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타 창비시선 284
신경림 지음 / 창비 / 200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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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경림 시인이 '또' 시집을 내놓았다. 그는 그의 '전집'을 엮어 낸 적이 있다. 전집들이 대개 시인 사후에 묶여 나오는 것이 일반적인지라, 신경림 시인이 두 권으로 묶어낸 '전집'을 나는 애써 외면했다. 시인이 절필을 선언한 것도 아니고, 전집을 낼 당시(2004년) 고희를 앞둔 나이임에도 여전히 그는 시적 감수성에 충만한 '현역' 시인이었으니, 그즘의 전집이 결코 전집일 수 없었기 때문이다. 결국 이번에 시인이 『낙타』란 시집을 또 내놓았으니, 이전의 전집은 이제 '전집'이 아닌 게 된 셈이다. 어찌 되었건 새 시집을 내놓았다는 소식에는 반가움을 금할 수 없다. 그는 내가 사랑하는 '살아있는' 시인이니까.

신경림을 떠올리면 새삼 감사를 전해야 될 곳이 있다. 바로 MBC의 <느낌표>란 프로그램이 그것이다. 지지리도 책을 안 읽는 대한민국에 한때나마 독서열풍을 몰고 왔던, 꽤 공이 많은 프로그램이었는데, 거기서 선정한 도서 중에 『신경림의 시인을 찾아서』가 있었고, 그것을 계기로 나는 신경림에게 더욱 매력을 느끼게 되었던 것이다. 그 시절, 이래저래 방향도 잡지 못하다 끌려가듯 군대에 가서, 어느 것 하나도 낙이 없이 지내던 시절이었다. 그래서 찾은 게 책이었고, '느낌표' 열풍에 살작 기댄 것이었다. 시에 관심을 꽤나 가지고 있던 터라, 신경림이 찾아간 옛 시인의 자취들, 신경림이 풀어내는 그 시인들의 노래들을 읽으며 참 행복했다. 군대라는 살벌한 공간에서 길 떠나는 노(老)시인을 따라 옛 시인들의 흔적을 찾아가는 것은 내게 참으로 행복한 낭만을 주었다. 그것을 통해 더욱 신경림 시인에게 끌리게 됐고, 신경림 시인의 시들까지도 찾아 읽게 되었다. 그의 유명세만큼은 익히 알고 있었지만, 그의 시를 여러편 탐독한 것은 아니었기에, 그의 시를 접하면서는 더욱 이 시인이 좋아졌다. 어쩜 이런 시를 써낼까, 감탄하면서. 가령 이런 시들 말이다.

   
 

다들 잠이 든 한밤중이면
몸 비틀어 바위에서 빠져나와
차디찬 강물에
손을 담가보기도 하고
뻘겋게 머리가 까뭉개져 앓는 소리를 내는 앞산을 보며
천년 긴 세월을 되씹기도 한다.

빼앗기지 않으려고 논틀밭틀에
깊드리에 흘린 이들의 피는 아직 선명한데,
성큼성큼 주천 장터로 들어서서 보면
짓눌리고 밟히는 삶 속에서도
사람들은 숨가쁘게 사랑을 하고
들뜬 기쁨에 소리 지르고
뒤엉켜 깊은 잠에 빠져 있다.

참으려도 절로 웃음이 나와
애들처럼 병신걸음 곰배팔이 걸음으로 돌아보는 새벽
별들은 점잖지 못하다
하늘에 들어가 숨고
숨 헐떡이며 바위에 서둘러 들어가 끼어앉은 내 얼굴에서는
장난스러운 웃음이 사라지지 않고 있다.

―「주천강 가의 마애불―주천에서」전문(『달 넘세』, 창작과비평사, 1985.)

 
   

신경림이 옛 시인들을 찾아 이러저리 떠돌았던 데에는 지나온 이력이 있다. 그는 시인만을 찾아 떠돈 것이 아니었다. 그가 고백하듯이 그는 장돌뱅이를 한 적도 있었다. 그러면서 이리저리 장이 서는 곳들을 찾아 떠돌았을 것이다. 그렇게 그가 떠돌면서 보았던 애틋하게 삶에 충실했던 농민들, 서민들, 민중들의 모습을 이렇게 시로 그려냈다. 주천강 가를 지나다 본 마애불에서 그는 '장난스러운 웃음'을 보았다. 그것은 그의 웃음이기도 하다. "짓눌리고 밟히는 삶 속에서도" 사람들은 그 질긴 삶을 "숨가쁘게 사랑을 하고" 때론 "들뜬 기쁨에 소리 지르"며 살아간다. 그 모습들에서 시인은 삶의 소중함과 행복을 보았던 것이 아닐까? 그는 "이웃들의 정서나 설움, 얘기 같은 것을 외면하지 않겠다"고 했고, "시는 사람이 사람답게 살기 위한 조건을 만드는 데 일정한 책임을 져야 한다고"(「나는 왜 시를 쓰는가」) 했다. 그 이웃들은 설움 속에서도 그렇게 "사람답게 살"고 있음을 볼 때, 너무나 좋아서 "애들처럼 병신걸음 곰배팔이 걸음으로" 부처님 체면은 아랑곳없이 춤을 춘다. 이 한 편의 시만으로도 나는 신경림을 대단한 시인으로 인정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런 시인이 전집을 엮어 내었을 때, 나는 이 늙은 시인이 시 쓰기를 그만할 작정인가 염려했었더랬다. 그러니 이번 시집이 무척이나 반가울 수밖에. 그런데 그런 반가움을 뒤로 하고, 이번 시집을 읽으면서 나를 온통 흐느끼게 한 것은 노(老)시인을 감싸고 도는 왠지 모를 죽음의 그림자였다. 그래서 이번 시집 한 편 한 편을 흐느끼며 읊었다. 아, 이 시인도 그가 찾았던 옛 시인의 돌아올 수 없는 길을 가려는구나.

   
 

낙타를 타고 가리라, 저승길은
별과 달과 해와
모래밖에 본 일이 없는 낙타를 타고.
세상사 물으면 짐짓, 아무것도 못 본 체
손 저어 대답하면서,
슬픔도 아픔도 까맣게 잊었다는 듯.
누군가 있어 다시 세상에 나가란다면
낙타가 되어 가겠다 대답하리라.
별과 달과 해와
모래만 보고 살다가,
돌아올 때는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사람 하나 등에 업고 오겠노라고.
무슨 재미로 세상을 살았는지도 모르는
가장 가엾은 사람 하나 골라
길동무 되어서.

―「낙타」전문

 
   

시집 『낙타』는 여는 이 시에서 나는 '낙타'를 타고 쓸쓸히 길 떠나는 시인을 본다. 사막을 그 고된 길을 낙타는 뚜벅뚜벅 느리게, 그러나 꾸준히 걸어간다. 등은 굽어 뒤우뚱거리며 걷는 것이 마치 어느 늙은이의 쓸쓸한 뒷모습 같다. 그런 낙타를 타고 "가장 가엾은 사람", 곧 시인이 저 멀리 사막의 길을 간다. 일흔을 넘긴 시인에게 드리운 것은 저 '저승길'의 "별과 달과 해"일 뿐이다. 이번 시집은 이 노시인이 차분하게 그러나 "아무것도 못 본 체" 낙타를 타고 걸어가는 사막길에서의 편지가 아닐까?

그 가는 길에서 시인은 "굵은 주름투성이 늙은이"와 "눈에 웃음을 단 아낙"과 "조그맣게 엎드려 사는 사람들"과 어느 또다른 늙은이가 저 뒤어서 타고오는 '조랑말'(「이역(異域)」)을 본다. 때론 '사랑방에' 앉아 계셨던 '할아버지'도 보고, '건넌방에' '아버지'도 보고, '할머니'를 보고 '어머니'를 본다. "철없는 아이가 되어 딱지를 치고 구슬장난을 하"(「즐거운 나의 집」)던 자신의 옛모습도 본다. 그는 또 '고목을 보'면서는 이렇게 읊는다.

   
 

내 몸의 상처들은
왜 이렇게 흉하고 추하기만 할까
잠시도 한곳에 머물지 못하고 떠돌게 하던
감미로운 눈발이며
밤새 함께 새소리에 젖어 강가를 돌던
애달픈 달빛도 있었고
찬란한 꿈 또한 있었건만
내게도

―「고목을 보며」부분

 
   

그렇게 먼 길을 가면서 시인은 '이역'의 사람들을 보기도 하고, 지나간 옛 추억에 침잠하며, 그리운 사람들을 떠올리기도 하고, 이제는 "흉하고 추하기만" 한 제몸을 돌아보며, 지난 날에 품었던 '찬란한 꿈' 이루지 못했음을 한탄하기도 하면서, 천천히 죽음의 길을 간다. 그가 가는 길은 "무너진 성과 집 사이의 무성한 잡초 속"(「폐도(廢都)」)이기도 하다. 그 사이에는 "먼 세상과 나를 하나로 잇는 강물이, 그리고/가까운 세상과 나를 둘로 가르는 강물이." 흐르고 있기도 하다. '낙타'를 타고 가는 그 길은 '사막'이고, '무너진 성과 집'을 지나며, '무성한 잡초 속'이기도 하고, 그 옆으로는 "세상과 나를 둘로 가르는 강물이"(「나와 세상 사이에는」) 흐른다. 이 모든 것에서 죽음의 이미지를 끌어내는 것은 괴이한 일이 아닐 것이고, 시인에게 죄송스런 말씀도 아닐 것이다. 그가 우리에게 보내는 이 편지들은, 그 길을 가면서, 차분하게 마음을 정리하는, 마지막 편지, 마지막 시편들이 아닐까? 시인의 목소리가 귓가에 맴돈다. "세상은 즐겁고 서러워 살 만하다고"(「귀로(歸路)에」).

이번 시집의 구성을 보면, 시인의 죽음에 대한 정서를 강하게 내포하고 있는 시편들은 1~2부에, 그리고 3부에서는 파괴되고 오염되어가는 현대 사회에 대한 비판의 시편들을, 그리고 4~5부에서는 기행시편들을 모아두고 있다. 사실 그의 시편들은 기본적으로 '기행'으로부터 탄생하지만, 4~5부에 실린 시편들이 보이는 차이는 국내가 아닌 국외를 대상으로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거기에 담고 있는 정서와 메세지는 여는 시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시집 말미에 담긴 산문 「나는 왜 시를 쓰는가」에서 시인은 자신의 시 인생을 겸허히 토해내고 있다. "내 시가 우리 사는 일과 무슨 관계가 있는가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면서" "세상을 위해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시가 시시해지고 문학이 우스워졌"던 시에 대한 회의를 고백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웃들의 정서나 설움, 얘기 같은 것을 외면하지 않겠다는 생각"과 "시는 그 시대의 문제에 대한 질문이요 대답이라는" 시인 나름대로의 시에 대한 정의에 입각하여 "사람이 사람답게 살기 위한 조건을 만드는 데 일정한 부분 책임을" 지는 시를 쓰고자 했단다. 거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시인은 "더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는" 문학성 높은 시를 쓰고자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남이 알지 못하는 것, 남이 보지 못하는 것, 남이 만지지 못하는 것을" 찾아 끊임없이 헤매었다. 그런 그에게 결론은 "그 시대의 삶에 깊이 뿌리 박는 것으로 충분하지 그 이상의 해답은 있을 수 없없고, 오늘의 내 삶, 우리들의 삶에 충실한 시를 쓰자"였다. 그것이 시인의 길이었다고 말한다.

그런 점에서 이번 시집의 3부에 엮인 시들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시적 성취에서는 좀체 신경림 시인의 명성에 부합하지 않지만 말이다. 4부와 5부에 엮은 시편들은 이역 만리를 여행하면서 거기서 보고 느꼈던, "남이 알지 못하"고 "남이 보지 못"했던 것을 시로 풀어냈다. 그러나 거기에서 본 그 타국의 사람들의 모습 속에서도 "한 오십년쯤 전/안성 장터 어느 골목으로 사라지던/떠돌이 젊은 악사와 닮았다 그 어깨가./몇봉지 약을 팔기 위해 저녁 한나절 기타를 켜고는/절뚝거리며 골목으로 들어가던 그 어깨"를 바라본다. 우리네 삶과 그리 다르지 않음을 본 것이다. 어느 세상에서는 사는 모습과 애환과 설움은 비슷한 것이라는 이야기를, 그래서 서로가 서로를 의지하고 "사람답게 살" 만한 세상을 함께 만들어 가야 한다고 말하는 듯하다.

이번 시집에서 보여주는 그의 시편들은 지난 날의 그의 시들과 그리 다르지 않다. 그러나 왠지 모르게 노쇄해 보인다고 해야 할까? 간혹은 시적 성취는 좀 떨어져 보이는 것 같다(특히 3부의 시편들이 그렇다). 그러나 고희를 넘긴 시인이 써낸 시들은 그 나름대로 가치가 있고, 그가 세상에 대고 격없이 퍼붓는 비판들은 그만큼이나 힘이 있고 울림이 있다.(가령, "그 잘나고 힘센 사람들은 다 두고 제일 못나고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만 수만 수십만이 죽고 다치고 부서져야 했는가?"(「아, 막달라 마리아조차!」)라는 절규가 그렇다. 상투적이라고 누가 감히 말하겠는가? 노시인의 애틋한 절규에 대고.)

노시인 신경림의 마지막 시집이 될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가득한 이번 시집 『낙타』는 그래서 끝까지 안타까움으로 읽혔다. 마지막이 아니길 바란다. 그러나 한편으론, 이제 서서히, 우리도 이 노시인의 기나긴 시적 여정을 기릴 준비를 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 노시인이 무거운 걸음을 애써 옮겨가며 우리에게 전해 주었던 아름다고 낭만 넘치는 옛시인의 자취와 노래들에 감격했듯이, 우리도 이 노시인이 낙타를 타고 사라진 이후를 준비해야 하지 않을까? 끝내 자취도 없이 사라지고 나서는 찾을 수 없는 노시인의 아름다운 모습들을, 아직 우리 곁에 남아있는 이 행복한 순간에 많이 많이 남겨두어야 하지 않을까? 이제는 우리가, 이 노시인을 찾아갈 때다. 얼른, 출발하자. 시인을 찾아서, 신경림을 찾아서 말이다.

   
 

그러나 이번 시집 『낙타』의 시들을 쓰는 동안 나를 사로잡았던 가장 중요한 생각은 시 작업이야말로 세계화, 디지털 시대에 가장 적합하지 않은 일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모든 것이 빨리 변하고 쾌속으로 질주하는 속에서 시는 어쩔 수 없이 느린 걸음으로 걸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어쩌면 시는 언젠가는 버려질 방언 같은 것일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빠른 흐름 속에서, 또 세계의 말이 온통 하나로 통일되어가는 세계화 속에서 느린 걸음, 방언은 비단 무의미한 것은 아닐 터이다. 그 느림과 방언에서 오늘의 우리 삶이 안고 있는 갈등과 고통을 덜어줄 빛을 찾을 수도 있고, 병과 죽음을 몰아낼 생명수를 찾을 수도 있는 것이다. 나는 근래 두리번거리면서 느릿느릿 걸어 간다는 생각으로 시를 쓴다, 많은 사람들이 알아듣지 못하는 방언을 중얼거리면서.

―「나는 왜 시를 쓰는가」에서

 
   

아! 내 더 큰 바람은 이 노시인이, 이 큰 시인이, 빠르게 흐르는 세월 속에서도, 꿋꿋하게 버티었으면, "두리번거리면서 느릿느릿 걸어" 갔으면, "많은 사람들이 알아듣지 못"하더라도, 계속해서 이 아름다운 그의 "방언을 중얼거"려 주었으면, 그랬으면 좋으련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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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왕국의 게릴라들 - 삼성은 무엇으로 한국 사회를 지배하는가
프레시안 엮음, 손문상 그림 / 프레시안북 / 200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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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들 '뉴하트'의 디질랜드 속에서 헤맬 때, 나는 KBS에서 방영한 '쾌도(快刀) 홍길동'을 봤다. 지성과 김민정의 '뉴하트'가 세간의 주목을 받을 때, 드라마에 곧잘 폐인되는 나도 무척이나 궁금했어지만, 나는 그래도 홍길동과 허이녹(유이녹)을 택했다. 왠지 모르게 나는 이 드라마에 끌렸다. 사극은 드라마에 고정 시청자층을 확보하고 있는 장르다. 현재 각 방송사에서 방영하고 있는 드라마 중에서도 사극이 차지하는 비율이 꽤나 높은 것은 그 이유에서다. 간혹 사극 열풍을 등에 업고 퓨전 사극을 표방하는 드라마들이 곧잘 있었지만, 정통 사극에 비해 그다지 주목을 받지 못했다. 이번 '쾌도 홍길동'도 마찬가지였다. KBS에서는 전에도 '쾌걸 춘향'이라는 퓨전 사극을 방영한 적이 있었는데, 그것도 거의 재미를 못봤다.(지금 생각해 보는 '쾌걸 춘향'은 사극이라고 보긴 힘들겠다.)

이전까지의 퓨전 사극이 이처럼 재미를 못 본 것은, 그것이 '퓨전'으로서의 재역할을 못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정통 사극은 다소간의 첨가와 상상이 가미되긴 했겠지만, 그것의 역할은 역사적 사실을 기반으로 그것을 흥미롭게 전달하면 그만이다. 그러나 퓨전 사극은 이와 다르다. 우선 '퓨전'을 표방했다는 것은 고전과 현대를 절묘하게 조합하겠다는 의도를 내포한다. 그런 가운데 상상력을 충분히 발휘하며 현대적 의미를 강하게 담아내야만 그것이 흥행을 떠나서 성공했다라고 말할 수 있는 근거를 가지게 된다. 그간 퓨전 사극이 대체로 '실패'했다고 말할 때에는, 이러한 '퓨전'이 가지는 의미들을 제대로 담아내지 못했다는 뜻이 크다.

내가 볼 때 이번 '쾌도 홍길동'은 그런 식의 실패는 전혀 아니다. 오히려 나는 이 퓨전 사극이 제대로 '성공'했다고 당당히 말해야겠다. 비록 그것이 '뉴하트'라는 강적을 만나서 대중의 관심을 강하게 끌지는 못했지만, '쾌도 홍길동'은 그것이 표방한 '퓨전 사극'으로서 그 역할을 최대로 발휘했고, 다양한 재미와 함께 당대 사회를 신랄하게 비판하고, 의미심장한 메세지를 전달하고 있다. 지금까지 보였던 모든 사극(정통과 퓨전을 통털어) 중에 가장 성공적이고 재미와 의미를 동시에 담아낸 최고의 사극을 꼽으라면, 약간의 주저와 함께 이 '쾌도 홍길동'을 꼽을 수 있을 것 같다.

'쾌도 홍길동'은 고전소설 '홍길동전'을 각색한 퓨전 사극이다. '홍길동전'은 누구나 다 아는 고전소설로, 완전한 영웅소설이다. 비범한 재질을 가지고 태어난 홍길동이지만, 서자라는 출생의 한계에 의해 고난에 부딪히고, 그는 세상에 대한 변혁을 꿈꾸며 세상과 싸우다, 결국 율도국이라는 이상의 나라로 간다는 그런 이야기다. 그런데 이 퓨전 드라마는 대략적 구도는 고전 '홍길동전'과 비슷하지만, 그 전개과정은 지극히 현실적이고, 사회비판 의식도 당대적 의미를 무척이나 반영했다.

우선, 홍길동은 서자로 태어난 것, 재능이 출중한 비범한 인물로 태어난 것 등은 비슷하지만, 그가 커나가는 과정에서 영웅의 기상을 찾아볼 수 없었다는 설정이 다르다. 그는 자신의 태생적 한계를 인정하고 시정잡배로 살아간다. 그러던 중, 그는 자기와 같은 소외된 사람, 태생적으로 한계지어진 사람을 보고 그로부터 세상의 모순과 억압을 보게된다. 그러나 그는 그런 세상에 자신이 그들의 대신해서 맞서 싸울 의지를 갖지는 못하다가, 차츰차츰 변화되고, 자각한다. 세상과 맞서 싸워서 변화시켜야 한다고 말이다.

홍길동과 그의 일당들(이 드라마 속에서 활빈당은 홍길동과 그 일당들이 의도한 명명은 아니었다. 어쩌다 사람들이 지어준 것에 불과했다.)은 더이상 주저하지 않고 세상과 강하게 맞서 싸우고, 자신들이 선택한 왕을 세우기에 이른다. 그러나 그 왕의 세상과 그들이 꿈꾸는 세상은 애초에 다른 것이었고, 그들이 선택하여 세운 왕의 세상에서 그들은 자신들의 세상을 꿈꾸는 것조차 불가능한 것이 되고 만다. 그 둘의 대결은 불가피한 것이 된다. 결국 홍길동과 그 일당들은 고전과는 달리 다분히 현실적으로 강한 왕의 군대에 의해 죽어갔고, 그들이 꿈꾸는 세상은 그렇게 꿈으로만 남게 된 것이다.(이 드라마 속에서 홍길동이란 인물의 현실성은 고전과는 달리 굉장히 부각된다. 그만큼 그는 영웅의 면모는 절대 아니다. 이 드라마 속에서 말하고자 하는 영웅의 모습은, 일개의 시정잡배일지언정, 세상의 모순과 억압, 그로부터 소외된 자신과 민중을 보고, 격분하여 세상을 바꾸고 변화시키고자 미약하게나마 맞서 싸울 때, 민중들이 그에게 부여한 명예가 되는 것, 그것이 진짜 영웅이라는 것이다.)

이 드라마의 마지막 장면에서, 홍길동과 그 일당들의 결말은, 확실히 보여주는 것은 아니지만, 결국 죽음으로 끝났다는 것을 강하게 암시한다. 그러나 살아남은 노승과 곰이를 통해, 그리고 홍길동을 기억하는 많은 민중들의 가슴속에 홍길동은 영원히 살아있고, 여전히 세상을 변혁을 꿈꾸는 것이라고 말한다. 노승은 이렇게 말한다. "어느 세상에나 홍길동은 있다"고. 바로 이것이 이 퓨전 사극 '쾌도 홍길동'이 이 불합리한 사회에 전하는 메세지다.(참고로, 여주인공 이녹이란 인물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내가 볼 때 허이녹(유이녹)으로 분한 성유리가, 지금까지 그가 맡은 모든 역할 중에 가장 연기를 (성공적으로) 잘 한 것이 이 드라마다. 이녹 또한 많은 아픔을 가지고 태어나지만, 항상 밝고 착한 마음으로, 순수하게 살아가는 인물이고, 도저히 악할 수 없는 인물로 그려진다. 그러나 그녀가 끝내 홍길동과 함께 한다는 것은, 그렇게 순수하고 선한 민중들이 그 순수과 선함 그대로를 간직하고 착하게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은 홍길동이 꿈꾸는 그런 세상이란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드라마 얘기를 너무 오래 장황하게 했지만, 그것은 이 '쾌도 홍길동'은 너무나 재미있었고, 감동적이었으며, 꿈과 희망의 메세지를 담은, 그러면서도 지금의 현실을 우습게 풍자하기도 하고, 비판적 칼날을 날리기도 한, 정말 성공적이 드라마였기 때문이다. 이 드라마에 이제 종영했지만, 이 드라마의 마지막 메세지, 즉 "어느 세상(시대)에나 홍길동은 있다"는 메세지와 최근에 읽은 『삼성왕국의 게릴라들』이 강하게 겹쳐졌기 때문이다.

노승은 말한다. "어느 세상에나 홍길동은 있다"고. 세상을 노려보고, 그 불합리에 격분하며, 그러한 세상의 변화를 꿈꾸는, 그런 홍길동은 언제, 어디서나, 그 누구에게나 존재한다고. 그래서 세상은 조금씩 변화하고, 차츰 살만한 세상으로 변해가게 된다고. 그것이 느리고 더딜 것이지만. 그런데, 그런 노승의 말이 다만 허황된 이상에 지나지 않을까 우려할 필요는 없다. 그 증거, 곧 이 시대에 살아있는 홍길동들이 여럿 있음을 이 책 『삼성왕국의 게릴라들』은 증명하고 있다. 삼성 비자금을 양심고백한 김용철 변호사, 김용철 변호사를 신앙으로 받아들이고 세상에 선전포고한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삼성 족발 체제를 파헤집고 있는 김상조 교수, "나를 고소하라"며 삼성과 정권의 유착관계와 X파일 물고 늘어지는 노회찬 국회의원, 삼성과 돌이킬 수 없는 전쟁을 벌이고 있는 '심상성'이라 불리는 심상정 국회의원, 기자정신에 투철하여 모든 두려움을 누리고 공익과 민중을 위해 당당히 삼성 X파일을 취재 방송한 이상호 기자, 삼성의 무노조 신화의 폭력에 맞서 민주노조 건설을 위해 투신한 김성환 위원장 등이 그들이다.

이 책 『삼성왕국의 게릴라들』이 증거하는 이들은 대한민국, 곧 삼성 이건희 회장의 왕국에서 그 거대 왕과 맞서서 진정한 대한민국, 곧 이 나라 민중들이 주인되는 세상 건설을 위해 투신한 게릴라들이다. 아니 세상의 변화를 꿈꾸고, 세상의 악을 노려보고, 고발하며, 투철하고 혈혈단신 싸우는 이 시대의 홍길동들이다. 그래서 퓨전 사극 '쾌도 홍길동'을 보면서, 그리고 그 드라마가 세상에 전한 희망의 메세지를 보면서, 나는 이들을 떠올리고, 이들이 이 시대의 홍길동들이며, 그래서 여전히 희망이 있다고 생각하게 된다.

이들은 드라마 속의 홍길동처럼, 자신이 왜 세상과 맞서야 하고, 싸워야 하는지, 그들은 알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차츰차츰 자신과 민중들이 고통당하고 착취당하며, 세상이 점점 사람이 사람답게 살지 못하는 세상이 되어가는 것을 보면서, 그것이 부당하고 불합리한 불한당들의 억압과 폭력 때문이라는 것을 알게되었고, 그것과 당당히 맞서 싸워야 한다고 생각하게 된 것은 아닐까? 이들은 태어나길 영웅으로, 투사로 태어난 것은 전혀 아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제 우리의 영웅들이다. 삼성과 맞서는 것은 그들 스스로도 말하듯이 두려움 그 자체다. 드라마 속의 홍길동도 그런 두려움에 갈등했다. 그러나 끝내 홍길동은 꿈꾸었다. 그 꿈은 이제 다시금 이 게릴라들, 아니 이 시대의 홍길동의 후예들, 분실들에 의해 다시 꾸어지고 있다. 그리고 그들은 이 땅의 소외된 자, 핍박받는 자, 착취당하는 자, 불합리에 굴복하여 울고 있는 자, 아니 우리 모든 민중들에게 우리도 이제 '홍길동'이 될 것을 말하고 있다.

지금 이들이 싸우고 있는 것은, 그들이 맞서 싸워 이루어 낼, 그들이 꿈꾸는 세상은 이녹이와 같은 우리 무지하지만 순수한, 살아가는 그것 자체가 선한, 그런 사람들이 사람답게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이다. 그런 세상으로 가는 데에, 삼성이 자꾸 걸린다. 그래서 그들은 삼성과 싸우고 있다. 이것이 희망 아닌가? 드라마 속의 홍길동처럼 다만 꿈으로만 기억되고 사라져갈지라도, 세상은 그 사라져가 만큼 변화할 것이다. 그러나 이 드라마 속에서 모든 민중들이 홍길동이었다면, 세상은 당장에 변화했을 것이고, 홍길동의 꿈은 현실이 되지 않았을까? 그럴 것이라고 믿는다. 그러니까 이 시대 홍길동이라 불릴 명단에 김용철, 사제단, 김상조, 노회찬, 심상정, 이상호, 김성환 다음으로 우리들의 이름을 하나씩 적어볼 생각은 없으신지? 내 이름도 저 어디 말단에 적힐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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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불온서적을 읽자!' 서평이벤트2 &lt;삼성왕국 &amp; 비정규직&gt;
    from 진보생활문예 『삶이 보이는 창』 2008-08-27 15:42 
    의 서평이벤트 2 '불온서적을 읽자!' 서평이벤트2 이번에는 '불온서적을 읽자!' 서평 이벤트 2편이 찾아왔습니다. 지난 이벤트에서는 신청이 많이 저조했습니다. 조금 급하게 진행되면서 홍보가 원활하게 이루어지지 않은 탓도 있었고, 서평도서 3권 중에 [말해요 찬드라]를 제외한 [공장은 노동자의 것이다]와 [물류를 멈춰 세상을 바꾸자!]는 조금 무거운 주제의 책이며, 발간된지 시간이 좀 지나서 시의성을 많이..
 
 
가시장미 2008-03-27 09: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드라마평과 서평을 한꺼번에 감상하게 되었군요. ^^ 이 시대에 홍길동이 정녕 있단말입니까~ 제가 그들을 잘 몰라서 인지도 모르겠지만, 있다면 빨리 나타나줬으면 좋겠네요.
'명박씨가 사실은 저는 명박이가 아니에요~~' 라고 말하기 전에요. ㅋㅋ

2008-03-27 12:12   URL
비밀 댓글입니다.
 
신은 위대하지 않다 (양장)
크리스토퍼 히친스 지음, 김승욱 옮김 / 알마 / 2008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만약 하느님이 모든 것을 창조하셨다면, 왜 우리는 하느님의 자연스러운 능력을 이렇게 끊임없이 '찬양'해야 하는가? 다른 건 몰라도 이건 정말 노예처럼 비굴한 행동 같았다. 만약 예수가 우연히 만난 맹인을 치료해줄 수 있다면, 아예 시력을 잃는 사람이 없게 만들 수는 없는 건가? 예수가 악마를 쫓아낸 것이 뭐 그리 대단한가? 악마가 사람 대신 돼지 몸속으로 들어가게 했을 뿐인데. 이건 좀 사악한 짓 같았다. 흑마법처럼. 사람들이 이렇게 끊임없이 기도를 드리고 있는데 왜 아무런 효과가 없는가? 왜 내가 다른 사람들 앞에서 한심한 죄인이라고 계속 말해야 하나? 섹스에 관한 이야기를 그토록 유해하게 생각하는 이유가 무엇인가?(14~15쪽)  
   

히친스가 "어렸을 때 머뭇거리며 제기했던 이 의문들"과 비슷한 것들이 내게도 있었다. '내게도 있다'고 말하는 것이 더 정확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문제는 히친스에게나 혹은 "세상에 지극히 흔하게 퍼져 있"는 이런 의문들을 품은 이들에게 "어떤 종교도 여기에 만족스러운 대답을 내놓"고 있지 못한다는 데에 있다. 사실 나는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의 그 모든 능력이 사실 그대로라면 히친스와는 달리 "끊임없이 찬양"할 마음이 충분하다. 그러나 창세기 1장 1절의 그 구절,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했다는 그 말부터 나는 믿을 수가 없었다. 전지전능한 하나님, 지고지선의 하나님이 사탄도 만들고 그와 함께 '재미난' 내기도 한다는 그 이야기를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최초의 인간 아담과 하와는 가인과 아벨, 그리고 또 누가 있었던가? 그렇다면 인류가 이만큼 번성한 것은 가인이 자웅동체였거나 아담과 하와의 숨겨둔 딸과 근친상간을 했거나 둘 중 하나일 것이 분명하지 않은가? 이외에도 나는 히친스만큼, 아니 그 이상의 의문들로 가득했다.

'사랑의 하나님'이 그렇게도 많은 인간들을 끊임없이 죽이고, 벌하고, 씨를 말렸다는 것을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 하나님이 선악 관념이 분명해서 그렇다지만, 우리에게 말하는 사랑은 아가페가 아닌가? 아가페적 사랑은 예수의 새로운 창조물인가? 예수 이전의 하나님은 그런 사랑을 할 줄 몰랐나? 그건 이상한 하나님이다. 때론 TV드라마 속의 연인들처럼 사랑에 배신당하고 처절한 복수를 하는 것을 볼 때, 하나님을 배신한 인간들이 참혹하게 죽어갔던 이야기를 떠올리면서, '질투하는 하나님'은 어딘가 모자란 신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주말 연속극에 '하나님'이 언제쯤 나올지 궁금해 하면서.

세상에 존재한다고 알려진 신들 중에 가장 많은 인간들을 죽인 신은 단연 기독교의 하나님일 거라는 말을 하면 불경한 것인지 모르겠다. 그러나 성경을 보면 그것이 성스러운 경전이라고 할 수 없을 만큼,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죽어간 인간들이 무수하게 나온다. 그래서일까? 나는 이 성경(특히 구약)을 읽으면서 종종『삼국지』를 떠올린다. 어디에서 더 많은 인간들이 죽었을까를 헤아려보는 것은 짓궂은 일인지도 모르겠다. 솔직히 말해서 나는 구약을 읽으면서는 『삼국지』만큼의 드라마틱하고 스펙터클한 재미를 느낀다. 아니 그 이상으로. 간혹 어떤 구절들에서 성스러운 가르침을 얻기도 하지만 말이다.

   
  여기서 우리는 <창세기>를 가득 채운 인간들의 거대한 오류를 다시 볼 수 있다. <창세기>를 쓴 것이 신이 아니라 무지한 인간이라는 사실을 어떻게 한 문단으로 증명할 수 있을까? 인간이 모든 짐승과 새와 물고기를 '지배할 권리'를 얻었다는 점이 바로 그 중거이다. 성경에 예를 들어 공룡들의 이름이 구체적으로 명시되지 않은 것은, 저자들이 공룡의 존재를 몰랐기 때문이다. 성경에 유대류가 언급되지 않은 것도 오스트레일리아(중앙아메리카의 뒤를 이어 '에덴동산'의 새로운 후보자)가 지도상에 나와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창세기>에서 인간이 세균과 박테리아를 지배할 권리를 얻지 못했다는 점이다. 저자들이 꼭 필요하지만 위험하기도 한 이 생물들의 존재를 몰랐으니까. 만약 이 생물들의 존재가 알려졌다면, 그들이 우리를 '지배'한다는 사실이 금방 분명해졌을 것이며, 사제들이 옆으로 밀려나고 의학 연구가 마침내 기회를 얻을 때까지 누구의 도전도 받지 않은 채 그 지배권을 마음껏 즐겼을 것이다.(137~38쪽)  
   

히친스의 재치있는 이런 반증말고도, 나는 성경(특히 구약)이『삼국지』보다 더 재밌을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어느 정도 이상의 인간의 가필이 성서에 있을 거라고 믿는다. 하여간에 나는 어떻게든 노력했지만, 성경의 모든 것을, 어쩌면 기독교 성립의 전제를 믿지 않으면서, 기독교를 믿었다. 그래서 아직까지 날나리 신자에 그치는 것인가 보다.

그러나 구약을 넘어서 신약에 이르러 예수 탄생 이후의 시나리오는 거반 마음에 들었다. 동정녀의 몸에서 예수가 탄생했다는 설화는 그 수준에서 '아름다운' 이야기로 받아들인다. 물을 포도주로 변하게 했다는 기적은 또 얼마나 유쾌한 일인가? 신약 속에 가득한 예수란 인물의 이야기들은 많은 부분 감동으로 넘친다. 그리고 그가 한 말들은 그다지 걸러낼 것들이 많지 않은 좋은 얘기들로 가득하지 않은가? 나는 그래서 예수가 좋았고, 여전히 기독교 신자를 자처하고 있는 것이다. 십자가에 달려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죽음을 당한 예수란 인물, 아니 신성을 가진 예수를 그대로 믿는 것은 어느 누구에게나 선택의 문제일지 모르지만, 그의 설법들은 오늘날에도 가히 혁명적인 말들로 가득하다. 나는 어쩌면 그 혁명가적 예수를 꿈꾸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나는 지금 이 기독교가, 그리고 세상의 종교가 욕먹는 이유는, 적어도 히친스가 유쾌하게 씹어대는 세상 종교의 죄악들은 성경속의 하나님도 예수도, 그리고 알라신도 아무런 책임을 질 이유가 없다고 생각한다. 그것을 인간이 썼건 신의 영감으로 지어졌건 간에, 그것을 '어리석게'도, 아니면 교묘하게도 제멋대로 이용한 것은 인간들이기 때문이다.

도킨스와 마찬가지로 히친스는 이 책에서 신은 단지 인간의 '형상'대로 인간적 감성으로, 인간의 필요성에 의해서 창조된 것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그런 히친스에 대해 그게 아니고, 성경에 이렇게 저렇게 써 있으니, 이것은 거룩하시고 전지하시며 전능하신 하나님이 쓰셨다고 반박하는 것은 현재로선 어리석어 보인다. 그러나 그것이 누구에 의해 창조되었건 간에, 우리는 그에 구애받을 이유가 하등 없는 것도 사실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흔히 기억하는 신화나 전설이 구태에 그 창작자가 누구인가를 두고 갑론을박하지 않듯이, 성경 또한 그러한 수준에서 생각할 수 있기에 충분하다.

문제는, 그것을 어떻게 이용하고 활용하는가이다. 그러니까 성경무오류설에 입각하여 사탄, 마귀새끼를 철저히 응징하고 뿌리뽑겠다는 십자군적 망상에 사로잡힌 종교 근본주의가 문제인 것이다. 종교를 어떻게 활용하느냐가 중요하지 그것이 진짜냐 가짜냐를 논하는 것은 쓸데없는 또다른 근본주의가 아닌지도 모르겠다. 오늘도 어디쯤에서 밥퍼주는 목사님이나,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라던 성철 스님은 걸리적 거릴 것이 거의 없지 않은가?

   
  이슬람의 기원은 이슬람이 표절한 다른 종교들과 마찬가지로 수상쩍다. 이슬람은 스스로를 엄청나게 부풀리며, 추종자들에게 납작 엎드리는 복종이나 '굴복'을 요구하고, 신도가 아닌 사람들에게는 존중을 요구한다. 이슬람의 가르침에는 이처럼 오만하고 뻔뻔스러운 행동을 정당화해주는 것이 전혀, 눈곱만큼도 없다.(195쪽)  
   

히친스의 이 말처럼, 성경을 들먹이고 코란을 들먹이며 종교를 지배수단으로 제멋대로 이용하고 사리사욕을 채우며, 인간을 무참히 짓밟으려고 하는 것이 결국 문제인 것이다. "역사적으로 종교는 지상의 독재체제와 내세의 절대적인 통제에 무릎을 꿇었을 뿐만 아니라 그런 사상을 널리 퍼뜨렸다." 그렇게 지배체제에 종속되고 인간을 억압하고 강제하는 것으로 쓰인 종교는 원초적으로 사라져야 할 것이다. 이 외에도 히친스가 말하는 종교의 악행 혹은 잘못된 쓰임은 수두룩하게 많다. '좋게 말해서' 종교가 인간에게 위안을 주고 안식처를 마련해 준다는 것을 십분 인정한다 하더라도, 종교란 이름으로 수많은 생명들을 죽이고, 잘못된 편견과 혐오를 조장하며, 심지어 "종교가 건강에 해로울 수"도 있다고 말한다. 또한 종교는 내세에 대한 허황된 기대와 염려를 팔아서 장사를 하고, 파렴치하고 반인류적인 지배체제와 타협하고 복종해 왔다. 히틀러의 친구는 저 로마 카톨릭의 교황이었다. 그 뿐인가? 종교를 아동 학대를 서슴지 않았다. 구약에도 아비의 헛된 약속으로 딸은 번제가 되었고, 이삭은 죽다가 살아났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인 인간들이 제멋대로 신을 악용한 것의 결과일 따름이다. 그들은 신성한 성경이니, 코란이니 하는 것들을 들이대지만, 그것이 있는 그대로 사실이고 절대적이라고 신도들에게 강요하지만, 그들 중 누구도 바다는 커녕, 집 앞에 흐르는 졸졸 시냇물 한 번 갈라보지 못했을 뿐더러, 어떤 불구덩이에도 들어가 본 적이 없지 않은가? 우리는 주몽이 위기에 처해 도망가다가, 강물에 막혀 더는 도망가지 못하고 있을 때 거북이 들이 나와서 다리를 마련해 주었다는 신화를 기억하고, 견우와 직녀를 만나게 해준 까치와 까마귀를 기억한다. 그러나 어디까지 그럴 듯한 이야기로 여길 뿐이다. 그렇다. 우리도 성경을 그렇게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지 않을까? 성경을 사실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은 만약 신이 있다면, 신이 하늘에서 웃을 일이다. 아니면, 나는 억울하다고 하소연할 일이거나.

내가 볼 때, 하나님은 억울하다. 예수님도 억울한 측면이 있다. 알라신도 그렇고, 부처도 어차피 피해神이다. 세상 모든 신(神)들이 히친스에 의해 이 무한한 죄의 굴레를 띄집어 쓰게 만든 것은 단지 인간일 뿐이다. 신이 있든 없든 그것은 아무 상관이 없다. 또한 인간이 신을 있다고 믿든, 없다고 치부하든 마찬가지다. 몹쓸 인간들이 있을지도 모르고 없을지도 모를 신을 몹쓰게 이용하고 애용한 것이 죄다. 그리하여 신(神)은 무죄하다. 나는 그 무죄한 신을 선별적으로 믿는다. 아니 믿고 싶다. 예수의 사랑을, 하나님의 그 어리석음까지도.

이 책을 읽으면서 내내 도올 김용옥이 떠올랐다. 그 특유의 삡싸리 나는 굉음이 섞인 '이~게, 이게'하면서 내뱉은 우습기까지한 신랄한 욕설과 독설이. 히친스의 이 시니컬한 종교비판은 도친스를 읽을 때 느꼈던 것과 비슷했다. 다만 도킨스를 읽으면서 느꼈다 묵중함 보다는 히친스를 읽으면서 보다 유머러스하게 시니컬한, 그래서 도킨스의 것보다 더 재밌게 읽혔다. 아무튼 이 책은 히친스의 역작이고, 대체로 수긍할 수 밖에 없는 종교인으로서는 뼈저린, 그러면서도 굉장히 기분 나쁜 책임에 분명하다. 이 책을 읽는 내내 히친스가 김용옥의 얼굴을 하고 그 기분나쁜 얼굴로 독설을 퍼붓는 듯 했다. 그러나 나는 너무나 흥미롭게 이 책을 읽었다. 미안한 말일지도 모르지만, 재밌게 말이다. 히친스가 말한 대부분을 수긍하면서, 내 연약한 마음은 인간을 미워하되 신은 미워하지 말기를 당부한다. 신은 무죄하다. "우리가 담론에서 종교적인 색채를 모조리 없애버린다는 단 한 가지 조건만 충족시킨다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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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져 가는 목소리들 - 그 많던 언어들은 모두 어디로 갔을까?
다니엘 네틀·수잔 로메인 지음, 김정화 옮김 / 이제이북스 / 2003년 11월
평점 :
절판


  작가 박완서가 “그 많던 싱아들은 다 어디로 갔”는 지를 끈질기게 묻고 있을 때, 사라져 버린 것은 비단 ‘싱아’뿐이 아니었다. 정말로 ‘그 많던’ 싱아들이 결국 다 사라져 버리고 나면 ‘싱아’라는 말도 사라질 것이지만, 아직까지는, 적어도 박완서의 소설 제목으로서는 ‘싱아’라는 말은 박제(剝製)처럼 살아있을(?) 것이다. 그러나 ‘싱아’가 사라지기 전부터 계속 사라져 왔고 사라져 가는 ‘그 많던’ 것이 있었으니 그것은 다름 아닌 우리의 언어들이다.

  다니엘 네틀과 수잔 로메인은 『사라져 가는 목소리들』에서 “그 많던 언어들은 모두 어디로 갔”는 지를 추적한다.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언어들이 사라져 왔는지, 어떻게 사라져 왔고, 또 사라져 가고 있는지를 탐구하고 있다. 결국에는 앞으로도 더 많은 언어들이, 현재 지구상에서 사용되고 있는 것으로 추정되는 약 6천여 종의 언어 중에 대부분이 사라질 것이라고 예측한다. 그럼으로써 저자들은 이 사라져 가는 언어들을 그대로 지켜보고만 있을 것이 아니라, 어떻게든 대책을 마련해서 그 언어들을 보존하고 유지시켜야 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언어가 소멸한다거나, 잔인하게도 사멸(死滅)되어진다고 하는 것에 우려를 표명(表明)하고 있는 것은 이들이 처음은 아니다. 그간 언어학계와 사회 일각에서 종종 언급되어 왔다. 그렇기 때문에 저자들의 이런 우려의 표명이 새삼스러운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들이 추적하는 언어의 사멸과, 그에 대한 우려가 가일층 강도 높게 읽히는 이유는, 이러한 언어의 사멸이 단지 ‘언어’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인식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저자들은 현재 각계에서 동의하고 있는 생태계 파괴와 오염의 문제가 이 언어의 사멸의 추세와 함께 동반하고 있음을 다양한 자료를 바탕으로 이끌어내면서, 언어의 사멸이 생태계 전반의 문제를 대표하는 척도(尺度)임을 강조한다.

  이러한 인식은, 아직 학계에서도 생소한 ‘생태 언어학’이란 학문 범주(範疇)를 이룬다. 어떻게 언어와 생태, 즉 자연이 관계되는가에 대해 의문을 가질 수 있겠지만, 저자들의 말에 귀를 기울여 본다면 어렵지 않게 수긍할 수 있을 것이다. 저자들이 볼 때 “언어들의 멸종은 전 세계적인 생태계 붕괴 현상의 일부”인데, 이는 “인간들의 언어들 속에” 이 생태계 전반과 긴밀하게 관계되는 “자연 환경에 대한 상세한 지식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생태계의 파괴는 곧 다양성의 상실로 이어지고, 이것은 생태계 전반의 존립을 위협하는 엄청난 재앙과도 같은 것이다. 이것은 언어에서도 마찬가지로 언어 다양성의 상실은 “우리 모두에게 손실을 안겨 주는 것이다.”

  언어가 생태계의 일부인지, 아니면 언어는 곧 생태계의 전부인지를 따지는 것은 또 다른 측면에서 유의미하겠지만, 어쨌든 언어와 생태계의 연관은, 그 소멸 현장이 공통되는 것만큼, 아니 그 이상으로 관련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저자들이 우려하는 것은 몇 가지 점에서 언어에 대한 우리 사회 일반의 인식에 의한 것이다. 언어가 단순히 의사소통의 매개 역할 뿐만 아니라, 인류의 생각과 정신, 그리고 사회 문화를 폭넓게 담고 있는 유산이기에, 그러한 언어의 사멸은 소중한 인류 문화유산의 소멸이며, 복원 불가능한 상실이라고 주장한다. 또한 언어가 각 사회의 정신적, 문화적 소산이며, 그 사회의 사고와 인식을 주관하는 매개로서, 각 사회 개개인의 정체성을 나타내는 지표라고 할 때, 언어의 상실은 곧 그 정체성의 상실임을 저자들은 강조한다. 결국 언어는 우리의 소중한 문화유산으로서, 우리의 정체성을 대변하고 있음으로서, 그 가치와 보존의 정당성을 여실히 함유하고 있는 것이다.

  저자들이 추적하기에 최근 200년간의 언어의 변화, 그 중에서도 소멸의 양상은 인류 기원의 시작과 그 맥을 대동소이(大同小異)하게 같이한 오랜 언어의 역사적 양상과 대비할 때 매우 특이한 면모를 보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영어, 프랑스어, 중국어 등 몇몇 세계 언어들이 확산됨에 따라 많은 소규모 언어들이 사멸하고 있다. 오늘날의 지구촌에서는 세계 인구 중 약 90퍼센트가 백 개 정도밖에 되지 않는 언어들을 사용하고 있다. 인간 사회가 이렇게 급진적으로 재편됨에 따라 영어와 몇몇 세계 언어들이 지배적인 지위를 가지게 되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러한 재편이 “적자생존”의 사례를 보여 주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할 것이다. 이런 상황은 결코 모든 사람들이 동등한 조건 아래서 자유로운 선택과 경쟁이 이루어진 이상적인 시장경제 체제의 결과가 아니라는 점을 주장할 것이다. 지배적인 언어의 등장은 사회적 변화가 불균등하게 일어남에 따라, 선진국들과 개발도상국들 간에 현저한 자원의 불균형이 생긴 데서 나온 결과이다.(41쪽)




  저자들의 이러한 주장은 이 책 전체에서 충분히 입증되고 남음이 있다. “자유로운 선택과 경쟁이 이루어”지는 ‘시장경제 체제’가 ‘이상적인’ 것이라는 데에는 의문의 여지가 있지만, 작금의 언어의 사멸이 단순히 어떤 자연적 흐름에 의한 것이 아니라는 지적은 타당하다. 생태계 파괴의 주요 원인으로 지적되는 것은 이른 바 산업화와 공업화의 근대적 발전 이데올로기다. 과학 기술의 발달로 급성장한 서구 근대 국가들의 산업화와 공업화 공세에 전 세계의 생태계는 무분별하게 파괴되기에 이른 것이고, 오늘날에는 신자유주의와 경제 논리의 미명 아래 이러한 발전 이데올로기가 합당한 것으로 치장된다. 생태계가 치명상을 입었음을 우려하고 경고하고 있는 상황에서도,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너왔으니 어쩔 수 없다는 식으로 말이다. 이러한 생태계 파괴의 원인은 저자들이 앞서 지적한 바와 같이 생태계와 언어의 관련성에 비추어, 언어 사멸의 제1원인이라고 할 수 있다.

  오늘날에 사회 변화는 자연적인 흐름이면서 필연이고, 그에 따른 언어의 변화가 수반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현상이라고 하기에는, 일부 선진국들의 언어가 대다수의 소수 언어들을 잠식(蠶食), 살해(殺害)해 나가는 현상을 볼 때 매우 부당한 것이 내재해 있다고 생각된다. 저자들의 말처럼, 산업화와 공업화를 앞장서서 세계에 전파했던 서구 열강들의 제국주의적 행각에 의해 사회적, 국가적 불균등이 생겨나고, 이러한 불균등 심화와 그에 따른 강압과 억압, 그리고 직 · 간접적 통제에 의해 언어가 사멸해 가고 있다는 것이다.

  언어의 변화, 즉 언어의 생성, 변화, 소멸은 그 언어가 기반으로 하는 사회의 변화와 밀접한 관련을 맺는다. 사회의 변화는 곧 언어의 변화를 의미하며, 이는 그 둘의 관계에 입각할 때 지극히 당연하면서도 자연스러운 흐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오늘날 한 언어가 통째로 포기되어지고, 이른 바 언어가 자살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에는 그렇게 곧이곧대로 자연스러움을 부과하기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다. ‘언어 제국주의, 언어 식민주의’란 명명에서 볼 수 있듯이, 제국의 언어가 식민지의 언어로 강요되는 현 실태는 불합리하고도 참혹한 언어 말살이라고까지 할 수 있을 것이다.

  저자 들은 이 책에서 언어의 소멸과 관련한 명명(命名)을 두고 논하면서, ‘언어의 자살’이란 명명에는 동의하지 않고 있다. 언어가 급변하는 사회에 맞게 자연적 변화를 일으키는 것으로 유야무야 넘어갈 문제가 아님을 이미 앞에서 언급 했듯이, 그것은 언어가 살해된다고까지 말할 수 있는 타살이란 측면이 강하다. 간혹 소수 언어의 사용자들이 자발적으로 자기네 언어를 포기하고 제국의 언어를 선택하는 경향을 보이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 근원에는 자발성의 측면보다는 경제적 생존 논리에 의한 무의식적 강압이 작용하는 것을 어렵지 않게 유추할 수 있을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다니엘 네틀과 수잔 로메인의 입장은 타살로 보는 것에 가깝다. 번역본이기 때문에 원문에서의 표기가 어떤 것인지를 찾아보지는 못했지만, 그들이 ‘사멸’이라고 부르듯이 그들의 논조 또한 피살되어지는 것으로 보는 성향을 느낄 수 있다. 여하튼 언어가 그렇게 사멸해 가는 것에 대한 일각의 이런 경각심을 모두가 호기(豪氣)롭게 보기만 하는 것은 아니다. 촘스키로 대변되는 변형생성론자들의 논법을 따르는 이들의 경우 언어는 그 기저에 심층구조상의 보편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언어의 이러한 변화 내지 사멸은 크게 우려할 만한 것이 못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언어의 이런 심층구조의 동일한 보편성을 십분 인정한다 하더라도, 그것이 항상 심층구조로 발화되고 사용되는 것이 아니란 점을 고려한다면, 그리하여 그러한 심층구조 상의 생각이 각각의 사회의 사고방식 및 문화, 정체성에 따라 제각기로 표현되어지고 발화되어진다는 것을 확인할 때 확실히 그런 언어들이 사라지고, 다양성이 극소수 몇 개의 언어만의 획일성으로 점철되는 것은 쉽게 넘길만한 일은 아니다. 언어가 보편성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그러니까 9개가 같고 1개가 다른 대동소이한 것이라 하더라고, 약 6,000여개의 언어가 가지는 다양성의 폭, 즉 ‘소이(小異)’한 것들의 개수는 6,000개 그 이상이며, 이것들이 사라진다고 할 때, 언어의 이런 보편성만으로 대수롭지 않게 보기에는 그 손실은 크나큰 것이다.

  다니엘 네틀과 수잔 로메인이 이 책에서 생태 언어학적 측면에서의 언어의 사멸을 고찰하고 있고, 그 원인으로 공업발전만을 강조한 서구의 경제논리에 따른 각기 사회의 불균형성을 들고 있지만, 아울러 그것이 현실적으로 적용되는 구조는 ‘언어 식민주의’적, ‘언어 제국주의’적 양상을 보인다. 초강대국 미국의 언어인 영어와 강대국 프랑스, 중국, 러시아, 일본 등의 언어들 아래 재편(再編)되어진 중심부, 주변부의 언어들의 역학(力學) 관계로 파악하는 것이 이른바 ‘언어 제국주의’적 양상인데, 그러한 논리에 따르면, 주변부들의 언어가 급속도로 제국의 언어의 강압 아래 굴복하고 복속되어지고 있는 것이다. 이 책에서 저자들은 그러한 논리를 직접적으로 가져오진 않지만, 일부분의 서술에서도 그런 제국주의 논리가 언어의 사멸에 깊이 관여하고 있음을 어렵지 않게 찾아 낼 수는 있겠다.




우리는 언어 정책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일부 사람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규모가 큰 언어를 사용하는 것이 실질적인 경제적 이득을 가져다준다면 사람들 스스로 그것을 깨달을 것이다. 따라서 강제로 사람들을 “현대화”시키려는 시도들은 잘되어도 방향을 잘못 잡은 것이고, 잘못되면 다른 문제들을 덮어 버리게 되는 것이다. 현대의 세계 경제에서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이 영어나 다른 세계어들을 사용할 수밖에 없다는 점은 인정한다. 그러나 그것이 그들의 선택과는 무관하게 모국어를 잃어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그것은 쉽사리 양자택일을 할 수 있는 사안이 아니다. 만약 그들에게 스스로 개발 조건을 정할 수 있는 실질적인 기회가 주어진다면 사람들은 흔히 양쪽에 모두 유리한 방안을 찾아낼 것이다. 즉 지역 사회의 자율성을 유지하면서 보다 광역의 경제 및 정치 체제에 적절히 전략적으로 참여하는 것이다. 언어학적인 관점에서 볼 때, 이렇게 되면 철저한 다중 언어 사회가 이루어져서 그 사회에서 쓰이는 모든 언어가 긍정적인 가치를 부여받고 상호 보완적으로 기능하게 될 것이다.

중심지 언어와 주변 언어들이 오랜 갈등을 겪는 동안 변방의 사람들은 진정한 선택권을 부여받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 선택은 인권의 측면에서 그 자체로서 바람직한 일일 뿐 아니라, 경제적인 면과 사회적인 면에 모두 이로운 영향을 가져올 수 있다.(248쪽)




  저자들은 언어의 사멸 양상을 추적하면서 언어가 기하급수적(幾何級數的)으로 근 200년에 걸쳐 소멸되고 있으며, 그것은 생태적 파괴의 양상과 우연 이상으로 일치한다고 근거를 들어 주장한다. 그들은 언어가 인류의 자원이며, 그 소멸은 인류에게 커다란 손실을 안겨주는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생물의 다양성 보존과 함께 언어의 다양성도 유지, 보존되어야 함을 강조한다. 위의 인용문에서 우리는 그들이 추구하는 언어적 다양성의 형태를 볼 수 있는데, 그것은 바로 ‘철저한 다중 언어 사회(多重言語社會)’가 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각각의 지역 사회의 자율성을 유지시키고 그들의 권리를 인정하고 지켜주는 것이 반드시 필요하다. 제국주의적인 외부의 근대적 발전의 강요와 억압은 그들의 자율과 권리를 파괴하고, 결국에는 모든 다양성을 말살하는 것일 뿐, 아무런 득 될 것은 없다.

  이러한 ‘다중 언어 사회’를 이루기까지 필요한 것은 아직까지 남아 있는 언어적 다양성을 유지 보존하고, 그것이 오랜 기간 이어질 수 있도록 하는 여러 가지 대안들이 필요하다. 저자들은 그러한 대안 찾기도 빼놓지 않고 있다. 여기서 그것을 열거하지는 않겠다. 여러 가지 대안들이 있고, 그러한 대안들이 조속히 실천에 옮겨져야 할 것이지만,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저 강대국 언어의 사용자들이 이러한 생태 언어적 현실에 대하여 보다 경각심을 가지고 바라보고, 그것을 유지 보존해야 함을 인식하는 것이 급선무다. 그들이 거기에 무관심하고 외면할 때 소수 언어들은 쥐도 새도 모르게, “그 많던 싱아”를 따라서 어디론가 돌아오지 못할 곳으로 사라져 버릴 것이다. 이러한 대안들과 해결책들, 그리고 조속히 처리해야할 구체적인 방법들은 데이비드 크리스털의 『언어의 죽음』에서 보다 잘 설명되고 있다. 그 책과 함께 이 책을 읽는 것은 매우 유효한 독서 방법이기도 하겠다.

  언어의 사멸은 우리 아닌 타 언어 사용자들의 문제만은 아니다. 언어를 어떻게 구분 짓느냐에 따라 다르겠지만, 우리 내부에서도 언어는 사멸하고 있다. 방언도 엄밀히는 언어 중의 하나이고, 그것은 한국어 내부의 언어적 다양성을 보여준다. 그러나 그것 또한 표준 한국어에 밀려 점차 사멸되어 가고 있다. 특히나 우려스러운 것은 다분히 독특한 점들을 보여주는 제주도 방언이 급속도로 사멸하고 있다는 점에서 국어학계의 우려가 크다. 이런 내부의 문제이기도 한 언어의 사멸에 관한 우려를 우리는 보다 넓은 시야와 애정으로 바라보고 대처해야 할 필요성이 있다. 우리와는 상관없는 듯이 보이는 저 머나먼 타국의 소수 언어들이 사멸해가고 있는 현실은, 곧 우리 전 인류의 공통된 손실로 다가올 것이다. 또한 우리 안에서도 그러한 전 지구적 손실이 이루어지고 있음에 우리는 인류에게 끼친 손실에 대해 반성해야 할 것이다.

  최근 논란이 되고 있는 ‘영어 몰입 교육’이니, ‘영어 공교육 강화’니 하는 것들도 언어의 사멸의 과정에 있어 초기 단계에 진입한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영어를 배제하자는 것이 아니라, 언어적 다양성을 유지하고, 다중 언어 사회로 나아가는 것이다. 우리의 제1언어인 한국어로 우리의 정체성을 갖추고, 영어를 비롯한 다양한 언어들을 존중하고 배워가면서 언어적 다양성을 통해 전 인류와 소통하고 공존하는 것, 그것이 바로 우리가 추구하고 노력해야 할 이상이다.

  한국인으로서 우리와 이웃한 중국, 일본 등과 역사적으로 불편한 관계를 맺어오긴 했지만, 이런 언어적 다양성을 추구할 때, 우선적으로 이런 이웃의 언어를 존중하고 배워나가는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근대 이전까지만 해도 당시 제국의 언어인 중국의 문자를 통해 한 · 중 · 일은 무리 없이 소통할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거의 불가능하고, 가능해지려면 영어의 도움을 받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동아시아가 연대하고 그것을 발판으로 삼으려 한다면 이 이웃한 나라들만이라도 제각기 다른 나라의 언어로 말하고, ‘내 언어’로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중국인과 한국인, 그리고 일본인이 한 자리에서 중국인은 한국어로 말하고, 한국인은 일본어로 말하며, 일본인은 중국어로 대화하는 모습 속에 다중 언어 사회의 구체적 모습이 희망적으로 담겨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영어 공교육 강화’의 필요성은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다. 그러나 그것이 모두에게 획일적으로 적용되는 ‘共교육’이 아니라 ‘公교육’이어야 하는 것을 우리는 명심해야 할 것이다. 영어를 배우고자 하는 이들에게 최상의 영어교육이 제공되는 것이 곧 공교육의 모습이다. 이것은 나아가 다중 언어 공교육으로 이어져야 한다. 나는 우리 사회가 내 언어로 생각하고 사고하며, 타인의 언어로 말해주고 전달하는 다중 언어 사회가 될 수 있기를 바란다. 이것은 저 독재(獨裁) 정부가 그렇게 노래만 불렀으나 도달할 수 없었던 ‘인류 공영에 이바지’하겠다는 목표에 가장 효과적으로 도달하는 길이 될 것이다.

  끝으로 사족을 더하자면, 몇 년 전부터 한글을 세계에 전파하자는 민족주의적 성향의 운동은 그것의 의도가 어떠하든지 간에 심사숙고(深思熟考)해야 할 일이다. 다니엘 네틀 등이 강조했듯이 언어에 있어 자율적이고 자발적인 그 언어 사용자들의 노력이 필수적인데, 거기에다 한글의 우수성은 곧 한민족의 우수성이고, 그런 자긍심과 민족적 우수성을 전파하고자 하는 민족주의적 한글 전파 운동은 성공할 수 없는 외부의 억압이 될 수 있을 것이다. 한글은 우수한 문자이지만, 또한 다른 문자들과 마찬가지의 장단점이 있다. 어떤 점에서 한글은 영어나 한자, 일본의 가타가나 보다 단점이 많을 수도 있고, 또 그와는 달리 그것들이 가지지 못한 많은 장점을 가졌을 것이다. 그러니까 상대적이라는 것이다. 한글이 만능은 아니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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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오기 2008-03-22 10: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너무 길~~어서 2차에 걸쳐 읽었더니 뭔 말인지...그래도 결론은 확실히 알아 들었어요.^^
"우리 사회가 내 언어로 생각하고 사고하며, 타인의 언어로 말해주고 전달하는 다중 언어 사회가 될 수 있기를 바란다."라는 말에 공감합니다.
UN의 유네스코에서 까막눈(문맹) 퇴치에 크게 이바지한 사람들에게 '세종대왕상'을 수여하는데, 이것은 한글의 가치와 공적을 국제적으로 인정한 상징으로 우리의 큰 자랑거리라 할 수 있지 않을까요?
 
자비를 팔다 - 우상파괴자 히친스의 마더 테레사 비판
크리스토퍼 히친스 지음, 김정환 옮김 / 모멘토 / 200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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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삼한 시대에 '소도(蘇塗)'라는 곳이 있었다. 중고등학교 '국사' 시간이면 빠짐없이 등장하는 곳이다. 이곳은 말하자면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곳이었다. 그러니 언제나 이곳은 신성한 곳, 성지(聖地)여야 했다. 그러다 보니 속세의 어떤 힘도 이곳을 범할 수 없었다. '신성불가침(神聖不可侵)'의 권역이 이 '소도'라는 곳이었다. 주지하듯이 '솟대'로 경계지어진 이곳에 죄인이 도망쳐 오면 누구도 그를 잡아갈 수 없었다. 역사 이래 이런 신성불가침의 권역들이 종종 존재했던 것 같다. 그것은 21세기를 살아가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존재하기도 한다.

우리 사회에서 이런 절대적 권역을 쉽게 찾아보기는 힘들지만, 종교적으로 신성한 곳이라고 여겨지는 곳에는 속세의 권력이 침범하는 것은 여전히 어려운 일이다. 또한 이런 신성불가침의 위엄은 곧잘 역사적 위인들에 적용되기도 한다. 우리나라에서 그 대표적인 인물을 든다면, 세종대왕이나 이순신 등이 그러한 예이다. 우리 사회에서 세종이나 이순신을 함부로 비판하거나 트집을 잡는다면 거의 예외없이 무시무시한 댓글에 시달릴 수밖에 없다. 그들의 공로가 사회적으로 충분히 인정되고 있지만, 그것이 그들에 대한 비판을 부정하게 만드는 것은 그다지 바람직해 보이지 않는다.

전 세계적으로 그런 인물을 꼽으라면 단연 마더 테레사(Agnes Gonxha Bojaxhiu, 1910~1997) 수녀를 들 수 있다. 테레사 수녀는 가톨릭 교도들 뿐만 아니라, 비기독교인에 이르기까지 존경과 찬사를 한몸에 받고 있는 인물이다. 그녀의 가난에 대한 봉사와 선교활동은 그리스도의 사랑을 온전히 실천하고 있는 것으로 받아지고 있다. 그녀가 이끄는 사랑의 선교회(Missionaries of Charity)는 가난과 굶주림이 있는 세계 곳곳에 널리 퍼져 있으면서, 그들을 치료하고 보호하며 자비와 사랑을 베풀고 있다고 간주된다. 전 세계의 많은 이들이 그들의 종교적 신념을 불문하고 이 사랑의 선교회로 많고 적은 후원금을 보내오고 있다. 테레사 수녀가 그들의 후원금을 좋은 곳에 써줄 것이라는 믿음으로 말이다.

그녀의 이런 공로를 높이사 1979년에 노벨평화상이 수여됐다. 2003년에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복자반열에 오르고 이후 시성절차가 진행중이라는 데 아직 시성되어 성인의 반열에 올랐는지는 과문하여 잘 모르겠다. 그녀의 이런 공로와 사랑의 실천에 어느 하나 존경은 못할 망정 누가 감히 비판하겠는가? 함부로 나서기가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그녀의 시성절차를 진행하면서 교황청에서는 '악마의 변호인'(시성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며 검사 역할을 하는 증성관(證聖官))을 선임했다. 교황청이 선임한 '악마의 변호인'은 히친스였다. 몇 년 전 영미권 지식인 중 5위에 오른 이 뛰어난 저널리스트는 거침없이 이 '악마의 변호인'을 맡았다. 아마도 이 증성관 역할이 히친스에게 오기까지는 많은 이들의 정중한 고사를 거친 후가 아니었을지도 모르겠다. 히친스를 증성관으로 선임한 교황청은 어쩌면 악수를 둔 것인지도 모르겠다. 마더 테레사가 성인을 반열에 오르는 데 치명적 결격사유를 히친스가 제공하고 있기 때문이다. 바로 이 책 『자비를 팔다』(원제 The Missionary Position)가 그것이다.

'The Missionary Position'이란 말에는 두 가지 뜻이 있다. 표면적 의미로는 '선교의 입장' 정도로 번역할 수 있다. 이 말이 가지는 다른 의미는 '선교사의 체위', 즉 섹스의 '정상 체위'를 뜻한다. 이 원제는 이 책의 영미권 출간 당시 "책 내용에 관한 논란과는 별도로 물의를 빚기도 했다." 그러나 이 원제가 보여주는 그 이중적 의미의 층위는 어쩌면 히친스가 비판하고 까발리는 마더 테레사라는 인물의 감추어진 이면들과의 그 이중성을 절묘히 비유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표면적으로 보여지는 테레사 수녀의 봉사와 헌신의 그 이면에 있는 어떤 것, 그것이 바로 히친스가 지적하는 저급한 정상체위, 그녀의 선교의 입장이 된다고 말이다.

원제가 가지는 물의를 피하기 위해 한국어판의 제목은 '자비를 팔다'가 되었다. 이 한국어판 제목 또한 히친스가 제공하는 물의를 피하면서도, 그가 제시하고자 했던 그 이중성, 마더 테레사의 역설적 이중성을 적절히 담고 있는 고급한 제목이라고 생각된다. '자비'는 베풀어질 때 성립할 수 있는 특성을 가진다. 그것이 판매된다면 더 이상 그것은 자비가 아닐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 역설적 제목 '자비를 팔다' 또한 히친스가 담고자 하는 마더 테레사의 이중 플레이를 유효하게 담아내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히친스가 비판하는 그녀의 봉사와 헌신적 활동 이면에 그 어떤 저급함이 있을까? 150여 쪽의 이 짧은 책자에서 히친스는 테레사 수녀와 그녀의 사랑의 선교회의 여러 활동들을 추적하고 자료를 제시하면서 그녀가 어떻게 가난한 자를 돕고 사랑해 왔는지를 추적한다. 그러나 그녀의 온화하고 자애로움이 묻어나는 몇 장의 사진들과 함께 그것이 어떻게 연출되고 어떤 배경 속에서 이루어진 것인지를 차분히 밝히고 있는 히친스의 지적을 읽는다면, 그녀의 그런 봉사와 헌신에 우리는 의문을 심하게 품게 된다.

이 책의 표지 사진으로 쓰인 80쪽과 81쪽 사이에 수록된 몇 장의 사진 중 첫 번째 사진을 보면, 어떤 가난한 이로 보이는 남자가 테레사 수녀의 손을 잡고 간절한 눈빛으로 그녀를 쳐다보지만, 테레사는 뭔가 차갑게 초탈한 듯 그를 외면하고 어느 먼 곳을 바라보고 있다. "콜카다의 선교회에서" 찍은 이 사진이 보여주는 것처럼 히친스는 그녀가 사실상 다른 목적으로 이 가난을 이용하고 세상에 팔아왔다고 말한다. 한 장을 넘기면 테레사 수녀가 "아이티에서 미셸 뒤발리에와 함께" 찍은 사진이 있다. 미셸 뒤발리에는 "아이티의 일인 독재자 장-클로드 뒤발리에"의 부인, 그러니까 아이티 대통령의 영부인이었다. 이 사진은 독재자 장-클로드 뒤발리에의 선전지인 「공격」 1981년 1월호에 실렸다.

   
 

  잡지를 펼치면, 둥글게 부푼 아이티 '제1시민'과 그의 유명한 신부 미셸 뒤발리에의 결혼기념일에 대한 길고 경애하는 글 옆에 커다란 사진이 있다. 사진 속의 미셸은 백인 및 크리올 엘리트의 지도자로서 태연하고 차분하고 우아한 모습이다. 팔찌를 찬 그녀의 팔을 다른 여인이 정답게 감쌌고, 이 여인은 존경과 복종으로 가득 찬 눈빛까지 바치고 있다. 사진 옆에 인용된 그녀의 말을 보면 자신의 아첨성 행동만으로는 부족하다고 느낀 것이 분명하다. "대통령 영부인은 느끼시고, 아시며, 자신의 사랑을 말뿐이 아니라 눈에 보이는 실체적인 행동으로써도 보여주고자 하시는 분입니다." 이 외침은 이어진 사회 페이지의 헤드라인에서도 메아리친다. "영부인님, 나라가 당신 필생의 사업으로 진동합니다."(19쪽)

  CBS 다큐멘커리 프로그램 「60분」이 방영한 이 필름에서 마더 테레사는 카메라를 향해 미소 지으며 미셸 뒤발리에에 대해, 살아오는 동안 많은 왕과 대통령들을 만났지만 "가난한 사람들이 국가의 우두머리와 이토록 친근한 경우는 처음 보았다. 내게는 아름다운 배움의 경험이었다."라고 말한다. 이것은 그 밖의 은총에 대한 보답으로 마더 테레사는 아이티 국가훈장 레종 도뇌르를 받았다. 지배자 부부에게 찬사를 보내는 그녀의 단순한 증언은 국영 TV 방송에서 매일 밤 최소 일주일 동안 방영되었다.
  훈장을 받은 때부터, 아이티 국민이 장-클로드 및 미셸과 너무도 '친근한' 나머지 그 부부가 자기들의 짐가방을 국고 재산으로 채우고 프랑스 리비에라로 영영 도망치는 데 시간이 아슬아슬했을 정도였던 시기까지 마더 테레사가 이 필름에 대해 항의를 제기했다는 얘기는 알려진 바 없다.(20쪽)

 
   

그 옆에는 MSIA라는 이름을 지닌 광신집단의 지도자로서, "사기 행각은 가히 초서급"인 존-로저와 '존-로저 성실상'을 수상하고 1만 달러를 기부받은 테레사 수녀가 함께 찍은 사진이 있다. 이 사진은 "스튜디오에서 찍은 것이고, 콜카타의 가난한 이들은 나중에 덧붙"인 것이다. 한 장을 다시 넘기면 "1995년 6월, 새로 문을 연 북서 워싱턴 입양의 집에서 힐러리 클린턴과 함께" 찍은 사진이 있다. 몇 장을 더 넘겨 보면 "80년대 말 미국을 뒤흔든 저축대부조합 도산 사태 때 사기죄로 유죄 판결을 받"은 찰스 키팅과 웃으면서 악수하고 있는 사진이 있다. 테레사 수녀는 그에게 100만 달러 이상의 후원금을 받았다. 이외의 정치적 거물들과 찍은 사진들이 다수 있다.

마더 테레사는 찰스 키팅이 사기죄로 기소되자, 재판의 담당 판사인 랜스 이토 판사에게 탄원서를 보낸다. 말하자면 찰스 키팅이 "주님의 빈자들에게 언제나 친절하고 관대했으며, 필요가 생길 때면 언제나 기꺼이 도울 태세였다는 점"에서 그를 선처해 달라는 것이다.(102~103쪽에는 마더 테레사의 편지 전문이 실려 있다.) 이 편지에 대해 "로스앤젤레스 지방 검사보로서 키팅 사건의 기소 담당자 중 하나였던 폴 털리"는 마더 테레사에게 답장을 보냈다. 키팅이 사기 친 "대부분은 재산이 많지 않고 대형 금융 거래에 익숙지 않은 사람들"의 돈, 그러니까 키팅이 선심 쓴 100만 달러 이상의 기부금을 돌려줘야 하지 않겠냐고 테레사에게 답장을 보낸 것이다. 그러나 테레사가 죽을 때까지 어떤 답변도 보내오지 않았다.

이런 갖가지 사실들을 나열하면서 히친스는 마더 테레사의 이 이중생활을 폭로한다. 이쯤되면 악마의 변호인으로서 그의 역할은 성공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더 테레사가 성인이 되는데 지장이 없다면 이상할 일이다. 마더 테레사는 순박하고 아무 것도 모르며 가난한 사람들을 돕기위해 아이티의 독재자 부인과 손을 잡고 온갖 미사여구를 곁들인 찬사를 보냈을까? 또한 가난한 자들을 사기쳐 번 돈으로 선심 쓴 키팅의 기부금으로 마더 테레사는 누구를 도왔을까? 우리가 마더 테레사는 속세를 떠난 고귀한 성인으로서 오로지 가난한 이들에게만 헌신하고 봉사한다고 생각하지만, 마더 테레사는 그 노구에도 불구하고 굵직굵직한 정치적 현안이 존재하는 장소에 어김없이, 절묘하리만치 교묘하게 등장한다고 히친스는 지적한다. 이런 그녀가 아이티의 독재자 부부의 실체를 몰랐을까? 키팅이 엄청난 사기를 치고 유죄 판결을 받았는데도, 아직도 그가 "주님의 빈자들에게 언제나 친절하고 관대했으며, 필요가 생길 때면 언제나 기꺼이 도울 태세"였다고 믿는 것일까?

마더 테레사는 얼마가 되는지도 모를 정도로 엄청난 기부금과 후원금을 끌어 모으고 있다. 그러나 그녀의 사랑의 선교회에 수용되어 있는 가난한 이들은 별반 그 생활이 나아지고 있지 않다. 그야말로 수용소에 다름 아니다. 그 막대한 돈은 다 어디로 갔을까? 이 책의 히친스의 고발에 따르면 간단한 수술이면 해결될 어린 아이의 병도 단지 방치될 뿐이고, 최소한의 기본 의료도 무참하게 제공만 된다. 주사기도 물로 대충 씻어낼 뿐 소독할 생각은 없다. 그런데 그녀는 지병을 치료하게 위해 세계 최고의 병원에 입원하여 장기간 치료를 받았다. 그 막대한 돈은 그렇게 쓰였고, 세계 곳곳에 사랑의 선교회란 이름의 수용소만 지어댈 뿐이었다. 아직도 스위스의 비밀 금고에 그녀가 모금한 어마어마한 돈이 꿈틀대고 있일지 모를 일이다.

히친스가 이렇게 신랄하게 고발하고 있는 마더 테레사의 'The Missionary Position'의 저급함은 바로 가난을 이용하고 위선적 자비를 팔아가면서 근본주의적 기독교를 전파하는 데만 혈안이 되었다는 것이다. 악마의 변호인 히친스는 바로 '근본주의 종교-사업가'로서의 테레사 수녀의 위선을 기소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기소는 기각된 듯 보인다. 왜? 히친스가 악마를 대변하고 있기 때문일까? 주간지 「뉴욕 프레스」는 이 책에 대해 촌평하면서 다소 익살스럽게, "지옥이란 게 있다면, 히친스는 이 책 때문에 거기에 가게 될 터이다"라고 농을 친다. 이 책 때문만은 아니고, 아무튼 지옥이란 게 정말 있다면 무신론자이고 적극적인 반종교주의자인 히친스가 지옥에 가게 될 것은 뻔한 일이다. 다만, 그가 지옥에 갔을 때, 그곳에서 히친스를 마더 테레사가 반갑게 맞이하지 않을까? 히친스는 후기에서 이렇게 결론을 내린다.

   
 

그러므로 그녀의 성공은 겸손과 소박의 승리가 아니다. 그것은 인류의 미신적인 유년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그리고 교활한 자와 한 가지 목적에 전념하는 자들이 소박하고 겸손한 자들을 착취하는 것에 기댄, 천년왕국 이야기의 또 다른 장이다.(14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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웽스북스 2008-03-05 00: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이 책 주문해서 오늘 받았어요! 리뷰는 다 읽어보고 읽어야지 ㅎㅎ
은근 멜기님이 추천해준 거 이것저것 접하고 있는 ㅋㅋㅋ
(제가 좀 스폰지같아요 ㅎㅎㅎ)

순오기 2008-03-06 08:5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종교단체나 성금이란 명목으로 방송매체에 얼굴을 휘날리며 후원하는 거부들이, 실은 가난한 종업원들의 임금을 착취하거나 혹은 비리로 받은 부정한 돈을 보낸다는 것 많은 이들이 알지만...마더 데레사에 대해선 맹신하는데, 이책은 그런 점을 잘 부각시켜줬군요. 일단은 추천하고 찜합니다!

김서늬 2008-03-17 16: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언제나 모든 것은 어떤 위치에서 보느냐에 따라 달라 보이죠.
진실이라는 것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요즘같이 기술은 좋은 시대에 온갖 진짜같은 가짜, 가짜같은 진짜들이 판치는 세상에서는 대중이 어느 쪽에 서서 바라보게 할 것인가를 (나쁜 뜻으로는)조종하고, (좋은 뜻으로는)선도하는 역할의 책임을 맡은 것이 바로 글쟁이들이 아닐까요. 마더 테레사가 어떤 인물이었는지는 히친스도 테레사의 추종자들도 아무도 모르겠지요. 마더 테레사 본인밖에는^^.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극단적으로 한쪽으로 치우친 위치에서는 오직 자신만의 판단을 따랐으면 좋겠습니다.

멜기세덱 2008-03-17 21:30   좋아요 1 | URL
저는 히친스가 우리들과 다른 위치에서 마더 테레사를 보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단지 우리는 보여주는 것만 보았다고 할까요? 히친스는 좀더 공을 들여 보여주지 않은 것들을 보면서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다고 여겨집니다.
우리의 판단은 이것때문에 수정되어야 할 것처럼 생각되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