문에, 오히려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면서 자신의 외로움을 극복하려는 사람이기 때문에 더 외로워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화요일에 보았던 영화 《나를 미치게 하는 여자》에서 여자주인공인 '에이미'의 아버지는 몸이 아파 요양원에 계신다. 자신에게 사귀자고 말하는, 연인이 되자고 말하는 남자와 함께 있는 중에 에이미는 요양원으로부터 연락을 받는다. 아버지가 다치셨다고. 함께 있던 남자는 닥터였고, 에이미가 통화를 끊고 아버지에게 가겠다고 하자 자신도 함께 가자고 말한다. 그래서 그와 그녀는 에이미의 아버지를 찾아가고 남자는 아버지의 이마에 찢어진 상처를 치료해준다. 그리고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연인이 되어있었던 남자는 에이미의 옆에 있어주고 그녀가 동생에게 상처주는 말을 했을 때도 그녀를 토닥이며 안부를 물어준다. 아, 저런 게 연인인가, 저런 게 상대를 사랑하는건가 싶을 만큼 그 장면들이 좋았다. 관심을 가진 상대, 애정을 가진 상대에게 힘이 되어주고자 하는 거. 그리고 도움을 주는 걸 기꺼이 받아들이는 거. 그래서 그들이 서로를 너무나 좋다고 말하면서 연애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게 아닐까. 리쿠의 엄마를 보면서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남편이 바람피는 걸 알고있고, 그걸 인정하는 모습을 보면서, 그렇게 쿨한 척 하지 않아도 될텐데, 싶었던 거다. 남편이 '그녀와 헤어질까?'라고 물어도 그녀는 아니라고 한다. 남편은 남편대로 자신이 혼자 아내를 짝사랑하는 것 같다고 외로워한다. 그렇게 강한 척 하지 않는게 좋았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외로움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 강한 척 하다가 더 외로워지는 것 같다고. 어차피 인간이야 결국 외로운 동물이긴 하지만, 차라리, '나랑 결혼했는데 나만 사랑해야지' 라고 으르렁거리는 편이, 너가 다른 여자를 만나니까 나는 외로워, 라고 말하는 편이 더 낫지 않았을까. 너가 좋을대로 다른 여자 만나, 라고 해서 리쿠의 엄마는 자꾸만 쓸쓸함을 안에 쌓아두게 되는 것 같다. 여태 세상을 살면서 느낀 게 있다면, 이 세상에 '쿨한' 사람은 없다는 거다. '쿨한 척' 하는 사람만 있을 뿐이지.


건강한 관계란 그런 것 같다. 나의 외로움, 나의 모자람을 상대에게 솔직히 드러내는 것. 그리고 상대가 그에 대해 위로와 격려 도움을 준다고 하면 그것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것. 어쩌면 '완벽하게 보이고 싶다', '부족한 모습을 드러내고 싶지 않다'는 욕심 때문에 더 부족해지는 게 아닐까. 


말하지 않으면 상대는 나의 마음을 알 수 없다. 내가 아프다고 말하지 않으면 아픈 걸 모르고, 사랑한다고 말하지 않으면 사랑하는 걸 모른다. 자꾸 괜찮다고 하면 정말 괜찮은 줄로만 안다. 괜찮지 않으면서 괜찮다고 말하는 건,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하지 말아야 하는 것 같다. 음..뭐, 나도 그리 잘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지만... 



내가 울면 상대가 안아주고 상대가 울면 내가 안아주고 그러면서 살았으면 좋겠다. 내가 웃으면 상대가 함께 웃고 상대가 웃으면 나도 같이 웃으면서 그렇게. 리코는 '그 다음'이 기대되는 중학생이지만 '리코 엄마'는 이제 변하기 힘든 어른인 것 같아서 리코보다 훨씬 더 눈에 밟힌다. 가뜩이나 사는 게 더러운데, 세상이 더러운데, 사랑하는 사람들과는 마음껏 사랑을 표현하면서 살았으면 좋겠다. 왜 유행가 가사 중에도 그런 게 있지 않나. 사랑만 하기에도 하루가 모자라.....




아침에 동료직원이 아메리카노를 사주고 촉촉한 초코칩도 줬다. 함께 먹는데 존맛..핵존맛.. 너무 맛있어서 집에 가고 싶다. 촉촉한 초코칩을 수십박스 사서 쌓아두고 아메리카노 어마어마한 냄비에 받아놓고 하루종일 먹으면서 핵존맛 핵존맛.. 이러면서 있고 싶다. 그러면 행복하겠지.. 인간..

크리스마스 계획을 짰다. 크리스마스 이브에는 아빠 엄마 모시고 가서 함께 갈비를 먹고!! 크리스마스 당일날에는 퍼져서 늦잠을 자는 거다!!!!! 


완벽한 계획이야...


삶의 연속성..무얼 먹을지 계속 끊임없이 고민하고 그대로 실천하면서 유지되는....삶의 연속성...


댓글(6) 먼댓글(0) 좋아요(15)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뽈따구 2015-11-26 10: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좋은 크리스마스 계획인데요!
계획........ 슬쩍 컨닝해갑니다.
저는 담주에 기념일날 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

다락방 2015-11-26 10:17   좋아요 1 | URL
계획 좋죠!! 맛있게 많이 먹고 퍼져서 늦잠 자는 건 진짜 지상 최고의 계획인 것 같아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2015-11-26 12:38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다락방 2015-11-26 15:54   좋아요 1 | URL
그림체가 좋았어요. 단순한 그림이잖아요. 이 만화책은 `그 다음`이 중요한 만화책이구나, 하는 생각을 다 읽고나서 했어요. 그리고 리쿠 가족이 좀 신경쓰여요..

크리스마스에 딩굴딩굴할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크리스마스가 기다려져요. 뭐, 저는 별 게획 없음에도 언제나 크리스마스를 기다려왔지만 말예요. 크리스마스는 어쩐지 두근두근한단 말예요? ㅎㅎㅎㅎㅎ

건조기후 2015-11-27 16:1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너무 맛있어서 집에 가고 싶다 ㅋㅋㅋㅋㅋ 나는 촉촉한 초코칩이랑 칙촉 사이에서 주기적으로 왔다갔다해요. 희한하게 하나가 맛있으면 하나가 맛없더라고요.. 흐음

다락방 2015-11-27 17:11   좋아요 1 | URL
오늘은 소고기가 너무 먹고 싶어서 머리가 다 아플 지경이에요. 일주일만에 엄마 만나는데 엄마가 저녁 같이 먹자 하시길래 소고기 먹고싶다고 했어요. 엄마가 그러면 먹자, 라고 하셔서 행복해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촉촉한 초코칩이 책상 서랍에 하나 남아서...아껴야겠다 싶어, 좀 전에는 오레오웨하스를 먹었어요. 이것도 진짜 맛있어요. 행복해..초콜렛은 사랑인가봐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