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타 창비시선 284
신경림 지음 / 창비 / 200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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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경림 시인이 '또' 시집을 내놓았다. 그는 그의 '전집'을 엮어 낸 적이 있다. 전집들이 대개 시인 사후에 묶여 나오는 것이 일반적인지라, 신경림 시인이 두 권으로 묶어낸 '전집'을 나는 애써 외면했다. 시인이 절필을 선언한 것도 아니고, 전집을 낼 당시(2004년) 고희를 앞둔 나이임에도 여전히 그는 시적 감수성에 충만한 '현역' 시인이었으니, 그즘의 전집이 결코 전집일 수 없었기 때문이다. 결국 이번에 시인이 『낙타』란 시집을 또 내놓았으니, 이전의 전집은 이제 '전집'이 아닌 게 된 셈이다. 어찌 되었건 새 시집을 내놓았다는 소식에는 반가움을 금할 수 없다. 그는 내가 사랑하는 '살아있는' 시인이니까.

신경림을 떠올리면 새삼 감사를 전해야 될 곳이 있다. 바로 MBC의 <느낌표>란 프로그램이 그것이다. 지지리도 책을 안 읽는 대한민국에 한때나마 독서열풍을 몰고 왔던, 꽤 공이 많은 프로그램이었는데, 거기서 선정한 도서 중에 『신경림의 시인을 찾아서』가 있었고, 그것을 계기로 나는 신경림에게 더욱 매력을 느끼게 되었던 것이다. 그 시절, 이래저래 방향도 잡지 못하다 끌려가듯 군대에 가서, 어느 것 하나도 낙이 없이 지내던 시절이었다. 그래서 찾은 게 책이었고, '느낌표' 열풍에 살작 기댄 것이었다. 시에 관심을 꽤나 가지고 있던 터라, 신경림이 찾아간 옛 시인의 자취들, 신경림이 풀어내는 그 시인들의 노래들을 읽으며 참 행복했다. 군대라는 살벌한 공간에서 길 떠나는 노(老)시인을 따라 옛 시인들의 흔적을 찾아가는 것은 내게 참으로 행복한 낭만을 주었다. 그것을 통해 더욱 신경림 시인에게 끌리게 됐고, 신경림 시인의 시들까지도 찾아 읽게 되었다. 그의 유명세만큼은 익히 알고 있었지만, 그의 시를 여러편 탐독한 것은 아니었기에, 그의 시를 접하면서는 더욱 이 시인이 좋아졌다. 어쩜 이런 시를 써낼까, 감탄하면서. 가령 이런 시들 말이다.

   
 

다들 잠이 든 한밤중이면
몸 비틀어 바위에서 빠져나와
차디찬 강물에
손을 담가보기도 하고
뻘겋게 머리가 까뭉개져 앓는 소리를 내는 앞산을 보며
천년 긴 세월을 되씹기도 한다.

빼앗기지 않으려고 논틀밭틀에
깊드리에 흘린 이들의 피는 아직 선명한데,
성큼성큼 주천 장터로 들어서서 보면
짓눌리고 밟히는 삶 속에서도
사람들은 숨가쁘게 사랑을 하고
들뜬 기쁨에 소리 지르고
뒤엉켜 깊은 잠에 빠져 있다.

참으려도 절로 웃음이 나와
애들처럼 병신걸음 곰배팔이 걸음으로 돌아보는 새벽
별들은 점잖지 못하다
하늘에 들어가 숨고
숨 헐떡이며 바위에 서둘러 들어가 끼어앉은 내 얼굴에서는
장난스러운 웃음이 사라지지 않고 있다.

―「주천강 가의 마애불―주천에서」전문(『달 넘세』, 창작과비평사, 1985.)

 
   

신경림이 옛 시인들을 찾아 이러저리 떠돌았던 데에는 지나온 이력이 있다. 그는 시인만을 찾아 떠돈 것이 아니었다. 그가 고백하듯이 그는 장돌뱅이를 한 적도 있었다. 그러면서 이리저리 장이 서는 곳들을 찾아 떠돌았을 것이다. 그렇게 그가 떠돌면서 보았던 애틋하게 삶에 충실했던 농민들, 서민들, 민중들의 모습을 이렇게 시로 그려냈다. 주천강 가를 지나다 본 마애불에서 그는 '장난스러운 웃음'을 보았다. 그것은 그의 웃음이기도 하다. "짓눌리고 밟히는 삶 속에서도" 사람들은 그 질긴 삶을 "숨가쁘게 사랑을 하고" 때론 "들뜬 기쁨에 소리 지르"며 살아간다. 그 모습들에서 시인은 삶의 소중함과 행복을 보았던 것이 아닐까? 그는 "이웃들의 정서나 설움, 얘기 같은 것을 외면하지 않겠다"고 했고, "시는 사람이 사람답게 살기 위한 조건을 만드는 데 일정한 책임을 져야 한다고"(「나는 왜 시를 쓰는가」) 했다. 그 이웃들은 설움 속에서도 그렇게 "사람답게 살"고 있음을 볼 때, 너무나 좋아서 "애들처럼 병신걸음 곰배팔이 걸음으로" 부처님 체면은 아랑곳없이 춤을 춘다. 이 한 편의 시만으로도 나는 신경림을 대단한 시인으로 인정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런 시인이 전집을 엮어 내었을 때, 나는 이 늙은 시인이 시 쓰기를 그만할 작정인가 염려했었더랬다. 그러니 이번 시집이 무척이나 반가울 수밖에. 그런데 그런 반가움을 뒤로 하고, 이번 시집을 읽으면서 나를 온통 흐느끼게 한 것은 노(老)시인을 감싸고 도는 왠지 모를 죽음의 그림자였다. 그래서 이번 시집 한 편 한 편을 흐느끼며 읊었다. 아, 이 시인도 그가 찾았던 옛 시인의 돌아올 수 없는 길을 가려는구나.

   
 

낙타를 타고 가리라, 저승길은
별과 달과 해와
모래밖에 본 일이 없는 낙타를 타고.
세상사 물으면 짐짓, 아무것도 못 본 체
손 저어 대답하면서,
슬픔도 아픔도 까맣게 잊었다는 듯.
누군가 있어 다시 세상에 나가란다면
낙타가 되어 가겠다 대답하리라.
별과 달과 해와
모래만 보고 살다가,
돌아올 때는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사람 하나 등에 업고 오겠노라고.
무슨 재미로 세상을 살았는지도 모르는
가장 가엾은 사람 하나 골라
길동무 되어서.

―「낙타」전문

 
   

시집 『낙타』는 여는 이 시에서 나는 '낙타'를 타고 쓸쓸히 길 떠나는 시인을 본다. 사막을 그 고된 길을 낙타는 뚜벅뚜벅 느리게, 그러나 꾸준히 걸어간다. 등은 굽어 뒤우뚱거리며 걷는 것이 마치 어느 늙은이의 쓸쓸한 뒷모습 같다. 그런 낙타를 타고 "가장 가엾은 사람", 곧 시인이 저 멀리 사막의 길을 간다. 일흔을 넘긴 시인에게 드리운 것은 저 '저승길'의 "별과 달과 해"일 뿐이다. 이번 시집은 이 노시인이 차분하게 그러나 "아무것도 못 본 체" 낙타를 타고 걸어가는 사막길에서의 편지가 아닐까?

그 가는 길에서 시인은 "굵은 주름투성이 늙은이"와 "눈에 웃음을 단 아낙"과 "조그맣게 엎드려 사는 사람들"과 어느 또다른 늙은이가 저 뒤어서 타고오는 '조랑말'(「이역(異域)」)을 본다. 때론 '사랑방에' 앉아 계셨던 '할아버지'도 보고, '건넌방에' '아버지'도 보고, '할머니'를 보고 '어머니'를 본다. "철없는 아이가 되어 딱지를 치고 구슬장난을 하"(「즐거운 나의 집」)던 자신의 옛모습도 본다. 그는 또 '고목을 보'면서는 이렇게 읊는다.

   
 

내 몸의 상처들은
왜 이렇게 흉하고 추하기만 할까
잠시도 한곳에 머물지 못하고 떠돌게 하던
감미로운 눈발이며
밤새 함께 새소리에 젖어 강가를 돌던
애달픈 달빛도 있었고
찬란한 꿈 또한 있었건만
내게도

―「고목을 보며」부분

 
   

그렇게 먼 길을 가면서 시인은 '이역'의 사람들을 보기도 하고, 지나간 옛 추억에 침잠하며, 그리운 사람들을 떠올리기도 하고, 이제는 "흉하고 추하기만" 한 제몸을 돌아보며, 지난 날에 품었던 '찬란한 꿈' 이루지 못했음을 한탄하기도 하면서, 천천히 죽음의 길을 간다. 그가 가는 길은 "무너진 성과 집 사이의 무성한 잡초 속"(「폐도(廢都)」)이기도 하다. 그 사이에는 "먼 세상과 나를 하나로 잇는 강물이, 그리고/가까운 세상과 나를 둘로 가르는 강물이." 흐르고 있기도 하다. '낙타'를 타고 가는 그 길은 '사막'이고, '무너진 성과 집'을 지나며, '무성한 잡초 속'이기도 하고, 그 옆으로는 "세상과 나를 둘로 가르는 강물이"(「나와 세상 사이에는」) 흐른다. 이 모든 것에서 죽음의 이미지를 끌어내는 것은 괴이한 일이 아닐 것이고, 시인에게 죄송스런 말씀도 아닐 것이다. 그가 우리에게 보내는 이 편지들은, 그 길을 가면서, 차분하게 마음을 정리하는, 마지막 편지, 마지막 시편들이 아닐까? 시인의 목소리가 귓가에 맴돈다. "세상은 즐겁고 서러워 살 만하다고"(「귀로(歸路)에」).

이번 시집의 구성을 보면, 시인의 죽음에 대한 정서를 강하게 내포하고 있는 시편들은 1~2부에, 그리고 3부에서는 파괴되고 오염되어가는 현대 사회에 대한 비판의 시편들을, 그리고 4~5부에서는 기행시편들을 모아두고 있다. 사실 그의 시편들은 기본적으로 '기행'으로부터 탄생하지만, 4~5부에 실린 시편들이 보이는 차이는 국내가 아닌 국외를 대상으로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거기에 담고 있는 정서와 메세지는 여는 시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시집 말미에 담긴 산문 「나는 왜 시를 쓰는가」에서 시인은 자신의 시 인생을 겸허히 토해내고 있다. "내 시가 우리 사는 일과 무슨 관계가 있는가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면서" "세상을 위해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시가 시시해지고 문학이 우스워졌"던 시에 대한 회의를 고백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웃들의 정서나 설움, 얘기 같은 것을 외면하지 않겠다는 생각"과 "시는 그 시대의 문제에 대한 질문이요 대답이라는" 시인 나름대로의 시에 대한 정의에 입각하여 "사람이 사람답게 살기 위한 조건을 만드는 데 일정한 부분 책임을" 지는 시를 쓰고자 했단다. 거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시인은 "더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는" 문학성 높은 시를 쓰고자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남이 알지 못하는 것, 남이 보지 못하는 것, 남이 만지지 못하는 것을" 찾아 끊임없이 헤매었다. 그런 그에게 결론은 "그 시대의 삶에 깊이 뿌리 박는 것으로 충분하지 그 이상의 해답은 있을 수 없없고, 오늘의 내 삶, 우리들의 삶에 충실한 시를 쓰자"였다. 그것이 시인의 길이었다고 말한다.

그런 점에서 이번 시집의 3부에 엮인 시들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시적 성취에서는 좀체 신경림 시인의 명성에 부합하지 않지만 말이다. 4부와 5부에 엮은 시편들은 이역 만리를 여행하면서 거기서 보고 느꼈던, "남이 알지 못하"고 "남이 보지 못"했던 것을 시로 풀어냈다. 그러나 거기에서 본 그 타국의 사람들의 모습 속에서도 "한 오십년쯤 전/안성 장터 어느 골목으로 사라지던/떠돌이 젊은 악사와 닮았다 그 어깨가./몇봉지 약을 팔기 위해 저녁 한나절 기타를 켜고는/절뚝거리며 골목으로 들어가던 그 어깨"를 바라본다. 우리네 삶과 그리 다르지 않음을 본 것이다. 어느 세상에서는 사는 모습과 애환과 설움은 비슷한 것이라는 이야기를, 그래서 서로가 서로를 의지하고 "사람답게 살" 만한 세상을 함께 만들어 가야 한다고 말하는 듯하다.

이번 시집에서 보여주는 그의 시편들은 지난 날의 그의 시들과 그리 다르지 않다. 그러나 왠지 모르게 노쇄해 보인다고 해야 할까? 간혹은 시적 성취는 좀 떨어져 보이는 것 같다(특히 3부의 시편들이 그렇다). 그러나 고희를 넘긴 시인이 써낸 시들은 그 나름대로 가치가 있고, 그가 세상에 대고 격없이 퍼붓는 비판들은 그만큼이나 힘이 있고 울림이 있다.(가령, "그 잘나고 힘센 사람들은 다 두고 제일 못나고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만 수만 수십만이 죽고 다치고 부서져야 했는가?"(「아, 막달라 마리아조차!」)라는 절규가 그렇다. 상투적이라고 누가 감히 말하겠는가? 노시인의 애틋한 절규에 대고.)

노시인 신경림의 마지막 시집이 될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가득한 이번 시집 『낙타』는 그래서 끝까지 안타까움으로 읽혔다. 마지막이 아니길 바란다. 그러나 한편으론, 이제 서서히, 우리도 이 노시인의 기나긴 시적 여정을 기릴 준비를 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 노시인이 무거운 걸음을 애써 옮겨가며 우리에게 전해 주었던 아름다고 낭만 넘치는 옛시인의 자취와 노래들에 감격했듯이, 우리도 이 노시인이 낙타를 타고 사라진 이후를 준비해야 하지 않을까? 끝내 자취도 없이 사라지고 나서는 찾을 수 없는 노시인의 아름다운 모습들을, 아직 우리 곁에 남아있는 이 행복한 순간에 많이 많이 남겨두어야 하지 않을까? 이제는 우리가, 이 노시인을 찾아갈 때다. 얼른, 출발하자. 시인을 찾아서, 신경림을 찾아서 말이다.

   
 

그러나 이번 시집 『낙타』의 시들을 쓰는 동안 나를 사로잡았던 가장 중요한 생각은 시 작업이야말로 세계화, 디지털 시대에 가장 적합하지 않은 일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모든 것이 빨리 변하고 쾌속으로 질주하는 속에서 시는 어쩔 수 없이 느린 걸음으로 걸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어쩌면 시는 언젠가는 버려질 방언 같은 것일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빠른 흐름 속에서, 또 세계의 말이 온통 하나로 통일되어가는 세계화 속에서 느린 걸음, 방언은 비단 무의미한 것은 아닐 터이다. 그 느림과 방언에서 오늘의 우리 삶이 안고 있는 갈등과 고통을 덜어줄 빛을 찾을 수도 있고, 병과 죽음을 몰아낼 생명수를 찾을 수도 있는 것이다. 나는 근래 두리번거리면서 느릿느릿 걸어 간다는 생각으로 시를 쓴다, 많은 사람들이 알아듣지 못하는 방언을 중얼거리면서.

―「나는 왜 시를 쓰는가」에서

 
   

아! 내 더 큰 바람은 이 노시인이, 이 큰 시인이, 빠르게 흐르는 세월 속에서도, 꿋꿋하게 버티었으면, "두리번거리면서 느릿느릿 걸어" 갔으면, "많은 사람들이 알아듣지 못"하더라도, 계속해서 이 아름다운 그의 "방언을 중얼거"려 주었으면, 그랬으면 좋으련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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