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블로그 - 역사와의 새로운 접속 21세기에 조선을 블로깅하다
문명식 외 지음, 노대환 감수 / 생각과느낌 / 2008년 1월
평점 :
절판


'블로그(blog)'는 원래 우리말이었다? '카페'도 실은 우리말이다? 조선시대에도 블로그를 운영하고 인터넷 카페가 있었다고 주장하는 그야말로 기상천외(奇想天外)하고 황당무계(荒唐無稽)한 책이 있다. '블로그'는 원래 우리말 '불로구(不怒口)'였고, '카페'도 '갑회(甲會)'였단다. '불로구갑회복원위원회'에서 편저한 이 책 『조선블로그』는 그 생생한 증거들을 담아놓고 있다. 21세기의 전유물로만 여겨졌던 블로그가 조선시대에도 있었다니? 믿어지시는가? 믿거나 말거나.

사실 이 책은 서문에서도 밝히고 있지만, 얼마 전 발견된 '불로구(不怒口)', '갑회(甲會)'라고 적혀있는 고문서들에서 아이디어를 가져왔다. 이 고문서들의 내용이 오늘날 우리가 블로그나 카페에 올리는 글들의 성격과 매우 비슷하였다고 한다. 말하자면 당시에 인터넷과 블로그가 없었을 뿐이지, 그들은 오늘날 우리가 하는 블로그질을 불로구에 했었다는 거다. 여하튼 이런 우연한 발견에 힘입어 편저자들은 역사적 인물들이 '블로그'질을 하고 인터넷 카페를 한다면 어땠을까를 가정한다. 그렇게 태조 이성계와 세종대왕, 이순신이 블로그를 만들고, 실학자들이 모여 카페를 개설한다. 가상의 일이지만, 사료에 근거해 그럴 듯 하게 꾸며놓은 이 블로그와 카페에 접속하는 즐거움이 남다르다.

이 기발한 아이디어에만 감탄하고 말 일이 아니다. 더욱 감탄할 것은 역사상의 인물들이 21세기에 재탄생해 우리와 같은 인터넷 공간에서 일촌이 되고 이웃이 되어 그 속내를 솔직히 내뱉는다. 블로그나 카페에서 내뱉는 보다 솔직하고 거짓없는 글들에 네티즌들이 공감하고, 때론 논쟁하듯이, 편저자들은 철저히 역사상의 인물들을 21세기적 개인으로 창조해 낸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 역사적 고증에 근거한 것이다. 그것이 어느 정도 한계가 있지만, 이 색다른 시도에 역사는 어느덧 우리가 즐찾한 여느 블로그처럼 친근해 진다.

이성계와 일촌을 맺고, 세종대왕 블로그를 즐찾하면서, 의병 카페에 가입하고, 실학 카페에 정회원이 된다? 비록 그것은 가상의 일이지만, 역사 속 현장과 시공간으로 깊이 들어가 그 당대 역사 인물들과 동시에 호흡하게 만든다. 이것은 역사를 보다 흥미진진하게 체험하게 한다. 가령, 이순신에게 응원의 댓글을 달면 더욱 잘 싸워줄 것만 같고, 정암에게 딴지를 걸면 "그냥 가던 길이나 가시지요."라는 싸늘한 댓글이 날아올 것만 같다. 이것은 역사를 보다 생생하게 재현시키는 탁월한 역할을 담당한다. 누가 생각이나 했겠는가? 역사 속 인물의 블로그를 즐찾한다는 것을.

아무튼 저자들은 이런 획기적인 기획을 앞으로 계속할 생각인 듯 하다. 고려 블로그도 나오고 삼국 시대 블로그도 나올 예정이란다. 싸이 미니 홈피와 접목해 보는 것도 재밌을 것 같다. 무엇보다 블로그가 좋은 장점은 역사의 대상으로서만 제시되는 역사 속의 인물들의 속내가 비록 가상의 결과물이긴 하지만 비교적 사실에 가깝게 비춰진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보다 그 인물에 가까워질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참신한 노력에 찬사를 보내며, 이 기획들이 꾸준히 출간되어지길 기대한다. 


댓글(3)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웽스북스 2008-03-03 23: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우 재밌겠는데요?
멜기님 저 쾌도홍길동 1회 봤어요 ㅎㅎ 나름 재밌던데요?

마노아 2008-03-04 00: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책 아주 재밌게 읽었어요. 아이디어가 어찌나 번뜩이던지요^^

순오기 2008-03-06 08: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마노아님이 주신 민경이 책으로 봤지요.
창의성이란 게 이런 거구나~ 감탄하면서...^^
 
박노자의 만감일기 - 나, 너, 우리, 그리고 경계를 넘어
박노자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08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박노자 선생님께

안녕하십니까? 오슬로의 먼 하늘 아래에서 강건하신지요? 저는 선생의 10년 독자이자, '88만원세대'란 이름조차 갖지 못한, 대한민국의 30대 초년병입니다. 먼저, 이렇게 선생께 편지를 띄우게 된 것은, 최근 펴낸 선생의 『만감일기』을 읽고 10년 독자로서 느낀 바가 남다르기 때문입니다. 무언가 선생께 한풀이도 하고, 고백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선생의 일기가 던져주는 "그 어떤 정답도 제공해" 주지 않지만, 그 뜨거운 '화두'들에 저는 어떤 식으로든 반응하고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선생의 오랜 독자로서, 매번 선생의 저서들은 나온 즉시 구해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번 『만감일기』도 읽은 것은 몇 날 전의 일입니다. 읽는 내내 선생의 "무거운 번뇌, 번민"들이 제게도 뜨겁게 다가와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선생께 이렇게 편지를 띄우게 된 것이지만, 이렇게 쓰기까지는 여러번 찢고 다시 쓸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우연찮게도 이명박 씨가 제17대 대통령으로 취임한 날이더군요. 취임식을 지켜보면서, 선생께 편지 띄우기를 더는 미룰 수 없었습니다.

얼마 전 대한민국의 20대에게 '88만원세대'라는 자랑스러운(?) 이름을 부여해 준 우석훈 선생의 책 『88만원세대』가 화제가 된 적이 있습니다. 그 후로 여전히 이 '88만원세대'는 착취와 억압 속에 사는 이 시대 20대들에게 비극적이게 뜨거운 화두로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이 '88만원세대'라는 명명 속에 제가 들어갈 자리는 없는 것 같습니다. 저는 이제 30대의 반열에 들어섰고, 이제는 이 사회의 그 비열한 메커니즘 속에서 살아남기에 바등거릴 수 밖에 없는, 지금의 20대와 함께 바리케이이드도 짱돌도 들지 못하는, 이도저도 할 수 없는 그런 처지일 뿐입니다.

제 20대의 오롯한 10년을 저는 선생의 독자로 살아왔습니다. 그렇게 서른이 되고, 지금에 이르렀지만, 어떻게 된 것인지 제 삶은 점점 더 가난해지고 비참해 지는 것만 같습니다. 선생을 읽는다는 것의 결과였던 것일까요? 이런 의문이 선생께는 죄스러운 것이지만, 선생이 부르짖던 좌파적 심성들에 공감하고, 그렇게 살고자 했지만, 지금의 제 현실, 우리 현실은 그 전보다 조금도 나아진 것이 없지 않습니까?

그러나 저는 지금 가만히 생각해 봅니다. 제 20대의 10년을 선생을 알지 않았더라면, 선생을 읽지 않았더라면 지금의 저는 어땠을까? 지금의 제 삶이 조금은 여유가 있었을까? 이 사회가 한결 좋게 여겼을까? 삶에 희망이 있었을까? 저는 그랬을 것이었다고 봅니다. 선생을 알지 못했고, 선생의 사유들을 읽지 않았었더라면, 제 20대의 10년을 타인을 이기기 위해 보다 치열하게 살았을 것이고, 사회의 경쟁 속에서 보다 가열차게 싸워 이겼을 것이고, 경제적 부를 꿈꾸고, 이 나라 이 민족의 부국강병을 꿈꾸며, 언젠가 나도 부자로 살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품었을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지금, 박노자 선생을 알고, 선생의 사유에 지극히 공감하는 지금으로서는, 그 어떤 빛과 희망도 이 사회에서는, 지금의 제 현실에서는 찾을 수가 없습니다.

국가주의라는 이데올로기 하에서, 모든 국민이 국가에 충성하고 희생할 것을 강요당하고, 신자유주의라는 무자비한 메커니즘에 갇혀 인간이 인간을 밟고 뭉개야 하며, 내 민족, 내 나라만이 제일이고, 타인을 배제하는 이 사회에서 풍요롭고 여유 있게 산다는 것은, 아니 어떻게라도 살아남는 다는 것은, 정말 생각할 수록 무서운 것이기만 합니다. "나라에 도가 있을 때에 가난하고 천한 것은 부끄러운 일이며, 나라에 도가 없을 때에 부하고 귀한 것 또한 부끄러운 일"[邦有道, 貧且賤焉, 恥也. 邦無道, 富且貴焉, 恥也.]라는 공자의 말로 위안을 삼아야 할까요? 누군가는 패배주의자의 자기 변명이라고 욕하겠지만, 적어도 선생으로부터 배운 바대로라면, 제게는 지금의 이 패배감은 어쩔 수 없는 것이겠습니다.

선생을 통해 이 사회의 배반적 역사, 국가와 제국주의의 폭력, 신자유주의의 냉혹한 무한경쟁, 타자에 대한 억압과 배척, 권위주의, 사상의 자유에 대한 억압과 구속 등이 얼마나 뿌리 깊고 굳건하게 작동하고 있는지를 알게 되면서, 저는 누구 못지 않게 분노하고 아파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분노하고 아파하는 것 뿐이었습니다. 거기에서 한 걸음도 더 나아가지 못했습니다. 가령 선생은 이렇게 말합니다.

   
  피부가 검은 청년들을 노르웨이 오슬로 시의 캄캄한 길거리에서 갑자기 만날 때 나는 거의 무의식적으로 '겁'을 느낀다. 이것을 인터넷 일기에서 솔직히 '고백(?)'할 때 무의식 속에 내재돼 있는 '나'의 인종적 편견을 스스로에게 알려 '자정'을 다짐함으로써 나름의 반성을 이룰 수 있는 것이다. 또 이를 읽은 독자들이 '아, 나에게도 그러한 부분이 있구나!'라며 자신들의 모습을 발견하여 같은 반성의 길로 간다면 그것이야말로 '소통'의 순기능이 아닐까?(7쪽)  
   

도대체 저는 얼마나 고백하고, 자정을 다짐하며, 반성해야 할까요? 선생이 줄곧 비판해 온 그것들을 제 몸이 무비판적으로 행하고 있는 것을 자주 볼 때마다, 소름이 끼칩니다. 그때마다 반성은 한다지만, 또 반복하는 저를 봅니다. 선생의 독자로 10년을 살아왔는데도 말입니다. 그때마다 뼈아프게 아파하고, 치를 떨며 분노하고, 이 사회의 그 모든 악을 몰아낼 듯한 의분을 갖지만, 거기까지 뿐입니다. 선생은 고백하고, 자정하며, 반성하는 '소통'을 말하지만, 그러한 소통을 통해 변화와 행동으로 나아가는 것을 바라는 것이 아닙니까? 왜 저는 그러하지 못 하는 걸까요?

솔직히 이 현실을 살아가는 것이 힘겹습니다. 더 솔직히는 잘 살고 싶습니다. 남보다 더 부유하고, 건강하며, 풍족하게 즐기며, 여유롭게 살고 싶습니다. 그러자면 이 사회가 원하는 대로, 남을 이기고, 그들 위에 홀로 우뚝 서야만 할 것입니다. 그렇다고 지금의 제가 그것을 원하기만 하면 이룰 수 있는 이 사회가 요하는 어떤 능력도 힘도 소유도 전혀 없습니다. 그러나 저는 선생을 통해서, 이 모든 것이 허상이고 허황된 이 사회 지배층들의 교묘한 술법임을 알게 되었고, 머리속에서나마 함께 공존하고, 남을 존중하며, 가난한 자와 소외된 이들에 대해 함께 연대하고, 사회 곳곳의 그 악한 이데올로기에 맞서 부르짖고, 고발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것을 잘 알기에, 지금은 무척 괴롭고 아픕니다.

선생이 꿈꾸는 "'나'와 '타자' 사이에서 지위와 돈, '국민에의 소속' 여부 등의 매개가 없는, 진정한 의미의 공산적 사회"를 선생의 독자로 살아오면서 저도 꿈꾸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사회는 그것을 좌파라 욕하고, 빨갱이라 낙인 찍으며, 강한 거부감을 표시합니다. 가까운 친지에게도, 친구에게도, 그런 저의 생각과 사상을 말하기가 무서울 정도입니다. 선생도 느끼듯이 이것은 "우리로부터 계속 멀어지는 것이 아닌가 두렵"습니다. 그래서 이렇게라도 선생께 한탄하고 울부짖지 않고는 참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대한민국의 제17대 대통령에 이명박 씨가 취임하면서 말한 바는, 기업이 잘 되는 나라, 경쟁력 있는 나라, 그 경쟁에서 살아남아 이명박처럼 성공의 신화를 이루는 나라를 만들겠다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저는 향후 5년의 절망을 상상했습니다. 제가 너무 지나친 것입니까? 어쩌면 선생도 저와 같은 절망을 보시지 않았을까 합니다. 이 현실에서 저는, 그리고 선생은, 나아가 선생께 공감하는 우리들은 어떻게 살아가야 하겠습니까? 앞으로도 선생의 글을 꾸준히 읽어간다면 그 해법을 찾을 수 있을까요? 고민하지 않고 생각하지 않으며 해답만을 요구하는 어리석음인 줄 알지만, 얼마나 더 그 답을 찾고자 괴로워 할 수 있을지 저 스스로도 저를 믿지 못할 것만 같습니다.

춘향전의 나라가 그리워 이 땅에 오셨다고 하셨지요? 대한민국이란 나라의 국적을 가지고 계시지만, 선생이 계시는 곳은 먼 하늘 너머 노르웨이의 오슬로입니다. 그리고 선생은 춘향전의 아름다움보다 이 나라 이 땅의 잔인하고 참혹하며, 무자비한, 폭력적 현실들을 더 많이 알게 되셨습니다. 그런데도 여전히 이 춘향전의 나라가 그리우십니까?

   
  글쎄, 아집인지는 모르겠지만, 북방의 먼 땅에서 매일 밤 한국의 산들을 머릿속에 떠올리며 향수의 눈물을 흘릴지언정 그 '나리님'들에게 백기투항할 생각은 없다. 이건 이념문제 이전에 인간으로 존재할 것이냐 말 것이냐의 실존적 문제이다. 물론 이용 가능한 모든 방법들을 다 동원해, 국내 대학들이 학생과 교직원에 의해 민주적으로 운영되는 자율적인 공공공간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하겠지만, 이 '작은 왕국'들이 민주공화제가 되기 전까진 거기에서 녹봉을 받아 먹고살긴 싫다. 물론 어느 날 향수가 하도 깊어져 나중 일은 생각도 안 하고 그냥 훌쩍 한국으로 돌아가버릴지도 모르겠는데, 어차피 나 같은 사람을 받아줄 데도 없을 테니 다 실체 없는 공상인 듯도 싶다. 어쨌든 '나리님'이 영접받는 광경을 목도한 그때 그 순간은 내겐 절망의 순간이었다.(34쪽)  
   

지금까지 선생의 글들을 읽으며, 저는 선생의 그런 절망의 순간들을 수도 없이 보았습니다. 구태여 태어난 나라를 뒤로 하고, 집도 절도 없는 이 나라의 국적을 갖은 것은 왜인지 묻고 싶습니다. 애써 좋은 것만 보고, 즐거운 것만 알고, 행복하게 사실 수는 없으셨던 건가요? 10년의 독자에게 선생은 선생의 그런 절망만을 얘기해야 했던 것입니까? 누군가는 선생을 일러 독설가라고 말하더군요. 그렇게 볼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선생을 외부인으로 치부하고 내 나라, 내 조국만을 감싸고 돌 때에 할 수 있는 말입니다. 선생은 더 이상 외부인이 아니기에, 선생의 그런 독설이 뼈아프게 다가오는 것입니다.

저는 선생을 '경계인'이라고 말해 왔습니다. 어디까지나 현실이 그러합니다. 이 나라 이 땅에서 선생을 그 경계 내부로 진정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은 찾아보기 힘들 것입니다. 저 또한 그렇습니다. 그러나 선생은 내부로 들어오기를 거부합니다. 그러면서 우리들에게 말합니다. 우리들도 선생이 있는 그 경계로 나오라고 말이죠. '나'와 '타인'의 그 경계에 설 때, 우리 사회는 선생이 꿈꾸는 그 이상적 사회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생각 가운데는 그 경계에 설 것을 상상하지만, 내부에 있는 제 무거운 몸은 한 발걸음도 경계쪽으로 옮기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저는 '마네킹'이 되고 '로봇'이 되어가고 있는 것인가 봅니다.

   
  끔찍한 사실이지만 우리 사회의 개인 대다수는 '개인'이라기보다는 '마네킹'에 더 가깝다. 무슨 제복이나 장교복, 귀족복을 입히면 입힌 대로 그 모델이 되는 것이다. 외물로부터 자유로운 '나'는 없어지고 외부의 '표준' 욕망들이 그대로 내면에서 복제되고 만다. SF 영화에서 로봇이 세상을 지배하기도 하지만 사실 지금 우리 사회에도 겉으로만 '인간'처럼 보이는 '로봇형 인간'의 비율이 꽤나 높다. 더 끔찍한 문제는 그들을 프로그램하는 자들도 '로봇'에 불과하다는 사실이다.(40~41쪽)  
   

죄송합니다만, 여기서 이 편지를 그냥 접겠습니다. 괜히 한탄만 하고 말 것 같아 부끄럽습니다. 여기까지 적고 더이상을 말하지 않아야 될 것 같습니다. 좀 더 선생의 '만감'을 화두로 삼아 되새겨야 할 것이란 생각이 듭니다. 그렇게 1년 후, 5년 후, 아니 10년 후면, 또 이런 한탄만 하지 않을지도 모르겠고, 어쩌면 내일 또다시 오늘 말하지 못한 남은 속내를 참지 못하고 토해낼지도 모르겠습니다. 오늘은 자꾸 정신이 혼미하여져서 그만 그쳐야 되겠습니다. 선생께 이 마치지 못한 편지가 전해질지는 모르겠지만, 이 편지가 선생께 일말의 누가 되지 않을까 염려할 뿐입니다. 이국의 먼 하늘 아래 오슬로에서 건필하시길 기원합니다.

2008년 2월 25일 자정에
선생의 10년 독자 올림.

(이 편지가 공교롭게도 내 100번째 리뷰가 됐다. 그런데 이것은 공교로운 것만은 아니다. "讀書百遍義自見"이라고 했던가? 어쩌면 이렇게 100권의 책을 읽고 되새김질 한 나에게도 일말의 "스스로 깨우침"의 그 경지에 살짝 턱이라도 걸게 된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그랬으면 좋겠다. 100번째 리뷰를 쓰면서, 그 백편이 주는 '義自見'을 생각하자니, 이 100번째의 자리에 무언가 뜻과 의미를 두어야만 하겠다고 생각했다. 그런 중에 『박노자의 만감일기』를 읽었던 것이고, 오래 묵혀두다가 이렇게 100에 맞춰 리뷰, 아니 편지를 썼다. 100번째 리뷰가 다 쓰지 못한 편지가 될 줄은 몰랐지만, 나 스스로를 돌아보게 하고, 조금이나마 내 삶에서 스스로 깨닫게 도와준 것은 바로 박노자였다. 그러하기에 이 100번째가 박노자의 차지가 되기에 마땅했던 것이다. 아무튼, 박노자 선생께 감사를 드린다.)


댓글(14)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순오기 2008-02-26 02: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정에 쓴 편지를 며칠만에 알라딘에 들어온 제가 읽게 되었군요.
우리 딸도 이 책을 읽고 많은 공감과 울분을 느낀다고 하더군요.
전, 아직 읽지 못해서...

멜기세덱 2008-02-26 14:52   좋아요 0 | URL
ㅎㅎ 어쩐지 제 서재가 그간 고요하더군요.....ㅎㅎ

Jade 2008-02-26 07: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읽는 사람의 가슴도 울분으로 들쑤셔놓으시네요. 하지만 "어떤 능력도 힘도 소유도 전혀 없"다는 이유로 저들의 논리에 포섭당하는 것이야 말로 저들이 가장 바라던 것이 아니겠어요? 분노하고 아파할 수 있는 감수성 이야말로 무언가 달라질 수 있는 시작이라고 믿어요 저는 ㅎㅎ

그런데 멜기님, 이런 절절하고 진심어린 편지는 반려자분께 쓰셔야지요! ㅎㅎ

멜기세덱 2008-02-26 14:52   좋아요 0 | URL
이런 편지를 보냈다가는 따귀맞기가 십상 아닐까요? ㅋㅋ

2008-02-26 12:5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02-26 14:53   URL
비밀 댓글입니다.

홍수맘 2008-02-26 17: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휴~. 짐 옆지기가 읽고 있는 중인지라 기다리고 있는데 님 글을 보니 빨리 읽고 싶어 근질근질 하네요.

잘 지내고 계시죠? 서서히 우리 홍/수의 방학이 끝나가니 그땐 더 열심히 마실 다닐께요.

멜기세덱 2008-02-26 23:36   좋아요 0 | URL
홍/수 때문에 제가 좀 서운했었더랍니다....ㅋㅋㅋㅋ

bookJourney 2008-02-26 21: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분노하고, 아파하고, 스스로를 되돌아보는 ... 그 순수함이 부럽습니다.

멜기세덱 2008-02-26 23:37   좋아요 0 | URL
순수하지 못해서가 문제에요...제가....ㅋㅋ

프레이야 2008-02-26 23: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주 새로운 형식의 리뷰, 감명깊게 읽었어요.
경계인,에게 보내는 편지가 백번째 리뷰라니, 더욱 뜻깊습니다.

멜기세덱 2008-02-26 23:38   좋아요 0 | URL
형식을 따져본건 아니지만, 그다지 새로운 형식도 아닌 것 같은데...ㅎㅎ
근데, 따져보니깐, 이게 정확히 백번째 리뷰는 아닌 것 같더라구요...
밑줄긋기가 2개나 있어서리....ㅎㅎ

2008-12-31 00:03   URL
비밀 댓글입니다.

멜기세덱 2008-12-31 01:22   좋아요 0 | URL
좋은 지적 감사합니다.
 
법률사무소 김앤장 - 신자유주의를 성공 사업으로 만든 변호사 집단의 이야기 우리시대의 논리 10
임종인.장화식 지음 / 후마니타스 / 2008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책을 읽는 내내 떠나지 않는 물음이 있었다. 이 사회에서 "법 없이도" 살아가는 게 가능할까? 이 물음을 행간 사이사이에 심어가면서 내린 결론은, 사실 급좌절이다. 내 개인적 지론으로서는 "법 없이 사는" 사람들이 많을 수록 좋은 사회라는 것인데, 사회가 근대화되면서 이 부류의 사람들은 기하급수적으로 줄어들었다. 결국 사회는 점점 삭막해지고 피폐해졌다는 것. 경제가 제 아무리 발전하고 성장한다고 하더라도, 법이라는 억압적 체계하에서 민중은 말 그대로 착취되어왔다. 이제 근대적 산물로서의 법은 민중을 감시하고 구속해 오면서 지배층들의 지배를 공공히 하는데 봉사하여 온 것에 불과하다.

그만큼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법은 "살아남기 위해 필요한" 필요악이다. 걸핏하면 "법 대로 하라"는 인간들이 언제든지 이 법 모르고 사는 사람들을 괴롭히고 있기 때문에, "법 없이" 살 사람들이 그나마 그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이 몹쓸 법을 알기는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 사회의 이데올로기는 이 몹쓸 법을 아는 것이 힘이라고 가르친다. 그래서 그 법을 가장 잘 아는 인간들을 사회의 지도층으로 내세우고 최고의 엘리트로 대우한다. 그와 반대로 "모르면 죽어"야 한다. 모든 사회가 언제나 법을 따지고 "법 대로" 하라며 들이댄다. 도무지 "법 없이" 살 수 있는 사람이 없다. 내 지론대로라면 이 사회는 더이상 좋은 사회가 아닌 것이 된다. 아 이 참 몹쓸 세상.

내 개인적 견해의 썰을 더 풀어보면, 인류가 무리에서 부족사회, 부족사회에서 국가사회로 변화해 오면서 형성되었을 윤리라든지 도덕, 나아가 규범과 법이라는 것은 민중적 자연스러운 요구에 의한 것은 아니었다. 소수의 지배자들의 지배를 효과적이고 공공하게 만들기 위해 이런 윤리나 도덕, 그리고 보다 강력한 억압적 구조의 법이 만들어 진 것이다. 법에 대한 현란한 찬사가 사실은 다 구라요 뻥이라고 생각한다. 이 법이 수천년을 이어오면서 이제는 사회 전체를 지배하고 가둬놓아 버려서, 그 구속적 사회 안에서 살아가는 대부분의 인간들은 결국 그 법대로 살지 않으면 안 되게 된 것이다. 그러나 근대 이전까지는 "법 없이도" 살아가는 사람이 많았고, 그들은 "법 대로 하라"며 들이대지 않았다. "법 대로 하라"고 들이대는 인간들의 태반이 갖은 자들이고 착취자들이었던 것이다. 이제는 모두들 "법 대로 하라"며 떠든다. 마치 모두가 지배층이 된 양, 서로를 협박하고 구속하지 못 해 안달인 것이다. 그러나 이 사회에서의 "법 대로"는 대부분의 민중들에게는 허상에 불과하다. 결국 "법 대로"하면 더 갖은 자가 반드시 이기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무엇을 근거로? 이 책 『법률사무소 김앤장』(이하 『김앤장』)은 그 근거를 '확실히' 보여준다.

『김앤장』을 읽으면서 더 이상 "법 없이"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이 없을 것 같은 생각은 더욱 공공해졌다. 현대적 법이 보다 민주적이고, 소수자의 인권을 보호하며, 공평무사해 졌다고는 하지만, 우리는 이런 허무맹랑한 수사를 여전히 믿지 않는다. 여전히 법은 갖은 놈들에게 유리하지 않던가? 법적으론 로펌도 아니지만 대한민국 최고 로펌임을 자랑하는 김앤장의 실체를 까발긴 이 책에 따르면, 이 최고 엘리트 집단인 로펌 아닌 로펌이 어떻게 갖은 자에 빌붙어서 지극히 "법 대로" 착취하고 억압하며, 권력에 영합하고 돈을 버는지 도무지 극악스럽지 않을 수가 없다.

법을 제 맘대로 해석하고 자유자재로 뜯어 고치면서 외국 투기 자본에 나라의 근간을 팔아먹고, 삼성 등의 재벌과 결탁하여 그들의 부를 증대시키며 그 콩꼬물에 빌붙어 사는지, 노동자들을 착취하는 세력을 대신해 그들을 정리해주는 이 법률사무소는 이 "법 대로"가 어떤 의미인지를 확실히 보여주는 예라 하겠다. 예전에도 그랬고 여전히 그러하듯이, 이들이 말하는 "법 대로"는 있는 놈 맘대로란 뜻에 다름 아닌 것이다. 있는 놈들이 잘 사는 세상은 당연한 것이겠지만, 없는 사람들도 살 만한 세상이어야 하는데, 이 법이라는 것이, 이 법을 잘 안다는 놈들이, 법 대로 한다면서 없는 사람들을 더 못 살게 구는 세상에 도대체 무슨 희망이 있을까?

더 쓰다 보면 계속 욕만 나오고, 횡설수설에 주체할 수 없게 될까봐 두렵다. 그보다는 '김앤장'에서 법 대로 하자면 "명예훼손"으로 고발해 올까봐 그게 더 걱정이다. 이쯤해선 나도 이 법을 좀 알아야 하는 것일까? 적어도 "명예훼손"에 대해서는 말이다. 법률사무소 '김앤장'에 모인 수백명의 변호사들, 그리고 전현직 "권력의 핵심"이었던 고문들이 받는 월급이 수천에서 수억에 달한단다. 새벽부터 밤 늦게까지 뭐빠지게 일해도 한 달 300벌기가 까마득한 이들이 태반인 이 사회에서 그들은 어떻게, 무엇을 근거로 그렇게 받을까? 난 이 물음에 말할 수 없다. 다만 그들이 있는한 우리 사회에서 "법 없이" 살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나도 이제 그 예외가 아니게 되어 버린 것이다. 여기에 댓글 다는 사람도 그러하다.

내가 이렇게 이 책 『김앤장』을 일독하고, 별 4개를 주며, 리뷰를 건방지게 써재끼는 것은, 여러분들께 이 책을 일독해 보십사 하는 것이다. 여러분들께 이 책을 일독해 보십사 하는 것은, 여러분들이 이 책 『김앤장』을 읽고, '아 나도 이제 법 좀 알아야겠구나'를 일깨우고자 함이 아니라, 법 없이는 못 사는 이 세상에 대해 다만 일말의 한탄이라도 좀 느끼시라는 뜻에서다. 우리 할머니, 할아버지가 그랬고, 내 부모 형제가 그랬었다. 법 없이도 잘은 아니지만, 못나게라도 근근히 살다 갔고 살아 왔다. 지금까진 나도 그랬고 여러분도 그랬을 것이다. 잘은 못 살았서도 말이다. 그런데, 더 이상 그럴 수 없을 것만 같다. 아니 그럴 수 없다. 이 노릇을 어떻게 해야 할까? 모두들 법 공부해서 판검사나 변호사가 되어야 할까? 내 머리론 곤란하다. 그러니 그냥 앉아서 뒤지는 수 밖에. 그러지 않으려면, 뭔가 해야되는데, "법 대로" 해선 그놈들에게 댈 게 아니지 않은가? 에라 모르겠다, 법이고 나발이고 난 모른다. 그냥 대갈빡으로 그놈들 면상에 쳐박고 싶은 심정뿐이다. 다시 말하지만, "법 없이도 사는" 사람들이 많은 세상이 참 좋은 세상이다. 그게 너무 먼 옛날의 일이어서 서럽다.


댓글(4)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08-02-05 09: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멜기세덱 2008-02-05 14:39   좋아요 0 | URL
저는 이거 나오자마자 장바구니에 집어넣는데, 우연찮게도....ㅎㅎㅎ

Jade 2008-02-05 10: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사실 '김앤장'이란 로펌이 있는지도 몰랐었어요 -_-;;

멜기세덱 2008-02-05 14:39   좋아요 0 | URL
저도 몰랐어요....ㅋㅋ
 
간절하게 참 철없이 - 2009 제11회 백석문학상 수상작 창비시선 283
안도현 지음 / 창비 / 2008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일본의 전통 시 양식 중에 하이쿠(俳句)라는 것이 있다. 이것은 정형시로서는 세계에서 가장 짧은 시 양식일 것이다. 5-7-5의 음절로 이루어진 하이쿠는 달랑 한 줄이다. 꼭 같은 것은 아니겠지만 우리 식으로하면 17자만으로 시를 쓴다는 것인데, 시가 짧은 만큼 쓰기도 쉬울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오산이다. 사실 시는 생략과 절제가 미덕이다. 압축의 미. 그것이 극도로 발휘되는 시 양식이 이 하이쿠다. 단 한 줄에 시인의 마음을 온전히 담아내는 것이 하이쿠다. 그래서 쉽지 않다. 한 줄로 시인의 마음을 담아내고 그것을 듣는(읽는) 사람들에게 큰 여운과 감동을 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기 위해서 하이쿠는 한 문장의 시 속에서 생각지도 못한 반전을 감행한다. 송곳에 찔린 듯한 딴끔한 충격. "마음을 찌르는 생의 의미가 있고, 유머가 있으며, 그리고 그림 같은 묘사가 있다." 특히 하이쿠의 대가 바쇼(芭蕉)의 시가 그렇다. 그의 시는 "단순하고, 쉽고, 운율이 있으며, 시적이다. 동시에 단검으로 찌르듯 생의 핵심에 도달한다."

일본의 하이쿠는 매력적인 시 양식임에 분명하다. 서양의 학자들도 이런 하이쿠에 많은 관심을 보이고 있기도 하다. 아무튼 이런 하이쿠를 보면서 드는 생각은, 우리나라 시인 중에 이 하이쿠를 가장 잘 쓸 것 같은 사람은 누구보다도 안도현 아닐까 하는 것이다.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너는/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너에게 묻는다」전문, 『외롭고 높고 쓸쓸한』, 문학동네, 1994.)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이, 안도현의 이 시에서는 하이쿠가 가지는 매력들을 물씬 풍기고 있다. 짧은 시일수록 그 안에 삼라만상을 담을 듯한 넓이와 깊이을 가지고 있는 듯하다. 비록 안도현은 하이쿠 시인이 아니지만, 그의 시에서는 하이쿠가 가지는 다양한 장점들을 담아내면서, 단순하면서도 쉽고, 운율감이 있으며, 시적 여운을 길게 남긴다. 그리고 우리에게 "너는/누구에게 한 번 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며 삶에 대한 날카로운 질문을 던지고 있다.

안도현은 1984년 「서울로 가는 전봉준」으로(동아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문단의 주목을 한 몸에 받으며 데뷔한 이래(엄밀히 말해 데뷔작은 1981년 대구매일신문 신춘문예에 당선된「낙동강」이다.) 시집 『서울로 가는 전봉준』(1985), 『모닥불』(1989), 『그대에게 가고 싶다』(1991), 『외롭고 높고 쓸쓸한』등을 내놓으며 작품성과 함께 대중성을 두루 인정받는 인기 시인이 되었다. 단적으로 그는 본격문학 가운데 가장 잘 팔리는 시인일 것이다. 그는 1998년 '소월시문학상'을 받으면서 그 시의 문학성도 높은 경지에서 인정을 받는다. 그러니까 우리 시인들 가운데 몇 안 되는, 작품성과 대중성을 동시에 획득하고 있는 시인인 셈이다. 그가 '소월시문학상'을 받았다는 것은 또 다른 측면에서 의미가 있기도 하다. 이 상이 소월의 시적 정취와 경향을 따르는 시인들에게만 주는 것은 아니지만, 안도현의 경우 소월의 계보를 잇는 시인으로서 이 상에 가장 적합한 인물이라고 볼 수 있다. 그의 시는 소월의 시 만큼이나 운치 있게 읊기 좋다. 이후 『그리운 여우』(창작과비평사, 1997.),『바닷가 우체국』(1999), 『아무것도 아닌 것에 대하여』(문학동네, 2005.), 『너에게 가려고 강을 만들었다』(창비, 2004.)등을 펴내며, 안도현은 그야 말로 한국의 대표시인으로서 자리를 굳건히 하고 있다.

안도현을 말하는 자리에는 으레 섬진강을 터잡은 김용택 시인을 언급하게 된다. 이 둘은 한국을 대표하는 시인으로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많은 점에서 이 둘은 비슷한 점이 많다. 이 둘의 출발도 어떤 점에서는 비슷하다. 김용택이 섬진강에 터잡은 시골 초등 교사였다면, 안도현은 전라도 이리(현 익산) 시골마을의 중등 교사였던 것이다. 그러나 안도현은 전교조 해직 교사 시절은 오래 겪는다. 우여곡절 끝에 복직이 되었지만, 이후 그는 큰맘을 먹고 교직을 그만두고 전업작가로 들어선다. 여기에는 이래저래 비판도 많았다. 그것은 차치하고 그가 글쓰고 시만 쓰며 살겠다고 나선 데에는 작지 않은 결단이 필요했을 것이다. 이 시대에 시만 쓰고 먹고 살기가 안도현인들 쉽겠는가마는, 그나마도 안도현이였기에 그에 대한 대중적 사랑이 그나마 전업작가로 나선 그를 먹여살리기가 가능했지 싶다. 어쨌든 중요한 것은 그가 전업작가로 나선 이후 더욱 아름답고 좋은 시를 내어놓느냐는 것일 테다. 내가 볼 때, 그 물음에 나는 고개를 끄덕일 수 있을 것 같다.

현재 안도현은 전업작가의 길에서 다시 선생의 길로 살짝 귀로한 것 같다. 우석대학교의 문예창작학과에서 버젓이 '교수'를 하고 있는 것이다. 교수도 선생이지만, 이전의 그것과는 물론 그 성격이 다를 것이다. 시를 평생의 업으로, 시만 쓰면서 살겠다고 나선 그가, 이제는 시인으로서 다다를 어떤 뛰어난 경지에 도달한 것은 아닐까? 시인은 애써 부인하겠지만, 나같은 범인이 선뜻 반론을 펴기에는 쉽지 않을 것이다. 그가 이제는 그처럼 시를 쓰면 살겠다는 이들에게 시의 화두를 던져주고 있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번 시집 『간절하게 참 철없이』는 교수 안도현이 제자들에게 던지는 화두이면서 시론, 시학이다. 그러므로 이번 시집은 안도현이란 시인의 시 인생에 있어 또 한 번의 중요한, 묵직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싸리꽃을 애무하는 산(山)벌의 날갯짓소리 일곱 근

  몰래 숨어 퍼뜨리는 칡꽃 향기 육십평

  꽃잎 열기 이틀 전 백도라지 줄기의 슬픈 미동(微動) 두 치 반

  외딴집 양철지붕을 두드리는 소낙비의 오랏줄 칠만구천 발

  한 차례 숨죽였다가 다시 우는 매미울음 서른 되

- 「공양」전문

 
   

이 시는 이번 시집 『간절하게 참 철없이』의 첫 머리에 실린 시다. 말하자면 서시인 셈이다. 비록 제1부 첫머리에 갇혀 있지만, 이번 시집 전체를 관통하는 키워드를 담고 있는 시다. 대부분의 시집에서 이처럼 첫머리에 얹힌 시들이 그 시집의 키워드로 기능하는 경우가 많은 것이 보통이다. 아무튼 이 시에서 안도현은 시쓰기는 '공양'이라고 말하는 듯 하다. 싸리꽃을 위한 산벌의 날갯짓, 칠꽃의 향기, 백도라지 줄기의 슬픈 미동, 소낙비의 오랏줄, 매미울음. 이것처럼 서로를 위하고, 사랑하며, 그 향기를 널리 퍼뜨리고, 슬퍼하며, 감싸주고, 울어주는 그 무게와 넓이와 길이와 깊이가 간절해 지는 것. 이것에는 '공양'하는 마음이고, 시를 쓰는 마음 또한 그러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시를 쓰는 마음이라면, 시를 쓰는 시인의 자세는 '구름'에게서 배울 수 있다. "저 구름은, 바라보는 일이 직업이다"(「독거」부분), 홀로 "우두커니 앉아 바라보기만 하는" 구름처럼 세상과 자연과 사물과 삶을 바라보는 것에서부터 시는 시작된다. 박형준이 지적하듯이 이 시집 전체가 하나의 바라봄의 시학이라고 말할 수 있을 만큼, 안도현은 그 바라봄이 어떻게 시로 태어나는지를 몸소 보여주고 있다. 또한 그의 지금까지의 시들이 보여주는 바도 세상과 자연을 간절한 마음으로 바라봄이다. 그렇게 바라보다가 "낮에 본 무릎 꺾인 어린 방아깨비의 안부를 궁금해"(「빗소리」)하는 것이 시가 된다.

시인 안도현에게 시란 '철길'이기도 하다. "멀리 가보고 싶어 자꾸 번지는 울음소리를 땅바닥에 오롯이 두 줄기 실자국으로 꿰매놓은 것"이다. "길을 달려왔으나 정작 길을 데리고 오지는 못하였다는 자책이 물소리가 되어 발목을 묶는다"(「탁족도(濯足圖)」부분)는 시인의 마음이 "두 줄기 실자국"처럼 꿰매져 시로 태어나는 것은 아닐까? 어쩌면 안도현의 시들은 "수면에 욜랑욜랑 무늬를 짓는 빛의 시문(詩文)을 베껴두었다가 밤 들면 어두운 창가에 걸어"(「탁족도」부분)두었던 것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그는 한없이 바라보다가, 달빛의 시문을 베껴두기도 하고, 멀리 바라보는 그곳에 가고싶은 마음을 "두 줄기 실자국으로" 아쉽게 꿰매놓음으로써 시를 써내고 있는 것이다.

안도현의 이런 바라봄은 그저 관조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간절한 마음이고 따스한 마음이며 애처로움의 마음이다. "기러기 알을 조심스럽게 가슴에 품는"(「기러기 알」부분) 마음이다. 때론 "밥 먹을 생각도 하지 않고 혼자 남아 날이 새도록 달을 돌리는 아이"(「목판화」부분)의 마음처럼 "참 철없"는 마음이기도 하다. "벌레도 사람도 반반씩 사이좋게 나눠먹는"(「콩밭짓거리」부분) 마음이 안도현 시인의 그 바라봄에 깊게 담겨 있는 것이다.

이런 마음은 아무래도 순수한 아이의 마음, 곧 동심이다. 그래서 일까? 어린 시절 어머니가 해주시던 맛깔스런 음식이야기가 이 시집의 제2부를 가득 채우고 있다. 그것은 시인에게 추억이고, 아름다움이며, 시간을 넘어선 오랜 사랑이다. "눈발의 이동경로를 따라 북방에서 남으로 내려왔을 것 같은" "할아버지가 맛있게 자셨"던 어머니가 해주던 '명태선'을 이제는 "아들과 함께"(「북방(北方)」부분) 맛보는 지금, 그 추억과 사랑이 시가 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먹음직한, 맛깔스러운, 담백한, 어머니의 사랑이 듬뿍 담긴, 어린 시절의 아름다운 추억이 가득한, 할아버지 할머니 그리고 아버지 어머니가 그리워지는, 애틋한 음식이다. 그래서 시는 이 음식과 같아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를 나는 음식의 시학이라고 말하고 싶다.

   
 

  통영 바다는 두런두런 섬들을 모아 하숙을 치고 있었다

  밥 주러 하루에 두 번도 가고 세 번도 가는 통통배

  볼이 오목한 별, 눈 푹 꺼진 별들이 글썽이다 샛눈 뜨는 저녁

  충렬사 돌층계에 주저앉아 여자 생각하던 평안도 출신이 있었다

- 「백석(白石) 생각」전문

 
   

안도현은 옛시인 백석을 무척 사랑한다. 백석을 생각하는 그의 마음은, 이번 시집의 제2부 음식시편들에 오롯이 담겨 있다. 무엇보다도 시인 백석이 음식을 소재로 많은 시를 써냈다는 것을 생각하면 이번 시집의 음식시편이 백석의 영향이 큼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안도현은 백석의 시에서 한 구절을 따와 시집 『외롭고 높고 쓸쓸한』의 제목을 삼기도 했을 만큼 백석을 사랑한다. 그래서일까? 안도현은 점점 시인 백석을 닮아가고 있는 것도 같다.

   
 

  건진국수에는 건진국수,라는 삼베 올 같은 안동 말이 있고 안동 말을 하는 시어머니가 여름날 안마루에서 밀가루박죽을 치대며 고시랑거리는 소리가 있고 반죽을 누르는 홍두깨와 뻣센 손목이 있고 옆에서 콩가루를 싸락눈처럼 술술 뿌리는 시누이의 손가락이 있고 칼국수를 써는 도마질 소리가 있고 멸치국물을 우리는 칠십년대 녹슨 석유곤로가 있고 애호박을 자작하게 볶는 양은냄비가 있고 며느리가 우물가에서 펌프질하는 소리가 있고 뜨거운 국물을 식히는 동안 삽짝을 힐끔거리는 살뜰한 기다림이 있고 도통 소식없는 서방이 있고 때가 되어 사발에 담기는 서늘한 눈발 같은 국수가 있고 찰방거리는 국물이 있고 건진국수 옆에 첩처럼 따라붙는 조밥이 있고 열무며 풋고추며 당파를 담은 채반이 있고 건진국수에는 누대의 숨막히는 여름을 건진국수가 안동 사람들을 건졌다는 설이 있다.

-「건진국수」전문

  새끼오리도 헌신짝도 소똥도 갓신창도 개니빠디도 너울쪽도 짚검불도 가락잎도 머리카락도 헌겊 조각도 막대꼬치도 기왓장도 닭의 깃도 개터럭도 타는 모닥불

  재당도 초시도 문장(門長) 늙은이도 더부살이 아이도 새사위도 갓사둔도 나그네도 주인도 할아버지도 손자도 붓장사도 땜쟁이도 큰개도 강아지도 모두 모닥불을 쪼인다

  모닥불은 어려서 우리 할아버지가 어미아비 없는 서러운 아이로 불상하니도 몽둥발이가 된 슬픈 역사가 있다

- 백석,「모닥불」전문

 
   

이 두 시를 놓고 보면, 시적 구조나 방법에서부터 시적정서까지도 무척 유사하다. 무미건조하게 소소한 것까지 나열하고 있는 것같지만, 그 모든 것이 유기적으로 시적 정서를 형성하고 있다. 이처럼 안도현은 어쩌면 의도적으로, 때론 무의식적으로 백석을 흉내내고 닮아가고 있다. 설마 그가 '백석시문학상'을 노리고 그런 것일까? 아니, 백석을 사랑하는 탓일 게다. 안도현의 음식 시편들이나, 백석에게서 영향을 받은 시편들이나 그것이 백석이란 한계에 머물지 않고 안도현 만의 다른 시편들로 형성하면서 또다른 시적 아름다움을 풍기는 것은, 무엇이라고 꼬집어 말할 수 없지만, 이 시편들이 우리에게 즐거움을 주는 이유일 것이다. 그래서 안도현은 백석만큼이나 사랑스럽다.

안도현은 이번 시집에서 바라봄의 시학과 음식의 시론을 정리하여 보여주고 있다고 하겠다. 그러나 거기에서 그가 백석이라는 시인에게서 느끼고 배운 바가 있음을 솔직히 고백하고 있다. 이것을 다시금 그의 제자들에게, 그리고 우리들에게 안도현의 시학으로 새롭게 재창조하고 있는 것이다. "간절하게, 간절하게 참 철없이"(「예천 태평추」부분), 그렇게 그는 시를 써왔고, 앞으로도 그렇게 시를 쓸 것이다. 그리고 우리에게도, 그 간절함과 철없는 순전함으로 시를 쓰고, 삶을 살아가면 어떨까 넌즈시 조언하고 있는 것이다. 이번 시집이 안도현에게 있어서 매우 유의미하면서도, 우리에게 또한 아름답게 가치 있음은 바로 거기에 이유가 있는 것이다.

이제 안도현은 할 일을 다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궁금한 게 없이 게을러"져도 좋고, "아무 이유 없이 걷"기도 하며, "햇볕이 슬어놓은 나락 냄새"를 맡아도 보고, "가끔 소낙비를 흠씬 맞기도 하면서, 때론 철없이 혼자 우는 것"(「가을의 소원」부분)이 소원이란다. 그렇게 "울다가 잠자리처럼 임종"을 맞이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 울음들이 있는 한, 그는 우리에게 이 시 '공양'을 멈추지 못할 것이다. 그의 울음은 곧 시가 될 것이니까 말이다.


댓글(4)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순오기 2008-01-29 02: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멜기님의 관심도서였기에 저도 사서 읽었지요. 그날 가방속에 있었고 돌아오는 전철에서 다시 꺼내든 시집.
즐거운 시간 뒤로 하고 광주입성했답니다!

멜기세덱 2008-01-30 02:14   좋아요 0 | URL
저도 며칠 전 읽었는데요, 아주 좋았습니다.ㅎㅎ
그리고 오늘 안도현, 김사인 북콘서트에 갔다가 듣지는 못하고 사인만 받아왔는데요, 항상 이분들 뵐 수록 설레요...막.....ㅋㅋ

로쟈 2008-01-29 13: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흔하지는 않은 '백석 계보'의 적통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멜기세덱 2008-01-30 02:17   좋아요 0 | URL
백석의 매력이 안도현 시인을 통해서 한층 부각되는 것 같습니다. 백석의 계보를 제가 꿰고 있지는 못하지만, 백석의 영향을 느껴지는 시들이 제법 되는 것 같아요. 김사인 시인도 그렇고요. 백석을 가히 '시인들의 시인'이라 불러도 족하지 싶어요.ㅎㅎ
 
현대문자생활 백서 우리말 맞춤법.띄어쓰기 새로운 글쓰기의 보고 세상 모든 글쓰기 (랜덤하우스코리아) 6
정희창 지음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7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랜덤하우스에서 요번에 내놓은 <세상 모든 글쓰기> 시리즈에 관심을 가지고 본 적이 있다. 그 중에서도 우리말 맞춤법에 관한 6권과 외래어 표기법에 관한 7권에 특히 주목했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내놓은 것 중에 어문규범에 관한 것은 이 2권 뿐이기 때문이다. "세상 모든 글쓰기"에 명쾌한 해법을 제시하겠다는 이 거창한 기획은 여러 다양한 종류의 글쓰기를 각 권에서 다루고 있으면서도 왜 이 어문규범을 2권 씩이나 포함하는 것일까? 그것은 어문규범이 글쓰기에 있어서 절대적인 것은 아니지만 기본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볼 때 이 맞춤법 관련 책은 시리즈의 1권을 차지했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한다. 그건 그렇고 이 시리즈가 다루고 있는 어문규범은 앞서 말했듯이 맞춤법과 외래어 표기법 만을 다루고 있는데, 추가적으로 표준어 규정과 로마자 표기법을 다루는 책도 나와야 할 것이다. 그래야 일단 글쓰기의 기본을 갖추게 되는 셈이니 말이다.

어문규범이 글쓰기의 기본적 사항이라고 말은 했지만, 사실 어떤 것이건 그 기본을 갖춘다는 것은 가장 어려운 일 중에 하나이다. 그 기본에 목을 매다보면 고루해지고 따분해지기 십상이다. 그렇다고 그 기본을 무시하면 그 이상을 이루기도 어렵다. 글쓰기에서 이 기본을 갖추는 것은 더욱 그렇다. 사실 이것은 갖출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갖추어 '가는' 것이어야 한다. 글을 쓰면서 항상 사전과 어문 규정집을 옆에 두고 틈나는 대로 찾아 살피는 것이 가장 미련하지만 효과적인 방법일 뿐이다.

내가 "가장 미련하지만 효과적인 방법"이라고 했을 때, 시중에 나와 있는 맞춤법 관련 해설서들이 저마다 자기 책들은 맞춤법을 명쾌하고 쉽게 가르쳐 준다고 뻥치고 있다는 사실을 반영하는 것이다. 흔히 말하듯이 맞춤법 또한 간단명료한 '왕도'는 없는 것이다. 그런데 저마다 자꾸 자기들 책만은 왕도를 알려주겠다고 하니, 혹시나 하는 마음에 사보게 되고 결국은 후회하게 된다. 그러나 그런 후회가 그렇게 가치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면서 하나씩 하나씩 맞춤법을 알아가는 길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여기 그런 책이 또 한 권 추가된 듯 하다. 이 책 『현대문자생활 백서 우리말 맞춤법·띄어쓰기』(이하 『우리말 맞춤법』)의 표지에는 다음과 같은 문장이 있다.

   
  정확한 의사소통의 기준이 되는 어문 규범을 실생활의 친숙한 예를 통해 스스로 익힐 수 있도록 한 어문 규범 강의. 단순히 '어느 말이 옳은가?'만 물었던 기존의 학습서와는 달리 '왜 그것이 옳은가?'에 대한 상세한 설명을 통해 어문 규범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히고 우리말에 대한 자신감을 길러 준다.  
   

이 설명만을 놓고 보면 이 책은 기존의 "'어느 말이 옳은가?'만 물었던" 것과의 차별성을 갖는다고 한다. 그러니까 단순히 이게 옳고 저게 틀리다가 아니라, '왜 그것이 옳은가?', 즉 원리를 설명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도 '상세한 설명'으로 말이다. 그런데 일단 이런 소개와 어긋나는 것은 '상세'하다는 것이다. 170여 쪽의 얄팍한 책자가 감당하기에 '상세'하다는 말은 이미 어울리지 않는 말이다. 그렇다면 이제 책 속으로 들어가서 이 책이 다른 책들과 차별성을 가지는, 즉 원리를 명쾌하게 설명하고 있어서 한글 맞춤법을 이젠 외우지 않고도 잘 알 수 있게 되는 것인가를 살펴봐야 하겠다.

우선 저자의 머리말을 간추려 읽어보자.

   
 

어문 규범을 주관하는 기관의 규범 담당자로서 맞춤법에 관한 문의를 받을 때마다 '어느 것이 옳은가?'에 대한 짧은 답을 하기보다 '왜 그러한 표기가 바른 표기인가?'에 대한 설명을 해 주고 싶을 때가 많았다. 늘 쓰는 말을 통해 '한글 맞춤법'의 원리까지 이해하게 되면 비슷한 많은 문제들을 쉽게 해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는 일상의 예를 통해 맞춤법의 원리를 알아 나갈 수 있도록 내용을 구성했다. 즉, 용례와 함께 그 원리를 설명해 줌으로써 우리의 말 속에 일정한 원리와 규칙이 있음을 자연스럽게 알 수 있도록 하였다.

이 책은 매우 짧다. 하지만 실례를 통해 원리를 익히고 그 원리를 다른 용례에 적용할 수 있게 된다면 우리말에 대한 이해가 좀 더 넓어지고 언어 표현에 자신감을 가질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이와 같이 저자의 말 대로만 된다면야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다. 일단 한글 맞춤법의 원리를 이해하고 그것을 다양한 사례에 적용할 수 있게 되는 경지에 이르는 것이 가장 바람직 할 것이다. 그래서 그렇게 이 책이 해주겠다는 것일까? 머리말에서만은 그럴 것처럼 말하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이 한글 맞춤법이 사실 뚜렷한 원리가 부재한다는 사실이다. 흔히 우리가 "문법에 맞게 말하고 쓴다"고 말하지만 이 말은 맞는 것이면서 틀린 말이다. 문법이 있고 말과 글이 있는 것이 아니라, 말과 글이 있고 문법이 있게 된 것이기 때문이다. 즉, 문법은 기존의 말과 글을 어떤 법칙들로 짜맞춘 것이란 얘긴데, 이렇게 짜맞추다 보니 이런 문법이란 틀에 들어맞지 않는 말과 글이 다수 존재하게 되어 버렸다. 따라서 어떤 법칙, 즉 원리로 우리말을 명쾌하게 설명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그래서인지 우리말이, 특히 글쓰기기 무척 어려운 것이다. 문법학자들이, 국어학자들이 몇 십 년을 연구하고 있지만 이렇다면 명쾌한 설명을 못 내놓고 있는 것이 바로 그 때문이다. 그런데 저자가 이 얄팍한 책에서 그걸 가능하게 하겠다는 것은 무척 무모한 일이 될 가능성이 높다.

그럼 그것이 얼마나 무모했는지 볼 차례다. 저자는 이 책의 1장에서 "한글 맞춤법의 원리"를 설명하는데, 무척이나 간단하다. 저자는 '한글 맞춤법' 제1장 제1항의 "한글 맞춤법은 표준어를 소리대로 적되, 어법에 맞도록 함을 원칙으로 한다."는 총칙을 들이밀면서 이게 무척이나 명쾌한 원리처럼 설명한다. 그런데 이건 총칙은 정말 애매모호하기 그지 없는 원칙 아닌 원칙이다. 소리나는 대로 적으면 소리나는 대로 적는 거지, 어법에 맞도록 함은 또 무엇인가? 소리나는 대로 쓰기도 하고, 어법에 맞도록 쓰기도 하는 것. 이것을 진정 원칙이라고 부르기에는 무척 민망하다. 그런데 기본적으로 한글 맞춤법은 형태주의, 곧 어법에 맞도록 형태를 밝혀 적는 것이 기본 원칙이다. 예외적으로 소리나는 대로 적기도 한다. 그렇다면 총칙은 이렇게 바뀌어야 한다. "한글 맞춤법은 표준어를 어법에 맞게 적는 것을 원칙으로 하되, 소리나는 대로 적는 것을 예외적으로 허용한다." 정도로. 한글 맞춤법 총칙 자체가 약간의 구라를 포함하고 있는 셈이다.

그렇다면 저자가 이러한 원칙에 따라 실제 사용례를 통해 원리를 설명하겠다고 했는데, 이걸 어떻게, 그러니까 지금까지의 어떤 국어학자도 불가능했던 것을, 해결하고 있는지 살표볼 차례다. 이 책의 2장 "한글 맞춤법의 실제"에서 그 포부를 펼치고 있다. 41쪽에 보면, 저자는 '날으는, 거칠은'이란 잘못된 표기를 설명하면서 "'노는'을 '놀으는'으로 쓰거나 '가는'을 '갈으는'으로 쓰는 일이 없는 것처럼"이라고 원리를 정하고, 이 원리에 따라 '날으는, 거칠은'도 '나는, 거친'으로 적어야 한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날(다)+은'이나 '거칠(다)+은'에서 작용하는 음운론적 원칙들에 대한 언급이 없이 그것을 원리라고 설명하는 것은 말이 안된다. 원리를 설명하겠다고 하면서 말하자면 잘 찍는 법을 가르치고 있는 셈이 아닐까?

같은 쪽에 "그렇지만 '몇 월'이 [며둴]로 소리 나듯이 '몇 일'은 [며딜]로 소리 나기 때문에 '몇 일'로 적을 수 없다. 표준어가 [며칠]이므로 '며칠'로 적어야 한다."는 설명도 무책임하다. 사실 '며칠'이 '몇 일'이 아니고 '며칠'인 것은 아직 국어학적으로 논란이다. 의미적으로나 문법상으로 '며칠'은 사실 '몇 일'이 되어야 할 것이다. 추측임을 전제로 설명하자면, 우리말에서 '일'이 '월'보다 먼저 존재했을 것이고, 이것은 아마도 '몇 일'이었을 것이다. 그것이 언중들에 의해 오래 사용되면서 [며딜]이란 어려운 발음을 피해 [며칠]로 잘못 발음하는 것이 굳어졌을 가능성이 있다. 어디까지나 내 추측이다. 아무튼 이런 추측이 저자의 설명보다 설득력이 없지는 않을 것같다.

   
  '먹-'의 경우에 '먹음[머금]'이 맞고 '먹슴[먹씀]'이 되지 않는다. '있읍니다'와 '있습니다'를 혼동하는 경우에도 '먹습니다[먹씀니다]'를 '먹읍니다[머급니다]'라고 하지 않는다는 것을 생각하면 '-습니다'가 결합한 '있습니다'가 맞는 말임을 알 수 있다.(49쪽)  
   

이런 설명에 어떤 원리 원칙을 발견할 수 있을까? 저자의 설명 방식은 대부분이 이렇다. "이렇게 발음하니까 이렇게 적는다." 이런 것을 원리하고 할 수 있을까? 가령, 맞춤법이 개정되기 이전에는 분명 '있읍니다'였다. 그런데 이것이 개정후 '있습니다'가 됐다. 이것은 언중들이 '있읍니다'보다 '있습니다'로 많이 발음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직 [있읍니다]로 발음하고 '있읍니다'로 적는 사람들이 다수 존재한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에게 이 책은 어떤 설명을 하고 있는 것인가? 결코 이 책은 아무런 원리와 설명을 그들에게 제공하지 못한다. 단지 "니들 발음이 틀렸습니다"라고 말하고 있을 뿐이다.

53쪽에서는 다음과 같은 설명이 있다. "'개굴거리다', '뻐꾹거리다'가 불가능하므로 '개굴이', '뻐꾹이'로 적지 않고 '개구리', '뻐꾸기'로 적는다." 사실 이것은 한글 맞춤법에서 가장 원리 원칙이 부재하는 항에 대한 설명이다. 한글 맞춤법 제23항은 이렇다. "'-하다'나 '-거리다'가 붙는 어근에 '-이'가 붙어서 명사가 된 것은 그 원형을 밝히어 적는다." 이 항의 [붙임]은 또 이렇다. "'-하다'나 '-거리다'가 붙을 수 없는 어근에 '-이'나 또는 다른 모음으로 시작되는 접미사가 붙어서 명사가 된 것은 그 원형을 밝히어 적지 아니한다." 이런 맞춤법 규정에 대한 설명이 고작 '개굴거리다'가 불가능하니까 '개굴이'가 아니고 '개구리'라니? 이런 자의적인 것을 원칙 원리라고 설명하는 것은 우미말 글의 맞춤법이 얼마나 조악한 것임을 보여주는 증거이다. 저자가 원리를 설명하겠다고 하지만 저자도 이 조악함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땅의 누군가는 분명 '개굴거리다'가 왜 안되냐고 물을 것이 분명하다. 그들에게 언제까지고 "니들은 틀리고 내가 맞아"라고 강요할텐가?

이런 같지 않은 설명은 이 책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76쪽에 다음과 같은 설명 또한 그렇다.

   
  '머릿말'이 아니라 '머리말'인 것은 소리가 [머리말]로 나기 때문이다. '인사말'도 [인사말]로 소리가 나므로 첫 번째 조건에 해당하지 않는다.  
   

이걸 설명이라고 할 수 있을까? 아니 여기서 무슨 원리를 찾을 수 있겠는가? 저자도 여기선 이게 얼마나 무책임한 설명인지를 인정하는 모양이다. 이 설명에 각주를 달아 "현실 발음이 흔들리기 때문에 자신의 발음을 기준으로 사이시옷의 개재 여부를 결정하기가 쉽지 않다."고 토로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저자는 결국 자가당착에 빠지고 있는 셈이다. 원리를 상세히 설명하겠다는 저자의 포부는 결국 무모한 것에 지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그것을 저자는 다시 한 번 명확히 고백하고 있다. 다음을 보자.

   
  '-이'와 '-히'로 끝나는 부사를 구분하기도 현실 발음을 기준으로는 결정하기 어렵다. [이]로만 소리가 나면 '-이'로 적고 [히]로도 소리가 나면 '-히'로 적는다고 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발음을 잘 모르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발음을 기준으로는 구분하기가 어렵다.(82쪽)  
   

그런데 저자는 "발음을 기준으로는 구분하기가 어렵다"면서 위에서 보는 것과 같이 계속 발음으로 원리인냥 설명하고 있지 않은가? 결국 이 책이 다른 기존의 맞춤법 책들과 하등 다를 게 없음을, 아니 오히려 책이 얄팍한 만큼 설명은 더욱 얄팍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 책으로는 <세상의 모든 글쓰기>를 다루겠다는 이 시리즈의 거창한 포부를 감당하는 기본을 갖추기는 무척이나 어렵고 힘든 일이 될 것이 분명하다. 결국, 미련한 방법이지만 매번 사전을 찾고 어문규범을 찾아가며 맞춤법을 익혀가는 것이 가장 효과적인 방법임이 다시금 명확해지는 순간이다.

끝으로 이 책이 못내 실망스럽지만, 이 책을 읽고 그나마 조금이라도 한글 맞춤법을 익히고 바로 쓰고자 하시는 분들이 계실 것 같아, 이 책의 몇 가지 잘못 된 곳을 교정해야 할 것을 적어두기로 한다.

34쪽 각주에서 편집과정의 실수 같은데, '같이'가 두 번 쓰이고 있다. 이것이 얼마나 이 책이 꼼꼼하지 못한가를 보여주고 있는 만큼, 이런 실수가 이 책의 신뢰도를 무척이나 바닥치게 하고 있음을 알아야 할 것이다.

39쪽의 "'젖니'와 '논곱'의 차이"에서 저자는 '젖니'를 '젖이'로, '머릿니'를 '머릿이'로 적는 것이 합리적이라고 설명하고 있는데, 이는 현행 맞춤법 규정에도 어긋하고, 저자 말대로 그다지 합리적이라고 하기 어렵다. 사실 원래는 '이'가 아니라 '니'였다고 어문 규정집에서도 밝히고 있다. 자칫 저자의 이런 주장이 독자들에게 오해를 줄 수 있기에 이런 주장은 저자의 사견임을 분명히 밝혀야 할 것이다.

56쪽 상단의 예문 중에서 '골라라'에 대한 분석으로 '고르-+-어라'를 제시하고 있지만 이는 잘못이다. 이는 당연히 '고르-+-아라'가 되어야 한다.

86쪽 박스에 닮긴 설명 중 '짧따랗다'는 '짤따랗다'로 수정되어야 한다.

102쪽에서 '파생'을 "어떤 말의 앞에 붙어서 새로운 말을 형성하는 것을 말한다."라고 설명하고 있는데, 이것만으로는 '파생'을 바르게 설명하고 있지 못하다. '합성'과 구분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합성' 또한 "어떤 말의 앞에 붙어서 새로운 말을 형성"한다. '파생'은 "어떤 말의 앞이나 뒤에 접사가 붙어서, 그 말의 의미를 제한하거나 더해 주는 것"을 말한다.

147쪽과 154쪽에서 온점을 '마침표'로 반점을 '쉼표'로 부르는 것을 허용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지만, 이미 그것을 허용하고 있는 사실을 저자는 모르고 있는 듯 하다.

167쪽 상단의 예문에서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朝聞道夕死可矣)"를 들으며 소괄호 사용례를 보여주고 있는데, 이는 잘못으로 보인다. 어문규정 부록의 '문장부호'에 따르면 소괄호는 "(1) 원어, 연대, 주석, 설명 등을 넣을 적에 쓴다. (2) 특히 기호 또는 기호적인 구실을 하는 문자, 단어, 구에 쓴다. (3) 빈 자리임을 나타낼 적에 쓴다."고 되어 있다. 그런데 저자가 제시한 예문에서의 소괄호의 쓰임은 이 중 어느 것에 해당하는지 모호하다. 오히려 대괄호를 사용하여야 할 것 같다.


댓글(4)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stella.K 2008-01-22 10: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인용구도 많고, 길게 쓰셔서 나름 좋은 책인가 보다 했더니
별이 고작 2개...? 우찌 이런 일이...@@@

순오기 2008-01-22 13: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두눈 부릅뜨고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런데 님이 쓰신 것 중에
"86쪽 박스에 닮긴 설명 중 '짤따랗다'는 '짤따랗다'로 수정되어야 한다."
는 어떻게 수정되어야 하는지, 예시가 똑같잖아요! ^^

멜기세덱 2008-01-22 13:53   좋아요 0 | URL
아 그렇군요. 책에는 '짧따랗다'로 되어 있어서요. 이건 '짤따랗다'가 옳은 표기입니다.
감사합니다. 바로 수정하겠습니다.

야~책이다 2008-02-20 10: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논리적이고 설득력 있는 글 잘 읽었습니다. 맞춤법과 띄어쓰기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출판사들이 더욱 책임감 있게 책을 출간해야 할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