씩씩한 남자 만들기 - 한국의 이상적 남성성의 역사를 파헤치다
박노자 지음 / 푸른역사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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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군생활 당시(2001~2003)에도 잘 부르지 않았던 군가 중에 '진짜 사나이'란 노래가 있다. "사나이로 태어나서 할 일도 많다만 / 너와 나 나라 지키는 영광에 살았다. / 전투와 전투 속에 맺어진 전우야 / 산봉우리에 해 뜨고 해가 질 적에 / 부모형제 나를 믿고 단잠을 이룬다."는 대중적으로 익숙한 '대중 군가'라고나 할까? 가슴아프게도 '사나이'는 할 일이 많다. 하지만 나라를 지키고 부모형제를 지키는 사나이가 바로 '진짜 사나이'라는 것인데, 이는 총과 칼로 적과 싸워 지키는 것 뿐만 아니라, 나라경제를 지키고 부모 자식을 먹여 살려 지키는 것까지를 포괄한다. 재미삼아 몇 절을 더 불러보자. 

   
  입으로만 큰소리 쳐 사나이라드냐?
너와 나 겨레 지키는 결심에 살았다.
훈련과 훈련 속에 맺어진 전우야
국군용사의 자랑을 가슴에 안고
내 고향에 돌아갈 땐 농군의 용사다.

겉으로만 잘난 체 해 사나이라드냐?
너와 나 진짜 사나이 명예에 살았다.
멋 있는 군복 입고 휴가 간 전우야
새로운 나라 세우는 형제들에게
새로워진 우리 생활 알리고 오리라.
 
   

2절과 3절이다. 이게 언제적 노래인지 알게 해주는 대목이 있다. "농군의 용사"란 노랫말을 봤을때 한참 전에 지어진 노래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를 현대적으로 해석하면 "산업의 용사"쯤으로 바꾸어 부를 수 있다. 다를 건 없다는 뜻이다. 군 생활이 암만 새로워져도 그게 부럽다는 사람은 없지만, 그래서 더욱 3절은 처량하다. 아직도 휴가 간다고 군복에 세 줄 잡고, 전투화에 불광내는 군인들이 있다는 사실이 말이다. 

여하간 '진짜 사나이'가 나라 지키고 부모 형제 지키는 나라의 일꾼이라고 노래를 부르지만, 진짜 사나이들이 너무 많아져서인지, 진짜 사나이 중에서도 우리는 '멋진 사나이'가 되고자 한다. 역시 출처는 군대일까? 특히 해병대에서는 '멋진 사나이'를 이렇게 정의한다.

   
  멋있는 사나이 많고 많지만 
바로 내가 사나이 멋진 사나이
싸움에는 천하무적 사랑은 뜨겁게 (사랑은 뜨겁게)
바로 내가 사나이다 멋진 해병대

멋있는 사나이 많고 많지만
바로 내가 사나이 멋진 사나이 
명령에는 호랑이 대화는 정답게 (대화는 정답게)
바로 내가 사나이다 멋진 해병대
 
   

적에 맞서 싸움을 잘하고 2번을 강력하게 강조해도 모자랄 정도로 여인에 대한 사랑은 '뜨겁게'하는 사나이가 진짜 사나이 중에서도 '멋진 사나이'라는 것이다. 역시나 여기서의 '싸움'은 적과의 싸움, 나아가 나라 경제의 최전선에서 벌이는 산업 전쟁이어야만 한다는 전제가 있다. 그러나 간혹 이를 망각하고 언제 어디서나 지들이 천하무적인 줄 알고 빨간 옷 입고 설치는 이들이 문제가 되기는 한다. 

군대에서도 시대의 발전상을 반영하고 있는 부분이 있어 흥미로운데, 우렁찬 목소리가 상징인 '진짜 사나이'는 그것도 때와 장소와 상대(특히 뜨겁게 사랑해야할 여인)를 가려 정다움을 내보여야 '멋진 사나이'가 될 수 있다. 이런 사나이라야 '남성 넘버원'이다. 

다들 한 물 간 사나이 타령이지만, 의미심장하게도 이는 여전히 우리에게 내재된 사나이스러움이다. 나라 경제의 대들보로서 사나이, 곧 남성은 전투력을 배가시켜야 하고, 이는 나라를 지키고 내 부모와 처 자식을 지키는 원칙이다. 곧 경제력 있는 남성이 '진짜 사나이'고 여기서 좀 더 부드럽게 그러나 사랑은 뜨겁게 하는 남성이 '멋진 사나이'라는 사실, 이는 진리 아니면 자연접칙이다. 

대세는 꽃미남이라고? 짐승 아이돌이 꽃미남 얼굴에 근육질을 자랑하며 설쳐대지만, 얘네들한테서 돈을 빼놓으면 그냥 루저일 따름이다. 얼굴 파먹고 사는 것 아니고, 근육 뜯어먹고 사는 것 아니라는 것이 우리의 상식이잖은가? 요즘 대부분의 매체들이 연예인들을 내세워 근육질 꽃미남을 남성의 이상형으로 선전하고 있지만, 이는 지극히 상업적 노림의 일환일 뿐이다. 교묘한 경제력의 다른 이름이라고나 할까? 노골적으로 "돈 있냐"를 물어보기는 쑥스러우니, 우회하고 있을 뿐이다. 꽃미남은 타고나는 것도 어느 정도 있지만, 근육질은 솔찮이 돈을 들여야 하니 말이다. 

각설하고, 박노자 교수의 근간 중에 그다지 주목받지 않았던 책 한 권을 소개해야 하겠다. <씩씩한 남자 만들기>란 책이다. "한국의 이상적 남성성의 역사를 파헤치다"라는 부제가 달려 있는 이 책은 1890~1900년대에 집중적으로 만들어진 '이상적 남성성'을 추적하고 있다. 다양한 자료와 문헌을 통해서, 역사적 사실과 사건들을 통해서 근대와 함께 어떠한 남성성이 요구되어지고 만들어졌는지를 끄집어낸다. 이를 통해 현대에 이어지는 '이상적 남성성'에 대한 '계보 캐내기'를 시도하고 있다. 

박노자 교수는 '남성성-남자다움에 대한 사회적 이상'을 "생물학적인 남성다움을 둘러싼 사회적 구성물, 복잡한 권력관계의 망에 의해 지탱되고 지배적인 문화의 틀과 이데올로기를 통해 구체화되는 패러다임"으로 정의하면서 '남성다움의 담론'의 역사를 추적한다. 

1890~1900년대 세계 제국 열강의 위협과 왕조의 존망의 위기 앞에서 서구 근대적 남성성에 대한 지향이 어떻게 우리에게 적용되었는지를 중심으로 하면서, 이전 시기의 유교주의에 입각했던 지배계층의 전통적 이상적 남성성, 이와는 다른 측면을 보이는 일반 서민의 이상적 남성성과 대비하고 있다. 이를 통해 근대화와 함께 형성된 이상적 남성성은 국가에 대한 자기희생적 정신을 바탕으로한 정신적인 힘(전장에서 죽을 태세)과 신체적인 힘(무쇠골격, 팔다리 민활)을 모두 구현하는 것이다. 이를 테면 부국강병을 위한 남성성을 강력히 요구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1890~1900년대 이루어진 이상적 남성성의 민족주의적 재구축은, 대체로 이 같은 가치들을 차용하여 왕조국가를 "민족/국민"으로 재정의하고 이전에 효라는 관념이 차지했던 최상의 지위를 "민족/국민"에 부여하는 한편, 여성에 대한 남성 지배의 구조는 근본적으로 손대지 않음으로써 이루어졌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전통과 근대의 접목을 통해 이상적 남성성 이데올로기의 성립을 예리하고 밝혀내고 있다. 

이는 꾸준히 그 논리와 수사를 변용하면서 지속되는데, 나라 존망의 위기에서 대두되었던 강인한 체력의 훈련된 민족 전사라는 이상형은, 박정희 시대를 거치면서 산업 전사로서 모습만을 바꾸게 된다. 조금씩의 변화는 있지만, 앞서 살폈던 대중군가(?)에서 보이듯이 오늘날의 진짜 사나이, 멋진 사나이, 스러움과 그다지 다르지 않은 이상적 남성성의 요구는 계속되고 있는 것으로 보여진다. 

박노자 교수는 현대 한국의 남성성 '경제화'된 남성성으로 규정한다. "학력 자본의 소유자"와 "경제 능력의 소유자"가 이상적 남성성이라는 것이다. 학력과 경제력은 오늘날 거의 등가를 이루고 있는 현실에선 이는 곧 '경제력'으로 수렴되는 것이라고 할 때, 역시나 오늘날 남성들에게 요구되는 덕목은 경제력에 다름 아닌 게 되었다. 경제력 하에서 꽃미남도 되고 근육질 남자가 되어야 하는 것이 변화라면 변화일 뿐이다. 

씁슬한 현실이다. 박노자 교수는 미래의 이상적 남성성으로 다소 엉뚱한 제안을 내놓는다. "바람직한 씩씩한 남성상은 배려하는 남자, 돌봄을 할 줄 아는 남성"이어야 한다는데, 나는 다소간 뚱~하다가도, 이내 수긍이 간다. "적극적인 배려의 생활은 상당한 체력을 요한다. 정기적인 운동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이런 점에서 배려는 과거의 근대적 이상들과의 단절이 아니라 발전적 계승이다."라며 자기의 주장을 강화하고 있다. 그렇게군. 이를 내식대로 해석하면 이상적 남성성도 이상적 여성성도 없어야 한다는 것이 아닐까 한다. 다만 이상적 인간성이 필요하다는 것은 아닐까? 

이 시대 여성만큼이나 남성도 피곤하고 힘겹다. 학력과 경제력으로 결정되는 경제력자 천하지대본은 이 시대의 인간성을 말살시키고 있잖은가? 이 시대의 진정한 루저는 180이 안되는 키의 남성이 아니라, 수천만원의 연봉을 받지 못하는 남성이다. 그녀는 다만 돌려 말했을 뿐인 것이다. 중요한 것은 이상적 인간성을 찾는 것이다. 우리 한국의 남성들이여 인간이 되자.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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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조원의 육체산업 - AV 시장을 해부하다
이노우에 세쓰코 지음, 임경화 옮김 / 씨네21북스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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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미국과 일본의 포르노 업체에서 한국인 네티즌을 상대로 고소를 해와 논란이 되고 있다. 자신들의 재산이 포르노 영상을 무단으로 인터넷에 유포했다는 죄목으로 말이다. 그 사실 자체는 부인할 수 없는 것이 사실이다. 이 사건을 처음 맡은 경찰에서는 포르노 자체가 불법인만큼 그에 대한 지적재산권을 보호할 근거가 없다는 판단에서 수사를 하지 않기로 해 일단락되는가 싶었는데, 검찰에서 이를 번복하고 미국과 일본 업체의 고소를 다시 받아서 수사한다고 한다. 일차로 5만여명의 업로더들을 추려 고소했는데, 이번에 다시 추가로 수천명을 고소했다고해서 재삼 논란이 커지고 있다.  

그간 나는 미.일 업체가 고소한 업로더에 해당되지는 않기에 이번 고소에 대해 긴장하거나 하지는 않지만, 고소당한 이들의 시혜를 어느 정도 받아왔기에 이번 논란과 검찰의 수사결과에 주목하고 있다. 내심으로는 계속해서 이 시혜를 누렸으면 하지만, 또 한편에서는 이번 논란을 계기로 포르노 및 성인 비디오물에 대한 사회적 법적 인식을 재고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하게 된다. 

미.일 업체는 자신들의 지적재산권인 포르노 영상을 무단으로 인터넷에 유포하는 한국네티즌으로부터 피해를 입었다는 주장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한국의 법적 테두리 안에서는 그 피해를 보전해야할 이유는 없어보인다. 지적재산이라고 주장하는 포르노 자체가 불법임으로 인터넷 등에 유포하는 행위는 형사적 불법행위일 뿐이지, 지적재산에 대한 침해의 불법은 성립할 여지가 없는 것이 당연해 보인다. 이러한 점에서 경찰은 수사하지 않겠다고 결정한 것일터다. 그러나 검찰의 생각은 다른 것 같다. 나로서는 법률적 지식이 거의 전무하므로 어찌 되가는지의 추이에 주목할 뿐이다. 

말이 나와서 말인데, 대한민국의 성인남성치고 야동이라고 일컫는 이 불법 포르노 영상을 보지 않은이를 찾기는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일본의 AV를 보지 않은이 나오라고 한다면, 난 나가지 못할 것이고, 아오이 소라를 아느냐는 물음에는 눈을 크게뜨고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여하간 우리 생활속에서 마음먹고 이 영상들을 찾는다면, 몇 분 걸리지 않고 아주 쉽게 찾을 수 있다. 중고생들의 접근도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우리의 인터넷은 야동으로 넘쳐나고 있지 않은가? 

이러한 현실에서 현재 불법으로 묶어놓고 있는 포르노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 필요하지 않은가 생각한다. 굳이 표현의 자유 운운할 필요 없이 변화된 사회 현실 속에서 구시대적 잣대만을 들이대기는 어려운 노릇이다. 미국이나 일본만큼은 아니지만(구체적으로 확인할 수는 없지만) 우리 사회는 어느 정도 성적 개방이 이루어진 상태고, 성에 대한 인식도 크게 변화해온 것이 사실이다. 일본에서는 AV로 대표되는 보다더 노골적인 영상(모자이크 처리된 영상)까지를 허용하고 있다. 어디까지를 보여줄 것인가를 놓고 생각할 때, 나는 보여주지 못할 것이 무엇인가하는 의문을 갖지만, 우리 사회의 합의가 일말의 변화가 있으리라고 생각할 때, 현재의 불법에 대한 기준은 분명히 진일보해야 할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청소년들의 성인 영상물 접근을 일체 차단해야한다고도 생각지 않는다. 기존의 온갖 야동들이 우리들의 젊은 시절 성적 인식에 어느 정도 왜곡을 가져다 주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그외의 영상물들이 아주 바람직한 인식을 준다거나, 그러한 기회를 제공하는 것은 전혀 많은 것이 아니다. 어쩌면 우리 청소년들의 성적 인식을 키운 것은 팔할이 포르노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 현실인 것을 아닐까 의심된다. 만약 그러하다면, 내용을 좀더 달리한 영상물을 제작 보급할 수 있도록 변화의 노력을 하는 것도 생각해 볼 수 있지 않을까? 너무 앞서간 얘기지만, 섹스에 대한 인식과 방법을 보다 바람직하게 이끌어 줄 영상물이 나올 수도 있다고 본다. 

2002년 일본에서 출간된 『AV산업-1조 엔의 메커니즘』(이노우에 세스코)이란 책이 최근 『15조원의 육체산업-AV시장을 해부하다』라는 제목으로 번역되어 출간됐다. 일본에서는 15조원에 육박하는 시장을 형성한 이 AV가 산업으로 인식되고 있다. AV 뿐만 아니라, 섹스산업이라고 통칭할 수 있는 매매춘 등을 포함한 여타의 것들을 헤아릴때는 가히 천문학적인 액수의 거대한 산업이랄 수도 있을 것이다. 한국의 현실 또한 그다지 다르지는 않을 것이다. 일본에서도 그러한 시장은 본격적으로 탐구하고 연구한 책들은 그다지 많지 않은 것으로 안다. 저자가 밝히듯이 그것은 뭐하러 취재하고 다니느냐는 주변의 물음을 수차례 들어야했을 정도라고까지 한다. 그러나 저자는 이미 산업이라고 일컫을 정도로 성장하고 우리의 생활에 밀접하게 연관된 AV 시장을 연구하고 해부하면서 이에 대한 인식과, 그 안에 가려진 불합리함을 개선해 나가는 노력이 필요함을 인식하고 이 책을 펴냇다고 한다. 

이 책에서는 그간의 일본 성인 비디오가 어떻게 형성되었고 어떻게 거대한 시장을 형성하게 되었는지, AV의 간략한 역사를 살펴보고, AV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이 어떠한지를 조사한다. 그러부터 AV업계가 어떻게 변화해왔는지를 추적한다. 또한 현재의 AV에는 어떠한 문제들이 있는지를 파헤친다. AV에 만연한 성폭력과 강간 등의 폭력적 성문화, 나아간 그 안에 내재된 AV 여배우들에 대한 반인권적 행태, 그것을 통해서 간접적으로 동참하는 AV 소비자들의 인식의 문제들을 지적한다. 이를 토대로 저자는 AV 시장이 어떻게 변화해야하고 또한 새로운 성문화를 창출하기 위한 과제를 제시하며 마무리한다. 비록 간략하고 부족하긴 하지만, 나름의 의미를 지닌 저서라고 할 수 있다. 

우리의 현실에서는 아직 시기상조라고 할 수 있지만, 범람하고 있는 불법 야동들을 그저 막으려만 하는 것은 눈가리고 아웅하는 식밖에는 안된다고 볼 때, 좀더 이른 시기에 좀더 변화된 기준을 갖고 판별하는 것이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아직까지 우리 사회에 적합한 기준이 무엇일지 제대로 논의되고 있지도 못한 현실은 여전히 왜곡된 성문화를 우리 사회 어둡고 칙칙한 곳에서 불법적으로 체험하는 범죄자들만 양산하는 것은 아닐까? 여하튼 이번 포르노 유포 논란이 우리 사회의 변화된 성인식을 재검토하여 보다 바람직하고 시의적절한 성문화 창출을 위한 기회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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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int236 2009-09-16 14: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하! 아오이 소라! 유명한 분이시죠. 아마 님의 태그 때문에 "아오이 소라"를 검색하시는 분 중에 분명히 당황하실 분이 있을 것입니다.^^

멜기세덱 2009-09-16 19:20   좋아요 0 | URL
파란 하늘이란 뜻이래요. 아름답지 않습니까? ㅋㅋㅋ

마노아 2009-09-16 15: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런데 뜬금 없이, 서재의 저 여인네는 누구인가요? 소용녀가 딱! 떠올랐어요.

멜기세덱 2009-09-16 19:22   좋아요 0 | URL
맞아요. <신조협려 2006>에서의 소용녀에요. 양과는 황효명이 맡았는데, 나이차이가 엄창나보여서리...ㅋㅋ
너무 예뻐서 찾아봤더니 이름이 유역비, 선검기협전, 천룡팔부에도 출연했더군요. 중국과 일본에서 음반도 내고 가수로 활동했대요. 우리나라는 안 오는지 몰라요.ㅋㅋ 천룡팔부의 왕어언, 요새 이거 보고 있어요...ㅋㅋㅋ

Jade 2009-09-16 15: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멜기님이 간만에 올리신 리뷰가 AV책이라니....어쩐지 웃음이 나와요 ㅋㅋ

멜기세덱 2009-09-16 19:23   좋아요 0 | URL
AV보고 웃으면 음...쫌 변탠데...ㅋㅋ

이매지 2009-09-16 16: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멜기님의 오랫만의 글이 야동을 허하라라니 ㅎㅎㅎㅎ
저도 어쩐지 재미있는 걸요 ㅎㅎ

멜기세덱 2009-09-16 19:24   좋아요 0 | URL
야동쯤이야...뭐...건전한 야동이 나라를 살린다는.....ㅋㅋ

마늘빵 2009-09-17 00: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랫만에 글 쓰셨는데 그 동안 AV 본 거 아녀요? =333

아오이 소라는 내한 때 하도 언론에서 떠들어서 누군가 찾아보고 알았어요. 정말요.

멜기세덱 2009-09-17 00:59   좋아요 0 | URL
흥!!! 그 소릴 누구보러 믿으라고?ㅋㅋ

순오기 2009-09-17 00: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랜만에 메인에 뜬 이름이 반가워서 로그인했는데~ 잘 사십니까?
AV가 뭔가 했어요~ ^^

멜기세덱 2009-09-17 01:00   좋아요 0 | URL
제가 그나마 할 줄 아는게, 그냥저냥 사는겁니다. 자알 살지는 못하고요...ㅎㅎ
평안하시죠? ㅎㅎ

무해한모리군 2009-09-17 09: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AV배우들은 한국사람이면 누구나 봤을 듯..
길바닥에 막 뿌려져 있잖아요.
오빠 전화주세요 하면서 ㅎㅎㅎ

막는다고 막아지지도 않을 일이고,
다 자란 성인이 저런거 본다고 그대로 하려고 할 일도 아니고 보면..

멜기세덱 2009-09-17 21:08   좋아요 0 | URL
그대로 할수도 있겠죠.ㅎㅎㅎ
어쩔 수 없으니 그냥 내비둬, 이런건 아니에요.
말하자면, 굳이 이걸 어째야 하느냐, 이런 것에 의문을 갖는 거죠.ㅎㅎ

Alicia 2009-09-18 08: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그러니까 멜기님은 음화반포죄로 처벌하는 형사법의 규정이 없어져야 한다고 생각하시는거죠? ^^
업자들이 포르노를 가지고 지적재산권 주장을 하고 있는지는 몰랐어요. 저작권의 보호대상이 사상,감정의 창작적 표현임에 주목한다면 단순 상업적인 성격이 매우 강하고, 성적호기심을 자극하는 정도에 그치는 표현물인 포르노를 저작권의 대상으로 보기는 좀 어렵지 않을까 생각해요. (좀 기계적인 접근이죠?) 서사구조가 있다면 또 달라지겠지만요. 그런데 대체로 포르노가 가진 '전형적인' 스토리는 창작성을 인정받기가 어려워요.(이러니까 야동 즐겨보는 사람같네! ☞☜) 뭐가 포르노고 예술인지 사실 그 경계 자체가 모호하기는 하지만. ^^

태그가 인상적이네요. 후훗.

멜기세덱 2009-09-17 21:16   좋아요 0 | URL
제가 지적재산권이라고 표현했는데, 정확하게 그들이 고소한 내용이 그것인지는 잘 모르겠네요. 아무튼 그런 종류의 권리를 주장하고 있는 것은 확실합니다. 포르노를 포함한 그런 종류의 영상들이 창작성이 떨어진다는 건 상대적인 것이겠죠. 전형적인 서사구조를 보여주는 것들에는 대중문학에서도 여럿 볼 수 있구요. 아무튼 그것은 또다른 논의가 필요하겠구요.
제가 생각할 때 궁극적으로는 어떠한 표현의 형태라도 규제되거나 제한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이지만, 현재에 있어서 그것을 극단적으로 주장하지는 않습니다. 음란물에 대한 기준이 좀 유순해질 필요성이 있다는 것이죠. 일본처럼 시민사회에서 자체적인 심의 기구 같은 것들이 만들어져 그러한 기준을 정하게 하는 것도 필요할 것 같구요.(일본의 경우라고 해서 그것이 100% 민간기구라고 하기는 어렵겠지만요.)

Alicia 2009-09-17 22:43   좋아요 0 | URL

영상물이라면 저작권을 이유로 전시,배포권 침해를 주장했을 가능성이 커요.
지적재산권은 크게 특허,상표,의장,디자인 등 아이디어 보호등을 내용으로 하는 산업재산권과, 사상이나 감정의 창작적 표현을 보호하는 저작권으로 나누어볼 수 있는데. (무엇이 아이디어고 무엇이 표현인지 그걸 명확히 구분하기는 사실 어렵습니다.) 말씀하신대로 포르노의 창작성에대한 논의는 필요한 것이겠고요. (사실 이 부분이 굉장히 흥미로워요!)

음란물에 대한 기준이 유연해질 필요가 있다는 점엔 동의하는데, 문제는 어떻게, 어디까지 이겠군요. 사실 음란물의 성적 표현의 하한이 어디까지 열려있어야 하는지, 구성원들의 합의 아래 합법성 안으로 포섭이 될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감이 잘 안와요.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멜기세덱 2009-09-18 00:24   좋아요 0 | URL
그나저나....
커피는 언제 사 주실 거에요? ㅋㅋㅋ
곧 추운 겨울이 다가온답니다....ㅋㅋ

심술 2009-09-17 21: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av랑은 관계없는 얘긴데 사전에서 용호상박을 찾아보면 '용과 호랑이가 싸운다는 말로 강자들끼리의 다툼을 가리킨다' 라고 돼 있는데 실제로 사람들이 쓰는 걸 들어 보면 막상막하나 난형난제랑 같은 뜻으로 더 많이 쓰거든요. 왜 이런 일이 생기죠?

멜기세덱 2009-09-18 00:21   좋아요 0 | URL
저한테 이런 걸 물어보시면....ㅎㅎ 곤란한데요....ㅋㅋ
용호상박의 정확한 출처는 제가 모르겠지만, 용과 호랑이가 싸울 땐 쉽게 승부가 나기 어렵기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용의 전설 속의 동물이고, 호랑이도 흔히 산신과 같이 인식되었으니까요. 용호상박과 비슷한 말로 양웅상쟁(兩雄相爭)이란 것을 언급하고 있는 것을 보면 확실하죠. 승패를 가리기 어려운 강자들의 싸움은 막상막하의 승부가 될 것이고, 용과 호랑이는 결국 난형난제가 되겠죠. 의미의 차이는 조금 있겠지만 문맥에 따라 비슷한 의미로 사용될 수 있다고 보여지는데요.ㅎㅎ

가넷 2009-11-04 01: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생각하는(?) 깊은 내용을 담은 것 같지는 않네요. 그래도 궁금하긴 하군요.

그나저나, 유역비는 국내에도 팬들이 많은 모양입니다. 선검기협전을 본 적이 있는데, 다른 작품에서 보다 정말 이쁘게 나오더라구요. 그런데 연기는 아직 별로인 것 같아요. 뭐 중드가 손발 오그라들게 만드는 요소가 있어서 더 그렇게 느끼는지도 모르겠네요;;;
 
불멸의 신성가족 - 대한민국 사법 패밀리가 사는 법 희망제작소 프로젝트 우리시대 희망찾기 7
김두식 지음 / 창비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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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지금의 사법계의 입장에서 말하자면, 그들은 현재 굴욕까지는 아니더라도 시련 혹은 당혹의 시간을 맞고 있다고 생각할 것이 틀림없다. 우리사회에서 사법부에 대한 불신은 뿌리 깊지만, 한때의 굵직굵직한 사건들을 우야무야 넘겨오면서 그럭저럭 넘겨온 것이 사실이고, 그 사이 조금씩의 변화는 있었지만, 어쩔 수 없이 많은 부분들은 가리워지고, 여전히 많은 시민들이 그들을 불신하고 있다. 그런 가운데, 또 한 번의 폭풍이 닥쳐왔으니, 그들이 당혹해 할 것은 분명한 것이다. 신영철 대법관이 일으킨 그 파동은 사법부 전체를 뒤흔들었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죽음으로 검찰은 끝모를 굴욕의 나락으로 떨어지고 있는 지금, 사법계는 당혹스럽고, 굴욕적인 시간을 보내고 있을 것이다. 또한 언제나 처럼 '이 시련의 시간'이 지나가면 괜찮을 거라는 생각을 하고 있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늘 하는 얘기지만, 이 위기를 계기로 자성하고 반성하면 커다란 변화를 기대하는 것은 어리석은 것일지도 모른다. 

보수 정당과 언론에서는 뭐 별일 아니라고 여기는 듯하고, 진보 쪽에서는 또 대단히 야단이다. 뭐 그럴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어쨌든 이번 사태의 결론이 단순히 신영철의 사퇴, 검찰의 반성 등으로 매듭지어진다고 하더라도, 우리 사법계가 대단히 옳은 방향으로 변신하여 전국민의 신뢰와 사랑을 듬뿍 받게 된다고는 그 아무도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 마당에 입 아프게 사법계에다 대고 떠들어봐야 그다지 변화하는 것은 없으니 답답할 노릇이다. 그게 그렇게 변화하기 쉬운 것은 아니니 그렇다고 조용히 입닥치고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고 말이다. 어리석고 무모하고, 바보같은 노릇이지만, 자꾸자꾸 잘못된 것은 잘못되었다고 떠들고 지적해야 하는 것은 고금의 진리이되, 좋은 소리는 듣지 못하고 미움을 받는 일이어서, 큰 맘 먹고 덤비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어쩌면 김두식 교수도 그런 맘을 먹고 이 책 『불멸의 신성가족』을 펴낸 것인지도 모르겠다. 

김두식 교수는 우리의 사법계를 '신성가족'에 비유하고 있는데, 이는 마르크스의 언사를 따온 것이다. 이는 둘 다 그 말이 보이는 외면의 거룩함을 뒤로한 채 비판적 의미를 가지고 있어서, 썩 좋은 말은 아니다. 오늘날의 사법계가 말 그대로 신성한 어떤 것이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지들 스스로 무언가 신성한 것처럼 여기고 남들고 구분하며 지들끼리만 지지고 볶고 하는 행태를 비판하기 위한 것일 터이다. 이를 지나친 표현, 무례한 표현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적절하고 적확한 표현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 이유를 대라고 하면, 그걸 몰라서 묻냐고 반문하기에도 딱 좋다. 여하튼 우리는 그들이 이룩한 '신성가족'의 외부에서 모든 것을 듣고 보고, 느끼고 체감하며 한편으론 부러워하면서, 한편으론 욕을 하면서 그렇게 저마다 그 특별나신 나리님들의 신성한 영역에 대한 공포를 가지고 있다. 

박원순 변호사가 이끄는 희망제작소의 <우리시대희망찾기> 프로젝트 중 하나를 김두식 교수가 맡아 내놓은 결과물이 바로 이 책이다. 이 프로젝트가 뭐 대단한 작업이고, 표방한 대로 그 희망을 찾을 수 있을지는 의문이지만, 지금까지 교육, 노동 등의 다양한 영역에서 작업한 결과물이 나와 있고, 사법 영역을 다룬 이 결과물이 그 프로젝트의 7번째 작업이다. 김두식 교수의 주도로 이 작업은 사법계 안팎을 구성하는 다양한 사람들과의 인터뷰를 통해서 사법계의 '풍경'과 내면을 탐구하고 있고, 프로젝트 명과 같이 그러한 작업을 통해서 어떤 희망을 보기 위함일 터이지만, 이 책이 담고 있는 영역은 사법계의 다종다양하고 뿌리 깊은, 여전히 변하지 않고 있는 문제점들을 보다 깊이 있게 드러내고 있다는 것이다. 

많은 이들을 상대로 하는 설문조사와는 다르게, 조사 인원은 적지만 보다 내밀한 부분까지 엿볼수 있는 조사방법을 택했다는 점에서 여러모로 장단점이 있겠지만, 이 책이 보여주는 사법계의 문제점들은 그다지 신선하다거나 충격적이라거나 하지 않다. 또한 그리 내밀해 보이지도 않고 비밀스럽지도 않다. 왠지 우리 모두 다 아는 사실을 그저 나열한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을 확인해 주고 있는 것같다. 오히려 불쾌했던 점도 있는데, 그것은 애써 예전보다는 그나마 많이 나아졌다고 수차례 강변하는 언설이 곳곳에 있었다는 점이다. 예전엔 이렇게 나빴는데, 지금은 많이 좋아졌지만, 아직 이런이런 문제가 있다 정도에 그치고 있는 부분이다. 

우리가 뻔히 알고 있는 전관예우의 문제들, 당연히 알고 있는 브로커의 문제들, 드라마를 통해서 오히려 구구절절 드러나는 판검사가 부자집 아가씨를 찾는 문제들 등등, 뭐 뻔히 들어 알고 보아 욕하는 뻔한 문제들을 반복한 것이라는 비판도 가능해보인다. 그러나 문제는 문제고 그것을 재확인하는 데에서 오는 아픔은 배가되게 하는 책으로서, 그 나름의 의미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최후의 성역 법조계 최초 인터뷰"라는 데에 그 의의를 높이 사주기로 하자. 앞서 말했듯이 자꾸자꾸 떠들어 대고 욕을 해야 조금이라도 변화하니까 말이다. 

김두식 교수는 이 책의 말미에서 그간 많은 변화와 노력으로 뿌리깊은 악습과 관행을 벗어버리기는 했지만, 여전히 남아 있는 문제들이 새삼 지적하면서, 그러한 문제들이 "서로 꼬리에 꼬리를 물며 연결된 까닭에 정확히 무엇이 뿌리인지 진단하기 어렵"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대략 요약하면 그 뿌리는 "의사소통의 부재와 원만함이라는 신성가족 이데올리기"라고 지적한다. 그러니까 의사소통의 부재라는 것은 판검사나 변호사의 부족하기 때문에 그런것이고, 원만함의 문제는 '관계'에서 오는 문제라는 단순한 지적인데, 이게 그리 우리의 뇌리를 자극하는 어떤 뛰어난 지적과 냉철한 분석이라고 보기에는 심히 어려워만 보인다. 누가 그걸 몰라서 이 야단인가 말이다. 어쩌면 김두식 교수로서도 이런 결론이 쑥스러운 듯, 이 프로젝트의 결론 혹은 목표를 "억지로 찾아본 희망"이라 명명한다. 이 말은 어쩌면 희망이 없다에 다름아닐지 모르겠다는 뉘앙스다. 그렇게 억지로 찾아 내놓은 희망이란게, '시민'이라고 한다. 참 너무 억지로 찾은 것은 아닌지 모르겠고, 어쩌면 김두식 교수의 냉혹한 비판이 반어적으로 담긴 표현이 아닐까 하면서 혀를 내두리게 된다. 도대체 어쩌라는 거니? 

결국 이 못난 사회에서는 당연히 '사람'만이 희망이다. 그러나 그 모든 잘못과 죄악 또한 이 모든 '사람'들의 것이 분명하다. 사람이 변화하고 달라져야지만이 모든 것이 변화하고 새롭게 될 것이다. 어떻게 변화해야 하나? 검사에게 당당히 말을 건내라고? 고작 그것뿐인가? 어쩌면 이것은 일반 시민에게 모든 책임을 떠넘기는 무책임한 말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순간 불쾌해진다. 우리는 알고 있다. 우리 사회의 뿌리깊은 사회구조적 문제 중의 하나가 이 신성가족에게도 예외가 아닌 사실을. 그러니까 우리가 변화해야 한다는 것은 근본적인 대안임은 분명하다. 하지만, 그런 소리는 누구나 다 한다. 그러니까 누구나 다하는 소리는 함께 같이 하되, 그것만 주구장창 떠벌이면 그건 전문가 쯤 되는 사람들에게는 좀 아니다 싶다는 거다. 구조가 바뀔 수 있는 다양한 방법들을 뱉어내어야 하잖은가? 여러가지 사법 개혁의 제도들을 마련해야 하잖은가? 배심원제의 도입, 판검사 임용의 개혁, 변호사의 확충, 기타등등, 기타등등. 결국은 '시민이 희망'이겠지만, 그건 너무 멍한, 그리고 당연한 결론이기에 아쉬움이 남는다. 역시나 아직은 요원하기만 한 이 신성가족의 해체가 아닐까 한다. 김명민이 열연했던 그 '불멸'한다는 이순신 장군도 수백년전 돌아가셨고, 드라마도 끝났는데, 이 '불멸의 신성가족'은 언제 멸하게 될까? 여전히 궁금하고 답답하기는 마찬가지이니, 이 책을 읽고는 울화통만 터질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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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딧불이 2009-06-28 09: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세댁님 오랜만에 오셨네요. 어여쁘고 앳된 처자까지 데리고... 울화통이 터지더라도 멸하지 않는 신성가족..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잘읽었습니다.

순오기 2009-07-06 03: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주 오랜만에 리뷰가 올라왔군요~ 블로거뉴스 특종이나 우수리뷰로 팍팍 밀어봅니다.^^
 
사랑의 단상 동문선 현대신서 178
롤랑 바르트 지음, 김희영 옮김 / 동문선 / 200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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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형(figure), 그것은 작업중에 있는 연인이다.

각 문형마다 그 깊숙이에는 사랑하는 사람의 구조 안에서만 용도를 갖는 하나의 문장, 대개는 미지의(혹은 무의식적인?) 문장이 잠들고 있다.

문형은 사랑하는 동안 내내 주체의 머릿속에 순서 없이 떠오르는 그런 것이다.

사랑 이야기(또는 '모험')란, 사랑하는 사람이 이 세상과 화해하기 위해 지불해야 하는 공물(貢物)이다.-14~21쪽

그 사람의 부재를 말하는 남자에게는 모두 여성적인 것이 있음을 표명하는 결과가 된다. 기다리고 있고, 또 그로 인해 괴로워하는 남자는 놀랍게도 여성화되어 있다. 성도착자여서가 아니라 사랑하기 때문에 여성적인 것이다.

그리스어에는 욕망에 대한 두 단어가 있다. 부재하는 이에 대한 욕망에는 '포토스(Pothos)'가, 현존하는 이에 대한 욕망에는 보다 격렬한 '히메로스'가.

부재는 지속되고, 나는 그것을 견디어내야만 한다. 그래서 나는 부재를 조작하려 한다.-31~4쪽

어떤 괴상한 논리에 의해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의 대상을 하나의 전체로 인지한다(가을날의 파리마냥). 동시에 이 전체는 말로는 할 수 없는 어떤 여분의 것을 지닌 것처럼 보인다. 그 사람의 전부가 미학적인 영상을 산출한다. 그는 그 사람이 완벽하다는 사실에 찬미하며, 또 그렇게 완벽한 사람을 선택한 자신을 찬미한다.

수많은 사람들 중에서 내 욕망에 꼭 들어맞는 이미지를 찾기 위해 얼마나 많은 우연과 놀라운 우연의 일치가(그리고 어쩌면 얼마나 많은 탐색이) 필요했던가!-39~41쪽

이미지의 변질은 내가 그 사람을 부끄럽게 생각할 때 일어나는 것처럼 보인다.

이미지는 부패한 것이다. 왜냐하면 내가 갑자기 목격하는 사람은 어떤 사람(더 이상 나의 그 사람이 아닌), 한 낯선 사람(미치광이?)이기 때문이다.

망가뜨림에 대한 공포는 잃어버림에 대한 고뇌보다 더 강렬하다.-48~52쪽

독창적인 관계일 때에는 상투적인 것은 모두 흔들리며, 초월되고, 철수한다.-62~3쪽

사랑하는 사람의 숙명적인 정체는 기다리는 사람, 바로 그것이다.

기다리게 하는 것, 그것은 모든 권력의 변함없는 특권이요, "인류의 오래된 소일거리이다."-68쪽

언어의 힘, 나는 내 언어로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다. 특히 말하지 않는 것조차도. 내 언어로는 모든 것을 할 수 있으나, 내 몸으로는 그렇게 할 수 없다. 내가 내 언어로 감추는 것을 몸은 말해 버린다. 메시지는 마음대로 조종할 수 있지만, 목소리는 그럴 수 없다. 내 목소리가 무엇을 말하든간에, 그 사람은 내 목소리에서 '무슨 일이 있다는 것'을 알아차릴 것이다. 나는 거짓말쟁이이지(역언법에 의해), 배우는 아니다. 내 몸은 고집 센 아이이며, 내 언어는 예의바른 어른이다.-74쪽

절망의 두 체제: 부드러운 절망, 능동적인 개념("나는 사람들이 그렇게 사랑해야만 하듯이 절망 속에서 당신을 사랑한다")과 격렬한 절망-79쪽

'가우디움'은 "현재 어떤 것을 소유하고 있거나 장차 소유할 것이 확실시될 때 영혼이 느끼는 즐거움이다. 우리는 어떤 것을 소유하고 있어, 그리하여 우리 세력하에 있어 우리가 원할 때면 언제나 그것을 즐길 수 있다." 이에 반해 '래티시아'는 보다 경쾌한 즐거움, 즉 "우리 마음속에 즐거움이 지배적인 상태"(때로 모순되는 여러 다른 감각들 중에서)를 가리킨다.-82~3쪽

최고선을 믿는 것은 최고악을 믿는 것만큼이나 어리석은 짓이다.-89쪽

조금 떨어져 있자. 거리감을 쌓는 훈련을 하자. 타자의 죽음 뒤에 홀로 살아남는 그 순간부터 모든 주체의 입에서 나오는 저 억압된 말, 살자(Vivons!)라는 말을 떠오르게 하자.-91쪽

"나는 나를 이해하고 싶고, 나를 이해시키고 싶고, 알리고 싶고, 포옹받게 하고 싶고, 누군가가 와서 나를 데려가기를 바란다."-95쪽

언어는 살갗이다. 나는 그 사람을 내 언어로 문지른다. 마치 손가락 대신에 말이란 걸 갖고 있다는 듯이, 또는 내 말 끝에 손가락이 달려 있기라도 하듯이. 내 언어는 욕망으로 전율한다. 이 동요는 이중의 접촉에 기인한다. 한편으로는 모든 담론 행위가 "나는 너를 욕망한다"란 유일한 시니피에를 은밀히 간접적으로 가리키면서 그것을 풀어주고, 양분을 주고, 가지를 치며 폭발하게 하는 것이라면(언어는 스스로 만지는 것을 즐긴다), 또 다른 한편으로는 나는 그 사람을 내 말 속에 둘둘 말아 어루만지며, 애무하며, 이 만짐을 얘기하며, 우리 관계에 대한 논평을 지속하고자 온 힘을 소모한다.-110쪽

"우리가 너를 위해 얼마나 많은 희생을 치렀는지 좀 알기나 하니" 혹은 "우린 너에게 생명을 주었는데"(-"하지만 그 생명으로 도대체 제가 어쩌란 말입니까!" 등등). 선물을 말하는 것은 곧 선물을 침묵 속의 소비와는 대립되는, 교환 경제(희생의, 경매의) 속에 집어넣는 것이다.-115~6쪽

나는 '고통'이란 말이 그 어떤 고통도 표현하지 못하며, 따라서 그 말을 사용한다고 해도 아무것도 전달하지 않으며, 더 나아가 짜증나게 하리라는 것을 알지 못한다(우스꽝스럽다고까지는 말하지 않더라도).

그 사람을 위해 글을 쓰지 않으며, 내가 쓰려고 하는 것이 결코 사랑하는 사람의 사랑을 받게 하지 않으며, 글쓰기는 그 어떤 것도 보상하거나 승화하지 않으며, 글쓰기는 당신이 없는 바로 그곳에 있다는 것을 아는 것, 이것이 곧 글쓰기의 시작이다.-146~8쪽

나는 찾으며, 시작하며, 시도하며, 더 멀리 나아가며, 달려간다. 그러나 내가 끝나가고 있다는 것을 결코 알지 못한다. 사람들은 불사조가 다시 태어난다고 말하지 죽는다고는 말하지 않는다(그렇다면 나 또한 죽지 않고 다시 태어날 수 있단 말인가?).
그러므로 충족되지도 못하며, 그렇다고 자살하지도 않는 내게 있어 사랑의 방황은 숙명적이다. 베르테르 자신도 '저 가엾은 레오노레'에게서 로테로 옮아가며 그 사실을 체험했었다. 비록 그 움직임은 중단되었지만, 베르테르가 살아남았더라면, 그는 똑같은 편지를 다른 여인에게 다시 썼을 것이다.-150~1쪽

나는 모성적인 것과 생식기적인 것을 원하는, 동시에 두 명의 주체이다. (사랑하는 사람은 어린 에로스가 그랬던 것처럼 발기된 아이라고 정의될 수 있을 것이다.)-154쪽

세상은 이렇게 내가 더불어 그 사람을 공유해야만 하는 염치없는 이웃들로 가득 차 있다. 세상이란 '공유의 구속' 바로 그것이다. 그러므로 세상(세속적인 것)은 내 적수이다. 나는 끊임없이 이런 불쾌한 것들로 방해받는다. 어쩌다 우연히 알게 된 사람이 억지로 우리 식탁에 와 앉거나, 또는 그 사람이 옆에 앉은 사람들의 저속한 대화에 정신이 팔려 내가 말하는지 어떤지도 알지 못할 때, 또는 하나의 물건, 이를테면 한 권의 책조차도 모두 불쾌한 것이다. 쌍수적인 관계를 순식간에 말소하고, 공범 관계를 변질시키며, 소속을 해체하는 것은 전부 그러하다. 세상은 "당신은 나에게도 또한 속해 있다"라고 말한다.-160~1쪽

나는 사랑하는 사람과 닮아야 한다. 나는 그 사람과 나 사이에 어떤 본질과 일치가 있다고 가정한다(바로 이 점이 나를 기쁘게 한다). 이미지·모방: 나는 가능한 한 모든 것을 다 그 사람처럼 하려 한다. 우리가 하나가 되어 똑같은 살갗의 자루에 갇혀 있다는 듯이, 나는 그 사람이며 그 사람은 나이기를 열망한다.-186쪽

반전(retournment): "아무리 해도 당신을 잘 모르겠어요"라는 말은 "당신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정말 모르겠어요"라는 뜻이다. 당신이 나를 어떻게 해독하고 있는지 모르기 때문에 나 역시 당신을 해독할 수 없는 것이다.

사랑하면 할수록 더 잘 이해하게 된다는 말은 사실이 아니다. 사랑의 행위를 통해 내가 체득하게 되는 지혜는, 그 사람은 알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 그러나 그의 불투명함은 어떤 비밀의 장막이 아닌 외관과 실체의 유희가 파기되는 명백함이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나는 미지의 누군가를, 그리고 영원히 그렇게 남아 있을 누군가를 열광적으로 사랑하게 된다. 신비주의자적인 움직임: 나는 알 수 없는 것의 앎에 도달한다.-196~7쪽

모든 연적은 처음에는 스승·안내자·흥행사·중개자였다.

"사랑에 대해 말하는 것을 한번도 들어 본 적이 없다면, 결코 사랑하지 않았을 사람도 많다."

"사랑이 시작되기 전 아름다움은 그 표지로서 필요하다. 그것은 우리가 사랑하게 될 사람을 칭찬하게 함으로써 그 사랑을 좌우하게 된다."-199쪽

합리적인 감정: 모든 것은 잘 되어 나가지만 지속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사랑의 감정: 잘 되어가는 것은 아무것도 없지만 그것은 지속된다.

지금의 나로서는 자기 희생을 하나의 고결하고도 연극적인 형태로만 파악하고 있으며, 이것은 여전히 희생을 상상계의 영역 안에 붙잡아두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205쪽

질투하는 사람으로서의 나는 네 번 괴로워하는 셈이다. 질투하기 때문에 괴로워하며, 질투한다는 사실에 대해 자신을 비난하기 때문에 괴로워하며, 내 질투가 그 사람을 아프게 할까 봐 괴로워하며, 통속적인 것의 노예가 된 자신에 대해 괴로워한다. 나는 자신이 배타적인, 공격적인, 미치광이 같은, 상투적인 사람이라는 데 대해 괴로워하는 것이다.-213쪽

아무리 그 대답이 긍정적인 것이라 할지라도('저도 그래요') 그 사람이 하나의 단순한 시니피에로만 대답한다면 그건 충분치 않다. 그는 내가 그에게 보낸 "난 널 사랑해"란 말을 다시 발화해야 하며, 그래서 공식화해야 한다. 펠레아스가 "사랑하오"라고 말하자, "저도 역시 사랑해요"라고 멜리장드는 대답한다.

내가 원하는 것은 정면에서, 어떤 새어나감도 없이, 완전하게, 문자 그대로, 사랑의 말의 원형을, 그 공식적인 표현을 받고자 함이다.-222~3쪽

물건 OBJETS. 사랑의 대상이 만졌던 물건이면 모두 그 몸의 일부가 되어, 사랑하는 사람이 열정적으로 매달리는 것.-251쪽

어쩌면 '울음'은 너무 투박한 것이 아닐까? 어쩌면 모든 종류의 눈물을 동일한 의미로 간주해서는 안 되는 게 아닐까? 어쩌면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속에는 여러 명의 주체가 있어, 비슷하면서도 다른 방식으로 우는 게 아닐까? '눈에 눈물이 나 있는' 이 '나'는 과연 누구일까? 혹은 어떤 날 '거의 눈물까지 날 뻔했던' 또 다른 나는 누구일까? '내 몸의 모든 눈물을 쏟으며 우는' 나, 또는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홍수 같은 눈물을' 퍼붓는 나는 누구일까? 이토록 다양한 울음의 방식을 가진 까닭은 아마도 내가 울 때면 언제나 누군가를 대상으로 하며, 또 그 수신자는 항상 동일한 인물이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내 눈물을 가지고 주변에 행사하려는 공갈협박의 유형에 따라 내 울음의 방식을 조정하는 것이다.-262~쪽

눈물을 흘리면서 나는 누군가를 감동시키려 하고, 또 압력을 가하고자 한다.

내 고통이 환상이 아니라는 것을 내 자신에게 증명해 보이기 위해, 나는 눈물을 흘린다. 눈물은 표현이 아닌 기호이다. 나는 내 눈물로 하나의 이야기를 하며, 고통의 신화를 만든다. 그렇게 하여 나는 고통에 적응할 수 있으며, 또 그 고통과 더불어 살아나갈 수 있다. 나는 눈물을 흘리면서 가장 '진실한' 메시지, 혀의 메시지가 아닌 몸의 메시지를 거두어 주는 한 과장된 대화 상대자를 자신에게 부여하는 것이다. "말, 그것은 무엇인가? 한 방울의 눈물도 그보다 더 많은 것을 얘기하리라."-~263쪽

내게서 그 사람은 결코 지시물이 될 수 없다. 당신은 결코 당신일 뿐이며, 나는 타인이 당신에 대해 말하는 것을 원치 않는다.-267쪽

'주체'란 우리에게(기독교가 생긴 이래) 괴로워하는 자를 의미하며, 그러므로 상처가 있는 곳이면 어디든지 주체가 존대한다는.

처음 우리는 하나의 정경을 사랑한다. 왜냐하면 첫눈에 반하기 위해서는(운명과도 같은 그 무엇에 휩싸여 넋을 잃는, 그리하여 내 책임이 아닌) 갑작스러움의 기호 작체가 필요하며, 또 이런 모든 대상의 배열 중에서도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이 정경이기 때문이다.

나를 매혹하고 황홀케 하는 것은 어떤 상황 속에 있는 육체의 이미지이다. 내게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작업하는 모습이 나를 흥분케 한다.

내가 매혹되었던 그 처음의 장면은 단지 나중에 재구성된 것일 뿐이다. 현재 시제로 체험하지만 과거 시제로 변형시키는 충격적인 이미지를 재구성하는 것이다.

첫눈에 반한다는 것은 이렇듯 항상 단순 과거로 표현된다.-272~9쪽

사랑의 행로는 세 단계(또 삼막)를 거치는 것처럼 보인다. 첫번째 단계는 즉각적인 사로잡힘의 단계이다(나는 이미지에 매혹된다). 이어서 일련의 만남이 그 뒤를 따른다(데이트·전화·편지·짧은 여행 등).

다음 단계란 고통·상처·고뇌·비탄·원한·절망·당혹·함정의 긴 행로로서, 그것의 희생물인 나는 끊임없이 그 사람, 나 자신, 그리고 우리 서로를 발견하게 해준 그 경이로운 만남마저도 실추하게 될지 모른다는 그런 두려움 속에 산다.-282~3쪽

사랑의 근심은 육체적인 노동만큼이나 육체를 혹사시키고 소모한다. "나는 너무도 괴로워했다. 하루 종일 사랑하는 이의 이미지와 싸웠더니 밤에는 잠이 잘 왔다"라고 누군가는 말한다. 베르테르 또한 자살하기 바로 직전 침대에 드러누워 오랫동안 잠을 잤다.-290쪽

결국 내가 매달려 있는 질문은, 그리하여 내가 그 사람의 얼굴에서 끈질기게 그 대답을 요구하는 것은 난 당신에게 어떤 가치가 있죠?라는 질문이 아닐까?-305쪽

반과거는 매혹의 시제이다. 그것은 살아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또 움직이지 않는다. 불완전한 현존, 볼완전한 죽음. 망각도 부활도 아닌, 기억의 기진맥진한 미끼. 그 기원에서부터 하나의 역할을 하기를 열망하는 장면은 추억 속에 자리한다.-309쪽

그대로 TEL.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하는 이를 정의해야만 하는 그 끊임없는 요청 앞에 자신이 내리는 정의의 불확실성 때문에 괴로워하면서 모든 형용사가 배제된, 있는 그대로의 그 사람을 받아들이는 지혜를 가질 수 있기를 꿈꾼다.-314쪽

성적인 쾌락은 환유적인 것이 아니다. 일단 얻고 나면 끝이 나는 그런 것이다. 그것은 언제나 닫힌 축제, 잠시 열린다 해도 금지에 의해 통제를 받는 그런 축제이다. 반대로 다정함은 무한한, 충족될 줄 모르는 환유이다. 다정한 몸짓이나 에피소드(어느 날 저녁의 그 감미로운 조화)가 중단될 때 내 마음은 찢어지는 듯하다.-319~20쪽

완전한 결합일나 "유일하고도 단순한 즐거움이요" "흠도 불순물도 없는 기쁨이자 꿈의 완벽함이며, 모든 희망의 종착역이요" "신과 같은 찬연함이다." 그것은 분리되지 않는 휴식이자, 또는 소유권의 충족이다. 우리는 서로를 절대적으로 자기 것으로 만들어 즐길 수 있기를 꿈꾼다. 그것은 결실(fruitif)의 결합이자 사랑의 향유(fruition)이다

"예전의 완전한 것을 그리워하고 욕망하는 마음을 우리는 사랑이라 부릅니다."

미치광이 같은 커플에서 부부의 외설스러움이 생긴다(한 사람은 다른 한 사람을 위해 평생 음식을 만든다.)-321쪽

사랑은 눈을 멀게 한다라는 속담은 거짓말이다. 사랑은 오히려 눈을 크게 뜨게 하며, 명석하게 만든다. "나는 당신에 대해, 당신에 관해 절대적인 앎을 갖고 있다."

그는 에메트(Emeth), 즉 진실이라 불렸으나 사람들이 한 글자를 지워 버리자 메트(Meth), 즉 '그는 죽었다(il est mort)가 된다.-328~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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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늘빵 2008-12-25 10: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홋 크리스마스에는 사랑을.

반딧불이 2008-12-25 12: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시 읽어도 여전히 가슴을 치는군요. 메리크리스마스요~

Alicia 2008-12-25 17: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크리스마스에 읽는 사랑의 단상. 좋아요. :)

Arch 2008-12-26 12: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니까 멜기님!
사랑의 단상을 다 읽은거랍니까? 오호! 전 맨날 들고 다녀도 거북이 걸음만큼도 못나갔는데.(거북이 미안) 같은 책인데도 나와 밑줄이 다르시네요. 우리 성실한 멜기님. 메리 크리스마스셨죠?
 
괴물의 탄생 우석훈 한국경제대안 4
우석훈 지음 / 개마고원 / 2008년 9월
평점 :
품절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 마태복음 7:20  
   

이명박 정부가 들어선지 1년이 넘었다. 지금으로부터 1년 전, 온 나라가 "경제를 살리자"는 구호 아래 저마다 "경제! 경제!"를 외쳤고, 지금의 이명박 정부를 탄생시켰다. 이명박은 "경제, 경제"를 외쳤고, 과연 '천국'에 들어간 것이다. '경제'는 우리사회의 오랜 숙명이요 정의다. "잘 살아보자"는 구호는 수십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유효했고, 이명박의 리바이벌 속에 새 정부를 탄생시켰다. "잃어버린 10년"에서 잃어버린 대상은 무엇보다 '경제'였고, 우리는 저마다 '경제'를 염원했다. '천국'으로 들어간 이명박은 그 잃어버린 '경제'를 찾아주마 하고 굳게 약속하고, 천국의 집, '청와대'에 입성한 것이다.

세계적 경제 위기 속에서 우리 사회는 휘청대고 있다. 모든 뉴스가 전하는 소식에 대다수의 사람들은 울고 있다. 고등어니 갈치니, 반토막이니 다섯토막이니 하는 소리가 씁쓸한 개그로 다가오는 것은 우리네 해학인지 모르지만, 듣는 이에 따라서는 자조적 풍자의 칼날에 상처를 입고 있을 것이다. 누구든 오늘날의 경제(상황)을 말하며, 죽을 지경이라 하소연 하지만, 저마다 말하는 그 '경제'는 엄밀한 의미에서 차이가 있는 것 같다. 우선, 나의 경우 경제는 여전히 소원한 대상일 뿐이다. 세계 경제의 위기가 현재로서는 내게 직접적으로 준 폐해는 없어 보인다. 그렇다고 이것이 나와는 무관한 것이라고 하기에는, 우리 사회가 어떤 식으로든 '경제'에 엮여 있음을 인정해야만 하겠다. 한갓 어린아이에게도 그 책임여하에 관계없이 경제는 치명적일 수 있는 것이니까.

사실 '경제'라고 하는 것에 나는 학문적으로나 현실적으로 관심 밖의 것이었다. 그런 점에서 오늘날의 경제 위기를 대하는 나의 자세는 여전히 관망이다. 쏟아지는 경제 위기 뉴스에 지겨워하며, '거 좀 잘 하지"라고만 생각할 뿐이다. 이런 나에게 누군가는 비난할지 모른다. 우리는 경제와 직·간접적으로 무관치 않기에, 그저 관조하고 관망하는 것은 무책임한 것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내가 무엇을 하여 이 경제를 살릴 수 있단 말인가?

'경제(經濟)'라는 것은 '경세제민(經世濟民)'의 준말이라고 한다. "세상을 다스리고(경영하고), 백성을 구제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여기서 '經'은 '治'와 통한다. 그런 점에서 이 '경제'란 말은 다분히 지배자의 입장에서 국가를 운영하고 백성을 다스리는 것을 의미한다. 유교적 사회에서 '경세제민'은 하나의 왕도였던 것이다. 이것은 근대 민주적 성격의 사회에서 추구되어야할 '경제'와는 사뭇 다른 양상을 보인다고 하겠다. 그렇다 하더라도, 오늘날의 '경제'가 최소한의 '경세제민'을 이루고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다행이라 할 것이다.

서양에서 'Economy'라 하는 것을 우리는 '경제'라고 번역했다. 그런데 이 단어의 어원을 찾아보면, 그리스어의 'oikos'와 'nomia'의 합성으로, "집을 관리하다"의 의미였다. 달리 말하면 '가정살림'이라고 직역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것은 '절약'의 의미가 강조되고 있는 단어라고 할 것이다. 이 단어가 우리에게는 '경제'라고 번역되지만, 이런 점을 미뤄볼 때, 서양의 'Economy'는 '제(濟)'에 해당된다고 하겠다.

여러 점에서 동양의 경제와 서양의 'Economy'는 다른 면모를 보인다. 근대적 성격의 경제는 서양에서 들여온 것이지만, 오늘날의 경제는 또 이와는 다른 양상과 모습을 보이는 것 같다. '경제'에 대한 학문적 정의로서 "생산, 분배, 소비의 순환으로 이루어지는 부의 사회적 재생산 과정"이라는 것도 현실적 경제와는 정확히 부합한다고 보기도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한국사회에서만 보더라도 이 '경제'의 의미는 계층, 세대, 지역, 계급 등에 따라 저마다 다른 것 같다. 경제적 여건에 따라 계층을 구분할 때, 부유층, 중산층, 서민층, 빈곤층 등으로 나는다면, 이들에게 의미하는 '경제'는 천차만별이다. 서민, 특히 빈곤층에게 '경제'는 하루하루를 연명할 수 있게하는 그 어떤 것인 반면, 중산층에게 경제는 현 상황을 유지하면서 좀더 재산을 늘리고, 보다 풍요로워지는 것을 의미한다. 반면, 극소수의 부유층에게 경제는 어떤 의미일까? 나는 쉽사리 상상하기 어렵지만, 이들에게 '경제'는 곧 '자신'이 아닐까 싶다. 돈과 권력을 자유자재로 부리고 이 사회를 지배하며, 절대자가 되게 해주는 것이 곧 이들에게 '경제'의 의미이다.

이명박 대통령이 목도리를 건네준 그 시장 아주머니에게 경제는 무엇일까? 배추 파는 아주머니에게 경제는 배추 한 포기를 더 파는 것일테고, 국밥집 주인에게 경제는 국밥 한 그릇 더 파는 것일테다. 강남의 복부인에게 경제는, 땅을 사랑하는 것이고, 부동산 가격이 상승하는 것이다. 오늘날 직장인들에게 경제는 주식과 펀드가 대박을 터트리는 것이다. 이것은 "경제를 살려야 한다"는 대명제가 지니는 각각의 모습들이다.

이명박 정부가 "경제를 살리겠다"는 약속은 지난 1년간 급하게 진행되고 있다. 분명히 그들은 약속을 지키고 있다. 이들은 '경제'를 살리겠다고 했으도, 우리 사회 속의 다양한 경제의 의미와 모습들을 특정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들이 외치는 '경제, 경제'가 우리 어린 백성들은 모두 자신이 의미하는 경제일 것이라고 오해했다. 더 악화된 경제 상황 속에서 현 정부에게 왜 공약을 제대로 이행하지 않는가 라고 반문할 수 있을까? 내가 볼 때 현 정부는 정확하게 그 공약을 이행하고 있다고 하겠다.

그들이 말했던 경제는 다름 아닌 부유층을 위한 경제였다. 이는 이전에도 폭로되었던 바지만, 우리는 애써 간과했고, 그럼으로서 우리는 그들이 거짓말쟁이였다고 욕한다. 결과적으로 그들은 거짓말을 한 적이 없지만 말이다. 부유층을 위한 경제, 그들만 만들어가는 경제를 살펴볼 때, 여기에는 동양 전통으로서의 경제, 곧 경세제민의 모습도, 서양에서의 가정살림을 의미하는 'Economy'의 모습도 찾아보기 어렵다. 이렇게 해서 만들어지는 사회는 곧 '괴물'을 탄생시킬 뿐인 것이다.

자칭 C급 경제학자 우석훈은 이러한 '괴물'을 탄생시킬 한국사회의 경제의 구조적 모순과 문제점들을 파헤친다. 그것이 바로 "한국경제대안 시리즈"다.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 1권 『88만원 세대』에서는 세대간 판이한 '경제'의 모순된 모습을 지적했고, 2권 『조직의 재발견』에서는 '조직의 덫'에 갖힌 한국 경제를 고발한다. '평화 경제학'이라 할만한 3권『촌놈들의 제국주의』에 이어 이 책 『괴물의 탄생』은 이 시리즈의 결론으로서 세계 경제내 한국 경제의 모습과 그 결과를 예측하고, '괴물' 탄생의 비극을 막기위한 '대안'을 제시하고자 한다.

우석훈에게 있어 오늘날의 한국경제는 지극히 비정상적이다. 앞서도 말했지만, 저마다 떠벌이는 경제의 의미와 모습을 다름에도 불구하고, 경제를 이끌어 가는 지배층들을 한결같이 자신들만의 경제를 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백성을 구제한다는 제민은 방기한지 오래고, 가정살림을 돌보는 'Economy'는 가정파탄으로 향하게 하는 경제가, 오늘날 한국경제의 모습이다. 그로써 탄생하게 될 괴물은, 가히 위협적인 것임이 분명하다.

이 책 『괴물의 탄생』이 네 권의 "한국경제대안 시리즈"를 마감하면서, 예견한 '괴물의 탄생'은 이전의 1권에서부터 예상되었던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 책에서 주목할 부분은 결국 '대안'의 제시다. 어떻게 이 무지막지한 '괴물'을 '해체'할 것인가? 우석훈은 이것을 몇가지 제시하고 있다. 한국 경제에 "공공성과 생태, 문화적 가치"를 높이는 것, 사교육을 해체하고, 기존의 대학서열화를 해체하여 이른바 "국립대 통합네트워크"를 구축하는 것, 지방의 자치와 문화를 살리며, 공공부문, 특히 제3부문을 살려내어 국민 경제를 균형있게 유지하는 것이 그가 말하는 대안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사실 어떻게 보면 명철한 대안이라고 하기 어렵고, 누구나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런 뻔한 것 같아보이는 대안이 어쩌면 절실한 대안이어야 하는 한국사회의 모순을 우리는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저는 시장이 모든 것을 경정하는 상태는 지옥이고, 그렇다고 조직이 모든 것을 결정하는 상태(즉 사회주의 상태)도 지옥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두 가지 사이에서 어떻게 균형을 찾을 것인가, 그게 학자로서의 저에게 던져진 큰 질문입니다. 저는, 이 두 가지 사이에서 불안하지만 안정성을 잃지 않는 국민경제, 그것이 바로 '인간의 얼굴을 한 자본주의' 혹은 '신뢰의 자본주의'라고 생각하며, 한국 경제의 대안이 그런 모습 가운데 하나이기를 원합니다. 그런 제3부문이 정상적으로 작동할 때, 그것이 곧 장기적으로 평화를 담보하는 평화경제라고 저는 봅니다. 그래야만 지금과 같이 토목경제가 해체되고, 한반도 생태계와 국민경제가 최소한의 공존을 추구할 수 있는 생태적 전환이 가능할 것입니다." 

 
   

우석훈이 추구하는 "인간의 얼굴을 한 자본주의"를 나는 그리 기대하지 않지만(인간의 얼굴을 한 괴물은 괴물일까? 인간일까?) 많은 부분 그의 말에 긍정하고 동의한다. 평화경제로 가는 길에 우리가 반드시 넘어서야할 것은 분명 '괴물'을 무너뜨려야 한다는 것일테다. 그런 점에서 우석훈이 "왜 경제성장이 필요한가, 여기에 대한 철학적 질문이 오히려 지금 단계의 한국 경제에 절실한 질문"이러고 할 때, 이 질문을 한다고 그들이 어떤 대답을 내놓을지 나는 기대하기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우리 모두가 만들어낸 시스템이 괴물의 모습을 하고 있"다고 할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비단 "앞으로 몇 년간 내리게 될 수많은 경제적 선택과 개인적 판단, 그것들만이 우리가 이 불행한 흐름에서 벗어나 살 길을 찾는 데에 현재로선 미결인 채로 남은, 거의 유일한 요소"라고 찝찝한 자위만 할 일은 아닐지도 모른다. 그리고 우석훈은 "우리는 지는 법이 없"다고 말한다. 그래서, 우리는 좀더 급진적인 방법들을 택하면 안 될까? 아직은 잘 모르지만, "10년 후 사교육 없는 한국, 완전고용의 한국, 평화국가 한국, 그리고 생태국가 한국에서 우리 모두 다시 만났으면 한다는 희망"을 말하기 위해서는 우석훈의 소극적 자위 이상의 그 무엇이 필요한 것이 아닐까 싶다.

얼마전 영화 <괴물>이 흥행한 적이 있다. 한강에 출현한 괴물을 무찌르는 것이 가능했던 것은, 비록 소수지만 가족이었고, 그 가족의 연대였다. 오늘날 우리에게 필요한 '괴물을 무찌르는' 유효한 방법을 이 영화에서 배워야 할 것이다. 우리 사회의 민주 주체들의 연대를 통해 나는 우석훈이 희망하는 그것을 얻어낼 수 있다고 본다. 그럴 때에 우리는 "지는 법이 없"는 것이다. 역사의 심판, 결국은 정의가 승리한다는 그런 마스터베이션은 뒤로 미루고, 지금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가 서로 살을 부비며, 연대하고 보다 적극적으로 이 현실을 타개해 나가는 것이 필요한 것이 아닐까? 우석훈이 제시한 그러한 대안을 목표로 삼아도 좋을 것이다. 그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 우리는 어떻게 할 것인가를 우석훈과는 조금 달리 택할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우리가 "경제, 경제"를 외쳐댔지만, 그래서 이명박은 '천국'에 들어간 것 처럼 보이지만, 천국에는 "아버지 뜻대로 행하는 자"만이 갈 수 있다고 했다. 이명박 정권 하에서 이명박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여 천국에 들어갈 자로 이 리뷰를 읽는 당신이 해당될 것은 아닐것이 확실하다. 그리고 이명박 대통령이 강부자 뜻대로 행할 때 그가 천국에 가기는 어려울 것이다. 이 사회를 지도하고 경영하는 이들은 "국민 뜻대로", 나아가 우리의 모습을 우리 뜻대로 만들어가야 하지 않을까? 그럴 때에 우리 사회는 천국 언저리에는 도달할 수 있을 것이다. 천국은 아버지 뜻대로, 우리 사회는 이 땅을 살아가는 우리 스스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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