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의 시대 - 뉴스에 대해 우리가 알아야 할 모든 것
알랭 드 보통 지음, 최민우 옮김 / 문학동네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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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를 긴 이야기 속 아무데나 빠뜨렸다가 다시 재빨리 꺼내면서도 사건이 전개돼온 더 넓은 맥락에 대한 설명을 제공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언론이 우리 사회에 넘쳐나는 중요한 사건들을 기사화할 때 상습적으로 벌이는 일이다. (25~6쪽)

이 '사실'이 지닌 문제는 오늘날 신뢰할 만한 사실 보도를 찾는 데 전혀 어려움이 없다는 것이다. 정작 문제는 우리가 더 많은 사실을 알아야 한다는 데 있는 게 아니라, 우리가 접한 그 사실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모른다는 데 있다. 매일같이 새로운 뉴스가 쇄도한다. 우리는 스탠더드 앤드 푸어스가 국가신용등급을 재검토하고 있다는 사실, 정부 지출을 확대하는 법안이 가결됐다는 사실, 투표권 행사 제한이 위원회에 회부되었으며 천연가스 수송관 계획이 입안되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하지만 이런 것들이 진정 의미하는 바가 뭐란 말인가? 이 사실들은 정치적 삶의 핵심적 질문들과 어떻게 연결되는 걸까? 이 뉴스들은 우리가 뭘 이해하도록 돕는 걸까? (32쪽)

우리는 어쩌면 편향에 대해 좀더 관대해져야 할지도 모른다. 순수한 의미에서 편향은 사건을 평가하는 방법을 뜻할 뿐이다. 그리고 이는 인간의 기능과 활동에 관한 일관되면서도 근본적인 논지에 의해 인도된다. 편향은 현실 위를 미끄러져들어감으로써 더 명확하게 사건을 들여다보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한 쌍의 렌즈다. 편향은 사건이 의미하는 바를 설명하려 분투하고 개념이나 사건을 판단할 수 있는 가치의 척도를 제시한다. 편향을 벗어나려는 행동은 그 자체로 지나친 시도로 보인다. 오히려 우리의 임무는 편향된 시각이 생산한 더 믿을 만하고 유익한 뉴스에 올라타는 방법을 찾는 것이다. (33쪽)

언론이 칭찬받을 만한 지점은, 사실을 모으는 단순한 능력이 아니라 그 사실들의 타당성을 알아내는 (지적 편향을 통해 갈고닦은) 기술이다. (34쪽)

현대사회는 정치적 의지를 가진 사람들의 진을 빼는 데 검열보다 훨씬 더 교활하고 냉소적인 힘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가르쳐 준다. 이 힘은 사람들 대다수를 혼란스럽고, 따분하고, 정신 사납게 만들어 정치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일에 관여한다. 그리고 이는 가장 중요한 사안의 맥락을 대다수 대중이 단 한순간도 붙잡을 수 없도록 무질서하고, 복잡하고, 단속적인 방식으로 사건들을 보도하는 행위를 통해 이루어진다. (36쪽)

정치 뉴스가 따분하다는 대중적 인식은 결코 사소한 문제가 아니다. 뉴스가 프레젠테이션 기술을 통해 대중의 호기심을 불러일으키고 관심을 모으는 데 실패할 때, 사회는 자신의 딜레마를 붙들고 고심하는 일에 위험할 정도로 무능해지고, 따라서 사회를 변화시키고 개선하려는 대중적 의지도 결집될 수 없기 때문이다. (37쪽)

수없이 많은 버전의 '현실'이 존재한다. 결단력 있는 언론기관들이 포착할 수 있는 현실이란 매일 딱 한 가지밖에 없는 것처럼 굴면서 국가를 논하는 건 불가능하다. 뉴스는 스스로를 현실을 그려내는 권위 있는 초상화가라고 제시할지도 모른다. 뉴스는 실제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가 하는 대단히 난감한 질문에 답을 갖고 있다고 주장할지 몰라도, 현실을 있는 그대로 옮겨놓는 빼어난 능력은 없다. 뉴스는 어떤 이야기를 조명하고 어떤 이야기를 빼버릴지 선택하면서 단지 현실을 선택적으로 빚어낼 뿐이다. (50~1쪽)

뉴스가 제공하는 국가에 대한 소식들이 국가 그 자체는 아니다. (52쪽)

탐사 저널리즘은 집단과 개인을 파괴하는 모든 요인들에 대한 전방위적인 관심에서 시작해야 한다. 뉴스는 무엇보다 정신 건강, 건축, 여가, 가족 구조, 연애, 회사 경영 방식, 교육과정과 신분질서 등을 취재해야 한다. 이런 영역이 우리 삶에 미치는 영향은 의회에서 일어나는 사건들보다 결코 적지 않기 때문이다.
뉴스는 국가가 겪는 문제의 뿌리가 상류층의 범죄행위에 근본적인 기원을 두고 있다고 상상하도록 부추긴다. 물론 언론은 개개의 썩은 사과를 겨냥할 임무를 분명 지니고 있지만,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합의 내부에 은폐된, 눈에는 띄지 않지만 훨씬 큰 제도적 실패에도 주의를 돌리도록 우리를 이끌어야 한다는, 마찬가지로 필수적인 책무 또한 지니고 있다. (74~5쪽)

뉴스의 가장 고귀한 약속은 무지를 줄이고 편견을 극복하게 하여 개인과 국가의 지성을 끌어올릴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는 것이다. (79쪽)

플로베르는 신문을 증오했다. 신문이 독자로 하여금 정직한 사람이라면 결코 타인에게 떠넘기는 데 동의하면 안 되는 어떤 임무를 그렇게 떠넘기도록 부추긴다고 확신했기 때문이다. 그 임무란 바로 생각하기이다. 언론은 이제 중요한 문제에 대한 복잡하면서도 지적인 논평을 생산해내는 일을 자기네 직원들에게 안심하고 맡길 수 있다고, 독자들의 정신은 각자의 특별한 여정, 탐구, 성찰을 멈추고 그 일들을

개개의 뉴스들 역시 뉴스 브랜드의 비호 아래 전달됨으로써 힘을 얻는다. 탁자 맞은편에 앉은 사람이 제기했다면 우리가 보다 철저하게 검토하려 들었을 의견들이 특정한 언론사 이름 아래 있기만 하면 거의 신화적인 힘을 획득할 수 있다.
전쟁을 벌이는 이유에 대한 기사가 신고딕풍 첼트넘 서체의

좀 지나칠 정도로 고르게 합의된 듯 보이는 관점과 맞닥뜨릴 경우, 플로베르의 마음속에서 경종이 울렸듯 우리 마음속에도 경종이 울려야 한다. 우리는 가장 아름다운 서체와 가장 권위적이며 믿음직한 헤드라인 아래 숨어 있을지 모를, 잠재적으로 심각한 바보짓에 대해 항상 회의적인 태도로 경계 태세를 유지해야 한다.
플로베르가 문학적 상투어에 대해 그랬던 것처럼 우리는 미디어의 상투어에 눈을 부릅뜨고 대해야 한다. 전자는 소설을 파멸시키고, 후자는 국가를 파멸시킬 수 있다. (89쪽)

우리가 다른 곳에 대해 알고자 하는 욕구를 모두 잃은 건 아니다. 우리는 아주 예전에는 이른바 이국 땅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들으려고 줄까지 섰던 생명체들이다. 문제는 현대의 뉴스 매체가 발전시킨 보도 방법론(다른 방법은 거의 모두 배제한 채, 정확하고 기술적으로 신속하지만 비인간적인데다 위기에만 초점을 맞춘 보도 방침)이 일조의 세계화된 배타적 편협함 속으로 잘못 빠져들었다는 점이다. 그로 인해 우리는 정말 많은 것들을 알지만 실제로 그에 대해 별 관심을 기울이지 않게 되었고, 잘못된 종류의 얕은 지식이 우리 호기심의 범위를 확장시키기보다는 좁혀버렸다. (108쪽)

이카로스를 주목한 사람은 많지 않았다. 하지만 화가가, 그리고 이제 시인이 주못했다. 이를 통해 오든이 우리에게 말하고 싶은 것은 바로 예술가가 하는 일이다. 예술가들은 하찮은 것에 주목한다. 작고 눈에 띄지 않는 것, 다른 사람들(쟁기질하는 사람과 목동, 여러분과 나, 그리고 바쁜 저널리스트)이 놓치고 지나가지만 우리의 무관심과 냉담함을 거두도록 하는 데 있어 본질적인 것 말이다. (129쪽)

우리를 침묵시키는 건 경제의 규모만은 아니다. 그것이 가진 복잡성도 우리를 입다물게 할 수 있다. 선진 경제지역 인구의 극소수만이 자신들이 속한 경제 체제가 작동하는 방식에 대해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다. 우리 대부분은 차익거래, 바젤1과 바젤2, 주기적으로 조정된 경상예산, 주가수익률이나 양적완화 같은 핵심적 경제 용어들 속에서 정확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파악하려면 꽤나 골치 아플 것이다. (151쪽)

어른이 된다는 건 수많은 희망을 단호하게 묻어버리는 법을 배우는 것이기도 하다. (155쪽)

뉴스라는 렌즈를 통해 보게 되는 경제 '논쟁'은, 대중의 기대와 무엇이 가능한가에 대한 대중의 감각 모두를 엄격한 통제선 안에 가두고 그 밖으로 넘어서지 못하게 한다. 누군가 그런 의제에서 벗어나려 하면(예를 들어 주주란 무엇이고 어떤 존재여야 하는지 다시 생각해보자고 하거나 성장과 복지의 상관관계에 의문을 품는다거나 하면) 갑작스레 '급진적'이라 간주되고 따라서 우습게 여겨지고 만다. 우리가 오늘날 당연히 여기는 것들 대부분(최저임금, 아동 보호, 환경 정책)이 처음에는 미친 것까지는 아니더라도 완전히 급진적으로 보이는 것으로부터 시작돼 '합리적인' 의견으로 정착된 것인데도 말이다. (159~60쪽)

경제 뉴스는 덜 불안하고 덜 파괴적이면서 더 안전하고 의미 있는 노동이 가능한 세상을 향한 큰 꿈에 궁극적인 책임을 지고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160~1쪽)

기자들은 숫자 뒤에 감춰진 세상을 보아야 하고, 자본주의를 시각적이고 감각적인 현상으로 인식해야 하며, 오싹할 정도로 질서정연한 사무실과 제조 시설의 살균된 아름다움을 탐구해야 할 것이다. (169쪽)

기억해야 할 것들은 다음과 같은 사실이다. 이 제품들은 (당연히) 무척 싸지만, 그건 찬쿤 실업이 엄청 대단하거나 똑똑해서가 아니고, 또한 현대 기술이 굉장히 기발해서도 아니라는 것이다. 제품 가격이 싼 근본적인 이유는, 경제학자들이 '가격결정권 결여'라고 점잖게 표현하지만 절망이라고 규정짓는 것이 더 솔직하게 느껴지는, 샤먼 시 노동자들을 처절한 고통 속에 몰아넣은 노동 조건에 있다. (173쪽)

우리가 선망하는 대상에서 정확히 어떤 점이 흥미로운지 좀더 분명하게 알도록 노력해야 한다. (18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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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신의 오후 - 남자, 나이듦에 대하여
우에노 지즈코 지음, 오경순 옮김 / 현실문화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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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신(獨身). 홀로 산다는 것인데, 아 참 외롭겠다, 한다, 다들. 이라는 한자도 참 모나게 외롭게 모질게 괴팍하게 생겼다. 은 일단은 혼자라는 뜻인데, 이 혼자라는 것은 비정상적이라는 뜻인지도 모르겠다. 홀로만 특이한 것이 독특인데 여기에도 을 쓰니 말이다. 결혼을 하지 않고, 가족과도 떨어져 혼자만이 사는 것은 특이하다는 인식, 어쩌면 찌질하다는 인식이 이 단어의 뜻에 들어가 있는 듯도 싶다. 독신은 또한 불쌍하다. ‘돕는 사람이 없다는 의미가 이 에 담겨있다.

늙어서 자식이 없는 사람을 이라 했고, 남편이 없는 여자를 이라 했으며, 자손이 없는 이도 이라 했다. ‘개싸움’, ‘원숭이를 잡아먹는 큰 원숭이’, ‘고립된 산’, ‘외발이’, ‘짐승 이름’. 이 모두 에 담긴 뜻이다. 하나 같이 괴상하기만 하다. 지금까지의 독신은 이렇게 괴상한 존재였다. 나도 어쩌면 이 괴상한 존재가 되어 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언제부터를 이라 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현재는 분명 이니 말이다.

현재까지 이 세상에서 만으로 34년을 넘게 살았다. 몇 달 후면 35년을 채운다. 세상의 기준으로 결혼 적년기이거나 지나고 있거나, 이다. 그런데 30년을 넘으면서는 주변에서 언제 독신을 면하느냐고 아우성이다. 그걸 내가 어찌 알겠느냐 만은, 과연 이것을 면해야만 하는 것이지도 나는 아직 의문이다. ? 남과 다르지 않기 위해서? 자식과 자손을 위해서? 어디 가서 개처럼 싸움질이나 할까봐? 누구를 잡아먹을 지도 모르니까? 다시금 짐승이 될까봐? 그리들 염려인가?

혼자서는 할 수 없는 것이 많지만 할 수 있는 것도 많다. 그런데 혼자가 아닌 이들에겐 할 수 있는 것들뿐일까? 독신을 면한 이들에게 해야 할 것이 태산이고 해서는 안 될 일들도 가득하며 피곤한 일들의 연속임을 주변의 비독신자들에게서 본다. 그럼에도 무엇이 독신을 비참하게 하는가? 그 무엇이 독신을 비정상인 쯤으로 여기게 하는가?

이 책에 의하면 현재 30대 비혼남이 세상 끝날까지 혼자 살 확률은 3분의 1이다. 3명 중의 1명이 나일 가능성은 농후하다. 걱정스럽기도 하지만 덤덤하기도 하고, 혼자면 어때 싶기도 하고, 외로울 것 같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나는 독신주의자는 아닌 듯하다. 결혼을 생각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독신을 생각한 것도 아니다. 그런 걸 생각할 여유도 이유도 그리 없었으니까.

<독신의 오후>란 책에 눈길을 준 것은 주변의 흔한 인사말도 있었지만, 결혼이란 걸 해야하나보다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이대로 혼자 사는 것은 어떨까 하는 생각도 들고 해서일 것이다. 중년 혹은 노년의 독신 여성이 들려주는 남자들의 독신이야기? 아니 독신 남자들의 노후 대비서? 그래, 내가 독신으로 산다면 늙어서 어떻게 될까, 하는 궁금함이, 독신의 선배가 들려주는 노하우를 엿보고 싶은 욕심이, 여자가 뭘 안다고 독신 남자에게 조언일까, 하는 호기심이 이 책에 관심을 가지게 한 것이다.

결론적으로 이 책은 처음엔 독신도 괜찮아 하는 응원과 격려였다가, 나중에는 독신도 쉽지 않네 하는 걱정 반 두려움 반의 충고가 되었다. 3분의 1이 독신으로 산다는데, 더 이상 은 특이하다에 붙여 쓰면 안 될 만큼 보편성을 가질 텐데 독신이 뭐 어때? 독신을 자네에게 권하네, 하고 어느 독신의 일본 할머니께서 나에게 권한다. 그런데 남자 독신은 여자 독신에 비해 진짜로 찌질하게 살기 쉽거든, 그러니 내가 가르쳐주는 방법을 잘 익히고 연습하시게, 하는 친절한 음성이 귀에 들린다. 독신으로 찌질하게 사는 남자들의 예가 어쩌면 나의 오후가 아닐까 하는 강한 확신이 드는 터라, 이 할머님의 충고를 되새기고 되새겨서 찌질을 면해야겠다는 결심을 하려던 찰라, 두려움이 엄습해 오고야 만다.

이 책은 전반적으로 독신의 오후’, 그러니까 젊은 독신이 아닌 늙은 독신에 큰 관심을 둔다. 그런데 오후에서 조금 시간이 더 흘러 저녁을 넘어 한밤중으로 깊이깊이 들어가 늙고 병들어 죽기 직전의 독신에 더욱 신경을 쓰고 있다. 인간은 곱게 죽지 않는다고. 죽기 직전의 독신을 염려하는 대목들이 많다. 어익후! 내가 독신으로 늙으면, 날 간병해 줄 사람은 누굴까? 시설에 들어가 정말 골골대고 죽을까? 아직은 생각하기 싫지만, 독신으로 산다면 생각하지 않을 수 없지 않을까? 그래서 이 책은 그 때를 준비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독신으로 어떻게 하면 재밌게 살 수 있을까가 아니라, 독신으로 죽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할까를 말하는 책이라고나 할까?

결국은 두려움이 강하게 마음속에 흐른다. 그래서 결혼을 해야겠다, 생각을 하면, 저자는 결혼하고 나서도 혼자가 될 거야, 그러니 사람은 누구나 독신의 오후를 준비해야겠지, 하고 말한다. 어익후! 이 책의 제목은 독신의 오후라는 비유적인 표현보다는, ‘독신으로 죽음을 준비하는 방법정도로 직접적으로 고치는 것이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인문보다는 실용서에 포함시켜야 할 정도로.

나는 아직 독신의 오전쯤일터이다. 좀 더 쓰다면 정오로 하자. 그러니 아직은 오후는 아니다. ‘독신의 오전이란 책이 필요했던 것이다. 저자에게 오전도 요청해 볼까? 여기에는 아마도 섹스의 문제를 따로 한 장 이상 담아야지 싶다. ‘오후에서는 부족했던 부분이다. 더불어 경제적 준비에 대한 문제도 심도 있게 다루어야지 싶다. 독신으로 재밌게, 멋지게 살자! 더불어 죽을 날도 대비하자! 그런 책이 나와야겠지 싶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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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파 마피아
토마스 키스트너 지음, 김희상 옮김 / 돌베개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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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FA[Federation Internationale de Football Association]는 우리말로는 '국제축구연맹(國際蹴球聯盟'으로 번역된다. "세계 축구의 중심이 되는 국제조직."이라고 DAUM 백과사전에서는 소개하고 있다. 자세한 소개를 보자

한 나라를 대표하는 단일 축구협회만이 가맹할 수 있으나 영국만은 잉글랜드·스코틀랜드·웨일스·북아일랜드의 4개 협회가 각각 회원국으로 승인되었다. 회원국은 2002년 1월 현재 204개국이다. 목적은 경기 추진, 각국 협회간 우호증진, 경기규칙의 준수 등이다. 4년마다 열리는 세계선수권대회(월드 컵 축구대회)를 주관한다. 조직으로는 최고 의사 결정 기구인 총회와 집행위원회, 집행위원회를 자문하는 18개의 상설위원회가 있다. 총회는 2년에 1번씩 개최되며 FIFA 정관 개정, 재정·회계 승인, 회원국 승인 등 FIFA의 주요 사항을 결정한다. 집행위원회는 회장과 7명의 부회장, 16명의 위원으로 구성되며 FIFA 사무의 대부분을 처리한다.

 

UN, 즉 국제연합 가입국이 현재 193개국이라고 위키백과에 나와 있는데(몇 년도 기준인지는 모르겠음.), 피파는 2002년에만 204개국이 가입되어 있다. 명실상부 세계적 기구임에 틀림없다. 세계 축구의 모든 것을 총괄하는 이 단체의 구성은 위와 같다. 회장 1명과 부회장 7명, 그리고 위원들. 그리고 사무총장. 이 사람들은 세계 축구의 수뇌부가 되겠다. 그런데, 이 책 <피파 마피아>에 의하면 결국은 회장 1명 뿐이다. 나머지는 들러리, 꼭두각시, 하수인 등등에 지나지 않는다. 과연 이 국제적 기구가 이럴 수가 있을까? 이 책의 내용이 과연 진실일까? 의심이 들지 않을 수 없다. 진실이라면 이건 코미디다. 저자는 이러한 작태를 마피아에 견주고 있는데, 책을 읽으면 마피아도 이 정도는 아닐 것 같다. 그들도 나름 조직의 체계는 있을 터.

 

정말이지 이 책의 내용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국제축구행정을 책임지는, 세계적인 축구 축제를 주관하는 피파가 과연 이렇게 주먹구구로 운영되는지, 회장이라는 사람의 독단과 독선이 이렇게 오랫동안 작용할 수 있는지, 그게 국제기구인지, 믿기지 않는 이야기 뿐이다. 그렇다고 믿지 않을 수 없는 건, 지금까지 피파의 역사를 보면 또 얼추 맞지 싶다.

 

이들은 축구의 축자 정도만 알고 있는 것 같다. 진정한 축구, 진정한 축구팬을 외면하고 이들은 돈과 권력 맞는 쫓고 있다. 그런데 몇 십년이 지나도 바뀌지 않는다. 왜일까? 왜일까 보다 그게 어떻게 가능할까? 가 더 궁금하다. 개선의 여지도 보이지 않는다. 이 책에서도 개선의 방법을 제시하지는 않는다. 아마도 이책은 그 주먹구구 마피아들을 고발하기 위한 목적만을 가지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세계의 축구팬들은 이 축구를 이용한 돈과 권력의 노예들, 축구 정치가들에게는 전혀 관심이 없는 것이 사실이다. 그저 축구를 좋아할 뿐. 그것을 자기들 멋대로 이용하고 치부의 수단으로 이용하는 이들을 어떻게 벌할 것인가?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이 곧 우리에게 알게 모르게 피해로 다가올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떤 방법이 있을까? 오늘부터 축구를 보지 말자? 이 책을 읽는 내내 그것이 무척 답답했다.

 

저자의 고발에서 약간은 불편한 점도 있었다. 우리 대한민국의 4강 신화에 얽힌 음모론 등도 불편했지만, 그보다는 아프리카나 소수 국가의 축구협회에 대한 약간의 비하의 시선을 느꼈기 때문이다. 거대한 축구 인프라를 갖춘 독일의 축구협회와 축구장도 변변히 없는 국가의 축구협회가 동등한 투표권을 행사하는 것을 무척 부정적으로 보는 저자의 시선은 무척이나 불편하다.

 

피파는 국제기구이기 때문에, 그리고 스포츠단체이기 때문에 느슨한 감시를 받을 수 밖에 없다. 외부의 어떤 압력도 거의 받지 않는다. 돈의 압력만 빼고. 오히려 축구를 이용하여 외부에 압력을 행사할 뿐이다. 결국의 자체의 정화만이 해결책이지 싶은데, 요원한 길이 분명하다. 어찌해야하나 어찌해야 하나. 답답하다. 그저 축구만 재밌게 보면 그만일까? 잘 모르겠다. 토마스 키스트너 같은 사람들이 이러한 문제들을 모든 이들에게 알리는 노력을 계속한다면 무언가 바뀌지 싶다. 지금으로선 그러는 수밖에 없지 싶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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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자와 하녀 -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마이너리티의 철학
고병권 지음 / 메디치미디어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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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철학이 일상의 삶과 무관하게 저 하늘의 별만을 보는 것이라면 가난한 사람들이 지적하듯 철학은 한가한 일이나 쓸모없는 일이 되어버린다. 하지만 가난한 사람들이 떠받드는 현실 감각 역시 그들 자신을 빈민으로 양산하는 현실에 대한 추인에 불과하다면 그것은 노예의 자기 위안에 불과할 것이다. 이처럼 철학과 가난한 사람이 대립하는 곳에서는 철학도 불행하고 가난한 사람도 불행하다. 철학은 기껏해야 현학적 유희이거나 비현실적 몽상에 불과한 것이 되고, 가난한 사람은 현실 논리를 재빨리 추인함으로써 영리한 노예, 성공한 노예가 될 뿐이기 때문이다.

  서로 조롱하고 적대하면서 철학과 가난한 사람이 함께 불행하다면, 역설적이게도 각자의 구원은 서로에게서 오는 게 아닐까. 삶의 절실함과 대면하면서 철학자는 새로 철학을 배우고, 앎의 각성을 통해 가난한 사람들은 삶을 새로 살지 않을까. 나는 이런 생각을 해보았다. 위대한 탈레스를 재치 있게 조롱했던 총명한 하녀가 어느 밤 다락방 창문을 열고 밤하늘의 별을 보았다면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 

 

철학이란 무엇인가? 이 거창한 물음에 역시나 거창하게 혹은 선문답처럼 대답을 내어놓을 이들은 역시나 철학자들이다. '인생이란 무엇인가?' 혹은 '문학이란 무엇인가?'처럼 분위기 잡고 썰을 풀어나가면 뭔가 있어보이는 듯한 이 물음. 소크라테스가 어쩌고, 플라톤이 어쩌고, 공자, 맹자, 노자 타령을 늘어놓아야 왠지 있어보이는 듯한 느낌. 어느 순간에 우리는 '철학하고 앉아 있네'란 욕 아닌 욕을 듣게 마련이다. '철학하고 앉아 있네' 이것은 과연 욕인가? 역시나 여기에 담긴 의미는 쓸데없는 헛소리를 짓거리는 이들에 대한 비하를 담고 있다. 이것이 오늘날 철학의 현실과 그리 다르지 않은 듯 하다.

 

나름 문학에 종사하는 나에게 문학 또한 이 철학의 현실과 크게 다르지 않다. 시가 어쩌고 소설이 어쩌고, 시를 쓰고 자빠졌고, 소설쓰고 자빠졌네는 욕에 다름 아닌 현실. 결국 여기에는 '불필요함'의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철학이라는 것이, 문학이라는 것이 일상과는 저멀리 떨어져있어 하등의 쓸모를 갖지 못하는 현실. 어쩌면 이것은 우리가 미개하고 무식하여 그 쓸모를 알지 못하고 멀리하고 있다고 탓할 수도 있겠지만, 과연 그렇다고만 할 수 있을까? 무식한 우리들의 탓일까?

 

고병권은 이 책에서 이런 물음에 답하려 한 듯 하다. 무식의 하녀만의 탓이 아니라는 다정한 대답이 나온다. 일종의 양비론을 펴고 있다. 일상을 저버리 철학과 철학자도 나쁘고, 철학을 버리고 사는 일상의 하녀도 나쁘다. 일상과 철학의 조화를 바라고 추구하는 듯하다. 그래! 좋게 보면 좋은 말이고, 맞는 말이다. 일상의 철학, 이름하여 실용철학이라고 해야 할까?

 

그러나 나는 고병권의 의견에 일부분 반대한다. 어찌 하녀를 탓할 수 있을까? 전적으로 철학자를 탓해야 옳다. 그들이 남겨놓은, 고병권의 말대로 일상을 저버린 철학을 탓해야한다. 그들의 철학이 우리의 일상에 어떠한 영향도 미치지 않았기에 그것은 쓸모 없음으로 우리 하녀와 같은 이들에게 인식되었고, 괜한 소리를 짓거리면 '철학하고 앉아 있네'란 수모를 당해야만 했던 것이 아닐까? 일상을 포용한 철학, 일상을 변화시키는 철학을 철학자들이 먼저 내어놓는다면, 우리 하녀와 같은 이들은 어느 순간에 모두다 이 철학을 하고 앉아 있을 것이다. 왜? 이 철학이 우리 삶에 이렇게 필요하니 말이다.

 

고병권은 <철학자와 하녀>에서 이러한 일상의 철학을 말하고 있다. 일상과 우리의 생활과 우리의 삶의 장소에서 발견한 철학, 저 높은 곳에서의 고담준론이 어떻게 우리의 일상에 적용될 수 있는지를 짧게나마 직접 보여주고 있다. 그래서인지 짧막한 글에서 느끼는 바가 많다. 내 머리속에 명쾌함을 심어주는 표현도, 금과옥조같인 메모해두고 두고두고 보고 싶은 글귀도 많다.

 

그러나 고병권의 이 글은 우리 일상에 복무하는 철학일까? 과연 실용철학이라고 할 수 있을까? 우리 무지의 하녀들이 이 글을 읽고 철학하게 만들 수 있을까? 아니라고 본다. 그가 보는 일상은, 그가 겪은 경험은, 그가 돌아본 세계는 아마도 대다수의 하녀들이 보지 못한 곳, 가지 못한 곳, 겪지 못한 경험일 뿐이다. 더 낮은 세계로 임해야 하지 싶다. 별은 3개 반 정도만 주고 싶었다. 그러나 반개는 없어서 인심쓰고 4개를 준다. 그가 낮은 세계의 철학을 했으면 하는 바람이 담긴 별 반개를 더한 것이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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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틀러의 철학자들 - 철학은 어떻게 정치의 도구로 변질되는가?
이본 셰라트 지음, 김민수 옮김 / 여름언덕 / 2014년 5월
평점 :
품절


따져야 할 것은 따져 물어야 한다. 따져야 할 것을 제대로 따져 묻지 않은 우리 사회의 현실은 어떠한가? 불신과 반목과 거짓의 병폐가 넘치지 않은가? 흔히 우리에게 독일은 달랐다. 독일은 아무래도 따져야 할 것을 제대로 따져 물었다고 알았다. 하지만 이본 셰라트의 이 책을 보면 여전히 제대로 묻지 않은 문제들이 남아 있었다. 어쩌면 단호히 따져 묻기 어려운 문제였을지도 모르겠다. 철학이라는 것이 그런 종류의 문제다.

 

이본 셰라트는 히틀러의 범죄에 부역한 철학자들을 추적하여 아직 그들에 대해 따져 물어야 할 것을 제대로 따져 묻지 않았다고 강조한다. 그 중점에 하이데거와 슈미트가 있다. 이본 셰라트는 이들을 주 타깃으로 하는 듯 하다. 하이데거가 히틀러 정권에 부역했다는 의심은 대중적으로도 많이 알려져 있는 사실이다. 하지만 그 혐의가 어느 정도이고 그것으로 인해 하이데거가 어떠한 처벌을 받았는지는 그리 알려져 있지 않다. 이본 셰라트는 하이데거의 과오가 큰데 반해 그 행위에 대한 처벌은 거의 없었다고 말한다.

 

이 책의 부제는 "철학은 어떻게 정치의 도구로 변질되는가?"다. 그렇다면 하이데거의 철학이 어떻게 정치의 도구로 변질되었는가를 따져야 하지 않았을까? 이본 셰라트가 들고 있는 하이데거의 부역의 증거들은 그의 편지들, 그의 글들, 그의 침묵들(히틀러의 반인권적 반학문적 반철학적 박해들에 대한)에 지나지 않는다. 그의 철학이 어떻게 히틀러 정권에 이용되었는지를 묻고 따져야 하지 않았을까?

 

하이데거의 과오에 대한 처벌이 적절하지 못했다고 지적하는 것은 가능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지금에 와서 부관참시라도 해야겠다고 나서는 것은 어리석은 것이 아닌가? 이 책을 읽으면서 이본 셰라트가 오늘날 이 히틀러의 부역자 하이데거가 얻은 철학적 지성으로서의 전세계적 명성이 못마땅해 하는 느낌을 받았다. 그렇다고 하이데거가 남긴 그의 철학사상을 폐기해야 할까? 그의 책을 금서로 지적해야 하는 걸까? 그것은 또한 히틀러의 방법과 무엇이 다를까?

 

나는 이본 셰라트가 더 정확히 따져 물어야 했다고 본다. 이 책의 부제처럼 말이다. 하이데거의 철학이 히틀러에게 어떻게 도움이 되었고, 이용되었는지를 조목조목 따져서 밝혀야 했다고 본다. 그것이 인정되었을 때 그의 철학은 자연스레 폐기되고 말 것이 아닌가? 그것이 아니라면, 그의 철학은 철학대로 두어야만 했다. 이본 셰라트가 지적하고 있는 하이데거의 오점은 그의 철학이 아니라 처세에 있다. 그런 점에서 '히틀러의 슈퍼맨'이란 칭호가 하이데거에 적절한지는 의문이다.

 

해켈은 범유럽 차원의 '일원론자 동맹(Monist League)을 결성하고 인간이 생물학 법칙의 지배를 받아야 한다고 강연했다. 인종의 순수성에 대한 해켈의 집착은 갈수록 커졌으며 아리안 인종의 힘을 보호하기 우해 우생학을 제시했다. 생물학을 따르지 않는 사회는 약한 사회가 될 것이라고 해켈은 역설했다. 그는 아픈 사람의 수명을 연장하기 위해 약을 쓰는 것은 자연선택을 방해하는 행위라고 주장했다. 하층민, 병자, 장애인, 걸인, 부랑자, 범죄자에게는 현대의학과 번식할 권리를 허용해서는 안 된다. 더구나 이들 약자는 인간을 오염시키고 인간의 생존을 위협한다. 따라서 해켈은 대량 안락사를 주장했다.

"악으로부터의 구원은 고통 없고 효과 빠른 독약에 의해 완수되어야 한다."(96~7쪽)

 

해켈의 이 말도 안되는 우생학은 "훗날 국가사회주의의 핵심 전제"가 되었다. 오늘날 이 우생학은 폐기되었다. 해켈의 사상은 히틀러의 인종청소, 유대인 박해에 핵심 전제가 되고 그것의 타당성을 뒷받침하는 사상이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해켈과 그의 사상의 히틀러와 함께 종료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하이데가의 사상 또한 그러한가? 그것에 대한, 즉 하이데거의 철학에 대한 문제점을 이본 셰라트의 이 책이 적절히 지적하고 있지는 못한 듯 하다.

 

이 책에서 읽은 만한 대목은 차라리 제2부에 묶인 '히틀러의 적들'이다. 발터 벤야민, 테오도어 아도르노, 한나 아렌트 등 오늘날 그 이름도 찬란한 이 철학자들에 대한 이야기에 오히려 더 빠져들었다. 개인적으로 이 책은 앞부분을 제외하고 '히틀러의 적들'이란 제목으로 이 철학자들에 대한 자료를 보강하여 펴내는 것이 더욱 좋았을 것이라 생각한다. 오히려 이들이 '히틀러의 철학자들'이 아닐까? 반어적, 역설적 의미에서 말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는 강만준이 생각났다. 강만준의 책만큼이나 주가 많이 달려있다. 다양한 자료를 찾았다는 이야기인데, 이것은 달리말하면 이본 셰라트가 하이데가 등의 철학적 문제, 즉 그의 철학이 어떻게 변질되었는지를 논박하지 못하고 있음을 말해주는 것은 아닐까? 곳곳에 흩어져 있는 인물의 행적을 추적하고 자료를 정리하는 능력을 보여줄 뿐이다. 그러하기에 위에서 말한 것처럼 히틀러의 적들이 어떻게 고통받았는지를 보여주고 있는 부분이 돋보이게 된 것이 아닐까?

 

이 책은 다큐로서 의미가 있다. TV프로그램으로 만들어 지면 더욱 좋았을 뻔 했다. 소설적 묘사도 제1부와는 그다지 어울리지 못했다. 오히려 제2부와 어울려 보다 감동적으로 읽히게 만들 뿐이다. 아쉬운 부분이다. 그러나 더욱 아쉬운 것은, 아니 부러운 것은 독일의 문제에서 아직 제대로 따져 묻지 못한 것이 철학의 문제 정도라는 것이다. 우리 사회가 더욱 한심해 보이기만 하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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