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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의 탄생 ㅣ 우석훈 한국경제대안 4
우석훈 지음 / 개마고원 / 2008년 9월
평점 :
품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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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 마태복음 7: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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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박 정부가 들어선지 1년이 넘었다. 지금으로부터 1년 전, 온 나라가 "경제를 살리자"는 구호 아래 저마다 "경제! 경제!"를 외쳤고, 지금의 이명박 정부를 탄생시켰다. 이명박은 "경제, 경제"를 외쳤고, 과연 '천국'에 들어간 것이다. '경제'는 우리사회의 오랜 숙명이요 정의다. "잘 살아보자"는 구호는 수십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유효했고, 이명박의 리바이벌 속에 새 정부를 탄생시켰다. "잃어버린 10년"에서 잃어버린 대상은 무엇보다 '경제'였고, 우리는 저마다 '경제'를 염원했다. '천국'으로 들어간 이명박은 그 잃어버린 '경제'를 찾아주마 하고 굳게 약속하고, 천국의 집, '청와대'에 입성한 것이다.
세계적 경제 위기 속에서 우리 사회는 휘청대고 있다. 모든 뉴스가 전하는 소식에 대다수의 사람들은 울고 있다. 고등어니 갈치니, 반토막이니 다섯토막이니 하는 소리가 씁쓸한 개그로 다가오는 것은 우리네 해학인지 모르지만, 듣는 이에 따라서는 자조적 풍자의 칼날에 상처를 입고 있을 것이다. 누구든 오늘날의 경제(상황)을 말하며, 죽을 지경이라 하소연 하지만, 저마다 말하는 그 '경제'는 엄밀한 의미에서 차이가 있는 것 같다. 우선, 나의 경우 경제는 여전히 소원한 대상일 뿐이다. 세계 경제의 위기가 현재로서는 내게 직접적으로 준 폐해는 없어 보인다. 그렇다고 이것이 나와는 무관한 것이라고 하기에는, 우리 사회가 어떤 식으로든 '경제'에 엮여 있음을 인정해야만 하겠다. 한갓 어린아이에게도 그 책임여하에 관계없이 경제는 치명적일 수 있는 것이니까.
사실 '경제'라고 하는 것에 나는 학문적으로나 현실적으로 관심 밖의 것이었다. 그런 점에서 오늘날의 경제 위기를 대하는 나의 자세는 여전히 관망이다. 쏟아지는 경제 위기 뉴스에 지겨워하며, '거 좀 잘 하지"라고만 생각할 뿐이다. 이런 나에게 누군가는 비난할지 모른다. 우리는 경제와 직·간접적으로 무관치 않기에, 그저 관조하고 관망하는 것은 무책임한 것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내가 무엇을 하여 이 경제를 살릴 수 있단 말인가?
'경제(經濟)'라는 것은 '경세제민(經世濟民)'의 준말이라고 한다. "세상을 다스리고(경영하고), 백성을 구제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여기서 '經'은 '治'와 통한다. 그런 점에서 이 '경제'란 말은 다분히 지배자의 입장에서 국가를 운영하고 백성을 다스리는 것을 의미한다. 유교적 사회에서 '경세제민'은 하나의 왕도였던 것이다. 이것은 근대 민주적 성격의 사회에서 추구되어야할 '경제'와는 사뭇 다른 양상을 보인다고 하겠다. 그렇다 하더라도, 오늘날의 '경제'가 최소한의 '경세제민'을 이루고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다행이라 할 것이다.
서양에서 'Economy'라 하는 것을 우리는 '경제'라고 번역했다. 그런데 이 단어의 어원을 찾아보면, 그리스어의 'oikos'와 'nomia'의 합성으로, "집을 관리하다"의 의미였다. 달리 말하면 '가정살림'이라고 직역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것은 '절약'의 의미가 강조되고 있는 단어라고 할 것이다. 이 단어가 우리에게는 '경제'라고 번역되지만, 이런 점을 미뤄볼 때, 서양의 'Economy'는 '제(濟)'에 해당된다고 하겠다.
여러 점에서 동양의 경제와 서양의 'Economy'는 다른 면모를 보인다. 근대적 성격의 경제는 서양에서 들여온 것이지만, 오늘날의 경제는 또 이와는 다른 양상과 모습을 보이는 것 같다. '경제'에 대한 학문적 정의로서 "생산, 분배, 소비의 순환으로 이루어지는 부의 사회적 재생산 과정"이라는 것도 현실적 경제와는 정확히 부합한다고 보기도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한국사회에서만 보더라도 이 '경제'의 의미는 계층, 세대, 지역, 계급 등에 따라 저마다 다른 것 같다. 경제적 여건에 따라 계층을 구분할 때, 부유층, 중산층, 서민층, 빈곤층 등으로 나는다면, 이들에게 의미하는 '경제'는 천차만별이다. 서민, 특히 빈곤층에게 '경제'는 하루하루를 연명할 수 있게하는 그 어떤 것인 반면, 중산층에게 경제는 현 상황을 유지하면서 좀더 재산을 늘리고, 보다 풍요로워지는 것을 의미한다. 반면, 극소수의 부유층에게 경제는 어떤 의미일까? 나는 쉽사리 상상하기 어렵지만, 이들에게 '경제'는 곧 '자신'이 아닐까 싶다. 돈과 권력을 자유자재로 부리고 이 사회를 지배하며, 절대자가 되게 해주는 것이 곧 이들에게 '경제'의 의미이다.
이명박 대통령이 목도리를 건네준 그 시장 아주머니에게 경제는 무엇일까? 배추 파는 아주머니에게 경제는 배추 한 포기를 더 파는 것일테고, 국밥집 주인에게 경제는 국밥 한 그릇 더 파는 것일테다. 강남의 복부인에게 경제는, 땅을 사랑하는 것이고, 부동산 가격이 상승하는 것이다. 오늘날 직장인들에게 경제는 주식과 펀드가 대박을 터트리는 것이다. 이것은 "경제를 살려야 한다"는 대명제가 지니는 각각의 모습들이다.
이명박 정부가 "경제를 살리겠다"는 약속은 지난 1년간 급하게 진행되고 있다. 분명히 그들은 약속을 지키고 있다. 이들은 '경제'를 살리겠다고 했으도, 우리 사회 속의 다양한 경제의 의미와 모습들을 특정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들이 외치는 '경제, 경제'가 우리 어린 백성들은 모두 자신이 의미하는 경제일 것이라고 오해했다. 더 악화된 경제 상황 속에서 현 정부에게 왜 공약을 제대로 이행하지 않는가 라고 반문할 수 있을까? 내가 볼 때 현 정부는 정확하게 그 공약을 이행하고 있다고 하겠다.
그들이 말했던 경제는 다름 아닌 부유층을 위한 경제였다. 이는 이전에도 폭로되었던 바지만, 우리는 애써 간과했고, 그럼으로서 우리는 그들이 거짓말쟁이였다고 욕한다. 결과적으로 그들은 거짓말을 한 적이 없지만 말이다. 부유층을 위한 경제, 그들만 만들어가는 경제를 살펴볼 때, 여기에는 동양 전통으로서의 경제, 곧 경세제민의 모습도, 서양에서의 가정살림을 의미하는 'Economy'의 모습도 찾아보기 어렵다. 이렇게 해서 만들어지는 사회는 곧 '괴물'을 탄생시킬 뿐인 것이다.
자칭 C급 경제학자 우석훈은 이러한 '괴물'을 탄생시킬 한국사회의 경제의 구조적 모순과 문제점들을 파헤친다. 그것이 바로 "한국경제대안 시리즈"다.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 1권 『88만원 세대』에서는 세대간 판이한 '경제'의 모순된 모습을 지적했고, 2권 『조직의 재발견』에서는 '조직의 덫'에 갖힌 한국 경제를 고발한다. '평화 경제학'이라 할만한 3권『촌놈들의 제국주의』에 이어 이 책 『괴물의 탄생』은 이 시리즈의 결론으로서 세계 경제내 한국 경제의 모습과 그 결과를 예측하고, '괴물' 탄생의 비극을 막기위한 '대안'을 제시하고자 한다.
우석훈에게 있어 오늘날의 한국경제는 지극히 비정상적이다. 앞서도 말했지만, 저마다 떠벌이는 경제의 의미와 모습을 다름에도 불구하고, 경제를 이끌어 가는 지배층들을 한결같이 자신들만의 경제를 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백성을 구제한다는 제민은 방기한지 오래고, 가정살림을 돌보는 'Economy'는 가정파탄으로 향하게 하는 경제가, 오늘날 한국경제의 모습이다. 그로써 탄생하게 될 괴물은, 가히 위협적인 것임이 분명하다.
이 책 『괴물의 탄생』이 네 권의 "한국경제대안 시리즈"를 마감하면서, 예견한 '괴물의 탄생'은 이전의 1권에서부터 예상되었던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 책에서 주목할 부분은 결국 '대안'의 제시다. 어떻게 이 무지막지한 '괴물'을 '해체'할 것인가? 우석훈은 이것을 몇가지 제시하고 있다. 한국 경제에 "공공성과 생태, 문화적 가치"를 높이는 것, 사교육을 해체하고, 기존의 대학서열화를 해체하여 이른바 "국립대 통합네트워크"를 구축하는 것, 지방의 자치와 문화를 살리며, 공공부문, 특히 제3부문을 살려내어 국민 경제를 균형있게 유지하는 것이 그가 말하는 대안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사실 어떻게 보면 명철한 대안이라고 하기 어렵고, 누구나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런 뻔한 것 같아보이는 대안이 어쩌면 절실한 대안이어야 하는 한국사회의 모순을 우리는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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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시장이 모든 것을 경정하는 상태는 지옥이고, 그렇다고 조직이 모든 것을 결정하는 상태(즉 사회주의 상태)도 지옥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두 가지 사이에서 어떻게 균형을 찾을 것인가, 그게 학자로서의 저에게 던져진 큰 질문입니다. 저는, 이 두 가지 사이에서 불안하지만 안정성을 잃지 않는 국민경제, 그것이 바로 '인간의 얼굴을 한 자본주의' 혹은 '신뢰의 자본주의'라고 생각하며, 한국 경제의 대안이 그런 모습 가운데 하나이기를 원합니다. 그런 제3부문이 정상적으로 작동할 때, 그것이 곧 장기적으로 평화를 담보하는 평화경제라고 저는 봅니다. 그래야만 지금과 같이 토목경제가 해체되고, 한반도 생태계와 국민경제가 최소한의 공존을 추구할 수 있는 생태적 전환이 가능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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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석훈이 추구하는 "인간의 얼굴을 한 자본주의"를 나는 그리 기대하지 않지만(인간의 얼굴을 한 괴물은 괴물일까? 인간일까?) 많은 부분 그의 말에 긍정하고 동의한다. 평화경제로 가는 길에 우리가 반드시 넘어서야할 것은 분명 '괴물'을 무너뜨려야 한다는 것일테다. 그런 점에서 우석훈이 "왜 경제성장이 필요한가, 여기에 대한 철학적 질문이 오히려 지금 단계의 한국 경제에 절실한 질문"이러고 할 때, 이 질문을 한다고 그들이 어떤 대답을 내놓을지 나는 기대하기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우리 모두가 만들어낸 시스템이 괴물의 모습을 하고 있"다고 할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비단 "앞으로 몇 년간 내리게 될 수많은 경제적 선택과 개인적 판단, 그것들만이 우리가 이 불행한 흐름에서 벗어나 살 길을 찾는 데에 현재로선 미결인 채로 남은, 거의 유일한 요소"라고 찝찝한 자위만 할 일은 아닐지도 모른다. 그리고 우석훈은 "우리는 지는 법이 없"다고 말한다. 그래서, 우리는 좀더 급진적인 방법들을 택하면 안 될까? 아직은 잘 모르지만, "10년 후 사교육 없는 한국, 완전고용의 한국, 평화국가 한국, 그리고 생태국가 한국에서 우리 모두 다시 만났으면 한다는 희망"을 말하기 위해서는 우석훈의 소극적 자위 이상의 그 무엇이 필요한 것이 아닐까 싶다.
얼마전 영화 <괴물>이 흥행한 적이 있다. 한강에 출현한 괴물을 무찌르는 것이 가능했던 것은, 비록 소수지만 가족이었고, 그 가족의 연대였다. 오늘날 우리에게 필요한 '괴물을 무찌르는' 유효한 방법을 이 영화에서 배워야 할 것이다. 우리 사회의 민주 주체들의 연대를 통해 나는 우석훈이 희망하는 그것을 얻어낼 수 있다고 본다. 그럴 때에 우리는 "지는 법이 없"는 것이다. 역사의 심판, 결국은 정의가 승리한다는 그런 마스터베이션은 뒤로 미루고, 지금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가 서로 살을 부비며, 연대하고 보다 적극적으로 이 현실을 타개해 나가는 것이 필요한 것이 아닐까? 우석훈이 제시한 그러한 대안을 목표로 삼아도 좋을 것이다. 그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 우리는 어떻게 할 것인가를 우석훈과는 조금 달리 택할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우리가 "경제, 경제"를 외쳐댔지만, 그래서 이명박은 '천국'에 들어간 것 처럼 보이지만, 천국에는 "아버지 뜻대로 행하는 자"만이 갈 수 있다고 했다. 이명박 정권 하에서 이명박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여 천국에 들어갈 자로 이 리뷰를 읽는 당신이 해당될 것은 아닐것이 확실하다. 그리고 이명박 대통령이 강부자 뜻대로 행할 때 그가 천국에 가기는 어려울 것이다. 이 사회를 지도하고 경영하는 이들은 "국민 뜻대로", 나아가 우리의 모습을 우리 뜻대로 만들어가야 하지 않을까? 그럴 때에 우리 사회는 천국 언저리에는 도달할 수 있을 것이다. 천국은 아버지 뜻대로, 우리 사회는 이 땅을 살아가는 우리 스스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