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은 위대하지 않다 (양장)
크리스토퍼 히친스 지음, 김승욱 옮김 / 알마 / 2008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만약 하느님이 모든 것을 창조하셨다면, 왜 우리는 하느님의 자연스러운 능력을 이렇게 끊임없이 '찬양'해야 하는가? 다른 건 몰라도 이건 정말 노예처럼 비굴한 행동 같았다. 만약 예수가 우연히 만난 맹인을 치료해줄 수 있다면, 아예 시력을 잃는 사람이 없게 만들 수는 없는 건가? 예수가 악마를 쫓아낸 것이 뭐 그리 대단한가? 악마가 사람 대신 돼지 몸속으로 들어가게 했을 뿐인데. 이건 좀 사악한 짓 같았다. 흑마법처럼. 사람들이 이렇게 끊임없이 기도를 드리고 있는데 왜 아무런 효과가 없는가? 왜 내가 다른 사람들 앞에서 한심한 죄인이라고 계속 말해야 하나? 섹스에 관한 이야기를 그토록 유해하게 생각하는 이유가 무엇인가?(14~15쪽)  
   

히친스가 "어렸을 때 머뭇거리며 제기했던 이 의문들"과 비슷한 것들이 내게도 있었다. '내게도 있다'고 말하는 것이 더 정확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문제는 히친스에게나 혹은 "세상에 지극히 흔하게 퍼져 있"는 이런 의문들을 품은 이들에게 "어떤 종교도 여기에 만족스러운 대답을 내놓"고 있지 못한다는 데에 있다. 사실 나는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의 그 모든 능력이 사실 그대로라면 히친스와는 달리 "끊임없이 찬양"할 마음이 충분하다. 그러나 창세기 1장 1절의 그 구절,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했다는 그 말부터 나는 믿을 수가 없었다. 전지전능한 하나님, 지고지선의 하나님이 사탄도 만들고 그와 함께 '재미난' 내기도 한다는 그 이야기를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최초의 인간 아담과 하와는 가인과 아벨, 그리고 또 누가 있었던가? 그렇다면 인류가 이만큼 번성한 것은 가인이 자웅동체였거나 아담과 하와의 숨겨둔 딸과 근친상간을 했거나 둘 중 하나일 것이 분명하지 않은가? 이외에도 나는 히친스만큼, 아니 그 이상의 의문들로 가득했다.

'사랑의 하나님'이 그렇게도 많은 인간들을 끊임없이 죽이고, 벌하고, 씨를 말렸다는 것을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 하나님이 선악 관념이 분명해서 그렇다지만, 우리에게 말하는 사랑은 아가페가 아닌가? 아가페적 사랑은 예수의 새로운 창조물인가? 예수 이전의 하나님은 그런 사랑을 할 줄 몰랐나? 그건 이상한 하나님이다. 때론 TV드라마 속의 연인들처럼 사랑에 배신당하고 처절한 복수를 하는 것을 볼 때, 하나님을 배신한 인간들이 참혹하게 죽어갔던 이야기를 떠올리면서, '질투하는 하나님'은 어딘가 모자란 신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주말 연속극에 '하나님'이 언제쯤 나올지 궁금해 하면서.

세상에 존재한다고 알려진 신들 중에 가장 많은 인간들을 죽인 신은 단연 기독교의 하나님일 거라는 말을 하면 불경한 것인지 모르겠다. 그러나 성경을 보면 그것이 성스러운 경전이라고 할 수 없을 만큼,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죽어간 인간들이 무수하게 나온다. 그래서일까? 나는 이 성경(특히 구약)을 읽으면서 종종『삼국지』를 떠올린다. 어디에서 더 많은 인간들이 죽었을까를 헤아려보는 것은 짓궂은 일인지도 모르겠다. 솔직히 말해서 나는 구약을 읽으면서는 『삼국지』만큼의 드라마틱하고 스펙터클한 재미를 느낀다. 아니 그 이상으로. 간혹 어떤 구절들에서 성스러운 가르침을 얻기도 하지만 말이다.

   
  여기서 우리는 <창세기>를 가득 채운 인간들의 거대한 오류를 다시 볼 수 있다. <창세기>를 쓴 것이 신이 아니라 무지한 인간이라는 사실을 어떻게 한 문단으로 증명할 수 있을까? 인간이 모든 짐승과 새와 물고기를 '지배할 권리'를 얻었다는 점이 바로 그 중거이다. 성경에 예를 들어 공룡들의 이름이 구체적으로 명시되지 않은 것은, 저자들이 공룡의 존재를 몰랐기 때문이다. 성경에 유대류가 언급되지 않은 것도 오스트레일리아(중앙아메리카의 뒤를 이어 '에덴동산'의 새로운 후보자)가 지도상에 나와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창세기>에서 인간이 세균과 박테리아를 지배할 권리를 얻지 못했다는 점이다. 저자들이 꼭 필요하지만 위험하기도 한 이 생물들의 존재를 몰랐으니까. 만약 이 생물들의 존재가 알려졌다면, 그들이 우리를 '지배'한다는 사실이 금방 분명해졌을 것이며, 사제들이 옆으로 밀려나고 의학 연구가 마침내 기회를 얻을 때까지 누구의 도전도 받지 않은 채 그 지배권을 마음껏 즐겼을 것이다.(137~38쪽)  
   

히친스의 재치있는 이런 반증말고도, 나는 성경(특히 구약)이『삼국지』보다 더 재밌을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어느 정도 이상의 인간의 가필이 성서에 있을 거라고 믿는다. 하여간에 나는 어떻게든 노력했지만, 성경의 모든 것을, 어쩌면 기독교 성립의 전제를 믿지 않으면서, 기독교를 믿었다. 그래서 아직까지 날나리 신자에 그치는 것인가 보다.

그러나 구약을 넘어서 신약에 이르러 예수 탄생 이후의 시나리오는 거반 마음에 들었다. 동정녀의 몸에서 예수가 탄생했다는 설화는 그 수준에서 '아름다운' 이야기로 받아들인다. 물을 포도주로 변하게 했다는 기적은 또 얼마나 유쾌한 일인가? 신약 속에 가득한 예수란 인물의 이야기들은 많은 부분 감동으로 넘친다. 그리고 그가 한 말들은 그다지 걸러낼 것들이 많지 않은 좋은 얘기들로 가득하지 않은가? 나는 그래서 예수가 좋았고, 여전히 기독교 신자를 자처하고 있는 것이다. 십자가에 달려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죽음을 당한 예수란 인물, 아니 신성을 가진 예수를 그대로 믿는 것은 어느 누구에게나 선택의 문제일지 모르지만, 그의 설법들은 오늘날에도 가히 혁명적인 말들로 가득하다. 나는 어쩌면 그 혁명가적 예수를 꿈꾸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나는 지금 이 기독교가, 그리고 세상의 종교가 욕먹는 이유는, 적어도 히친스가 유쾌하게 씹어대는 세상 종교의 죄악들은 성경속의 하나님도 예수도, 그리고 알라신도 아무런 책임을 질 이유가 없다고 생각한다. 그것을 인간이 썼건 신의 영감으로 지어졌건 간에, 그것을 '어리석게'도, 아니면 교묘하게도 제멋대로 이용한 것은 인간들이기 때문이다.

도킨스와 마찬가지로 히친스는 이 책에서 신은 단지 인간의 '형상'대로 인간적 감성으로, 인간의 필요성에 의해서 창조된 것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그런 히친스에 대해 그게 아니고, 성경에 이렇게 저렇게 써 있으니, 이것은 거룩하시고 전지하시며 전능하신 하나님이 쓰셨다고 반박하는 것은 현재로선 어리석어 보인다. 그러나 그것이 누구에 의해 창조되었건 간에, 우리는 그에 구애받을 이유가 하등 없는 것도 사실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흔히 기억하는 신화나 전설이 구태에 그 창작자가 누구인가를 두고 갑론을박하지 않듯이, 성경 또한 그러한 수준에서 생각할 수 있기에 충분하다.

문제는, 그것을 어떻게 이용하고 활용하는가이다. 그러니까 성경무오류설에 입각하여 사탄, 마귀새끼를 철저히 응징하고 뿌리뽑겠다는 십자군적 망상에 사로잡힌 종교 근본주의가 문제인 것이다. 종교를 어떻게 활용하느냐가 중요하지 그것이 진짜냐 가짜냐를 논하는 것은 쓸데없는 또다른 근본주의가 아닌지도 모르겠다. 오늘도 어디쯤에서 밥퍼주는 목사님이나,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라던 성철 스님은 걸리적 거릴 것이 거의 없지 않은가?

   
  이슬람의 기원은 이슬람이 표절한 다른 종교들과 마찬가지로 수상쩍다. 이슬람은 스스로를 엄청나게 부풀리며, 추종자들에게 납작 엎드리는 복종이나 '굴복'을 요구하고, 신도가 아닌 사람들에게는 존중을 요구한다. 이슬람의 가르침에는 이처럼 오만하고 뻔뻔스러운 행동을 정당화해주는 것이 전혀, 눈곱만큼도 없다.(195쪽)  
   

히친스의 이 말처럼, 성경을 들먹이고 코란을 들먹이며 종교를 지배수단으로 제멋대로 이용하고 사리사욕을 채우며, 인간을 무참히 짓밟으려고 하는 것이 결국 문제인 것이다. "역사적으로 종교는 지상의 독재체제와 내세의 절대적인 통제에 무릎을 꿇었을 뿐만 아니라 그런 사상을 널리 퍼뜨렸다." 그렇게 지배체제에 종속되고 인간을 억압하고 강제하는 것으로 쓰인 종교는 원초적으로 사라져야 할 것이다. 이 외에도 히친스가 말하는 종교의 악행 혹은 잘못된 쓰임은 수두룩하게 많다. '좋게 말해서' 종교가 인간에게 위안을 주고 안식처를 마련해 준다는 것을 십분 인정한다 하더라도, 종교란 이름으로 수많은 생명들을 죽이고, 잘못된 편견과 혐오를 조장하며, 심지어 "종교가 건강에 해로울 수"도 있다고 말한다. 또한 종교는 내세에 대한 허황된 기대와 염려를 팔아서 장사를 하고, 파렴치하고 반인류적인 지배체제와 타협하고 복종해 왔다. 히틀러의 친구는 저 로마 카톨릭의 교황이었다. 그 뿐인가? 종교를 아동 학대를 서슴지 않았다. 구약에도 아비의 헛된 약속으로 딸은 번제가 되었고, 이삭은 죽다가 살아났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인 인간들이 제멋대로 신을 악용한 것의 결과일 따름이다. 그들은 신성한 성경이니, 코란이니 하는 것들을 들이대지만, 그것이 있는 그대로 사실이고 절대적이라고 신도들에게 강요하지만, 그들 중 누구도 바다는 커녕, 집 앞에 흐르는 졸졸 시냇물 한 번 갈라보지 못했을 뿐더러, 어떤 불구덩이에도 들어가 본 적이 없지 않은가? 우리는 주몽이 위기에 처해 도망가다가, 강물에 막혀 더는 도망가지 못하고 있을 때 거북이 들이 나와서 다리를 마련해 주었다는 신화를 기억하고, 견우와 직녀를 만나게 해준 까치와 까마귀를 기억한다. 그러나 어디까지 그럴 듯한 이야기로 여길 뿐이다. 그렇다. 우리도 성경을 그렇게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지 않을까? 성경을 사실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은 만약 신이 있다면, 신이 하늘에서 웃을 일이다. 아니면, 나는 억울하다고 하소연할 일이거나.

내가 볼 때, 하나님은 억울하다. 예수님도 억울한 측면이 있다. 알라신도 그렇고, 부처도 어차피 피해神이다. 세상 모든 신(神)들이 히친스에 의해 이 무한한 죄의 굴레를 띄집어 쓰게 만든 것은 단지 인간일 뿐이다. 신이 있든 없든 그것은 아무 상관이 없다. 또한 인간이 신을 있다고 믿든, 없다고 치부하든 마찬가지다. 몹쓸 인간들이 있을지도 모르고 없을지도 모를 신을 몹쓰게 이용하고 애용한 것이 죄다. 그리하여 신(神)은 무죄하다. 나는 그 무죄한 신을 선별적으로 믿는다. 아니 믿고 싶다. 예수의 사랑을, 하나님의 그 어리석음까지도.

이 책을 읽으면서 내내 도올 김용옥이 떠올랐다. 그 특유의 삡싸리 나는 굉음이 섞인 '이~게, 이게'하면서 내뱉은 우습기까지한 신랄한 욕설과 독설이. 히친스의 이 시니컬한 종교비판은 도친스를 읽을 때 느꼈던 것과 비슷했다. 다만 도킨스를 읽으면서 느꼈다 묵중함 보다는 히친스를 읽으면서 보다 유머러스하게 시니컬한, 그래서 도킨스의 것보다 더 재밌게 읽혔다. 아무튼 이 책은 히친스의 역작이고, 대체로 수긍할 수 밖에 없는 종교인으로서는 뼈저린, 그러면서도 굉장히 기분 나쁜 책임에 분명하다. 이 책을 읽는 내내 히친스가 김용옥의 얼굴을 하고 그 기분나쁜 얼굴로 독설을 퍼붓는 듯 했다. 그러나 나는 너무나 흥미롭게 이 책을 읽었다. 미안한 말일지도 모르지만, 재밌게 말이다. 히친스가 말한 대부분을 수긍하면서, 내 연약한 마음은 인간을 미워하되 신은 미워하지 말기를 당부한다. 신은 무죄하다. "우리가 담론에서 종교적인 색채를 모조리 없애버린다는 단 한 가지 조건만 충족시킨다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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