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밥바라기별
황석영 지음 / 문학동네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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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석영을 읽는다는 것 

 

  얼마 전 황석영은 <무릎팍 도사>란 프로그램에 출현한 적이 있다. 그가 나왔다고 해서 그 프로그램을 인터넷에서 다운로드해 보았다(정확히 이 행위가 불법인지는 모르겠다. 나는 아주 낮은 가격을 지불하고 다운로드 받았다). 60을 훌쩍 넘긴 나이의 황석영은 한국 문단의 원로답지 않게 젊은이 못지않은 패기와 열정을 유감없이 보여주었다. 사실 이전에 출현했던 이외수와는 격이 한층 높았다고 생각된다. 이외수와 황석영을 놓고 격 자체를 따지는 것은 나에게 있어 좀 어색하긴 하다. 같은 기준을 놓고 그 격을 따져야 하지만, 기인 이외수와 소설가 황석영이란 두 대상을 가르는 기준은 같지 않기 때문이다. 하여간 황석영이 <무릎팍 도사>에 출현한 것 자체로 내게는 다소 흥미롭고 관심 가는 일이었고, 그 흥미와 관심을 여하히 채울 수 있어서 기뻤다. 

  다 늙어서 애들처럼 왜 이런 프로그램에 출현했을까 황석영의 주변 여럿이 의아해하고 걱정했었던 모양이다. 그래도 문단의 원로가 망신이나 당하지 않을까 하는 주변의 노파심이었겠지만, 또 하나의 이외수를 만드는 것은 아닌가 하는 노심초사였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이외수를 폄하하는 것은 아니다. 내 생각에 그는 아무래도 황석영과는 많이 다른 영역에서 기인 소설가로 존재하니까 말이다. 

 

  각종 TV 연예 프로그램에 영화 개봉이나 신작 드라마 출현, 가수의 경우 새 앨범 발매 즈음에 불이 낳게 출현하는 경우가 간혹 비판받아 왔다. 사실 좀 과한 감이 없지 않은 게, 연예가 소식을 전하는 프로그램이면 그럴 만도 하겠다 하는 것이겠으나, 이것저것 가리지 않고 여기저기에 출현해 지겹고, 자기 새 작품 홍보에 열을 내는 것 같은 모습이 조금 구역질나기도 한 것이었으리라. 그러나 과한 것이 문제이지, 어느 정도는 유용한 정보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황석영의 이 프로그램 출현은 고무적이라고 하겠다(이외수의 경우도 그러한 면에서 긍정적이라고 생각한다). 가뜩이나 책 안 읽는 세상에서, 특히나 더 소외되고 있는 문학(소설, 시 등)에 대해 독자들의 관심을 이끌기 위해서라도 많은 시인, 소설가들이 이런 대중적 프로그램에 출현하는 것을 권장하는 것도 좋겠다는 것이다. 

  아무튼, 황석영의 <무릎팍 도사> 출현을 계기로 그의 신작 소설의 매출이 많이 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황석영이란 이름만으로도 불황을 밥 먹듯 하는 출판사에게는 한줄기 빛이었고, 매출로 확실히 보상했겠지만, 좀 더 득을 보는 것을 마다할 것은 전혀 못 된다. 여러모로 긍정적이고 고무적인 일이지만, 특히나 나를 비롯한 황석영에 대해 관심가지고 있는 유력한 독자들이라면, 황석영의 이러한 일탈(그는 사실 일탈을 밥 먹듯 했지만)은 다분히 흥분되는 일이기도 하다. 황석영이 이 프로그램에서 고백한 고민(지식인처럼 보이고 싶다고?)은 별 볼일 없는 것이고, 그가 풀어낸 그의 살아온 인생역정은 자못 박진감 넘치고 우리를 열나게 하고, 울고 웃기는 것임에 부족함이 없었다. 

  이 <무릎팍 도사>에서 황석영이란 소설가를 멋들어지게 읽었다고 하면 이상한 것일까? 1943년(잘 모르는 분이 계실지 몰라 하는 말이지만, 이때는 우리나라가 일제강점기를 벗어나기 이전, 그러니까 대한독립 만세의 날 1945년 8월 15일보다 2년이나 이른 시기다) 만주의 장춘에서 태어나 업둥이시절 독립을 맞고, 이어지는 전쟁, 고등학교 자퇴(혹은 중퇴?), 이런저런 방랑 혹은 방황, 소설가로서의 삶, 어머니에 대한 못난 아들의 사랑, 험난한 일탈 혹은 도전, 베트남 전쟁 참전, 북한 방문, 그야말로 역사의 곡절을 온몸으로 꺾고 꺾이어온 파란만장한 황석영이란 인간의 역사를 읽(듣)는 것은 참 값진 것이었다(그 점에서 약간의 다운로드 비용은 충분히 보상받았다). 남는 장사였던 것이 그 자체가 박경리 선생의 대하소설 『토지』 4부작 중 절반에는 해당할 스펙터클 드라마틱 이야기들을 짧은 시간에 읽(들)었으니, 남기도 어지간히 남은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래서였을까? 그의 신작은 미뤄오던 차에 구입해 두었던 것이다. 프로그램 중에서도 간간히 그의 신작 이야기들을 내비치고, 거기에 담긴 자신의 삶의 역정도 풀어놓았지만, 그래서 이 소설을 한번 읽어나 봐야겠군, 하는 생각을 더 가지게 한 듯하다. 사놓고는 시간을 조금 보내고, 엊그제야 하룻밤에 읽어내었던 것이다. 하룻밤에 읽었다는 것은 <무릎팍 도사>를 열 번 이상 볼 수 있는 시간이지만, 그래 손해 보는 장사는 아니었다고 해두어도 무방하리라 생각한다.

 

  소설을 읽는다는 것

  우리는 소설을 왜 읽을까? 문학원론적 이야기를 하자는 것은 아니다. 그저 이야기의 재미를 만끽하고, 때론 그 허구적 삶에 울기도 하고, 공감도 해가면서, 한번쯤은 그러한 낭만적 삶을 꿈꾸기도 하면서, 내 삶을 돌아보고, 우리의 모자란 경험들을 한가득 채우기 위해 우리는 소설을 읽는 것이 아닐까? 적어도 나는 그렇다. 내가 소설을 자주 즐기지는 못하지만, 애써 지루하게도 몇 편, 몇 권의 소설을 그래도 열심히 읽어내는 것은 소설이 주는 그러한 효용들 때문인 것이다. 여기서 내가 “소설이 주는 효용”이라고 했지만, 무슨 교훈적 측면으로서의 효용만을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저 심심풀이로, 무협지를 읽어가듯이, 그렇게라도 시간 때우기 위해 읽을 때도 있는 것이다. 

  사실 소설의 특징으로 첫째로 손꼽히는 것이 ‘허구성’이라는 것인데, 중고등학교에서는 이것을 무슨 공식이라도 되는 듯이 소설하면, ‘허구성’이란 단어가 이구동생으로 나오지 않으면 안 되는 것처럼 교육을 시켜서 첫째 손가락에 꼽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내 생각으로는 가급적이면 이 허구라는 말을 소설이란 분야에서 제일 끝자리에나 앉히고 싶다. 왜냐하면, 문학이라는 것은 대체로 허구이기때문이고, 또한 모두가 허구가 아니기 때문이다. 소설을 수필과 경계 짓는 곳에 허구를 놓지만, 수필의 어느 곳에는 허구덩어리가 있지 않다고 어느 누가 장담할 것인가? 소설 어느 곳에 허구 아닌 것이 있으리라고 나는 보장하지 못한다. 둘째손가락부터 꼽히는 소설의 다른 특징들로, 서사성, 개연성, 진실성, 갈등, 사건, 플롯 등등이 있다. 그런데, 아무래도 이것들을 다 합치면 소설이 된다고 말하기에도 좀 망설여진다. 그러니 그런 것들이라고는 우리 따지지 않는 것도 좋으리라. 서사, 곧 이야기라는 것은 소설 아닌 다른 것에도 존재하지만, 그 이야기를 이야기로서 온전히 전하는 장르가 소설일 뿐이라고 말하면 잘못일까? 아닐 것 같다. 소설을 읽는다는 것은 그래서 이야기를 듣(읽)는 것이면 족하리라고 본다. 이야기를 들을 때 제일 중요한 것은, 그 이야기에 푹 빠져서 듣다가, 잠에 들면 꿈속에서 재현하고 재창조해내는 것일 터이다.

 

  황석영의 소설을 읽는다는 것 

  소설을 읽다보면, 한 장이라도 넘기는 것이 지겹도록 무거운 것이 있고, 그렇지만 그래도 그 무거운 것을 소중히 온 힘을 다해 넘겨 읽게 만드는 마력의 소유자로서의 소설도 있다. 또는 수십 장이 후루룩 넘어가면서도 허한 것도 있을 것이고, 푸근한 것도 있을 것이고, 재미난 것도 있을 것이며, 막막하기도, 아리기도, 씁쓸하기도, 하여간 다양할 것이다. 내 기준에서 좋은 소설이란, 잘 읽히면서 재미난, 그러면서도 무언가 찡하게 남는 그런 것이다. 이것이 좋은 소설을 가리는 보편적 기준은 아닌 것이, 또 다른 내 기준에서는 내가 읽지 않은 어떤 소설에 대해, 혹은 아주 힘겹게 읽어낸 어떤 소설에 대해, 나는 이 소설 좋은 소설이기도 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황석영의 소설을 놓고 보자면, 어느 정도 전자에 해당된다고 나는 말할 수 있다. 술술 읽히면서도 재미있고, 어느 정도 가슴 울리는 무엇이 있는 소설 말이다. 그래서 그의 이름이 높은 것일 터이다. 

  황석영의 소설을 내가 많이 읽었던 것은 아니니, 그의 소설 전반에 대한 나의 평이 그렇다는 것은 아니다. 그의 초기 중단편들 몇 편(등단작 「입석부근」을 비롯해 「삼포 가는 길」, 「객지」 등)을 읽었을 뿐이고, 그의 장편들은 거의 읽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초기 중단편들에 대해 말하자면, 그 시절 그의 소설을 읽었던 기억이 그리 유쾌하지 못 하였다고 어느 곳에서 고백한 바 있어, 씁쓸할 뿐이다. 요전에 그의 소설은 읽은 기억은 『바리데기』 뿐이고, 그러니까 그의 최근작인 2편의 장편소설을 읽었을 뿐이다. 문단의 평이 여러모로 갈리는 가운데, 그의 최근작에 대해 나는 확실히 다른 면을 발견한 듯하다. 호불호를 떠나서 그의 최근작은 이전의 것들과는 분명 다른 데가 있었다. 우선 호흡이 가쁘지 않다는 것이다. 쉽게 읽히고 빨리 넘어가며, 잔잔히 흥미로운 데가 있어 좋았다. 

  내가 앞서 좋은 소설을 가리는 내 기준을 밝혔는데, 그에 따르면, 황석영의 최근작은 분명 전자, 그러니까 잘 읽히면서 재미있고, 무언가 남는 그런 작품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나는 그의 『바리데기』에서 2% 이상의 부족함을 느낀다. 그에 대하여는 다른 리뷰에서 밝힌바 있어 재론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개밥바리기 별』은 어떨까? 황석영의 최근 소설 경향을 내 나름대로 판단했을 경우, 이번의 작품도 그 경향을 전혀 벗어나지 않는다고 하겠다. 그러니까 내 기준으로서 좋은 소설에 해당하기는 한다는 것이다. 

  황석영의 소설 『개밥바리기 별』을 읽는다는 것 

  ‘신비평’이라는 근대적 비평의 조류를 세운 I. A. 리처즈는 1929년에 『실제비평』이란 뛰어난 업적을 토해놓는다. 이 책은 “사 년 동안의 강의를 바탕으로 한 읽기이론과 이론의 적용을 정리”한 것이다. 여기서 “리처즈는 저자를 밝히지 않고 시를 캠브리지 대학의 약 60명의 대학생들에게 나누어준 뒤 일 주일 후에 시를 읽은 횟수를 기입하고 시감상을 써오라는 과제물을 매번 제시”하는 실험(?)의 결과를 정리했다. 여기에 그의 장차 ‘신비평’이라고 불리는 이론이 실제적으로 적용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저자를 밝히지 않”았다는 사실에서 학생들의 감상 결과는 많이 달라졌다. 결국 이 실험을 통해 리처즈는 ‘신비평’의 다른 이름이랄 수 있는 내재적 비평이 중요함을 강조하게 된다. 이러한 리처즈의 신비평은 후대에 와서 비판 혹은 부정되지만, 현대 비평에 미친 영향은 크다고 하겠다. 

  문학 비평 이론사를 떠벌일 능력이 못 되어 절미하면서, 내가 왜 이 이야기를 꺼냈는가를 말하자면, 이런 가정을 제시해보기 위해서다. 황석영의 최근 소설에서 “저자 황석영”을 거세하면 어떨까 하는 것이다. 확실히 『바리데기』는 ‘황석영’이란 이름을 거세했을 때 지금보다는 저평가 될 것이다. 그렇다면 이 『개밥바리기 별』은 어떨까? 

  황석영이 스스로 밝혔듯이(방송에 나와서까지) 자전적 소설에서 이 ‘자전’을 거세하는 것은 어려운 노릇이다. 그러나 ‘자전적’을 거세했다고 해도 ‘소설’은 남는다. 그러니까 ‘황석영’이라는 ‘자전적’을 거세하고 『개밥바리기 별』이라는 소설만을 볼 때, 이 소설은 어떻게 평가될까? 남의 평가에 연연해하지 않고 내 기준에서 볼 때, 우선, 나는 이 소설을 읽지 않았을 것이고, 그렇다면 평가 자체가 불가능해질 수 있겠다. 그러나 어찌어찌해서 읽었다고 보고 말하자면, 사실 조금 아닌 데가 있다. 

  『개밥바리기 별』에서는 ‘준’을 중심으로 그를 둘러싼 친구들(‘영길, 인호, 상진, 정수, 선이, 미아’)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그들의 20대 초반에 이르기까지의 이야기를 담은 자칭 ‘성장소설’이다. ‘준’의 “베트남 파견이 결정”되고 며칠간의 휴가를 틈타 예전 여자 친구를 찾으면서 이 소설은 시작된다. 그런 시작에 이어서 회상 비슷한 형식으로 돌입한다. ‘준’이의 중고등학교 시절로 돌아가는 것이다. 다른 회상 형식의 작품과는 달리 특이한 것은 각 장에서 ‘준’의 시점을 사이에 두고 각각의 친구들의 시점이 교차되며 나타난다는 점이다. 이 점은 뒤에서 논하기로 하고, 그렇게 ‘준’의 사춘기 시절 이야기가 펼쳐지는 것이다. 

  아버지의 사업이 망해 홀어머니와 누이, 동생과 함께 어렵게 살아가는 ‘준’이는 그 즘의 시각이나 오늘날의 시각에서나 다소 삐딱한 아이, 그러나 책 읽기를 즐기고, 글쓰기에 재능이 있었던 아이였다. 학교를 때려치우기까지 그의 불우하다면 불우한 이야기가 끝나고, 여러 친구들과 어울려 방황하다가, 어느 일용직 막노동자를 따라 몇 년을 전국을 떠돌며 산 이야기를 끝으로, 회상(?)은 끝난다. 끝끝내 옛 여자친구(‘미아’)를 만나지 못하고 베트남 파병을 앞두고 부대로 복귀하는 열차에 오른다. 이게 대강의 줄거리다. 

  성장 소설은 인정하자. ‘준’이와 함께 그의 친구들은 각자의 삶에서 이래저래 살아가며, ‘성장’한다. 그러나 초점은 ‘준’이에 맞춰져야 한다. 우선 그는 반쯤 문제아다. 가족으로부터, 학교로부터, 사회로부터, 그리고 진정 자신으로부터 방황하고 떠나고자 한다. 그러나 글을 잘 썼던 아이였다. 그런 그에게 가족은 아무런 도움이 못 된다(경제적으로, 정신적으로). 그렇다고 그가 열심히 어울리는 친구들은 그저 도우미 정도일 뿐이다(노래방 도우미를 연상하자!). 그래서 그는 혼자 열심히 이 모든 것을 떠나고자 방황하고 도망(?)친다. 그가 사랑을 살짝 느꼈던 것 같은 ‘미아’로부터도 말이다.(왜 갑자기 ‘미아’를 베트남 파병을 앞두고 찾은 것일까? 그저 회포라도 풀 작정이었을까? 이런 쯧쯧. 사랑이라도 진하게 했다면, 고개를 끄덕이며 아쉬워했으련만.) 

  그 방황의 과정에서 ‘준’은 무언가를 찾은 것 같다. 그러나 그것은 스스로의 힘은 아니었다. 하긴 세상은 스스로 찾을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지 싶다. ‘대위’라는 일용직 떠돌이 노동자를 만나서 말이다. 그를 만난 것은 이 작품의 후반부쯤이지 싶다. 작품을 끝내려면 어쩔 수 없었다 싶기도 한데, 그에게 친구들이 해 준 것은 아무것도 없었던 것은 아닐까? 마지막 부분에서 ‘준’의 어떤 깨달음을 보자.

 

대위가 헛기침을 하고 나서 노래를 흥얼거리면 나는 좀 가만있으라고 짜증을 냈다. 땅거미 질 무렵의 아름다운 고즈넉함을 더욱 연장하고 싶었던 것이다.

어라, 저놈 나왔네.

대위가 중얼거리자 나는 두리번거렸다. 그가 손가락으로 저 물어버린 서쪽 하늘을 가리켰다.

저기…… 개밥바리기 보이지?

비어 있는 서쪽 하늘에 지고 있는 초승달 옆에 밝은 별 하나가 떠 있었다. 그가 덧붙였다.

잘 나갈 때는 샛별, 저렇게 우리처럼 쏠리고 몰릴 때면 개밥바라기.

나는 어쩐지 쓸쓸하고 예쁜 이름이라고 생각했다.

  방황 끝에서, 글쓰기를 통해서도 아니고, 막노동꾼을 따라 유랑하며 노동하면서, 깨달은 것 치고는 좀 허하다. 아! 그럴 수도 있겠다 싶은 것뿐이다. ‘개밥바리기’를 보며 ‘준’이는 “쓸쓸하고 예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희망 하나를 새기는 문구 “잘 나갈 때는 샛별”이 왜 이리 공허한지 모르겠다. ‘개밥바리기’가 ‘준’을 비롯해 그의 친구들과 동일시되는 것은 당연하다. 그리고 그들이 언젠가는 ‘잘 나갈’ 것이라는 헤픈 희망이 새겨진다. 왜? 단지 ‘개밥바라기’는 ‘샛별’과 같은 실체이기 때문이다. 그게 다인가? 온갖 방황과 고생 끝에 얻어진 것 치고는, 밤새 놀음을 하고 나와 초승달을 보며 느끼는 그 싸늘한 희망과 다를 것이 없어 보이는 것은 비단 나뿐인가? 아무튼 황석영을 거세하고 보자면 그렇다. 

  그런데 여기에 ‘황석영’을 첨가하자면, 읽는 재미는 한층 나아진다. 그가 <무릎팍 도사>에서 풀어낸 인생역정, 파란만장의 썰을 대비하며 읽는 재미는 엄청나다. 그런데 이것은 ‘소설적’ 재미와는 다른 것이 아닐까?

 

국제극장 골목에 줄지어 있던 어느 선술집에서 막걸리를 두주전자쯤 마신 날, 둘이서 시청 쪽으로 걷다가 부민관 건물의 화단 뒤로 움푹 들어간 그늘 앞에서 선이가 나를 잡아끌었다. 그녀는 나를 차가운 벽에 밀어붙이면서 입술을 댔다. 첫키스를 했는데 나는 처음에는 얼떨결의 일이라 두 팔을 낙지처럼 늘어뜨리고 섰다가, 나도 모르게 한 팔은 그녀의 등을 감고 다른 한 손으로 가슴을 더듬었다. 그러자 선이가 그냥 내버려둔 채로 입술을 떼고는 내 눈을 들여다보며 종알거렸다.

작지?

  이런 뭔가 올 듯 말 듯 한 어린 시절의 첫 키스의 찝찔 짜릿한 추억의 재미가 재미라면 재미고 ‘준’의 어설픈 첫 여자경험의 그 못남의 어처구니없음이 웃음이라면 웃음이다. 그러나 할 건 다 하면서 제대로 풀어내지 못하는, 그래서 영화 <뜨거운 것이 좋아>의 우리 소희의 키스보다는 찌릿함이 떨어지고, 널브러진 포르노보다는 그 노골함이 아쉬운 것은 어쩔 수 없다고, 나는 생각한다. ‘황석영’을 거세하고는 말이다. 

  ‘황석영’이 가세하면 상황은 보다 흥미로워진다. 가령 자살의 경험을 보다 구체적으로 알아본다거나, 어떻게 하다가 어린 시절 작가의 꿈을 키웠다거나(이 대목은 확인이 어렵다), 혹은 학교를 무엇 하다가 관뒀다거나, 학교 관두고 무엇하고 놀았다거나, 하는 대목이 황석영과 매치시키지 않고는 별반 재미날 것은 없는 에피소드일 뿐이다. 혹은 이런 대목에서 또 다른 재미를 느끼게 되는데,

 

담임은 황새라는 별명의 국어선생이었는데 좀 독특한 데가 있었다. 키가 크고 얼굴도 길쭉하고 팔과 손가락도 가늘고 길었다. 말씨는 느릿느릿했고 상대가 마음에 들지 않는 언행을 보이면 입 양편에 비웃는 주름살을 지으며 냉소적인 말로 상처를 주었다. 교과서에 나오는 글도 일단은 가차 없이 씹고 나서 한 줄씩 짚어주는 식이었다.

낙엽을 태우면서라는 제목도 그렇지만, 가을을 슬픈 계절이라고 보는 게 어쩐지 통속적이지 않나? 낙엽 태우는 연기에서 갓 볶은 커피 냄새가 난다는 대목도 겉멋이라구 보이는데, 정서는 생활과 연결이 되어야 하겠지. 그러지 않으면 귀에서 목덜미까지 소름이 돋아요. 어떤 글이든 남에게 자기 생각을 전달하려는 수단이고 통로일 뿐이다. 감정을 아끼고 담담하게 냉정하게 쓰되, 문장과 문장 사이가 중요하지. 독자는 이 사이에서 자신의 상상력으로 나머지를 채우고 글을 함께 완성해준다.

  여기서 ‘황새’는 혹여 황석영이 아닐까 하는 호기심, 정말 ‘황새’가 황석영의 국어 선생님이었다면 황석영이 그에게 글쓰기에 대한 영향을 어느 정도 받았겠구나 하는 추측, 그러면서 여기서 남모르게 담아 놓은 황석영의 문학론을 살피는 것 등이 재미라면 재미인 것이다. 그러니까 “사람은 씨발…… 누구든지 오늘을 사는 거야.”라는 ‘씨발’ 때문에 ‘맨숭맨숭하지’는 않은, 쓸데없어 보이는 아포리즘이 별다른 감동은 주지 못한다는 것이다. 여기에 황석영이 이 말을 듣고 “거기 씨발은 왜 붙여요?” 물으면서 개운한 웃음을 웃었을 것을 생각하는 것이 더 재밌을 거란 생각, 나만 그런가? 

  황석영은 <작가의 말>에서 “이 소설에서 사춘기 때부터 스물한 살 무렵까지의 길고 긴 방황에 대하여 썼다. ‘너희들 하고 싶은 대로 하라’고 끊임없이 속삭이면서, 다만 자기가 작정해둔 귀한 가치들을 끝까지 놓쳐서는 안 된다는 전제를 잊지 않았다.”고 말한다. 그렇다 이 소설은 사춘기 시절의 방황을 썼던 것이다. 그런 점에서 오늘날 사춘기 아이들에게 일말의 공감은 형성할 수도 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이걸 ‘소설’로서 잘 풀어냈느냐는 별개의 문제일 것이다. 

  이 소설이 소설로서 가지는 어떤 장점이라는 것은 앞서서 언급한 형식적인 면일 것이다. ‘준’이를 중심으로 번갈아 교체되는 여럿의 1인칭의 시점들은 다양한 인물들의 사춘기 모습을 그리면서, 한 인물의 사춘기 시절을 총체적으로 서술하는, 그러한 방법을 통해 ‘준’이라는 인물과, 그를 둘러싼 삶의 모습들, 사춘기의 일상과 정서를 보다 깊고 넓게 서술하고 있다는 것이 이 소설의 가치를 어느 정도 상승시켜 준다고 볼 수 있다. 독특한 면이지만, 이것이 ‘준’이의 회상 형식과 중복될 때, 다소 부조화가 일어나는 것은 아닐까 하고 생각된다. ‘준’이라는 인물의 총체적 삶의 모습(성장)과 동시에 다양한 인물 군상의 또 다른 성장이 중첩되면서 그 폭이 넓어졌다고 할 때, 이것이 ‘준’을 중심으로 열리고, 다시 ‘준’에 의해서 닫힐 때 어딘가로 날아가 버린 듯 한 허함이 남는 것은 그러한 연유에서일 것이다. 

  어쩌면, 나는 이 소설은 황석영이 소설이 아닌 일종의 자서전적 수필로 담아내었다면, 그래서 그의 어린 시절의 이러한 삶은 보다 사실적으로, 역사적으로 그려냈다면, 보다 유효하과 적절했지 않았을까 싶은 것이다. ‘황석영’이라는 이름과 ‘소설’이라는 장르는 일종의 금상첨화와 같은 만남이지만, 때론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이 『개밥바리기 별』이 주는 교훈일수도 있겠지만, 황석영의 입장에서 그 소재들을 버리기 아까웠을 수도 있었겠다 싶다. 아무튼 황석영이 앞으로도 그의 “문학적 연대기의 기술”을 이어나간다고 할 때, 이 “작품이 하나의 새로운 표지석이 되”기는 될 것이다. 그의 남은 생애 건필을 빌며, 졸렬한 이 글을 마치지만, 아쉬움은 다시 ‘황석영’에게로 돌아간다. 그리고 이 책을 읽으실 분들에게 권하자면, <무릎팍 도사>를 먼저 보시고, 이 책을 읽으면 좋겠다. 그 역도 가능하지 싶기는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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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CAT 2009-01-08 14: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인간 조종법] 서평단 설문 & 리뷰를 올려주세요
인간 조종법 - 정직한 사람들을 위한
로베르 뱅상 , 장 레옹 보부아 지음, 임희근 옮김 / 궁리 / 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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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를 조종한다는 것이 가당키나 한 일인가? 한 인간이 다른 인간을 떡주무르듯 마음대로 조종한다는 것은 언듯 들어서는 인간윤리에 어긋나는 악행일 따름이다. 그런데 보통의 경우에서 기계를 작동시키듯, 파일럿이 비행기를 조종하듯 인간을 제멋대로 조종하는 일은 찾아보기 극히 어렵다. 티비에서 보이는 체면술사가 그러해 보이지만 알고보면 이것도 거의 짜고치는 고스톱 아니던가?

자 여기에 조금은 의아스럽고, 어쩜 그런 책이 있을까, 하고 궁금해할 책이 나왔다. 프랑스의 사회심리학자(이들은 무슨 일로 그런지는 잘 이해가지 않지만 자신들을 '사회심리학자'로 부르면서 애써 '심리사회학자'와 구분한다. '사회심리학'과 '심리사회학'은 차이는 크다면 크고 적다면 적지 않을까? 곳곳에 보이는 이런 학자연하는 사람들의 노름이 간혹 이 책을 따분하게 만들고, 쓸데 없어 보이기까지 한다.)인 로베르 뱅상 줄과 장 레옹 보부아의 책 『인간 조종법』이 바로 그것이다. 과연! 이 책이 비행기나 헬리콥터 조정법처럼 인간을 조정하게끔 해 주는 그런 방법들을 담고 있을까? 짐작하시듯이, 천부당 만부당, 당연지사로 '아니다'다.

   
  보통 하는 말로는, 남에게 영향을 끼치는 행동(누군가로 하여금 그 사람이 자진해서라면 하지 않을 어떤 행동을 하도록 설득하는 일)을 가리켜 '조종'이라 할 수 있다. 조종자가 자기중심적인 사람일 경우, 그는 자기가 명분을 성취하기 위해 끌어들이려는 사람과 자기 자신 사이에 이익 공동체가 성립된다고 실제로 확신할 수도 있다. 그런데 이 책에서 문제 삼는 것은 그런 조종이 아니다. 우리가 여기서 말하는 조종은 설득하는 행동에 의거하는 것이 아니라 일종의 '행동 기술'에 의지한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그리고 이러한 의지는 고의적일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만약 조종자가 자신이 하는 행동의 의미를 명료하게 의식하고 있는 경우라면, 조종당하는 사람은 자기를 목표로 삼은 이 조종 작업을 여간해서 따돌리기 어렵다.(67쪽)  
   

말하자면 이 조종은 사람이 사람을 '꼬시는' 여러 행위(언행)들이다. 이를테면, 가게 점원이 손님에게 물건을 사게 한다거나, 어떤 자선단체에 기부하게 한다거나, 보험에 들게 한다거나, 공중전화를 사용할 동전을 얻는다거나, 과자 사먹을 천원을 타낸다거나 할 때, 그것을 아주 효과적으로 성공할 수 있도록 해 주는 것을 말한다. 이런 것이 조종이라면 우리는 끊임없이 조종하고 조종당하며 살고 있었고, 살고 있으며, 살아 갈 것이다. 하다못해 시장통에서 흥정을 하는 것도, 이 책의 저자들에 의하면 조종의 기법 중 어느 한 가지에 해당하기도 한다.

저자들이 말하는 무슨 특화된 듯한 무슨무슨 조종법들은 사실 너무나도 흔한, 우리가 의식, 무의식적으로 자주 써왔던 것들에 다름 아니다. 사람들에 따라 그 정도 및 효과에 차이가 있을 뿐이다. 요즘은 '낚시'가 대세다. "문간에 발 들여놓기", "문전박대 자초하기" 등으로 번역을 그럭저럭 잘 해놓았지만, 이름만 붙였을 뿐, 저자들이 새로이 창안하여 만든 그야말로 인간을 제멋대로 조종하는 특허낸 기술은 아니라는 얘기다.

그렇다고 우리가 이것을 소홀히 볼 일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무엇을 아는지, 무엇을 모르는지 아는 것에 있다고들 하잖은가? 우리가 무의식적으로 사용해온 방법이지만, 우리가 자주 쓰고 아는 그런 방법들이 무엇인지 안다는 것은, 그것을 보다 효과적으로 적절하게 현 생활 속에서 유용하게 사용하게 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럴때에 우리의 생활은 좀더 윤택해지지 않을까? 그건 몰라도 우리의 작은 수고를 좀 덜어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책 제목인 "인간 조종법"을 수식하는 부제격의 "정직한 사람들을 위한"이라는 말은 참 쓸데없는 것이지만, 홍보용 문구인 "프랑스인들이 꼽은 최고의 커뮤니케이션 지침서"라는 말은 이 책이 조종이 아닌 '커뮤니케이션', 나아가 인간관계에 어느 정도의 도움을 주고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어 홍보용 이상의 도움을 우리에게 준다. 이를테면, "딱지 붙이기의 기능" 같은 것일텐데, 이것은 "추상적, 심리적, 도덕적 특성을 지닌 예비 행위에 방금 참여한 사람에게 어떤 타이틀을 붙여서 높여주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일종의 칭찬하기일 수 있겠다. 많이들 써왔듯이 이는 우리의 인간관계를 보다 긍정적이게 만들어 주는 효과적인 방법이다.

한가지 더 들어보자. 우리는 스킨쉽이 우리에게 어느 정도 감정과 정서에 좋은 영향을 주는지 익히 들어 알고 있다. 여기서는 이것을 일컬어 '접촉 기법'이라고 명명했다. 지나가는 손님에게 슬쩍 손을 가져다가 접촉하면서 친근함을 표현하면, 상품 판매율이 괄목할 정도로 늘어난다는 것이 실험을 통해서 검증되었다고 한다. 이런 것들이, 그러니까 우리가 잘 알고 있으면서, 혹은 안다고 하지는 못하지만, 무의식적으로 실행하고 실행당했던 것들을 잘 정리해서 묶어 놓고 있다. 실험을 통해서 검증까지 하고 있기도 하다.

이런 점에서 이 책은 유효적절한 도움을 우리에게 줄 수 있다. 그런데,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그런 방법을 넘어, 인간관계에 있어서 어떤 것이 중요한 것인지를 알려준다는 데에 있다. 억압이 되었건, 설득이 되었건, 권위에 위해서건, 꼬임에 의해서건, 내가 누군가에게 무엇인가를 꼭 시켜야 하겠거든, 그러니까 그 누군가가 내가 원하는 그 무엇인가를 해준다고 할 때, 누이 좋고 매부 좋은 것이 무엇인가 하는 점이 대단히 중요하다는 얘기다. 아무래도 좋은 게 좋은 것 아니겠는가? 그 무엇이 범죄행위에 버금가는 어떤 것이 아닌 이상에야 말이다. 그것을 여러 조종기법을 심도있게 추적하고 분석해온 저자들은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앞의 여러 장에서 낚시, 문간에 발 들여놓기, 덫 기법에 대해 말하면서 우리는 자유롭다는 느낌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자유롭다는 느낌은 특정 행위를 손쉽게 얻어내도록 해주는 보조장치(낚시나 덫 기법에서의 첫 결정, '문간에 발 들여놓기' 기법에서 예비 행위)가 아니라, 상대방을 그 행위 속에 참여시키려 할 때 꼭 있어야 할 열쇠였다. 그러므로 자유롭다는 느낌은 분명, 조종자에게 도움이 되었다. 말하자면, 부담이 적은 첫 행위에 참여하게 함으로써 상대방으로 하여금 나중에 좀더 부담이 큰 다른 행위도 실행할 수 있도록 미리 포석을 깔아준다는 점에서 그렇다. 그런데 이 자유롭다는 느낌 자체가 조종의 우아한 기술 중 하나일 수도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이른바 '마음대로 하십시오' 기법이 그것이다.(211~2쪽)  
   

저자들이 재차 강조하듯이 "개인은 그가 자유롭다고 느끼는 상황에서만 효과적으로 조종될 수 있다는 것"이다. 자유롭다는 느낌을 주는 것, 다시 말하면, 자발적 행위가 될 수 있도록 그러한 조건과 환경을 만들어 주어야 보다 자유자재의 조종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자발성이 지극히 요구되는 분야는 아무래도 교육(학교교육이나 가정교육 등)일 것이다. 저자들이 예시한 다음 내용을 살펴보자.

   
 

1. "얘야, 나는 네가 뛰어내리면 좋겠다. 물론 하느냐 안 하느냐는 네 문제이니까,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하렴."

2. "얘야, 네가 뛰어내리면 나는 기쁠 거야. 내 말 잘 알아들었니? 만약 안 뛰어내리면, 넌 일요일날 친구들하고 영화 보러 못 갈 줄 알아라."

3. "얘야, 나는 네가 뛰어내리면 좋겠다. 뛰어내리면 딸기 아이스크림 사 주마."

4. "얘야, 나는 네가 뛰어내리면 좋겠다. 뛰어내리면 자전거를 사 주지."

 
   

저자들이 제시한 4가지의 경우는 모두 아버지가 아들의 담력 혹은 용기를 키워주기 위한 이유가 담겨 있는 조건문들이다. 위의 모든 조건에서 아이가 뛰어내렸다고 가정했을 때(번역상에 문제였을까? 아버지가 아이를 강물에 뛰어내리라고 자꾸 권하거나 강요하는 것은 우리의 통념과 윤리에 부적합하잖은가? 프랑스에서는 어떤지 몰라도 말이다. 무언가 상황이 다를 것 같은데, 번역상에서 좀 신경을 써줘야지 싶다. 이 책에서는 비슷한 예로 정원에서 물에 뛰어내리기 놀이같은 것이 나오기도 하는데, 그것도 우리가 이해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다. 아무튼 번역자 혹은 편집자의 설명이 덧붙여져야지 싶다.) 아이의 자발성이 도드라지는 것은 1번과 3번이다. 2번은 협박에 가깝고, 4법은 아이를 물신만능에 빠지게 하기 십상이다. 오늘날 우리 부모들이 하는 작태가 거반 2번가 4번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입안이 씁쓸해진다.

교육에 있어서 자발성, 혹은 자기 주도적 학습이 중요하다는 사실은 이미 잘 알려져 있다. 그것을 유도하고 적극적으로 도움을 주는 것은 교사 혹은 학부모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그러한 위치에 있는 사람들에게 대단히 유용한 도움을 줄 것으로 기대된다. 아이 스스로 무엇인가를 해냈다고 느낄때에 나타나는 그 교육적 효과는 아이를 보다 바람직한 방향으로 자라게 해 줄 것이 분명하다. 이 책의 아쉬운 점도 이 부분이다. 좀 더 그런 활용법이 강조되었으면 좋았을 법하지만, 아무래도 이들이 사회심리학자다보니 그러한 요청의 응답을 기대하는 것은 어려울 수도 있겠다. 다만, 이 책이 그러한 역할을 감당할 이에게 좋은 영감과 영향을 주기 바랄 뿐이다.

교육과 관련해서 저자들이 말하고 있는 것처럼, 주의해야 할 부분은 이러한 조종의 기법들이 자유로운 느낌을 주는 것은 분명하지만, 그것이 창조적인 행위들을 이끌어 내기보다는 단순한 재생산을 수월하게 만들어 줄 뿐이라는 사실이다. 기성세대들의 인식, 윤리, 문화 들을 아이들이 자유로운 느낌으로 재생산할 뿐인 것이라는 얘기다. 참고하고 숙고해야할 지적이다. 그런 점을 보완하면서 보다 효과적인 교육방법, 교육심리학 등이 연구되고 그 결과물이 나올 수 있기를 기대한다.

사족으로, 번역자 혹은 편집자의 다소 무성의함을 언급하고 끝내자. 각종 조종 기법들을(원서에서 아마도 쉬운 말로 풀어서 명명했을테지만) 쉬운 우리말로 풀어낸 것은 긍정적인 일이지만, 곳곳에서 보이는 학술 및 전문용어들이 무지막지하게 돌출하고 있다는 점을 우선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주석이라고는 저자의 것뿐이어서, 편집자가 과연 무엇을 했는지 좀 의심스럽다. 아무래도 편집자가 주를 대어야 할 곳이 많아 보인다. 그리고 번역상에 다소간의 오류가 있어 보인다. 예를 들면 289쪽의 다음과 같은 대목이다.

   
 

실제로 그 가게 점원에게 다른 생각이 없었다면 왜 굳이 다른 옷과 한 벌을 이루는 바지를 따로 할인 판매했겠는가? 그것도 상의와 바지를 따로 팔 수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앞부분의 이야기는 대략 이렇다. 멋진 바지를 내걸고 대폭 할인판매하고 있다고 유혹하여 그 바지를 사러 들어온 손님에게 그와 더욱 멋드러지게 어울릴 할인 안 되는 상의를 권유하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의 상업전략이라는 얘기 중에 위 인용문이 나오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좀 이상하다. 앞뒤가 안 맞잖은가? 첫 문장에서는 다른 생각(손님을 유인할 생각)이 있어서 "다른 옷과 한 벌을 이루는 바지를 따로 할인 판매했"다는 얘기다. 이에 자연스럽게 이어지려면 같은 얘기 아닌 다른 이야기가 나와야 한다. 문맥상 "~에도 불구하고"에 적절히 호응하기 위해서는 말이다. 그런데 다시 앞 문장과 같은 의미가 반복된다. "상의와 바지를 따로 팔 수 있었"다는 얘기는 바로 앞 문장에 나오는 말 아닌가? 여기서는 문맥상 "그것도 상의와 바지를 같이 팔 수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말이다."가 되어야 자연스럽잖은가? 원서를 대조하지는 못했지만, 원서의 오류이던가, 번역상의 오류 둘 중 하나일 가능성이 농후하다.

아무튼, 이런 옥의 티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여러면에서 나름의 장점들이 많다. 이어지는 후속작업, 연구, 그리고 각계의 활용방법들의 성과들이 많이많이 나와주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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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모 에로스] 서평을 올려주세요
사랑과 연애의 달인, 호모 에로스 - 내 몸을 바꾸는 에로스혁명 인문학 인생역전 프로젝트 6
고미숙 지음 / 그린비 / 2008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삼십 평생을 연애 한 번, 찐한 사랑놀음 한 번 못 해 본 나같은 사람에게, 연애가 이러쿵 저러쿵, 사랑이 어쩌구 저쩌구 하는 것은 한낱 사치일 뿐이다. 아니 어쩌면, 그나마의 위로 혹은 위안 삼는 자위일지도 모르겠다. "사랑이 무어냐고 물으신다면, 눈물을 씨앗이라고 말하겠어요"를 구성지게 뽑아 제낄지언정, 그 씨앗을 어디에 심어야 할지는 도무지 알 수가 없다. "사랑이 뭐길래?" 도대체가 알 수가 없다. 알 수 없는 그것에, 언제부턴가, 스스로로부터, 때론 타의에 의해서 집착하고 집착하게 된다. "여자 친구 없냐?" "장가가려면 얼런 여자를 사귀어야 한다"느니 하는 말들에서부터, 괜히 쓸쓸해지는 봄 여름 가을 겨울의 계절나기까지, 세상은 수시로 나를 괴롭힌다. 드러워서라도 내 한 평생 사랑 한 번 해보고 말리라! 젠장.

사랑이야기들, 연애담들, 사랑학개론들, 사랑은 이렇게 담론들이 넘쳐나는 세상이다. 어쩌면 사랑을 팔기 위해 안달인 세상같다. 연애 고수들은 모든 이들의 부러움을 한 몸에 받는다. 몸발이 좋은 사람들, 얼굴이 꽃미남에 동안인 인사들, 게도 안되면 말발이라도 자지러지는 인간들, 그들은 줄곧 연애전문가로 통한다. 연애와 사랑이 시시절절 끊이지 않는다. 다만 대상이 수시로 바뀔 뿐이다. 하여간 잘도 한다. 삼십 평생에 하나 있을까 말까한 내 경험을 걔들은 무시로 해치우고 만다. 대단하다. 대단한 고수들.

우리는 그들을 연애박사, 연애대장 쯤으로 부른다. 누가 박사학위를 준 것은 아니지만, 나름 그들도 사랑 혹은 연애에 자신을 전문가쯤으로 여기는 듯 하다. 솔직히 인정한다. 그들이 많은 여자를 사귀는 데에도 나름의 노하우와 전략이 있을 것이다. 그게 능력이든, 돈이든, 얼굴이든, 말발이든 간에, 그것도 개뿔 없는 나와 비교해서는 대단한 장점들이니 말이다.

그런데, 이제 그런 수식, 혹은 명명들을 거둬들여야 할까 보다. 이 시대에 연애 고수들에게 "니들이 사랑을 알아?" "공부 좀 더 하셔"하고 온갖 자신감 충천하여 건방지게 떠들고 나온 이가 있으니, 그가 다름 아닌 고전평론가 고미숙 선생이다. 중년의 나이에 참 용감도 하셔라. 그에 대한 이미지는 사실 사랑의 '사'자로 모를 위인처럼 보일 뿐인데, 자칭 사랑의 달인 납시오 하며, 사랑에 대한 썰을 마구마구 풀어댄다. 허 참!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도대체 이 중년의 아줌마(고 선생께 죄송스럽지만, 양해 바란다)가 뭘 안다고, 사랑의 달인 타령일까? 쪼끔 궁금해진다. 그렇다면 이 책 『사랑과 연애의 달인, 호모 에로스』를 읽을 자격이 충분히 되는 셈이다. 우선, 읽기 전에 아줌마라고 얕보고 들어가진 말길 충고한다.

고미숙 선생이 보기에 요즘 세대, 정확히는 근대 이후의 세대, 더 정확히는 신자유주의와 자본이 점령한 80년대 이후의 요즘 젊은 세대들은 제대로 된 사랑을 못하고 있는 것 같아 안타까운 마음에, 사랑은 이런 것이야, 이쯤 해야 사랑한다고, 연애한다고 말할 수 있지, 하고 조언한다. 고미숙 선생이 지적하는 요즘 세대의 사랑의 문제는 대략 이런 것들이다. 첫째, 사랑과 연애의 고수들이 판을 치는 '연애공화국'처럼 보이지만 실상 그 안에 진정한 사랑을 하는 이들은 없다는 것. 둘째, 순정 아니면 냉소, 선수 아니면 스토커, 사랑과 섹스, 차고 차이고 등으로 대별되는 사랑 공식의 그 무식한 이분법. 셋째, 사랑에 대한 말도 안되는 상상과 이미지, 그리고 마지막으로 삶과 유리된 사랑. 이런 것들이 오늘날 사랑에 대한 잘못된 인식들이라고 지적한다. 대단히 동의할 수 있는 대목이다.

그런 사랑에 대한 잘못된 인식들, 곧 사랑에 대한 '오만과 편견'은 다만 개인적 인식의 잘못 만이 아니란 사실, 그 사실을 고미숙 선생은 이어서 분석한다. 이 사회는 총체적 구조 속에서 사랑에 대한 헛된 망상을 조장하고 왜곡시킨다고 보는 것이다. 국가, 사회, 학교, 가족, 문화 등등등. 이 모든 것들이 자본과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와 헤게모니 속에서 사랑을 왜곡시키고 있는 셈이다. 그 일례가 되는 것이 사랑은 곧 소비가 되는 현실이다. 모든 사랑의 진행과정은 그야말로 소비의 진행이다. 첫만남은 스타벅스에서 차를 마시고, 영화를 보는 것은 이제 공식이 되어 버렸다. 무슨무슨 데이는 특별한 사랑을 창조하는 것 같지만, 기실은 조장된 소비문화일 뿐이다. 이 데이데이에 맞춰서 사랑이 진행될 뿐이다. 여기에 문제가 있다.

   
 

거듭 당부하거니와, 절대 상품을 주고받는 식으로 사랑을 확인하지 마시라. 물론 선물은 중요하다. 하지만, 진짜 소중한 선물에는 '삶의 서사'가 묻어 있어야 한다. 즉, 나의 일상의 리듬과 무관한 선물이란 그야말로 쇼에 지나지 않는다. 일상으로부터 분리되어 "쇼"가 되는 순간, 아무리 정성을 다한다 한들 결국 화폐로 환산될 수밖에 없다. 특히 요즘같이 상품과 예술의 경계가 모호한 시대에는 정성과 화폐가 분리되기 어렵다. 갖은 정성을 다한 선물일수록 가격에 비례한다. 따라서, 그 노선을 취하는 순간, 이미 그 사랑은 화폐권력의 장에 포획되어 버린다. 그 다음부터는 일상의 모든 흐름에 상품의 혼이 따라붙게 된다. 처음엔 얼떨결에 따라했던 작업들이 나중엔 자신의 본성인 양 전도되어 버리는 것이다.(197~8쪽)

 
   

그렇게 우리의 사랑에 대한 인식은 전도되어 버렸다는 것이다. 그러니 뻔한 사랑, 밋밋한 사랑일 뿐이고, 점점더 자극적이 되고, 이벤트가 가장 소중한 사랑이 되어 버리고, 본말은 전도되고, 나와 네가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나와 네가 세상의 물질과 소비를 사랑하는 것이 되어 버리고 만다. 일찍이 혜은이는 말했다. "만나서 차마시는 그런 사랑 아니야, 전화로 얘기하는 그런 사랑 아니야, 웃으며 안녕하는 그런 사랑 아니야"라고. 밋밋한 사랑 공식들, 연애 과정들 속에서 사랑은 점점 그 힘을 잃어갈 뿐이다. 그러니 더 자극적인 요소들을 찾아간다.

사실 혜은이는 열망했다. "가슴 터질 듯 열망하는 사랑, 사랑 때문에 목숨 거는 사랑"의 열정을 원했던 것이다. 살자고 사랑하고, 사랑하자고 사는 것인데, 죽을 이유는 하등 없어 보인다. 좀더 자극적이어야 한다는 것이 오늘날의 사랑이다. 고미숙 선생의 말대로라면, 좀더 자극적인 것을 추구하다 보면, 일찍 시들기 마련이다. 그런 사랑, 정말 아니다.

내가 사랑을 안 해봐서 모르겠지만, 현대 사회에서 가장 큰 병통은 사랑과 섹스의 문제다. 사랑과 섹스는 하나도 아니고, 그렇다고 둘 도 아니다. 사랑 없는 섹스는 잘못일까? 섹스 없는 사랑은 숭고할까? 섹스는 섹스 자체로도 아름답고 가치 있다는 게 일단 내 지론이라고만 밝혀두자. 이런 사랑과 섹스에 대한 이분법적 인식의 틀도 결국은 근대 이후의 자본논리와 신자유주의의 논리가 만들어낸 괴상한 것일 뿐이라고 고미숙 선생은 말한다.

자 이쯤해서 고미숙 선생의 사랑학개론의 결론을 말해보자. 고미숙 선생은 프롤로그에서 우리에게 이 세 가지를 기억해야 한다고 말한다. 우선 사랑의 주체와 대상은 곧 나라는 것이다. 자꾸들 사랑에서 나를 거세시켜 버리는 것, 이거 안 된다. 다음으로 실연에 대한 오해와 편견이다. 또 다른 시작을 향해 힘차게 나갈 수 있는 행복한 기회여야 하지 않겠는가? 그리고 에로스는 쿵푸다.

에로스는 쿵푸다. 사랑하려면 공부하라. 이것이 결론이다. 사랑이라는 헛된 망상을 위해 정신줄 생명줄 놓는 인간들이 참 많다. 진정한 사랑은 창조적이고, 삶을 한결 충만하게 하며, 나아가 나와 너를 자유롭게 해 주는 그런 것이어야 하는데, 그럴려면, 인문학적, 정신적, 지성적 공부가 대단히 중요하다는 것이다. 알아야 사랑하지. 현대 사회가 벌여놓은 그 사랑의 공식들을 철저히 거부하고 그로부터 탈출하여 보다 창조적 사랑을 영위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이 공부가 필수다. 책도 많이 읽어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난 책은 좀 읽는데, 왜 이러지?)

나아가 사랑은 혁명이다. "사랑, 노동, 지식은 우리 생활의 원천이며, 이것들이 우리의 생활을 지배해야 한다."고 빌헬름 라이히가 말했다고 고미숙은 인용한다. 그러면서 이렇게 덧붙인다.

   
 

왜 사회를 전면적으로 전복하기를 꿈꾸면서 사랑과 성적 관계에 있어서는 새로운 실험을 기획하지 않는 것일까? 사랑이야말로 혁명의 뇌관임을 눈치조차 채지 못하고 있는 것일까? 대체 왜?(83쪽)

 
   

그렇다. 사랑은 창조적이어야 한다.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은 다름 아닌 사랑이다. 혁명은 세상을 전복하고자 한다. 사랑이 없다면, 무슨 수로 혁명이 가능할까? 세상의 그 구조적 오류들을 사랑으로 극복하고 전복시킬 수 있다. 그리고 그 위에 창조적 발상들을 위치시켜야 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공부해야하고, 공부해서 사랑하고, 사랑해서 혁명하자는 것이다. 이를 테면 이런 식이다.

   
 

이런 생각을 해본 적이 있다. 우리시대 모든 연인들이 연애와 쇼핑 사이의 이 은밀한 공모관계만 해체해도 신자유주의 체제는 휘청거릴 것이다, 라는. 세상에, 이렇게 간단하고 기막힌 혁명전략이 어디 있단 말인가? 그러니 청춘들이여, 아니 사랑에 빠진 모든 이들이여, 세상이 바뀌기를 정말 원하는가? 신자유주의에 저항하고 싶은가? 그렇다면, 가장 먼저, 쇼! 하지 마라! 쇼! 그럼 어떻게 사랑을 표현하는가? 그래서 창의성이 필요하다. 나의 사랑이 지닌바 특이성이 유감없이 발휘될 수 있는 사랑법을 창안하라.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고유한 사랑법을.(198쪽)

 
   

오호! 이런! 이쯤되면 혁명을 꿈꾸는 내가 안달해마지 않을 것은 당연한 노릇이다. 자 이제부터 혁명하자! 아니 사랑하자! 그럼 공부하자! 그런데 의문! 나 남들보다 책 많이 읽고, 인문학적 공부 열심히 하고 있다. 그런데, 왜 이모양이람. 사랑하고 혁명하는데 아무 문제 없는데, 왜 이러냐 이 말이다. 어이쿠! 고미숙 선생 친절히 말씀하신다. "정말 사랑의 열정을 맛보고 싶다면, 지금 당장 일상의 배치를 바꾸는 훈련에 돌입해야 한다."고. 그럼 그렇지! 젠장!

흥미로운 부분은 어떻게 공부해야 하냐는 대목이다. 사랑도 혁명도 혼자서는 못하는 법! 아니 그럼 공부는 혼자서해야 하잖은가? 기분 좋게도 공부는 여럿이서 하면 더 좋은 것이다. 세미나, 이것이 고미숙 선생이 제시하는 사랑을 공부하는 방법이고 전략이다. 일상의 배치를 바꾸는 것이 바로 그런 것이다. 일상의 배치를 바꾸고, 함께 공부하고 사랑할 수 있는 이들은 찾아 나서고, 대화하고 토론하며, 공부하면서 눈이 번쩍 띄이는 사랑의 짝을 스스로 주체적으로 만들고 찾으라는 것이다. 흠흠! 쉬운일이 아닐 터이다. 내일부터라도 찾아나서야겠다.

알라딘에 많은 분들 들으시면 좋겠다. 우리 사랑하십시다. 아니 혁명하십시다. 아니 공부하십시다. 아니 '세.미.나' 하십시다. 자 난 내일 혁명하러 갈 참이다. 세미나 하러 갈 계획이다. 그렇다고 이상하게 보지는 마시라. 그냥 전부터 하던 것이었으니까, 일상의 배치가 바뀐 것은 아니다. 암튼 이제 알았으니, 다르게 보일 수도 있긴 하겠지만. 아! 혁명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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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ch 2008-12-05 23: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멜기님. 리뷰 곳곳에 정말 멜마에스러운 모습이 엿보여요. 아무래도 '그' 세미나엔 충성스러운 혁명가인 여성분이 좀 포진해야할 듯 싶어요. 일상의 배치를 바꾸는 것까지는 좋은데 딱 거기까지인 것만 같아서 말이죠. 아, 제가 너무 멜기님의 성정체성을 확정시켰나요? 이 밤. 뭐 그정도는 봐주실거라고 생각해요. 혹 똥덩어리 막 이렇게 퍼부으시는거 아니죠? 그럼 안 들리는척 해야겠다.^^

순오기 2008-12-06 03: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부라보~ 멜기님의 리뷰는 바로 이 맛이야!
밑밑한 사랑이야, 밋밋한 사랑이야? 어떤게 맞나요~ ^^

순오기 2008-12-07 11:50   좋아요 0 | URL
연음법칙에 따르면 밑밑한 사랑이 맞는거 같은데~ 정말 모르겠어요.

멜기세덱 2008-12-07 13:17   좋아요 0 | URL
밋밋한이 맞아요...ㅎㅎ^^

2008-12-09 00: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심술 2008-12-07 22: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거야 원 나같이 귀찮고 애쓰는 거 싫어하는 사람은 머리아파서 사랑도 못 하겠네요.
 
[아버지의 편지] 서평단 설문 & 리뷰를 올려주세요
아버지의 편지
정민.박동욱 엮음 / 김영사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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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하면? 제일 안 좋은 추억으로 무조건 군대가 떠오른다. 훈련소에 입소해서부터 볼펜과 편지지를 던져주고는 다짜고짜 부모님에 편지를 쓰라는 황당무개한 강요를 시작으로, 자대배치를 받아서 정기적으로 편지쓰는 행사가 나를 참 막막하게 괴롭혔다. 대부분 첫 편지는 감회와 우수에 젖어 부모님께 눈물을 편지를 쓰기도 한다마는, 나는 이게 영 괴로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뭐 좋은 곳에 간 것도 아니고, 그렇게도 가기 싫었던 군대에 끌려가서 어리벙벙한 상태에서 부모님께 구구절절 받들어 올릴 어떤 말씀도 생각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쓰라고는 하니까, 나의 상투적 문장력을 발휘하여 한 장 씩은 꼬박 채워 보내곤 했다. 다른 선임병의 편지까지도 대필한 기억이 난다. 어찌나 상투적으로 잘 썼는지, 대필했던 선임병의 부모님께서 그 편지를 보시고는 처음으로 아들 생각에 눈물을 흘리셨다나, 그런 풍문도 전해진다. 우리 어머니도 그랬을 것이다. 아무튼 좋지 못한 추억이긴 하지만, 이때 사상 처음이자 마지막을 부모님께 편지를 쓸 수 있었던 유일한 기회였던 셈이다.

그러나 편지하면? 더욱 쓰라린 추억은 고등학교 2학년 때의 일이다. 교회 학생회 대표로 음악 경연대회에 출전해서 독창으로 입상한 적이 있었더랬다. 거기서 나를 알아보고(?) 친구의 친구에게서 편지가, 연서가 날아왔다.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여학생에서의 연서. 한 달 동안 답장을 쓸까 말까, 쓰면 어떻게 써야 할까? 우린 아직 서로 잘 모르지 않으냐, 아직은 공부에 전념하고 싶다, 에서부터 핑크빛 미래에 대한 상상까지, 오만가지 상상과 현실을 왔다갔다 하면서 답장을 썼다 지웠다, 다시 썼다 찢었다를 반복했다. 결국 한 달이 넘도록 답장 한 장을 못 썼더랬다. 그 여학생은 뭐하고 살까? 문득 궁금해진다. 내 답장을 심히 기다렸을 것인데! 쩝!

살면서 편지를 쓴 기억이 많지 않다. 이른 바 편지는 구시대적인 것이어서, 90년대에 들면서부터는 편지가 가지는 다양한 역할들이 다른 신시대적인 것으로 대체되었고, 이제는 아예 이 수고로운 글씨쓰기는 사라져 버린 듯 하다.

편지를 대체한 것은 흔히 이메일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내 경험에 비추어봐도 이메일은 그 대체물이 되지 못한다. 이전의 편지가 담았던 수만가지 중에 이메일은 단순히 스팸 비스무리한 것만 가져왔을 뿐이다. 오히려 이 편지를 거반 대체하고 있는 것은 핸드폰과 문자메시지가 아닐까 싶다. 가까운 이들과 끊임없이 주고 받는 문자메시지는 하루 한 통의 편지의 양과 비견될 정도로 많다. 그러나 이것도 우리의 편지를 완벽히 대체하지는 못한다.

고미숙 선생의 인터뷰를 어느 동영상을 통해 우연찮게 본 적이 있었다. 옛날 옛적(?) 연애편지 얘기였다. 사랑타령만 하면 제대로된 연애편지가 아니라나, 거기엔 자신의 비전과 능력 등이 총체적으로 담기도록 연애편지를 써야했고, 연애편지를 잘 쓰는 사람들이 말도 잘하고 공부도 잘했다는 그런 얘기였는데, 어쨌든 중요한 것은 편지가 담아내었던 것은 이런 종류, 그러니까 지적이면서도 논리적이고 이성적이며, 길기도 하고 깊기도 한, 하고 싶었으나 얼굴 대면하고 말하지 못했던 말들을 편지는 고스란히 담아내 주었다.

편지는 일종의 거리감을 형성하고 있다. 누군가를 대면하지 못하고, 떨어져 있을 때에 편지는 그 거리를 넘어 의사소통의 기능을 담당한 것이다. 그러나 이런 편지의 거리가 편지의 속성을 다양하게 만들어 주었던 듯 하다. 얼굴 대면하고는 말하지 못했던, 닭살스런 말에서부터, 뼈아픈 말 등등, 못했던 말들, 자세한 이야기들을 늘어놓을 수 있었던 것이다. 바로 옆 한 이불 속에서 살면서도 뭔가 진중히 할 이야기가 있으면 편지를 쓰기도 하잖은가? 아무튼 편지가 가지는 이런 종류의 장점들을, 이 편지가 잊혀져 가는 지금 그 대체물들이 이어받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안타깝게 느껴진다.

조선시대를 살았던 선비, 그들이 자기 자신들에게 여러차례 편지를 썼다. 그것들을 엮은 것이 『아버지의 편지』다. 정민 선생이 그간 꾸준히 해왔던 고전 산문의 대중화 작업의 최근작 중 하나다. 그간의 작업들에 매우 만족하고 있던 차에, 이번 책에서 느끼는 만족은 좀더 색다른 종류의 것이다. 편지에 대한 추억을 떠올리게 하기도 하고,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 그리고 날로 갹퍅해지는 세상 속에서 사라져가는 이런 편지에 대한 아쉬움, 그리고 보편적인 아버지들의 엄격함과 자상함에서부터 팔불출스러운 우스움까지, 다채로움 재미와 감동을 느끼게 되었다.

편지에 대한 나의 추억은 위에서 따분하게 읊었기에 각설하고, 이 책이 담고 있는 아버지들의 아들에 대한 사랑과 애정의 편지는 어려서 아버님을 여읜 나에겐 참 부럽고 안타깝게 하는 것들이다. 아들을 위해 하나부터 열까지 신경쓰고 조언하며, 정성스레 편지를 써내려간 조선시대의 아버지, 그런 아버지가 내게도 있었다면, 아마도 내 삶은 지금보다는 나아지지 않았을까?

그런데, 이런 의미에서 아버지의 상실은 비단 나뿐만은 아닌 것 같다. 현대 사회에서의 아버지는 아무래도 이 책에서의 아버지들의 역할을 전혀 하지 못하고 있다. 가부장적 의미에서가 아니라, 아들에게, 혹은 자식에게 선경험자로서의 조언과 스승으로서의 훈계 등의 역할을 오늘날의 아버지가 감당하고 있느냐 하면, 절대로 그렇지 못하기 때문이다. 오히려 지금의 아버지는 아들이 입시공부에 열중하기 위해 조용히 해야할 뿐, 그 어떤 도움도 줄 수 없는 존재일 뿐이고, 그 공부를 꾸준히 안정적으로 지속하게 만들어줄 돈 찍어내는 기계여야 할 뿐이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오늘날의 가족의 문제, 아버지의 문제를 고민하게 만든다. 오늘날 어떤 아버지가 자식에게 이런 편지를 쓸 수 있을까? 살기 위해 살아왔고, 자식들 키우기 위해 살아왔던 이 아버지들, 세상과의 경쟁에서 남과 싸워 이겨야할 강한 자식들로 키우기 위해 우리의 아버지들은 그저 기계적 역할만을 해올 뿐이었다. 이 책에서 보여주는 아버지의 역할과는 전혀 다른 종류의 아버지로 변질된 것이다.

이런 문제들은 비단 가족, 아버지의 문제만은 아니다. 사회 전반이 갹퍅해 지는 현실에서 느긋한 편지는 아무 도움이 안 된다. 돈을 잘 벌기 위해서 이러이러해라, 1등하려면 어떻게 해야 한다, 절대로 남에게 지지 않기 위해 공부해라 등등, 이딴 소리 적어보내려고 편지를 쓴다면 미친짓이 아닐까? 여하튼 오늘날의 사회에서 편지는 괴상한 것이 되어 버렸다.

수도 없이 날아다니는 그 문자메시지 속에는 다만 공허하고 일회적인 것 뿐이다. 아들에 대한, 연인에 대한, 부모님에 대한, 친구에 대한, 그리고 나 자신에 대한, 깊고 넓은 이야기들이 사라져버리고, 일회적이고 상투적인 것들만 남아 있다.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짧막한 대화들만이 남아있을 뿐이다. 이쯤해서는 예전의 우정국이 사라지고 우체국이 된 것이 이해되기도 하겠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내내 이를 본받아 우리도 다시 이 편지를 써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예전에 좋아하는 후배와 크리스마스 겸 연말연시에 카드보내기를 해보자고 몇 차례 보낸적이 있었더랬다. 그것도 잊혀져가는 아름다운 것 중에 하나가 아닐까 싶다. 생일을 맞아서 얼마전에 후배놈들에게 생일 축하 메시지를 손수 적은 카드도 받아보았다. 이런 것들이 사라지는 요즘, 괜히 막막하고 따분하고 냉냉한 세상이라고 느끼는 것은 비단 나만이 아니지 않을까? 모든 잊혀져 가는 것들을 되살릴 필요도 능력도 없겠지만, 이런 편지쓰기 만큼만은 되살리는 것이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쓰다보니 책 얘기를 많이 못했다. 내가 이 책에서 또한 주목한 것은 이래저래 웃긴 대목들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아버지들은 다를 바가 없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됐다. 아버지들의 엄중함과 자야로움, 그리고 귀엽기까지한 모습들이 마구마구 떠올랐다. 몇 대목만 정리해 보자.

"동접 중에 불행히 놀이로 사람을 꾀어 그르쳐서 무리를 어그러뜨리는 자가 있더라도, 절대 그들 무리에 빠져서 휩쓸려 한통속이 되어서는 안 된다."(31쪽)

이황이 아들 준에게 보낸 답장의 한 대목이다. 나쁜 친구들하고 어울리지 말라는 내용이다. 예나 지금이나 다를바 없구나 하기도 하면서, 요즘 유난히 설레발치고 다니는 엄마들의 모습까지는 아닌 듯 싶어진다. 친구 아빠의 직장에서부터, 그 집 살림살이까지 다 따져서 놀애 안 놀애 정해지는 요즘의 것과는 아무래도 다른 종류의 친구사귐에 대한 조언일 것이다.

"조정의 잘잘못은 비록 말할 만한 것이 있더라도 진실로 마땅히 깊이 생각해서 매번 어쩔 수 없는 뒤에라야 말하도록 해라. … 어찌 입에서 나가기만 하면 문득 많은 세상일에 얽혀들면서도 아는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핑계대는 게냐?"(149쪽)

박세당의 편지다. 아들이 앞뒤 안 재고 떠들고 다며 별별 문제들을 많이 일으켰나 보다. 그래서 일언지하에 말조심하고 훈계다. 이 말조심을 요즘의 위정자들에게 해주고 싶다는 생각은 나 뿐일까?

 "몹시 기다리던 차에 일을 맡긴 하인이 왔다. 편지 보고서 새아기가 무사히 해산한 것을 알았다. 또 사내아이를 낳았다니 기쁘고 다행스럽다. 나는 이미 늙었는데 네 형들이 잇달아 요절하는 화를 당하고 보니, 자손이 고단한 것을 늘 상심하고 아파했었다. 이제 이 아이를 얻었으니 만금을 얻은 것만 같구나. 새로 낳은 아이 이름은 '다손(多孫)'이라 하는 것이 좋겠다."(157쪽)

박세당의 또다른 편지다. 할아버지가 된 기쁨이 가득 담겼다. 그도 그럴 것이 아들들이 그토록 말조심 하라고 했는데, 그러지 못해서 세상을 먼저 떴다. 그런 안타까움에서 일까? 귀하게 얻은 손자의 이름을 다손이라고 지어준다.

"조밥과 찬 짠지를 먹지만 평소처럼 편안하니, 너희는 절대로 내 걱정은 하지 마라."(233쪽)

"뱃속에 횟병 증세가 몹시 고약하여 통증을 없애고 싶구나. 예전에 기록을 보니 후추를 꿀에 버무려 알약을 만들 수 있다고 하더구나. 대두도 수십 알쯤 가져왔으면 좋겠다. 내 건강은 신경 쓸 것 없다."(238쪽)

박제가의 편지다. 이 대목들을 읽다가 박장대소했다. 무득 얼마전의 CF가 떠올랐다. "아들아~"로 시작해서, "아무것도 필요없다"하는 어떤 노부부가 나와서 웃음을 주었던 모 기업의 CF 말이다. 그 CF 시리즈를 보는 듯하다. 말하자면 "아들아~" CF의 조선시대 버전인 셈이다. 조밥과찬 짠지를 먹지만 괜찮다, 걱정마라, 하면 아들이 괜찮구나 걱정 안 해도 되겠구나 하겠는가? 애처롭기도 하고 재밌기도 한 대목이다.

무엇보다 압권은 박지원의 늙으막 시절의 편지다. 요즘 유행하는 말처럼 해보면, 박지원은 애교덩어리, 귀여움 덩어리가 아닐까 싶다.

"재선(在先) 박제가의 집에 있는, 우리나라로 건너온 중국 사람의 시필(詩筆) 몇 첩을 빌려 볼 수만 있다면 마땅히 요 며칠 사이의 답답증을 누그러뜨릴 수 있을 것 같구나. 하지만 그 인간이 꼴 같지 않고 무도하니, 어찌 지극한 보물을 잠시인들 손에서 내놓겠느냐? 그렇다 하더라도 모름지기 이를 빌려 오도록 해라."(196~7쪽)

꼴 같지 않고 무도한 인간이 박제가? 절친했던 박제가가 아니던가? 그런데 그렇다면서도 아들에게 그래도 빌려 오도록 하라는 건 또 뭔지! 게다가 호랑이 같이 생긴 박지원이 "고추장을 작은 단지로 하나 보낸다. 사랑에 놓아두고 밥 먹을 때마다 먹으면 좋겠다. 이것은 내가 손수 담근 것인데, 아직 잘 익지는 않았다."고 한 대목에서는 도무지 이 사람을 감잡을 수 없을 지경에 이른다.

박지원도 할아버지가 됐다. 할아버지가 됐다는 소식에 기뻐서 "응애응애 하는 소리가 종이 위에 가득하"여 일도 제대로 못하고 있잖은가? 손자의 삼칠일을 맞아서 "2백여 명의 관속들에게 아침에 국과 밥을 먹였더니 좋아하며 떠들썩하게 축하해주"더란다. 게다가 "나도 경술년에 순조 임금께서 막 태어나셨을 때 산해진미로 기쁨에 넘쳐 즐거워하면서 억조창생을 고무케 하시던 성심(聖心)을 가늠하겠더니라"며 그 기쁨을 감추지 못한다.

이런 손자가 얼마나 보고 싶었을까? 아이처럼 투정을 부린다. "이마는 넓고 솟았으며 정수리는 평평하고 둥근지, 어째서 하나하나 적어 보이지 않는 게냐? 답답하구나." 얼마나 보고 싶었으면 그럴까 이해도 하지만, 다음 대목에서는 웃음을 참을 수 없다.

"전후해서 보낸 소고기볶음은 잘 받아서 아침저녁 찬거리로 했느냐? 어째서 한 번도 좋다는 뜻을 보여주지 않느냐? 답답하고 답답하구나. 나는 육포나 장조림 등의 반찬보다 나을 거라고 생각한다. 고추장도 내가 손수 만든 것이니, 맛이 어떤지 자세히 알려다오."(207쪽)

박지원에게는 요즘 나오는 휴대폰을 하나 사줘야 할 성 싶다. 요즘 애들처럼 수시로 문자를 날리면서 왜 내 문자 씹냐고 한바탕 야단을 칠 것만 같다. 박지원이 손수 요리를 해서 자식들을 챙기는 모습도 이채롭지만, 보낸 음식을 잘 먹었는지, 맛은 어땠는지를 알려주지 않는다고 투정부리는 모습은 아이같기만 해서 참 즐겁다.

한 가지 발견한 사실은 박지원은 요즘의 이모티콘의 원조격이란 사실이다. 번역문에서 "껄껄"로 표현했고, 원문은 "好笑好笑"로 되어 있다. 요즘으로 치면 "ㅎㅎ" 나 "ㅋㅋ"인 셈이다. 아무래도 이 사람, 핸드폰 세대하고 제대로 통하지 싶다.

이 외에도 많은 대목들에서 재미와 감동을 함께 느낀다. 공부 방법이나 훈계 등이 대다수를 차지하지만, 곳곳에 감춰진 이런 감성어린 아버지의 모습들이 아름답다. 따분할 것만 같았던 조선시대 아버지들의 편지가, 이렇게 즐겁고 기쁜 감동을 줄 수 있다니? 놀랍기만 하다. 많은 것을 보고 느꼈다. 이제부터 우리도 이를 본받아서 아버지에게, 혹은 아들에게, 때론 부인에게, 형제자매에게, 그도 아니면, 아무에게나, 편지를 써보자. 삶과 사회가 한층 밝아지지 않을까? 밑져야 본전이나 손해 볼 것은 없잖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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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오기 2008-11-30 01: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은 안 봐서 모르지만 오랜만에 멜기님의 리뷰 재밌게 봤어요~ ^^
박지원 그양반 참 솔직한 사람이네요~ ㅋㅋ

파란여우 2008-12-01 15: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내 이래서 서평을 나중에 쓰면 꼭 손해보는 듯한 느낌이 든단 말에요.
근데 멜님!(이렇게 부르니까 어째 멜랑꼬리한 ㅎㅎ) 제 글에 다음블로거 추천 했어요?
최신 추천자가 멜기세덱이므로 심증이 강하게 파도처럼 밀려오네요.
 
[독서] 서평단 알림
독서 - 김열규 교수의 열정적 책 읽기
김열규 지음 / 비아북 / 200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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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야흐로 나의 계절이다. 가로수 줄지어 늘어 선 길, 떨어지는 낙엽을 아삭아삭 밟으며, 깃세운 바바리코트 처량히 날리며, 걸어가는 처진 어깨의 뒷모습의 나를 생각했다면, 오산이다. 하늘은 높고, 말은 살찌는데, 나는 말라만 간다. 가을 하늘은 맑고 푸르러 높게 보이고, 온갖 곡식이 차고 넘쳐, 말에게까지도 먹일 양식이 많이도 돌아가니 말은 살찐다. 그리하야 이 가을은 天高馬肥요 秋高馬肥다.

그래서일까? 하늘은 높푸르고 모든 것들은 살찌는데, 왜 남자들은 외롭고 쓸쓸할까? 가을이 남자의 계절이라고 하는 것은 알 수 없는 일이다. 바바리코트나 팔아먹자는 상술만도 아닐 것이기 때문에. 하여간 내가 높고 외롭고 쓸쓸한 남자여서, 바야흐로 나의 계절이냐? 아니다. 가을은 독서의 계절이라고 하잖은가? 세상은 풍요롭고 하늘은 맑고 높아, 잔잔히 부는 바람이 살포시 책장을 넘겨주어 책읽기 좋다는 것일까? 그럴듯 하지만은, 이도 난 잘 모를 일이라고 생각한다. 책을 무슨 가을에만 읽자는 것은 아니잖은가? 하도 책을 안 읽는 현실속에서 태어난 고육지책만도 아닐 것이고. 여하튼 가을은 책읽기에는 좋은 계절임이 분명하고, 그래서 난 이 계절에 안성맞춤한 인간이길 바라고, 그래서 나의 계절이(었으면 한)다.

엊그제 촉촉히 가을비가 내렸다. 날은 하루가 다르게 싸늘해져만 간다. 가을은 선선해야 가을이다. 싸늘한 가을은 벤치에 앉아 책을 읽는 나를 상상하지 못하니 말이다. 벤치에 앉아서(혹은 누워서) 한가로이 시집을 펼쳐들고, 세월아 네월아, 아 가을은 외롭운 심사, 한 줄 시 속엔 이내맘을 담아 읊으면, 그 어찌 풍경 좋은 멋진 그림이 아니겠는가?

허송세월 보내는 것도 모자라 쓰는 것에도 죄다 허송한 떠벌림 뿐이니 참 한스러워 보이기도 한다. 변경하자면, 가을이고, 외롭기도 하고, 바쁜 일상들, 초조한 마음들 모이다 보니, 한가로이 책읽이나 편히 읽어봤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기에 구절구절 허한 마음 담아 늘어놓은 것이려니 해주기 바란다.

내가 책을 어줍잖게 심하게 읽기 시작한 것은 10년이 되지 못한다. 그도 하 긴 세월이라, 이제는 거반 활자중독에 가깝다고들 한다. 그래서 내 눈은 피곤하다. 버스 안에서도, 화장실에서도, 길을 걸으면서도, 내 눈은 한가롭지 못하다. 길을 걸으면서, 특히 출근하는 10분 남짓의 거리에서도 나는 책을 펼쳐들고 걷는다. 초기에는 이런저런 돌출물에 부딪혀 무릎팍도 솔찬히 깨졌다. 애꿎은 사람들에게도 충돌하고. 그런데 이제는 그런 일들이 거의 없다. 잘도 피해다닌다. 낯선 곳에서는 여전히 힘들지만.

책읽기에 푹 빠져지내는 축에서 나도 한가락 한다고 생각해 왔는데, 이 분한테는 명함도 못 내밀 것 같다. 어줍잖게 책읽기는 어쩌고 저쩌고 떠들 수가 없다. 올해로 77세가 되는 이 분은 최근 『독서』라는 책을 펴내 나같은 풋내기들에게 한 수 가르침을 주신다.

   
  읽는 것, 그 자체에 홀려 있었던 것이다. 철들기 전 내가 제대로 사랑한 첫 대상은 읽기인지도 모른다. 읽기는 나의 첫사랑이었던 것이다. 읽기는 재미있고 신나고 신기했다. 매력덩어리였고 사랑스럽기 짝이 없었다.  
   

어려서부터 책읽기를 좋아해서, 심지어는 책읽기가 첫사랑이라고 고백하는 77살의 이 노교수는 이 책에서 자신의 독서인생의 자서전을 써나간다. 위의 인용문에 쓰인 과거시제는 모두 수정되어야 할 것이다. 아직 이 분은 살아계시니까 말이다.

   
  모르는 것, 그게 바로 인생일지도 모른다. 삶은 그런 것이다. 그러기에 삶은 앎이 되려고 무진, 무진 애를 쓴다. 삶이란 모르는 걸 하나 하나 알아가는 과정이다. 삶은 앎을 향한 행보(行步)이다. 아니, 아예 삶을 앎이라고 해두는 게 좋을 것 같다.
(…)
내게 앎 없이 삶은 없다. 앎이 삶이고 삶이 곧 앎이다. 그러니 내게 읽기 없는 삶 또한 있을 수 없다. 그건 당연한 일이다. 읽음이 앎이다. 앎은 삶이다. 그렇다면 읽기가 삶이고 삶이 읽기이다. 이건 자명한 일이다.
 
   

김열규 교수의 인생론이라고 해야 할까? 아님 독서론이라고 해야 할까? 삶은 앎(알아가는 과정)이고, 앎은 곧 읽기다. 그래서 그의 삶은 읽기다. 이건 "자명한 일"이다. 그렇게 자명한 일이기에 그는 이 책에서 자신의 살아온 여정을 풀어냈는데, 그게 죄다 책읽기 얘기다. 읽기로 시작해서 읽기로 끝나고 있다.(아직 끝난 건 아니지만) 오죽했으면 "책님들이시여! 고맙습니다!"며 큰절을 해댈까.

김열규 교수는 대중적으로 그리 잘 알려진 인물은 아닌 듯 하다. 그도 그럴 것이 알려지기 쉽지 않은 국문학이 전공이고, 그 중에서도 여러모로 소외된 구비문학과 민속학 쪽으로 연구를 많이 했으니 말이다. 그가 펴낸 책들도 부지기수다. 대부분의 것이 "한국인의 삶과 죽음에 대한 원형과 궤적을 찾아다"닌 결과물들이란다. 내가 그를 처음 읽은 것은 그의 탁월한 저서 『욕, 그 카타르시스의 미학』이란 책 달랑 한 권이다. 예전에 이 책을 우연찮게 발견하고 집어들어 읽었는데, 참 흥미로운 대목들이 많아서, 저자였던 '김열규' 이름 석자를 머리속에 각인 시켜 놓았더랬다.

그를 다시 만난 것이 이 책이다. 그의 이 독서인생 자서전을 읽으면서 할 수 있는 유일한 말은 "경이롭다"는 단 한마디여야 할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저렇게 70평생을 책에 푹빠져 지낼 수 있을까 생각하면 다른 말이 나올 수 없기 때문이다.

"읽는다는 것은 '아는 것'도 '아는 짓'도 아니었다. 그건 '되는 것'이었다. 내가 나 아닌 다른 뭔가가 되는 것. 그렇게 나만의 세상이 만들어지는 걸 실감하곤 했다."는 그는 어쩌면 그 자체가 곧 수십권의 책이 되버린 것인지도 모르겠다

   
  결국 읽기는 황금 캐듯이 해야 한다. 흙더미와 돌더미를 헤치고 광맥을 헤집고는 가까스로, 그리고 신통하게 금덩이를 캐내듯이 책도, 글도 읽을 수 있어야 한다. 읽는 일은 그래서 발굴하기와도 같은 것이다. 글줄은 그리고 문맥은 광맥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만은 아니다. 모래바닥 위를 흐르는 개울에서 사금을 훑어내듯이 책이며 글을 읽을 수도 있어야 한다. 그게 글을 읽는 최종 목적이고 수확이다. 최종 결승점이다. 마지막 유종의 미이다.
 
   

그는 얼마나 많은 황금을 가지고 있을까? 77년 평생을 캐었으니 그의 머리와 온몸과 맘은 황금으로 가득 채워져있지 않을까? 그의 이 책을 읽으면서 반짝였던 그 황홀한 금빛은 그래서일지 모르겠다.

이 책은 그가 평생을 함께 해온 책이야기, 읽기 이야기다. 스스로 써내려간 자신의 독서자서전 말이다. 그리고 그의 인생자서전이다. 그가 아이였던 시절부터, 노년의 지금에 이르기까지 읽기가 첫사랑이었다는 고백에서부터 책님에게 감사하기까지, 얽히고 설킨 독서의 여정들이 낯낯이 빛나고 있다. 재미있는 에피소드도 많아 웃음까지 준다. 책을 빌려보던 어린 날의 추억이었겠지만, 애틋한 연애의 감정도 살포시 피어난다.

책과 책읽기에 대한 그의 애정과 성찰은 남다르다. 누워서 읽는 것에도 어엿한 이름이 붙어있을 줄이야. 그는 누워 읽는 것을 2가지로 구분한다. 첫째는 "엎드려서 책을 읽는 '와독(臥讀)'"이다. 흔히 臥를 누을 와로 알지만, 이 한자는 신하가 황제에게 예를 올릴 때의 모습을 뜻한다. 간혹 사극에서 보듯이 황제 앞에서 어지간한 신하들은 반듯하게 엎드린다. 그래서 이 臥는 엎드릴 와가 된다. 배를 깔고 엎드려 책을 읽은 것이 와독이다. 두번째는 "반듯하게 누워서 책을 읽는 '앙독(仰讀)'"이다. 우러를 앙(仰)자를 썼다. '앙독'. 참 멋진 말 아닌가? 개인적으로 앙독은 좀 불편해서 거의 쓰지 않는다. 이제부턴 책을 우러러 보기도 해야겠다.

   
 

그러니 초등·중등·고등학교에 걸쳐서 국어 교과서며 문학 교과서에 웃음 읽기를 위한 내용이 드물거나, 심지어 없다시피 하다는 것은 인류에 대한 역적질과 다름없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인과 한국문화가 웃음 읽기에 인색한 것은 여간 불행한 일이 아니다. 그러니 우리는 김선달과 정수동을 아주 특출하고 영특한 한국인으로 존경해야 한다. 그들은 위인 명단에 올려야 한다. 벼슬이나 해먹은 자들의 이름만 높다랗게 내걸면 햇빛을 가려서 국민 건강에도 해롭다.

서가에 꽂힌 책, 책상에 높인 책, 끼니때 밥상 옆에 놓인 책, 어린 시절 가슴에 묻은 책, 방바닥에 흩어진 책……. 책도 차지한 자리에 따라서 신분도, 계급도 달라진다.

 
   

그의 책과 책읽기에 대한 명석하고 빛나는 통찰은 이 책의 처음부터 끝까지 곳곳에서 드러난다. 그러나 그것만이 아니다. 그는 책만 읽는 것이 아니다. 세상을 읽고 자연을 읽고 모든 것을 읽고자 한다. "머리 위에 설레고 있는 나뭇잎들은 나더라 자기들이 지표에 던지고 있는 그림자의 무늬를 읽으라고 속삭인다." 그래서 그는 그 나뭇잎이 보내는 글자들을 읽는다. 나뭇잎의 "저 잔주름을 신성문자처럼" 어김없이 읽어내는 것이다. 나도 그에게 신성문자처럼 읽혀질 수 있을까 꿈꿔본다.

이젠 좀 읽기를 고만하시라고 조언하고 싶기도 하다. 그런데도 여전히 시력은 좋으시단다. 그러나 세월은 막을 수가 없는 것. 여전히 책읽기를 탐하는 그에게 돋보기는 필수품이다. 여전히 책읽기에 빠져 살고 있을 것이다. 밥을 먹으면서, 산책을 하면서, 한가로이 누어서, 시시때때로. 그런 그에게 아쉬움은 "미처 못 읽은 책들에 대한 사무치는 그리움 때문"일 수 밖에.

   
  그런데 지금 내게는 '또 다른 나'가 되고 더불어서 우리가 될 친구가 없다. 몇몇은 이미 세상을 떠났다. 귀하게 남은 몇은 모두 멀리, 멀리 있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내게는 '또 다른 나'이자 '우리'가 자그마치 둘이나 남겨져 있다. 바로 자연과 책이다. 그 둘은 이제 나의 천복이다. 그중에도 책 읽기라는 천복에 다다르기까지의, 온갖 내 삶의 자국이 이 책에 찍혀 있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다.  
   

나의 천복은 김열규 교수의 그것에 하나를 더 보태야 할 것 같다. 김열규 교수가 가르쳐주는 독서론, 곧 인생론을 읽게 된 것이 나도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다." 이 책을 덮으면서 앞으로는 길을 걸으면서는 책읽기를 자제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제는 가로수의 낙엽을 상형문자처럼 읽어야하니 말이다. 책만 읽는 것이 아니라 자연도 읽어야겠다. 이 또한 나의 천복이니, 나는 김열규 교수보다는 더더욱 다행인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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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오기 2008-10-25 06: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멜기님은 썼다 하면 장문에 탁월한 리뷰를 쓰십니다~ ^^
교과서에서 웃음을 뺀 죄에 공감하며 저자와 님의 천복에도 동참하고 싶네요.
이 가을엔 책과 더불어 낙엽의 신성문자를 읽으러 나들이도 자주 해야겠습니다.^^
그리고 6행시 짓기에 장문의 심사평을 올려주셔서 품격있는 이벤트가 되었어요. 자칭 심사위원장님 고맙습니다~ 사례는 인천가서 할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