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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내라 브론토사우루스 스티븐 제이 굴드 자연학 에세이 선집 3
스티븐 제이 굴드 지음, 김동광 옮김 / 현암사 / 2014년 4월
평점 :
품절


스티븐 제이 굴드 Stephen Jay Gould. 왠지 이 이름은 고생물학자이자 진화생물학자인 저자의 직업과 딱 어울린다고 생각한다.(근거를 가지고 있지 않다. 진화생물학 관련 책들을 얼핏얼핏보면서 이 이름을 들어서일 수도 있고, 고생물학자들은 아무래도 어느 굴들을 찾아다녀야 할 것만 같아서 일수도 있다. 그냥 그렇다는 얘기다.) 그의 책 <힘내라 브론토사우루스>는 그 제목만큼이나 거대한 저작이다. 무려 800쪽에 조금 못 미치는 분량이다.(이쯤되면 양장이 어울릴 것 같다는 편견을 난 가지고 있다.) 내용도 나로서는 참 거대하게 느껴진다. 어느 작은 생물에서부터 공룡, 저 멀리 우주에까지 이른다.(고백하건대, 나는 이책을 다 읽지는 않았다. 아니 못했다. 시간도 없긴 했지만 그리 열심히 읽지도 않았다. 중반 이후부터는 선별적으로 읽긴 했지만, 그래도 3/4은 읽은 듯 하다. 점 하나까지 다 읽어야 리뷰를 쓸 자격이 있는 것은 아니니, 이러한 사실에 그다지 불편해 하시지들은 않길...) 그러나 굴드는 이 책을 대중적이라고 역설한다.(내가 분명 대중 가운데 하나라면 이 책은 그다지 대중적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굴드의 대중에는 아마도 나는 포함되어 있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 모두 영광스러운 지적 전통인 알기 쉬운 과학을 되살리는 작업에 매진할 것을 맹세해야 한다. 그 규칙은 간단하다. 절대 개념적 풍부함을 손상기키지 않을 것. 모호하거나 모르는 부분을 건너뛰지 않을 것. 물론 전문용어를 쓰지 않되, 그렇다고 필요한 개념을 생략하지 않을 것(개념적 복잡성이 일상 언어로 전달될 수 있도록). 현재 미국에서 이런 양식의 글쓰기를 하는 사람이 여럿 있다. 따라서 우리의 일차적인 임무는 그 중요성을 널리 알리는 것이다. 우리는 자신이 누구고 누가 아닌지 식별해내기 위해 노력을 기울여야 하고 프란체스코와 갈릴레이의 인문학적 전통을 꿋꿋이 주장해나가야 하며, 핵심 요약이나 연출 사진과 같은 작금의 설득 이데올로기에, 즉 미국의 또 하나의 낡은 전통(반지성주의의 어두운 면, 파시즘의 전조가 될 수 있는 사려 없는 감성주의에 대한 호소)에 휘둘려서는 안 된다.(12~!#쪽)

 

이렇게 과학을 대상으로한 대중적 글쓰기를 천명한 저자는 책을 읽고야 알게 되었지만, 십수년간을 그것을 실천하고 실행해 왔다. 놀라지 않을 수 없는 일이고, 그래서 그는 세계적인 명사의 반열에 오른 것일지도 모르겠다. 저자가 스스로 제시한 규칙을 이 책이 준수하고 있다고 판단할 능력을 나는 가지고 있지 못하다. 이 책이 일차적으로는 미국의 대중을 대상으로한 대중적 글이라고 보여지는데, 미국의 대중에 해당하지 않는 나에게는 그의 규칙들이 어떻게 적용되고 준수되었는지를 가늠할 여지를 주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그 반대로 그 규칙들이 어긋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나는 이와 비슷한 분야에 관해 읽은, 나에게 있어 가장 대중적인 책은 전중환이 쓴 <오래된 연장통>이란 책이라고 생각한다.(절대 굴드보다 전중환이 위대하다는 얘기가 아니니 오해 없길 바란다.) 좀더 확장하면 굴드의 책보다 전중환의 책이 우리나라 대중들에게는 더욱 대중적일 터이다. 나에게 굴드의 책(한국어 본역본이라고 해야 더 정확하겠다.)이 대중적으로 다가오지 않았다고 해서 굴드를 탓해서는 안 된다. 나는 오히려 이 책을 번역하고 출간한, 번역자와 출판자에게 책임이 있다고 생각한다. 영어 원서를 읽을 능력도 시간도 없는 나이지만, 이 책이 정확한 번역일 수는 있어도 한국어로써의 잘된 번역은 아닐 듯 싶다.(내 생각일 뿐이다.)

 

무작위로 이 책의 어느 한 페이지를 펼쳐 보았다.

 

다시 말해서, 키위의 알은 결코 비정상적으로 커지지 않았으며 오히려 몸집이 줄어든 것이라는 설명이다. 그리고 이 두 가지 주장은 전혀 같지 않다. 오래된 농담과 달리, 우리는 뚱뚱한 사람이 몸무게 때문에 키가 작은 것이 아님을 알고 있듯이 말이다.(162쪽)

 

여기서 '오래된 농담'은 과연 무엇일까? 나는 그 오래된 농담을 공유하지 못했기에 이 대목에서 조금은 망설이지 않을 수 없었다. 내 과학적 지식의 부족함도 원인이겠지만, 굴드의 대중적 글쓰기가 나에게는 공유하지 못한 문화적 한계 때문에 전혀 대중적으로 다가오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 간극을 번역자 또는 편집자가 채워넣어야 하지 않았을까? 번역에 있어서 대부분 직역한 부분이 많은 것 같고, 비문에 해당되는 문장들도 있는 듯 해서 가독성이 많이 떨어졌다. 첫 에세이부터 읽어가면서 나는 굴드의 비유와 예들을 거의 하나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또한 나에게는 이 책이 담고있는 진화생물학적, 고생물학적 지식의 설명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가장 큰 책임은 나에게 있겠지만, 그렇다는 얘기다.

 

굴드의 논법은 미국인들에게 꽤나 대중적이었을 듯 싶다. 흥미로운 것은 골드가 이야기를 시작해나가는 방법들이다. 잡다한 이야기, 전혀 연관성 없어 보이는 소재들을 가져와 이런저런, 이리 뒤집고 저리 뒤집어 가며 자신의 이야기 속으로 독자를 끌어들이는 듯한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내가 공유하지 못하는 '대중적'임에도 불구하고. 그만큼 골드는 꽤나 출중한 작가다.)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내가 가장 좋아하는 글은 N. S. 셰일러와 윌리엄 제임스에 대한 21번 에세이다." 그가 가장 좋아한다는 21번 에세이를 읽어야 햇다.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했는지 몰라도, 나는 이 에세이가 도입부분 만큼은 아주 탁월하다고 느꼈다. 아이들 문화에서 오는 어휘의 변천을 탐구하면서 자신의 지난날의 경험으로 이어지고, 그로부터 한참을 흘러 본연의 주제로 들어가는 굴드식 어법이 흥미있었다. 거기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책의 많은 부분 중에서도 <7부 지적 전기 - 생물학자>에 실린 21~23번 에세이와 <8부 진화와 창조>에 담긴 에세이들, 그리고 <9부 숫자와 확률>에서 야구와 연관된 엣세이를 나름 재미 있게 읽었다. 창조과학과 진화론의 논쟁은 승리자가 뻔한 싸움임에도 논쟁의 과정은 재미있고 흥미롭다. 그 오래된 역사를 전해주는 굴드의 이야기에 빠져 단숨에 읽어나갔다.(위에서 언급했던 불편함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이 책에서 굴드는 일관되게 필연이 아니라 우연을 강조하는 느낌을 받았다. 더불어 종교와 과학이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 자신들의 역할만을 다 하면 된다는 점, 진화론이 인류의 기원을 탐구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 이런 점들을 다시금 되새기게 하는 의의가 있어서 나쁘지는 않았다. 결국, 내 능력의 부족함일터이다. 브론토사우루스를 응원하는 스티븐 제이 굴드와 더불어 브론토사우루스가 제 이름을 수성 혹은 되찾기를 바란다. 내가 이책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했다 하더라도 내 첵임만은 아니니, 힘내자 메르키세데크스!!(내 아이디 멜기세덱을 펼쳐읽으면 비슷해질 듯 해서)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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