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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내라 브론토사우루스 스티븐 제이 굴드 자연학 에세이 선집 3
스티븐 제이 굴드 지음, 김동광 옮김 / 현암사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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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븐 제이 굴드 Stephen Jay Gould. 왠지 이 이름은 고생물학자이자 진화생물학자인 저자의 직업과 딱 어울린다고 생각한다.(근거를 가지고 있지 않다. 진화생물학 관련 책들을 얼핏얼핏보면서 이 이름을 들어서일 수도 있고, 고생물학자들은 아무래도 어느 굴들을 찾아다녀야 할 것만 같아서 일수도 있다. 그냥 그렇다는 얘기다.) 그의 책 <힘내라 브론토사우루스>는 그 제목만큼이나 거대한 저작이다. 무려 800쪽에 조금 못 미치는 분량이다.(이쯤되면 양장이 어울릴 것 같다는 편견을 난 가지고 있다.) 내용도 나로서는 참 거대하게 느껴진다. 어느 작은 생물에서부터 공룡, 저 멀리 우주에까지 이른다.(고백하건대, 나는 이책을 다 읽지는 않았다. 아니 못했다. 시간도 없긴 했지만 그리 열심히 읽지도 않았다. 중반 이후부터는 선별적으로 읽긴 했지만, 그래도 3/4은 읽은 듯 하다. 점 하나까지 다 읽어야 리뷰를 쓸 자격이 있는 것은 아니니, 이러한 사실에 그다지 불편해 하시지들은 않길...) 그러나 굴드는 이 책을 대중적이라고 역설한다.(내가 분명 대중 가운데 하나라면 이 책은 그다지 대중적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굴드의 대중에는 아마도 나는 포함되어 있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 모두 영광스러운 지적 전통인 알기 쉬운 과학을 되살리는 작업에 매진할 것을 맹세해야 한다. 그 규칙은 간단하다. 절대 개념적 풍부함을 손상기키지 않을 것. 모호하거나 모르는 부분을 건너뛰지 않을 것. 물론 전문용어를 쓰지 않되, 그렇다고 필요한 개념을 생략하지 않을 것(개념적 복잡성이 일상 언어로 전달될 수 있도록). 현재 미국에서 이런 양식의 글쓰기를 하는 사람이 여럿 있다. 따라서 우리의 일차적인 임무는 그 중요성을 널리 알리는 것이다. 우리는 자신이 누구고 누가 아닌지 식별해내기 위해 노력을 기울여야 하고 프란체스코와 갈릴레이의 인문학적 전통을 꿋꿋이 주장해나가야 하며, 핵심 요약이나 연출 사진과 같은 작금의 설득 이데올로기에, 즉 미국의 또 하나의 낡은 전통(반지성주의의 어두운 면, 파시즘의 전조가 될 수 있는 사려 없는 감성주의에 대한 호소)에 휘둘려서는 안 된다.(12~!#쪽)

 

이렇게 과학을 대상으로한 대중적 글쓰기를 천명한 저자는 책을 읽고야 알게 되었지만, 십수년간을 그것을 실천하고 실행해 왔다. 놀라지 않을 수 없는 일이고, 그래서 그는 세계적인 명사의 반열에 오른 것일지도 모르겠다. 저자가 스스로 제시한 규칙을 이 책이 준수하고 있다고 판단할 능력을 나는 가지고 있지 못하다. 이 책이 일차적으로는 미국의 대중을 대상으로한 대중적 글이라고 보여지는데, 미국의 대중에 해당하지 않는 나에게는 그의 규칙들이 어떻게 적용되고 준수되었는지를 가늠할 여지를 주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그 반대로 그 규칙들이 어긋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나는 이와 비슷한 분야에 관해 읽은, 나에게 있어 가장 대중적인 책은 전중환이 쓴 <오래된 연장통>이란 책이라고 생각한다.(절대 굴드보다 전중환이 위대하다는 얘기가 아니니 오해 없길 바란다.) 좀더 확장하면 굴드의 책보다 전중환의 책이 우리나라 대중들에게는 더욱 대중적일 터이다. 나에게 굴드의 책(한국어 본역본이라고 해야 더 정확하겠다.)이 대중적으로 다가오지 않았다고 해서 굴드를 탓해서는 안 된다. 나는 오히려 이 책을 번역하고 출간한, 번역자와 출판자에게 책임이 있다고 생각한다. 영어 원서를 읽을 능력도 시간도 없는 나이지만, 이 책이 정확한 번역일 수는 있어도 한국어로써의 잘된 번역은 아닐 듯 싶다.(내 생각일 뿐이다.)

 

무작위로 이 책의 어느 한 페이지를 펼쳐 보았다.

 

다시 말해서, 키위의 알은 결코 비정상적으로 커지지 않았으며 오히려 몸집이 줄어든 것이라는 설명이다. 그리고 이 두 가지 주장은 전혀 같지 않다. 오래된 농담과 달리, 우리는 뚱뚱한 사람이 몸무게 때문에 키가 작은 것이 아님을 알고 있듯이 말이다.(162쪽)

 

여기서 '오래된 농담'은 과연 무엇일까? 나는 그 오래된 농담을 공유하지 못했기에 이 대목에서 조금은 망설이지 않을 수 없었다. 내 과학적 지식의 부족함도 원인이겠지만, 굴드의 대중적 글쓰기가 나에게는 공유하지 못한 문화적 한계 때문에 전혀 대중적으로 다가오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 간극을 번역자 또는 편집자가 채워넣어야 하지 않았을까? 번역에 있어서 대부분 직역한 부분이 많은 것 같고, 비문에 해당되는 문장들도 있는 듯 해서 가독성이 많이 떨어졌다. 첫 에세이부터 읽어가면서 나는 굴드의 비유와 예들을 거의 하나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또한 나에게는 이 책이 담고있는 진화생물학적, 고생물학적 지식의 설명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가장 큰 책임은 나에게 있겠지만, 그렇다는 얘기다.

 

굴드의 논법은 미국인들에게 꽤나 대중적이었을 듯 싶다. 흥미로운 것은 골드가 이야기를 시작해나가는 방법들이다. 잡다한 이야기, 전혀 연관성 없어 보이는 소재들을 가져와 이런저런, 이리 뒤집고 저리 뒤집어 가며 자신의 이야기 속으로 독자를 끌어들이는 듯한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내가 공유하지 못하는 '대중적'임에도 불구하고. 그만큼 골드는 꽤나 출중한 작가다.)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내가 가장 좋아하는 글은 N. S. 셰일러와 윌리엄 제임스에 대한 21번 에세이다." 그가 가장 좋아한다는 21번 에세이를 읽어야 햇다.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했는지 몰라도, 나는 이 에세이가 도입부분 만큼은 아주 탁월하다고 느꼈다. 아이들 문화에서 오는 어휘의 변천을 탐구하면서 자신의 지난날의 경험으로 이어지고, 그로부터 한참을 흘러 본연의 주제로 들어가는 굴드식 어법이 흥미있었다. 거기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책의 많은 부분 중에서도 <7부 지적 전기 - 생물학자>에 실린 21~23번 에세이와 <8부 진화와 창조>에 담긴 에세이들, 그리고 <9부 숫자와 확률>에서 야구와 연관된 엣세이를 나름 재미 있게 읽었다. 창조과학과 진화론의 논쟁은 승리자가 뻔한 싸움임에도 논쟁의 과정은 재미있고 흥미롭다. 그 오래된 역사를 전해주는 굴드의 이야기에 빠져 단숨에 읽어나갔다.(위에서 언급했던 불편함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이 책에서 굴드는 일관되게 필연이 아니라 우연을 강조하는 느낌을 받았다. 더불어 종교와 과학이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 자신들의 역할만을 다 하면 된다는 점, 진화론이 인류의 기원을 탐구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 이런 점들을 다시금 되새기게 하는 의의가 있어서 나쁘지는 않았다. 결국, 내 능력의 부족함일터이다. 브론토사우루스를 응원하는 스티븐 제이 굴드와 더불어 브론토사우루스가 제 이름을 수성 혹은 되찾기를 바란다. 내가 이책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했다 하더라도 내 첵임만은 아니니, 힘내자 메르키세데크스!!(내 아이디 멜기세덱을 펼쳐읽으면 비슷해질 듯 해서)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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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 정약용 평전]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다산 정약용 평전 - 조선 후기 민족 최고의 실천적 학자
박석무 지음 / 민음사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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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 만한 사람치고, 아니 배웠다는 사람치고 다산 정약용을 모르는 사람은 없겠다. 단군, 이성계, 세종대왕, 이순신 등등의 급은 아닐지 몰라도 그 아래 등급 정도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위인 중의 한 분이 터이다. 정약용에 대한 서적들만 시중에 나와 있는 책들이 잔뜩 있다. 나는 정민 선생이 쓴 <다산성생 지식경영법>이란 책과 박석무의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 등을 보유하고 있고, <목민심서>란 책이 있었는데 지금은 어디 가 있는지 잘 모르겠다. 어쨌거나 저쨌거나 그렇게 유명하신 분의 '평전'이 아직 제대로 된 것이 없었다는 게 조금 놀라웠다.

다산은 학문 분야가 넓고 광범위했을 뿐만 아니라 해박하고 정밀하며 전문성이 높고 치밀하여 그에 대해 정확하게 정리하고 분석하여 평가를 내리는 일은 누구에게나 어려운 일이다. 그렇지만 누군가가 하지 않으면 안 될 일인 것도 사실이다. 다산 서세 178년이 지났고, <여유당전서>가 간행된 지 76년이 되었는데, 본격적인 다산의 평전이 출간되지 못했음은 역시 이 나라 학계가 지적받을 사안의 하나다. 그러나 위에서 언급한 대로 어느 누구도 선뜻 착수하기는 어려운 일이었기에 그럴 수밖에 없었다는 것 또한 인정해야 한다.(14쪽)

그렇다. 정약용과 같은 뛰어난 인물을 감히 누가 평가하겠는가? 단군 평전을 못봤고, 이성계나 이순신, 세종대왕 평전이 견문이 적은 탓으로 보질 못했다. 단군은 자료가 부족할 탓을 테고, 다른 분들은 너무 뛰어나서 평가의 칼을 들이대기 겁이 나서일지도 모를 일이다. 어설프게 들이댔다가는 본전도 못찾고 욕만 잔뜻 먹기 딱 좋다. 대단한 각오와 용기만 필요한 게 아니고, 적확하게 평가할 능력 또한 갖추어야 하기에 누구하나 선뜻 나서서 평전을 쓰기 어려웠을 터이다. 그렇다해도 평전이 하나 없는건 그분들에 대한 모독일 수도 있고, 우리 무지대중들에 대한 애민정신의 부족일 수도 있는 일이라, 우리 학계는 지탄을 받아야 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그 일을 박석무가 맡았다. 대단한 용기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평전을 쓰려면 잘 써야 했다.

 

다산 정약용의 평전 쓰기, 쉬운 작업이 아닌, 지난한 일이다. '평전'의 사전적 의미는 '평론을 곁들인 전기'이다. 어떤 인물의 인생과 학문에 대한 일대기인 전기에 가치 판단인 '평론'을 곁들이는 일은 누구의 경우에도 어려운 일이다. 더구나 다산 정약용은 뛰어난 인물이고 탁월한 학자인 데다 삶 또한 파란만장하고 드라마틱하여 그 일생을 정리해 내고 평가를 내리는 일은 더욱 쉽지 않은 일이어서 '지난'한 일이라고 했다.(13쪽)

평가하기가 쉽지 않은 일이라고 해서 평전을 쓰면서 평가를 포기해서는 안 된다. 저자의 서문을 읽으면서 과연 정약용에 대한 어떤 평가를 내리려 하기에 이렇게 거듭 엄살을 부리는 것인지 궁금해졌다. 일단의 저자의 전략이 성공한 것이리라-생각했다.

 

서문격인 '들어가면서'로 책을 시작하는데 서문에 정약용의 일생과 저술 등을 일목요연 잘 정리하고 있다. 본론으로 들어가면서는 정약용의 드라마틱한 인생을 보다 드라마틱하게 전달하고자 순행적 구성이 아닌 역순행적 구성, 그러니까 시간적 재구성을 통해 약간의 시간적 변화를 주어 정약용의 젊은 시기 암행어사로서의 활약상을 먼저 보여주고 있다. 흥미있는 구성 전략이라고 보여진다.

 

그렇게 흥미롭게 읽어가면서, 정약용에 대해 우리가 잘 알고 있던 부분을 재확인하기도 하고, 잘 몰랐던 세세한 일화들에 재미를 느껴가고 있는 터에, 불현듯 정약용에 대한 저자의 평가는 언제 나올까가 궁금해졌다. 그래서 그 평가에 주목하면서 이 평전을 읽어가는데, 요약하자면, 아니 요약할 필요도 없이, 책 표지에 있는 그대로 뿐이었다. "조선 후기 민족 최고의 실천적 학자'. 이 외의 어떤 평가를 찾아 볼 수 있었는지 다른 분들께 물어보고 싶다.

 

논문을 쓰는데 있어서 먼저 선행연구를 정리하는 것이 기본인데, 저자도 서문에서 선인들의 정약용에 대한 평가를 찾아 제시하고 있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한다. "칭찬의 평가만 많아 비판한 내용을 많이 찾지 못하는 아쉬움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면 자신이라도 비판점을 찾아 제시했어야 했다. 더구나 저자는 자신만의 긍정적 평가도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그저 선인들의 정약용에 대한 평가만 재삼재사 나열하고 있을 뿐이다.

 

이런 위대한 역사적 경험이 우리에게 존재하지만, 다산 이전이나 이후의 오랜 시가 동안 고을의 수령인 목민관은 고을의 주인이고 권력자로 여겨져 수령의 다른 호칭으로 '성주'라는 용어가 보편적으로 사용되었으니, 그런 아이러니한 현상을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지, 민주주의 발달사에서 한 번쯤 되짚어 연구할 가치가 있다고 여겨진다. 다산 또한 백성이 나라의 주인이라는 논리로 실제 행정을 폈으면서도, 역사의 발전 주체를 국민이 아닌 국왕에게 두고 국왕이 선정을 펼쳐야 역사가 발전한다는 논리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 이러한 점에서 다산도 인간적 한계를 보였으며 시대적 제약에서 탈피하지 못했다는 아쉬움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근본적인 변화와 개혁이 불가능했던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었을 것이다.(234쪽)

 

저자가 제시한 정약용의 한계, 과연 타당한가? 저자의 지적은 타당하지만, 현재의 시점에서 당대를 평가한 것이고, 그 시대 모두에게 적용될 한계일 터이다. 정약용을 이 시대 민주주의의 선각자로 만들 필요는 없는 것인데, 민주주의의 잣대를 정약용에게 적용해서 한계를 지적하고 비판한다면 이처럼 불합리한 평가는 받아들이기 어려울 것이다. 정약용의 민본은 현대의 민주와 그 성격이 다르다.

 

여기서 우리는 다산에 대한 아쉬움과 애석함을 토로하지 않을 수 없다. 고산은 몇백 년 전에 이미 순수한 우리 한글로 그처럼 아름답고 뛰어난 시조를 남겨 우리 한글의 우수성을 여실히 증명했는데 고산의 6대 외손이던 다산은 훨씬 뒤의 인물임에도 한글을 사용한 문학 작품을 남기지 않았다는 까닭이다. 송강 정철이나 고산 윤선도보다 훨씬 뒤의 후손으로 그들이 이룩한 문학적 업적도 계승하지 않은 점은 유교주의자의 한계로서 후진성을 면할 수 없다. 다산의 한문시들이 내용 면에서야 송강이나 고산에 뒤지지 않은 점이 많지만, 표현의 수단으로 한자만을 사용한 점은 이해하기 어려운 대목의 하나임이 분명하다. 시대로 보면 훨씬 진보적이어야 하건만, 후진적인 점은 어떤 이유인지 알 길이 없다. 문학가와 사상가의 차이로도 볼 수 있겠으나, 여기에서 다산의 한계는 숨길 수가 없다.(436쪽)

 

이게 말이 되는가? 다산이 한글 작품을 짓지 않은 것이 후진적이라니? 고산의 자손이니 한문이 아닌 한글 작품을 남겨야 한다는 건 무슨 논리인지, 고산이나 송강의 문학적 업적을 계승하려면 강호자연을 노래하거나 임금님 찬양을 노래하는 가사나 시조를 정약용이 지었어야 했다는 말인가? 한자만 쓴 걸 이해하지 못했다면 더 연구했어야 했고, 한글을 써야 문학가고 한문을 쓰면 사상가라고 규정할 바에야 아에 규정을 말았어야 했다.

 

다산의 한글을 쓰건 한문을 쓰건 그건 다산의 자유이면서, 도산이나 송강이 한글을 쓴 건 노래로 읊기에 유리하면서 정서를 표현하는 데에는 한글이 부족함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들의 시에도 사상이 담긴 말은 죄다 한자인걸 모르나? 정약용은 백성들의 비참한 생활상을 그려내는 데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저자가 밝히고 있듯이, 그런 사회 비판을 통해 백성들의 참상을 위정자들에게 알리기 위해 핍진하게 시로 그려낸 것이다. 그것을 자세히 그리고 세밀하게 표현하기 위해서는 한글보다도 당시에는 한자를 사용하는 것이 더 유리해던 것이 아닐까? 한자를 사용하면서도 당시의 귀한 우리말 표현을 최대한 살려낸 점을 칭찬할 일이지, 한글을 쓰지 않았다고 후진적이고 한다면, 이런 어불성설이 또한 어디에 있을까?

 

저자는 법을 전공한 학자이고 <다산 정약용의 법사상>이라는 논문으로 석사학위를 취득했다. 국회의원을 지냈고, 국회다산사상연구회를 조직, 간사로 활동했으며, 여러 대학에서 석좌, 석좌초빙교수 등을 역임했다. 박사 학위를 받았는지는 프로필에 나와있지 않아 모르겠지만, 문학을 전공하지는 않은 게 분명해 보인다. 그래서인지 문학적 평가에는 매우 부족한 능력을 보인다. 위에서 언급한 한글, 한자의 문제뿐만 아니라, 정약용의 작품을 인용하면서 붙인 해설과 평가는 그저 일반적 수준에 불과하고, '그냥 좋다'식의 평가 뿐이다.

 

다산의 나이 50세이던 1811년에는 평안도 정주 지방에서 지역 차별 철폐 등을 내걸고 홍경래가 민중들을 동원하여 봉기하였다. 다산은 귀양지에서 이런 소식을 듣고서 민란이라고 규정하고 그들을 토벌해야 한다고 전라도민에게 고하는 <창의통문>을 작성했다. 왕조 정권 아래의 백성 입장이던 다산은 그 일에 대해 대처하지 않았어도 크게 탓할 일이 아니었는데, 왕조 정권을 지지하는 입장임을 나타내려는 뜻에서 그런 글을 지었지 않았을까 생각하지만, 민중 사관으로 보면 다산 개인의 한계이자 시대적 한계를 드러냈다고 여길 수 있다. 그는 좋은 집안의 출신인 기득권자였고 상당한 지위의 관료를 지냈다는 점 때문에 그러한 한계에서 벗어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480쪽)

 

다산이 <창의통문>을 지었다는 사실을 처음 알게 되었는데, 왜일까 하는 의문이 드는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저자의 해설을 보면, 다산이 백성 입장이었다는 건 무엇을 근거로 하는지 의문이다. 또한 당시의 다산이 기득권자의 위치에 있었는지도 의문이다. 이러한 다산의 행위를 설명하고 평가하려면 다산의 저술을 분석하고 다산이 <창의통문>의 입장을 취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를 밝혀내야 했다. 민중 사관으로 보는 것은 그 다음의 일이 되어야 했던 것이다. 저자 말대로라면 홍경래의 난을 보고도 다산은 입다물고 가만히 있었어야 했는가? 정약용도 양반이고 관리출신이니까 그랬을 거야? 정권에 잘 보여서 유배나 빨리 풀자고? 아니면 잠깐 정신이 나가서?

 

나는 박석무의 이 책이 정약용에 대해서 처음부터 끝까지 읽은 유일한 책이다. 그런데도 정약용에 대해서는 이런 저런 이야기들을 알고 있기는 했다. 그러나 이 책을 통해 좀더 정약용이라는 인물에 대해서 더 자세히 알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되었다. 그런데 그것 뿐이다. 평전이라고 해서 인물을 반드시 비판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어느 정도의 평가가 이루어져야 하기 때문에, 그에 대한 보다 심도있는 탐구, 사상에서 문학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탐구와 그에 대한 저자의 전문적이고 객관적인 평가가 있어야 제대로된 평전이 나올 것이다. 그러나 이 책은 거기에 이르지 못했다는 판단이다.

 

 

추신

1. 정약용을 이야기하는데 있어서 천주교와의 관련성은 빼놓을 수 없는 것이긴 한데, 정약용이 천주교에 대한 입장을 바꾼 것, 그리하여 천주교에서 벗어난 것은 저자의 판단에 동의하지만, 한번이면 족하지 않았을까? 이 책은 여러곳에서 천주교 얘기를 하면서 천주교의 오류를 지적하는데 많은 공을 들이고 있다. 좀 과한 느낌.

2. 평전에서 평가의 내용을 주로 선행 연구들을 정리하여 채우고 있는데, 그렇다면 적어도 책 말미에 참고문헌으로 정리는 해주어야 하지 않았을까?

3. 정약용이 강진의 다산에서 유배생활을 했는데, 언제부터 다산이라는 호(?)를 사용했는지, 왜 그런 것인지가 궁금했는데, 책에는 별반 내용이 없어 아쉬웠음.

4. 그외 아쉬움 점은 생략.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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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바람 2014-06-16 13: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웅 깨갱이어요 덕분에 저도 정약용 공부해야겠어요
 
[반란의 도시]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반란의 도시 - 도시에 대한 권리에서 점령운동까지
데이비드 하비 지음, 한상연 옮김 / 에이도스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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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시골서 학창 시절을 보냈다. 대학 진학과 동시에 도시에 오게 되었다. 시골서는 옆집 숟가락이 몇 개인지까지는 몰랐지만, 그 집의 식구가 몇이며 대소사는 무엇인지 모를 수가 없었다. 반경 몇 키로 내의 이웃들을 거의 다 알고 지냈다. 도시에 와서부터는, 그리고 현재 내가 사는 집 앞뒤좌우 옆집의 이웃이 누구인지 나는 모른다. 그러니 나는 지금 이웃이 없고 마을 친구가 없다. 삭막한 도시.

 

  이 도시는 왜 삭막할까? 시골은 일과 생활이 같은 장소에서 이루어진다. 그들은 같은 일을 하고 같은 생활을 한다. 반면 도시는 일하는 곳과 생활하는 곳이 다른 경우가 많다. 나 같은 경우, 생활의 공간은 대부분이 잠만 자는 공간인 경우다. 또한 이사도 자주하게 되면서, 여기가 '우리 마을, 우리 동네'란 인식은 약해진 듯 하다. 언젠가는 떠나갈, 잠시 지나는 공간일 뿐이다. 오래 머물 수 없는 공간.

 

  이런 공간에서 십 여 년이 넘게 생활한 나는 이제 어엿한 시티즌이다. 도시 사람. 시민이다. 이런 나에게 하비는 '반란'을 권한다. 데이비드 하비를 처음 경험한 건 <신자유주의>란 책에서다. 어느 책 모임에서 신자유주의를 주제로 토론하게 되면서 이 책을 읽게 되었는데, 무슨 경제학자나 정치학자, 사회학자가 아닌 어울리지 않는 지리학자가 쓴 책이라는 걸 알고는 신뢰성을 의심하며 읽은 책으로 기억된다. 이 책을 통해 내가 신자유주의를 철저히 공부하게 되었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지리학이라는 것이 꽤나 넓은 범위를 다루는 학문이란 사실을 느낀 바가 크다. 그런 그가 이제는 반란을 말한다. 도시에서의 반란. 어쩌면 이 주제는 그가 전에 탐구했던, 그 실체를 까발렸던 '신자유주의'에 대한 저항의 연장선상에 있는 작업이지 싶다.

 

  왜 반란을 하라는 거지? 이 도시를 왜 뒤집어엎어야 하는 거지? 이 책을 읽다가 잡혀가는 건 아닐까? 국가보안법에 저촉될 염려가 있지는 않은가? 위험한 책. 이런 두려움을 읽는 내내 느꼈다. 이 책은 마지막 장은 그 위험성이 가장 커보였다. '윌스트리트를 점령하라'는 그의 선언적 명령은 나를 두렵게 했다.(잡혀갈까봐.)

 

  하비에 의하면 도시는 공유재다. 이 도시는 그 누구의 것도 아니고, 이 도시에서 사는 모든 사람이 이루어낸 결과? 성과? 유산? 뭐 그런거다. 그런데, 이 도시를 소수의 사람들이 사유화하고 있다. 본래의 주인을 내쫓고 있다. 약탈이 일어나고 있고, 착취와 사기와 거짓으로 모든 걸 빼앗아 가고 있다.

 

  "1980~90년대 서울에서도 건설회사와 토지개발업자가 험상궂은 용역깡패를 동원해 달동네 주택을 대형 해머로 때려 부수고 주민을 몰아내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1950년대부터 가난한 사람이 거주하던 고지대 토지가 1990년대에 이르러 가치가 높아졌기 때문에 빚어진 일이다. 현재 고지대는 온통 고층건물로 뒤덮여 있어 과거 야만적인 재개발 과정의 흔적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다."(p.51)

(우리나라 사례가 제시된 유일한(?) 경우인데, 불행인지 다행인지, 자본의 통제가 워낙 철두철미해서인지, 하비의 연구가 미진해서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모범적 반란의 사례로는 우리나라는 등장하지 않는다.)

 

  이런 상황 속에서 우리는 빼앗긴 것을 되찾아야 한다고 하비는 말하고 있다. 그 빼앗긴 것. 그것은 이 도시를 누릴 권리, '도시권'이다. 그래서 하비는 서문에서부터 제1장에까지 '도시권'을 말한다. 이 도시권을 그들이 약탈해 갔고, 그것은 원래 우리의 것이고, 그것을 이제부터 찾아와야 한다고 말이다. 제2장에서부터 제4장까지는 그것을 철저하게 분석하고 증명하면서 우리가 왜 도시권을 찾아와야 하는지를 쪼금은 어렵게(나한테는 어려웠다.) 이야기한다. 그리고 제5장에서는 어떻게 도시권을 찾아야 하는지 그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내가 주목한 부분, 그리고 열심히 읽은 부분은 바로 이 대목이다. 반란의 방법론.

 

  "좌파는 세계시장에서 자본주의적 가치법칙에 적극적으로 관여하면서 그 대안도 만들어내야 한다. 또 협동적 노동자가 무엇을 어떻게 생산해야 하는가의 문제를 놓고 민주적이고 집단적으로 결정하고 운영하는 능력도 길러야 한다."(p.218)

 

  그러면서 하비는 '새로운 도시혁명'의 방법을 제시한다. "파업에서 공장 점거에 이르는 노동자 중심 투쟁은 주변 민중세력이 지역사회와 공동체 차원에서 대규모로 결집해 강력하고 활기차게 지원할 때, 성공할 가능성이 높아"지기 때문에 "노동자와 지역 주민 사이의 끈끈한 연대"를 구축하라고 말한다. 더불어 "연대를 구축하고 유지하고 강화하려는 정치적, 의식적 노력이 꼭 필요하다." 또한 노동 개념의 변경도 필요하다. "점점 도시화하는 일상생활의 생산과 재생산에 꼭 필요한 노동이라는 넓은 의미로 바뀌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반란의 구체적 방법은 무엇일까? 하비는 솔직하게도 "그저 잘 모르겠다"고 말한다. 무책임해 보이지만, 그 방법을 우리모두가 찾아야 한다는 필요성을 역설하는 게 아닐까 싶다. 고기가 아니라 낚시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는 말이다. 고기를 어디서 찾아야 할까? "혁명적 상황에 놓인 도시의 정치적 실천 사례를 검토"하는 작업에서 그 방법을 찾아낼 수 있을 거라고 하비는 말한다.

 

  하비는 제7장(마지막장) '월스트리트를 점령하라: 월스트리트당이 복수의 여신과 만낟다'에서 월스트리트의 탐욕과 부정, 약탈과 착취, 거짓과 범죄를 가열차게 고발한다. 하지만 이에 맞서 지금 현재 '월스트리트 점령운동'이 일어나고 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비는 다음과 같이 선언하면서 반란의 당위성을 설파한다. "월스트리트당의 전성기는 끝났다. 처참한 몰락만이 남았다. 우리는 폐허 위에서 대안을 구축할 절호의 기회를 맞이했다. 이는 우리의 피할 수 없는 의무, 피하려고 해서도 안 되는 의무이다."

 

도시권을 되찾자, 도시에서의 반란은 신자유주의와 자본에 맞서 싸우는 원동력이 되어야 한다. 민중의 연대, 협력, 공동체 등등. 어쩌면 이 하비의 선동은 그간의 노동운동의 당위를 주장하는 다른 이야기들과 크게 다를게 없어 보이기도 한다. 같은 이야기들의 반복. 그러나, 나는 마지막 선언에 담긴 하비의 말에서 자신감을 보았다. 막연한가? 그 막연함이 우리를 반란으로 이끌어 갈 것이라고 믿는다. 막연하고 답답하고 먹먹하고 비참하고 처참하며 말이 안 되는 현실이기때문에 우리가 '반란'하는 것이겠지. 반란의 역사는 다 그런 식이었다.

 

사족: 이 책의 번역이 많이 아쉽다. 사소한 부분들에서의 실수가 많이 보인다. "이를테면 페미니스트는 교외와 교외형 생활양식 때문에 매우 불만스럽다고 선언했다."(p.36)에서 처럼 잘못된 조사가 사용되었거나, 문장의 호응이 맞지 않는 등의 실수들이 곳곳에서 보인다.

 

p.35 "그 방법 무엇인가는" 은->이

p.59 "통상적 범위를 넘어는" 넘어는->넘어서는

p.105 "부동산 소유자 개입되었다." 소유자->소유자가

p.114 "19세기 후반부터 도시 개발은 항상 투기적 성격을 띠었지만, 중국 경제 발전에서 엿보이는 투기의 규모는 지금까지의 인류 역사에서 나타났던 그 어떤 투기의 규모와도 차원을 달리 한다. 그럼에도 글로벌 경제에서 흡수되어야 하는 과잉 유동성도 전례 없는 규모인데다 나날이 기하급수적으로 확대되고 있다." 의미상 '그럼에도'는 '게다가' 정도가 아닐까?

p.134 "온갖 용도의 공간 갖춘" 의->을

p.150 "이 문제는 오스트롬의 주장은 물론 급진 좌파가 공유재 문제를 두고 내놓는 다양한 제안이 반드시 해결하고 넘어가야 한다." -> 주술 호응이 맞지 않는다.

p.175 "그러고는 두 가지 요인 덕분에" 요인이-> 요인

p.230의 각주 번호는 2가 아니라 25다.

p.235 "창출을 추진하면서 옹호한 구상과 비슷한다." 비슷한다->비슷하다

p.241 "완강한 엘리트(특히 산타크루주 시에 몰려든 무리)는" -> 둘 중 하나는 빼야한다.

p.251 '라르' ->지금까지 계속 '라자르'라고 했다.

p.272 "모든 제도정치 짓눌려" 제도정치->제도정치에

 

내가 찾은 건만 무려 13개다. 더 찾아보면 더 나올지도 모르겠다.

 

  더욱 아쉬운 것은 번역가가 번역을 덜 한 듯한 느낌이 든다는 것이다. 한국말로 번역할 때 적절한 말을 찾지 못해서인지는 몰라도 '프리캐리아트'라든지, '리버테리어니즘', '뉴어버니즘', '레버리지', '인프라스트럭처', '인클로저할 수 없을 때', '거버넌스하는 데', '코포라티즘' 같은 단어들은 번역을 해 주든지, 번역을 안 할 거면 영어라도 병기를 해주든지 해야 했다. i'm happy를 나 해피해라고 번역하는 듯해서 언해피하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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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명사회
한병철 지음, 김태환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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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뻔 하게 시작해본다. 한병철의 <투명사회>를 읽기 전에, 읽으면서, 그리고 읽고 나서 문득 드는 뻔 한 생각이 '투명 인간'이었다. '투명 인간'은 우리가 한번쯤 어렸을 때 동경(?)했던 존재(?)였다고나 할까? (하도 오랜만에 리뷰를 쓰니 어휘력이 꽝이 됐는지, 적절한 단어들이 떠오르지 않는다. 아마도 이 리뷰는 물음표 천지가 되지 싶다.) '투명 인간'이란 특이한 발상은 꽤 오래되었지 싶다. 검색해 보니, 1897년에 영국의 소설가 웰스가 쓴 공상 과학 소설 <투명 인간>이 그 시초가 아닐까 싶다. 투명해 지는 약을 개발해 먹고 못된 짓 하다가 죽는다는 내용이란다. 신기하게도 1969년, 내가 태어나기도 무려 10년 전에, 그 당시 내로라하던 신성일, 허장강, 서영춘, 그리고 요즘 대세 이순재 선생 등 한 가닥씩 하는 분들이 출연해 만든 <투명 인간>이라는 영화가 우리나라에서 만들어진 걸 알았다. 2000년에는 미국에서 <투명 인간>이라는 드라마가 방송됐다. 그런데 내용은 잘 모르겠다. KBS에서는 <투명인간 최장수>라는 드라마도 했다. 외국에서는 <투명인간 그리프>라는 영화도 있었다. 찾아보면 더 많을 것이다. 그만큼 '투명 인간'이라는 화두(?)는 이래저래 유행이었더랬다.

 

  지금은 '투명 인간'이라는 비현실적인 화두를 들어보기는 어려운 듯하다. 대신에 공상이 아닌 현실로서의 '투명 인간'의 가능성이 언뜻 언뜻 보도를 통해 들려오기는 한다. 투명 망토 같은 것을 개발할 수 있다고 하는 것 같은데, 우리 어렸을 적, 그런 망토가 있으면 투명 인간이 될 수 있을 거야 하는 허무맹랑한 생각이 곧 현실이 되는 걸 볼 수도 있지 않을까 싶다. 그러면 진짜 신기할 거 같다. 투명 인간이 되는 방법들은 우리 상상 속에서 여러 가지가 있었다. 약 같은 것을 개발하려 하다가 잘못해서 투명 인간이 되거나, 투명 망토를 걸치면 투명해지는, 뭐 그런 것을 생각했었다. 그렇게 우리는 투명해 지고 싶었던 것이다.

 

  투명 인간이 되어서 우리는 무엇이 하고 싶었을까? 여탕에 들어가는 걸 최우선으로 꼽을 수 있겠고, 은행에 가서 돈을 잔뜩 들고 나오는 것, 대강 유치찬란 뽕짝 같은 상상들에 그치고 만다. 그러다 정의를 위해 악당을 물리치고 해피엔딩? 그런데 지금 생각해 보면, 투명해진다는 것은 불편한 점이 더 많을 듯하다. 요즘 같은 세상에 내가 보이지 않는다면, 죽거나 다치기에 딱 좋지 싶다. 길을 걸을 때도 아무도 나를 보지 못하니 열심히 피해 다녀야 할 판이다. 잠시 잠깐 한눈이라도 팔았다가는 차에 치여 죽기 딱 좋지. 아무데서나 잠을 자는 것도 피해야 할 것이다. 내가 자는 데 누구라도 덜컹 앉아버리거나, 무거운 짐이라도 쿵 내려놓는다면? 어익후!!!

 

  보통 공상 과학류의 주인공들은 한 때 신나게 즐기다가도 남과 다른 나를 느끼며 외로워지고 슬퍼진다. 뻔 한 스토리지만, 뻔하다는 것은 일반적이고 보편적이고 자연스러운 귀결을 말하는 것이 아닐까? 내가 투명인간이 되어도 당근 슬퍼지고 말 것 같다.

 

  상상을 넓혀서 투명해지는 약 혹은 망토가 개발되어 세상 모든 사람들이 투명해진다면, 세상은 어떻게 될까? 아무도 아무를 보지 못하는 세상은, 투명한 인간들이 제 아무리 빨빨거리며 돌아다닌들, 그건 아무도 없는 세상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 인간 모두가 투명해지면, 세상은 아무도 없는 세상이 되고 만다. 아무 것도 아닌 것이다. 無.

 

  한병철은 말한다. "투명한 관계는 모든 매력, 모든 활기를 잃어버린 죽은 관계이다. 완전히 투명한 것은 오직 죽은 자뿐이다."(p.19) <투명사회>에서 말하는 투명한 인간과, 내가 지금까지 주저리 떠들었던 '투명 인간'은 출발점이 다르지만, 어쩌면 결과는 동일해지는 듯하다. 인간 모두가 투명해지면 그건 아무도 없는 세상, 죽은 자만 널린 세상, 아무 것도 아닌 세상, 아무 것도 없는 세상, 無.

 

  한병철이 말하는 '투명사회'의 속성은 '긍정, 전시, 명백, 포르노, 가속, 친밀, 정보, 폭로, 통제'다. 이렇게 보면 도무지 무슨 사회인지 알 수가 없다. '긍정, 명백, 친밀, 정보'만 보면 대단히 좋은 사회인 듯싶고, '포르노'를 보면 흥미롭게 야한 사회이기도 한 듯싶다. 이 사회에서도 인간은 투명해진다. 오늘날 '정보사회'라고 하는 이 시대에 인간은 '투명'하다는 얘기다. 이 '정보사회'에서 발생하는 중요한 문제가 정보 유출인데, 비단 몰래 빼가는 유출만이 아니라, 나도 모르는 사이 자연스럽게 노출되는 정보의 유출, 그로 인해 나의 일거수일투족 모든 것이 낱낱이 읽혀지는 그런 정보사회가 '투명사회'다. 누군가 나를 속속들이 알고 있다. 나의 모든 정보가 투명하게 누군가에 의해 읽혀진다. 그래서 나는 투명하다. 아니 이 사회의 인간 모두는 점점 투명해진다. 그리하여 투명해진 인간이 된다. 투명인간. "투명사회는 정보사회다. 정보는 어떤 부정성도 알지 못한다는 점에서 투명성의 현상이다. 정보는 긍정화되고 조작 가능하게 만들어진 언어다."(p.83)

 

  "아감벤의 테제에 따르면 아담과 이브는 원죄 이전에 벌거벗지 않았다. "은총의 옷" "빛의 옷"이 그들의 몸을 덮고 있었기 때문이다. 원죄로 인해 그들은 신성한 옷을 빼앗기고 만다. 완전히 벌거숭이가 된 아담과 이브는 몸을 가리지 않을 수 없었다. 따라서 벌거벗음이란 곧 신이 내린 옷의 상실을 의미하는 셈이다."(p.49-50)

 

  태초에 하나님이 계셨고, 아담과 이브를 창조했더랬다. 그러나 그들은 벌거벗었지만 "벌거벗지 않았다." '신성한 옷'을 입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담과 그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 아니하니라."(창세기 2장 25절) 그러나 그들은 벌거벗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누가 너의 벗었음을 네게 고하였느냐?"(창세기 3장 11절) 그 부끄러움을, 부정성을 그들은 옷을 만들어 가렸다. 그리고 그들은 숨어 버렸다. "아담과 그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창세기 3장 8절) 그러나 오늘은 인간은 부끄러움을 가린 그 옷을 실오라기 하나까지 훌훌 벗어버린다. 부끄러움에 숨지도 않고 자신 있게 드러낸다. 부끄러움을 느끼지 못한다. '긍정', 그리하여 만인에게 자신을 드러낸다. '전시'. 야한 사회, 이것은 '포르노'다. "아무것도 덮거나 숨겨두지 않고 시선에 내던지는 투명성은 외설적이다. 오늘날 모든 미디어의 이미지들은 어느 정도 포르노적이다."(p.59)

 

  "투명성의 강제는 기존 시스템을 안정적으로 유지하는 데 매우 효과적으로 작용한다. 투명성은 그 자체로 이미 긍정적이다. 투명성 속에는 기존의 정치경제 시스템을 근본적으로 의문시하는 부정성이 들어 있지 않다."(p.25) 이러한 투명성은 결국에는 '통제'에 있어 최적화된다. "투명성의 독재 속에서는 주류에서 벗어나는 의견이나 일반적이지 않은 아이디어는 아예 입 밖으로 꺼내기도 어려워진다. 과감한 도전은 거의 시도되지 않는다. 투명성의 명령은 강력한 순응에의 강제는 낳는다. 사람들은 카메라의 지속적인 감시 속에 있을 때처럼 관찰되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투명성의 명령에는 파놉티콘적 효과가 있다. 그것은 결국 커뮤티케이션의 획일화와 동일한 것의 반복으로 귀결된다."(p.141) 이것을 한병철은 '디지털 파놉티콘'이라 명명한다.

 

  21세기에 우리 인간은 자유를 만끽하고 있다. 아니 만끽하는 것만 같다. 아니 만끽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과연 그러한가? 디지털은 우리의 발자취를 낱낱이 기록한다. 길을 걸어도 우리도 걸음 하나하나는 수많은 차들 앞유리창에서 반짝반짝 빛나는 블랙박스에 녹화된다. 거리마다 빌딩마다 달려있는 cctv에 의해 촬영된다. 우리가 버스를 타도 어디에서 어디로 가는지 모든 정보가 남는다. 인터넷의 바다를 유영해도, 백화점엘 가도, 그 어디를 가도, 이 정보사회는 우리를 벌거벗게 만든다. 이것을 어느 누가 보고 있다면, 그는 우리를 '통제'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감시되는 것이다. 한병철의 투명사회의 속성을 하나 추가하면 '감시'가 되는 이유다.

 

  "오늘날 우리는 우리를 노예처럼 부리고 착취하던 산업 시대의 기계에서 해방되었지만, 디지털 기기가 낳은 새로운 강제, 새로운 노예제에 직면하고 있다. 디지털 기기는 이동성을 무기로 모든 곳을 일터로, 모든 시간을 일의 시간으로 만듦으로써 우리를 더욱 효과적으로 착취한다. 이동성이 가져온 자유는 어디서나 일해야 한다는 치명적인 강제로 돌변한다."(p.163) "더 많은 자유를 약속하는 스마트폰에서 하나의 치명적인 강제가 생겨난다. 커뮤니케이션에의 강제. 사람들은 최근 들어 디지털 기기와 거의 강박적 관계에 빠져들었다. 여기서도 자유는 강제로 전도된다. 소셜네트워크는 커뮤니케이션에의 강제를 엄청나게 강화한다. 결국 그러한 강제는 자본의 논리로 소급된다. 더 많은 커뮤니케이션은 더 많은 자본을 의미한다. 커뮤니케이션과 정보의 순환이 가속화되면 자본의 순환도 가속화된다."(p.164) "우리는 오늘날 자유 자체가 강제를 촉발하는 특수한 역사적 단계에 처해 있다. 자유는 본래 강제의 반대 형상이다. 그런데 강제의 반대 형상이 강제를 낳는 것이다. 그래서 더 많은 자유는 더 많은 강제를 의미한다. 그것은 자유의 종말일 것이다."(p.181)

 

  디지털 파놉티콘의 무서운 점은 이렇듯 자유로운 통제, 감시라는 점이다. 아니 더 정확히는 자발적이라 해야 옳을지 모르겠다. "디지털 파놉티콘의 주민들은 수감자가 아니다. 그들은 자유롭다는 환상 속에서 살아간다. 그들은 자발적으로 스스로를 전시하고 훤히 비추어줌으로써 디지털 파놉티콘에 풍부한 정보를 제공한다."(p.212) 우리의 정보를, 우리가 자발적으로 자유롭게 드러내놓은 정보를 누군가가 독점한다면, 그는 우리를 통제할 수 있다. 이전의 통제가 권력을 위한 것이라면, 오늘날의 통제는 무엇을 위한 것일까? 결국은 '돈'이다. 오늘날은 '돈'이 곧 권력이니, 그 근본은 같다.

 

  "내가 한 모든 클릭은 저장된다. 내가 디딘 모든 발걸음은 역추적될 수 있다. 우리는 도처에서 디지털 발자취를 남긴다. 우리의 디지털적 삶은 네트워크 안에 정확히 모사된다. 삶의 완벽한 프로토콜이 남겨질 수 있는 가능성으로 인해, 신뢰는 완전히 통제로 대체된다. 빅데이터가 빅브라더의 자리를 차지한다. 삶의 완벽한 프로토콜화는 투명사회를 완성한다."(p.211)

 

  한병철은 현대 사회의 '디지털화'에 초점을 맞춰 이를 '투명사회'로 분석한다. 정확히 말하자면 현대 사회는 투명사회'화'되고 있다. 어느 순간엔 완성될. 여기저기 막그냥 확그냥 정보가 넘쳐난다. 그러나 우리에겐 이야기가 사라진다. "오늘의 사회를 지배하는 긍정성의 과잉은 이 사회에서 서사성이 사라졌음을 방증한다."(p.69) 우리의 서사가 사라진 사회에서 빅브라더는 우리에게 이야기를 부여하고, 우리를 그의 이야기에 따라 지배하게 될 것이다. 서사가 없는 이 사회는 결국엔 비극이 될 것이다.

 

  몇 가지 아쉬운 점? 아니면 궁금한 점? 이도 아니면 그냥 궁시렁 몇 자 적으며 마무리하자. (내가 지금까지 무슨 말을 장황하게 했는지 정리도 안 된다.)

 

  1. 투명사회라는 테제는 한병철이 서문에서도 이야기했듯, 불합리하고 비합법적인 불투명성과 싸우는 투명성과 겹쳐진다. 정치권력, 자본권력에 강력히 요구되는 투명성, 투명한 사회에의 요구는 이 사회에 필수적인 부분이다. 이것이 자칫 한병철의 '투명사회'라는 비판에 의해 퇴색될까 하는 우려가 생긴다. 프레임이라고 했던가? 비판적 의미로서의 '투명사회'라는 한병철의 명명을 비판적 의미가 좀 더 부각되는, 그래서 조금 더 적절한, 권력과 자본의 투명성에 대한 요구와 겹쳐지는 않는, 그런 명명이 필요해 보인다. '디지털 파놉티콘' 같이 말이다.

 

  2. 투명사회가 완성되기 전에, 우리는, 우리사회는 무엇을 해야 할까? 어떻게 완전한 통제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피로사회>에서 제기된 현대사회에 대한 비판적인 분석이 <투명사회>로 완성되었다면(?) 이제는 '불(不)투명' 사회로 되돌아 갈 수 있는 길을 알려주어야 하지 않을까?

 

  3. 한병철의 우려는 약간의 기우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과연 이 디지털 사회에서 부정성이 완전히 사라졌는가? 이야기가 없는가? <투명사회>를 읽어가면서 긍정성의 강요, 부정성의 소멸(?)이라는 견해에 부분적으로 동의하면서도 과연 그런가? 정말 그런가? 꼭 그런 건가? 아닐 수도 있지 않나? 여전히 나는 비밀을 간직하고 있는데? 하는 의문들이 든다. 인터넷을 통해 자기의 의견을 개진하고 비판하고 토론하는 장이 확대되고 있고, 건전하고 생산적인 만남으로 이어지고 있기도 하지 않은가? 그런 부분에 대한 의도적인 무시가 있지는 않은가? 하는 의문이 남는다. 한병철의 후기 작업을 기대하는 부분이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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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명사회
한병철 지음, 김태환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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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명한 관계는 모든 매력, 모든 활기를 잃어버린 죽은 관계이다. 완전히 투명한 것은 오직 죽은 자뿐이다.-19쪽

투명성의 강제는 기존 시스템을 안정적으로 유지하는 데 매우 효과적으로 작용한다. 투명성은 그 자체로 이미 긍정적이다. 투명성 속에는 기존의 정치경제 시스템을 근본적으로 의문시하는 부정성이 들어 있지 않다. 투명성은 시스템의 외부를 보지 못하고, 그저 이미 존재하는 것을 확인하고 최적화할 뿐이다. 따라서 투명사회는 포스트정치와 일치한다. 완벽하게 투명한 것은 오직 탈정치화된 공간뿐이다.-25~26쪽

아감벤의 테제에 따르면 아담과 이브는 원죄 이전에 벌거벗지 않았다. "은총의 옷" "빛의 옷"이 그들의 몸을 덮고 있었기 때문이다. 원죄로 인해 그들은 신성한 옷을 빼앗기고 만다. 완전히 벌거숭이가 된 아담과 이브는 몸을 가리지 않을 수 없었다. 따라서 벌거벗음이란 곧 신이 내린 옷의 상실을 의미하는 셈이다.-49~50쪽

아무것도 덮거나 숨겨두지 않고 시선에 내던지는 투명성은 외설적이다. 오늘날 모든 미디어의 이미지들은 어느 정도 포르노적이다.-59쪽

오늘의 사회를 지배하는 긍정성의 과잉은 이 사회에서 서사성이 사라졌음을 방증한다.-69쪽

투명사회 역시 시인이 없는 사회, 유혹도 변신도 없는 사회이다. 시인이란 누구인가? 시인은 연극적 환상, 가상의 형태, 제의적, 의식적 기회를 생산하는 자, 적나라한 사실에 예술작품Artefakten(인공물), 반反사실Antifakten을 맞세우는 자인 것이다.-81~82쪽

투명사회는 정보사회다. 정보는 어떤 부정성도 알지 못한다는 점에서 투명성의 현상이다. 정보는 긍정화되고 조작 가능하게 만들어진 언어다.-83쪽

존경할 줄 모르는 사회, 거리의 파토스가 없는 사회는 스캔들 사회로 전락한다.-116쪽

투명성의 독재 속에서는 주류에서 벗어나는 의견이나 일반적이지 않은 아이디어는 아예 입 밖으로 꺼내기도 어려워진다. 과감한 도전은 거의 시도되지 않는다. 투명성의 명령은 강력한 순응에의 강제는 낳는다. 사람들은 카메라의 지속적인 감시 속에 있을 때처럼 관찰되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투명성의 명령에는 파놉티콘적 효과가 있다. 그것은 결국 커뮤티케이션의 획일화와 동일한 것의 반복으로 귀결된다.-141쪽

커뮤니케이션의 소음을 만들어내는 디지털 매체의 가산적 특징은 정신의 걸음걸이와는 거리가 멀다.-143쪽

스마트폰은 즉흥성과 근시안적인 태도를 장려하고 긴 것과 느린 것을 소외시킨다.-146쪽

오늘날 우리는 우리를 노예처럼 부리고 착취하던 산업 시대의 기계에서 해방되었지만, 디지털 기기가 낳은 새로운 강제, 새로운 노예제에 직면하고 있다. 디지털 기기는 이동성을 무기로 모든 곳을 일터로, 모든 시간을 일의 시간으로 만듦으로써 우리를 더욱 효과적으로 착취한다. 이동성이 가져온 자유는 어디서나 일해야 한다는 치명적인 강제로 돌변한다.-163쪽

더 많은 자유를 약속하는 스마트폰에서 하나의 치명적인 강제가 생겨난다. 커뮤니케이션에의 강제. 사람들은 최근 들어 디지털 기기와 거의 강박적 관계에 빠져들었다. 여기서도 자유는 강제로 전도된다. 소셜네트워크는 커뮤니케이션에의 강제를 엄청나게 강화한다. 결국 그러한 강제는 자본의 논리로 소급된다. 더 많은 커뮤니케이션은 더 많은 자본을 의미한다. 커뮤니케이션과 정보의 순환이 가속화되면 자본의 순환도 가속화된다.-164쪽

셀 수 없는 것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된다.-165쪽

우리는 오늘날 자유 자체가 강제를 촉발하는 특수한 역사적 단계에 처해 있다. 자유는 본래 강제의 반대 형상이다. 그런데 강제의 반대 형상이 강제를 낳는 것이다. 그래서 더 많은 자유는 더 많은 강제를 의미한다. 그것은 자유의 종말일 것이다.-181쪽

이 사회는 우리를 따로따로 떼어놓는 성과사회다. 성과주체는 쓰러질 때까지 스스로를 착취한다.-182쪽

우리는 디지털 매체로 인해 실제로 멀리 있는 사람에 대해 생각하고 가까이 있는 사람을 만지는 법을 잊어버리지 않을까?-189쪽

투명사회에도 이면이 있다. 투명사회란 어떤 의미에서 표면적 현상이다. 투명사회의 뒤편, 또는 그 아래에서, 모든 투명성을 벗어나는 유령들의 공간이 생겨난다.-193쪽

내가 한 모든 클릭은 저장된다. 내가 디딘 모든 발걸음은 역추적될 수 있다. 우리는 도처에서 디지털 발자취를 남긴다. 우리의 디지털적 삶은 네트워크 안에 정확히 모사된다. 삶의 완벽한 프로토콜이 남겨질 수 잇는 가능성으로 인해, 신뢰는 완전히 통제로 대체된다. 빅데이터가 빅브라더의 자리를 차지한다. 삶의 완벽한 프로토콜화는 투명사회를 완성한다.-211쪽

디지털 파놉티콘의 주민들은 수감자가 아니다. 그들은 자유롭다는 환상 속에서 살아간다. 그들은 자발적으로 스스로를 전시하고 훤히 비추어줌으로써 디지털 파놉티콘에 풍부한 정보를 제공한다. ~ 자유와 통제의 구별이 불가능해질 때 통제사회는 완성에 이른다.-212쪽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사물들은 우리를 관찰한다.-2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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